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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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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12일 22시 52분 등록
책머리에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목적은 무엇이며, 그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맨 처음에 있는 '서왈(敍曰)'에 명쾌하게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자주의식의 소산이다....p12

《삼국유사》는 무엇보다도 삼국 시대 이전의 역사를 중국 사서에만 의존하지 않았고, 중국의 사서와 우리 사서와의 비교 검증을 통하여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민족의 신화, 전설, 일화, 사상, 종교 등 귀중한 자료를 제공받는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p16

《삼국유사》를 상반된 집필 방향에서 지어진 《삼국사기》와 따로 떼어내 보는 것은 제대로 된 독서법이라 할 수 없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함께 읽어나가야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줄 수 있다. 그래야만 삼국 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p24

기이 제1(紀異第一) 권 1
고조선(왕검조선)

그 당시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가 이것을 먹되,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삼칠일(三七日)동안 금기했는데, (금기를 잘 지킨)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37

말갈과 발해
《통전(通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그 추장 조영(大祚榮)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으로 불렀다. 선천(先天) 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 하였다....p51

제 3대 노례왕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전저 즉위하였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하였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이 노례왕에서 비롯되었다....p75

내물왕과 김제상
신이 듣건대,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그 일을 위해)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려운가 쉬운가를 따져보고 나서 행동하면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고, 죽을지 살지를 따져보고 나서 움직이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명을 받들어 가기를 원합니다."...p88

[20050413]

■ 기이 제2(紀異第一) 권 2
- 문무왕 법민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이 가득한 언덕에 땅을 그어 성을 만들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없애고 복이 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큰 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재해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p147

- 효소왕대의 죽지랑

지나간 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
아름다운 모습에 주름이 지니
눈돌릴 사이에 만나보게 되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에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
...p158, 159

-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안민가)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열어젖히자 벗어나는 달이
희구름 좇아 떠간 자리에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자갈벌에서
낭의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 잣나무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p166, 167

■ 흥법 제3
- 원종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 몸을 바치다.

성인의 지혜는 여태까지 만세의 계책이며,
구구한 여론은 가을 터럭끝 같은 비방뿐이다.
법륜(法輪)이 풀려 금륜(金輪)을 따라 구르니,
요순이 다스리던 시절에 부처의 광명이 높구나
-이것은 원종을 위한 것이다.

의로움을 좇아 삶을 가볍게 여긴 것은 놀라운 일이니,
하늘꽃[天花]와 흰 젖의 이적(異蹟)이 더욱 다정하구나.
갑자기 단칼에 몸은 죽었지만,
은은한 종소리가 서울을 뒤흔드네.
-이것은 염촉을 위한 것이다.
...p288

■ 감통 제7
- 경흥이 성인을 만나다.
이때 한 여승이 찾아와 문안을 드리면서 《화엄경》가운데 있는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설로 말하였다.
이렇게 말하고는 열한 가지 탈을 만들어 저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춤을 추게 하니, 높이 솟아올랐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며 변하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우스워 턱이 빠질 정도였다. 법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러자 여승은 문을 나가 남항사(南港寺)로 들어가 숨어살았는데, 그가 짚었던 지팡이만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을 그린 그림 앞에 높여 있었다....p525

- 진신석가가 공양을 받다
"옛날 계빈( 賓) 삼장법사가 아란야법(阿蘭若法)을 행하여 일왕사(一王寺)에 도착하니, 절에서 큰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문지기는 그의 옷차림이 허름한 것을 보고는 문을 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다 떨어진 옷을 입었다 하여 매번 들어가지 못하자, 임시 방편으로 좋은 옷을 빌려 입고 가니 문지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자리에 참석한 후에 갖가지 좋은 음식을 입고 있는 옷에게 먼저 주니, 여러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이곳에 여러 차례 왔으나 매번 옷이 허름하여 들어오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 옷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으니, 옷에게 먼저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아마 이번 일도 같은 사례인 것 같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향 피우고 부처를 가려 새 그림을 보았고,
음식 만들어 스님을 공양하고 옛 친구를 불렀네.
이로부터 비파암 위의 달은
때로는 구름에 가려 못에 더디 비치리.
...p529

- 월명사의 도솔가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 제망매가(祭亡妹歌)
...p532

■ 피은 제8
연회가 이름을 피하다. 문수점
저자에 가까우면 오래 숨어살기 어렵고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은 삐져나와 감추기 어렵다네.
뜰 아래 푸른 연꽃 때문에 잘못되었지
운산(雲山)이 깊지 않아 그런 것은 아니라네.
...p554

