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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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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23일 18시 19분 등록
역사 속의 영웅들 (윌 듀런트 지음, 안인희 옮김, 황금가지, 2002)
Heroes of History.. by Will Durant

제1장. 문명이란 무엇인가

문명을 위한 최초의 토양인 농업은 아마도 여자가 발전시켰을 것이다. 그녀는 열매나 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을 알아챘다. 남자들이 동물먹이를 사냥하러 나가 있는 동안 그녀는 동굴이나 오두막 주위에 시험적으로 끈질기게 씨앗을 심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집과 정착 생활에 적응하였다. 여자들은 먼저 양, 개, 나귀, 돼지들을 길들여 가축으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자를 길들였다. 남자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길들인 동물로, 마지못해 부분적으로만 문명화되었다. 남자는 천천히 여자에게서 사회적 특질을 배워 익혔다. 가족에 대한 사랑, 친절(친족과 가까워지는 것), 절제, 협동, 공동체 활동 등이다. 이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자질이 미덕이 되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다. 즉 문명이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자연과 문명 사이의 깊고도 끈질긴 갈등도 함께 시작되었다.

제2장. 공자와 추방당한 신선

중국인의 사유는 성자가 아니라 현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선의가 아니라 지혜를 주로 이야기한다. 중국인들의 이상(理想)은 경건한 헌신이 아니라 성숙하고 고요한 마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지어 도(道)와 지혜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지혜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범과 경험으로만 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아는 것이 많을 경우 그는 이것을 감추려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부나 권력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수준으로 소망을 줄인다.
공자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던 서른다섯의 나이로 노자를 찾아가 역사의 몇 가지 세부 사항에 대해 충고를 구하였다. <늙은이>는 거칠고도 신비롭고 짤막한 말로 대꾸하였다.
“네가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뼈까지 진흙이 되고 말았다. …… 너의 자부심과 야망을 없애라. 애착과 극단적인 목적들을 다 없애라. 네 품성은 이것들로부터 얻을 것이 없다.”
중국의 역사가들은 공자가 이 말 속에 지혜가 들어있음을 깨닫고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제3장. 붓다에서 인디라 간디까지

인도에서도 문명은 -앞에서 이미 문명이란 문화 창조를 촉진시키는 사회 질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고고학자들이 파낼 수 있는 한 오래된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종교 철학적 대화이다. 여러 세기를 걸쳐 이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는데 인도 철학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아주 많은 것을 가르친다. 자신을 정화시키는 방식으로서의 요가와 이기적인 데 대한 형벌로서의 내생(來生). 종교에 대한 붓다의 생각은 순수하게 윤리적이었다. 붓다는 신체와 개체의 살아있는 힘인 영혼은 그대로 남는다고 가르쳤다. 이 영혼은 다시 태어나 지상의 삶을 새로 시작하고 전생에 지은 죄를 여기서 속죄할 수 있다고 했다. 영혼이 모든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영혼은 다시 태어나게 된다. 우리의 분리된 자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면 마지막에는 해탈, 곧 이기적이지 않은 평화를 찾을 것이다.

제4장. 피라미드에서 이크나톤까지

이집트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날짜는 -물론 불확실한 것이다- 기원전 42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 문명을 기원전 4241년부터 그리스의 이집트 정복(기원전 332년)까지로 잡는다면 이집트 문명은 3,809년 동안이나 존속하였다.
어째서 파라오들과 다른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가? 이집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카>라고 부르는, 자기와 똑같은 영적인 짝이 들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육체가 굶주림, 폭력, 부패를 이기고 보존된다면 원래의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었다. 피라미드에는 야만적으로 원시적인 요소가 있다. 그토록 난폭하게 엄청난 크기를 만들어낸 일과 영원성을 향한 공허한 갈망이 그것이다. 역사에 의해 부풀려진 채 이들 건축물을 위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도 구경꾼의 추억과 상상력일 것이다. 분명 사진은 이집트 건축물을 지나치게 고상한 것으로 만들었다.

