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33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2월 11일 03시 54분 등록



[]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시집, 창비, 2004


20181017_184049.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4 [리멤버 구사부] 정면으로 살아내기 file 정야 2019.10.14 875
123 [시인은 말한다] 타이어에 못을 뽑고 / 복효근 file 정야 2019.10.14 844
122 [리멤버 구사부] 변화의 기술 file 정야 2019.10.14 727
121 [시인은 말한다] 자작나무 / 로버트 프로스트 file 정야 2019.09.23 1336
120 [리멤버 구사부] 아름다운 일생길 file 정야 2019.09.23 814
119 [시인은 말한다] 별 / 이상국 file 정야 2019.09.23 981
118 [리멤버 구사부] 한 달의 단식 file 정야 2019.09.02 899
117 [시인은 말한다] 푸픈 힘이 은유의 길을 만든다 / 배한봉 file 정야 2019.08.26 1027
116 [리멤버 구사부] 양파장수처럼 file 정야 2019.08.20 934
115 [시인은 말한다] 자유 / 김남주 file 정야 2019.08.20 994
114 [리멤버 구사부] 품질 기준 file 정야 2019.08.05 780
113 [시인은 말한다] 현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file 정야 2019.07.29 964
112 [리멤버 구사부] 바라건대 file 정야 2019.07.22 905
111 [시인은 말한다] 잃는 것과 얻은 것 / 헨리 왜즈워스 롱펠로 file 정야 2019.07.15 1022
110 [리멤버 구사부] 지금이 적당한 때 file 정야 2019.07.08 800
109 [시인은 말한다] 새출발 / 오보영 file 정야 2019.07.05 1654
108 [리멤버 구사부] 비범함 file 정야 2019.07.05 768
107 [시인은 말한다] 늙은 마르크스 / 김광규 정야 2019.06.17 1004
106 [리멤버 구사부] 우정 정야 2019.06.17 758
105 [시인은 말한다] 생활에게 / 이병률 정야 2019.06.17 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