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레몬
  • 조회 수 4412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2년 2월 26일 09시 41분 등록

깊은 인생

 

1.저자에 대하여

 

<8기 예비 연구원 과제물 품질 유감>

“대략 과제물 올린 것을 보았는데, 이 수준으로는 8기 연구원으로 뽑힐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제를 올린 게시판에 느닷없이 “그 분”의 경고글이 올라왔다. 음 뭐지? 누가 뭘 잘못했나? 나는 예비연구원들이 올린 글을 주욱 훑어보았다. 뭔가 잘못한 사람이 많은 것 같군.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나를 빼곤 모두가 양식이 틀렸군. 그렇다면, 결국 나만 양식이 틀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구나.

 

“... ...(아)”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기도가 콱 막혔다(아, 나는 진짜 왜 또 이런거야!!!). 이 정도면 지뢰를 터뜨린 셈이다. 나는, 정녕 이것으로 끝인가?

 

순간, <하버드 법대의 공부벌레들>의 킹스필드 교수가 떠올랐다. 그가 다른 150명의 우수한 학생들로 들어찬 교실에서 한 남학생에게 동전 10센트를 주는 바로 그 광경이다.

“가서 자네 어머니께 전화하게. 자네는 절대 변호사가 못 될 거라고 말이야.”

남학생은 망연자실하여 동전을 받아들고 축 쳐진 어깨로 흐느끼며 강의실 문을 나선다. 300개의 눈이 고개는 그대로인 채, 일제히 그의 뒤통수를 따라간다. 그 순간, 이판사판에 꼭지가 돈 남학생이 소리를 지른다.

“킹스필드 이 개자식아!”

 

그러자 킹스필드 교수는 어떻게 했을까?

“자네가 처음으로 말 같은 말을 했군.”

그는 이렇게 말하곤 남학생에게 다시 와서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너무 속단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언급하여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진짜다).

 

그 후, 나는 “내쳐졌던 강의실에 다시 앉기 위해” 자판을 휘몰아치듯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아침 11시 경이 되자, 책상에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30분 정도 눈을 붙인 것을 제외하면 그냥 깨어 있었다. 그렇게 글을 수정하고, 급한 마음에 퇴고도 없이 글을 올리고, 잠이 올 때까지 게시판에 올린 글을 읽고 또 읽으면서(내 글의 조횟수를 내 스스로 올려놓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아, 정말 킹스필드 쫓아내지 말아요... 착잡하고 동시에 후련한 마블링 같은 감정. 정녕 토할 것 같았다. 도대체 난 왜 이렇게 된 걸까?

 

나는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예비 8기 연구원이다. 집안의 경사로서 1차 경선을 통과했고 앞으로 2차, 3차를 남겨두고 있다. 만 30년 가까이 살아오는 동안, 건어물처럼 비루하게 말라가던 한 영혼을 “게솔린” 같이 타오르게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그도 그럴 것이 다음 경선의 주제는 다름 아닌 구본형 자신의 저서, <깊은 인생>이다. 연구원들은 모두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 알아가야 한다. 그것도 빠삭하게. 그렇다면, 킹스필드의 동전을 받은 애증의 제자로서 오기가 발동할 만하다. 예전에 들었던 의료 경영 컨설팅 수업 내용이 생각났다. 병원 진료에 불만을 품은 한 환자가 커뮤니티에 남긴 한 줄기 댓글.

 

“그 의사 선생님, OO 아파트 202호에 살아요.”

 

그래, 그렇다면... 나도 구글링으로 저자의 모든 것을 파헤쳐주마. 나의 의욕은 이상한 동기에 의해 이글이글 타올랐다. 나는 우선 작가 구본형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저서 <깊은 인생>을 포함하여 저서 전체의 목록을 정리해보기로 하였다.

 

<저서>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전문가가 뽑은 ‘90년대의 책 100선’에 선정

1999 낯선 곳에서의 아침

2000 월드클래스를 향하여 - IBM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경영심사관으로 일했던 경험과 노하우를 정리하여 경영 평가 모델을 변용해낸 책, IBM을 떠나면서 이 책을 본인에게 선물.

떠남과 만남

200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 동아일보가 뽑은 ‘2001년 전반기 읽어야 할 책 10선’

- 중앙일보 선정 ‘2001년 좋은 책 100선’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 ‘2004년 리드앤리더 자문위원단이 뽑은 국내외 ’비즈

니스 명저 40‘에 선정

- 영역본, 일역본 출간

2002 사자같이 젊은 놈들

2003 내가 직업이다

2004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일상의 황홀

2005 코리아니티

2006 공익을 경영하라

2007 사람에게서 구하라

2008 세월이 젊음에게

2009 더 보스 - 쿨한 동행

2010 필살기

2011 깊은 인생

 

13년 동안 17권의 책을 쓴 그는 확실히 다작가이다. 수학자 폴 에어디시는 논문의 양이 곧 질과 비례한다는 말을 남겼다. 많이 쓸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질을 보증한다는 의미이다. 성실함의 반증이기도 하거니와, 책의 경우에는 전작의 시장성이 증명되어야만 다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공병호(공교롭게도 이니셜도 동일하다.)와 주로 비교되곤 한다. 두 사람은 경영 혁신의 대상 연령이 약간 다르다. 공병호는 청소년과 대학생 위주이며, 구본형은 성인과 직장인이 대상이다. 공병호가 유년기의 자기개발에 더 집중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천적 재능의 계발방향을 염두해 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천재성의 선청성과 후천성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을 논설한 후, 자신의 의견은 ‘재능과 노력이 합쳐질 때 최대의 성과가 난다’는 논지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나 구본형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인생 중반기의 돈오 및 반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인의 자기개발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즉, 천재성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재능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그나마 좀 나은 평범한 재능을 갈고 닦는 그 “노력 자체”가 재능이라는 것이다. 보다 더 희망적이며 더 긴 안목으로 인생을 보는 셈이다.

구본형은 경영학과 인문학을 통합하는 저술 활동을 많이 해왔다. 최근에 <구본형의 필살기>라는 저서를 통해, 지금까지의 저서를 종합하여 매뉴얼화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저서의 기본은 인문학에 있다. 이는 그가 역사학을 전공하였고 역사학 교수인 은사를 깊이 존경하고 그에게서 받은 가르침의 영향이 컸음을 의미한다. 또한, 구본형은 <깊은 인인생>에서 언급한 마거렛 미드의 저서의 특징에서 저술 방식의 아이디어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거릿 미드는 <사모아인의 성년>에서 기존의 학술서의 딱딱함을 철저히 배재한 쉽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존 학문의 권위와 합리성, 과학지상주의가 반드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감동시키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저자도 깨달았을 것이다. 덕분에 구본형의 <깊은 인생>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책이 그저 쉽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책은 얇고 작은 편이지만 신중하게 고른 구절과 시적 표현들을 하나하나 음미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는 속도가 병목 현상에 걸린 자동차 마냥 느려질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속도에 적응하기가 힘들지만, 이내 순응한 후에는 강호한정의 배 위에서 신령스런 경치를 감상하듯이 인문학과 경영학의 통섭 - 그 경계의 흐드러짐 - 안에서 영감에 흠뻑 취할 수 있다.

 

저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구본형이 자신의 저서에서 말한 인생의 4분기에 맞춰 그의 연대기를 정리해보았다.

 

<구본형의 연대기>

 

<1> 학생 시절

1954년 1월 15일,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서강대학교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역사학 교수가 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은사의 조언으로 다른 분야의 지평에 도전해보기 하고 동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였다.

 

<2> 직장 시절

1980년(26, 괄호 안 숫자는 만 나이)에 한국 IBM에 입사하여 2000년까지 21년 간 근무하였다. 1985년(31)부터 1991년(37)까지 한국 IBM 경영혁신 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순리에 맞게 승진 가도를 평탄히 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꽤 만족도가 있는 일을 하였으나 11년 차에 접어들 무렵 매너리즘에 빠져들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3> 불만 시절, 영광 시절

1. 그늘 체험

구본형은 1991년(37)부터는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격동하는 국제적 경영과 혁신의 바다에서 그저 관찰자 역할에 머무는 며칠을 경험하고 전에 없이 침전하였다. 그 경험을 “간디가 견뎌야 했던 춥고 어두운 마리츠버그”와 같이 받아들인 그는, 덕분에 밥벌이를 위한 회사원이 아닌 “변화경영전문가”로서의 비전을 품게 되었다.

 

2. 침묵의 10년

놀랍게도 비전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 후로 1년 만인 1992년(38), 구본형은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제1회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상을 수상하였다. 그늘 체험의 1991년부터 회사를 나온 2000년까지 10년 간, 구본형은 비전에 심취하여 묵묵한 열정으로 매진하였다. 그는 이 시기를 “침묵의 10년”이라고 명명한다.

 

3. 인생의 분기점

1997년(43)에 그는 회사의 양해 하에 1달 동안 단식을 강행하였다. 밥을 벌어와 입으로 먹는 행위의 굴레에서 한 번쯤은 탈출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단식 일주일 째 배고픔의 본능과 무모한 전쟁 중에 불현듯, 자기 존재의 허망함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서는 이에 항변하듯 외침이 들려왔고, 그 외침은 글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6개월 후 그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완성하였다. 구본형은 이날 아침이 자기 인생의 분기점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는 1997년 그날 이후 새벽 4시에 일어나 매일 아침 두세 시간씩 글을 써오고 있다.

