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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0일 08시 36분 등록

헤로도토스 역사 (Historiae)

(박현태 , 동서문화사)

 

1. 희랍인 헤로도토스

 

■ 헤로도토스 (BC 484~425)

서양 문명에 역사라는 개념을 안겨준 첫 사람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고 그의 생을 바쳤다. 여느 시대의 역사가 그러하듯 전쟁은 그 시대를 규정짓는 커다란 사건인데 지금 이 땅의 모습을 대변하는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 한국전쟁이듯 그가 살았던 시대의 변곡점 또한 전쟁이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책 역사의 많은 부분을 페르시아와의 전쟁과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 등 전쟁의 모습에 할애하며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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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보드룸(옛 헬리카르나소스) 에 있는 헤로도토스 象]

 

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가상 인터뷰 형식을 빌려온다. 이름하여 안녕하세요? ‘헤로선생님이다. (유치함을 용서하시라)

 

■ 안녕하세요? ‘헤로선생님~

(: 나의 질문 : 헤로도토스의 대답)

 

▶ 사람들은 선생님이 세기의 여행자라고도 할 만큼 많은 여행을 하셨다고들 하는데 선생님의 역작 역사는 그 여행에 힘입은 바가 컸나요?

 

▷ 질문의 의미를 대충 이해하겠네. 내가 직접 여행하며 기록했는지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선, 사실을 얘기하자면 직접 여행하며 보고 들은 내용들을 기록하였네. 회상해 보니 그 많은 길들을 어떻게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책에도 나와 있듯이 내가 직접 보고 들었다라는 표현은 모두 그 지방에 있을 때의 기록들이라네. 특히 사모스섬에는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책에서 사모스에 대한 내용은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네.

 

▶ 당시 페르시아 지역에도 다니셨는데 페르시아 전쟁 이후 페르시아가 외국인을 대하는 남다른 경계는 없으셨는지요?

 

▷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 사람들에게 적대감이 상당했다네 특히, 스파르타에 대한 분노는 컸었지. 그러나, 페르시아라는 제국은 다원성을 존중하는 문화로 인해 강성해졌기 때문에 전쟁 이후라도 그 본 모습은 많이 잃지 않았다네.

 

▶ 그 많은 문헌과 구전 기록들을 어떻게 집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파피루스는 그 시대 기록 체계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네. 알다시피 많은 양을 구할 수 없을 뿐더러 많은 양의 기록을 남겨 전하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집안의 주름이 없었던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네. 그대의 시선으로는 귀족으로도 구분할 수도 있을 정도였지.

 

▶ 그 시대에 귀족이었다면 정치 참여도 하셨겠네요.

 

▷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당시 독재제의 참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친척들과 항쟁하기도 하였다네. 나는 전제정치가 매우 싫었어. 당시 위정자들에게도 반감이 컸었지. 그러나 나의 목숨을 걸고 싸울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힘을 쏟지는 않았다네. 그러나, 송사에 휘말려 사모스섬 등 많은 지역에서 본의 아닌 망명생활도 하였어.

 

▶ 존경하시는 분이 있으시다면

 

▷ 아테네에 잠시 머무는 동안 나는 페리클레스와 소포클레스(비극 작가)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네. 그 때 아테네는 너무도 아름다운 도시였네. 자유의 공기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토론하고 학문을 얘기했다네. 나는 아테네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당시 아테네의 왕이 페리클레스였다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국가을 실천하시고 계셨던 분이지. 나는 그분을 열렬히 숭배한 나머지 그분의 실천에 같이 동참했다네.

 

역사의 구성에 총9권의 꼭지로 만들어졌는데 권마다 붙어있는 이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궁금할 줄 알았네. 그건 뮤즈 신들의 이름들이라네. 내가 집필했을 때에는 그렇게 분류하여 만들지는 않았는데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교정자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전해 들었을 뿐이네. 그리고 그 뮤즈의 이름들이 들어간 권의 분류도 단순히 뮤즈의 수에 맞추었기 때문에 크게 의미를 부여 할 필요는 없으니 개의치 말고 읽으시게나.

 

▶ 어떤 연유가 선생님으로 하여금 역사를 서술하도록 하셨나요?

 

▷ 눈물겨운 생이 그냥 흐르도록 놔둘 수가 없었네. 아테네의 자유로움과 이상 국가 건설을 위한 실천은 나에게 행동을 요구했고 나는 역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네. 이 책의 저술로 내 말년을 쏟아 부었다네. 개별적인 사료들의 수집은 물론 사관의 정립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퇴고를 거친 역작인 만큼 잘 읽어 주기 바라네.

 

▶ 선생님의 책에는 허구가 넘쳐난다는 후대 사학자들의 지적들이 있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개인적으로 역사는 사실에 입각해야 하지만 구전되고 대대로 전해지는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도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네. 그래서 이 책을 집필할 때의 원칙은 개개인이 말하는 바를 들은 그대로 서술하는 것이었지.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어서 내 책의 전체에 적용하였다네. 덧붙이자면 나는 한때 지리학을 공부하였었는데 책을 집필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되었었지. 자부하는 것이 있다면 구전, 설화의 내용과 지리학적 지식이 책의 곳곳에 묻어 있어 독자에게 위화감은 없을 것이네. 또한, 서술에서 나타날 수 있는 탈선이나 정체에도 동요하지 않는 안정된 서사로 구성할 수 있었지.

 

 

2. ‘역사속으로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 헤로도토스의 언어, Ü : 나의 언어)

 

1권 클레이오 (Kleio)

 

□ 인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리스인이나 이방인이 이룩한 위대하고 놀라운 갖가지 업적, 특히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었는가에 대한 사정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갈 것이다. (P. 13)

 

Ü역사기술의 목적을 얘기하고 있다. 망각의 두려움이 기록으로 이어지는 세상의 눈물겨움의 시작이다. 바로 이 무엇 때문에로 인해 헤로도토스는 탐스럽다.

 

□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적이라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페르시아인은 아시아와 아시아에 사는 비()그리스 여러 민족을 자기들에게 소속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유럽과 그리스는 자기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 15)

Ü 여전히 이어지는 민족 문제의 서막인가. 헤로도토스에게 편협하지 않음을 기대했던 건 무리였나. 세계관의 차이는 시작된다.

 

□ 그리스인에 대한 악업(惡業)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인물,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그 인물의 이름을 여기에 들고, 이어 사람들이 사는 나라들(고을들)에 대해서 그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하나하나 논해가면서 이야기를 해나가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때 강대했던 나라들이 대부분 이제는 약소해지고, 내가 살았던 시대에 강대했던 나라도 한때는 약소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운은 결코 오래도록 계속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는 나는,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똑같이 밝혀 다루어가려고 한다. (P. 15)

 

Ü 정말 하나하나씩 논한다. 지리에 밝고 신화에도 밝다. 족보나 계보에도 밝아서 얘기가 진행되는 중에 뜬금없이 아무개는 누구의 아들이고 어디서 태어났는데 그 마을은 어디 옆에 어디다. , 어떻다를 설명하며 디테일을 더한다. 어떻게 알아내었을까. 감탄했으나 읽는 자로서는 큰 곤욕이 아닐 수 없다.

