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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4일 22시 3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1960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조선 후기 고문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있다. 1996년 한시를 쉽게 풀어 소개한 이론서 <한시 미학산책>을 내놓으면서 대중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연암 박지원의 만남

그는 박사과정에서 18세기 옛 문장에 대해서 공부하다가 연암 박지원을 만나게 된다. 그 후 10년 동안 연암 뿐만 아니라 이덕무와 박제가 등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다. 연암 박지원의 예술정신을 살핀 <비슷한 것은 가짜다>, 이덕무의 청언소품을 감상한 <한서이불과 논어병풍>, 제자들과 함께 박제가의 시문집 <정유각집>를 펴냈다.

다산 정약용의 만남

그는 18세기 조선의 지식경영을 연구하면서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된다. 다산의 20년간 강진 유배생활에서 쓴 친필편지와 시, 교유했던 수 많은 제자와 승려들의 만남을 탐구하면서 다산의 면모를 재구성한다. 다산의 위대함을 담보해준 방법적 원리에 대해 주목하고 <다산의 재발견>,<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다산선생 지식경영법>,<미쳐야 미친다>,<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를 써냈다.

연암과 다산의 만남을 통해 저자는 학문이 풍요로워지고, 공부의 안목이 넓어지고, 삶의 눈길이 깊어졌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중한 고전을 우리 시대와 함께 호흡하기 위해 그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과 언어로 책을 써냈다. 그 출발은 기존의 연구자들이 써낸 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육성들이 살아있는 원문 자료를 직접 해석하고, 글 속에 담겨있는 사람 내면의 풍경을 탐구했다. 이렇게 저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고전을 해석하여 오래된 미래을 찾아내고 옛사람들의 지혜와 감성을 우리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저자와 닮고 싶은 점(저자의 평가)

사람들은 그에게 어려서 서당에 다녔습니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가 정작 한문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 4학년 여름방학이다. 그 때 처음, 스승을 만나게 되었고 작고하실 때까지 8년을 모시고 공부하게 된다. 스승에게서 사전 찾는 의미를 깨우치고, 가르침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한문학의 길을 걸어간다. 지금도 마음이 스산하면 스승의 손때가 묻는 사전을 곁에 모셔두고 체취를 느낀다고 한다. 그는 학문의 길에 무슨 왕도가 있겠는가? 단순 무식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스승의 옥편을 통해서 학문에 대한 마음의 자세를 다잡고 정진하는 모습을 나는 닮고 싶다.

그는 1년에만 700쪽이 넘는 책들을 세 권씩 출간할 정도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책을 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그는 다산 정약용의 지식경영법에서 얻는 정보처리방식을 활용한다. “하나가 끝나면 다음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가지 작업을 병진한다, 그리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 논문으로 발표하거나 잡지에 연재를 하고 그것들을 주제별로 묶어서 책을 낸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그의 불광불급(不狂不及)의 철학이다. 그가 이룬 성취들을 보면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을 엿볼 수 있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조선시대 지식인들 대부분이 이러한 철학의 소유자들이다. 나는 저자의 삶과 저서를 통해서 미친 듯이 몰두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내 삶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의 글은 간결하고 리듬이 살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글을 쓴 후 세 번 정도 소리 내어 읽어본다고 한다. 다음으로 아내에게 읽어보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나도 글을 쓰고 난 뒤에 아내에게 보여주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글을 눈으로 보기만 했지, 소리 내어 읽어 보진 않았다. 저녁마다 둘째 아이에게 책을 읽어줄 때가 생각났다. 큰 소리로 감정을 넣어 가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어느새 아이도 신이 나서 듣고 있다. 소리를 내어 읽었을 때, 자연스럽고 리듬감이 있어야 내용 전달이 잘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저서

‘삶을 바꾼 만남’(문학동네, 2011)

‘옛 사람 맑은 생각’(푸르메, 2011)

다산의 재발견’(휴머니스트, 2011)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휴머니스트, 2011)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김영사, 2011)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태학사, 2010)

‘성대중 처세어록’(푸르메, 2009)

‘아버지의 편지’(김영사, 2008)

‘호걸이 되는 것은 바리지 않는다’(김영사, 2008)

‘다산어록청상’(푸르메, 2007)

‘스승의 옥편’(마음산책, 2007)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휴머니스트, 2007)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 2006년 출간)

‘어린이 살아있는 한자교과서’(휴머니스트, 2006)

‘꽃들의 웃음판’(사계절, 2005)

‘죽비소리’(2005)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

‘선비의 지혜’(푸른역사, 2004)

‘한시속의 새 그림속의 새’(효형출판, 2003)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보림, 2002)

‘초월의 상상’(휴머니스트, 2002)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 2002)

와당의 표정’(열림원, 2002)

돌위에 새긴 생각’(열림원, 2000)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열림원, 2000)

비슷한 것은 가짜다’(태학사, 2000)

목릉문단과 석주 권필’(태학사, 1999)

마음을 비우는 지혜’(, 1997)

한시미학산책’(, 1996, 2010년 휴머니스트 개정판)

 

출저

http://blog.daum.net/windada11/8753547

http://jungmin.hanyang.ac.kr/

http://blog.naver.com/naver_diary/150103102249

‘스승의 옥편’(마음산책, 2007)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 2006년 출간)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2004)

‘책 읽는 소리’(마음산책, 2002)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보림, 2002)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문구

 

20p

영양의 발자취만 보고 따라가다가는 어느 순간 발자취는 끊어져버리고 영양은 간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시인이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양의 발자취뿐이다. 발자취가 끝난 곳에서도 영양은 그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정작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영양의 발자취에 지나치게 현혹되거나 그것만이 전부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시인이 쳐놓은 언어의 통발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된다.

인터넷을 하다 보면 현혹되는 단어에 그만 낚여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 속에서 발견하는 단어들은 나를 느끼게 합니다. 운이 좋으면 잃어버린 나를 찾기도 합니다.

 

23p

시는 만물이 사람에게 가탁하여 짓게 하는 것이다. 물 흐르듯 귀와 눈으로 들어와서 단전 위를 맴돌다가 끊임없이 입과 손을 따라 나오니, 시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물은 제 스스로 성색정경을 갖추고 있다. 이것이 시인의 입과 손을 빌려 언어로 형상화될 뿐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때 시인은 사물의 몸짓을 언어로 전달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따라서 시는 함축을 귀하게 여긴다. 시인이 직접 다 말해서는 안 된다.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사물을 쳐다 있으면 순간, 사물의 눈으로 나를 볼 때가 있습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가 되어 나를 쳐다 봅니다. “너는 나에게 밥도 주지 않고, 물도 제때 갈아주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이나 나를 쳐다 보니? 정말 너무 하구나!” 그 동안 금붕어에게 미안했던 마음들이 저에게 들려옵니다.

 

32p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화이니, 만약 그가 병 아닌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면 그 으스대는 양을 어찌 볼 것 인가.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먼저 안 것에 발끈이니. 정말 그의 병통을 지적해준다면 그 성내는 꼴을 또 차마 어찌 보겠는가.