 

4. 1인 기업 창업

2000년(46) 3월 회사에서 독립하여 ‘1인 기업’을 창업하였다. 1인 기업에 대한 아이디어의 창시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개념을 시초부터 발전시키고 현실화한 것은 구본형의 역할이 컸다. 그 후 4년간, 그의 말대로 소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력”하였다. 자유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면 그것으로 족한 삶이었다. 구본형은 40대의 10년은 본인의 돈오와 발전을 위해 썼다면, 50대의 10년은 이보다 확장하여 남을 위해 투자하기로 하였다. 40대의 10년은 자기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50대의 10년은 남을 위한 것으로 삼기로 하였다.

 

5.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설립

구본형은 쉰살이 되던 해(2002년, 한국 나이 50)의 아침해를 눈동자의 기억으로 새기고 있다. 그는 새로운 10년의 계획과 비전을 세웠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2002년에 바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설립하였다. 이는 구본형 자신이 제시한 10년 단위 비전 설정을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인생에 적용한 것이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는 “어제보다 아름다워 지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 이끌어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로 지식을 가치 수단으로 주고 받고 공유하면서 서로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대학원 프로그램이라 볼 수 있다. 2012년 현재 제8회 연구원을 선발 중이다. 그의 구체적인 비전은, 10년 동안 100명의 변화 경영 연구원을 키우고, 500명의 꿈벗 커뮤니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의 비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시처럼 사는 법”을 각자 깨칠 수 있도록 함께 돕는 것이다.

 

2005년(51)에 삼성 SDS e캠퍼스로부터 3000명의 강사 중 최고의 강사로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 KBS 라디오에서 ‘구본형의 성공시대’ 12부작 드라마를 제작하여 방송하였다.

 

6. 작가의 자아정체성 확립

그는 자신이 글을 쓰기 시작한 1997년부터 작가라는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인정하는데 10년의 시간(2007년, 53세)이 걸렸다고 회고한다. 그는 1997년부터 2011년까지 13년 간, 17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7. 변화경영사상가

2010년(56) 이후부터 스스로 “변화경영사상가”로 부르고 있으며, 변화 경영을 사상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연대기는 생각보다 한 번에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었다. 작가 본인이 경영가 답게 확실한 인생관이 시기별로 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대기는 이력서와 같은 것이어서 정리된 자료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진위가 있다. 빌게이츠는 최근까지도 자신의 이력서 대학졸업이라는 말을 넣지 못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내가 그의 일대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부분은 바로, “단식” 부분이다. 나는 그의 아이디어가 무척 창조적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입으로 상징되는 밥벌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생. 그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가장 적나라한 시도가 아니던가! 굶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신체적 결핍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은 가장 굴욕적이다. 단 한번의 반전 없이 몸이 정신을 이기기 때문이다. 지독한 패배감에 젖어드는 트라우마가 반복되면 그 패배의 지겨움에 익숙해져 결국 코끼리의 족쇄로 불리는 학습 무기력에 갇히고 만다. 구본형은 바로 그 족쇄를 깨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곧 심신이 허약해졌다. 겨우 버티는 새벽에 그는 정신이 몸을 따라 쇄락해감을 느꼈다.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자신의 인생과 미래에 대한 빈곤 망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망상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저항하라고 외쳤고 그에게 글이라는 무기를 쥐어준 것이다.

 

나는 이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 현시대의 가장 유명한 글로벌 베스트셀럴인 <해리포터>의 저자 조앤 롤링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녀가 <해리포터>를 쓰기 시작할 때, 그녀는 생활보호수급자였으며, 무직이었고, 아이가 딸린 이혼녀였다. 그녀는 철저히 인생의 패배자였다. 그녀는 하버드 졸업 축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 인생의 최저 밑바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매진할 수 있었다.”

 

나는 구본형과 조앤 롤링의 기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바닥 확인하기” 과정이다.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아는 것이다. 나는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몹시 원하던 직업 진로가 있었으나 철저하게 실패하고 무직의 세상으로 나가떨어졌다. 그 곳은 찬 바닥이었는데, 그 바닥은 상상보다 절망적이지 않았다. 내내 좌절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며 나름 악을 쓰고 고군분투를 하고 나니, 그 좌절이 현실이 되었을 때는 오히려 덤덤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철푸덕 뺨이 바닥에 끌리는데 의외로 시원하고 두개골이 울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유쾌한 타락이랄까. 그 후, 여행을 하고 남들이 보기에 턱없이 초라한 아르바이트들을 재미있게 다녔다.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들꽃같이 아름답고 곡매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인생의 다른 문을 연 듯 했다. 가장 큰 의의는, 나는 이제 내 바닥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나는 내 바닥의 실체를 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주 죽을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정말 안심이 되었다.

그러자 진로에 대해 용기가 생겼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진로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 결과에 대해 전혀 두렵지 않다. 그 곳은 분명 나에게 발전과 비전이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길을 사랑한다.

 

나는 구본형이 50대의 문지방에서 세운 비전의 최대 수혜자이다. 경연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나는 1차 합격 통지를 받던 그 순간,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준 이 혁신가에게 의리를 결심하였다. “다른 이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더욱 즐거운 일이다.”라고 <마지막 수업>의 랜디 포시는 말하였다. 그는 이매지니어링이라는 수업을 개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새로운 꿈의 지평을 열어준 후, 꽃같이 떠났다. 나는 구본형에게서 배울 점은 경영과 혁신 이전에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철학대로, 최대한 그에게서 배워서 그처럼 사회에 헌신하고 싶다.

 

그러니, 10센트는 사양하겠다.

 

 

 

 

 

 

 

 

 

 

 

 

 

<보다 자세한 관련 서적 목차>

 

1997년 3월 미래 예측, 배리 하워드 민킨(지은이), 구본형(옮긴이)

1998년 4월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전문가가 뽑은 ‘90년대의 책 100선’에 선정

1999년 2월 낯선 곳에서의 아침

2000년 3월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7월 떠남과 만남

2001년 4월 책방에 나온 사보 - 구본형, 김윤정, 강신, 고상준(엮은이)

12월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양장본

12월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12월 For a Dazzling Day(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12월 낯선 곳에서의 아침 - 양장본

2002년 1월 今日を光り輝く一日とするために(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 일역본

5월 사자같이 젊은 놈들

2003년 3월 내가 직업이다

3월 상상 -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 구본형 등

2004년 3월 나, 구본형의 변화 이야기

11월 구본형 일상의 황홀

2005년 1월 생활 속의 명상

2005년 6월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2006년 2월 공익을 경영하라

2007년 2월 사람에게서 구하라

2월 코리아니티

2월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2월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 구본형의 하루 경영 9가지 법칙, 개정판

8월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 - 구본형, 오세나, 홍승완

12월 낯선 곳에서의 아침 - 신판

12월 익숙한 것과의 결별 - 신판

2008년 3월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2008년 4월 세월이 젊음에게

2008년 4월 떠남과 만남

2008년 4월 다름의 아름다움

2008년 10월 생활 속의 명상

2009년 1월 구본형의 The Boss

2009년 5월 시야, 너는 참 아름답구나

2009년 12월 구본형 아저씨, 착한 돈이 뭐예요? - 구본형, 홍승완, 류춘희, 최정희(지은이)

2010년 1월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웨인 W.다이어, 책에 <구본형의 노자 읽기> 10편 수록

2010년 3월 구본형의 필살기

2010년 4월 글로벌 시대 자신만의 스펙을 디자인하라

2010년 8월 회사가 나를 미치게 할 때 알아야 할 31가지

2011년 4월 깊은 인생

2011년 12월 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 - 일곱개의 청춘 이야기 - <사자같은 젊은 놈들>의 개정판

 

 

 

 

 

 

 

깊은 인생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지난 번 제출한 과제를 재독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은 읽은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본다는 것이다. 내가 평생 읽어온 책의 분량은 형편없었다. 그나마 모두 과학서적이었기에 그 어떤 과제를 들이밀어도 과학으로 풀어버리는 신기하지만 정도가 심한 편중 현상이 보였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나는 비록 한국어가 모국어이나 그것만으로는 표현력이 확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긴 글을 쓸 때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었다. 글이 한계 이상 길어지면, 나는 구태의연한 구절을 반복하고 있었다. 충격적일만큼 표현력이 빈약했다. 앙드레 지드는 한 권의 책에서 1만개 이상의 단어를 사용한다는데, 이제 시작하는 나에게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의 서평들은 이를 가능한 생각하며 써보기로 하였다.

 

 

p.29

프리토리아에 도착한 나는 동족들을 모았다. 그리고 부당한 대우에 대처하기 위해 그들을 규합했다. 그 규합은 성공적이었다. 일련의 활동들을 통해 인도인도 ‘옷차림이 적절하다면’ 일등실이나 이등실에서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날의 회합이 바로 일개 변호사였던 내가 정치적 지도자로 전환한 첫 순간이었다.