 

□ 크로이소스 이전에도 킴메리아인이 이오니아에 침공한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여러 나라의 정복이 아니라 단순한 약탈이 목적이었다. (P. 16)

 

□ 왜냐하면 밀레토스인이 해상을 제압하고 있기 때문에, 육군에 의한 봉쇄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P. 20)

 

Ü 시대의 Key word가 나왔다. 철학자 강유원은 당시 희랍의 이 시대를 약탈전쟁이 열쇳말이라 했다. 기회가 되는대로 부연설명을 이어가겠으나 물산(物産)이 풍부하지 않은 지리적 조건은 약탈로 이어지게 되는 필연성을 제공하는데 그래서, 이 섬나라 도시국가들은 제해권이 중요해진다.

 

□ 여기까지는 필자가 델포이인으로부터 들은 말인데 (P. 21)

 

Ü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풍문이나 들어서 옮긴 말이 많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허구라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게 되지만 이런 점 때문에 역사는 풍부해 진 것이라 믿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그 당시 대중교통 시스템으로는 도저히 이를 수 없는 곳까지 직접 걸어 다니며 여행했다고 알려지는데 그것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얘기들을 직접 듣고 기록했다면 인류 최초의 Interviewer로써 손색 없다.

 

크로이소스와 솔론

아테네의 손님이여, 그대의 소문은 이 나라에도 우뢰처럼 들리고 있소. 그대가 현자라는 것은 물론 지식을 구하여 널리 세상을 구경하신다는 것도 들었소. 그래서 그대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대는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만난 일이 있소?’

 

 크로이소스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자부하고 이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런데 솔론은 왕에게 아부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대로 대답하였다.

 

∙∙∙ 인간은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행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지언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

 

어떠한 일에 대해서나 그것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그 결말을 끝까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에 의해 울타리 너머로 행복을 잠깐 보았으나, 결국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솔론의 이 이야기가 크로이소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현재 있는 복을 버리고 모든 일의 결말을 보라고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바보라고 생각한 크로이소스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솔론을 떠나 보내고 말았다. (P. 24~28)

 

Ü솔론이라는 사람의 행복론이다. 솔론을 떠나 보낸 크로이소스는 훗날 무리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죽임을 당하기 직전, 솔론이 한 말을 떠올리며 슬픈 목소리로 세 차례나 솔론의 이름을 불렀다’. (P. 59) 직언하는데 거침이 없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늘 배척 당하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 가려서 듣는 재주가 있다. 그리고, 꼭 마지막에 후회를 한다. ‘만약 그 때 그의 말을 들었다면하고 말이다. 있을 때 잘하자.

 

□ 손님이여, 그대가 스스로 죽음을 선고했으니 나로서는 이미 그대를 충분히 벌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대가 본의 아니게 이 일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의 재난은 그대의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부터 나에게 일어날 것을 경고하신 어느 신께서 하신 일이지. (P. 32)

 

Ü 신이 한 일. 당시 전쟁의 여부, 죽고 사는 것, 정책의 시행과 중단 등 모든 일은 신전에 있는 무녀(巫女)의 계시에 의해 움직여 진다. 당연히 그들(무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컸다. 신을 연결하는 인간의 의사결정에 의해 나라의 대소사가 결정되는데 아이러니하다.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이 아직도 인류사를 지배하고 있으며 모든 폭력의 시작은 신의 이름을 빌리고 있으니. 지혜의 진보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비약인가.

 

□ 크로이소스는 일일이 그 이름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건을 봉납했는데 자기 아내의 목걸이나 허리띠도 봉납하였다.

 

Ü 절박하다. 이는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허하는 제사에서 신께 재물을 바치는 대목이다. 전쟁의 필연성을 다른 방법으로 정당화 시키는 것인데 그 만큼 군사력이 급히 증강되고 제해권이 빠르게 페르시아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임을 반증한다. 페르시아에 의한 희랍 세계의 약탈의 제약이 본격화 되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다.

 

□ 키루스가 도착하고 크로이소스와 대치하여 진지를 구축하자 두 군은 프테리아 지구에서 힘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두 군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결국 승패는 나지 않고 해가 지자 전투는 끝이 났다. (P. 52)

 

그들이 전투를 하는 방법은 말을 타고 큰 창을 휘두르는 것으로 그들의 승마 기술은 탁월했다. (P. 54)

 

두 군에서 300명씩 전사가 나와 싸워 이긴 쪽이 문제의 지역을 차지한다는 협정이 성립되었다. 두 나라는 대등하게 싸워 마침내 마지막으로 600명 중 세 명만이 살아남았다. 이 세 사람만이 남았을 때 해가 넘어갔다. (P. 56)

 

, 300명 중에서 살아남은 단 한 사람인 오트리아데스는 같은 부대의 전우가 전사했는데 자기 혼자 스파르타로 돌아온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티레아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P. 56)

 

Ü 이 시대 전투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자면 대부분의 성인 남성은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전쟁의 시대였다. 무거운 창과 방패를 들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방진을 짜서 전투에 임했다. , 이 시대 도시국가의 성인 남성은 모두 전우였다. 그리고 칼은 매우 크고 무뎌서 상대를 베어 죽이는 용도가 아닌 때려 죽이는 용도였다. 자연히 체력소모는 크고 전투는 반나절 이상 가질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투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시민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전우애였는데 위의 헤로도토스가 묘사한 오트리아데스의 자결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대의 시대상은 병영의 시대였으며 전장의 큰 윤리는 우정의 무대로 대변될 수 있겠다. 이상의 전투 모습은 강유원의 책 서구정치 사상 고전읽기에서 차용하여 각색했음을 밝혀 둔다. ‘역사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배경 지식이 될 수 있고 많은 시사점을 아울러 얻을 수 있겠다.

 

□ 신께 봉사를 잘한 자를 속이는 일이 신의 습관이냐고 묻는 것을 허락하옵소서. (P. 61)

 

Ü 그 많은 봉납품을 신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내몰렸던 크로이소스의 신에 대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드디어, 구체화된 인간의 삶이, 신에게 반기를 든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철학자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과연, 혜안이다.

 

나는 그 어떤 것도 신을 통해서 정의하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신이지, 그 역은 아니다. 내가 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나는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의 현존(existence)으로부터 출발하지는 않는다. 신의 추상적인 관념은 인간적 상황을 명백하게 해줄 수 없는 관념이다. 반대로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 준다.”