강의를 처음 시작할 때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대본을 작성하고 외워서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 대부분이 졸고 있었습니다. 끝나고 동영상에 담긴 저를 모니터 해 보았습니다. 긴장하는 모습, 지루하게 반복되는 접속사, 말이 길어져서 횡설수설, 정말이지 봐주기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형편 없는 강의였음에도, 평가 점수가 낮게 나왔다고 투덜거렸으니 이명과 코골기 둘 다 가진 나였습니다.

 

41p

그리려는 대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물 길러 나온 중, 말의 꽁무니를 쫓아가는 나비, 난간에 기댄 소녀, 피리 부는 뱃사공, 남녀의 신발 한 켤레로 대신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동양화의 화법 가운데 홍운탁월법이란 것이 있다. 수묵으로 달을 그릴 때 달은 희므로 색칠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법도 이와 같다. 성동격서란 말처럼 소리는 이쪽에서 지르면서 정작 저편을 치는 수법이다. 나타내려는 본질을 감춰두거나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 본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제가 쓴 시를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하나를 그리기 보다, 둘 다 열심히 그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낸 성급함이었습니다.

 

44p

   시인은 할 말이 있어도 직접 말하지 않고 사물을 통해 말한다는 것이다. 아니, 사물이 제 스스로 말하게 된다. 시는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다. 시는 언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생물체여야 한다. 시인은 외롭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독자를 외로움에 젖어 들게 해야 한다. 괴롭다는 말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도 독자가 그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시인이 직접 나서서 시시콜콜한 자신의 감정을 죽 늘어놓는다면 넋두리나 푸념일 뿐, 시일 수는 없다.

합평할 때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이 감정표현입니다. ‘기쁘다, 슬프다, 아프다이런 관념적인 표현을 왜 기쁘고, 슬프고, 아픈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6p

 옛사람은 시를 지음에 뜻이 말 밖에 있는 것을 귀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게 하였다.” 시인은 다 말해버려서 독자가 더는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58p

황전이란 화가가 나는 새를 그렸는데 목과 다리를 모두 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적했다. “나는 새는 목을 움츠리면 다리를 펴고, 다리를 움츠리면 목을 펴지, 둘 다 펴는 법은 없다.” 알아 보았더니 실제로 그러하였다. 이 또한 예리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준다. 가짜와 진짜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다. 가짜가 오히려 더 진짜같이 보인다. 관념화된 그림, 진정을 상실한 그림은 좋은 그림이 아니다. 정신은 간데없이 손끝의 기교만으로 그리려 드니, 난초를 그린다는 것이 파가 되고, 대나무를 그렸는데 갈대가 되고 만다.

소설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시드니 샐던도 세밀한 부분을 담아내기 위해 실제 인물들을 찾아갑니다. FBI요원이 어떤 도시에 등장하면 실제 근무한 사람과 몇 칠 동안 함께 지내고 실제 배경장소에 가서 꼭 간접체험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생동감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게 됩니다.

 

59p

시인이 정을 머금어 이를 펴고, 경물을 대하여 마음을 움직이며, 물상을 그려냄에 그 정신을 얻게 된다면, 저절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정신의 향기 없이 표현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면 성정의 천진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그 결과 생동감도 찾아볼 수 없다.

 

76p

언어란 이렇게 불완전하다. 이런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한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하고, 시비가 생겨난다. 장자는 다시 덧붙인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글이다. 글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말에는 귀히 여기는 것이 있다. 말이 귀히 여기는 바는 뜻이다. 뜻에는 따르는 바가 있다. 뜻이 따르는 바는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언어가 뜻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은 고대로부터 널리 인식되어왔다. <주역> <계사상>에서는 공자의 입을 빌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고 했다.

 

78p

우는 학은 그늘에 있고, 그 새끼가 화답한다. 내게 좋은 술잔 있어, 그대와 함께 나누리라.”라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괘는 이를 군자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어미 학이 산기슭에서 울면 그 새끼는 어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화답하여 운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도 뜻 없이 던지 한 마디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좋은 술잔이 있으면 여러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함께 술을 마신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언행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군자는 각별히 언행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언어의 불완전 때문에 때로는 오해하고 싸움이기 합니다. 저는 군인 출신인 아버지 밑에서 말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나의 아내에게는 항상 존중하는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결혼 11년째 되어서도 그 마음을 변치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그 영향을 받고 저와 아내에게 화답합니다.

 

101p

당시와 송시의 차이는 보여주기와 말하기의 차이로도 설명한다. 어떤 시인은 시 속에서 자꾸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고, 또 어떤 시인은 가급적 말하는 것을 절제하는 대신 보여주기를 좋아한다. 이때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메시지의 전달을 뜻한다. 시인이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시는 이해가 쉬운 반면 자칫 식상한 느낌을 주거나 거부감을 일으키기 쉽다. 반면 보여주기만 하는 시는 무슨 말인지 갈피 잡기가 쉽지 않고 자칫 추상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쉽다. 또 이 경우 시인의 의도는 단지 이미지를 통해 전달되므로 독자의 적극적인 독시가 요청된다.

 

101p

 당시의 특징으로 거론한 영묘란 글자 그대로 그림자를 묘사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닌 것을 어떻게 묘사해낸다는 말인가. 대상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시인의 감정은 실로 그림자와 같아서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시는 그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느낌을 언어로 옮겨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반면 포진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 펼쳐 진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의론을 세워 자신의 주의 주장을 전달하려 할 때 흔히 이 방법을 사용한다.

 

101p

전송서가 <담예록>에서 사람의 일생에서 소년 시절에는 재기가 발랄하여 마침내 당시의 기풍을 띠게 되고, 노년 시절에 이르면 사려가 깊어져서 송시의 기풍을 띠게 마련이다.라고 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도 이럴진대, 문학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시풍의 변모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이러한 점은 현대의 시인도 비슷하다. 젊은 시절 격동하는 감정의 분출과 화려한 비유로 독자를 사로잡던 시인도 만년에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담한 언어에 담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본다. 이로 보면 당시와 송시의 구분은 실제로는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관되는 것이기도 하다.

2년 전에 자전적 소설을 써 보았습니다. 합평하는 자리에서 소설가는 묘사부분이 부족하다며 저에게 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공부였는데 꾸지람을 많이 들었습니다. “단순한 이미지만 나열한다, 통찰이 없어서 시의 깊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야단맞아도 깨닫지 못했는데, ‘한시미학산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107p

 인생이란 결국 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 아니겠는가. 길을 가로막고 달려드는 낙엽은 시인에게 인생은 이와 같이 덧없는 것이라고, 길은 어디에도 있고 또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스무 자에 불과하지만 길 가는 나그네의 신고와 뼈에 저미는 외로움이 생생하게 마음을 파고든다.

 

111p

 간밤의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새들은 어느새 날이 샌 것을 알아 노래한다. 봄바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꽃들은 망울을 터트린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제 스스로 알아 지저귀고 망울 부푸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구도의 깨달음도 이와 같다. 누가 알려주어서 관념으로 깨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통연자득洞然自得, 활연관통豁然貫通해야 한다.

