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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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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4일 10시 50분 등록

꿈의 레이스 2차 관문 셋째 주 과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김용규지음, Humanist-20113 14일 낮 12시까지 제출)-Book Review

 

1. 저자에 대하여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1 페이지)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저자에 대해 나온 내용은 그가 한국의 움베르트 에코라고 불리우며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였다는 것 그리고 슬하에 자녀가 1녀 있다는 이야기 (이건 책 표지를 보아서도 예상했던 내용이지만)이다. 주로 가사일은 본인이 도맡아하며 현대인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은 인문학에 대해 늘 고심하는 저자로 생각이 된다. 지금까지의 저서들만 보아도 그 풍부함에 압도된다. 이번 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서양 문명 코드를 읽는데 도움이 되도록 친절하게 해석해 놓은 것 같다.  

사실 이분에 대한 자료가 이렇게 없는 것에 오히려 조사하면서 놀랬다. 한국의 움베르트 에코라고 불리우리만큼 많은 저서와 또 그 학문적 깊이에 대해서 인정을 받는 분에 대한 내용이 생각보다 너무 없어서였다. 늘 그렇듯이 난 저자들이 책을 통해서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지만 사실은 그 분들의 삶과 철학이 일치하는지 또 인터뷰를 통한 좀 더 심층적인 그 분들의 살아있는 언어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서면 인터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만하고서 실천을 못한게 아쉽지만 다른 분의 글을 통해서 저자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저자는 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해서도 무한한 동정심과 애정이 넘치는 분이라는 걸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러한 방대한 작품이 나오기 힘들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글과 그 인간에 대한 따스함이 어우러지기 힘들거라는 생각때문이다. 저자가 서문에서도 밝혔다시피 사도 바울이 글을 쓸 때 사용했던 디아트리베라는 수사법을 활용했다고 썼다. 기분 풀이 내지 환담이라는 뜻을 가진 디아트리베는 전문용어가 아닌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표현함으로 독자와의 담화를 이끌어나가는 수법인데, 바로 이것이 이 책의 가치를 입증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저자의 독자에 대한 사랑이자 신의 사랑을 좀 더 널리 알리기 위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종교서적이 늘 어렵게 느껴지고 다가가기 힘들다는 걸 특히나 신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는 더더욱 고심이 되었을 부분인데, 이런 측면에서 권위나 체계를 강조하기 보다 신의 사랑과 동시대의 함께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가 더 생각하는 저자의 깊이를 보면서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그 깊이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소 어렵다고 생각하던 신에 대한 생각 특히나 기독교 관점에서의 신에 대한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 저자에게 감사를 드리며, 그 분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탐구는 추가적인 숙제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첫 주의 신화의 힘과 모든 것이 맥을 함께하는 것 같아서 사부님께서 왜 이렇게 꿈의 레이스의 책들을 선정했는지도 이 저자분에 대해 조사해 보면서 알 수 있었다.

신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없이는 쓸 수 없었을 이 책을 자칫 딱딱한 철학서가 될 수도 있었을 내용을 다양한 문학작품과 해석을 통해서 부드럽게 터치해주신 걸 통해 저자의 지금까지의 고뇌에 대한 깊이를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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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작품]
신(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철학고양이 요루바. 1: 약속
9인 구색 청소년에게 말걸기
설득의 논리학
알도와 떠도는 사원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철학 통조림 3 : 담백한 맛(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 고소한 맛(지식을 위한)(1318 청소년도서관 철학통조림 4)
철학 통조림 1 : 매콤한 맛(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2 : 달콤한 맛(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매콤한 맛(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달콤한 맛(도덕을 위한)
다니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데칼로그(십계명)
영화관 옆 철학카페
알도와 떠도는 사원(상)
알도와 떠도는 사원(하)


[
참고자료]
교보북리뷰 : http://news.kyobobook.co.kr/theme/liveBestView.ink?sntn_id=2735&orderclick=J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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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내게 된 이유는?

