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00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1년 12월 13일 07시 17분 등록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이은규



문득 놓치고, 알은 깨진다


깨지는 순간 혈흔의 기억을 풀어놓는 것들이 있다

점점의 붉음

어느 철학자는 그 혈흔을

날개를 갖지 못한 새의 심장이 아닐까 물었다

이미 흔적인 몇 점의 혈흔에서 심장 소리를 듣다니

모든 가설은 시적일 수밖에 없고

시간은 어떻게 그 가설들로 추상을 견디길 요구할까

시적인 철학자의 귀는 밝고, 밝고


날개를 갖지 못한 알 속의 새는 새일까, 새의 지나간 후생後生일까


경계도 없이 수많은 가설들로 붐비고

깨져버린 알이나 지난봄처럼

문득 있다가, 문득 없는 것들을 뭐라 불러야 하나


깨진 알에서 혈흔의 기억을 보거나

혹은 가는 봄날의 등에 얼굴을 묻거나

없는 새에게서 심장 소리 들려올 때

없는 봄에게서 꽃의 목소리 들려올 때

그 시간들을 살기 위해 견딤의 가설을 내놓는다

새가 되어보지 못한 저 알의 미지는 바람일 것

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도 없다

이음새가 없는 새의 몸

바람으로 머물던 흔적이 곧 몸이다

너무 멀리 날아가서 다스릴 수 없는 기억처럼

, 바람이 되지 못한 것들의 배후는 허공이 알맞다


새의 심장이 보내온

먼 곳의 안부를 깨진 알의 혈흔에서 듣는다


 

이은규 시집『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IP *.37.189.73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44 [시인은 말한다] 너에게 보낸다 / 나태주 file 정야 2020.09.21 1744
243 [시인은 말한다] 새출발 / 오보영 file 정야 2019.07.05 1654
242 [시인은 말한다] 영혼의 가장 맛있는 부분 / 다니카와 슌타로 정야 2021.11.22 1448
241 [시인은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file 정야 2019.04.08 1438
240 [시인은 말한다] 벌레 먹은 나뭇잎 / 이생진 file 정야 2020.10.05 1399
239 [시인은 말한다]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file 정야 2019.09.23 1336
238 [시인은 말한다] 벽 / 정호승 file 정야 2019.02.11 1331
237 [시인은 말한다] 은는이가 / 정끝별 정야 2021.09.06 1306
236 [리멤버 구사부] 매일 같은 시각 한가지에 집중하라 [1] 정야 2017.07.21 1297
235 [시인은 말한다] 봄밤 / 김수영 file 정야 2019.05.20 1286
234 [리멤버 구사부]오늘, 눈부신 하루를 맞은 당신에게 [2] 정야 2017.01.09 1280
233 [시인은 말한다] 영원 / 백은선 정야 2021.07.12 1267
232 [시인은 말한다] 그대에게 물 한잔 / 박철 file 정야 2020.11.16 1252
231 [시인은 말한다] 함께 있다는 것 / 법정 정야 2021.08.09 1237
230 [리멤버 구사부]삶은 죽음을 먹는 것 정야 2017.10.28 1232
229 [시인은 말한다] 픔 / 김은지 정야 2020.12.28 1231
228 [리멤버 구사부] 마흔이 저물 때쯤의 추석이면 file 정야 2020.09.28 1227
227 [시인은 말한다] 친밀감의 이해 / 허준 file 정야 2020.11.02 1220
226 [시인은 말한다] 직소폭포 / 김진경 정야 2021.08.23 1205
225 [리멤버 구사부] 도토리의 꿈 정야 2021.08.30 1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