제5장. 구약성서의 철학과 시

나는 시편보다 언어나 상상력이 더 훌륭한 것을 알지 못한다. 누가 이 시편을 썼을까? 신앙의 전통은 그 중 약 70편을 다윗 왕이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학자들은 그 말을 별로 믿지 않는다. 시편 대부분은 아마도 다윗 왕에서 다니엘에 이르는 700년(기원전 900년~기원전 167년까지) 기간 동안에 나온 수많은 시인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 중 많은 것은 성전에서 부른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고대 오리엔트 시에서 볼 수 있는 대응연(對應聯) 리듬을 느낄 수 있다. 장엄한 코러스가 서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형식이다. 구약성서에는 한 가지 시편이 더 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솔로몬의 노래>라고 불리며, 젊은 왕의 연도(連禱)의 일부로 여겨진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고귀한 사랑은 에고를 가장 많이 넓혀주고, 살아 있고 평화로운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과 팔을 활짝 여는 일이다. 영혼이 행복하면 그 사랑도 커진다.

제6장. 페리클레스에 이르는 길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기원전 7세기가 끝나갈 무렵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부의 격차가 절정에 도달해서 아테네 시는 정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전제 정치 말고는 도시를 소동에서 자유롭게 해줄 어떤 방책도 불가능해 보였다>라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력 폭동을 일으켜서 완전한 재분배를 해야 한다는 말이 돌기 시작하였다. 부자들은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빚을 돌려받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저축에 대한 도전을 보고 분노하였다.
이렇게 위태로운 순간에 -역사상 자주 언급되곤 한다- 한 사람이 나타나 말이나 행동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타협하게 만들었다. 이 일을 통해 그는 사회적인 무질서를 피했을 뿐 아니라 이후의 아테네 역사에도 중요한, 새롭고 더욱 인간적인 정치와 경제 질서를 만들어냈다. 솔론의 평화로운 혁명은 역사상 용기를 주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제7장. 아테네의 황금시대

1820년경 셸리는 이렇게 썼다. <페리클레스의 탄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사이에 들어있는 시대는 …… 세계 역사상 가장 기억할만한 시대이다.>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와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에서 페르시아를 누르고 그리스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해군의 힘으로 이 두려운 시기를 벗어나면서 아테네는 지중해 상권을 장악하고, 또한 이전의 동맹국(델로스 동맹)들에 대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델로스 섬 신전에 모금된 적립금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아테네는 유럽 문명에서 중요한 한 시대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아티카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는 명실 공히 아테네 제국의 지도적 국가가 된 것이다.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시민들은 거듭 크산티푸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를 선출하였다. 그는 출생과 교육의 모든 이점을 다 누린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경탄과 진실의 정신을 가졌던 선거인단은 기원전 467년에서 428년까지의 기간동안 국가를 통치하는 10인 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30번이나 페리클레스를 선출하였다.

제8장. 플라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까지

부의 한가운데서 빈곤이 늘어났다. 영리한 사람들에게 돈을 벌 기회를 준 다양성과 교역의 자유는,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전보다 더 빨리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잃어버릴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아테네는 두 도시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와 부자들의 도시가 되어 서로 전쟁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법령 제정이나 혁명을 통해 부자들을 약탈할 음모를 꾸몄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항해 방어 조직을 만들었다. 지식인들은 대체로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섰다. 그들 중에는 플라톤처럼 부자도 섞여서 공산주의 사상을 드러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학생 알렉산드로스를 보면 (나폴레옹을 보듯이) 경탄하게 된다. 그가 혼자 힘으로 세계의 절반에 맞섰기 때문이고, 또한 그는 한 개인의 영혼 안에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피 속에 흐르는, 미치게 만드는 야만의 유산에 맞서 싸웠다. 모든 전쟁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빛을 더 큰 세계로 가져가겠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9장.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의 공기와 토양은 신들로 살아있었다. 모든 신들과 인간을 지배하는 신은 유피테르(주피터)였다. 이탈리아의 모든 종족은 달(月)에 신들의 이름을 붙였다. 이 주요 신들은 그리스에서 온 신들로 확인되었다. 아테나 여신은 미네르바가, 헤라는 유노가, 아프로디테는 베누스가, 불카누스는 마르스가, 아르테미스는 디아나가 되었다. 전에 어떤 종교도 이렇게 많은 신을 가진 경우는 없었다. 이 종교가 로마인의 도덕성에 도움을 주었을까? 어떤 점에서 보면 부도덕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의식들은 신들이 선의가 아니라 선물과 형식으로 보상을 해 주었음을 알려준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물질적 혜택이나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그런데도 종교는 개인, 가족, 국가에서 질서와 힘을 위해 좋은 작용을 하였다. 종교는 가족에게 신의 보장과 후원을 보내주었다. 공공생활의 모든 국면을 종교적 엄숙함으로 덮어주고, 국가를 신들과 친근하게 융합시켜 신앙심과 애국심을 하나로 만들었다. 종교는 가족과 힘을 합쳐 강철 같은 성격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500년 동안 로마가 고대 세계를 통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제10장. 로마의 혁명

