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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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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10일 18시 31분 등록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정창권 풀어 씀, 사계절, 2003)

이 책은 「미암일기」를 중심으로 16세기 양반가정의 일상생활을 사실대로 재현한 것이다. 眉巖日記는 1567년에서 1577년까지 약 11년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한문으로 기록한 미암 유희춘의 개인일기인데, 이 책은 그것을 가지고 미암과 부인 송덕봉을 위시하여 그들의 자녀와 일가친척 및 집안의 수많은 노비들이 서울과 향촌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이야기체로 그려져 있다.

「미암일기」를 기록할 당시 미암은 가족과 함께 끊임없이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생활을 하였다. 이 책은 「미암일기」를 6개의 테마인 관직생활, 살림살이, 나들이,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로 나누어 미암을 비롯한 16세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설명하고「미암일기」에 기록된 실제사건과 상황들을 필자가 약간의 상상을 가미하여 이야기로 구성한 것이다.

▶ 노비는 양반의 수족이라

근래 사학계의 조사에 따르면, 15~17세기에 노비의 수는 전체 인구의 3~4할, 즉 ⅓이나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15세기 성현은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노비가 절반 이상이다”라고 말하였고, 1653년 조선에 체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은 ‘우리는 2,3백 명의 노예를 가진 양반을 보았다’라고 기록하였다. 미암도 ‘우리 부부 양쪽에 딸린 노비가 거의 백여 구가 된다’라는 일기의 기록처럼 부인 송덕봉과 함께 백여 명의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양반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대부분 노비에게 의존해서 생활하였다. 미암의 하루 일과를 보아도, 새벽에 일어나면 종들이 등불을 켜주고 세숫물과 밥상을 갖다 바치며, 집을 나설 때는 의관과 신발까지 준비해주었다. 출근길도 구종과 종들이 수행하였고, 점심 역시 관노비가 마련해주었다. 퇴근 후에도 마찬가지로 종들이 저녁밥을 차리고 요와 이불을 깔아서 편안히 잠들도록 해주었다.

¶ 1568년 3월 10일 이른 새벽이었다. 주위엔 아직도 칠흙 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미암은 아랫배를 움켜쥔 채 이부자리를 젖히고 일어나 다급하게 시동 옥석이를 불렀다.
“옥석아, 냉큼 일어나 등불을 밝혀라!”
“나으리, 어디 불편하시옵니까?”
“이놈아! 왜 이리 꾸물대느냐. 얼른 앞장 서거라. 측간에 좀 가야겠다.”
미암은 나무랄 겨를도 없이 옥석이를 앞세우고 측간으로 줄달음쳤다. 설사를 해서 이미 속옷이 젖은 듯하였다.

옥석은 3남4녀 중 둘째로 태어나 종모법에 의해 덕봉의 노비가 되었다. 종모법(從母法)이란 노비의 신분과 소유권을 동시에 규정한 것으로, 어머니가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가 되고 그 소유권도 어머니의 주인한테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주인집에 의지하여 자식을 낳고 길렀기 때문에 자연히 그 소유권이 어머니의 주인한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옥석이가 하는 일은 늘 미암 곁에 머물며 온갖 몸시중을 드는 것이었다. 방안을 쓸고 닦는 일과 이불을 깔고 개는 일, 요강을 비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닦는 일, 미암이 집을 나서면 신발을 챙겨서 신겨 주는 일, 기타 등불 관리와 세숫물 떠다주기, 먹물 갈기 등이다. 한마디로 미암의 시중드는 아이, 곧 시동(侍童)이었다.

▶ 비로소 서울살림을 주관하다

¶ 시동 옥석이가 방 안을 향해 “나으리, 마님이 나오셨사옵니다.”라고 아뢰면서 스르르 방문을 열어주었다. 이날도 미암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퇴근하고 돌아와 사랑방에서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덕봉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미암을 나무랐다.
“휴우. 아무리 주인 없는 살림이라고 저토록 내버려둘 수가 있소. 예나 지금이나 살림에 무심한 건 여전하구려.”
“아니, 갑자기 그 무슨 소리오? 내 딴엔 잘한다고 했는데 말이오.”
덕봉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이번에 우리집 식구가 얼마나 늘었소. 그런데도 밥상이 고작 손가락으로 꼽을 지경이니 도대체 뭘로 상을 차리란 말이오. 곳간의 콩도 내일 모레면 떨어지겠습디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은 했는데 그만 깜박하고 말았소. 내 지금 곧 사람을 보낼 테니 너무 나무라지 말구려.”