 

112p

 봄을 찾으려고 온 산을 헤매는 것은 도를 깨닫고자 구도의 행각에 나섬을 뜻한다. 그녀는 온갖 고행을 무릅쓰며 일념으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온 산 어디에도 없는 봄처럼, 도의 실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집착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위의 시는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파랑새>를 떠올리게 한다.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맨다. 그들은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파랑새는 자기 집 새장 안에서 울고 있었는데 말이다. 깨달음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114p

   시는 우선 시가 되어야 한다. 당시와 송시의 구분이나 참여니 순수니 하는 변별은 그 다음 문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시적 언어의 규율을 무시하고 목청만 높이면 한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려 듣고 싶은 독자는 없다. 시는 결코 관념의 퇴적장 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는다. 시는 결코 독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이거나 암호문일 수가 없다.

 

  135p

   한시에는 자주 보이는 표현 중 하나가 누각 또는 난간에 기댄다는 말이다. 누각 위에는 왜 오르는가? 누각의 난간은 높은 곳에 있어, 그곳에서 보면 먼 곳에서 오는 사람을 잘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난간에는 왜 기대는가? 기다림에 지친 까닭이다.

 

  175p

   명나라 때 사진은 <사명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은 시의 매개이고, 은 시의 배아이다. 이 둘이 합하여 시가 된다. 몇 마디 말로 만 가지 형상을 부려서 원기가 혼성하니 그 넓음이 가엾다.” 무심히 경물과 마주하여 마음속에 정이 일어난다. 경이 정의 매개가 되는 까닭이다. 가슴에 자욱한 정을 품고 경을 바라보면 무심한 경물이 내 마음의 빛깔로 물든다. 정은 경에 의미를 불어넣는 배아인 셈이다. 정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경만 가지고 시가 되는 법도 없다.

 

177p

정과 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미묘한 줄다리기는 시 감상의 즐거움이다. 시인은 가장자리를 굳이 감추려 들고, 읽는 이는 경물 안에 감춘 시인의 정을 자꾸 들춘다.

 

  186p

   벽옥 됫박이 종일 명주를 달아 채웠다간 들이붓고 채웠다간 들이붓기를 되풀이한다. 벽옥 됫박은 다름아닌 푸른 연잎이다. 무수한 빗방울이 맑은 구슬로 넓고 푸른 연잎 위를 덱데굴 구른다. 옥구슬이 꽤 모여 묵직해지면 그제야 흡족해서 기우뚱 연못 위로 말구슬을 쏟아 붓는다.

 

  197p

   이상 몇 수의 시에서 보듯 시인이 아무리 경만 말해도 그 속에 어느새 정이 녹아 든다. 시인은 눈앞의 여러 대상 중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렌즈야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초점을 맞추는 시인의 선택에 감정이 스민다. 시 속에서는 어떤 경물도 포착과 동시에 주관의 색채로 물들고 만다.

 

  202p

   시는 찬 샘물이다. 시를 잘 쓰려면 물의 선변(善變)을 배워야 한다. 굴원의 시와 장자의 산문에는 강개의 비문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강개는 어디까지나 돌에 부딪혀 난 여울의 소리였지. 악악대며 떠드는 왜가리 소리가 아니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시의 법은 점차 시끄럽고 번다 해져 옛사람의 정신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수다스럽게 말하고 아프다고 끙끙대는 소리가 시의 내용이 되고 말았다. 심상(尋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말라. 그러나 진정한 시법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최후의 현관(玄關)이 있다. 그 현관 앞에 서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여는 법은 아무도 일러줄 수가 없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제 손으로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216p

   시를 찬찬히 읽고 난 정곡이 말했다. “4구의 자는 자로 고쳐야 조매早梅가 되겠네.” 이 말을 듣고 제기가 탄복했다. 쌓인 눈 속에 피어난 매화의 돌올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는 확실히 여러 가지에 핀 매화보다 단 한 가지에 먼저 핀 매화가 함축적이면서 도약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221p

  일자사의 첫 번째 미감 원리는 의미의 중복을 피라하.’는 것이다.

시는 중복을 꺼린다. 한 글자도 넘치거나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 절제된 경지를 한유는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지 않고, 간략하되 한 마디도 빼먹지 않는다.”한 글자만 더하거나 빼도 와르르 무너지는 그런 글, 그런 시를 쓰라는 주문이다.

 

223p

두 번째 미감 원리는 여운을 남기고 호응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여운은 추상의 여백에서 생긴다. 시는 단정적 언사를 꺼린다. 사물과 시인이 빚는 의경은 카메라 렌즈처럼 또렷하게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러 초점을 흐리는 데 묘한 맛이 있다. 그래도 의경의 호흡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227p

세 번째 미감 원리는 시상詩想의 온유돈후를 중시하라.’는 것이다. 감각적 직설보다는 에둘러 말하는 데서 온건한 맛이 깊어진다. 모난 말보다는 각지지 않는 표현에서 중후한 체취가 풍겨난다.

 

229p

  일자사 이야기가 보여주는 한시의 미감 원리는 물론 이 세 가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 경계에는 더 많은 변주들이 있다. 일자사는 한 글자를 놓고도 무게를 달아보고 섬세한 말결을 음미할 줄 알았던 옛사람들의 시 정신이 빚어낸 생각의 보석들이다.

 

231p

 시인은 시안을 연마할 때 집착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시안은 시안을 감추는 장안藏眼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통찰력 없이 그저 남의 눈이나 놀라게 만드는 수사적 기교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235p

 대상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 없이 위대한 예술은 이룩되지 않는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쳐야 미친다. 비록 하찮은 기예라 해도 자신을 온전히 잊는 몰두가 있어야 비로소 성취를 말할 수 있다.  

 

 240p

 권필은 평생 벼슬길에 몸담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벼슬을 권하는 벗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게는 고서 여러 권이 있어 홀로 즐기기에 족하고, 시는 비록 졸렬하지만 마음을 풀기에 족하며, 집이 비록 가난해도 또한 막걸리를 댈만하다네, 매번 술잔 잡고 시를 읊조릴 때면 유연히 스스로 얻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니, 저 이러쿵저러쿵하는 자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241p

 가도는 매년 그믐날이 되면 반드시 그 한 해 동안에 지은 작품을 책상 위에 모아놓고, 향을 살라 두 번 절하고는 술을 부으며 빌었다. “이것이 내가 한 해 동안 고심한 자취다.” 그러고는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253p

 아무 짝에 쓸모 없는 줄 잘 알면서도 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이 시인이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표현 욕구를 옛사람들은 기양(技癢)이란 말로 표현했다. ‘은 가려움증을 말한다. 아무리 긁어도 긁어지지 않는 가려움이 있다. 이런 가려움은 어떤 연고나 내복약으로도 못 고친다. 이와 마찬가지도 쓰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표현욕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기양이다.

시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기에 정신을 피폐케 하고 진기를 소모해가면서 허구한 날 시구의 조탁에만 힘 쏟게 만드는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떠날 수 없게 만드는 마물이 있으니, 옛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마(詩魔) 라 했다.

 

267p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에는 바탕이 순박하여 꾸밈이 없고 순후하고 정직하다. 그러다가 한번 시에 빠지면 말을 요사스럽게 하고 괴상하게 비틀어 사물을 희롱하고 남을 현혹시킨다.