제가 지은이의 말에서 밝혔듯이 우리가 서양문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 또는 이해가 지나치게 피상적입니다. 마치 벽에다 수도꼭지를 박아놓고 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그런 현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파편화 된 지식들을 가지고는 어떤 생산적인 사유가 창출되지 못하죠. 그래서 이번에 신에 관한 모든 사유들을 통틀어서 하나로 묶고 그것을 통해 서양문명을 조명해보고 보다 깊은 심층적인 이해를 가능케 하자 이것이 제 뜻이었습니다.
 
보다 깊이 있고 근원적인 서양문명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 김용규 교수는 이라는 코드를 선택한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저자는 신작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통해 신에 대한 개요는 물론 서양문명과의 상관관계, 신과 연관된 서양의 고전들, 예술작품 등을 활용하여 풍부하게 설명한다. 또한 우주론과 진화론, 자연 과학자들의 신에 대한 담론 등 최근의 과학이 바라보는 신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로 신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서양문명에 있어서는 동양에서 도()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심층적이고 근원적인 개념이 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밖에 죄, 구원, 사랑, 은총 이런 것들이 서양에서는 아주 기독교 안에서 기독교를 근거로 하는 서양문명 안에서는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키워드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서양문명을 이해해보자 이런 것이 제 의도죠.
서양문명과 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저자는 신의 이름으로 추구되어온 최고의 가치들의 몰락과 서양문명의 위기, 그리고 그것이 불러온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등과 같은 문제를 짚으며 그에 대한 해법까지 제안한다.
 
방대한 분량의 내용과 두께에 선뜻 책을 집어 들기가 어렵지만 책은 우려만큼 어렵지도 무겁지도 않다. 고상한 전문용어대신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마치 옛이야기를 전하듯 풀어놓는 편안한 글들은 이야기의 흥미를 높인다.
 
윤태진 (교보문고 북뉴스)
taejin107@kyobobook.co.kr, 트위터 @taejin107

존 티한의 저서와 비교하는 컬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10311131733&section=04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책을 읽다 마음에 들어 온 인용문을 인용 페이지와 함께 발췌하여 적을 것 (A4 10페이지 이상)

 

<1부 신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고 신을 아는 것은 오만을 낳는다

신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절망을 낳는다 파스칼, 팡세 (p.20)

파스칼 팡세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구나 다시 되새겨보게 된다. 요즘 자연의 움직임으로 인간의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데 신에게 묻고 싶은 많은 질문들을 하기 전에 파스칼이 던진 내용에 대해서 마음을 들여다 본 후에 그 질문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난 나의 비참함을 알고 있는지 아니면 신을 모르고 있는지 말이다.

 

오직 천재적 재능과 초인적 열정으로 바닥에서 무려 20미터나 높이 붙어 있는, 13.2미터, 길이 41.2미터의 드넓은 천장에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재현했습니다. (p.21)

미켈란젤로는 나와 생일이 같아서 (물론 몇백년의 차이를 두고 있지만) 예전부터 더욱 관심이 많았던 예술가이다. 물론 유럽 배낭여행시에도 천지창조 그림 앞에서 넋을 잃고서 한 참을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했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마음은 많았지만 제대로 그 그림이나 미켈란젤로 그리고 역사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었기 때문에 빙산의 일각만 느끼고 돌아왔지만 가사를 모르는 외국곡이라도 아름다운 노래에서는 그저 감동이 느껴지는 것처럼 무언가 찡한 감동이 있는 그림이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천재적 재능이라는 말과 초인적 열정이라는 말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한 작품이였다. 어쩌면 신이 있다면 미켈란젤로의 육체를 빌어 그리신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기분이였다. 작가가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1부 주제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로 시작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고대 예술이 이룩한 기적이라고 극찬한 <벨베데레의 아폰론>이 자웅을 겨룰 수 있겠지요.