▶ 자기 조상의 제사는 자기가 지내야

16세기까지는 여전히 아들과 딸이 공평하게 재산을 분배받았기 때문에 제사도 서로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미암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엔 재계(齋戒)를 이유로 가급적 손님을 접대하지 않았고 제삿날에는 출근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개가 새끼를 낳으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으로 여겼다.

재계(齋戒)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것을 말한다. 미암은 제사가 있는 날이면 항상 이틀 전부터 육식을 하지 않고 물을 만 밥에 오이, 생강, 김치를 먹으면서 소식(素食)을 하였고, 하루 전에는 부인과 떨어져서 밖에 나가 잠을 잤다. 또 여름에는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

1568년 10월 14일, 이날은 덕봉의 친정어머니 제삿날이었다. 덕봉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제복인 연한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었다. 이 시기 제사는 주로 새벽에 일어나서 날이 밝기 전에 지냈다.
덕봉은 부모의 기제만 지냈는데 가풍에 따라 두 분을 함께 모셨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제삿날에는 아버지도 함께 모시고 아버지의 제삿날에는 어머니도 함께 모셨던 것이다.

▶ 임금이 미암의 관복을 하사하다

¶ 1568년 10월 23일 이른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나 몸을 단장하고 조반을 마친 미암은 의관을 갖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덕봉에게 말하였다.
“내가 본시 이가 많은 사람인데 근래에 와서 보기가 드물어 의심을 했소. 근데 전일부터 다시 많아지기 시작했으니 이젠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소.”
“좋기도 하겠수.”
이 시기 사람들은 죽을 사람에게는 이가 없어진다고 여겼다.

▶ 꿈도 생활의 일부였다

조선 중기 사람들도 꿈에 나타난 영상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했다. 우선 그들은 꿈에 누군가가 나타나면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고 염려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꿈을 통해 서로 만나기도 하였다. 심지어 꿈을 통해 죽은 자와도 서로 만났다. 그들은 꿈 속에서 죽은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꿈으로 인해 마음의 균형을 잃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단지 꿈을 생각이 독실해서, 또는 낮에 한 일이 꿈에 나타난 것쯤으로 여겼다.

▶ 임금의 행차를 구경가다

조선조 양반여성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인간관계의 폭이 대단히 넓었으며, 최소한 16세기만 하더라도 부녀들끼리 자주 모임을 가졌을 뿐 아니라 나라에 특별한 구경거리가 있으면 반드시 나가서 구경을 하였다.

¶ 1569년 8월 15일 저녁 무렵이었다. 덕봉은 다음날로 예정된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러 가기 위해 일찌감치 몸단장을 하였다. 덕봉은 종들한테 집단속을 분부한 뒤 은우어미(딸)와 가마에 올랐다. 시간이 벌써 삼경(밤 11시~1시)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번 구경은 일가친척의 노비집에서 하기로 하였다. 임금의 행차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시작되었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남자들이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퍽 눈길을 끌었다.

▶ 생활의 느낌을 시로 표현하다

이 시기에는 여성들을 위한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 필적할만한 가정에서의 교육, 곧 가학(家學)이 엄연히 존재하였다. 덕봉도 어릴 적부터 가학과 독학으로 글을 배웠다. 「경서」와 「사서」를 두루 섭렵하여 여성선비(女士)로서의 풍모를 갖추었다. 아울러 평생 지속적으로 시를 써서 「덕봉집(德峯集)」이란 시집을 남겼다. 오늘날 그 시집은 전하지 않고 「미암일기」와 그 부록에 편지 1통, 문 2편, 시 20여 수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덕봉문집」에도 실려 있는데, 여기에서도 일기의 부록처럼 미암이 지은 시문과 함께 묶여 있다. 이를 토대로 그녀의 작품들을 살펴보자.

덕봉은 미암에게 자주 편지를 써서 보냈다. 특히 이들 부부는 서로 떨어져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편지를 통해 집안 소식을 전하였다. 홀로 서울에 온 뒤 3~4개월 동안 독숙(獨宿)하면서 일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미암은 아내 송덕봉에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자랑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이에 송덕봉은 1570년 6월 12일에 남편을 힐난하는 장문의 편지를 쓴다.

