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추모

리멤버

구본형

  • 정야
  • 조회 수 1163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20년 1월 13일 03시 53분 등록



[1]


오은



1월은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만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오은 시집,『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문학동네, 2013


 20180804_180812.jpg




IP *.174.136.4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4 [리멤버 구사부] 지금을 즐기게 file 정야 2020.03.02 816
143 [시인은 말한다] 통속 / 정끝별 file 정야 2020.02.24 859
142 [리멤버 구사부] 피그말리온적 투쟁가 file 정야 2020.02.17 671
141 [시인은 말한다]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file 정야 2020.02.10 862
140 [리멤버 구사부] 다시 실천 file 정야 2020.02.10 770
139 [시인은 말한다] 넥타이 / 나해철 file 정야 2020.01.28 964
138 [리멤버 구사부] 나눈다는 것 file 정야 2020.01.20 855
» [시인은 말한다] 1년 / 오은 file 정야 2020.01.13 1163
136 [리멤버 구사부] 여든다섯 살 할머니의 쪽지 file 정야 2020.01.06 851
135 [시인은 말한다]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 허수경 file 정야 2019.12.30 1021
134 [리멤버 구사부] 변화는 나 자신부터 file 정야 2019.12.30 776
133 [시인은 말한다] 오늘의 결심 / 김경미 file 정야 2019.12.16 972
132 [리멤버 구사부] 작은 빛들의 모임 file 정야 2019.12.09 743
131 [시인은 말한다] 시간들 / 안현미 file 정야 2019.12.02 932
130 [리멤버 구사부] 얼굴 file 정야 2019.11.25 772
129 [시인은 말한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file 정야 2019.11.18 902
128 [리멤버 구사부] 젊은 시인에게 file 정야 2019.11.11 799
127 [시인은 말한다]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 이진명 file 정야 2019.11.04 938
126 [리멤버 구사부] 전면전 file 정야 2019.11.04 771
125 [시인은 말한다] 첫 꿈 / 빌리 콜린스 file 정야 2019.10.21 10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