기원전 133년에 티베리우스의 자유주의 입법과, 기원전 31년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사건 사이에서 로마를 이끌어갔던 혁명의 세기는, 협소하고 이기적인 귀족 정치를 몰아냈지만 어떤 다른 통치 방식도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였다. 실업, 매수, 빵과 소동은 평민 의회를 망가뜨려 형태는 일그러지고 정열에만 이끌리는 폭도의 무리로 바뀌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도 없었으니 제국을 통치할 능력은 더욱 없었다.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표현한대로 붕괴되었다. 즉, 자유는 방종이 되었고, 혼란 상태는 자유의 종말이 오기를 구걸하였다.
정치에 대해 플라톤이 말한 것들이 완전한 순환을 겪었다. 즉 독재관 통치에서 왕조, 이어서 귀족 정치, 이어서 공화제, 이어서 독재관, 이어서 왕조 ……. 로마는 그 후 2세기 동안 점점 약해졌지만 서양의 중심지이자 역사상 최고의 영광과 잔혹성을 계속 누렸다.

제11장.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18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손자이고 양아들이며 후계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해전에서(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치고 기원전 29년에 로마로 돌아왔다. 이집트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이집트의 국고를 조사하고, 또한 전쟁과 혁명과 무정부 상태로 인해 거의 떨어져나가 있던 동부의 로마 속국들 사이에 질서와 조공을 복구시키고 난 다음이었다.
로마의 평화 시대에 제국의 모든 부분은 상품과 사상을 수출하고, 가장 최근의 유행과 신앙을 수입할 수 있었다. 이제 헬레니즘 세계 -그리스, 중동, 이집트 등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의 창조자이며 소지자- 는 그들의 시문학과 산문, 오래된 신앙과 새로운 회의, 과학과 철학, 예술을 로마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로마는 지적으로는 여전히 새로운 종교, 시적 열광, 건축 형태 등을 받아들일 열의가 있었다.

제12장. 네로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14년부터 476년 로마 최초의 <야만인> 통치자인 오도아커가 등장할 때까지 로마 제국은 모든 외부의 시련과 내부의 타락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잘못된 정보로 해서, 또 그가 자신의 극장에서 예술적 기교를 선보였다고 해서 로마 황제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네로의 죽음은 쾌락주의 로마의 절정을 이루었다. 카토가 죽은 직후 로마는 그리스(기원전 146년) 및 헬레니즘 동양을 정복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200년 전에 열었던 길을 서쪽을 향하여 열어주었다. 이 길을 통해 동방의 종교들이 로마로 쏟아져 들어와 스토아 철학을 향한 로마의 열정을 쾌락주의적인 가벼움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관습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 다양한 혈통, 신앙, 목적, 방식들의 대 소용돌이 속에 종족의 단일성과 활력이 뒤섞인 것 등이, 밖에서 들여온 로마의 부(富)와 힘을 합쳐 로마의 도덕 생활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무모한 쾌락주의, 네로의 오락과 범죄, 로마 황후들의 부정행위 등으로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2세기에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역사에서 가장 스토아 적이고 헌신적인 통치자들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제13장. 인간 그리스도