¶ 엎드려 편지를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양 하였는데 감사하기가 그지없소.
단 군자가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림은 성현의 밝은 가르침인데
어찌 아녀자를 위해 힘쓴 일이겠소. 또 중심이 이미 정해지면 물욕이 가리우기 어려운 것이니 자연 잡념이 없을 것인데 어찌 규중의 아녀자가 보은하기를 바라시오.
3,4개월 동안 독숙을 했다고 고결한 체하여 은혜를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거나 무심한 사람이 아니오. 안정하고 결백하여 밖으로 화채(華采)를 끊고
안으로 사념(私念)이 없다면 어찌 꼭 편지를 보내 공을 자랑해야만 알 일이겠소.
곁에 지기의 벗이 있고 아래로 권속과 노복들이 있어 십목(十目)이 보는 바이니
자연 공론이 퍼질 것이어늘 꼭 힘들게 편지를 보낼 것까지 있겠소.
이로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하오.
내가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러움이 한량이 없소.
나도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소. 가볍게 여기지 마시구려.
당신은 몇 달 동안 독숙을 하고서 붓끝의 글자마다 공을 자랑했지만, 나이가 60이 가까우니 만약 그렇게 한다면 당신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이로운 것이지, 결코 내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니오. 하기사 당신은 귀한 관직에 있어서 도성의 만인이 우러러보는 처지이니 비록 수개월 동안의 독숙도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오.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소. 그래도 나는 지성으로 예에 따라 장례를 치루면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이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하였소.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리의 길을 나서서 멀리 험난한 길을 갔는데 이것을 누가 모르겠소. 내가 당신한테 한 이런 지성스런 일이 바로 잊기 어려운 일이오.
당신이 몇 달 동안 독숙한 공을 내가 한 몇 가지 일과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소.
원컨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시오.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바이오. 나의 뜻을 이해하고 깊이 살피기를 엎드려 바라오.
송 씨 아 룀

또한 그녀는 1571년 7월 5일에 「착석문 서」와 「착석문」이란 두 편의 글을 지어 미암한테 친정부모의 묘소 앞에 비석을 세우는 일을 더 이상 늦추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 착석문 중에서

내가 홀로 잠 못 이루고 가슴을 치며 속이 상한 것은 옛날 우리 아버지께서 항상 자식들한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은 뒤에 모름지기 성심을 다해서 내 묘의 곁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오. 아직까지 우리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으니 매양 이것을 생각하면 슬픈 눈물이 눈에 가득하오.
이는 족히 인자와 군자가 마음을 움직일 만한 일이오. 당신은 인자와 군자의 마음을 갖고 있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줄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편지하기를 ‘동복끼리 사비로 하면 내가 그밖의 일을 도와주겠오’라고 하니 이 무슨 말씀이오? 당신의 맑은 덕행에 누가 될까 봐서 그런 것이오? 처부모에게 차등을 두어서 그런 것이오? 아니면 우연히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이오?
우리 아버지께서 당신이 장가오던 날 ‘금슬백년(琴瑟百年)’의 시구를 보시고 어진 사위를 얻었다고 몹시 좋아하셨는데 당신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것이오. 하물며 당신은 나의 지우(知友)로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비하며 백년을 함께 늙자고 했으면서 불과 40, 50말의 쌀이면 될 일을 이렇게 귀찮게 여기니 통분해서 그만 죽고 싶소. 경전에 이르기를 ‘허물을 보고 어짐을 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남들이 들어도 이 정도를 가지고 허물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이오.

동복끼리 사비를 들여 하라는 말은 크게 불가하오. 혹은 과부로 근근이 지내고 있는 자도 있고 혹은 궁하여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자도 있으니 비단 거두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기필코 원한만 사게 될 것이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집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서 하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소. 만약 사가(私家)에서 변통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의 성의로 진작 해버렸을 것이오. 어찌 꼭 당신한테 구차하게 부탁했겠소?
또 당신이 종성의 만리 밖에 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오직 소식(素食)만 했을 뿐이요, 삼 년 안에 단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전일 장가왔을 때 그토록 간곡하게 대접해주던 뜻에 보답했다고 할 수가 있겠소? 이제 만약 귀찮은 것을 참고 비석을 세우는 일에 억지로라도 도와준다면 지하에 계신 분이 감동하여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것이오.
나도 또한 당신에게 박하게 베풀고 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몸과 마음을 다해서 예에 따라 장례를 지냈고 제사도 예에 따라 지냈으니 남의 며느리 된 사람으로서 도리에 부끄러운 것이 없소. 당신은 어찌 이런 뜻을 생각하지 않소?
당신이 만약 나로 하여금 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면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오. 이 모두 지성에서 느껴 나온 말이니 글자마다 자세히 살피기 바라오.