 

나는 저자가, 변화의 특징을 매우 잘 묘사했다고 생각했다. 변화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다. 간디가 운명의 역사에서 순식간에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가 지도자라는 명사를 머리에 떠올렸을지도 의문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하기로 한 일을 한 것 뿐이다. 간디는 걷는 구두의 끝날을 살짝 돌렸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그가 프리토리아에서 동족을 모아 그가 겪었던 부당한 대우 하나를 해결한 것이 바로 그 첫 번째 한 발이다. 마치 닐 암스트롱의 첫 번째 발자국처럼. 나는 바로 그 한 발자국을 시간과 지면을 들여 정성스레 묘사한 것이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p.31

그것이 왜 저였는지는 아직도 모릅니다. 아마 제가 당신을 향해 주저하면서도 한 걸음 다가섰기 때문에 당신이 기뻐하며 제게 열 걸음 다가와 당신의 은총을 보이신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잔을 제게 내미신 것입니다. 그 잔이 제게 왔을 때 무섭고 두려웠지만 그 잔을 들게 하고, 그 우주적 떨림에 의지하여 제 길을 더듬어 갈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간디가 자신의 신에게 “ Why Me?"라고 물었을 때, 과연 자신에게 이 영광을 주셔서 황송하다고 했을지 의문이다. 그는 결코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의 최전선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기로 마음 먹을 때, 간디는 은총이라는 이름으로 각오를 다진 것이다. 자신이 민족을 위해 가장 먼저 죽을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참으로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p.33

제목 - 삶의 문턱에서 홀연 각성하라.

 

소제목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글자수가 2/4/2/4로 맞아떨어지는 리듬감과 그 내용의 상징성이 탁월하다.

 

 

p.34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일반적으로 이런 역사적 소명을 받는 장소나 사건은 대개 깊은 숲속이나 큰 나무 아래, 심연으로 상징되는 어둡고 험하고 추한 곳일 때가 많다고 말한다.

 

간디의 마리츠버그 역사에서의 경험에 신화적 가치를 부여한 구절이다. 역사적 소명을 받는 일을 일반화시킴으로서 전설의 영웅이 살아 돌아오는 듯한 흥미를 더한다.

 

 

p.36

그는 평범함을 넘어 위대한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 조건인 ‘엄격한 자기 검열’에 특별히 민감했다.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면 초자아(super-ego)가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에이브러햄 링컨, 마틴 루서 킹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린 시절에 저지른 사소한 잘못까지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서 애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한 인물을 생각했다. <한살림>의 창시자, 무위당 장일순이다. 나는 그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뚝길에서 그 날 자신의 한 말 중 잘못한 것이 있는지 곱씹어보고 조금이라고 상대가 맘상해 할 말이 떠오르면 걱정하여 밤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뻔한 사기꾼들에게도 돈을 빌려주고 이내 빈곤에 굶주리곤 했다는 그의 일화까지 들은 후에는, 착하기보다는 나약한 까닭에 악인에게 당하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의 총수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한살림>을 창시하였고 바보 이반의 현명함으로 스스로 희생한 터에 나무를 만들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장일순의 초자아를 두고 바보의 행동이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p.39

"(여행에서 돌아와) 아르헨티나 땅에 다시 발을 딛는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도 없었다. 이 글을 다시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많이 변했다. 그 깊이는 내가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는 위의 구절을 사진처럼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에르네스토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환자촌을 향해 강을 수영하여 건너는 장면이다. 강 이편에는 에르네스토가 있고, 강 저편에는 체 게바라가 있다. 에르네스토는 그 강을 건너면서 다시는 건너기 전의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p.43

정신의 지평이 넓어진 바로 그 지점, 지금까지의 ‘삶의 지평은 너무 좁아 더는 나의 영혼의 크기에 적합하지 않게’ 된 그곳, 바야흐로 또 하나의 삶의 문턱을 넘어야 할 때, 내 존재가 운명처럼 저항한 바로 그 지점, 우연이 운명이 된 그 도약점 말이다.

 

나는 작은 괄호 안을 보면서 소라게를 생각했다. 소라게는 자신의 몸이 커감에 따라 이전의 소라집을 버리고 새로운 소라집으로 이사한다. 더 이상 맞지 않아진 소라집이 답답한 만큼 소라게는 분주하게 새로운 큰 집을 찾아다닌다. 이런 욕구는 소변이나 변이 마려운 것과 같은 생리학적 욕구만큼 강하고 급진적이다. 당장 해내야 하는 것이다. 소라게는 집을 옮겨타는 그 순간, 약한 꼬리를 천적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험이 두려워 과거에 안주할 수는 없다. 이미 영혼은 과거의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p.47

나는 간디나 체 게바라처럼 크고 빛나는 별은 아니다. 나는 작은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빛나야 할 운명을 가진 별’이다. 사람은 모두 별이다.

 

예전에 한 과학고생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이 학생은 과학고에 진학한 이후, 자신보다 월등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동안 자신의 능력을 확신했기에 학문의 발전에 대해 가졌던 사명감은 허탈한 자조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고, 마지막 남은 오기로 그 미약한 존재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정도로만 공부에 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시덥잖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디제이의 나레이션을 들었다. 헤르만 헤세였다.

 

“소년은 별을 너무 사랑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밤마다 별과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절벽으로 올라가 한껏 팔을 내밀었습니다. 소년은 말했습니다. ”오, 별아. 내가 너를 안을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텐데!“ 그러자 별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렴. 그러면 나를 안을 수 있단다.“ 소년의 눈은 기쁨의 눈물로 차 올랐습니다. 소년은 발걸음을 떼어 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두고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역시, 별을 안는다는 것은 무리야.“ 소년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만약 소년이 끝까지 별을 안을 수 있다고 믿었더라면, 소년은 별과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나레이션을 듣고 그 과학고 학생은 뒤늦은 깨달음에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늦은 위로였지만 앞으로 살 날이 더 많았다. 과학고생은 그 후 다시는 가능성이라는 허구의 잣대에 휘둘려 자신의 별을 놓치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p.55

누구보다 열심히 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춤꾼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빛났다.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작가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나는 빛났다.” 이렇게 쓰고 몸에 문신으로라도 새기고 싶은 구절이다. 나의 친구 중에는 프로 작가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는 한 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16시간 정도 꿈쩍 하지 않고 쓴다. 이 친구는 또한 매우 겸손해서 자신의 타고난 글의 재능은 조금 뛰어난 정도이지만 자신은 노력할 줄 알기에 누구보다 뛰어날 자신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이 친구야 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 작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도 그 친구와 글의 방향은 약간 다를지라도 못지않은 저술가가 되고 싶다.

 

 

p.57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나는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자기만의 욕망과 가치를 담음 무용을 시도했고,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꿈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저항했다. 그 녀는 화려한 장식을 떼어내고 엄격한 검소함과 투박한 몸짓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었다. 종종 그녀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고전무용에 무지하고 추한 형식과 증오에 찬 정신으로 몸을 사용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약속대로 자신만의 무용을 만들어냈다. 존 마틴이라는 당신의 무용 평론가는 그런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무용에는 열정과 항의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 그녀는 무용가로서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셈이다. ......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마사 그레이엄이 정상에 오르겠다고 말한 바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한다. 소위 우리가 특정 분야에서 정상에 오르겠다고 한다면, 이는 이미 마련되는 있는 과거의 권좌 위에 오르고 싶다는 뜻이다. 발레를 가장 잘하는 사람, 성악을 가장 잘 하는 사람, 바이올린을 가장 잘 켜는 사람 등등이다. 물론 예술가의 특성은 타인이 모방할 수 없는 것이고 지문이 모두 다르 듯, 예술가들 고유의 매력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마사 그레이엄의 정상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나는 마사 그레이엄이 루스 세인트 데니스의 무용 포스터를 보고 실제로 그의 공연까지 보았을 때부터, 무용에 대한 비전이 수립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무용수의 옷이 예쁘고 춤이 아름다워서 무용을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레이엄은 어릴 때부터 무용을 좋아하였다. 의사이자 자상한 아버지를 둔 그레이엄은 보통 이상의 문화 생활은 누렸을 것이고, 그 당시까지의 무용이 어떤 형태인지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데니스의 무용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지금껏 전부인 줄 알았던 무용방식에서 탈피한 새로운 가능성을 본 것이다. 바로 그 순간, 그레이엄은 깨달았다. 인식이 전환된 것이다. 무용은 유일무이한 한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이 2가 되면, 3이 되고 4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레이엄은 직접 다른 무용을 창조해보고 싶어진 것이다. 바로 그 비전을 본 순간, 마사는 비전에 미치게 되었고 무용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최고가 되었다. 그러나 그 최고의 의미는 기존의 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사 그레이엄은 최고라기 보다는 창조자였다. 여신이 된 것이다.

 

 

p.61

하워드 가드너는 리더십에 대한 특별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리더십이란 신비로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사람을 통솔하거나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적절한 사회 문화적 조건 속에서 연습되고 다듬어진 훈련된 능력’이다. 결국 그의 정의에 따르면, 리더로서의 성공은 명성과 돈 또는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을 비범하게 발전시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리더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정면으로 질타한 부분이다. 우리가 왜 각 분야의 우수한 인물들, 공인들을 넓은 범주에서 사회의 리더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연아가 오로지 피겨 스케이팅을 잘했을 뿐인데 사회의 중요한 자리, 가령 평창 올림픽에서 지지 연설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들인 노력에서 지도자의 자질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p.63

“예술가의 천재성이란 의지로 되찾은 유년기, 이제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어른의 육체적 능력을 갖춘 유년기, 그리고 무의지적으로 축적된 경험의 총합에 질서를 부여하는 분석적인 능력을 갖춘 유년기.”

