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955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4월 22일 01시 50분 등록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저, 창작과비평사, 2003

 복숭아꽃.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4 [시인은 말한다] 밀생 / 박정대 정야 2021.04.19 971
143 [리멤버 구사부] 우연한 운명 file 정야 2020.11.23 970
142 [시인은 말한다] 가는 길 / 김소월 file 정야 2020.04.20 969
141 [리멤버 구사부] 불현듯 깨닫게 정야 2021.06.21 962
140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file 정야 2019.11.04 960
139 [시인은 말한다] 삶은 계란 / 백우선 file 정야 2019.01.21 960
138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file 정야 2019.12.02 958
137 [리멤버 구사부] 사랑하는 법 file 정야 2020.08.03 957
136 [리멤버 구사부] 양파장수처럼 file 정야 2019.08.20 956
» [시인은 말한다]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file 정야 2019.04.22 955
134 [시인은 말한다] 내가 아는 그는 / 류시화 file 정야 2020.04.06 953
133 [시인은 말한다] 나는 새록새록 / 박순원 정야 2021.02.08 951
132 [리멤버 구사부] 실천의 재구성 정야 2021.03.02 949
131 [시인은 말한다] 의자 / 이정록 file 정야 2020.05.04 944
130 [리멤버 구사부] 실재와 가상 정야 2021.12.31 943
129 [리멤버 구사부] 이해관계 없는 호기심 정야 2021.10.18 937
128 [리멤버 구사부] 삶에 대한 자각 정야 2021.11.15 934
127 [시인은 말한다] 꿈꾸는 사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file 정야 2019.03.11 932
126 [리멤버 구사부] 바라건대 file 정야 2019.07.22 931
125 [리멤버 구사부] '나의 날'을 만들어라. 정야 2017.10.04 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