예수는 정말로 존재했나? 신약 성서의 처음 세 복음서는 단순히 신화를 옮긴 것일까? 마태오, 마르코, 루가 등이 전해 주는 이야기에서 이교도 신들의 이야기가 -동방 박사 세 사람 같은- 교회의 인가 없이 민중에 의해 덧붙여졌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기는 하다. 단지 몇 명이 겨우 몇 년 동안 예수처럼 강력하고 호소력이 있는 인물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보다 오히려 더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수위 높은 비평의 2세기가 지난 다음 그리스도의 생애, 성격, 가르침의 윤곽이 상당히 명료해졌다. 그리고 서양 남성의 파노라마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 드러났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주었던 복음은 무엇이었던가? 그의 업적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성의 윤곽을 드러냈다는 점에 있었다. 그의 윤리 법전은 하느님의 나라가 일찍 다가올 것을 예언하고, 사람들을 그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뺨도 내밀라는 충고, 경제적 공급, 부, 통치 등에 대한 무관심, 결혼보다 독신 생활을 더 높이 여기는 태도, 가족과의 유대를 포기하라는 명령 ……. 이런 그의 생각은 가족생활이나 사회적 질서를 위한 규칙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눈앞에 닥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남자와 여자를 수도원 생활 방식에 맞추기 위한 것이다. 그 나라에는 법도, 결혼도, 성관계도, 부(富)도, 전쟁도 없다.

제14장. 기독교의 성장

무엇보다도 중세 유럽의 변모는 -론, 라인, 다뉴브 강 북부- 숲, 정글, 늪지대가 새롭고도 지속적인 문명의 토대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길을 내고, 운하를 만들고, 우물과 광산을 파고, 거주지를 짓고 자신과 가축들을 길들이고, 마을, 도시들을 조직하고 법과 의회를 발전시키고 부모의 권위와 학교와 종교를 통해 젊은이를 교육시켰다.
중세 사람들은 종교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교황들은 국가를 통제하고 왕들에게도 벌을 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가 널리 퍼지고 부유해지면서 강해졌다. 또한 세속적 영향력을 높인 것과, 파괴적인 개인주의와 정치적 술수와 회의적 지성에 의해 약해졌다.
중세의 영혼은 자라나는 세포처럼 두 가지 역사적 유기체로 발전하였다. 남부 유럽에서는 고전적, 에피쿠로스적, 이교적 르네상스이고, 북부 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적, 스토아적, 청교도적 종교 개혁이다. 중세의 영혼은 이제 두 개의 강력한 문화가 되었다. 그들을 통해 문명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세의 역사적 업적은 완성되었다. 그 죽음이 곧 그 완성이었다.

제15장. 르네상스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중심으로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 중에 누가 이토록 다양한 세계를 가진 남자를 판단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여러 방향을 향한 그의 정신이 우리를 홀려 그가 실제 이룩한 것을 과장하도록 만들곤 한다. 그는 실천보다는 착상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시대 가장 위대한 과학자나 엔지니어나 화가나 조각가나 사상가가 아니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을 합친 사람이었고 각 분야에서 최고 거장들과 경쟁하였다.
어떤 화가도 뉘앙스의 섬세함이나 감정과 사상과 생각에 잠긴 부드러움을 표현하는 미묘한 초상화 분야에서 레오나르도와 겨룰 수 없다. 그 시대의 어떤 조각상도 레오나르도가 만든 석고 모형 「스포르차」만큼 높이 평가된 것은 없었다. 어떤 드로잉도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를 능가하지 못한다. 르네상스 철학에서 어떤 것도 자연법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는 <르네상스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토록 강하고 격하던 시대를 대표하기에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게 신사적이고 내성적이고 섬세하였다. 그리고 <보편인>도 아니었다. 그의 다양성 안에는 정치가나 행정가의 자질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한계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르네상스 그리고 아마도 모든 시대에 걸쳐 <가장 풍요로운 사람>이었다.

제16장. 르네상스Ⅱ 로마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다른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문명이란 소수의, 소수에 의한, 소수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원래의 정당성을 넘어 과대하게 찬양하는 것이 될 것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은 밭을 갈고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동이 틀 무렵부터 어스름이 질 때까지 일을 하였고, 저녁이면 생각을 위한 근육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생각을 하도록 하였다. 자신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일을 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의견도, 종교도,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답변까지도 자신을 둘러싼 분위기에서, 혹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오두막에서 얻었다. 그리고 매일 전통 신학을 자신들에게 전해주는 매혹적인, 위안을 주는, 영감을 주는, 두려움을 주는 경이로움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거기에 귀신론, 마법, 전조, 요술, 예언, 점성술 등을 덧붙였다. 이런 것들은 이단보다 더 많은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교회가 비난하는 대중 철학을 이루었다.