 

269p

지금 자신에게 시마가 들어와 있는지 알고 싶으면 위에서 제시한 여러 증상을 스스로에게 비추어보면 된다. 길을 가면서도 시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시 생각, 심지어 꿈에서까지 시 생각뿐, 그밖에 다른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어지는 증세, 예의와 염치, 체모조차 우습게 보는 태도, 눈에 띄는 사물마다 허투루 보지 않고 거기에 담긴 비밀을 찾아내겠다고 달려드는 증상이 이른바 시마 증후군이다.

 

270p

 <구시마문>에서 이규보가 제시한 시마의 다섯 가지 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붓만 믿고 찧고 까불게 만드는 죄다. 사람은 처음 바탕이 소박할 때는 화려하지 않은 꽃떨기 같다. 총명함도 눈이나 귀가 채 열리지 않는 것처럼 가려져 있다. 그러다가 허술한 틈을 타고 시마란 놈이 들어와 붙으면, 이를 빙자해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을 현혹시켜 아름답게 꾸미고, 요술을 부려 온갖 괴상한 짓을 한다.

 둘째, 천기를 누설하면서도 당돌하여 그칠 줄 모르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죄다.

 셋째, 삼라만상의 온갖 형상을 닥치는 대로 남김없이 옮겨내서 겸손할 줄 모르는 죄다.

 넷째, 제멋대로 상 주고 벌 주며, 정치를 평론하고 만물을 조롱하여,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죄다.

 다섯째, 목욕을 싫어하고 머리 빗기를 게을리 하며, 공연히 끙끙대고 인상을 써서 갖은 근심을 불러들이는 죄다.

 

283p

시마를 쫓아내겠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이규보의 경우는 오히려 행복하다. 시마가 더는 오지 않는 시인들은 붓을 꺾든지, 아니면 차라리<영시마문>이라도 지을 일이다. 배부르고 따뜻함 속에는 시마는 깃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충족된 넉넉함을 시마는 혐오한다. 무언가 결핍된 상태, 그 결핍을 채우려는 시인의 정신이 죽창처럼 곤두서 있는 지점에서 시마는 슬그머니 시인에게 스며든다. 그래서 시인은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아름답지 아니한가?

 

290p

 박지원의 <답창애>란 글이다. 창애란 이가 자신이 최근 사마천의<사기>에 푹 빠져 있노라며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그러자 연암은 <사기>를 읽는다면서 <항우본기>에 보이는 항우의 비할데 없는 용맹과, <자객열전>에서 악사 고점리가 진시황을 쳐 죽이려고 축이란 악기로 내려칠 때의 광경을 떠올리며 사마천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력에 감탄하는 것은 마치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을 하나 주워놓고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듯이 숟가락 주웠다!”라고 소리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잘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마천의 글 솜씨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그 글을 지을 때 품었던 마음자리를 얻는 것이다.

 

 연암은 그 참신한 붓을 들어 사마천의 마음을 나비를 잡으려다 놓친 소년에 견주어 설명한다. 소년은 꽃잎에 앉은 예쁜 호랑나비를 보았다. 정신을 손가락 끝에 온통 집중시켜 살금살금 나비에게 다가간다. 잡았다 싶었는데 나비는 손가락 끝에 감촉만 남긴 채 훨훨 날아가 버린다. 뻗었던 손이 부끄럽고, 전심전력의 몰두가 허망해지는 순간이다. 이거다 싶었는데 결국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잡았으리라는 자책감, 혹시 누가 내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움, 바로 이런 모종의 안타까우면서도 착잡한 마음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지을 때의 마음이라고 했다.  

 저도 좋은 책을 보면 작가 분이 글을 참 잘 쓴다.’라고 생각합니다. 지인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는 책을 권합니다. 이 글을 읽고, 작가의 마음가짐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헤아리지 않고 단지 표면적인 글에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291p

     그때 항우가 천하를 쟁패했다면, 형가의 독 묻은 비수가 진왕의 가슴을 갈랐다면 역사는 어떻게 뒤바뀌었을까? 지나간 시대 영웅들의 비분강개한 삶의 역정을 돌아보는 사마천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292p

 후세는 사마천의 이 발분저서(發憤著書)’의 정신을 높여 기린다. 연암이 강조한 사마천의 마음발분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주자의 풀이에 따르면 이란 마음으로 통하려 하지만 아직 얻지는 못한 상태을 말한다.

 

294p

 시인은 코앞에서 나비를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견디기 힘든 시련과 좌절 앞에서 주저앉지 않는 발분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 발분하는 서정 없이 어찌 남을 감동시키겠는가.

 

296p

 이들은 궁했기 때문에 좋은 시를 남길 수 있었다. 한편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시를 씀으로 해서 곤궁을 더욱 가중시키거나 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를 통해 곤궁을 잊을 수는 있었지만 털어버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곤궁을 털어낼 기회가 와도 스스로 이를 박차기까지 했다. 이때 시를 창작하는 행위는 삶에 대한 올곧음을 견지함과 같고, 시를 포기함은 현실과 타협하거나 타성에 야합하는 것을 뜻한다.

 

298p

 시궁이후공은 연원의 오랜 말이다. <논어>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고 했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송백의 굳센 절조가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다. 세한으로 낙목한천이 계절이 오자 전에 미처 느끼지 못하던 송백의 푸르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307p

 불평즉명, 발분서정, 시궁이후공 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아이덴티티, 즉 동일성은 자신을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즉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상적∙관념적 자아와 실제의 자아 사이에 어떤 편찬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궁의 상황이 가져다 준 실의나 좌절감은 시인의 내부에 그렇지 않았던 상태와의 격차를 증대시킨다. 이는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규범으로서의 자아와 그렇지 못한 현실의 자아 사이에 발생한 괴리감에 대한 인식이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 활동을 인간 내부의 두 자아를 일치시켜나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있다면, 궁의 상황은 더 나는 예술작품의 창조를 위한 충분조건이 된다.

 

호적은 <백화문화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잠과 두보는 해학적 풍취가 있는 사람들로, 궁하고 쓰라린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우스운 소리도 하고 통속적인 자유시도 쓰는 풍취를 지녔기에 궁핍하고 배고픈 중에도 미쳐버리지 않았고 타락하지도 않았다.” 궁하다고 그 궁함 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결코 풍취를 포기하지 않는 독립불구의 정신, 시의 공교로움은 이러한 정신 안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시인은 탄탈로스와도 같은 존재다. 맛있는 음식과 샘물을 앞에 두고도 영원한 갈증과 갈망 속에서 헤맨다는 탄탈로스! 시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319p

 한시 비평에서 말하는 기상론이란 바로 시인의 기질과 삶의 자세가 그의 시에 거울처럼 비쳐진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만나보지 않고도 그 사람을 알게 된다.

 

324p

 낙제하고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내의 냉대다. 당나라 때 두고(杜羔)가 과거에 낙방하고 집에 돌아가려 할 때, 아내가 시를 보내왔다.

   낭군께선 우뚝한 재주를 지니시곤

   무슨 일로 해마다 낙제하고 오십니까?

