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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13일 01시 55분 등록
(리처드 니스벳 지음/최인철 옮김/김영사)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했던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찾아보기 힘든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의 삶은 스스로 주관하는 것이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행복’에 대한 그들의 정의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스인들이 정의하는 행복이란 ‘아무런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관계’를 중시했던 고대 중국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은 ‘특정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이었다. 중국인들은 주변 환경을 자신에 맞추어 바꾸기 보다는, 자신을 주변 환경에 맞추도록 수양하는 일을 중시했다.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통하여 가족과 마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고 통치자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노력했다. 그리스인들에게 행복은 ‘자신의 자질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것’이었지만, 중국인들에게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 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중국인의 일상에서 개인의 권리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권리 중 자신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사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의 철학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동양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세상은 늘 변하며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다. 따라서 어떤 일의 경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반대 경우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나중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의 사고를 잘 대변해 주는 것이 음양 이론이다. ‘음(陰)’(여성적이고 어둡고 수동적인 것)과 ‘양(陽)’(남성적이고 밝고 적극적인 것)은 서로 반복된다. 음은 양 때문에 존재하고 양은 음 때문에 존재하며, 세상이 현재 음의 상태에 있으면 곧 양의 상태가 도래할 것이라는 징조이다.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길’을 의미하는 도(道)의 상징은 흰색과 검은 색 물결의 형태를 띤 두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검은 색 물결은 흰 점을 품고 있고 흰색 물결은 검은색 점을 품고 있다. 이는 ‘진정한 양은 음 속에 존재하는 양이고, 진정한 음은 양 속에 존재하는 음이다’라는 진리를 나타낸다. 음양의 원리란 ‘서로 반대되면서 동시에 서로를 완전하게 만드는 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힘’의 관계이다.

『역경易經』은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행복은 불행 때문에 가능하고, 불행은 행복 속에 숨어 있다. 무엇이 불행이고 무엇이 행복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확실한 것은 없다. 의로운 것이 갑자기 사악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갑자기 악한 것이 된다.”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원이며,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모든 움직이는 것들의 근원이다.” 회귀, 즉 끊임없는 순환은 도의 기본적인 운행 원리이다. 『도덕경道德經』은 또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무언가를 구부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펼쳐야 하고
무언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강화시켜야 하며
무언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풍성하게 하여야 하고
무언가를 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주어야 한다.

유교에서는 중용(中庸)의 도가 가장 중요한 행위 규범이다. 중용의 도란 절대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 것이며, 서로 대립되는 의견이나 사람들에게도 제각각 일리가 있다고 믿으라는 가르침이다. 물론 도교와 마찬가지로 유교의 관심사 또한 진리 자체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세상살이의 도를 찾는 것이다.

유교, 도교, 불교 모두 ‘조화’, ‘부분보다는 전체’, ‘사물들의 상호 관련성’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세 철학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합주의(holism)’는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종합주의라는 개념은 공명(resonance)현상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악기의 한 줄을 건드리면 공명에 의해 다른 줄이 울게 되듯이 인간, 하늘, 땅은 서로에게 이런 공명을 일으킨다.

중국인들의 기본적인 우주관은 우주가 서로 상호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물질이라는 것이었다……저명한 과학철학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은 “중국인에게 있어서 우주는 연속적인 장(場)이었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물들 간의 상호 작용은 원자의 충돌이 아니라 파장들의 중첩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중국과 그리스의 과학과 수학

그리스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과학의 발견은 ‘자연계’라는 개념 자체의 발견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연계를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제외한, 우주의 나머지 부분으로 규정하였다……이러한 구분은 그리스 논쟁의 전통에서 기인한 듯 하다. 즉 논쟁을 통해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 대해 자신이 남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실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에 있어서 내가 상대보다 더 정확하다는 신념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설득이 가능하다.