보들레르는 아이를 예술가로 본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을 가진 어른이 예술가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니 천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천재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박한 재능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발전시켜온 사람들이 바로 평범함에서 위대함으로 도약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작가가 한 해석의 탁월함에 놀랐다. 보들레르의 글은 단편적으로 이해하자면, 천재란 어쨌거나 유년기의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그것이 어른의 도구를 통해 표출되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해석에서 한 수를 더 보았다. 어른은 아이로부터 자란 것이다. 그런 어른이 아이의 눈을 유지하기 위해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도구로서 육체의 표현력과 분석능력을 키운 것이 곧 예술적 천재성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이였으며, 아이의 진실성과 창의성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렇다면, 천재성이란 어른이 되어가면서 노력해온 결과물이다.

 

 

p.67

밥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한번 마음먹은 대로 살아보고 싶어 시작한 나의 성전이었다.

 

매우 창의적인 성전이라고 생각한다.

 

 

p.70

어쨌든 나는 현실이 아닌 비현실 하나를 믿는 훈련을 해본다. 내 마음대로 해볼 수 있는 세상 하나를 창조해보는 연습을 한다. 그러면 나는 훨씬 괜찮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비전들은 그 구체성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하루에 하나, 세상 하나를 창조하는 연습. 작가는 확실히 경영학도이다. 경영학의 기본은 비전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치마킹할 가치가 매우 높은 비전이다.

 

 

p.88

아이러니하게도 미래를 잘 볼 수 있는 자는 과거를 잘 아는 자다. 선견지명에 이르는 그 신비의 원천은 신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근면과 노력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내가 존경하는 컨설팅 회사의 대표님은, 시중에 나와 있는 미래에 관한 책은 모두 다 읽는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미래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확신을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데일 카네기의 <행복론>에는 걱정을 없애는 획기적인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 걱정하는 바에 대하여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고민은 자동적으로 해결된다.

 

 

p.90

미래에 대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미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미래에 대해 고려할 점은 두 가지이다. 소위 두가지 축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경제와 경영이다(포괄적인 의미의 용어로 써보자). 경제는 우리가 조절할 수 없다. 경제는 다만 예측해야 한다. 경영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다. 미래를 창조한다면, 그것은 첫 번째로 경영을 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경제를 자지우지할만큼 힘있는 인사가 되는 것이다. 영국 해군력을 향상시킬 권력이 있던 처칠이 그러하였고, 달로 우주인을 보내기로 결정한 케네디가 그러하였다. 심지어 워렌 버핏도 경제 전반을 움직이는 것은 힘들어하고 다만 추세만을 예측하는데, 그래도 개미들은 워렌 버핏이 주식을 사면 다 따라서 사므로 창조의 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p.90

냉소적인 사람은 결코 대성당을 짓지 못합니다.

 

여기서 냉소란, “나는(너는, 혹은 우리는) 안될거야.”라는 말의 동의어이다.

 

 

 

p.93

나는 이 아이디어(1인 기업)에 반했다. ...(중략)... 앞으로 또 10년이 지나면 훌륭한 고용의 대안이 될 것이다. 내 마음에 1인 기업가라는 개념이 꽂혔을 때, 나는 이것이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직업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빌 게이츠는 요즘,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또 이를 차곡차곡 실천하고 있다. 가령, 예전에는 가장 합리적인 기부금의 사용 방법은 생명을 살리는 예방의학에 있다고 생각하여 아프리카에 백신을 공급하였다. 현재, 빌 게이츠는 미국에서 소규모의 학교를 세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지원한다. 학교의 구체적인 설립안을 제시하면 빌 게이츠 재단에서 이를 후원하는 방식이다. 이들 학교는 전교생의 숫자가 10명 남짓할 정도로 작은데 이들 마이크로 학교 출신의 학생들이 대학 진학률과 성적 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고 있다. 작은 규모 경영의 승리인 것이다. 항상 학교는 닭장처럼 학생들을 몰아넣고 전체주의적 교육을 시킬 때 가장 효율적이라는 사고를 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국가의 사정 상, 필요악이고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의식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쉽게 변할 수 있다. 자신의 코쿤 안에서 소우주를 만들고 자족할 수 있는 자유로운 노마드들이 생겨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인 기업 역시,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대표적 움직임이다.

 

 

p.96

그것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는냐에 따라 현업에 대한 열정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내가 다니던 프랑스어 학원 선생님은 늘 학생들의 배우는 속도 차이를 두고 비교를 하곤 하셨다. 시작이 미약하기 그지 없던 프랑스유학 지망생과 단지 취미로 프랑스어를 배우던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의 습득 속도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학원에서 줄곧 실험자의 위치에 있었고, 이미 확신을 내린 상태였다. 약 6개월 후, 그 미약한 시작남은 프랑스어 자격증을 무난히 취득한 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나는 아직도 기초회화를 끝내지 못하고 있다. 그 유학생과 나의 차이는 비전의 스케일에 있었다.

 

 

p.102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책임질 아무 일이 없어 하늘의 새처럼 자유로웠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삶이었다. 그 기간은 1929년에서 1934년까지 5년 동안이었다.

 

인터뷰에서 구본형은 <깊은 인생>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로 조지프 캠벨을 꼽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의 자유로웠던 5년의 시간은 경험해보지 나조차 그리울 지경이다. 왜 나는 캠벨처럼 자유로울 용기가 없었던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다만, 그를 통해 그 경험과 철학의 신선한 기쁨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나는 ‘아무것도 없이, 책임질 아무 일 없이, 심지어 나 자신조차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그 경이로운 자유 앞에 의식하지 못했던 고삐를 풀어버린 기분이다.

 

 

p.104

방황을 할 때는 당장 그날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하되, 내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묻지 말아야 한다. 미리 생각해둔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특히 다음 세 가지는 결코 생각해서는 안 된다. 먼저 하나는 굶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 아닐까. 내가 캠벨과 같은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이유는 위와 같은 전략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1달러를 찬장 위에 올려 놓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달래도 좋을 만큼 생의 유쾌함에 나를 맡겨버리기 위해서는. (1) 굶는 것, (2) 미래불안, (3)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p.112

종종 너무 많은 지식은 오히려 창의성을 방해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p.112

우연처럼 보이는 영감과 통찰은 대체로 모두 이런 전문적 지식과 몰입의 산물들인 것이다.

 

양이 질을 창출하는 것도 참이고, 질이 양을 창출하는 것 역시 참이지만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다.

 

 

p.113

악보에 충실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좋은 기억에만 의존했으며, 앙코르 곡으로 적당히 청중을 열광하게 하는 방법을 영리하게 체득했다. 한마디로 악보에 충실하게, 그리고 기술적 결함 없이 완벽하게 연주했다고 자랑할 만한 곡이 하나도 없었다. ...... 나는 내가 진정한 음악가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재능을 끊임없이 계발하는 대신 그것을 밑천으로 뜯어먹고 살고 있었다.

 

나는 위의 말을 한 루빈슈타인의 쇼팽 연구 앨범을 가지고 있다. 그의 발라드 1번은 매우 깔끔하고 화려하다. 후에 임동혁 등 스타일이 더 좋은 피아니스트도 생겨났지만, 내 마음 속에는 루빈슈타인이 언제나 쇼팽의 1인자였다. 줄리아 로버츠와 암투병 남자의 사랑을 그린 <사랑을 위하여>라는 영화에서, 남자가 말한다. “우리 어머니가 전에 루빈슈타인을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손이 마치 농구 선수만 했대요.”

 

루빈슈타인이 초기의 과도한 쇼맨쉽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노력으로 타고난 재능을 썩혔다는 내용은 웬만한 클래식 역사에 수록되곤 한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리면서 했다는 말이 위의 구절일 것이다. 탕아의 철저한 자기 비판에 숙연해진다. 그는 태만을 구조조정할 시점에 도달하였다. 더 이상 재능만의 약발이 먹히지 않는 순간이 온 것이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범재들이 치고 올라온다. 그들의 통통 튀는 손가락이 만드는 화음이 어느 순간, 그를 각성시켰다. 그는 깨닫고 연습실로 돌아갔다. 그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죽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그의 손은 농구선수의 것만큼 커져 있었다.

 

 

p.127

아들이 뛰어난 학자가 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던 아버지는 나와의 인연을 끊었다.

 

평생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을 스피노자에게 아버지와 연을 끊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려서 애착 관계가 형성된 부모, 특히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유년기를 장악했던 모범생 자식들에게는 이보다 큰 충격이 없을 것이다. 부모의 죽음 이전에 천붕을 맞이한 셈이기 때문이다. 바닥이 없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p.128

우리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적을 미워하지 않는다. 미움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단점과 두려움을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역시, 포켓 속에 써다니고 싶은 문구이다. 이 세상의 모든 미움을 종식시킬 백신과도 같은 깨우침이다.