그의 육체는 모든 현실성을 초월하여 숭고하고,

그의 자세는 내부에 흐르는 위대함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며

그의 발걸음은 경쾌한 바람의 날개를 갖고 있다

영원한 봄이 매력으로 가득 찬 남성의 육체에

감미로운 청춘의 옷을 입혀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다. (p.23~24)


르네상스의 거장은 이처럼 육감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땅의 것과 하늘의 것,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을 한데 아울러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미를 표현해 냈습니다. 어느 때 누가 신과 인간의 만남을 이보다 더 극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했겠어요! (p.26)
르네상스와 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아름답게 풀어나가다니, 예술을 통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참 좋은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 그들에게 신은 영입니다.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또는 숨결과 어원이 같아요. 그래서 독일의 현대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신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고 늙은이나 젊은이도 아닙니다. 도무지 어떤 감각적 형상도 갖고 있지 않지요. (p.27)
우리는 실체적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하는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생텍쥐베리도 어린왕자를 통해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우매함을 거울처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였을런지요. 신의 형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그려내려고 하는 그것이 인자한 할아버지 혹은 남자로 그려지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예전부터 왜 그래야 하나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렇게 한 마디로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라고 얘기하니 흥미로운 생각이 듭니다. 보이지않는 신을 믿게하려니 절실한 자에게만 그 분이 보이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고 또 느끼는 것이니까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또는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이로 표현됩니다. (p.28)

아마도
밝혀지는 것이 옳지 못할 다른 세계의 비밀을
어이 말하리오. 그러나 그대에게는
 가능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 가잦ㅇ 잘 표현될 수 있도록,
영적인 것을 육체적인 형태에 비유하여
묘사하겠노라 (p.31)

사람이란 항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법입니다. 밀턴의 사려 깊은 경고는 사실상 무시되었고, 그의 탁월한 묘사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신을 의인화하는 데 뚜렷한 공헌을 하고 말았습니다. (p.31)
음악 Danse of the Blessed spirit을 들으면서 이 구절을 읽다.
신은 축복받은 영혼들의 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네 음울한 자만에 가장 합당한 형벌은
오직 너 자신의 분노이리라 (p.35)

당신도 알다시피, 르네상스란 '재탄생' 또는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의 재탄생이고 부활이란 말일까요? 그것은 신 중심의 중세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양식이 드러내는 특징이지요. (p.35~36)
이들에게 신은 인간을 이상화하거나 그 능력을 극대화한 존재라고 생각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을 닮고싶은 인간들의 욕망을 예술을 빌어서 표현하고 그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인본주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중세시대 죽어 있던 인간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에서는 아름다운 전환이였으나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제대로 신이 표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었을 것 같다. 그 균형점이 어디인지는 더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지요.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제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p.37)

미켈란젤로가 얼마나 그리스 정신에 충실했는지는 그의 그림 <천지창조>가 그리스인들의 신화가 아닌, 히브리인들의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p.39)

이데아의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이데아의 미란 가시적 자연이 아니라 가지적 인간정신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지요. 빙켈만의 뛰어난 표현을 빌리자면 '오성에 새겨진 정신적 자연'에서 나오는 미를 말합니다. (p.41)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p.43)
서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의 철학은 기독교적인 삼위일체와 이데아에 기반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로스라는 것 플라토닉 러브라는 것도 이 철학자의 생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예술작품과 서양인들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이데아적인 생각을 필히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오직 하나의 신을 믿습니다. 유일하고 영원한 그분은
사랑과 소망을 통해 모든 천체를 움직이시되
당신 스스로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p.51)

그렇다면 신은 어떻게 생겼고 도대체 무엇인가? 신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모르고야 설사 그가 항상 우리와 함께한다고 해도 어찌 알아볼 수 있으며, 신이 무엇이거나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야 어떻게 그를 믿고 의지할 수 있겠는가? (p.55)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늘 이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시간을 내주길 바라는 분들을 많이 뵙게 되는데 사실상 그것을 전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신은 우매한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마음이 열려야만 즉 신념을 통해서만이 만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늘 갸우뚱하게 되는 건 바로 이 이성과 신앙 그 양극을 종합하는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신은 모든 존재물이 존재하는 바탕입니다. 즉 모든 존재물은 신이라는 존재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아 존재하지요. 신은 존재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은 우주마저 자기 안에 포괄하며, 무소부재하고, 신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은 유일자다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또한 자신의 내적 법칙인 '말씀'에 의해 모든 존재물을 창조하지요. (p.56)
바로 로고스.. 말씀에서 시작되고 있는 창조론인 것이지요. 물질이 아닌 말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더 생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존재와 인격 사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일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p.57)
신화의 힘에서 인용되었던 문장과 오버랩되는 부분인 것 같다. 부활의 의미 말이다. 혼이 없는 씨앗은 열매 맺지 못하고 곧 생명의 숨결은 신의 말씀을 통해서 그 안에 신이 깃들때에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 비기독교인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난해할 수도 또 그 언어 차용에 대해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현상을 두고 볼 때에는 용어의 차이가 있다 뿐 내게는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마치 어떤 종교에서는 사랑을 기반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신이 곧 존재라는 가르침에서 신을 떠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상실, 곧 사망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단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일 뿐이지요. 신은 영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은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킨 겁니다. 이처럼 성서는 낙원 추방의 서사에서부터 존재론적 함축성을 이미 내포한 것이지요. (p.59)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같지 않기도 하고, 게다가 그 관계도 분명치는 않으니까요. '알면 믿는다'는 입장도 있고 '믿으면 안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당연히 후자를 견지합니다만, 이 문제는 차치해 두고 일단 알아봅시다. (p.65)

