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26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1월 28일 02시 48분 등록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껍질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고두현 시집『늦게 온 소포』,민음사, 2000


20181021_095815.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4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file 정야 2020.07.27 1295
203 [시인은 말한다] 노자가 떠나던 길에 도덕경을 써주게 된 전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정야 2021.06.14 1294
202 [리멤버 구사부] 괜찮은 사람 되기 정야 2021.07.26 1293
201 [리멤버 구사부] 고독의 인연 file 정야 2020.08.18 1293
200 [리멤버 구사부] 필살기 법칙 정야 2021.08.16 1292
199 [시인은 말한다] 난독증 / 여태천 file 정야 2020.07.13 1292
198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file 정야 2020.12.07 1291
197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288
196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file 정야 2019.02.25 1287
195 [시인은 말한다] 빗방울 하나가 5 / 강은교 정야 2022.01.03 1286
194 [리멤버 구사부]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file 정야 2020.12.21 1286
193 [시인은 말한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정야 2021.03.22 1285
192 [시인은 말한다]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정야 2021.04.05 1283
191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 파블로 네루다 file 정야 2020.06.01 1283
190 [시인은 말한다] 여름의 시작 / 마츠오 바쇼 정야 2021.07.26 1282
189 [리멤버 구사부] 스스로의 역사가 file [3] 정야 2020.08.31 1280
188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280
187 [리멥버 구사부]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라 [1] 정야 2017.07.14 1275
186 [리멤버 구사부] 지금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정야 2021.05.24 1273
185 [시인은 말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file 정야 2020.08.24 1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