 

 

p.128

또한 나는 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려 했다. 신에게 시간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란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미래에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마련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반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p.129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변경되지 않도록 이미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망과 공포는 둘 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지혜의 결핍에 의해 생겨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희망에 속지 말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을 통해 지혜를 얻어야 한다. 나는 나의 학설을 믿었다. 그리고 실천했다. 이후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분노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상대를 비난하지도 않았다. 만물이 다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감정에 휘둘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운명론을 믿지 않으며, 시간의 대칭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운명론”은 철학적 장치라고 생각되며 그 효용에 의의가 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미래를 두고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일어날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초상화는 그 시대의 화풍을 생각하더라도 매우 동글동글한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자못 우스꽝스러운 곡선의 얼굴에서 죽음 앞에서도 약간의 미소로 의연하게 대처할 것 같은 스피노자를 상상할 수 있다.

 

 

p.130

나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렌즈를 연마했다. 이것은 내가 유별나게 가난해서만은 아니었다. 그 당시 유대인 학자들은 학문에만 힘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학자라면 누구에게나 생계를 유지할 기능을 익히게 해야 한다는 유대율법이 몸에 배어 있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노동은 신성한 것이며, 직업을 가지지 않은 학자는 결국 부랑인이 되어 사회에 짐이 될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한 푼도 남길 수 없을 만큼 조촐하게 살았지만 나는 행복했다.

 

나에게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 소중한 문구이다. 기존에 나에게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우던 가장 유효했던 카드는 마르크스의 냄새가 약간 묻은 톨스토이의 사상이었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던 것은 농장주 톨스토이의 말이 아니던가? 물론 톨스토이도 그 역시 열심히 노동을 하였다. 그러나 학자에게 노동이란 조금 다른 것이 아닐까? 나는 어떻게든 노동의 굴레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잡역부의 일이나 다름없는 잡일을 할 때면, 신세 타령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렌즈를 연마한 마당에 내가 못할 일은 또 무엇이겠는가? 일을 밥벌이를 위해서 하기는 하지만, 밥벌이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그만 둘 성질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한다는 개념. 나에게 변명의 유지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편이 나를 더욱 다행감에 젖게 만든다. 탈출구가 없는 스피노자의 확실한 직업윤리 안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낀다.

 

 

p.131

한번은 이성보다 신의 계시를 믿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내가 자연적 오성으로 수집한 결과가 진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불만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게는 그 자체가 유쾌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나날은 탄식과 슬픔 속에서가 아니라 평화와 밝음과 환희 속에서 지나가고 있다.”

 

촉망받는 신학자로서 신의 계시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던 자가, 오히려 지나치게 엄정하고 뛰어난 공부 때문에 신을 부정하게 되었다는 안데르센 동화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스피노자. 바로 그러한 이성적 양심을 선택한 덕분에 그는 평생 이단자의 변방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고통을 겪은 자에게 만약 신이 나타나 그의 선택이 틀렸음을 증명하게 된다면?

평범하고 신실한 신도들이 생각하는 결말은 이럴 것이다. 이단자는 신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신은 이제는 자신을 믿게 된 과거의 탕아를 거두어준다. 배신자의 고독과 고통까지 돌보는 거룩한 신이여. 할렐루야 만만세.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저 유쾌한 것이라고 말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나 역시 인생을 길게 산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참으로 재고의 가치도 업을만큼 당연해 보이는 일들도 어처구니없이 예상을 빗나갈 때가 꽤 있다. 설사, 그 빗나간 예상의 결과, 내가 민망해지거나 곤란한 상황이 되더라도 차라리 기가 막혀서 실제로 웃기기도 하지 않는가? 조금 더 뒤에서 사건을 관망하다보면, 세상일의 예측 불가능함에 경이감이 인다. 삶이 원래 이런 것이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재밌다고 생각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관조를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어보리라.

 

 

p.131

'자연은 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으니‘, 스피노자도 자연을 본받아 그렇게 살려고 했다.

 

작년에 자신이 낙엽으로 내려 보드라워진 흙에서 양분을 얻고 사는 나무처럼, 최소한의 것으로 생을 오고 가는 생물이 되리라. 그 생각만으로도 인생이 단촐한 짐만 가지고 떠나는 즐거운 소풍처럼 여겨진다.

 

 

p.132

학자들은 그의 지혜 때문에 그를 존경했고, 순박한 사람들은 그의 다정함 때문에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이단으로 취급하고 ‘죽은 개처럼’ 평가했다.

 

이 구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순박한 사람들은 그의 다정함 때문에 그를 존경했다.” 부분이다. 학자로서 지혜를 논하기 전에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신망을 쌓아가는 과정이 아름답다. 비록 일자무식의 미천한 이웃이라 하더라도 결코 바보가 아니다. 글자가 아니라면 말투로, 눈빛으로, 진심으로 인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범인이 어느 순간에 다정함을 잃는지 겪어서 알고 있다. 그러니, 일관성있는 다정함은 존경할만한 것임을 학자가 아닌 이들도 알았던 것이다.

 

 

p.137

그러나 이 위대한 책은 40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p.138

나는 그의 위대함에 대한 세 번째 장면을 그의 죽음 근처 쓸쓸한 초상에서 찾아본다. 니체는 1900년에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어머니가 돌봐 주었지만, 어머니가 죽은 후 3년 동안은 누이동생이 보살펴주었다. 죽기 전 어느 날 정신이 맑아졌을 때, 그는 기쁨에 찬 어조로 “아, 나도 좋은 책을 몇 권인가 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책처럼 살다 갔다. ‘늘 자신을 넘어서 있는 자신을 창조해가려 했고, 그런 후에 장렬하게 단명한 목숨을 끝내고 몰락해가는 자를 사랑하듯’ 그는 그렇게 살았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은 그의 생전에 40부 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반 고흐 역시 살아 생전에는 단 한 개의 작품도 팔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 날, 오르셰 미술관에 걸린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고 있자면 그 살아있는 붓자국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어째서 당대의 사람들은 이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까?

 

자신이 보기에는 너무 훌륭하다. 인류의 패러다임을 바꿀 역작이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주지를 않는다. 이럴 때, 작가가 할 수 있는 무엇일까? 자기를 믿거나, 독자를 믿는 것이다. 니체는 끝까지 자기자신을 믿었다. 그러나 그런 강인한 초인과도 같았던 그도, 대다수의 사람과 다른 의견을 낼 때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특히 그 의견이 자신의 가치와 직결된 것이라면 트라우마는 클 수밖에 없다. 대중의 의견이 한 개인의 의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심리학 실험들이 많이 있는데, 그 결과들은 모두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 개인은 웬만해서는 대중의 심리를 거스르기 힘들다. 실제로 세상의 많은 예술가들이 동 시대에 혹평받은 역사 때문에 신경 쇠약에 걸려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라흐마니노프 등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은 기록도 많이 있다. 니체 역시, 말년에는 정신병동 신세를 지었는데 바로 그런 그의 이미지가 “순전한 광기”로 오인된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p.139

이쯤 되면 웬만한 사람은 지금의 화풍을 유지하고 같은 양식을 고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에게는 현재의 영광에 만족하지 못하는 어떤 뿌리 깊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다.

 

피카소가 파격을 감행하던 당시, 그는 이미 잘나가는 화가였다. 그러나 그 잘난 직함을 ‘개나 줘버려’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는 다시 일을 저질렀다. 그는 어디에서 그런 자신감을 얻었는가? 베토벤 역시 말년에는 파격적인 작품들을 많이 썼다. 그의 콰르텟과 대푸가는 현대 클래식 작품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파격적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예술가가 어느 경지 이상에 오르게 되면, 남들과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비전이 세워진다. 그리고 그 비전의 가치는 자신이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멋모르는 이들의 의견 따위는 전혀 상관없다. 어차피 나의 육신은 사그라들어도 나의 시도는 영원하다. 그들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이런 자신감이 들떠 비전의 열락에서 날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명 더 거론할 사람이 있다. 바로 커트 코베인이다. 그는 밴드 <너바나>의 리더로서 훌륭한 뮤지션이었다. 당시, 그의 정형화되지 않은 “음악 같지 않은 조악한, 그러나 꽤 들어줄만한 음악”은 당시 대중들에게 자유의 상징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인기가 커트 코베인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는 그 인기를 무너뜨리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 때문에 다음 앨범은 아예 더 제멋대로인 파격을 시도하였다. 그는 다시 인디로 돌아가서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앨범에 대중은 더욱 열광하였고, 코베인은 당황하였다. 결국 그는 삶의 균혀을 잡지 못한 채 얼마 뒤 마약에 찌들어 사망하였다. 왜 커트 코베인은 피카소나 베토벤이 되지 못하였을까? 그는 결국, 대중의 거울이었을 뿐, 자신의 비전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p.142

외로움이란 바로 자신의 생각에 빠져들고 세상에 이미 알려진 상식적 삶에 질문을 퍼붓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 종료 5분 전에 손을 들어 선생님이나 교수님께 질문을 해보라. 정말 외로워진다.

 

 

p.143

철학에서 멀어지면 삶은 먹고 과시하는 저잣거리의 인생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말이다.

 

p.145

이 세상에 성공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철학이 없으면 결코 위대해질 수 없다. 성공했으나 천박한 자는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천한 자본주의에 대한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p.146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외쳐대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장 큰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라고 압박하기 때문이다.

