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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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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1일 10시 51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미국의 신화종교학자, 비교신화학자.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자로 불린다. 1904년 뉴욕의 중산층,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평범하던 그의 인생을 크게 흔든 사건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아버지 동생과 함께 Buffalo Bill's Wild West show를 보러 간 곳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민담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것이다. 이후 맨하탄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즐겨 찾으며 그 박물관의 한 코너에 있는 토댐 기둥에 특히 매료되었다. 10살까지 지역 도서관에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책들을 모두 섭렵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그가 얼마나 놀랍게 몰입하였는지 짐작 할 수 있다.

그 뒤 1925년과 192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자신이 어렸을 적 즐겨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캠벨은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여러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두루 섭렵했다. 특히 파리 대학과 뮌헨 대학에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 어를 공부하였다.

그의 인생에서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1929년 유럽으로부터 돌아온 후, 시대적 상황적 환경 속에서 회의를 느낀 그가 숲에 들어가 2년간 책 읽기와 쓰기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사회에서 모습을 감춘 이 기간에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 자세한 일화는 찾기 어려우나 실망과 회의, 좌절에 굴하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임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1934년에는 캔터베리 스쿨에서 가르쳤으며, 이후 뉴욕 사라 로렌스 대학의 교수가 된 뒤 신화의 원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신화적 인물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신화에 대한 여러 저서를 통해 왕성한 지적 연구 활동을 펼치다 1987년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셉 캠벨은 스스로 천복을 쫓는 자이자, 그가 천복인 신화를 통해 그 안에 살아있는 한 영웅의 모습을 닮아간 사람이라 여겨진다. 그가 평생 천복을 쫓을 수 있던 이유는 늘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임으로써 자기 중심을 지켰음이리라. 또한 천복에 관련된 분야를 통섭하는 집요함과 지독한 몰입은 그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세상에 영향을 미칠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냈다. 또한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푹 빠진 7살 어린 아들이 마음껏 앎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부모의 역할이 없었다면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은 자신의 천복을 쫓음으로써 인생의 사명을 이루어내기 위해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를 지녀야할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준다. 어쩌면 그가 평생을 연구하고 갈구했던 영웅의 모습은 바로 그 자신의 내면에 살아있는 위대한 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출처]

동아일보 2005-10-31 [책갈피 속의 오늘]1987신화학자 조지프 캠벨 사망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http://www.jcf.org/new/index.php

교보문고, 알라딘 저자 소개


(사진 별첨) 

PBS방송에서 빌 모이어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조셉 캠벨. ‘신화의 힘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
출처: http://www.kellymoore.net/Joseph_Campbell.html)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신화와 현대 세계

 

로마의 속담: “운명은 앞서서 뜻 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 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끄는 것은 아니라오.” 그는 큰 스승들이 그러하듯 예증을 통하여 가르친다. 말을 통하여 믿음으로 이끄는 일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다…..(중략)”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주기만 하면 될텐데 말이오.” P.14

 

그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이다. P.15

 

나이를 먹어 나날의 삶에 대한 관심에 심드렁해지면, 사람은 내면적인 삶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내면적인 삶이라는게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 참 곤란한 일이지요…..(중략) 우리는 세계와 관계를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현실과 조화시키기 위해 옛 이야기를 하고, 읽는다.P.26

 

완전한 것은 비인간적입니다. 보고 듣는 사람에게 초자연적인 인간이나 불사신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신, 아슬아슬한 것,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는 인간미…….이게 사랑스러운 겁니다. P.29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 어떤 실마리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랍니다. 신화는 인간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P.29

 

살면서 살아있음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꼈던 적이 얼마나 있는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의 광활한 경관이 아니더라도, 어깨 위 포근히 내려 앉은 햇살 속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나무의 향기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재잘거림에서 살아있음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의 흐를수록 살아있음에 대한 경험보다는 사회에서 주어진 역할에만 집착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한 집착이 오래될수록 삶의 깊이는 오히려 얕아진다. 공허함이 밀려온다. ‘어떻게 영적인 잠재력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오랜 궁금증에 대해 신화는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보다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에게는 자기 종교와 관련된 신화를 믿음이라는 문맥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의 신화를 읽으면 메시지를 느끼게 됩니다. 남의 신화를 읽으면 경험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P.30

 

신화가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한 쌍의 재회랍니다.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P.32

 

결혼한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시련입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것이지요. 바로 이 관계안에서 둘은 하나가 됩니다. P.33

 

때로는 결혼 생활이 버겁게 느껴지는 것은 결혼을 통해 새로 태어남을 깨닫지 못했음 때문이리라.