마키아벨리.. 한 사람이 남는다. 분류하기나 어디에 자리매기기 힘든 사람이다. 외교관이며 역사가, 극작가, 철학자이다. 자기 시대의 가장 냉소적인 사상가이면서도 하나의 이상으로 불타는 애국자다. 기도한 거의 모든 일에서 실패한 사람, 그러면서도 이 시대의 다른 어떤 인물보다 더욱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이다.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지치고 시골의 은둔 생활에 지치고 심지어는 선술집의 친구들에게도 지쳐 1527년에 삶을 내려놓았다. 같은 해에 도이치 군이 주축이 된 신성로마 제국 군대가 로마를 정복하고 유린하면서 로마 르네상스에 종말을 가져왔다.

제17장. 르네상스Ⅲ 베네치아의 일몰

1378년 베네치아는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시민들은 굶주렸고 정부는 수치스런 항복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반세기 뒤, 베네치아의 부와 권력은 점점 커져 마치 이탈리아의 머리 부분에 자리 잡은 왕관 쓴 여왕처럼 보일 정도였다. 베네치아의 부유함은 수많은 산업 -조선, 철강, 유리, 피혁, 방직, 보석- 과 상선에서 오는 것이었다. 상선들은 베네치아와 속국들의 생산품을 그리스, 이집트, 아시아로 실어 나르고 반대로 그곳으로부터는 비단, 양념, 융단, 약품, 노예들을 실어오곤 하였다. 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도 이런 무역량을 소화하는 곳은 없었다. 세속적인 방탕함과 신성 모독이 정통 신앙 및 주일의 경건함과 힘을 합쳐 베네치아(와 이탈리아)의 특성을 이루었다.
베네치아의 삶은 정신보다는 그 무대가 더욱 매력적이다. 이 독재 국가는 유능하였고 역경에서 대단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때로는 잔인하였고 항상 이기적이었다. 이웃 국가들이 그렇듯이 베네치아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일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분열된 나라에 어떤 정치적 비운이 닥칠 것인지 거의 걱정하지 않았다.

제18장. 종교 개혁Ⅰ 위클리프와 에라스무스

교육과 배움의 확장, 고전 문화의 발굴, 차츰 커지는 대학의 독립과 세속화, 십자군 전쟁에서 회교도가 승리함으로써 기독교 내부의 회의주의에 토대가 마련된 점,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모르는 사이에 이성이 풀려난 것,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의 윌리엄의 대담한 회의론, 모든 계층에서 일어난 육체의 해방, 경건한 농경사회가 도시 노동자와 여행을 많이 한 상인들과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이 빠른 금융업자들의 종교적 무관심으로 이행되었다는 점, 왕과 국가의 부가 늘어나고 군대가 강해졌다는 사실, 추기경과 수도사들의 세속적 욕망, 교황청의 분열 ……. 이런 것들이 또 다른 발전들과 아울러 한때 당당하던 가톨릭, 곧 <보편>교회라는 당당한 건축물을 붕괴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과 터키 전쟁에서 기독교에 대해 회교가 승리를 거둔 일. 기독교 이외의 신앙이 점차 퍼져나간 일. 아랍의 과학과 철학의 유입. 개혁을 위한 공회의 운동 실패. 세속적 고대의 발견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인쇄술 개발. 일반적인 교육의 확대. 성서의 번역과 성서읽기. 사도들의 삶과 교회의 의식 사이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종교적 제약과 요구를 싫어하는 시민 계급의 확대. 돈이 로마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저항감. 법과 정부의 세속화. 모국어와 모국 문화의 민족주의적 영향 심화와 왕조들의 권력 강화. 종교의식은 줄이고 더욱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며 직접적인 종교를 향한 신비주의적 열망…….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힘의 급류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중세 관습의 딱딱한 표면을 깨고 모든 기준과 제약들을 느슨하게 풀고 유럽을 국민과 종족으로 흩어놓고 전통적인 신앙의 위안과 후원을 점점 더 없애버릴 힘이었다. 그리고 유럽인의 정신적, 도덕적 삶에서 기독교가 지배적인 역할을 해온 일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기도 하였다.