결국 덕봉의 글을 읽고 난 미암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 석물(石物; 무덤 앞에 돌로 만들어 놓은 것)일을 시작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근 한 달 만에 처부모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낸다.

이 편지와 글은 이응태 부인의 한글편지, 허난설헌의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과 함께 현재까지 남아있는 16세기 여성산문의 유일한 작품이자, 이 시기 여성들의 의식세계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 부부가 사랑한다는 것은……

조선 중기인 16세기만 하더라도 비록 제한적이지만 신분 상승이 가능하였고, 유교 이외에 불교와 도교 사상이 공존하였으며, 여성의 권익을 존중하는 전통이 여전히 남아 있는 비교적 개방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남녀관계에서도 관습에 크게 구속당하지 않았고, 남녀간의 애정 표현도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잘 알려진 임재를 비롯해서 이달, 최경창 등은 감미로운 애정시를 많이 남겼으며, 황진이나 이매창, 홍랑 등도 자신의 사랑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시로써 표현하였다. 평범한 부부들도 자유롭게 애정을 표현하며 애틋한 부부애를 누렸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1586년 이응태의 부인이 쓴 한글 편지가 있다. 이 편지는 비록 죽은 남편의 무덤에 넣은 것이지만 16세기 사람들의 정감어린 부부생활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이응태 부인이 쓴 편지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은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였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와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의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은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 하고서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겁니까.
아무리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에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계실 뿐이지만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1586년 6월 1일 아내가

▶ 첩과 서녀의 생활

이 시기에 양반 남성들이 부인 이외에 따로 첩을 두는 것은 거의 보편화된 관행이었다. 미암 일가족만 보더라도 미암을 포함해서 장인 송준, 아들 유경렴, 사위 윤관중이 모두 첩을 두고 있었다. 첩을 둔 이유는 성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생활상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공공연히 첩을 둘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이 첩과 가정을 새로 꾸민다는 것은 그만큼의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기 때문에 집안의 살림을 책임진 안주인의 반발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신의를 저버린 남편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심하게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미암은 방굿덕(房㖌德)이란 첩을 두고 있었다. 미암이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그의 첩으로 들어와 네 명의 딸을 낳았고, 귀양에서 풀려나 다시 관직에 등용되자 해남으로 내려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살았다. 1571년 현재 그녀의 나이는 44세였으며 미암보다 15세 아래였다. 굿덕이 첩으로 하는 일은 미암이 해남에 올 때마다 딸들을 데리고 찾아가 그의 시중을 드는 일로 음식과 의복수발, 빨래, 방청소, 잠자리 돌보기 등 매우 다양했다. 그래서 미암은 그녀를 시중드는 사람 즉 ‘시자(侍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 대신에 첩과 첩의 딸인 서녀의 신공을 납부할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면 짝을 찾아 혼인시키고, 속량(贖良; 몸값을 주고 양민이 되게 하는 것)까지 시켜 주었다.

▶ 부부가 한바탕 입씨름을 벌이다

16세기 부부들도 집안일과 자녀교육, 남편의 외도 등 갖가지 이유로 서로 싸웠다. 하지만 부부불화가 가정파탄의 지경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역시 남편이 첩을 두는 문제였다. 심지어 남편이 첩을 두면 집에서 내쫓고 공공연히 이혼을 선언하거나 병들어 죽게 만들기조차 하였다. 이 시기 여성들은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친정 식구라는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후대 여성들에 비해 자기주장을 내세우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

▶ 초야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다

1575년 10월 미암은 벼슬을 그만두고 담양 인근의 창평 수국리로 내려왔다. 이즈음 미암은 윗니가 모두 빠지고 한 개만 남아서 음식을 먹을 때면 입을 오므리고 부드럽게 우물거리기만 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하부의 냉증과 침이 자주 마르는 소갈증까지 앓아서 덕봉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 큰손자 장가가는 날

16세기만 해도 한국 사회는 남자가 여자집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그대로 눌러 사는 장가와 처가살이 혹은 친정생활이 보편적인 혼인풍속이었다. 이는 고려 이래 계속된 한국 고유의 혼인풍속으로 가족사, 여성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지만 자료가 희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7세기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면, 중국의 주자학적 혼인풍속의 영향을 받아 이전과는 정반대로 여자가 남자집으로 가서 사는 시집살이로 바뀌게 된다.