하나된 관계에서보다 반쪽이던 시절의 습성을 중시할 때 마음에 부담이 생긴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생활패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젊은이들은 의례를 통하여 한 겨레 혹은 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하는데,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의례를 베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이군요. 모든 아이는 거듭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아이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성적으로 기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어린 시절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P.35

 

서른이 되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살아온 시간이 길어진다고 자연스럽게 어린 아이가 어른으로 변모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사회가 의례를 베풀어 줄 수 없다면 스스로 자신을 던지고 거듭날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함을 느낀다. 내 안의 어린아이와 결별 할 수 있는 그 날이 내 인생 진정한 성인식이 될 것이다.

 

신화적인 의례, 우리는 바로 이런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것을 벗어던지고 새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P.41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된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P.42

 

의식을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은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이부이지요……..(생략)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합니다. 이 의식은 의식을 하는 주체에게 살아 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합니다.P.46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습니다. 식물의 세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P.47

 

어떻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명상이라는게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중략)많은 사람이 명상이라는 것을 하기는 하되, 돈이 들어올 데, 돈이 나갈데에 관해서만 명상을 합니다…….(중략) 그러면 영적인 의식이라고 하는 걸 어디에서 얻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화가 필요한 겁니다.P.47

 

당시의 하느님은 어떤 동네의 종족신이었답니다. 그런데 6세기에 유태인들이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문득 이 세계의 구주라는 관념이 생기면서 성서의 신은 새로운 차원으로 발돋움합니다. 옛 전통을 가꾸는 유일한 방법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그것을 쇄신하는 길뿐입니다.P.57

 

언젠가 로마의 신전을 탐방하던 때, 동행했던 한 역사학자의 설명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라났던 내게 그 이야기는 듣고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제 한 종교와 종족을 벗어나 큰 세계를 바라봐야 함을….어서 눈을 들어 진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음을 이 책은 일러준다. 그동안의 억눌러왔던 끊임없던 의문을 풀어나가는 순간이다.

 

성서에 나오는 같은 신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이름을 인정하지 못해요.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그 참의미는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고 할까요. P.58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사회의 어떤 동아리에 속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지요.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납니다. P.60

 

미합중국은 이 세계에서 전쟁이 아니라 이성을 바탕으로 세워진 최초의 국가입니다. P.64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능케하는 것은 이성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이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은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권위나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특별한 계시 같은 것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P.65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어떤 사람이든지, 그 마음이 진리를 떠나 있지 않다면 진실을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P.70

 

이성을 파괴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정치에서 열정은 곧 탐욕입니다. 탐욕은 인간을 타락케합니다. P.71

 

이성은 생각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성이 작용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존재의 바탕, 우주의 근본적인 구조를 고려에 넣고 무엇을 생각해야 비로소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P.73

 

성서에 바탕을 둔 우리 서구의 이야기는 선사 시대의 우주관 위에 서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든지, 우주에 관한 오늘날의 개념과는 맞지 않아요. 그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것이지 더 이상 우리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할일은 온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P.76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신화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신화는 어떤 도시, 어떤 동아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이 땅에 관한 신화입니다. 모든 인류가 사는 이 땅에 관한 신화 여야합니다. P.77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P.86

 

사람은 다 어떤 종류의 문턱을 넘어야 달라질 수 있습니다. P.87

 

꿈에서는 우리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꿈의 기억을 떠올려 메모하는 겁니다. 다음에는 꿈의 작은 단편 중에서 하나, 두어 개의 이미지나 관념을 선택하고 이를 연관시켜보면서, 이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기록해보는 겁니다. 그려면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P.88

 

꿈은 우리 의식적인 삶을 지탱시키는 깊고 어두운 심층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입니다. 반면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P.89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P.91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이지는 것입니다. P.96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면서 가나안 백성을 정복한 것과 관련된 역사적인 설명이 있어요. 가나안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신은 여신이었어요. 그런데 이 여신은 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요. 바로 삶의 신비를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지요. 남성신 지향적인 민족이 이런 신관을 거부하지 않을리 없어요. 달리 말하면 에덴 동산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모신을 거부하는 태도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는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P.103

 

신화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존재가 언표되는 장이랍니다. P.103

 

에덴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나위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P.105

 

은유라는 것은 드러내기는 드러내면서도 사실 본뜻은 다른데 있는 표현법입니다. 종교 전통에 등장하는 은유를 갈자 그래도 이해하면 죽도 밥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문자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거지요.P.116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분의 1의 깊이 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대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119

