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008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4월 22일 01시 50분 등록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저, 창작과비평사, 2003

 복숭아꽃.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4 [시인은 말한다] 오래 말하는 사이 / 신달자 정야 2021.11.15 1176
203 [리멥버 구사부] 인문학적 감수성을 키워라 [1] 정야 2017.07.14 1176
202 [시인은 말한다]시에라네바다 산맥을 따라가는 삶의 사소한 선택들 혹은 소금과 별들의 순환 이동 경로 / 박정대 file 정야 2020.07.27 1175
201 [시인은 말한다] 난독증 / 여태천 file 정야 2020.07.13 1172
200 [리멤버 구사부] 좋은 얼굴 정야 2021.09.13 1171
199 [시인은 말한다] 노자가 떠나던 길에 도덕경을 써주게 된 전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정야 2021.06.14 1171
198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 파블로 네루다 file 정야 2020.06.01 1167
197 [시인은 말한다] 여름의 시작 / 마츠오 바쇼 정야 2021.07.26 1163
196 [시인은 말한다] 늦게 온 소포 / 고두현 file 정야 2019.01.28 1162
195 [리멤버 구사부] 고독의 인연 file 정야 2020.08.18 1161
194 [시인은 말한다]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정야 2019.05.20 1161
193 [시인은 말한다] 대추 한 알 / 장석주 file 정야 2020.08.24 1154
192 [시인은 말한다] 발작 / 황지우 file 정야 2020.05.18 1144
191 [리멤버 구사부]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file 정야 2020.12.21 1140
190 [시인은 말한다] 송산서원에서 묻다 / 문인수 정야 2021.07.12 1139
189 [리멤버 구사부] 나를 혁명하자 file 정야 2021.01.04 1138
188 [리멤버 구사부] 잃어버린 열정을 찾아서 file 정야 2020.12.07 1137
187 [리멤버 구사부] 스스로의 역사가 file [3] 정야 2020.08.31 1135
186 [리멤버 구사부] 내가 담아낼 인생 정야 2017.11.07 1132
185 [시인은 말한다]허공에 스민 적 없는 날개는 다스릴 바람이 없다 / 이은규 정야 2021.12.13 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