 

□ 리디아라고 하는 나라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한 건조물이 있다. 크로이소스의 아버지 알리테스의 무덤이 그것으로 토대는 거석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부분은 흙을 쌓아 올린 것이다. 이것을 만든 것은 상인이나 장인(匠人) 그리고, 매춘부였다. 그 중에 매춘부들이 한 일이 가장 많았다. 왜냐하면 리디아에서는 아가씨들이 모두 몸을 팔아 시집을 갈 때까지 자기 지참금을 벌었기 때문이다. (P. 64)

 

Ü 우선, 왜 남자들이 아닌 사회적 약자들이 노역에 동원 되었을까. 바로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아가씨들의 몸 파는 일이 고대의 종교적 매음이라고는 하나 성적 금기가 폭력 수준에 이르는 오늘날에 비하면 그 시대 성적 자유의 공기는 비할 것이 못 된다.

 

□ 그런데 이와 같은 놀이를 발명해서 어떻게 기근에 대처했는가 하면, 이틀에 하루는 식사를 잊도록 아침부터 밤까지 놀이를 한다. 다음 날은 놀이를 그만 두고 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18년 동안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천재(天災)는 가라앉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P .65)

 

Ü 그 시대에도 몰락을 막는 사회적 방어기제가 가동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곳(지금의 그리스 지방)은 척박하다. 제해권이나 교역권은 물산이 나지 않고 자연재해가 많은 이 지역에서는 도시국가 형태를 지킬 수 있는 근간이 되는 권력이었다. 전쟁은 아마도 이런 경제적 문제로 인해 발발하지 않았겠는가. 유사한 견해는 거듭된다.

 

□ 여기서는 몇몇 페르시아인, 그것도 키루스의 업적을 과대하게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설에 따라서 기술을 해 나갈 생각이다. (P. 65)

 

Ü 헤로도토스가 역사에 대한 엄격함과 자기검열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의 말을 전하는 금강경도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한다.

 

□ 이렇게 해서 왕정을 실시할 것을 서로 합의한 것이다. (P. 67)

 

Ü 합의에 의한 , 듣던 대로 선진적이다.

 

□ 페르시아인 여러분, 이것이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실정이다. 내 말을 따르면 노예와 같은 일은 하지 않고 오늘과 같은 좋은 일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내 말을 거스르면 어제와 같은 괴로운 작업을 수없이 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자유의 몸이 되어라. (P. 81)

 

Ü 키루스가 쿠데타를 시작하며 했던 말이다. 당시 이 연설을 하는 상황을 재연해보면 참 멋있을 것 같다. Speech는 페르시아인에게 자유라는 영감을 얻게 했을터.

 

□ 페르시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을 술을 마시면서 상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 상담에서 모두가 찬성한 일을 상담의 회장이 되었던 집 주인이 이튿날 술이 깬 상태로 있는 모두에게 제기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찬성을 하게 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한다. 또 술에 취하지 않는 상태로 예비상담을 한 일은 술자리에서 다시 결정을 하게 된다. (P. 86)

 

Ü , 현명하다. 냉정함과 열정의 체온이 유지된 결정의 방법. (헤로도토스는 지금 페르시아인들의 특성을 열거하고 있다.)

 

□ 세계에서 페르시아인 만큼 외국의 풍습을 도입하는 민족은 없다. (P. 87)

 

Ü다원성’ ‘이질적 문화의 가감 없는 수용’, 예나 지금이나 제국의 덕목이다. 플라톤이, 피타고라스가, 탈레스, 데모크리토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페르시스,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로 유학하여 공부했다는 사실은 새롭다. 특히, 천문학, 수학, 물리학, 기하학과 신학까지 이 시대 페르시아 학문의 여향은 지대했다. (Farrokh, Shadows in the Desert, 2007)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새로운 이유는 아마도 앵글로 색슨의 열등감이 고대의 ‘Pax Persiana’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헤로도토스는 지금 페르시아인들의 특성을 열거하고 있다.)

 

□ 아이에게는 5세에서 20세까지 사이에 단 세 가지 것만을 가르친다. 승마, 궁술, 그리고 정직이 그것이다. (P. 87)

 

Ü , 현명하다. 그들의 현명함에 감탄한다. 지덕체 기반 전인교육의 모태 아니겠는가. 지금 한국의 교육 당국이 과거로 되돌아가 배워야 할 터.(헤로도토스는 지금 페르시아인들의 특성을 열거하고 있다.)

 

□ 지금 말한 매우 좋은 풍습과 더불어, 또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다. 아무리 국왕이라도 단 한번의 죄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 그 밖에 일반 페르시아인도 자기 하인에게 한 번만의 과실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주인은 잘 생각한 끝에, 하인이 범한 나쁜 일이 그의 공적보다 크다고 여겼을 때 비로소 벌을 준다. (P. 87)

 

Ü 재활의 사회적 장치를 법제화 하지 않았나. 또 감탄이다. 제도적 장치로써 나라를 운영하자는 고대 중국, 한나라 법가사상이 울고 갈 만하다. 한비자는 페르시아를 표절했는가.

 

□ 한편, 키오스가 팍티에스를 인도한 뒤 마자레스는 팍티에스와 함께 타바로스를 포위 공격한 자들을 공격하고, 프리에네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기고 마이안드로스 평야 일대를 군대로 약탈, 유린하고 마그네시아에도 같은 타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마자레스는 그 뒤 얼마 있다가 병사하였다. (P. 99)

 

 Ü 마자레스는 자신을 공격한 자를 공격하고 키메인은 자신을 공격한 마자레스(페르시아인)를 다시 공격한다. 이 장면은 이 땅의 현대사가 아른거려 아프다. 불과 60년 전 우리는 보도연맹, 양민학살, 여순반란 등 보복으로 얼룩진 피의 역사를 기억한다. 스스로를 살육하고 복수하고 보복하며 삶을 소비하기엔 우리 생은 너무도 임시적이지 않은가.

 

□ 그런데 많은 크니도스인이 운하를 파는 동안에 암석의 파편으로 몸의 여러 부분, 그것도 특히 눈에 상처를 입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런 일이 도가 지나쳐서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신의 뜻이 아닌가 여겨졌다. 그래서 신탁을 받기 위해 델포이에 사자를 보내어 그 원인을 묻게 한 결과, 무녀는 단장 육각운의 시구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엿다고 크니도스인은 전한다.

 

지협에 성채를 구축하는 것도, 호를 파는 것도 안 된다.