<2부 신은 존재다>

있는 자라는 이 명칭은 신의 가장 고유한 이름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신을 존재 자체라고 인식하는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통해서 신은 제자리를 찾는듯이 보인다. 적어도 인간과 동격이 아니라 그저 있는자라고 표현되고 있으니 말이다. 신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부터가 벌써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 보다 그 있음에 더 주목하고 그 있음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지요. (p.84)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p.85)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p.85~86)
난 왜 이 문장을 읽는데 장자의 도덕경 첫구절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보면 결국 이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도나 신이나 같은 개념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는 말이 없나보다.. 진정으로 신을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자면 그저 침묵하게 되는가 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는 아페이론은 그것이 아무리 광대무변한 신적인 것이라 할지라도-마치 오늘날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소립자의 장'이 그렇듯이-형태만 없을 뿐 어디까지나 '존재물'이며, 다분히 자연학적 개념이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형이상학으로 끌어올려 '존재'라고 이름 붙인 사람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는 비물질적 무한자이자 유일자였지요. (p.88)

존재는 생성되지 않고 소멸되지 않으며
온전한 일자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게 될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있으며,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p.88)

어쩌면 이런 현상이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건 우리로서는 영원히 뛰어넘기 어려운 벽인지도 몰라요.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라는 질송의 말처럼, 보이지 않고 사고할 수도 없으며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의 이성은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p.97)

소박하게 생각하자면 다양한 모든 존재물이 근원적으로 가진 공통요소가, '있음' 곧 그것의 '존재'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생각이 서양철학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지요.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본적 두 주제인 '본질'과 '존재'중 하나인 존재를 간파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형이상학으로 단번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 결과 만물의 근거를 탐구하던 아르케에 대한 물음이 자연철학에서 존재론으로 도약했지요. (p.104)

만일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 어떤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 자체를 부분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어느 것 때문도 아니라네. 또한 모든 것이 다 그렇다고 나는 말하겠네 (p.111)

사실상 이데아는 만물이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 곧 플라톤이 나중에 <티마이오스>에서 언급한 -창조주인 셈이지요 (p111)
이토록 플라톤과 서양철학은 얼마나 깊이 있게 연결되어 있는지요. 

영혼은 '현실화의 원리'이긴 해도, 자기 손으로 또는 도구를 갖고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물질세계를 만드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은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 무엇을 생산해 내는 매우 특별한 방식을 취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내막은 이렇지요. 물질세계를 생산해 낼 때, 영혼은 정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들이 물질 안에서 가시적 형태로 스스로 만들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영혼이 하는 일은 물질이 형상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종의 촉매 작용입니다. 이를 플로티노스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따라서 만약 영혼이 어떤 행위가 아니고 합리적 원리라면 그것은 '성찰'이다' (p.136)

최고의 본질(신)이 어떤 시간과 장소에도 항상 존재하면서, 동시에 어떤 시간과 장소 안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 그것이 모든 시공 안에 존재하면서 어떤 시고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제기된 반론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p.165)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은 내가 명확히 아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p.230)
사실 수많은 말을 통해서도 어떤 한 사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위의 이야기를 보면서 전 또 불교에서의 선문답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것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종교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하나의 틀이 패러다임이 머리속에 있는 경우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과학적인것이든 어떠한 틀이던 상관없이 사람들은 그 틀에 자신의 앞에 놓인 의구점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래서 그러한 틀을 벗고서 이러한 담론들을 대하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무엇이라고 규정하고 이름지으면 벌써 그 순간 그 이름을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 풀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부한 어둠이 있다>
(p.235)
어떠한 빛, 어떠한 어둠.. 
깨달음 역시 그 존재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 
믿음이 주는 평화. 
이 모든 것이 신을 있게하고 
그 존재안에서 편안함을 얻고자하는 인간들에게는 
구원이 아닐까?