 

삶을 하나의 시련으로 보는 관념, 이 시련을 겪어야 세속적 의미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관념은 고등 종교의 관념입니다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 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P.120

 

글을 쓰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와 인간의 손으로 쓰여지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해온 내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한다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내게 옮겨야 할 그의 말씀을 무엇인가. 더욱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구절이다.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어느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체험한 사람은 체험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이미지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언어의 현실보다는 이미지의 현실이 훨씬 풍부한데 말이지요. P.124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경험을 한정시키는 감각 능력을 형성시킵니다.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존재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을 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P.126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이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P.133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P.135

 

선악을 논하기 전에, 천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겁니다. P.136

 

언젠가 한 신부님의 이러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죄인이 잡혀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 때문인가? 죄의 무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이 책은 다시 내게 묻는다. ‘내가 삶에서 선을 추구하는 것은 선에 대한 신념이 있어서인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인가?’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에 있습니다. P.139

 

3. 태초의 이야기꾼들

 

고대의 신화는 몸과 마음을 조화시킬 목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P.141

 

사냥의 신화를 보면, 동물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계약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은 사냥 꾼에게 기꺼이 목숨을 내어줍니다. 자기 삶이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면, 회생 의례를 통해 흙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뱃속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내어주는 겁니다. P.146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가,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P.147

 

초기 신화는, 삶에 필요한 행위일 경우이면 그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하면서도 공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해줍니다. 말하자면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지요. P.148

 

인디언들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P.158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에 어느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P.158

 

모든 사람의 의례적 삶에서 변모라는 주제는 상당히 근본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문제였던 것으로 보여요. P.165

 

민중의 문화를 빚겠다는 최초의 충동은 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아래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P.168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P.172

태양신전이 있던 그 자리에 카톨릭 교회가 섭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도들에 의한 연고권 주장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이들은 다른 신전이 있던 자리에 자기네 신전을 세움으로써 한결같던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버리지 않았습니까? P.182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잡아줍니다. P.187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심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다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P.189

 

읽는 행위를 통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붙잡아서,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되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작가, 저 작가로 옮겨다니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언제 무엇을 썼는지는 줄줄 외고 다닐 수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도움은 안됩니다. P.190

 

사막으로 나오면 하늘도 하나요, 세상도 하납니다. 그러니 신이 하나일 수 밖에 없지요. 그러나 정글에서는 지평선은 커녕 10야드 앞을 보기도 어렵습니다. 유일신 관념이 생길리 없지요. P.192

 

숲과 농경 문화에는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새 생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서의 죽음이 있어요. P.195

 

성서문화에서는 승자가 되는 쪽, 선한 쪽은 늘 둘째아들이에요. 둘째 아들은 나중 온 자 아닙니까? 즉 히브리인을 상징하지요. 둘째 아들이 그 땅으로 왔을 때, 이미 그 땅에는 맏아들, 즉 가나안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카인은 농경에 기초를 두고 있는 당시의 도시 문화를 상징하지요. P.201

 

예술의 기능은 창조작업을 통해 그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아,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P.205

 

종교 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 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17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할 도리밖에는 없어요. P. 223

 

끝없는 혼란 속에 빠졌을 때 깨달은 것은 결국 나의 문제이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은 내 안에 밖에 없음이었다. 그 누구도 나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천복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순간 삶에 대한 진정성과 책임이 살아난다.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길로 나가게. P. 225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쫓되 두려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을 열릴 것이다.” P.227

 

그게 어디가 되었든,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를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P.227

 

5. 영웅의 모험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P.229

 

보통 영웅의 모험은 무엇인가를 상실한 사람, 자기 동아리에게 허용되어 있는 정상적인 경험에는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 시작합니다. P.230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0

 

출산은 영웅적인 행적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중략)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P.232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영웅이냐, 괴물이냐는 우리 의식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지요. ….(중략) 영웅이 자신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옹호하려는 관념이 반드시 옳은 것일 수만은 없지요. 하지만 이것은 반대편 입장에서 보아서 그럴 뿐입니다. 반대입장의 견해가 영웅이 이룬 업적이 지닌 고유의 영웅적 속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P.235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모습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넣을 필요가 있는 것인 이 때문이지요. 우리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옵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P.239

 

T.S 엘리엇의 황무지가 그리고 있는게 바로 무기력한 삶과 강요된 삶으로 빚어지는 사회학적인 침체 상황입니다. 이런 삶을 우리의 영적인 삶, 우리의 잠재력, 우리의 육체적인 힘을 촉발할 수 없지요. 세계 대전이 무엇이던가요? 이런 삶이 지배하는 분위기가 빚어낸 전쟁 아니던가요?P.242