   이제는 그대 낯을 뵙기 부끄러우니

   그대여 오시려면 밤중에나 오소서.

 숫제 협박에 가깝다. 누구는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졌느냔 말이다. 낮에 말고 밤중에 오라니 남편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라기보다 이웃들 볼 면목이 없다는 타령이다. 장부가 그렇기로 제 집을 도둑고양이들 듯 할 수야 있겠는가. 이에 발분하여 용맹정진을 거듭한 그는 마침내 이듬해 과거에서 급제할 수 있었다.

 이 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번 레이스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발분하여 최선을 다해야겠다.

 

 332p

 시는 곧 사람이다. 알려 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언어가 제 스스로 말해주는 사실이다. 언어가 그 사람의 기상을 대변한다는 것은 그 연원이 깊다. 무심히 뱉은 말이 씨가 되고,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 시화에 자주 보이는 시참(詩讖)’이 바로 이를 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가슴속에 호연한 기상을 품을 일이다. 떳떳함을 길러야 한다.

 

344p

 이제현의 <곡령에 올라>조급함을 모르는 원대한 기상이 실렸다.  

  마른입 입김 불고 비 오듯이 땀 흘리며

열 걸음에 엳아홉 번 쉬면서 오르누나.

뒷사람이 앞서감을 괴이하게 생각 말라

느릿 가도 마침내는 산마루에 이를지니

 

353p

곧은 나무는 금세 도끼에 찍혀 재목이 된다. 그 가지를 일부러 구부림은 베임의 화를 면키 위해서였다. 그래도 곧은 성품은 감추지 못해 끝내 지팡이 감이 되어 도끼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그에게 화를 피할 것을 경계한 것이다.

 

355p

 말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쓴 한 편의 시가 어느 날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말 한 마디, 시 한 구절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어이 붓을 함부로 놀리랴!

     최근 SNS보급이 확산되어서 우리나라에서만 천만 명이 이용한다고 합니다. 쉽게 접근하고 말할 수 있는 편의성은 있지만 예의나 서로의 배려는 상실되고 있다. 메시지로 보내는 단어 하나 하나에 책임감을 가지고 배려심을 담아야겠다.

 

     403p

       하늘이 모자 벗고 한 점을 얻으며

       ()’가 지팡이를 잃고 띠를 하나 둘렀네.

 무슨 소리일까? ‘()이 모자를 벗으면 ()’가 된다. 여기에 다시 한 점을 얹으니 ()이다. ‘()’가 지팡이를 잃으면 ()’만 남고, 여기에 다시 띠를 하나 둘러주면 ()’가 된다. ‘견자(犬子)’, 쉽게 말해 개새끼이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서 부아가 치밀어 비꼰 시다.

 

409p

 얼마나 많은 습작의 과정을 거쳤으면 언어를 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을까. 언어를 매만지는 장인의 근성이 이런 잡체시를 낳았다.

오늘날 잡체시가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어의 부단한 실험정신, 질곡을 만들어놓고 그 질곡에서 벗어나기, 언어의 절묘한 직조가 보여주는 즐거움 외에도 잡체시는 오늘의 시단에 의미 있는 시사를 준다. 젊은 시인들이 실험하고 있는 각종의 형태시들은 기실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전통의 재현일 뿐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이 모든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수 없는 상호 텍스트화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430p

무궁화를 소인배라 비웃는 것도, 두 조정을 섬기지 않는 충신으로 기리는 것도 보기에 달렸다. 접시꽃의 일편단심을 충신이라 높일 것도 못 되고, 줏대 없는 아첨배라 욕해도 상관없다. 인간 세상의 시비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2구의 양조(兩朝)’두 아침이면서 동시에 두 조정의 의미가 된다.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근화일일영(槿花一日榮)’의 상식을 뒤엎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미를 읽었다.

 

465p

     네 다리 소반 위에 죽 한 그릇 놓였는데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누나.

     주인아 면목 없다 말하지 마시게나

     물 위에 비쳐오는 청산을 아끼노니.

  가난한 주인이 지나는 과객에게 묽은 죽 한 그릇을 내오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이다. 죽이 얼마나 묽었으면 앞산의 그림자가 얼 비쳤을까. 이런 시도 점잖은 체면에서 보면 되잖케 보이겠지만 자신의 인생을 물끄러미 관조하는 잔잔한 서글픔이 있어 좋다.

475p

  지렁이의 머리는 어느 쪽인가? 해를 피해 나아가는 쪽이다. 배는 어느 쪽인가? 바닥에 닿은 쪽이다. 성호 이익의 <관물편>에 보인다. 성호의 관찰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칠규오장을 갖추지 못한 지렁이도 제 몸의 해를 피해 이로움을 향해 나아갈 줄 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패망이 뻔히 보이는데도 눈 뜨고 그 길을 가서 제 몸을 망치고 일을 그르치는 이가 있다. 지렁이만도 못하다.

477p

  거위에게는 거위의 생리가 있다. 이를 벗어나니 병통이 된다. 그러나 보라. 자연은 자신의 리듬을 잘 알아 억지로 거스르는 법이 없다. 열흘 넘게 굶은 거위는 탐욕을 버리는 대산 자신을 잘 지켰다.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많이 먹고 뚱뚱해져 날지도 못하는, 그러고도 그 맛에 길들어 쌀을 찌우다 마침내 제 몸을 망치는 인간 거위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가.

485p

무릇 관물이라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이치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 사물은 이치를 담지 않는 것이 없고, ()이나 명()이 없는 것이 없다.

487p

  마음의 본 바탕을 굳게 지켜 거죽으로 드러나는 형상에 현혹되는 일이 없어야겠다. 위엄으로 누르고 덕으로 향기를 뿜어 일체의 작위함을 벗어 던진다. 말을 잊고 이끼 가득한 작은 뜰을 관찰한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마당을 덮은 이끼,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도 다를 게 없다.

 

488p

  결국 마음 공부는 언뜻 보아 다른 듯이 보이는 현상 속에 내재된 한 가지 이치를 수시로 자가 점검함으로써 외물에 현혹되지 않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489p

  시인은 시냇가 다락에 기대 앉아 강물에 노니는 물고기의 발랄함을 지켜볼 뿐이다. 종일 물고기만 보았는데 마음이 해맑아진다. 구름 걷힌 맑은 하늘 같다. 물속에서 노닌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490p

오늘 잠시 승진했다 하여 기뻐할 것이 없고, 또 좌천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니다. 이래서 좋으면 저래서 나쁘고, 저래서 미쁘면 이래서 언짢으니, 군자는 의연하게 제자리에 지켜 서서 변화의 기미를 보아 몸을 맡길 뿐이다. 단순히 새옹지마의 자기 위안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490p

  관물시는 만 갈래로 나뉘어 백태를 연출하는 사물에 현혹되지 않고, 그 안에 깃든 한 이치를 투시하며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작위와 편견을 배제한다. 권필의<정중음 靜中吟>이 이를 잘 요약한다.

     뜻이 차니 삿됨은 사라져가고

     마음 비니 한 이치 뚜렷이 밝다.

     고요할 제 만물을 바라보자니

     봄기운 저절로 생동하누나.