실제로 객관성은 주관성에서 비롯된다. 사람들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제 각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세상은 그러한 각각의 인식들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실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일찍부터 통일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그들과 전적으로 다른 철학적•종교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모든 것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에 중국인은 어떤 사물이든지 주변 맥락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겼다. 따라서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범주화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단순한 범주와 규칙을 가지고 어떤 사물은 이해하고 통제하기에는 우주는 너무나 복잡하고 역동적인 곳이었다.

중국인들은 일찍이 우주의 복잡성을 이해하여, 사물을 파악할 때 부분보다는 전체 맥락을 중시한 점은 매우 타당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주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어떤 범주에 존재하는 규칙을 무시함으로써 그 범주에 속하는 개체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리스인의 범주에 대한 집착은 과학의발전과 이후의 지적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모순’이라는 개념에 강박적이라 할 만큼 집착했다. 어떤 주장이 다른 주장과 모순 관계에 있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그릇된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비모순의 원리(principle of noncontradiction)는 형식 논리에서 가장 기본적이다.

중국에는 논리학이 없었을 뿐 아니라, ‘비모순의 원리’ 또한 중시되지 않았다. 중국인들이 연산이나 대수학에서는 뛰어나면서도, 기하학에서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기하학이 ‘모순법’을 통한 추상적인 증명을 중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0413)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자기 개념

철학자 도널드 먼로의 표현을 빌자면 동양인들은 인간을 “가족이나 사회 혹은 도의 원리와 같은 전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한다.” 인간은 ‘인간 관계 속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독립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리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동양인에게 있어서 행위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에서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된다.

동양과 서양의 자기 개념의 차이는 자신을 얼마나 독특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발견된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자신의 독특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양인들은 그러한 착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사회심리학자인 김희정과 헤이즐 마커스(Hazel Markus)는 사람들에게 여러 대상의 그림을 보여주고 그 중 한 사물을 선택하게 하는 연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가장 희귀한 것을 고르고 한국인들은 가장 보편적인 것을 골랐다고 한다. 같은 연구에서 볼펜들을 선물로 주면서 고르게 했더니 미국인들은 가장 희귀한 색의 볼펜을 고르고 한국인들은 가장 흔한 색의 볼펜을 골랐다. 미국인들은 항상 남의 눈에 띄고 싶어하나 한국인들은 늘 남들 정도만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서양의 독립성과 동양의 상호의존성

동양인들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호의존적 단서들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인 사람이 되도록 유도(점화)되고 있고, 서양인들은 독립적 단서들을 통해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늘 점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면 독립적 단서에 노출되기 때문에 독립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게 되고,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지내게 되면 상호의존적 단서에 점화되어 상호의존적인 방법으로 사고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논쟁하는 서양, 타협하는 동양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평균적으로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는 매우 큰 사회심리적 차이가 존재한다. 동양인들은 상호의존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self)를 전체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지만, 서양인들은 독립적인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자기를 전체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여긴다.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성공과 성취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영광을 의미하나,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개인의 업적을 의미한다. 동양인들은 인간 관계 속에 조화롭게 ‘적응’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비판을 하지만, 서양인들은 개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동양인들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인간 관계의 조화를 추구하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인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정의를 추구한다. 동양인들은 위계 질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집단의 통제를 수용하지만, 서양인들은 형평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선호한다. 동양인들은 모순과 논쟁을 회피하지만 서양인들은 법률, 정치, 과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논쟁을 끌어들인다.


