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10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1월 28일 02시 48분 등록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껍질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고두현 시집『늦게 온 소포』,민음사, 2000


20181021_095815.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4 [리멤버 구사부] 지금을 즐기게 file 정야 2020.03.02 843
143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file 정야 2020.02.24 880
142 [리멤버 구사부] 피그말리온적 투쟁가 file 정야 2020.02.17 685
141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file 정야 2020.02.10 885
140 [리멤버 구사부] 다시 실천 file 정야 2020.02.10 784
139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file 정야 2020.01.28 995
138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file 정야 2020.01.20 891
137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file 정야 2020.01.13 1184
136 [리멤버 구사부] 여든다섯 살 할머니의 쪽지 file 정야 2020.01.06 871
135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042
134 [리멤버 구사부] 변화는 나 자신부터 file 정야 2019.12.30 793
133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file 정야 2019.12.16 997
132 [리멤버 구사부] 작은 빛들의 모임 file 정야 2019.12.09 762
131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file 정야 2019.12.02 953
130 [리멤버 구사부] 얼굴 file 정야 2019.11.25 790
129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file 정야 2019.11.18 922
128 [리멤버 구사부] 젊은 시인에게 file 정야 2019.11.11 822
127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file 정야 2019.11.04 957
126 [리멤버 구사부] 전면전 file 정야 2019.11.04 793
125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