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08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1년 4월 19일 03시 03분 등록


밀생


                          박정대


   오늘은 파리 노트르담대성당의 첨탑이 불타고 내일은 불붙은 전 세계의 지붕이 주저앉겠지만 바람이 물고 가는 불씨는 그대 가슴의 대양 어디쯤에서 꺼질 게요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고 하지만 우리는 항상 불타오르고 있었고 언젠가는 꺼지는 것이오

   꺼진 영혼들이 허공의 골목길을 떠돌다 모여드는 곳이 그림자들의 블랙홀이오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는 떠도는 그림자들의 거대한 블랙홀이 있소

   블랙홀은 하나의 기억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적극적 망각의 통로. 물질들의 영혼이 영혼이라는 물질을 운반하는 환승역에서 또 다른 밀생이 이어지는 것이오

   태양은 태양의 자리에서 불타오르고 인간은 태양을 바라보던 자리에서 그렇게 불타오르다가 언젠가는 꺼지는 것이오

   태양이 꺼지는 순간이 오면 우리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오

   점점 희미해져가는 태양의 기억이 그대 가슴에 닿을 때쯤이면 모든 게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오

   오늘은 성모마리아의 아름다운 첨탑이 불타고 내일은 바람이 불어 강원도의 거대한 숲을 태우겠지만 세상의 모든 불씨는 그대 가슴 어디쯤으로 날아가 꺼질 게요

   그대 가슴속 블랙홀 속으로 세상의 불탄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밤이오

   그러나 아직 태양은 꺼지지 않았으니

   그대를 통과한 모든 것들이 이토록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또 다른 아름다운 밀생을 꿈꿀 수 있기를    

 

                                                                          *

                                                                     - 중 략 -


박정대 시집, 『불란서 고아의 지도』, 현대문학, 2019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4 [시인은 말한다] 제도 / 김승희 정야 2021.09.27 1207
203 [시인은 말한다] 오래 말하는 사이 / 신달자 정야 2021.11.15 1202
202 [시인은 말한다] 노자가 떠나던 길에 도덕경을 써주게 된 전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정야 2021.06.14 1202
201 [시인은 말한다] 난독증 / 여태천 file 정야 2020.07.13 1200
200 [시인은 말한다] 여름의 시작 / 마츠오 바쇼 정야 2021.07.26 1198
199 [리멤버 구사부] 체리향기 [4] 정야 2017.01.16 1197
198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 파블로 네루다 file 정야 2020.06.01 1194
197 [리멥버 구사부]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라 [1] 정야 2017.07.14 1194
196 [리멤버 구사부] 고독의 인연 file 정야 2020.08.18 1193
195 [시인은 말한다] 늦게 온 소포 / 고두현 file 정야 2019.01.28 1189
194 [시인은 말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file 정야 2020.08.24 1185
193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file 정야 2021.01.04 1182
192 [리멤버 구사부]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file 정야 2020.12.21 1182
191 [시인은 말한다]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정야 2019.05.20 1182
190 [리멤버 구사부] 스스로의 역사가 file [3] 정야 2020.08.31 1177
189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file 정야 2020.12.07 1175
188 [시인은 말한다] 다례茶禮를 올리는 밤의 높이 / 박산하 정야 2021.05.31 1172
187 [시인은 말한다] 송산서원에서 묻다 / 문인수 정야 2021.07.12 1171
186 [리멤버 구사부] 지금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정야 2021.05.24 1167
185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