 

동화는 어린이들의 신화예요. 각 나이에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신화가 있어요. P.253

 

디즈니 만화 속의 신화이야기를 세상의 신화라고 믿었던 것은 아닌가?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지는 않은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쇼를 연출하는 줄(주도권을 행사하는 줄)알지만 아니에요. 무엇이 쇼를 연출하는가 하는 것은, 가로 선 아래에서, 즉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에 달려 있어요. 한 인간이, “쇼를 연출하는게 나 자신이 아니구나”, 이런 걸 깨닫는 시기가 바로 사춘기에요. 전혀 새로운 요구체제가 우리의 의식아래에서 자기 존재를 알리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나 사춘기 청소년에게는 여기에 아무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장악할 수 없어요. P.261

 

나는,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사회 상황에서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그만큼 모르는 상태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중략)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살지요. 아이들이 달력을 보면서 휴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휴일이 되서야 저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P.262

 

신화는 어떻게 하면 진짜 자기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까?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 또는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중략)또 하나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P.263

 

의식적인 인격은 통제 불가능한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충전을 받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웅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됩니다. P.269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P.270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P. 272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라도 좋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말해서, 마지막 일,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혼자 해야 합니다. P.273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적인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P.279

 

니체의 영혼의 세 가지 변모첫번째가 낙타의 변모, 즉 어린아이와 소년의 변모입니다. 책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교육과 수업을 받아야 하는 복종의 시절이 있는 법입니다. (중략) 등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사자의 힘은 그만큼 강해집니다. 이 사자가 해야 하는 일은 용을 죽이는 일인데, 용의 이름은 그대의 미래입니다. 낙타, 즉 아이는 그대의 미래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사자, 즉 청년은 이것을 벗어던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완전히 제압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의 미래가 완전히 극복되면 사자는 다시 그 사나운 본성을 버리고 아이로 변모합니다. P.284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P.296

 

고통에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P.298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도 이걸 통해서 와요. 증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P.299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정점에 이르러 있는 운동 선수는 내부에 정점을 하나 지니고 있어요. 그의 움직임을 바로 이 정점에서 생겨납니다. 움직임의 장에서 뛰고 있는 한, 운동 선수는 제대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어요.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인이 된 셈입니다.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P.299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납니다. P.301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신화를 정말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 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서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에서 말하는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의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P. 303

 

6. 조화여신의 은혜

 

아버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몸과 때로 마음은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P.307

 

자기 삶에 집착한 나머지 남의 먹거리가 되어주지 않는 것도 삶을 거부하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이지요. 그렇게 하면 생명의 흐름이 끊겨버립니다. 이 흐름을 타는 것은 매우 신비스러운 체험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먹거리가 된 동물에게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겁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우리 자신을 주어야 할 거예요. P.319

 

만물 중 인간이 가장 위대하다는 사상은 세상을 병들게 만들었다. 언젠가 헬렌 니어링의 책에서 그대는 그대의 자녀가 식탁 위에 오르게 될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구절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때가 생각난다.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닌, 끊임없는 살생에 무감각해지고 감사함을 잊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영적인 인간이 탄생한다는 암시…….(중략) 우리 가슴 가까이 있는 진리를 깨닫고 자비를 실천할 때, 곧 함께 슬퍼할 수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을 때 생깁니다. 바로 이 중심에서 인간성이 비롯됩니다. 종교적인 명상도 바로 이 중심에서 이루어집니다. P.320

 

누가 신인지 아세요? ‘우리가 곧 신이에요. 이 모든 신화의 상징이 수다스럽게 말하는게 바로 이것이라고요. P.320

 

처녀수태는 가슴에 자비가 깃들이게 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처녀가 낳은 것은 정신이에요. 그건 영적인 탄생을 말하는 거지요. 처녀는 귀로 들어간 말씀으로 잉태를 한 거에요. P.320

 

근본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곧 어머니 원리로 돌아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언제 또 가부장적 원리로 되돌아갈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왜냐, 이 땅의 모든 조직은 거대 규모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 자체가 남성적 기능이 두드러지기에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차 어떤 경향이 나타날지는 예견할 수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근본, 혹은 자연은 언제 돌아와도 돌아옵니다. P.334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계시가 담긴 약도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약도는,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주기를 요구합니다. P.335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P. 337

 