 

영화 빠삐용에서 죄수의 죄명은 <인생을 낭비한 죄>였다. 그 죄명을 꿈속에서 들은 빠삐용은 탈출은 결심하게 된다.

 

 

p.149

“누구나 자신을 계발해야 해.” 나비는 이렇게 속삭이며 기울고 있는 석양빛 속으로 나풀거리며 날아들어 갔다.

이것이 내가 이루려는 혁명이다. 나는 이 장면을 마음속에 품어두었다. 나의 내면에도 방기되고 마비된 많은 것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흉하고 초라한 것 속에 구겨져 있는 나비, 때가 되어 껍데기를 벗으리라. 나의 혁명에 성공하리라. 그리고 파란 하늘을 날게 되리라. 이것은 얼마나 멋진 푸른 혁명이냐!

 

프라하의 자연사 박물관 2층에 갔을 때 본 것들이다. 많은 나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어떤 비단과 빌로드천보다도 아름다운 광채로 빛나는 나비의 날개는 끝없는 경탄의 대상이었다. 나는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변태 과정만큼 극적인 생명의 드라마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날 수 없는 것에서 나는 것이 되고, 숨어서 의태하는 것에서 드러내고 뽐내는 것이 된다. 번데기의 그 어떤 아나토미에서도 나비를 상상할 수 없다. 인류 중 맨 처음 번데기로부터 나비가 되는 변태를 관찰한 자는 얼마나 놀랐을까?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나비의 날개 무늬가 형성되는 과정을 세포의 수준에서 설명해 주었다. 무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가운데에서 변방으로 밀리고, 그리하여 결국 호랑나비 무늬가 된다... 이렇게 과정을 모두 쪼갠 설명들이 나비의 본질을 설명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왜 애벌레는 계속 송충이나 지네처럼 원통형의 애벌레인 채로 있지 않고 나비가 되어야 했을까?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것도 당연한 듯 여기는 당신이라면, 당신의 변화도 상상해볼만 하다. 적어도 우리는 당신에게 등을 째고 날개를 내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p.150

하루의 경영에 실패하면, 화가가 손을 뗀 그리다 만 그림처럼 꿈은 초라해진다. 한 줄기 무상의 바람이 불고 이내 꿈은 추억이 된다. 꿈은 흔적만 남아 미련이 되고 몸음 하루의 밥벌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불행하다. 그리고 그 불행은 페스트처럼 직장을 휩쓴다.

 

중국의 일화이다. 한 노인이 유명한 화가를 찾아가서 소매춤에서 그림 한 점을 꺼냈다. 그림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12살짜리 아이가 그린 것입니다. 좀 봐주십시오.” 그림을 보고 화가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매우 훌륭합니다. 이 아이가 그림을 열심히 한다면, 틀림 없이 천하 제일의 화가가 될 것입니다.” 화가는 이어서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온다면, 제가 최고로 교육시키겠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은, 제가 12살 때 그린 것입니다.”

 

이보다 안타까운 고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노인이 자신의 어릴 적 그림을 가지고 찾아가 평가를 기다리는 대목에서 노인의 한 평생 한이 느껴진다. 왜 노인은 화가가 되지 못하였을까? 알 수 없다. 시대의 장난이거나, 개인의 문제일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 재능의 허비를 각성하게 된다.

 

 

p.151

작가도, 1인 기업가도 태생적으로 외로운 존재 방식이다. 1인 기업가이며 작가가 되어 살기 시작할 때 나는 이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세 가지 행동철학을 세워두었다. 10년째 나는 이 철학에 의지해 내 길을 걸어왔다. 첫째는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며 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오직 나의 명령에 따라 산다. 나는 작더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제국을 원한다. 두 번째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을 늘림으로써 자유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자유의 양이 많아질 때만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는 본업을 통해 세상의 밝음에 기여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이들의 잠재력을 발견한고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응원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다.

 

구체화된 작가의 <1인 기업가> 전략은, 한 마디로 “멋있다.” 인간이 태어나 뜻을 세움에 있어 그 기개와 자존감이 물씬 느껴지지 않는가? 특히, 암묵적 계급 사회에서 “이제 더는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파격 그 자체다.

 

 

p.164

모든 심각한 자야말로 바보인 것이다.

 

심각함 속에 무지를 숨기고, 권위를 방어하는 자들을 바보라고 부른 것이다.

 

 

p.164

스승은 도란 ‘평상심’이며, “사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사물을 떠나서는 도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가령, 예를 들어서 당신이 몸의 건강과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서 식사량을 조절하기로 마음먹고 이를 실천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원초적 수행을 실생활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한 친구는 인도의 도인 마을을 여행 갔을 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사람들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도를 닦는데 한 사람은 평생 어깨로만 기어다니며, 어떤 사람은 평생 앉아서 생활한다. 친구는 자신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가장 실천하기 쉬운 맨발로 다니기를 선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실천한 첫날, 그는 발로 더러운 것을 밟을까봐 노심초사한 까닭에 항상 땅만 보고 다녔음을 깨달았다. 삼일 째 되던 날, 밤에 숙소로 돌아와 고단한 맨발을 씻고 자리에 누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발은 낮에 아무리 더러운 것을 밟고 다녀도 밤에 들어와 씻으면 다시 말끔히 깨끗해지지 않는가? 깨달음을 얻은 친구는 맨발임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날 부터는 풍광을 향해 고개를 들고 마음껏 여행을 즐기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도인을 따라해보고 싶었던 야매 신자에게도 도는 찾아왔다. 도는 생활의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p.165

“거지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네.”

 

길거리에서 박스를 줍는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착잡하다. 사회 약자를 위한 복지 문제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사회 보호 대상자들을 마냥 가엾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마음은 그들이 더 부자일 수 있다. 우리는 평생 김밥을 팔아 모은 돈으로 그 김밥을 팔아준 학생들의 대학에 선뜻 기부 의사를 밝히는 김밥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또한 가난할수록 이웃을 더 많이 돕는다는 통계 결과도 있다. 그들은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이다. 어느 날, 좁은 교차로의 한쪽 구석에서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 껌을 팔고 있었다. 그는 찬송가를 틀어놓은 상태였는데 측은함을 느낀 내 친구가 그에게 다가갔다. 알고보니 그는 찬송가의 구절을 매우 즐겁게 따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친구는 저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행복론>의 번역서 첫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장애우들이 함께 길거리에서 노상을 열었다가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오는 생활을 하지만, 그들은 주님의 은총 아래에서 늘 감사하며 특히 집으로 돌아가 마시는 따뜻한 국물이 너무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다.

 

 

p.168

"1914년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전부터 받기를 단념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 자신을 진심으로 인정해줘도, 그 사람의 인생은 바뀔 수 있다. 나 역시 경험하고 있고 경험하고 싶은 바이다.

 

 

p.171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다.

 

친구 같은 스승에게서 가장 많이 배우고 또 스스럼 없다 하여 예를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스승은 어렵고 멀다.

 

 

p.177

선생님의 강의는 내게 늘 놀라움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서양사 개설’과 ‘역사학 입문’을 들으며 나는 수업의 진미를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강의 도중 지그시 눈을 감고 좋은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애쓰셨다. 이윽고 가장 적합한 표현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역사 속의 한 인물, 한 장면은 갑자기 두꺼운 먼지 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곤 했다. 그 사람들, 그 장면들이 시간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는 장면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예전 한 프로그램에서 원숭이탈을 쓰고 재래 시장의 야외 마당에서 연극을 하는 한 한문학 교수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다뤘었다. 그 교수는 연극을 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생기고 가족을 부양할 상황에 놓이면서 꿈을 접고 한문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꿈을 놓지 못하고 결국 일인 연극의 대본을 직접 써서 시장이라도 찾아가게 된 것이다. 연극을 할 수만 있다면 어느 무대라도 좋았다. 그는 연극의 재미를 위해 최신 여자 아이돌 그룹의 춤도 익혀 가고 분장도 열심히 한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인생이 아니던가?

 

나는 위의 글을 읽다가 뜬금없이 그 원숭이탈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 교수님 역시 매우 좋은 교수님이다.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없을까봐 헤드셋 마이크를 쓰면서까지 열정적으로 한문학을 강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 교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원숭이 연극 안에 자신의 한시를 삽입한다. 시장바닥에서 구성시게 명문 한 시 한 소절을 뽑아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는 원숭이를 보면서, 나는 삶의 경이로운 생명력을 느꼈다. 그 교수님에게 한문학은 바로 연극이자, 삶이었다.

 

저자의 은사이신 역사학 교수님의 열띈 강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그 학문의 순수한 성취감과 인생의 감칠맛이 연상되었다. 교수님이 알맞은 표현을 찾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는 그 순간, 강의실은 이미 공부와 성적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저것이 과연 옳으냐? 마치 그리스의 향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조금은 구닥다리의 학문의 현장이 된다. 저자는 누군가의 눈감은 모습만 바라봐도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그리운 그 시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p.178

"논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웅변이 되지 못하는 잡담이며, 경험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논리는 논리가 아니라 부조리다.“

 

처음 빠르게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리가 함축된 문장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기가 막힌 명문이다.

 

 

p.178

'인생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스스로 모색해라.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러나 그 길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앞에 다른 길이 나오면 슬퍼하지 말고 새 길로 가거라. 어느 길로 가든 훌륭함으로 가는 길은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좌절한 모든 청춘에게 바치는 위로의 산문시가 아닐까?