제우스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으면 섬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P. 106)

 

Ü 신탁의 의견은 탁월하다. 위의 시구의 의미는 나아가 모든 인위를 경계하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과학이 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가 야만적인 신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야만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데르수 우잘라라는 책에서 시베리아 대륙의 원주민 데르수는 박스속에서 사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이 인위가 아닌가. 완당의 글씨 版殿은 아이와 같은 것이고 고흐의 그림 의자는 흡사 초등학생의 시선이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이와 같이 모두 인위가 없다. 꾸밈 없는 것이 가장 아름다움임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은 해가 뜨고 달이 지듯 하자.

 

□ 바빌론에서 8일 여정의 거리 (: 하루의 여정을 헤로도토스는 평지에서 200스타디온 즉, 37KM, 산지에서는 150스타디온 즉, 28KM로 계산하고 있다)

 

  Ü 엄청나다. 축지법을 쓰고 있다. 성인 남자가 빨리 걸어 갈 수 있는 시간당 거리는 산지에서 1KM~1.5KM 로 알려져 있다. 12시간을 꼬박 걸어도 20KM를 넘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매우 빠른 것이다.

 

□ 세라미스에 이어 두 번째로 여왕이 된 여성은 그 이름을 니토크리스라고 하였는데 먼저의 여왕보다도 훨씬 총명했다. 그녀는, 내가 지금부터 기술하려는 것과 같은 여러 기념물을 남겼다. 또 메디아의 강대한 세력이 끊임없이 확장을 계속하여 도시가 차례로 점령되어 마침내는 니노스(니네베)까지 함락되는 것을 눈 앞에 보고 최대한의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P. 111)

 

그 무렵 마사게타이에서는 남편을 여읜 토미리스라고 하는 이름의 여자가 왕이었다. 키루스는 사자를 통하여 자기 아내로 삼고 싶다며 이 여왕에게 구혼하였다. (P .123)

 

  Ü 사적 견해가 가능한지 모르겠다.(이미 많이 해 왔으면서 조심스레 되묻는다) 이 부분을 읽다가 여성 지도자에 대한 사견이 덧씌워져 한 참을 밖을 바라보았는데 그냥 넘어가기 뭣해서 사족을 달기에 이른다. 개인적으로 여성지도자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적 남성보다 더욱 진한 남성스러움을 풍기는데 실제 이들의 아이덴티티는 마초적 남성에 뒤지지 않았다. 가까이는 영국의 수상 대처가 그러했고 멀리는 측천무후가 그러하다. 이것이 편견이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도무지 제 자신이 약자(라는 말도 편견이겠다. 이해하시라)로써 약자를 위한 적을 본 일이 없다. 그래서, 약자가 집권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즐겁기도 하지만 근자의 한국의 정치적 모습을 이러한 역사와 포개었을 때는 고개가 흔들어진다.(전 세계적인 놀림감으로 전락될까 두렵다. 피노체트의 딸이 집권하고 있는 파블로 네루다의 조국, ‘칠레를 생각해보라) 생각은 여기서 멈춰 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보고 싶다. 연변 출신의 조선족 여성이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정치적 지형을.

 

2권 에우테르페 (Euterpe)

 

□ 인간계에 한정해서 그들이 하는 말 중 일치하는 것은, 1년이라는 단위를 발명한 것과 1년을 계절에 따라 열두 부분으로 나눈 것은 이집트인이 최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별을 관찰하여 발견했다고 말하였다. 나는 달력을 계산하는 방법은 이집트인 쪽이 그리스인보다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P. 131)

 

Ü 헤로도토스의 견해는 옳다. 그러니 그리스에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 이집트로 유학 길에 올랐을 터다. 그리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류는 이집트로부터 시간을 빚진 것이다. 이보다 오래된 중국 고대 국가 하, , 주로부터는 (주역)’ 자체에 대한 인류사적 부채를 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집트의 풍습

이집트인은 거의 모든 점에서 다른 민족과는 정반대의 풍속과 습관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여자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데 남자는 집에서 베를 짠다. ∙∙∙ 신들의 사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만 이집트에서는 머리를 짧게 깎는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의 근친은 머리를 깎고 상복을 입지만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으면 그때까지 짧게 자르고 있던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다른 민족은 가축과 따로 생활하지만 이집트인은 가축과 같이 산다. (P. 147)

 

이집트인은 누구나 암소를 그 어느 가축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중히 숭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집트인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리스인의 입에는 키스를 하지 않고 또 그리스인이 사용한 식칼이나 구이꼬치, 냄비는 사용하지 않으며 깨끗한 소의 고기도 그리스의 식칼로 자른 것은 입에 대지 않는다. (P. 150)

 

Ü 서로가 서로를 야만이라 한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집트인에 대한 약간의 비하를 더하여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짐작컨대  앵글로보다는 이집트인이 당시에는 훨씬 덜 야만적인 것 같다. 이 또한 사견이다.

 

□ 헤라클레스는 어떻게 해서든 제우스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제우스는 그에게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결국 제우스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 숫양 한 마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그 목을 자른 다음, 숫양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잘린 목을 앞으로 내밀며 헤라클레스에게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이집트인이 제우스의 신상을 숫양의 머리를 한 모습으로 만드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 풍습은 이집트인으로부터 암몬인에게도 미치고 있다. 암몬인은 본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로부터 이주해 온 민족으로 그 언어도 두 나라 언어의 중간에 해당되는 것을 쓴다. 그들이 암몬인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이 고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집트인은 제우스를 아문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P. 152)

 

Ü 신은 결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간절하지 않으면 신은 다가가지 않는 것이다. 당시 간절함의 정도를 더 하기 위해 더 크고 싱싱한 동물의 피를 내어 바쳤고 나아가 젊은 여자의 몸을 바쳤을 것이다. ‘아문, 암몬은 숨은 것이라는 의미로 모든 일에 때가 되어 간절함이 임계치에 이르기 전에는 신은 숨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신께 기대고 싶은가. 먼저 제 자신에게 최선(이라는 말은 우리의 언어로는 식상하다. 그러나, 박경철이 인용한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가 내린 최선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식상하지 않다. ‘자기의 노력이 스스로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을 다해 보이자. 자신에게 자신이 갈 때까지.

 

□ 헤라클레스에 관해서 나는 그가 12신 중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리스인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헤라클레스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어느 곳에 가서도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떻든 간에 헤라클레스의 이름은 이집트인이 그리스인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인이 그것을 이집트인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P. 152)

 

Ü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서 BC 7C~5C까지의 그리스 미술작품을 언급하며 이집트의 그것과 예리하게 비교 분석한다. 원시적이고 딱딱한 그리스 미술이 이집트 미술을 받아 들이며 얼마나 부드럽고 세련되어지는 지를.