동양의 순환론과 서양의 직선론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사물이란 쉽게 변하지 않으며 설사 변하더라도 일정한 방향과 일정한 속도로 변한다고 믿었다. 현대 서양인들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고대의 중국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고를 이어받은 현대의 동양인들은 사물이란 항상 변하는 존재이며 현재 어떤 방향으로 변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믿는다. 그들은 일이 어떤 방향으로 계속해서 진행되어 오고 있다면 그것은 곧 정반대방향으로 바뀔 것임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데 익숙하며, 세상이 복잡하고 매우 가변적인 곳이라 믿는다. 또한 세상의 구성 요소들은 서로 얽혀 있고, 세상사는 양 극단 사이에서 순환을 반복하는 형태로 진행되며 그러한 사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협동과 조정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와는 반대로, 현대의 서양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원자론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주변 환경과 떨어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변화가 일어난다면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개인이 그러한 일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0414)


서양의 Either/Or 지향과 동양의 Both/And 지향

고대중국인들의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의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1)변화의 원리(The principle of change) 동양의 사고에서 우주는 정적인 곳이 아닌 역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곳이다. 어떤 사건이 현재 특정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은 그 상태가 곧 변화할 것이라는 징후로 간주된다. 현실은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에 현실을 반영하는 개념들 역시 고정적이고 객관적이기보다는 유동적이고 주관적이어야 한다.

2)모순의 원리(The principle of contradiction)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대립(oppositions), 역설(paradoxes), 변칙(anomalies)이 늘 발생하며, 신/구, 선/악, 강/약이 모든 사물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대립은 사실상 서로를 완성시키고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도교에서는 모순 관계에 있는 두 주장들이 역동적인 조화의 상태로 존재하며, 서로 대립적인 동시에 서로 연결되어 상호 통제한다고 생각한다. 도는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3)연관성 혹은 종합론의 원리(The principle of relationship, or Holism) 변화와 대립에 대한 그러한 견해는 자연스레 어떤 사물도 다른 것들과 고립된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다른 무수한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연관되어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어쩌면 서양인들의 눈에도 이와 같은 동양적 사고들이 낯설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칸트, 피히테, 헤겔의 시대 이래로 이런 종류의 변증법 전통은 서양 사상의 흐름에서도 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헤겔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은 모순을 수용하거나 초월하기보다는 모순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동양의 변증법적 사고보다 더 공격적이다.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변증법적 사고가 전적으로 동양적인 것이 아니라 서양에도 존재한다고 쉽게 착각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고 전통 안에 동양적 변증주의 정신에 정면으로 반하는 논리적 원리들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양의 ‘종합론 원리’는 맥락이 달라지면 어떤 사물이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변화의 원리’는 삶이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끊임없는 변화 과정이며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동양 사람들은 왜 점 보는 것을 좋아할까?

사람들은 누구나 낙천적이면서도 때로는 우울해 하고, 사교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내성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뻔한 말을 해주는 심리학자나 점술가, 혹은 누가 되었든간에 그 사람을 ‘족집게’로 믿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바넘효과(Barnum effect)라고 부른다. 이 말은 ‘쉽게 속아넘어가는 얼치기는 매순간 태어난다’라는 표현을 했던 어떤 서커스단 주인의 이름인 바넘에서 기인한 것이다……즉, ‘외향적이지만 내성적이다’라는 주장 속에 담겨진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 바넘 효과에 더 취약할 것이다.


동양인들은 왜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일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라피스 라줄리 Lapis Lazuli」(*註)라는 시가 있다. 이 시는 어떤 사원의 처마 밑에 서 있는 두 명의 중국 노인이 새겨진 보석을 묘사하고 있다.

저기, 산과 하늘을,
그 모든 비극적인 장면을 그들은 마라본다.
한 사람이 구슬픈 곡조를 청하면
능숙한 손가락은 연주를 시작한다.
주름이 많아 진 그들의 눈, 그들의 눈,
그들의 오랜 빛나는 눈은, 즐겁다.

예이츠가 중국인을 그리면서, 모순되는 감정을 강조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대립적인 정서의 동시다발적 경험은 동양인들의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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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Lapis Lazuli : a deep blue stone. 옥돌.

