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1342
- 댓글 수 0
- 추천 수 0
[벽]
정호승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시집, 창비, 2004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44 | [리멤버 구사부] 지금을 즐기게 | 정야 | 2020.03.02 | 831 |
143 |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 정야 | 2020.02.24 | 876 |
142 | [리멤버 구사부] 피그말리온적 투쟁가 | 정야 | 2020.02.17 | 680 |
141 |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 정야 | 2020.02.10 | 876 |
140 | [리멤버 구사부] 다시 실천 | 정야 | 2020.02.10 | 782 |
139 |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 정야 | 2020.01.28 | 985 |
138 |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 정야 | 2020.01.20 | 879 |
137 |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 정야 | 2020.01.13 | 1177 |
136 | [리멤버 구사부] 여든다섯 살 할머니의 쪽지 | 정야 | 2020.01.06 | 865 |
135 |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 정야 | 2019.12.30 | 1032 |
134 | [리멤버 구사부] 변화는 나 자신부터 | 정야 | 2019.12.30 | 786 |
133 |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 정야 | 2019.12.16 | 989 |
132 | [리멤버 구사부] 작은 빛들의 모임 | 정야 | 2019.12.09 | 755 |
131 |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 정야 | 2019.12.02 | 948 |
130 | [리멤버 구사부] 얼굴 | 정야 | 2019.11.25 | 784 |
129 |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 정야 | 2019.11.18 | 913 |
128 | [리멤버 구사부] 젊은 시인에게 | 정야 | 2019.11.11 | 816 |
127 |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 정야 | 2019.11.04 | 951 |
126 | [리멤버 구사부] 전면전 | 정야 | 2019.11.04 | 787 |
125 |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 정야 | 2019.10.21 | 10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