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327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1년 1월 25일 01시 08분 등록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_ 허영만 시집, 『비 잠시 그친 뒤』, 문학과지성사, 1999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4 [리멤버 구사부] 지금을 즐기게 file 정야 2020.03.02 1039
143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file 정야 2020.02.24 1126
142 [리멤버 구사부] 피그말리온적 투쟁가 file 정야 2020.02.17 868
141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file 정야 2020.02.10 1121
140 [리멤버 구사부] 다시 실천 file 정야 2020.02.10 981
139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file 정야 2020.01.28 1170
138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file 정야 2020.01.20 1131
137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file 정야 2020.01.13 1382
136 [리멤버 구사부] 여든다섯 살 할머니의 쪽지 file 정야 2020.01.06 1055
135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289
134 [리멤버 구사부] 변화는 나 자신부터 file 정야 2019.12.30 976
133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file 정야 2019.12.16 1179
132 [리멤버 구사부] 작은 빛들의 모임 file 정야 2019.12.09 964
131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file 정야 2019.12.02 1186
130 [리멤버 구사부] 얼굴 file 정야 2019.11.25 990
129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file 정야 2019.11.18 1180
128 [리멤버 구사부] 젊은 시인에게 file 정야 2019.11.11 1010
127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file 정야 2019.11.04 1179
126 [리멤버 구사부] 전면전 file 정야 2019.11.04 984
125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