■ 발문
우리 동방의 삼국에는 《본사(本史)》와 《유사(遺史)》두 책이 있으나, 달리 간행된 적은 없고 단지 본부(本府)에만 남아 있는데, 세월이 흘러 자획이 닳아 없어져 한 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겨우 네댓 글자뿐이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사서(史書)를 두루 보아 천하 정치의 잘잘못과 흥함과 망함, 그리고 여러 이적(異跡)까지도 널리 알고자 하는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역사를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다시 간행하고자 널리 완본을 구했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으니, 이 책이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아 사람들이 쉽게 구해볼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간행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실전(失傳)되어 동방의 지난 일을 후학들이 들어서 알 수 없게 될까 한탄스럽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유학도(儒學徒)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 공이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는 완본을 구해서 보냈다. 나는 기쁘게 받고서 감찰사 상국(相國) 안당(安 )과 도사(都事) 박후전(朴候佺)에게 이 소식을 알리니, 모두들 기뻐하였다. 그래서 여러 고을에서 나누어 간행하도록 하여 우리 고을로 보내 간직하게 한 것이다.
아아! 물건이란 오래되면 반드시 없어지게 마련이고, 없어지면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니,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러한 이치를 알아 때로 일으켜 영원히 전할 것을 역시 후세의 학자들에게 바란다....p584

소감

삼국유사는 고려의 승려 일연(一然)이 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고대사적의 쌍벽을 이루며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 신화를 비롯한 우리의 신화와 설화들의 원형, 향가, 방대한 불교자료와 민속신앙, 일화 등이 실려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 고전인 것이다.

또 다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삼국유사>는 정말이지 말로만 듣던 책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함께 학창시절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던, 수업시간이나 시험기간에만 존재했던 책이다. 물론 일부 내용이야 교과서를 포함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할 수 있었지만 온전한 형태의 한 권으로 된 <삼국유사>는 처음 접해본 것이다. 더구나 저자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삼국사기와의 전반적인 내용 비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 책을 읽고난 후의 소감은 뭐랄까... 이제야 우리나라의 고대사를 정면으로 마주했다는 느낌이다. 어렴풋이 신화나 전설로 남아있던 우리의 고대역사가 손에 만져질 듯 하다. 평소에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근현대사를 한 줄에 꿰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삼국유사는 그 좋은 출발점이 된 것 같다.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맨 처음에 나오는 고조선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신화로만 알고 있던 너무나 친숙한 이야기이다. 실제 곰이 금기를 지킨 기간이 100일이 아니라 21일이었다는 논란성 있는 주장도 새롭지만 주석에 나타나있는 바와 같이 이 부분을 환웅의 천신 숭배 집단과 웅녀의 곰 토템 부족의 통합이라고 풀이한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로 잘 알려진 작가 이윤기 선생님 스스로가 신화에 집중하고 신화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신화가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으며 신화는 역사적 사실의 은유라고 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이야기만 들어봐도 오늘을 살면서 신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좀 더 넓어지고 깊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학적 아름다움이 뛰어난 <의해 제5> 이후와 유명한 향가가 많이 수록된 부분은 고문학의 미덕을 만끽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는데 역시 한문 해독의 어려움이라던가 책 초반부의 사건 나열식의 구성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문화재 지정에서는 낮게 평가되어왔던 일연의 삼국유사가 뒤늦게나마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여간 다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일연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거나 아무런 비평이나 평가없이 진술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자신이 느낀 바를 분명하게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존경심마저 갖게 되었으며 이는 크게는 내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며 적게는 내 독서의 큰 지침으로 삼을 만한 큰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

내가 저자라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자주의식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연은 몽골족이 원나라를 세우고 우리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이 심하던 시기에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 자주적 입장에 서서 우리 나라가 중국에 버금갈 만한 유구한 역사 민족임을 드러내려 하였다.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몇 가지 측면에서 비교되곤 한다. 우선, 일연은 <삼국사기>가 유교의 도덕적 사관에 의지한 편협된 시각에서 저술된 것이라고 보고 불교 설화 등을 비롯하여 다소 황당한 것처럼 보일 만한 내용도 기록하여 <삼국사기>에 빠진 부분을 보충한다는 자신의 취지를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였고, 오히려 <삼국사기>의 내용을 상당부분 참조하여 <삼국사기>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왕권 중심의 유교적 통치 이념과 그러한 김부식의 저술 태도를 비판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일연은 우리 나라의 자료를 50여 종이나 인용하였고 고기, 향기, 비문, 고문서, 전각 등도 다양하게 인용하였다고 하는데 이 부분이 큰 아쉬움을 남긴다.

그간 수집된 자료 외에도 추가적인 자료 수집, 보강, 수정을 통해 내용을 보충하고 더 많은 양의 자료 인용과 보다 자세한 각주를 남겨주었더라 후세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오래된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록 <삼국유사>가 50여년에 걸친 긴 자료조사 기간이 있었다고는 하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70이 넘은 시기였으므로 추가적인 자료조사 및 오류의 수정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우리는 역사의 올바른 기록과 보존에 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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