 

 

p.184

"보통의 선생은 그저 말을 하고, 좋은 선생은 설명을 해주고, 훌륭한 선생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영감을 준다.“

 

요즘 우리는 보통 자신을 탁월한 전략으로 원하는 대학에 붙여주는 선생을 위대한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스승이란 성공의 지렛대가 아니라 영감의 지렛대요, 인생의 버팀목이자 저 멀리 눈가에 두고 볼 큰 산이다.

 

 

p.190

어머니는 전통적인 것을 거부하셨으며, 우리에게 늘 "특별해져라. 평범함을 거부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보고 듣고 자랐으니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어떤 제도에서든 나는 늘 도전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사랑이나 일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복잡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p.191

내가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어머니는 카페를 처분하고 동네 한복판에 나이트클럽을 개업하셨다. 그리고 요란하게 장식하셨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은 ‘엘 쿠바나’였다. 언젠가 내가 집에 들렀을 때, 어머니는 은색 루렉스 드레스 차림으로 담배를 입에 물고 바에 앉아 계셨다.

 

내가 <깊은 인생>에서 가장 부러워하고 좋아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두 명을 꼽을 수 있다. 바로, 조지프 캠벨과 아니타 로딕의 어머니이다. 아니타 로딕 자신도 훌륭한 기업가지만, 그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 그의 어머니는 진실로 자유로운 영혼이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우연히 자유의 골짜기로 접어들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는 조지프 캠벨보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욕을 해대면서 계단을 닦고 있을 아니타 로딕의 어머니가 더 위대한 것 같다. 그녀가 자식들에게 “세상에 묻어가라.”라고 가르치지 않고, “특별해져라, 평범함을 거부하라.”고 가르친 부분에서 입이 떡 벌어진다. 나는 아니타 로딕의 어머니가 나이트 클럽을 열고 완전히 변신한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유쾌한 해방감을 느낀다. 인생을 남들보다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 그래도 세상은 살아지기 마련이고, 오히려 훨씬 유쾌하다. 나는 로딕 어머니의 정신적 양녀가 되어 가르침을 받고 싶다.

 

 

p.192

실수를 했을 때는 즉시 그 실수를 인정하고 빨리 바꾸라는 것이다.

 

인생의 기회 비용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실제로 주식의 투자 손실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손해를 볼 시점에서 바로 팔아버리도록 주문을 넣어두는 것이다.

 

 

p.193

따지고 보면 모든 성공의 요인은 사실 내게 돈이 없었다는 점이다. 돈이 없고 배가 고프면 창의력이 생긴다. 노력하지 않아도 가질 수 있으면 생각하지도 않고 추진력도 생기지 않는다. 다른 성공한 기업가들처럼 궁핍이 나를 생각하게 했다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이민자의 노동 윤리를 가진 아웃사이더였기에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일을 할 때 화가나 작가와 같은 열정이 나를 휩싸고 지나갔다. 나는 궁핍으로 인해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믿었으며, 그것을 실현하고 그것으로 먹고 살고 그것으로 이익을 내기를 바랐다. 보디숍은 내 손으로 만든 내 자식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내가 되었다.

 

“이민자의 노동 윤리를 가진 아웃사이더였기에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부분이 나는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이 책에서 나를 위한 단 한 구절을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이 부분을 고를 것이다. 특히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내가 그 동안 알고 있었으나 말로 형상화하지 못했던 불안의 실체 그 자체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따라 얼마든지 아웃사이더의 근성을 본받을 생각이다. 나의 나약함에 천둥처럼 경종이 울린다.

 

 

p.197

비즈니스 세계의 가장 큰 문제는 탐욕이다. 욕심이 문화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처럼 암담한 것은 없다. 탐욕이 성공이 되고, 가장 욕심 많은 사람이 롤모델이 되면서 탐욕은 우리 인생의 가치 있는 것들을 전부 잡아먹기 시작했다.

 

우리가 탐욕스런 자본주의를 쿨한 듯이 당연하게 여겨가는 와중에, 공동체를 위한 착한 자본주의에 대한 상상력과 창조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p.197

비즈니스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업이 할 일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창출이다.

이 명제는 청소년기 경제학 수업의 도그마가 되는 명제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물론 우리는 기업을 통해 이윤을 창출한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삶의 목표가 먹기 위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비즈니스가 사람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더 이상 비즈니스는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도움이란 곧 책임을 의미하며, 비즈니스가 개인으로 구성된 가족사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윤추구라는 저차원의 목적으로 숨어들어가서는 안 된다.

 

 

p.198

인생에 영적 차원이 있듯이 비즈니스도 영적인 차원을 가져야 한다. 나는 세계를 다니면 깨달았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나의 존재는 전일성(oneness)으로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경외심이 나를 가득 채웠다.

 

p.200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더욱 급진적’이 되었다.

 

p.201

왜 각성한 부자들에게 이런 정신적 전환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사회의 의식 수준이 향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p.203

따라서 마지막 도약의 단계는 인류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의식이 점점 성숙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p.204

사람이 정말 휼륭해지기 시작하는 분기점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 시작할 때부터다.

 

p.205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삶의 목적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짧은 여행을 하러 온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 어쩌면 신의 섭리가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여기 온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모두, 이미 죽었거나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 덕에 살아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주려고 그들을 위해 나를 쓰지 못해 안달을 하게 되었다.”

 

p.205

자신보다 큰 것에 헌신하지 못한다면 기껏해야 뜻을 이룬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벌고, 자신을 위해 쓴다면, 돈은 얻을지 모르나 존경은 얻을 수 없다.

 

p.212

연구원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전 과정에 대한 수업료는 무료다. 엄밀하게 말하면 무료가 아니다. 나는 ‘지식의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을 시도해보았다. 돈을 거래의 단위로 쓰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거래의 단위로 사용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들을 지도했고, 그들은 그들의 배움과 숙제를 내 홈페이지에 올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학업을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남을 위해, 특히 남의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남을 돕는 행위의 중요성. 그 돌고 도는 선순환에 벌써 마음이 설레지 않는가?

 

 

p.215

위대한 사람들은 꼭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다. ...(중략)...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위대함을 끄집어내 가장 자기다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 평범한 사람들, 스스로 자기 자신의 별이 된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p.218

훨씬 더 깊은 인생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는 졸렬한 현재인 것이다.

 

p.219

모든 평범한 자는 우연한 사건을 만나 영혼을 흔드는 각성을 거쳐 사회가 강요한 꿈이 아닌 자신의 꿈을 꾸게 되는 위대한 모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p.220

"인간은 확고하고 명료하고 완성된 것이 아니다. 변화해가는 것이다. 인간은 시도이고 예감이며 미래다. ......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실을 숭배하거나 존경해서는 안 된다.“

 

매일 아침을 현실 숭배를 거부하는 훈련으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깊은 인생

 

3. 내가 저자라면

 

우선 책에 대해 평가해볼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의 초견 때는 막 헤로도토스 역사를 읽은 후여서인지 책의 분량이 적어보이고 7명의 위인들의 전기를 잘 편집한 것에 불과한 느낌을 주어서 “책을 쓰는 데 그리 큰 정성을 들이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나 정독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각해볼만한 구절을 모으다보니 어느 덧 책 전체에 줄을 긋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자의 성찰과 깊이에 놀라고 질투심을 느꼈다. 마치 해적들이 보물섬을 발견하여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것처럼, 나는 내 눈앞에 쏟아져 내리는 혜안의 보물들을 말없이 걱실걱실 주워담았다.

 

이 책은 2011년 4월에 1쇄 발행하였다. 내가 이 책을 찾았을 때는 대형 문고의 구본형 코너에 꽂혀 있었다. 요즘 책이 출판되는 속도를 생각하면 절판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이다. 저자는 필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책들은 좋은 평가를 받으며 보기 좋게 나열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히 의문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은 이보다는 더 오래 메인 서가에 머물러도 될 것 같다. 풀무원의 직원들은 그들의 ‘풀뿌리 정신’으로 어느 마트를 가더라도 풀무원 제품을 진열대 가장 앞에 내놓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책 스스로 진열대 앞으로 걸어나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책을 파는 것은 90% 이상이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제목은 책의 얼굴이다. 일단 얼굴에서 끌려야 그 사람이 궁금해지는 것처럼, 책도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제목에서 독자의 마음을 끌지 못하면 책은 외면받는다. 절세미녀의 인생에 남자가 끊이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 제목만 봐도 베스트셀러는 짐작 가능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 하나로 인생이 활짝 피었다. 현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상실의 문제를 아련한 시적 표현으로 깔끔하게 끌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만 봐도 집어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책의 제목 <깊은 인생>은 매우 좋은 제목이다. 책이 인생에 대해서 논하고 있으니 인생이라는 말이 들어가고 어떤 인생인가를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 중, “깊다”는 것 이상의 획기적인 것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제목을 보고 책을 읽어보면 기대했던 내용과 사뭇 다를 수 있다. “깊은 인생”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것은, 도인의 인생이다. 표면의 허레허식에서 벗어나 가치의 깊은 샘물을 퍼올리는 혜안의 삶이다. 물론 완전히 책의 내용을 비껴간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책의 핵심은 더욱 놀라운 데에 있다. 책은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사람으로 변하는 바로 “그 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 역시 바로 그 한 지점으로 수렴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카프카가 자신의 소설 <변신>의 제목을 <벌레 인생>이라고 지었다면 어떨까? 하루 아침에 격변한 인생의 변이는 색이 바래버린다. 그저 남는 것은 벌레에 대한 차별 뿐이다.