아모르적 사랑은 순수하게 개인적인 성격을 지니는 사랑입니다. 이 아모르적 사랑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듯 눈과 눈이 만나는 데서 싹트지요. 말하자면 개인대 개인의 사적인 경험인 겁니다…….(중략) 바로 그 용기 덕분에 서구문화에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겁니다. P.343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육체적 관심에서 시작되어 정신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진정한 결혼은 사랑, 즉 아모르의 영적인 충돌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P.345

 

중세 기사가 섬기던 다섯가지 미덕: 절제, 용기, 사랑, 충성, 예의바름(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단정하게 처신하기) 사랑은 홀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미덕과 동행해야 한다. P.351

 

음유시인들은 사랑의 고통, 의사가 낫게 할 수 없는 고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받은 상처를 찬양했지요. 그 상처는, 거기에 그 상처를 낸 바로 그 무기를 통해서만 나을수 있는 상처였지요. P.356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인생의 꽃이자 향기인 동시에, 개화이자 성취이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 주어진 미덕이 아니라는 겁니다. P. 358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은 그 결과에서는 한 쌍의 대극을 낳는다는 겁니다. 가장 바람직한 삶은 빛을 향하여, 남을 이해함으로써 남의 고통에 동참하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화합의 관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배가 의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망스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인 겁니다. P.359

 

우리는 우리 세계에 살고 있는가 하면, 밖에서 강요하는 또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기도 하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 두 세계를 조화 있게 상호 관계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는 이 모듬살이로 태어났으니까, 모듬살이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P.361

 

결혼은 우리가 참가하는 엄연한 약속입니다. 우리의 결혼 상대는 글자 그대로 우리의 잃어버렸던 반쪽입니다. 이렇게 두개의 반쪽이 모임으로써 하나가 되는 것, 이게 결혼입니다. P.365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의 측면과의 만납이랍니다. P.368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슬픈 것이기 때문에 사랑도 종국은 슬픈 겁니다. 사랑이 깊으면 괴로움도 깊은 법이지요. 사랑 자체가 고통, 혹은 진정하게 살아 있음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요. P.373

 

8. 영원의 가면

 

서구인의 사고방식은 하느님을 우주의 에너지와 경이의 종국적인 근원, 혹은 본원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고방식은 신들은 결국 비인격적인 에너지의, 그 자체로서의 드러남이자 에너지의 공급자로 파악하지요. 따라서 이들에게 신들은 에너지의 본원이 아닌 겁니다. 신은 그러니까 에너지를 나르는 수레인 것이지요. P.376

 

언어 밖에 있는 깨달음에 이르려면 하느님의 이미지부터 넘어서야 합니다. 분석 심리학자 융 박사는 종교는 하느님의 체험에서 인간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있어요. P.379

 

힌두교 경전에 보면, “오로지 신만이 신을 섬길 수 있다는 말이 나와요. 신을 경배하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자면 자신과 그 신이 표상하는 영적인 원리를 동일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P.381

 

우리의 목표는 자기를 넘어서는 것, ‘자기에 대한 모든 관념을 넘어서는 것, 이로써 자기라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의 드러남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어야 합니다. P.382

 

아버지의 왕국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으나 사람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니라. P.386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이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누가 나에게 그럼 당신은 그 잠재력을 어떻게 사오?라고 묻겠지요. 내 대답은, ‘천복을 따르는 것입니다. P.412

 

III.          내가 저자라면


말말랑말랑한 젤리에 익숙해져있던 내게 이 책은 아주 딱딱한 말린 문어를 씹는 느낌이었다.

턱턱이 아파 뱉고 싶을 때쯤 베어나오는 묘한 단 맛이 뱉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전전반적으로 모이어스의 저널리스트로서의 노련함과, 때때로 들리는 우문에도 현명하게 답을 하는

조조셉 캠벨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곳곳에 삽입된 사진과 그 옆의 짤막한 글귀는 책에서

이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하지만 나의 무지함 때문인지 번역서로서의 한계 때문인지 모호한 문장 앞에서 고개를

갸갸우뚱 거리는 시간이 꽤 많았다.특히 빌 모이어스의 서문 부분이 그러했는데 방대한 이야기를

그그대로 요약한 듯한 방대한 서문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보다 본문에 돌입하기 전에 흥미를 반감시키

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또한 이 서문과 1장 신화와 현대세계는 책 전반적인 내용 곳곳의 이야기를 내포함으로써

전전반적으로 같은 내용이 계속하여 반복되는 느낌을 남긴다. 본문에서 캠벨이 이야기하였던 긴

언언어로 그 신비로움을 다 전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가 체험한 빛을 잠시 보여주는 것이 더욱 감흥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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