   만물 속에 답이 있다. 고요히 바라보라. 마음이 늘 문제다. 외물에 끌려 다니면 안 된다. 가만히 응시하면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 하나도 모를 것 없다. 명징하고 투명하다.

 

492p

유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감정이 객관 물태에 스며 강렬한 주관의 색채를 띠는 경우다. 무아지경은 시인의 주관 정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물아가 하나가 되어 피아의 구별이 무너진 상태다.

 

492p

    그늘진 누각에 보슬비 내려

    깊은 뜰 한낮에야 문을 열었네.

    앉아서 이끼 빛깔 보고 있자니

    내 옷 위로 스멀스멀 오르려 한다.

당나라 왕유의 <서사 書事>란 작품이다. 옅은 그늘이 지나가고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비가 그쳐 시인은 문을 열고 산책에 나섰다. 보슬비가 지나간 촉촉한 이끼 위에 가만히 앉는다. 시인의 옷깃 위로 이끼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대로 있으면 내가 곧 이끼 덮인 바위가 될 것만 같다. 우연히 빈 뜰에 나와 앉았다가 물과 아가 하나로 만나 나누는 흐뭇한 교감이다. 사물로 향하는 아의 삼투압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서로 팽팽한 표면장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균형이 깨지면서 한꺼번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제 없다.

 

494p

비를 맞고 피어나서 바람 따라 떨어지니

봄 오고 가는 소식 이 가운데 있구나.

간밤에 바람 불고 비까지 내리더니   

복사꽃 만발하고 살구꽃은 다 졌다오.

권벽의 <봄밤의 비바람>이다. 물리의 순환하는 이치를 절묘하게 꼬집어내었다. 비가 와서 꽃을 피우면, 바람은 와서 이를 떨군다. 어제 만발한 살구꽃은 진흙탕에 떨어지고, 그 자리에 복사꽃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슬퍼할 것도 안타까워할 일도 아닌 셈이다. 만발한 복사꽃을 바라보는 경이와 비바람에 떨어진 살구꽃의 빈 가지를 바라보는 허탈을 함께 포착했다. 봄은 그렇게 와서 또 그렇게 간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여기서 사물의 한 이치를 반추한다. 시인이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는데도 다분히 주관적 색채로 물들게 된 까닭이다.

 

498p

달사와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에 대해 김택영은 <수윤당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천하에 이른바 도술과 문장이라는 것은 부지런함으로 말미암아 정밀해지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진실로 능히 깨닫기만 한다면 예전에 하나를 듣고 하나도 알지 못하던 자가 열 가지 백 가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전에는 천만 리 밖에 있던 것을 바로 곁에서 만나 볼 수 있게 되고, 지난날 어근버근하여 알기 어렵던 것이 매끄럽게 쉬 이해한다.

 

499p

 깨달음이 없이는 우리 모두는 눈뜬장님일 뿐이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려 한다고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깨달음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아무렇게나 열리지 않는다. 손끝이 갈라지는 연습 없이 그저 기타 들고 동해 바닷가에 서 있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깨닫는 수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버린다. 차원이 달라진다. 속인과 달사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 차이다.

 

499p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누구나 보고 있지만 못 보는 사실, 늘 마주치면서도 그저 지나치는 일상 사물에 담긴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과 낯설게 만나, 그 낯섦으로 그 사물을 새롭게 만나는 것. 이것이 관물론이 시학과 만나는 접점이다. 시인은 격물 또는 관물의 정신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주변 사물이 끊임없이 발신하는 의미를 깨어 만날 수 있다. 히드라의 예민한 촉수와 같이 안테나를 세워 세계와 교신할 수 있어야 한다.

 

504p

 은 분별지를 마음에서 걷어내는 것이다. 명상, 즉 생각을 잠재우고, 묵상, 곧 생각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그때 남는 것은 마음뿐이다. 선은 마음을 텅 비워 본래의 나와 만나는 순간이다.

 

508p

이렇듯 말 같지 않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까닭은 단 하나다.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로 따져 알려 들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라는 뜻이다. 굳이 말로 하자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일러주는 중이니 섣불리 사변의 잣대를 들이댈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우격다짐이다.

 

510p

일본의 다쿠안 소호 화상은 유명한 검객이었다. 그는 제자인 야규 미쓰요시에게 검술에 대한 충고의 말을 남겼다. 핵심은 마음을 항상 흐르는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검술은 의식적으로 얻어진 기교를 넘어선다. 높은 경지의 검객은 자신의 적의 검의 움직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무의식의 명령에 몸을 맡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이제 그가 아니다. 실제 어떤 검객들은 적을 쓰러뜨리고 나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항상 흐르는상태로 마음을 유지하라. 흘러가는 상태에 자신의 정신을 얹으라.

 

511p

 검객은 어디 있는가, 마음이 흘러가는 곳, 사물과 내가 하나 되는 자리에 있다. 함초롬히 이슬 머금은 꽃잎 위에 칼끝 같은 깨달음이 있다.

 

515p

 인생은 물거품이요 한바탕 봄꿈이다. 성가신 가죽 부대를 벗어던지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 뒤엔 무엇이 남는가. 붉은 해가 서산에 진다. 슬프고 안타까울 일이 하나도 없다. 이렇듯 선시의 세계는 칼끝 같은 깨달음을 노래한다. 언어가 무력화되고 의미가 힘을 잃는다.

 

517p

 내게 깨끗한 것이 남에겐 더럽고, 내가 더러워 못 견딜 것도 남에겐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한번 바꾸면 모든 것이 시원스럽게 된다. 깔깔깔 웃게 된다.  

 

523p

 말을 매만져 표현을 가다듬는 것이 시가 아니다. 포단(蒲團)위에 앉아 독경 소리 가다듬는 것이 참선이 아닌 것과 같다. 마음에 문득 와 닿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토해내야 한다. 성률(聲律)이나 계율(戒律)에 얽매이지 마라. 뜻이 없이는 성률도 없다. 깨달음이 없이는 시도 선도 없다.

 

526p

   천 척의 낚싯줄을 곧장 아래 드리우니

   한 물결 일렁이자 일만 물결 따라온다.

   고요한 밤 물이 차서 고기는 입질 않고

   빈 배 가득 밝은 달만 싣고서 돌아오네.

 포물선을 긋고 낚시 줄이 떨어진다. 바늘이 물 위에 한 점을 찍자 동심원을 그리며 일만 물결이 파문을 일으킨다. 파문이 잔잔히 가라앉을 동안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깊은 밤 만뢰(萬籟)는 적만한데 고기는 입질이 없다. 애초부터 이편에서도 고기에는 마음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 빈 배엔 고기 대신 휘황한 달빛을 가득 실었다.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의 세계이다.

 

528p

 선의 화두가 그러하듯이, 좋은 시는 타성에 젖은 뒤통수를 후려 친다. 그러고 보면 문자로도 세울 수 없는 깨달음은 큰 깨달음이랄 수도 없겠다. 고려 때 혜심의 설날 법어에 이런 것이 있다.아이는 한 살 더 먹기를 바라고, 늙은이는 한 살 더 줄기를 바랄 것이다. 누가 한 해라는 시간을 정해 놓았더냐. 차라리 한 해라는 시간을 없애 버림은 어떨꼬?” 통쾌하지 않은가.

