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966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7월 29일 02시 19분 등록


[현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현실은 꿈이 사라지듯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버리지는 않는다.

술렁대는 바람의 기운도, 초인종 소리도

감히 흩어지게 할 수 없고

날카로운 비명 소리도, 요란한 경적도

감히 멈출 순 없다.

 

꿈속에 나타난 영상은

아련하고 모호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현실이란 말 그대도 현실일 뿐,

풀기 힘든 난해한 수수께끼이다.

 

꿈에는 열쇠가 있지만

현실은 스스로 문을 열고는

도무지 잠글 줄 모른다.

그 안에서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와 상장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나비 떼와 오래된 다리미들,

윗부분이 닳아 없어진 모자들과

구름의 파편들,

그것들이 모두 어우러져 절대로 풀 수 없는

정교한 퍼즐을 만들어낸다.

 

인간이 없으면 꿈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이 없으면 현실이 존재할 수 없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만성적인 불면증이 만들어낸 산물은

잠에서 깨어나는 모두에게 유용하게 배분된다.

 

꿈은 미치지 않았다.

미친 것은 현실이다.

비록 사건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완강히 저항하고는 있지만.

 

꿈속에는 얼마 전에 죽은 우리의 친지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아니 더 나아가

청춘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되찾은 채로.

현실은 우리의 눈앞에

죽은 이의 시체를 내려놓는다.

현실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

 

꿈이란 덧없는 연기 같아서

기억은 그 꿈을 손쉽게 털어버린다.

현실은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실이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우리의 심장을 무겁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의 발아래서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매 순간 가는 곳마다 우리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기에.

끊임없이 도망치는 우리의 피난길에서

현실은 매 정거장마다 먼저 와서 우리를 맞이한다.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문학과지성사, 2007




20180726_094724.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4 [리멤버 구사부] 지금을 즐기게 file 정야 2020.03.02 817
143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file 정야 2020.02.24 864
142 [리멤버 구사부] 피그말리온적 투쟁가 file 정야 2020.02.17 675
141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file 정야 2020.02.10 864
140 [리멤버 구사부] 다시 실천 file 정야 2020.02.10 772
139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file 정야 2020.01.28 965
138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file 정야 2020.01.20 856
137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file 정야 2020.01.13 1165
136 [리멤버 구사부] 여든다섯 살 할머니의 쪽지 file 정야 2020.01.06 852
135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022
134 [리멤버 구사부] 변화는 나 자신부터 file 정야 2019.12.30 777
133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file 정야 2019.12.16 976
132 [리멤버 구사부] 작은 빛들의 모임 file 정야 2019.12.09 746
131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file 정야 2019.12.02 934
130 [리멤버 구사부] 얼굴 file 정야 2019.11.25 774
129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file 정야 2019.11.18 904
128 [리멤버 구사부] 젊은 시인에게 file 정야 2019.11.11 802
127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file 정야 2019.11.04 940
126 [리멤버 구사부] 전면전 file 정야 2019.11.04 774
125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