아래의 예는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집트에 대한 그리스의 열망을 보여준다. 디테일은 풍부해 지고 선은 부드러워졌다. 묘사는 자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없애 전달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진보 된 것이라고는 발의 모습뿐이다. 무지한 내 시선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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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오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BC 1330, 이집트, left>  

<헤게스의 묘비 BC 400, 그리스, right>                                                    

 

□ 이집트인은 국민적 대축제를 1년에 한 번 여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개최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르테미스를 위하여 부바스티스라고 하는 도시에 모여서 하는 축제이고 그 다음으로는 부시리스라는 도시에서의 이시스 축제이다. 이 도시에는 이시스의 장대한 신전이 있고 도시 그 자체가 이집트의 델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시스는 그리스로 말하자면 데메테르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 중요한 대축제는 사이스에서 아테네 축제, 네 번째는 헬리오폴리스에서의 헤리오스(태양신) 축제이고 다섯 번째는 부토에서의 레토 축제, 여섯 번째는 파프레미스에서의 아레스 축제이다. (P. 160)

 

Ü 축제가 없는 사람의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지겨운 일상을 견디는 방어기제이기도 하거니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문명의 장치이기도 하다. 고대 이집트는 축제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은 풍요로웠을 테다. 그 자유의 공기가 2500년을 넘어 느껴질 만큼.

 

□ 이집트의 부유층이 개최하는 연회에서는 식사가 끝나고 주연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한 사람의 남자가 나무로 인간의 시체를 본따 만든 것을 관에 넣어 가지고 돌아다닌다. 이 나무 시체는 그것을 그린 솜씨나 판 솜씨가 실물과 똑같고 키는 1페키스 (45cm) 내지 2페키스이다. 이것을 회식하는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즐겁게 술을 드시기 바랍니다. 당신도 돌아가시면 이와 같은 모습이 될 테니까요.”

(P. 168)

 

Ü 한마디로 죽으면 썩어질 몸이니 젊어서 놀자는 말이겠다. 이집트 너무 마음에 든다.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니 늙어지면 못 논다. 삶이 주는 임시성을 여한 없이 누리자는 말이겠다. 나 이집트로 가고 싶다.

 

□ 이집트에서는 의술이 전문별로 분화되어 있다. 의사는 저마다 한 종류의 병만을 다룬다. 따라서 곳곳에 의사 투성이로 눈 의사, 머리 의사, 복부 의사, 치아 의사, 환부가 분명치 않은 병의 의사 등등이 있다. (P. 170)

 

Ü 놀랍다. 이미 그 때 전문화 되어있고 집중화 되어 분야 별로 치료가 가능했다는 얘기 아닌가. 인류가 이집트에게 빚진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구나.

 

□ 먼저 굽은 연장으로 콧구멍에서 뇌수를 꺼내는데 이때 약품도 주입한다. 그러고 나서 예리한 에티오피아 돌로 옆구리를 따라 절개하여 장부를 모두 꺼내고 꺼낸 장부는 야자유로 깨끗이 씻은 뒤 다시 갈아서 으깬 향료로 깨끗이 한다. 이어 맷돌에 간 순수한 몰약과 육계, 그리고 유향 이외의 향료를 복강에 쟁이고 봉합한다. 그러고 나서 이것을 천연 소다에 담가서 70일간 놓아둔다. 그 이상 담가 두어서는 안 된다. 70일이 지나면 유체를 씻어 고급 아마포를 잘라서 만든 붕대로 전신을 감고 그 위에 이집트인이 보통 아교 대신에 사용하는 고무를 바른다. 이 일이 끝나면 근친이 미리를 받아 사람 모양의 나무 상자에 넣고 상자를 닫은 뒤 장실 안의 벽 쪽에 똑바로 세워서 안치한다. 이상이 가장 비싼 미라를 만드는 방법인데 (P. 171)

 

Ü 이런 기록들이 BC 500년에 활자화되어 남아있다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사료로도 귀중한 글귀가 될 수 있겠다. 인체해부학적 지식이 이미 상당히 진전됐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다. 이집트의 장례 의식도 궁금해진다. 이집트인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사자의 서에서는 죽음 직후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비추어 상상해 봤을 때 이집트인의 장례식은 다음 생으로 가는 축제였을 것 같다. 남도의 섬 진도에서 그러하듯이 말이다. 책의 내용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 그런데 이집트인이 하는 말로는 지하계를 지배하는 것은 데메테르와 디오니소스 두 신이라고 한다. , 인간의 영혼은 불멸이며 육체가 죽으면 차례로 태어나는 다른 동물의 체내로 들어가서 머문다는 설을 처음으로 주창한 것도 이집트인이다.

영혼은 육지에 사는 것, 바다에 사는 것, 그리고 하늘을 나는 것, 이런 식으로 모든 동물의 몸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인간의 체내로 들어와 3000년으로 영혼의 일순(一巡)이 끝난다고 한다. 그리스인 중에는 사람에 따라 시대적으로 선후는 있지만이 설을 채택하여 마치 자기가 생각한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이들의 이름을 나는 알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P. 193)

 

□ 파피루스 (P. 174)

 

Ü 단어 하나에 꽂혀 장고(長考)한다. 이 글의 전승 형태는 파피루스에 새긴 활자였을 것인데 그 당시 저서의 편집체계나 언어체계를 고려했을 때 헤로도토스의 글은 오래도록 보관 되어 지거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읽을 수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후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편집되고 각색되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결국, 헤로도토스의 말 또는 의견에 더해 성경과 같이 오랜 세월 구전되는 과정에서 살이 입혀지고 편집자의 의견이 더해졌으리라 생각된다. 

 

□ 사제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왕은 모든 이집트인에게 같은 면적의 네모난 땅을 분배해 주었는데 이로써 해마다 연공을 바치는 의무를 부과하여 나라의 재원을 확보했다고 한다. 강이 들어와 소유지의 일부를 잃는 사람은 본인이 왕에게로 출두해서 그것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면 왕은 검증을 위해 사람을 내보내어 토지의 감소분을 측량시켜 그 뒤에는 나머지 토지에 대해서만 연공을 바치게 한 것이다. 생각건대 기하학은 이와 같은 동기에서 발명되어 나중에 그리스로 전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인은 해시계, 지시침, 또 하루의 12분법을 바빌론인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P. 182)

 

