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93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9년 4월 22일 01시 50분 등록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저, 창작과비평사, 2003

 복숭아꽃.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4 [리멤버 구사부] 지금을 즐기게 file 정야 2020.03.02 817
143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file 정야 2020.02.24 864
142 [리멤버 구사부] 피그말리온적 투쟁가 file 정야 2020.02.17 675
141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file 정야 2020.02.10 864
140 [리멤버 구사부] 다시 실천 file 정야 2020.02.10 772
139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file 정야 2020.01.28 965
138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file 정야 2020.01.20 856
137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file 정야 2020.01.13 1165
136 [리멤버 구사부] 여든다섯 살 할머니의 쪽지 file 정야 2020.01.06 852
135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022
134 [리멤버 구사부] 변화는 나 자신부터 file 정야 2019.12.30 777
133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file 정야 2019.12.16 976
132 [리멤버 구사부] 작은 빛들의 모임 file 정야 2019.12.09 746
131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file 정야 2019.12.02 934
130 [리멤버 구사부] 얼굴 file 정야 2019.11.25 774
129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file 정야 2019.11.18 904
128 [리멤버 구사부] 젊은 시인에게 file 정야 2019.11.11 802
127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file 정야 2019.11.04 940
126 [리멤버 구사부] 전면전 file 정야 2019.11.04 774
125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