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23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제도
김승희
아이는 하루 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
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
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깔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
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
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
엄마, 엄마,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그렇지?
아이의 상냥한 눈동자엔 겁이 흐른다.
온순하고 우아한 나의 아이는
책머리의 지시대로 종일 금 안에서만 칠한다.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나 그토록 제도를 증오했건만
엄마는 제도다.
나를 묶었던 그것으로 너를 묶다니!
내가 그 여자이고 총독부다.
엄마를 죽여라! 랄라.
김승희 시집,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24 |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 정야 | 2020.01.13 | 1298 |
223 | [리멤버 구사부] 자기 설득 | 정야 | 2020.11.09 | 1294 |
222 | [리멤버 구사부]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 | 정야 | 2020.07.20 | 1292 |
221 | [시인은 말한다] 밖에 더 많다 / 이문재 | 정야 | 2020.11.30 | 1286 |
220 | [시인은 말한다] 낯선 곳 / 고은 | 정야 | 2020.06.15 | 1277 |
219 | [시인은 말한다] 나무들 / 필립 라킨 | 정야 | 2021.05.03 | 1254 |
218 | [리멤버 구사부] 숙련의 '멋' | 정야 | 2021.08.02 | 1250 |
217 | [시인은 말한다] 간절 / 이재무 | 정야 | 2021.03.08 | 1249 |
216 | [시인은 말한다] 어떤 나이에 대한 걱정 / 이병률 | 정야 | 2021.12.20 | 1243 |
215 | [리멤버 구사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천천히 흘러야 한다 | 정야 | 2017.10.04 | 1243 |
214 | [시인은 말한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 정야 | 2021.01.25 | 1241 |
213 | [리멤버 구사부] 관계의 맛 | 정야 | 2020.10.26 | 1240 |
212 | [시인은 말한다] 따뜻한 외면 / 복효근 | 정야 | 2020.08.10 | 1238 |
211 | [시인은 말한다] 눈풀꽃 / 루이스 글릭 | 정야 | 2020.10.19 | 1237 |
210 |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 정야 | 2019.02.25 | 1235 |
» | [시인은 말한다] 제도 / 김승희 | 정야 | 2021.09.27 | 1233 |
208 | [리멤버 구사부] 나를 마케팅하는 법 | 정야 | 2021.12.13 | 1229 |
207 | [리멤버 구사부] 필살기 법칙 | 정야 | 2021.08.16 | 1229 |
206 | [리멤버 구사부] 괜찮은 사람 되기 | 정야 | 2021.07.26 | 1227 |
205 |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 정야 | 2020.07.27 | 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