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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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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2일 01시 50분 등록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저, 창작과비평사, 2003

 복숭아꽃.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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