<3
부 신은 창조주다>

자연에 나타난 신의 계시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와는 다른 또 하나의 구원 방법으로 여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종교개혁자 칼빈처럼 자연을 하나님의 영광르 위한 무대이자 하나님을 발견하는 장소로서 이해했음은 분명하지요.(p.271)
그래서 요즘 자연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신보다는 돈이 더 우선이고 자본주의라는 사회속에서 그 응답이 돈이 더 즉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일본의 지각변동과 같이 엄청난 자연 재해 앞에서면 우리는 다시금 신을 찾고 종교를 찾게된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 어마어마함을 자연앞에설때에 비로소 우리는 신을 떠올리게 되니까 말이다.

'어느 특이하고도 영광스러운 순간에' 급기야 대폭발을 했습니다. 말그래도 '빅뱅'이었지요. 하지만 이 폭발은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는 폭발과는 전혀 다릅니다. 엄청난 규모로 동심원을 그리며 진행된 갑작스럽고 광대한 팽창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팽창이 텅 비어 있던 어두운 공간을 뭔가가 순식간에 채워나간 것은 아닙니다. 아직 공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또 이런 특이점이 '언제' 존재했느냐고도 물어볼 수 없습니다. 아직 시간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무에 가까운 특이점 밖에는 공간도 시간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주는 그야말로 무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p.284)
빅뱅을 끌어들여서 설명한 경우, 물리학을 통해서 신을 이야기 하다니 대단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분야를 다윈의 진화론과 빅뱅과 함께 거론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매우 열린 사고이자 비기독교인들에게 다가가는데 더 수월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주가 어떤 특이한 한순간에 탄생했고 지금도 무서운 속도로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지요. (p.289)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이야기..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는데
신의 존재는 그 창조의 끝을 어디에 두고 계실런지
요즘 자연의 분노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원하는 것을 얻은들 소득이 무엇이랴
그것은 꿈이요, 한순간의 입김이다.
덧없는 쾌락의 거품일 뿐
누가 일주일의 고통을 주고 한순간의 환락을 사랴
장난감 하나를 얻고자 영원을 팔아?
달콤한 포도 한 알을 얻기 위하여
덩굴을 모두 망칠 자가 누구랴
어떤 어리석은 거지가
당장 왕홀에 맞아 죽을 텐데 왕관을 만지겠는가
(p.339)
부처가 왕궁을 빠져나올 때의 심정도 이러했을까요?
한낱 헛된 꿈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그 자비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행동들이 지금 이 지상에서도 
너무나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다. 

역시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아우구스티누스가 밝힌 대로-창조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 어떤 신비롭고 거룩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서의 여섯 날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6일과는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p.377)
여기서부터 헤매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들의 언어로 그 종교를 이해하는 것. 
아마도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해서 잘못 신을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반야심경을 잘못외우는 노파도 그 마음이 지극하여 깨달음에 이르듯이 그 믿음이 이해를 앞선다는 생각이 든다. 신념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자족하는 신이 왜 세계를 창조했는가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입니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p400)

한마디로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특별한 목적에 따라 이끌어 가는 신은 -니체의 말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지요. (p.405)
신의 비 목적성에 대해서 재미있게 해석을 해 준 것 같다. 늘 목적이 있으면 언제든 그 목적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지는 것은 당연할 진저.. 이러한 패러다임을 깨버리는 이야기들.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기독교가 이미 오래전부터 확보했다는 것과, 약간의 장애물만 제거하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p.457)
진화론과 신의 진화를 서로 다른 언어놀이로 풀어낸 저자의 해석이 재미있다. 