There, on the mountain and the sky,
On all the tragic scene they stare.
One asks for mournful melodies;
Accomplished fingers begin to play.
Their eyes mid many wrinkles, their eyes,
Their ancient, glittering eyes, are g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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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긍정적인 정서가 충만한 경험과 부정적 정서가 충만한 경험이 완전하게 양립하고 있었다. 공자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라고 했는데, 이는 동양인들을 두고 한 말이 틀림없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수렴될 것이다?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세 번째 견해는 문화적 차이가 수렴될 것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동양이 서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가치관에 있어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들이 서로 결합되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견해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이중문화적(bicultural)이다.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는 상호의존적인 특징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려는 독립성이 흔재한다. 따라서 이 중 어떤 특성이 더 강하게 부각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적 특징을 보일 수 있다.

나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의 문화를 수용하여 중간쯤에서 수렴될 것이라는 이 세 번째 견해가 ‘문화 차의 미래’에 대한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믿는다.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두 문화는 새로운 통합을 맞이할 것이다. 그 통합이 두 문화의 가장 좋은 특성들만을 모아놓은 걸작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0415)



Ⅱ. 감상

이 책은 동양(Asia, 그 중에서도 한•중•일)과 서양에 있어서의 문화의 차이가 사실은 그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온다고 말하면서 ‘왜’ 동양과 서양은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것인지를 구체적인 예증과 논거, 실험 등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저자는 동양 사회의 집합주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특성은 세상을 보다 넓게 종합적으로 보는 시각, 어떤 사건이든지 수없이 많은 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일맥상통하고, 서양 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특성은 개별 사물을 전체 맥락에서 떼어내어 분석하는 그들의 접근, 사물들을 다스리는 공통의 규칙을 범주화할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들의 신념과 통한다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 문화간의 차이는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생각의 도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두 문화가 어떤 면에서, 어느 정도 다른지, 그리고 그러한 차이의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역사가 동양(Asia)과 서양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함께 뒤섞인 채 다양한 사고방식과 관점 속에서 흘러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동양과 서양을 이해하는데 있어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에서 계획되고 기술되었지만, 아울러 문화비교사적인 정보와 내용을 함께 담고 있기에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문화의 이해에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주고 있다.



Ⅲ. 저자의 입장에서

저자는 '동양'을 아시아Asia, 그 중에서도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인 한, 중, 일만을 이 책의 논거로 삼아 그 문화와 사고방식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이것을 기독교 문명권과 유교 문명권으로 나누어 논의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동양(Orient)인 인도나 이슬람 문명권도 함께 비교, 연구하여 보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서로 다른 여러 문명권을 함께 비교, 연구하여 그 문화의 차이와 사고방식의 차이를 제시하였더라면, 말 그대로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이라는 연구 내용이 책 속에 담겨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내용이 훨씬 더 풍부해짐은 물론 그 깊이와 무게 또한 한층 더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긴, 이건 뭘 몰라서 할 수 있는 용감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수렴될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동양이 서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가치관에 있어 서양적인 가치관에 있어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들이 서로 결합되는 상태에 도달할 것……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두 문화는 새로운 통합을 맞이할 것이다.”

지구라는 이 세계는 저자가 언급한 서양과 동양(Asia) 이외에도 서로 다른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저자의 얘기는 또 다른 형태의 오만이나 패권주의가 될 위험성 또한 내포하는 것이다. 언급된 두 문화가 수렴되고 통합되는 것 보다는 여러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 상호공존 할 수 있을 때, 그러한 다(多)문화를 수용할 수 있을 때, 동양과 서양의 문화 또한 한층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한 서로 다른 문화 형태를 서로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인류의 평화와 문화발전을 위해 더 소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 그 어떤 문화도 단일하거나 순수할 수 없으며 타자와의 교섭이 빚어낸 산물이다. 모든 문화는 혼혈이며, 다양하면서 또한 변별적이며, 다층적인 것이다. 진정한 인류의 발전과 공존은 다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이며, 이를 위해 새롭고 상상적인 또 다른 ‘생각의 지도’가 요구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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