제19장. 종교 개혁Ⅱ (1517년~1555년) 루터와 공산주의자들

코페르니쿠스와 콜럼버스를 제외한 다른 누구보다도 이후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도이칠란트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공포와 형벌의 신학에 겁을 먹은 부모는 자식들을 말씀과 매질로 키웠기에 루터는 뒷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부모와 함께 엄격하고 가혹한 삶을 보냈기에 뒷날 나는 수도원으로 도망쳐 수도사가 되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에서 그는 하느님은 창조 이전에 이미 어떤 영혼은 구원받아 천국에 가도록, 그리고 다른 영혼은 영원한 저주를 받도록 정해 놓으셨으며, 선택받은 사람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로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것이라는 생각을 찾아낸다. 이러한 생각은 루터 신학과 그 추종자들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

새로운 교파 중에서 가장 과격한 교파는 재세례파(한 번 더 세례 받는 사람)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은 모든 폭력의 사용, 특히 정부에 의한 폭력 사용을 거부하였다.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언제나 죄가 되는 일이라는 이유에서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였다. 이들은 제후나 황제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제외한 모든 맹세를 거부하였으며, 퀘이커교도의 선구자가 되었다.
재세례파는 1521년경에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지만 도이칠란트로 이주했다. 한 분파는 1719년 도이칠란트에서 펜실베니아로 이주해서 도이치 타운 근처에 정착하였다. 동부 펜실베니아에 있는 암만파 신도들은(17세기의 야콥 아멘에서 유래) 아직도 공식적으로 면도칼, 단추, 철도, 자동차, 동영상, 신문, 트랙터 등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작지는 미국에서 가장 깔끔하고 가장 번창하고 있다.

제20장. 가톨릭 종교 개혁 (1517년~1563년)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도덕적 통솔력과 교리 개혁이라는 점에서 가톨릭 교회가 퇴보하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개신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성직자가 반대한다 해도 그리고 교회에 가지 않는다 해도 일반적으로 종교심이 강하였다. 그들은 계절에 따른 의식들을 좋아하고 도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는 성인들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신을 상상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연극으로 데려가는 신앙,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추락한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믿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일이 드물었다. 교황청의 부유함은 대대로 물려받은 이탈리아의 보물이며 확정된 이익이었다.

이탈리아의 논의는 교회 안에서의 개혁에 대한 것이었다. 내부 개혁 운동은 그 지도자인 카라파가 교황 바오로 4세가 되면서(1555년) 승리를 거두었다.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를 넘어서는 덜 활발하게- 교회는 성직자들과 그 도덕성을 개혁하였다. 원래의 교회는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채 이루어진 일이었다. 교회 개혁은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전제 군주제에 해당하는 교황제가 주교 귀족 정치를 뜻하는 공회의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였지만 이것은 시대의 정신에도 맞는 일이었다. 교회 개혁을 위해 요구된 규율은 권위가 나뉘는 것보다는 중앙에 집중됨으로써 더욱 효율적으로 될 수 있었다.

제21장.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은 르네상스(셰익스피어), 종교 개혁(엘리자베스), 계몽주의(베이컨) 등이 하나로 합쳐진 천재와 역사가 폭발적으로 집약된 시대였다. 수많은 요인들이 이런 복합적인 결과를 위해 이바지하였다. 영국의 종교 및 지적 생활이 외부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진 것. 사려 깊은 여왕과 표면에 나서지 않는 대신들 치하에서 45년 동안의 정치적 안정과 발전. 교회 재산을 영국의 교육, 정치, 경제생활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자유롭게 풀려난 창의력과 에너지를 갖추고 꽃피어나는 국민에게서 농업, 산업, 항해술, 상업, 재정이 성장한 것.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의 격파와 그 결과로 대서양을 장악하게 된 것. 투자와 사업을 유혹하는 북아메리카로의 접근이 쉬워진 것. 교육의 확대와 학교 및 대학의 다양화. 그리고 영국의 남녀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문명, 문학, 예술과 여러모로 만날 수 있었다는 점……. 이런 요인들과 다른 발전들이 튼튼하고 금욕적이고 진취적인 국민의 정신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할 길이 없는 높이로 끌어올렸다.