<4
부 신은 인격적이다>

가장 비참한 비극은 신의 섭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요
가장 큰 축복은 이 신의 섭리를 인식하는 것이다-요한 칼빈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다음으로는 예술을 사랑했다.
 나는 삶의 모닥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
 이제 그 불길이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p.498)
 아..이 책속에서는 정말이지 수많은 철학자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답게 죽음을 이야기하다니,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는 또 한 사람으로서 
 이 시는 정말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 있으며, 아무도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지요 (p.500)

세네카가 '운명'이라고도 부른 스토아 철학적 섭리는 그야말로 우주적 보편성을 갖고 있어서 어떤 것이든 그 직접적 인과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질서이기 때문이지요. (p.523)

신교와 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신학은 마르틴 루터가 한마디로 선언했듯이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간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지요. 왜냐고요? 일찍이 히포이 감독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포한 것처럼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라는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네카가 로마 광장에서 '인간의 이성과 도덕에 의한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있을 때, 바울은 아테네 거리에서 '신의 섭리와 은총에 의한 구원의 길'을 선포했다는 이야기지요. (p.544)
결국 신은 구원의 존재라는 것. 그 점이 더욱 중요해진다. 신념안에서는. 

뮈세에게는 비참하고 유치한 계산, 그렇듯 많은 헛된 작업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 '무한한 자기체념'이지요. 키르케고르는 <공포와 전율>에서 이처럼 '무한한 자기체념'을 통해 <종교적 단계>에  섰던-맨 처음이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아브라함을 내세웠습니다. (p.594)
윤리적 단계의 영웅과 종교적 단계의 인간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조금 더 기독교에서 생각하고 있는 무한한 자기 체념과 불교에서의 하심이 닮아 있다는 하지만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결국 버리고 다시 태어나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 과정에서의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다른지는 조금 더 공부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어떤 자는 자신의 힘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자신의 지혜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자신의 소망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자신의 사랑 때문에 위대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누구보다도 위대했다. 무력(無力)이 본질인 그의 힘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 광기의 모습을 빌린 그의 소망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한 사랑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p.606)
자꾸만 신의 이야기에서 불교가 보인다. 자신을 놓아버릴 때에 비로소 본래면목과 마주할 수 있다는 그 말과 무력으로 장자의 무위로 이 세상의 도를 신을 마주한다는 것이 닮아 있다. 함이 있는 것에서는 결국 하지 않음이 발생하고 내가 존재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이 있다. 신은 그것을 넘어선 곳에 계시다는 것. 이성으로서 말해지기 힘든 존재이자 인격체.

헤르만헤세의 <기도>

주여, 나로 하여금 나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그러나 당신에게는 절망하지 말게 하소서. 
혼미한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소서. 
모든 고뇌의 불꽃을 핥게 하소서. 
모든 부끄러움과 욕됨을 맛보게 하시고 
내가 나 자신을 가누는 것을 돕지 마옵시며 
내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살피지 마옵소서. 
그러나 나의 모든 자아가 파괴되었을 때는 
당신이 그것을 파괴하셨고
당신이 불꽃과 고뇌를 낳으신 사실을 
나에게 가르치소서. 
왜냐하면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 
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
오직 당신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p.611)
 


<5
부 신은 유일자다>

만물의 궁극적 근거는 오직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지요. 둘만 되어도 그 둘의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다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p.627)

이데아는 자기 자신을 사물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다수의 사물이 존재하게 하므로 단일할 수가 없지요. 예컨대 아름다움의 이제아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사물에게 자신을 나누어 주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모든 이데아 중 가장 단순한 것조차 하나가 아닐 뿐더러 사실상 무한한 다수성을 포함한다는 점이 나타난다.'라는 질송의 말이 그래서 나왔지요. (p.627)
여기서 플라톤은 철학에 머물고 기독교는 종교가 되는 차이가 생기는 접점인 것도 같다.