Ü 중국 수, 당 시대의 전유물로 알고 있던 균전제는 이미 이집트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또한 기하학의 발견은 가히 역사적이라 할 만하다. 이 시대에 공리 개념 등 가정에 의한 진리 접근법을 갖추고 있었고 예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반 학문이 여기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신격화를 지지하는 학문으로 변질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 프로테우스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람프시니토스였다. ∙∙∙ 이 왕은 막대한 양의 은을 갖고 있었는데 안전하게 보관하려고 궁전에 돌로 된 방 하나를 만들게 하여 보관하였다. 그러나 그 방을 만드는 자가 돌을 빼고 끼울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훗날 죽기 전 자기의 아들에게 이것을 일러 두었다. 아들은 두 명이 있었는데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듣고 은을 수 차례 가지고 나왔다. 수상히 여긴 왕은 그 방에 덫을 놓았고 형제 중 형이 걸려들었는데 동생과 같이 잡히지 않기 위해 형의 목을 자르고 그 목을 집으로 들고 가라 일렀다. 동생은 그렇게 하였다. 왕은 화가 났고 목이 없는 시체를 담에 매달았고 이를 보고 슬퍼하는 사람은 불러들이라 했다. 도둑의 어머니는 보다 못해 동생에게 형의 시체를 가져오지 않으면 왕에게 알리겠다고 하였는데 이리하여 동생은 형의 시체를 가져오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시체를 지키는 파수꾼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잠이 든 틈에 형의 시체를 결국 가져오게 되었다. 또 다시 화가 난 왕은 자신의 딸을 사창가로 보내어 어떤 남자라도 차별하지 말고 손님으로 맞아 반드시 몸을 허락하기 전에 이제까지 해 온 일 중에서 가장 교묘하고도 악한 짓은 무엇이었던가를 이야기하게 하라고 이르렀다. 도둑은 지혜 다툼을 하고 싶은 생각에 용감하게 왕의 딸을 보러 갔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왕의 딸은 그의 팔을 잡았고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 팔은 이미 죽은 이의 팔이었고 도둑은 그대로 문 밖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결국, 왕은 이 도둑의 영리함과 대담무쌍함에 혀를 내 둘렀고 그를 칭찬하고 세계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하여 왕녀를 아내로 주었다고 한다. 이집트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탁월한데, 이 사나이는 이집트인도 능가하는 자라는 것이다. (P. 189~192의 이야기를 요약함)

 

Ü 재미 있어 인용하였다. 그 스토리의 전개가 마치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연상케 한다.

 

□ 프산메티코스는 그의 이집트 통일에 협력한 이오니아인과 카리아인에게 땅을 주어 살게 했는데 이 거주지는 나일을 가운데에 끼고 마주보고 있으며 여기에는 병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왕은 그뿐만 아니라 처음에 약속했던 은상도 모두 주었고 또 이집트인의 자제를 그들에게 맡겨 그리스어를 배우게 하였다. 오늘날 이집트에서 통역을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때 그리스어를 배운 사람들의 자손이다. (P. 211)

 

프산메니토스여, 그대의 주군인 캄비세스께서 물으신다. 딸이 학대 받고 아들이 형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소리도 지르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던 그대가 그대와는 아무런 혈연도 없는 저 거지를 소중히 여김은 무엇 때문인가?

 

캄비세스의 이 물음에 대하여 프산메니토스는 대답하였다.

 

키루스의 아드님시여, 우리 집안에 일어난 불행은 슬퍼 울기에는 너무나도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유복한 신분에서 거지로까지 전락하여 더욱이 노경에 이른 저 친구의 불운은 울어 주어도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이 대답이 캄비세스에게 보고되자 그는 훌륭한 대답이라고 생각하였다. (P. 232)

 

  Ü 책에는 오타가 자주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프산메티코스와 프산메니토스는 문맥상 동일인으로 파악된다. 어쨌든 프산메니토스는 난 사람이다. 당시 Bilingual의 언어 효과성에 대해 간파하고 있었으며 오늘날의 그것처럼 천박하지 않은 Global Mind를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 프산메티코스의 아들은 네코스인데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국왕이 되었다. 그는 홍해로 통하는 운하를 손을 댄 맨 처음 인물로 뒤에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가 완공한 것이 이 운하이다. ∙∙∙ 네코스 왕 때에 운하의 개착에 동원된 이집트인 중 12만 명이 죽었다. 그러나 네코스는 그의 공사가 이국인을 위한 것이 될 것이라는 신탁의 방해를 받아 중도에서 개착을 그만 두고 말았다. 이집트인은 자기와 언어가 같지 않은 사람은 모두 이국인이라 불렀다. (P. 213)

 

Ü 삽질은 사람을 죽이고 생명을 죽인다.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척 또한 곧 자기를 죽이는 일이다. 수용과 자연 vs 배척과 인위는 인류사의 끝없는 반목의 반복이었구나.

 

□ 아마시스가 소장한 수많은 재보 중에 발을 씻는 데에 사용하는 황금으로 만든 대야가 있었다. 아마시스는 자신도 그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도 언제나 이 대야로 발을 씻었다. 아마시스는 이 대야를 녹인 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도시의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장소에 안치하게 하였다. 그러자 이집트인은 이 신상을 크게 숭상하며 절했던 것이다. 도시 사람들의 행동을 안 아마시스는 이집트인을 불러 모아 신상은 발을 씻는 대야로 만들었다는 것, 이전에 그들이 그 속에 토하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발을 넣고 씻었던 것을 지금은 매우 숭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진상을 폭로해 보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기의 경우로 이 대야와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한 평민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왕이므로 자기를 중히 여기고 숭배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아마시스는 이렇게 해서 이집트의 민심을 다스려 자기에게 복종하도록 납득시켰다. (P. 218~219)

 

Ü 이 이야기는 에 매몰된 인간의 관념을 정확히 집어내고 조롱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을 쫓는 인간의 경박함을 야유한다. 또한, 평범함이 비범함이 되는 순간 온 세상은 그 전환에 경배할 일이다.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도 힘을 얻자. 진실을 비추는 거울은 내면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음을 거울을 밝게 하고 자신을 보자. 쉽지 않을 테지만.

 

□ 아마시스의 정무를 집행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아침 동안에 광장에 사람들이 나올 무렵까지는 그에게로 올라온 정무를 열심히 처리하지만 그 이후는 술을 마시고 함께 자리한 상대를 놀리면서 하찮은 일로 시간을 보냈다. 왕과 친한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에 마음 아파하여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왕이시여, 지나치게 천한 행동을 하시는 것은 국왕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닐 것입니다. 옥좌에 앉으셔서 온종일 정무를 맡아보시는 것이 전하에게 어울리는 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집트 국민도 위대한 통치자를 추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고 전하의 평판도 틀림없이 좋아질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결코 제왕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옵니다. (P. 219)

 

Ü 조선을 건국할 때 그 설계자 정도전은 경복궁을 지은 후 그 본관을 근정전이라 명명하고 다음과 같이 왕께 아뢰었다.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오직 부지런해야 하는 것만 알고 부지런해야 하는 바를 모르면

그 부지런하다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고 까탈스러움에 흘러 보잘것 없는 것이 됩니다

 

아침엔 정무를 보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고,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 하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부디 어진 이를 찾는 데 부지런 하시고, 이진 이를 쓰는 것은 빨리 하십시오

 

쉬는 것 또한 부지런함이라 이르니 시대를 초월한 HRD 전문가다. 우리는 2500년 전 이집트의 왕을 보좌한 신하의 위와 같은 사고방식과 정도전의 생각을 비교할 수 있다. 정도전이라는 사람을 역사 앞에 내보일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또 다른 자부심이 된다. 정도전은 참 고수다.