 

나는 책의 제목을 <변신> 정도로 지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경영론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책이므로, 그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인간 변신론>이라든지(데일 카네기 냄새가 좀 나긴 한다만), <변신 심리>(브라이언 트레이시의 냄새가 좀 나긴 한다만), 최소한 <평범함의 졸업> 등등, 그 변화의 순간을 제목부터 포착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제목은 사람들에게 욕망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마치 소설 <향수>의 매혹적인 향기처럼, 사람들의 탁하고 잔잔한 마음의 수면에 돌멩이 하나를 풍덩 빠드리는 동요를 일으켜야 한다.

 

책장을 넘겨보자.

 

[시작하며] 부분이 있고, 다음에 [목차]가 나오며, 그 후 [프롤로그]가 나온다. 이 중, 시작하며와 프롤로그의 성격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시작하며]는 앞서 삽화처럼 집어넣은 낙타와 사자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서 풀어쓴 것이다. 마치 에피타이저 같다. 그리고 책의 내용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프롤로그]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그리고 책의 구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나는 왜 저자가 이런 방식을 채택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낙타와 대조되는 사자의 메타포를 십분 활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글을 맺어야 사자의 잔영이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즉, 퇴고의 퇴고를 반복한 저자의 신중함 덕분에 [시작하며]는 지나치게 담백한 길이가 되었고, [프롤로그]와 또 분리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사실 시작하며와 프롤로그의 내용은 합쳐도 될 것 같다. 만약 내가 저자라면,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 바로 충격을 때릴 것 같다. 사자를 앞에 배치하고, 그 뒤에 바로 프롤로그의 전반부 내용을 넣을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프롤로그]를 읽고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시처럼 살고 싶다”고 단번에 고백하는 저자의 호기, 그리고 이어지는 진심이 가슴을 후려 때린다. 독자에게 이 책의 매력을 알려주는 첫인상으로 이보다 좋은 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작하며]를 쓰게 되면, 마치 미슐랭 가이드 3스타의 코스 메뉴를 시작하기 전에, 크래커 위의 참치 정도로 요기를 달래는 느낌이다. 기대치가 떨어지고 도대체 무슨 글이 나올지 의구심이 든다. 특히 저자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긴 호흡에 대한 별 기대감 없이 나가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정도는 작가의 선택의 문제일 뿐,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사실 구본형은 자신의 저서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경영학도의 출신이면서 인문학 색채의 글을 쓴다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를 위시하여 한국 인문학에도 통섭의 바람이 불고 있지만, 아직까지 시적인 경영학은 많은 독자들에게 생소하고 또 생소한만큼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특히,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의 경영혁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장르의 파괴는 자칫 전문성의 결여로 오해받기 쉽다. 그러나 니체가 자신의 저서를 생전에 40권 팔았다고 해서, 그 것이 니체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니체에게 좀 더 내용을 전달하기 쉬운 방법을 찾아보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구본형의 <깊은 인생>은 읽을수록 한 줄 한 줄에서 피어나는 철학의 향기가 못내 사무치는 책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유와 고민이 있었을까? 노력의 결실은 결국 낭중지추이다. 위대한 책은 곧 시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구본형의 새로운 시도를 높이 평가하며 앞으로 경계 위의 책들의 시초가 될 것이라 믿는다.

 

구본형의 새로운 시도 중 하나는, 주인공 시점에서 인물들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빙의를 경험하는 것처럼 간디나 처칠, 아니타 로딕의 몸을 입고 그들의 상황으로 내동댕이 쳐지는 것이다. 새로운 시도는 늘 새로운 부대나 새로운 옷처럼 처음에는 까끌까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시도의 의도를 잘 알고 있으며,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간디와 함께 마리츠버그역에 앉아서 엉덩이와 손등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주인공 시점의 글의 글씨체를 바꾸었다면 하는 것이다. 모두 과거의 시점이므로 마치 아득한 그 시점으로 돌아가듯이 글씨체를 타이핑체나 궁서체로 바꾸었더라면 현실의 작가가 쓰는 글과 현격하게 구분될 것이다. 그러면 보다 먼 거리에서 쉽게 주인공으로의 빙의가 가능했을 것 같다.

 

나는 구본형이 예비연구원들에게 당신이 저술한 책에 대하여 논하라는 과제를 내었을 때, 정말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괴짜 나르시스트이거나 자기 검열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철권의 달인같은 인상이었다. 저자가 좋아하는 간디의 “비폭력 운동 선언”의 연설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오히려, 창칼 앞에 맨 가슴을 활짝 열어 내밀 수 있는 자가 더욱 용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구본형의 과제를 떠올릴 것 같다.

IP *.36.14.34

프로필 이미지
2012.03.01 17:37:11 *.154.223.199

킹스필드 야 이 개자식아, 아, 정말 킹스필드 쫒아내지 말아요, 10센트는 사양하겠다 요 말이 저는 젤 마음에 드는데 우짜지요? ^___^

(마음에 무찔러 들어요 ㅋ )

30분 자고 밤을 새서 쓰셨군요. 토 나오겠어요. 정말.

레몬님의 글 읽는게 재미있어요. ^^

 

저도 그랬어요.

그날 12시 마감에 간당간강, 아홉 뮤즈 증 뒷 세 뮤즈 인용문을 빼먹고,

저자에 대해, 내가 저자라면, 칼럼은 오탈자 한 번 봐 보지 못하고 냈거든요. 뭐 제가 맨날 그래요. 슬라이딩과 인편이 제 모습이니까요.

저 바로 뒤에 저 무서운 글이 올라와서 그날 죙일 쳐서 조각조각 올리고, 담날 정오까지도 다크써클 달고 매달려있었어요.

실격 퇴장이라는 휘슬과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는 장면이 자꾸 연상되고요, 아아 무서웠어요. 벌벌 떨었어요.

자려고 불끄고 누워서 엉엉 울어 버렸어요.

프로필 이미지
2012.03.05 01:12:30 *.36.14.34
이제서야 댓글을 달 여유가 생겼어요.^^ ㅋㅋ 저도 그 때 저 자신을 멍충이라고 얼마나 구박했는지 그래도 쪽팔리기는 싫어서 죽어라 쓴 거 같네요. 권윤정님 마음 완전 동감이예요.ㅜㅡㅜ 사실 윗글에서 '킹스필드 이 개 자식아.'는 자체 심의에서 자를까 말까 간이 콩알, 심장은 콩닥콩닥 했지만 개겨 보고 싶었어요. 하하, 좋게 봐주셔서(??) 캄사합니다! 우리 꼭 만나서 잘해봅시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4993
638 제 8기 지적 레이스 삼주차 -한시미학산책 문윤정 [1] id: 문윤정 2012.03.05 5365
637 [예비8기 3주차, 김이준] 한시미학산책 file [1] 레몬 2012.03.05 4401
636 8기예비연구원_3주차[한시미학산책]-한승욱 file [1] 똥쟁이 2012.03.04 4550
635 [예비8기 2주차-권윤정] 깊은 인생 file [8] 권윤정 2012.02.27 4378
634 [8기예비연구원 하영목]-깊은인생 [1] 학이시습 2012.02.27 4551
633 [제8기 레이스-2주차]깊은 인생-이길수 [1] 길수 2012.02.27 4543
632 [8기 레이스] 깊은인생_구본형 file [1] 펄펄 2012.02.27 4554
631 8기 예비연구원(허정화) 2주차 과제 -깊은 인생 file [2] 난다 2012.02.27 4293
630 [8기] '깊은인생' -장재용- file [1] [1] 장재용 2012.02.27 4844
629 [8기 레이스 - 2주차 독후감] 구본형 '깊은 인생' file [1] 이준혁 2012.02.27 4349
628 [8기 지적레이스 2주차/ 정나라] 깊은 인생_구본형 [1] 터닝포인트 2012.02.27 4274
627 [8기 예비 2주차 세린신] 깊은 인생 file [2] [4] 세린 2012.02.26 4627
626 예비 8기 연구원 지적 레이스 2주차 진성희 file [2] 샐리올리브 2012.02.26 4304
625 8기 예비연구원 2주차과제 - 깊은 인생 - 한승욱 file [2] 똥쟁이 2012.02.26 4375
624 제 8기 지적레이스 2주차- 깊은 인생 file [2] id: 문윤정 2012.02.26 4514
» [8기 예비 2주차 레몬] 깊은 인생 file [2] 레몬 2012.02.26 4412
622 8기 예비연구원들에게 드리는 시 한 편 [3] 재키 제동 2012.02.22 4307
621 [8기 지적레이스 1주차 보완/ 정나라] 감동적인 장절 보완 터닝포인트 2012.02.21 4307
620 [예비8기 1.5차;;; 레몬] 역사의 발명가, 헤로도토스 file 레몬 2012.02.21 6551
619 8기 예비 연구원분들께 드리는 작은 조언 [17] 희산 2012.02.21 4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