¶ 1576년 3월, 하루는 큰손자 광선이 남원 처가에서 놀러오자 미암은 그를 앉혀놓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먼저 미암이 그 처의 생김새와 재능을 물었더니 광선은 순진하고 얌전하며 능히 온 집안 살림을 하여 괜찮은 점이 심히 많다고 대답하였다. 광선은 한 달이 넘게 머물다가 처가로 돌아갔는데, 동생들이 그 형이 가는 것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후로도 광선은 수시로 처가와 본가를 왕래하며 혼인생활을 한다.

▶ 생일을 맞아 집안잔치를 열다

미암의 생일은 12월 4일이고 덕봉의 생일은 12월 20일이었다. 그래서 이 날이 되면 자녀들은 술과 음식을 풍성하게 장만하여 부모에게 술잔을 올리고 가비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곤 하였다. 또 두 사람의 생일이 같은 달에 들었기 때문에 그 사이의 적당한 날을 잡아 집안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 후일담

1577년(선조 10년), 피로와 열이 크게 발하여 일기를 적지 못하고 5월 15일에 미암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8개월 뒤인 1578년 1월 1일 덕봉도 향년 5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갑자기 생을 마감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평소 잔병을 자주 앓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서로 ‘지우(知友)’라고 여길 정도로 금슬 좋게 지냈던 자신의 동료를 잃어버린 슬픔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미암과 덕봉은 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대덕면 비천리에 쌍분으로 나란히 묻혀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묘지 오른편 약간 아래에 첩 방굿덕이 잠들어 있다. 조선조 첩의 무덤이 아직까지 남아있고 그것도 선산에 함께 모셔져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종가집 할머니에 의하면 첩 방굿덕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가 죽으면 영감 곁에 묻어서, 제사 지내고 남은 퇴주라도 부어줄 수 있게 해주시오”라고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

2년 전쯤, 여성학 모임에서 오한숙희 선생님께서 소개해 주셨던 기억이 나서 읽게 되었다. 결혼 후 남자가 여자의 친정에서 살았던 시대,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 아니었던 시대의 일상 생활사를 일기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재현해 낸 이 책은, 실제 일기가 아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그동안 배우고 알아왔던 역사를 패러디한 유머나 남녀의 역할을 옷만 바꿔 입고 연기하는 개그쯤으로 받아들였을까? 어쨌든 감사하게도 사실이었고 유쾌한 상상의 시간들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16세기는 정치적으로는 지방 중소지주 출신의 사림이 성장하여 기존 훈구세력과 대립하면서 많은 희생을 당하였고, 경제적으로는 과전법의 분리와 함께 양반 지주층이 상속이나 매득, 매간 등을 통해 농장을 확대해나갔으며, 사회적으로는 주자학적 가부장제 의식이 널리 보급되었던 시기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인 조선 후기에 비해서는 매우 개방적인 사회였고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여권존중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시기 사람들은 가족 관계에서 아들과 딸을 따지지 않았고 친족관계에서 본손과 외손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차별 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나눠주는 균분상속이 이루어졌고, 조상의 제사도 자녀들이 서로 돌아가며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가 관행이었다. 한마디로 남녀의 권리와 의무가 서로 동등하였던 셈이다. 또한 여성들의 학문과 예술 활동도 장려되어 신사임당, 송덕봉, 허난설헌, 황진이, 이매창 등의 여성예술가들이 대거 출현했으며, 여성사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이 책은 16세기 사람들의 의식주를 비롯한 유형(有形)의 생활사만이 아니라 꿈과 사랑 같은 무형(無形)의 생활사도 중시하였고, 등불이나 목욕, 화장실 같은 생활사도 폭넓게 다루었다. 그 속에서 한국 가정은 열린 공간이었으며, 여성의 힘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새롭게 해석하였다.

그래서?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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