 

3권 탈레이아 (Thaleia)

 

□ 에티오피아 왕은 페르시아 왕에게 충고하는 바 페르시아인이 이 정도의 큰 활을 이렇게 손쉽게 당길 수 있을 때 (* 에티오피아 왕은 사자 앞에서 손수 활을 당겨 보인 것이다) (P. 236)

 

Ü 문맥상 이렇게라는 부사에 묘한 어감을 느꼈다. 주석에는 시범을 보였다 했다. 장궁(長弓)을 들어 보이고 시위를 당기는 왕의 모습을 눈을 감고 상상해 보았다. 2500여 년 뒤 에게 이런 상상을 하게끔 하는 그 왕은 도대체 누구일까. 나와는 어떤 인연이 있는 사람일까. 3천 년을 한 순배로 돈다는 이집트인의 사상으로 그와 난 500년 후에는 만날 것인가. 책을 읽다 말고 일어서서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의 모습이 3D로 겹쳐진다.

 

□ 왕(캄비세스)이 활을 들고 쏘려 하자, 크로이소스는 몸을 피하여 문 밖으로 도망갔다. 활을 쏘는 데에 실패한 왕은 신하들에게 크로이소스를 붙잡아 죽이라고 명령하였으나 (P. 246)

 

Ü 이 대목은 코믹하다. 한 참을 웃었는데 머리 속으로 이 상황을 떠올려 보니 개콘을 보는 듯 하다.

 

□ 그러나, 가장 중대한 일은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이오. 독재자란 조상 전래의 풍습을 파괴하고 여자를 범하고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소. 이에 반해 대중에 의한 통치는 먼저 만민평등권이라는 아름다운 명목을 갖추고 있고 다음으로는 독재자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직무의 관장은 추첨에 따르고 관리는 책임을 가지고 직무에 임하며 모든 국책은 공론에 의해 결정되오. 따라서 나로서는 독재제를 단념하고 대중의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여기에 제출하는 바요. 모든 일은 다수 의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오. (P. 272)

 

Ü 멋진 연설이다. 현재의 위정자가 오타네스(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죽은 뒤 7인의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의 민주주의 사상을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2천 년을 넘어 정치적 진보가 없음에 자괴감이 들지 않겠는가.

 

□ 모두가 말을 성 밖으로 멀리 타고 나가 일출과 함께 최초로 운 말의 주인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이다. (P. 275)

 

Ü 매우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사람의 능력은 거기서 거기다. 언젠가 한번 테스트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입사를 위해 장황하게 늘어져 있는 심사의 기준을 뚫고 들어온 사람들과 선착순으로 선발한 사람과의 성과를 비교해 보는 것. 머리 속 추체험으로 얻은 결론(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은 후자의 성과가 더 뛰어나거나 또는 특별한 성과의 차이가 없거나, .

 

□ 왕국을 징세구로 구분 (P. 279)

 

Ü 월급쟁이라 그런지 나는 국가가 징수하는 세금에 알레르기가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도 흐릿해져 가는 요즈음, 세금정책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주체하기 힘든 소심한 무정부주의자) 다레이오스가 통치하던 그 때나 지금이나 국가는 안민(安民)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금 얘기가 나올 적 마다 국가는 필요하지 않다는 소극적 무용론을 넘어서는 거북함이 있는데 전쟁과 정쟁, 싸움, 분노, 폭력 등 모든 것이 국가의 존재로 비롯되지 않았나.(확대해석 했다) 국가는 영토를 긋고 그 안에서 세수(稅收)놀이하는 단체(요사이는 장사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좀 쎈가. 어쩌랴 나도 어쩌지 못하는 이 반골기질을)

 

□ 그가 불타는 듯한 빨간 외투를 입고 멤피스의 광장에 있을 때였다. 당시에 캄비세스의 친위대에 있으면서 그다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다레이오스가 그 모습을 보고 그 외투를 갖고 싶어서 그에게로 접근하여 돈을 주고 사려고 하였다. 다레이오스가 외투에 대단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실로손은 어떤 영감으로 움직였다고나 할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을 그 어떤 값으로도 팔 생각은 없으나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것이 되어야 한다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다레이오스는 그 말에 감사하여 이 외투를 받은 것이다. (P. 303)

 

Ü 다레이오스는 훗날 페르시아의 왕이 된다. 이와 같은 일화 하나로 우주의 연기를 설명할(수 도 없다) 마음은 없으나 모든 것이 로 인해 특별해 진다는 것쯤은 새기고 넘어가자. 내 아내여서 특별하고 내가 쓰는 가방이라서 특별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라서 특별하고 내가 잠시 머물렀던 마을이라서 특별한 것이다. 굳이 여기저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피곤하게 살 필요는 없으나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가끔 부여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 아닌가. 비록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결국 나에게 온 것들이다. 주위를 다시 둘러 보자.

 

□ 또 다레이오스는 바빌론의 자손이 끊이지 않도록 배려하여 그들에게 여자를 확보해 주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바빌론인들은 식량이 부족할 것을 대비해 자기들의 여자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다레이오스는 근처의 여러 민족에게 명해서 저마다 할당된 수의 여자를 바빌론에 보내게 했는데 그 수가 5만 명에 달했다. 현재의 바빌론인들은 이 여자들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P. 312)

 

Ü 다레이오스 통치 기간 중 바빌론에서 난이 일어났다. 바빌론은 그들의 아내들까지 죽이며 필사적으로 항전 했지만 결국 진압되고 만다. 이러한 바빌론에 대한 다레이오스의 배려는 눈물 겹다. 타 민족의 여자를 데려와 바빌론의 를 잇게 하였는데 이후의 바빌론은 바빌론이 아니었을 것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인류사에서 흐릿해지는데 여전히 우리는 단일 민족임을 자랑처럼 내세우는 것이 나에게는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런 유치한 자랑이 우리뿐만 아님에 자족해야 하는가.

 

4권 멜포메네 (Melpomene)

 

□ 한편, 스키타이인의 부녀자와 노예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성장해 이윽고 자신들의 출신성분을 알게 되지 메디아에서 귀환해 온 스키타이인들에게 저항했다. 전투는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는데 스키타이 쪽이 좀처럼 전세를 호전시키지 못하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소. 자기 노예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쪽이 살해되면 동포의 수가 줄고, 상대를 죽이면 앞으로 우리의 부하가 줄게 되오. 그래서 이제부터 창이나 활은 버리고 각자 말채찍을 들고 적에게 다가가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왜냐하면 우리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는 한 그들은 우리와 출신성분도 같고 대응하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오. 우리가 무기 대신에 채찍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들이 우리의 노예임을 깨달으면 저항도 하지 않을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스키타이인들은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러자 노예들은 이 행동에 크게 놀라 싸울 생각도 잊고 도주해 버렸다. (P. 314)

 

Ü 고정된 관념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조그만 말뚝에 발이 묶여 자란 코끼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뽑아내지 못하고 그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를 속박하는 관념은 무엇일까. 하나의 온전한 인간임에도 채찍에 대한 기억은 일 순간 그들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나를 나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내 주위의 채찍은 무엇일까.