 

537p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 넣어준다. ()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이 아무나 자신의 품에 끌어안는 것은 아니다.

 

541p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고 다 산수시가 아니다. 산수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 산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산수 쪽으로 향해 가서 어느덧 물아(物我)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

   뜰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는 등불이요

   둘러앉은 산빛은 청치 않은 손님일세.

   솔바람 악보 없는 가락을 연주하니

   소중히 지닐 뿐 남에게 못 전하리.

 고려 때 최항의 <절구絶句>. 흔히 최충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뜰의 달빛이 대낮 같다. 자리를 깔자 청하지도 않은 청산이 슬그머니 들어와 앉는다. 손님이 왔으니 풍악이 없을쏘냐. 솔가지 사이로 바람이 겅중겅중 지나면서 악보로는 잡을 수 없는 가락을 들려준다. 맑고 상쾌한 경지다. 이 거나하고 해맑은 운치를 어찌 말로 다 하랴.

 

576p

 유선시는 중세적 꿈꾸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꿈꾸기는 허망한 몽상이나 환상이 아니다.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꿈을 꿀 수가 있다. 문학이 다만 실천의 도구일 때, 사회는 꿈을 꿀 자리를 잃어버린다. 꿈이 없을 때 사회 개조는 있을 수 없다.” 김현의 이 말은 바로 유선시에서 중세적 꿈꾸기가 갖는 의미를 매우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우리의 혈관 속에 내재한 원초적 상징들을 까맣게 잊고 있던 그 기호들을 유선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580p

짧은 시 속에 함축이 매우 깊다. 시인은 임진왜란으로 이 땅에서 벌어진 죽음의 참상을 남의 얘기 하듯 장면으로 포착한다. 슬픔은 간접화되고 전쟁의 체험도 배경으로 숨는다. 오히려 인생무상의 주제를 떠올리기 십상인 이 시는 그럼에도 깊은 아픔을 내재한다.

 

 

583p

시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시의 거울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바람과 애환이 그대로 떠오른다. 한 편의 시는 방대한 사료로 재구성한 어떤 역사보다 더 생생하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시사(詩史)라 한다.

시사는 시로 쓴 역사란 뜻이다. 역사를 소재로 시를 썼다는 말이 아니라, 앞서 본 이안눌의 시처럼 시인이 직접 보고 들은 당시의 일을 시로 기록해둔 것이 뒷날 사료적 가치를 지니게 됨을 두고 말이다. 시를 읽으면 그 시대가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진다.

 

603p

역사란 무엇인가? 현재의 퇴적일 뿐이다. 지금 시대의 자취를 일러 후세는 옛날이라 한다. 그렇다면 굳이 지나간 옛날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것이 곧 옛날이다. 시사는 시인의 충실한 증언이 뒷날의 역사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사시는 시인이 과거의 거울에 비춰 현재를 읽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어제의 태양은 오늘도 그대로 뜬다.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비추는 등불인 까닭이다.

 

608p

   허공을 쪼갤 듯이 그네가 솟구치자

   바람 먹은 두 소매가 당긴 활등 같구나.

   높이 솟다 저도 몰래 치맛자락 터져서

   붉게 수놓은 꽃신 코가 빼꼼히 드러났네.

 

625p

 한시에서 사랑의 노래는 기쁨의 구가는 적고 가라앉은 슬픔이 많다. 정서란 애초에 모든 것이 충족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 없다. 소중한 무엇밖에 놓여 있다는 생각, 안겨야 할 어디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마음에서 정서는 비로소 움터 나온다.

 

643p

   새로 바른 창을 닫고 수수들을 까는 저녁

   요 빗소리를 철창鐵窓에서 또 듣나니

   언제나 등잔불 돋우면서 이런 이약 할까요.

 조운의 시조 <아내에게>. 일제 때 감옥에 갇혀 지은 작품이다.

 여보! 우리도 훗날에는 오늘의 내 이 기막힌 심정을 옛이야기 하듯 나눌 날이 있겠지요.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견뎌주겠소.” 못 견디게 울컥한 그리움을 라는 한 글자에 농축했다.

655p

 옛것이 어째서 오늘에 감동을 주는가 그들은 내가 아닌데 왜 나와 같을까? 그와 나를, 그들과 미당을, 그들과 목월을 이어주는 원형질은 무엇일까? 1920년대의 시조부흥운동도 좋고, 이즈음의 생활시조운동도 소중하다. 하지만 형식의 복고에 앞서 이 원형질을 찾아나서는 일이 우선해야 할 것 같다. 형식은 변한다. 생각도 변한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이 강산, 이 흙 밟고 살아온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민 정서는 세월로도 씻을 수 없는 원형질로 남는다.

 

659p

 문학에는 정해진 규범과 형식이 있다. 새것을 추구해도 이것마저 무시할 수는 없다. 새것이 힘을 얻으려면 옛 것을 변화시키는 통변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옛 것을 새것이 되게 하는가? 어찌하면 드넓게 터진 길을 통쾌하게 내달릴까? 마르지 않는 샘물에 목을 적실까? 그 길은 방향도 없고 실체도 없다. 저마다 마음으로 깨달을 뿐 누가 일러줄 수가 없다. 목마른 자 스스로 샘을 팔 일이다. 아무리 달고 찬 샘이라도 두레박줄이 짧으면 마실 수가 없다. 의지를 확고히 다잡아도 물집 터진 발로는 먼 길을 못 간다. 시인은 깊은 우물에 가 닿을 긴 두레박줄을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먼 길에도 부르트지 않는 튼튼한 다리를 가져야 한다.

 

662p

 옛것을 어떻게 배울까? 그 껍질을 배우지 말고 정신을 배워야 한다. 당대(唐代) 고문(古文)운동을 제창한 한유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글을 지을 때 무엇을 본받아야 합니까?” “마땅히 옛 성현을 본받아야지.” 그가 갸우뚱하며 다시 묻는다. “옛 성현이 지은 글이 다 남아 있지만 그 말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어느 것을 본받으라는 말씀이신지요?” “하나도 같지 않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그 말을 흉내내면 안 된다.” 이른바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의 정신이다. 또 그는 옛사람의 정신을 본받되 사필기출(詞必己出)’, 즉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663p

 공명선은 글 한 줄 안 읽었지만 스승이란 책을 옳게 읽어낸 독서가다. 다른 제자들이 옛 경전에 눈이 팔려 있을 때, 그는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읽었다.

 

665p

 옛 것을 본받아라. 그러나 그 정신과 원리를 본받아야지. 형식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원리란 무엇인가? 부뚜박의 숫자를 조작하여 적을 현혹시킨다는 것이다. 형식이란 무엇인가? 부뚜막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는 것이다. 손빈은 부뚜막 숫자를 줄여서 이겼고, 우승경은 반대로 늘여서 이겼다. 손빈은 적진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고, 우승경은 적진에서 후퇴하는 중이었다. 방법은 반대로 했지만 이긴 것은 같다.