여기 강력한 지성이 있다. 철학과 정치에 동일하게 친숙한 사람, 한 세기에 한 명 정도의 인물이다. 그렇다고 그가 철학의 어떤 체계를 가졌다거나 아니면 논리학을 제외하고 자기 사유에 대해 깊은 설명을 남겼다는 말은 아니다. 베이컨의 지혜는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는 형이상학을 신비주의나 무분별의 영역으로 떠넘겼다. 그는 굴종의 지경까지 자신을 추구하였고, 신들을 분노하게 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하였지만 우리도 또한 이런 약점들을 가지고 있기에 그가 비춘 빛으로 그의 성품을 용서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이기심은 항해를 위한 바람이었다. 남들이 우리를 보듯이 우리가 자신을 본다면 충격이 될 것이다. 그는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과학의 철학자였다. 그가 원했건 아니건 그가 요구하였던 기획 -자연 탐구를 위한 포괄적인 기구, 지식의 세계적인 확장과 보급- 은 현대의 가장 심오한 드라마의 씨앗을 이미 품고 있었다. 이 현대의 드라마는 베이컨을 통해 세계를 향하여 그 프롤로그를 말했던 것이다.


***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겨.우. 다 읽고야 말았다.
‘종합선물세트’를 받아들고 좋아했는데 뜯어보니 별로였다. 재미없었다. 아는 만큼만 읽혔다. 그래서 글귀도 못 알아먹는 열등감에 책을 덮어버리기를 여러 번했다. 내공의 힘이었을까? 나를 잘 달래서 다시 책이 펼쳐지기가! anyway.. 읽긴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을 요약한다는 것은 분명 넌센스였다. 물론 나는 그 짓을 했다. 그러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별 짓을 다 했다는 얘기다. 그런 나는, 누구인가?

몇 년 전 여름의 짧은 유럽 여행마저 없었다면.. 지난 일주일 동안의 시간은 학창시절 몇 점의 점수로 남은 ‘공상 속의 역사시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중 2때 였던가? ‘과학자’에 관한 글짓기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 썼다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라며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선생님 덕.분.에 숙제를 다시 했던 아련한 기억마저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역사 점수와도 친하지 않았던 것 같다. 더 중요한 건 기억조차 희미하다는 사실이다. 내 머리로는 국사가, 세계사가, 상.상.하기 힘들었었다.

그런데 상상이 아닌 현실로 경험한 서유럽은, 특히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에 현존하고 있는 고대와 중세와 현재는, 커다란 자극이었고 도전이었다. 아니, 어쩌면 진한 눈물이었다. ‘라파엘로의 방’을 지나서였을까?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인 ‘천지창조’를 보고, 아니 거.기.에. 그.렇.게. 그림을 그렸을 미켈란젤로를 생각하며 흘렸던 눈물을 나는 기억한다. 그래서, 윌 듀런트도 ‘그냥 지나쳤다’고 언급한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10년 동안의 작업’은 크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불어 이 책은 내게 종교에 대해, 인간의 삶과 능력에 대해, 결론짓지 못한 의문을 갖게 했던 그때 그 시간들을 다시 한 번 더듬어보게 했다.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악과 선, 고통과 사랑스러움, 파괴와 숭고함을 뒤섞은 듯이 보이는 우주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기를 달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거나, 혼돈에 질서를, 사물에 의미를, 형태나 생각에 고귀함을 부여하는 지적인 의지를 보면, 우리는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삶과 법칙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듯한 느낌을 얻는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가?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여전히 난 상상력이 부족하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다.고..

끝으로, 당당하게 플라톤의 말을 흉내 낸 아리스토텔레스를 나도 패러디하고 싶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의 어떤 부분도 읽지 말 것>
물론 농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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