일자는 어떤 존재하는 사물일 수 없으며 모든 존재자에 우선한다 라며 일자가 어떤 것 하나 즉 그 어떤 존재물 가운데 하나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p.639)

성부, 성자, 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신의 본질인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본받으라는 계명을 받았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입니다. (p.719)
요즘 사회학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이슈가 많이 떠오르고 있는데 어쩌면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기독교인에게는 쉬울 수 있을지 모르는 이야기이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움 개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리부터 다시 하나하나 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으로 실존하는 인간 공동체가 쉬이 상상이 가나요? 그곳에는 당연히 그 어떤 배타적 요소나 위계적 지배 그리고 특권에 의한 종속이 없으며, 오직 사랑에서 나온 평등한 사귐과 자유로운 교제만 존재하지요. 그래서 구성원 모두가 기쁨뿐 아니라 슬픔도, 희망뿐 아니라 절망도, 삶뿐 아니라 죽음도 함께 느끼고 함께 나누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이런 공동체를 실제로 봤거나 경험한 적이 있던가요? (p.729)
사실 기독교가 가장 어려웠던 이유중 하나는 바로 이 유일자에 대한 개념 때문이였는데 이 저서에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그 유일자에 대한 개념을 풀어내고 있는듯하여서 늘 불편했던 한 부분이 편안하게 넘겨지는 것 같았다. 저자는 위와같이 행복한 공동체를 이야기하지만 늘 내가 대했던 기독교의 모습은 배타적이고 그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 혹은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이 계시다면 늘, 이런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해왔었고, 이 책에서 저자의 질문제기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은 '동일한 하나'가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라는 말인데요. 이 같은 내용이 우리가 나누는 이 이야기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이 장의 서두에서 '신의 유일성이 곧 배타성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 이후 지금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무엇인가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자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p.732)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다. 우리가 신을 믿고 또 종교를 갖어야 하는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
맺음말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p.810)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인들 저곳인들 어떠리. 
오늘 복 받은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니라. 
천 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없이 (p.811)
 

            

 

 

3. 내가 저자라면 자신이 이 책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고,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그리고 보완점을 평설할 것 (1페이지)


난 항상 책을 펼치면 목차부터 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책의 뼈대가 보이기 때문에 향후 책의 본문을 통해 살들을 붙여서 이해할시에 좀 더 흔들리지 않고서 그 문맥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목차를 펼쳤을 때에 바로 이해가 되지는 않는 조금 어려운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일수도 있겠고, 이 신을 풀이한 언어들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하나로 꿰어지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친절하고도 쉬운 언어가 큰 도움이 되었고, 평상시에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을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에 대해서 희열마저 있었던 것 같다. 늘 기독교에 대해서 아쉬웠던 유일성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나 감동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이렇게 기독교를 이해할 수도 있었구나 잘못 믿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정보를 내가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구성적으로 보면 서문에서 친절하게 그 구성에 대한 의미와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해 주어서 그 맥을 짚어가는데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천지창조에서 시작해서 최후의 심판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에 있어서는 저자가 쉽게 다가가되 그 구성에 있어서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다양한 인문학을 다루고 있는데, 아쉬운 것은 인문학에서 나아가 음악이라던가 미술 작품도 함께(군데 군데 포함해서 이야기가 되고는 있지만) 다루어졌다면 더더욱 풍성한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어떤 책을 쓸 때에 배경음악을 신중하게 선택해서 듣고 그 작품이 탄생하고 나서는 그 음악을 저서에 적어주기도 한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바로크 시대의 클래식 특히 바흐를 즐겨서 들었는데, 이상하게 신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향후 더 기대를 해본다면 다양한 예술 작품 속의 신들에 대한 작품을 연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음악 속에서의 신의 모습의 변화라던가 미술 작품 속에서의 변화등.. 이 작품에서도 시간과 속에서 혹은 시간과 더불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데 신과 인간의 창조물인 예술을 엮어서 다루어본다면 더더욱 흥미롭고 또 더 다가가기 쉬운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지금의 논리적인 내용들을 디아트리베 수사법으로 철학을 뼈대로 군데 군데 미술과 문학 작품을 응용했다고 한다면 좀 더 살을 붙여서 철학적인 논리성을 뼈대로 한 채로 그 위에 살과 옷을 더 입힌다면 우매한 대중들이 좀 더 신을 느끼고 또 보고, 역사속에서 읽혀져 내려온 그리고 앞으로 우리들에게 신의 의미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비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자칫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고 그 자체에 대한 것 보다 '신'을 통해서 삶의 방향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 맺음말에 언급하셨던 새로운 종합에 대해서 결론 부분에서 더 많이 다루어주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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