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 조회 수 99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시집『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산책방, 2014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04 | [리멤버 구사부] 오늘을 실천하라, 내일 죽을 것처럼 | 정야 | 2019.05.27 | 1089 |
103 | [시인은 말한다] 꿈, 견디기 힘든 / 황동규 | 정야 | 2019.05.20 | 1246 |
102 | [리멤버 구사부] 우리가 진실로 찾는 것 | 정야 | 2019.05.20 | 918 |
101 | [시인은 말한다] 봄밤 / 김수영 | 정야 | 2019.05.20 | 1567 |
100 | [리멤버 구사부] 부하가 상사에 미치는 영향 | 정야 | 2019.04.29 | 1118 |
99 | [시인은 말한다]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 정야 | 2019.04.22 | 1112 |
98 | [리멤버 구사부] 죽음 앞에서 | 정야 | 2019.04.15 | 1087 |
97 | [시인은 말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랜터 윌슨 스미스 | 정야 | 2019.04.08 | 1738 |
96 | [리멤버 구사부] 인생은 불공평하다 | 정야 | 2019.04.01 | 1211 |
95 | [시인은 말한다] 상처적 체질 / 류근 | 정야 | 2019.03.25 | 1135 |
94 | [리멤버 구사부] 시처럼 살고 싶다 | 정야 | 2019.03.25 | 935 |
93 | [시인은 말한다] 꿈꾸는 사람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정야 | 2019.03.11 | 1088 |
92 | [리멤버 구사부] 도약, 그 시적 장면 | 정야 | 2019.03.04 | 1098 |
91 |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 정야 | 2019.02.25 | 1285 |
90 | [리멤버 구사부] 흐름에 올라타라 | 정야 | 2019.02.25 | 829 |
89 | [시인은 말한다] 벽 / 정호승 | 정야 | 2019.02.11 | 1596 |
88 | [리멤버 구사부] 어울리는 사랑 | 정야 | 2019.02.07 | 1095 |
87 | [시인은 말한다] 늦게 온 소포 / 고두현 | 정야 | 2019.01.28 | 1259 |
86 | [리멤버 구사부] 사람의 스피릿 | 정야 | 2019.01.21 | 839 |
85 | [시인은 말한다] 삶은 계란 / 백우선 | 정야 | 2019.01.21 | 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