 

666p

 같은 배수진이었지만 한신은 이겼고 신립은 졌다. 왜 그랬을까? 배수진을 쳐서는 안 될 곳에 쳤기 때문이다. 남의 흉내나 내는 시는 결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옛길을 따르지 말라.

 

666p

 설사 우리에게 거북선이 없었다 해도 충무공이 있는 한 왜군은 해상권을 장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북선이 아니다. 그것을 운용하는 장수의 용병술이다. 아무리 해박한 이론의 무장이 있어도 그것을 운용하는 통변의 정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를 쓰는 데 이론은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더 많다.

 

670p

 이 책의 맨 처음을 연암으로 시작했으니, 이제 연암으로 끝을 맺겠다.

 본분으로 돌아가라 함이 어찌 문장만이리오? 일체의 일이 모두 그렇지요. 화담(花潭)선생이 길을 가다가 집을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는가?”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다섯 살에 눈이 멀어 이제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나와 길을 가는데 갑자기 천지만물이 맑고 밝게 보이는지라 기뻐 돌아가려 하니, 골목길은 갈림도 많고 대문은 서로 같아 제 집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했다. “내가 네게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주겠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그러면 바로 네 집을 찾을 수 있으리라.이에 눈을 감고 지팡이를 두드려 걸음을 믿고 도달할 수 있었더랍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깔과 형상이 전도되고, 슬픔과 기쁨이 작용이 되어 망상이 된 것이지요.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분수를 지키는 관건이 되고, 집으로 돌아가는 보증이 됩니다.

 

671p

 주체의 자각이 없는 현상의 투시는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내가 본래 있던 그 자리, 미분화된 원형질의 상태로 돌아가라. 눈에 현혹되지 말라. 네 튼튼한 발을, 네 듬직한 지팡이를 믿어라. 갑자기 눈이 열리기 전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차차 새롭게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볼 일이다. 문학은 발전해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3. 내가 저자라면

 

책의 구성과 주제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연암 박지원의 글을 시작으로 건강한 눈과 열린 가슴으로 한시를 바라보자라고 운을 띄웠다. 한시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옛사람들은 무엇을 노래하고, 어떤 느낌으로 썼는지 말해주고 있다. 다섯 번째~아홉 번째는 시 속에 숨어 있는 뜻과 시인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마음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열 번째~열 세 번째는 시인의 내면을 움직이게 하는 시마와 궁핍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결국, 시는 그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열네 번~열 일곱 번째는 다양한 한시를 소개하고 있다. 오늘의 시단에서 실험하고 있는 형태시들도 전통의 재현이라 말하고, 시대정신과 시 정신이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여덟 번째~스물한 번째는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얻어지는 깨달음, 타성에 젖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큰 깨달음, 자연과 하나가 되어 나를 깨달아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스물두 번째~스물네 번째는 시로 쓴 역사를 보여주면서 시는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요, 변화하는 역사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가슴속에 스민 정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눈을 감고,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던 세계로 돌아가서, 차차 새롭게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보라고 이야기한다.

  각 이야기마다 한시를 풍성한 예화로 소개하면서 쉽고 재미있게 풀어 썼다. 그리고 한시와 현대시를 비교하여 오늘날 현대시의 흐름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한시입문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고전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책으로 공감하고 있다. 그의 간결한 문장과 여운 있는 글 쓰기는 한문학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지우기에 충분했다.

  이 책이 주는 감동은 한시를 통해 옛사람들의 추구했던 가치와 정신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시인들의 생각과 삶이 시속에 그대로 표현되어 그들의 내면과 생생한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던 한시가 이렇게 소중한 깨달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저자의 우뚝한 작가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값진 보석을 만들어 낸 저자에게 감사에 말을 전하고 싶다.

 

가장 감동 깊었던 장면

  이 책은 연암으로 시작해서 연암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연암이 던진 화두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부분이 가장 감동 깊었던 장면이다.

  갑자기 눈이 열리기 전 내 앞에 놓여 있던 세계, 익숙해져 있던 세계, 나와 사물 사이에 아무런 간극도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그 세계가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려 본래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차차 새롭게 열리는 빛의 세계를 바라볼일이다. 문학은 발전해 왔는가, 아니다. 다만 변화해왔을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라. 먼저 네가 들어가야 할 대문부터 찾아라.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그 여운을 음미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순간 떠오른 것은 고등학교 때, 처음 시를 느꼈을 때였다. 선생님이 낭독하는 시를 눈을 감고 들었다. 그 시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할지 희미하게 보여주었는지 모른다. 그 때는 확실히 보지 못했다. 지금 다시 눈을 감았을 때, 내가 들어가야 할 문이 어떤 문인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문을 두드리고 있다.

 

책의 보완점

  이 책은 개정을 통해서 덜어내고 깎아내는 작업을 거쳤다. 앞 부분을 읽으면서 허전하게 느꼈던 현대시의 연결은 후반부에서 채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이 책을 아껴준 독자를 배려하여 큰 틀을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처음 책을 내는 저자의 입장이라면 세부적인 이야기 구성은 그대로 두더라도 5개의 큰 장으로 나누어서 구성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1장은 한시의 새로운 만남, 2장은 시인의 내면이야기, 3장은 한시의 다양한 형태미, 4장은 깨달음의 미학, 5장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 구성해 보았다. 훨씬 짜임새 있고 독자가 한 눈에 구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틀을 정해 놓는다면, 한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오히려 딱딱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독자의 사랑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이유는 한시에서 선인들의 생생한 삶은 알기 쉽게 이야기로 풀어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이야기의 힘을 절실히 느꼈다. 전 세계 아이들이 사랑하는 애니매이션 토이스토리를 만든 '픽사'가 생각났다. 그 회사 정문에는 이런 슬로건이 붙어있다.

“Show, Don’t 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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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0 13:52:35 *.154.223.199

소설을 썼고, 묘사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시 수업도 들으셨군요. 열심이세요.^^

정민 선생님의 에필로그에서 연암 박지원이 했던 말 '다시 눈을 감아라'

다시 눈 감은 똥쟁이님에게로 고등학교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청춘'이 온거로군요. 그 칼럼이 여기서 왔군요.

 

똥쟁이님의 오탈자 없는 깔끔하고 정갈한 글 잘 읽었습니다.

저의 오탈자 투성이 글이, 다른 분들 글을 돌아보면서도 발걸음하지 않았던 못난이 인형같은 저의 독후감이 인제 슬슬 궁금해집니다.

한시미학산책은 보라파란색으로 내 생각을 쳐넣기가 벅찼더랬습니다. 당최 뭔 소린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밑줄 그은 부분을 성실하게 타이핑을 하고, 다시 읽으며 글자를 다듬는 과정도 공부겠구나 다른 분들의 성실한 글을 보며 알아집니다.

정민선생님의 '학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단순 무식하게 열심히 하는 것만이 방법이다'는 투의 말씀이 멋집니다.

 

똥쟁이님, 저도 저 과거 낙방 선비의 아내의 시에 뜨금합니다.

제가 2차 레이스 참여한다고 동네방네 자랑질을 좀 했어야지요. 슬슬 걱정이 됩니다. 먹튀를 할 수도 없고 이거 참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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