 

□ 킴메르인은 스키타이인이 대거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협의를 했는데 의견이 둘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다. 그 가운데 왕족의 견해 더 뛰어났다. 민중 측 의견은 우세한 적에 대해서 위험을 무릅쓰지 말고 철수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데 반해 왕족 측은 공격해 오는 적과 끝까지 싸우자고 한 것이다. 조국에서 뼈를 묻을망정 민중과 함께 국외로 망명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결투를 하기에 이르렀다. 킴메르 민중은 서로의 칼에 찔려 모두 최후를 마친 왕족들을 테라스강변에 매장한 다음 철수했다. 그리고 내습한 스키타이인은 아무도 없는 땅을 점령했다고 한다.

 

Ü 이 대목에서 파리코뮌의 전사들이 어른거린다. 확대 해석하고 사안을 확장해서 1980년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기억이 있다. 신념이 죽음의 공포를 압도하는 장면 말이다. 책에 스키타이인이 내습했을 때 아무도 없는 땅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하며 떠올린 생각이다.

 

□ 이세도네스인의 풍습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어느 집의 부친이 사망하면 친인척이 모두 가축을 데리고 모여 그것을 잡아서 고기를 썰고 더불어 그 사망한 부친의 살도 썰어서 이것을 섞어 요리로 해 연회를 베푸는 것이다. 시신의 머리는 머리카락과 그 밖의 것을 제거하고 깨끗이 한 다음 금을 씌워 이를 예배물처럼 다루고 해마다 성대하게 산 제물을 바쳐 제사를 지낸다. 이 나라에서는 마치 그리스인이 연제를 지내듯이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이와 같은 예를 다하는 것이다. 그 밖의 점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Ü 야만같이 보이겠다. 그러나 죽은 이를 영원히 살게 하는 방편으로 보인다. 티벳의 조장(鳥葬)의 엄숙함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 스키타이인은 누군가와 서약을 교환할 때에는 아래와 같이 한다. 흙으로 빚은 큰 잔에 술을 붓고 여기에 서약을 교환하는 당사자의 피를 섞는다. 그런 다음 단검과 화살과 전투용 도끼, 창을 잔 속에 담근다. 그렇게 해둔 다음 긴 기원의 구절을 외우고 난 뒤, 서약을 교환하는 자뿐만 아니라 수행한 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들이 잔에 든 것을 마신다.

 

Ü 약속은 이와 같이 맹세한다. 그리하면 겁나서 안 지킬 수가 없겠다. 나라면 약속 같은 것은 애초에 하지 않는다.

 

□ 아가티르소이인은 아내를 공유해 자유롭게 관계를 갖는데 이것은 서로 형제가 되고 온 부족민이 근친이 되어 서로 질투나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P. 360)

 

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가티르소이인은 에로스적 사랑에 관한 한 그 관용을 따라올 수 없다. 그리고 갈등을 무지하게 싫어했나 보다. 자기 아내를 공유할 만큼.

 

□ 스키타이인은 원시적 삶을 살아가는 아마존족의 여자들과 가까워진다.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장소에서 서로의 생활을 바라보고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결국 야영지를 합치고 스키타이인의 남자와 아마존족의 여자는 관계를 맺고 의지한다. (P. 362~364, 짧게 요약하였음)

 

Ü 서로 다른 두 문명의 결합이다. 장황한 내용을 요약하다 보니 비약이 많지만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날려버리는 아마존 여인들이 인상 깊다.

 

□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는 (스키타이인에게)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스키타이의 제왕은 이 사정을 알자 사자를 보내 다레이오스에게 선물로 참새에 쥐, 개구리, 그리고 다섯 개의 화살을 전했다. (중략) 고브리아스는 선물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추리하였다.

 

페르시아인이여, 그대들은 새가 되어 하늘에 날아오르거나 쥐가 되어 땅속에 파고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또 개구리가 되어 호수에 뛰어들지 않는 한 반드시 이 화살에 맞아 무사히 귀국하지 못 할 것이다.” (P. 370)

 

Ü 전쟁 중에도 상징, 암시를 서로에게 건네며 여유를 가진다. 당시에는 심각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전장에서도 유머를 간직하고 발휘한 여유로움이 새삼 멋져 보인다.

 

□ 무녀는 말했다. “왕이여, 그대는 나의 계시에 대해서 물으려고 왔구나

바토스(리비아의 왕)는 이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여, 저는 저의 발음에 대해서 알고자 왔는데 당신께서는 리비아에 식민을 하라는 등, 관계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저에게 그와 같은 재력과 병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호소했으나 무녀에게 다른 계시를 내리게 할 수는 없었다. 무녀가 또 같은 계시를 되풀이하자 바토스는 계시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떠 테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P. 382)

 

Ü 터무니 없는 신의 목소리가 구차하게 반복될 때 인간은 좌절한다. 신이 구체화된 인간의 삶에서 멀어질 때 신의 권위는 무너지고 그 엄숙하고 진지함은 우스운 놀림거리가 된다. 신의 계시를 과감히 무시한 바토스의 기개는 높이 살만하다.

 

□ 암몬에는 또 하나의 샘물이 있는데 이곳의 물은 새벽녘에는 미지근하다가 시장이 열릴 때쯤 되면 차가워진다. 그리고 낮이 되면 실로 차갑고 주변은 이 시각에 채소밭에 물을 준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다시 차가운 정도가 떨어지고 완전히 해가 지면 미지근해진다. 밤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온도가 오르고 이 무렵이 되면 거품이 일고 끊기 시작한다. 이 샘은 태양의 샘이라 불리고 있다. (P. 393)

 

Ü 온천의 묘사인 듯 하다.

 

5권 테릅시코레 (Terpsichore)

 

□ 트라우소이족의 풍습은 다른 트라키아인과 대체로 같은데 아이가 태어났을 때와 사람이 죽었을 때에 아래와 같은 행동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은 그 아이 주위에 둘러앉아 인간에게 일어나는 온갖 불행을 모두 헤아리고 이 아이도 태어난 이상 이와 같은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서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수많은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더 없는 행복의 경지로 들어간 것이라고 해서 기쁨 속에 땅에 묻는 것이다. (P. 405)

 

Ü 불가의 경전을 보는 듯하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삶의 자신감이다. 치열하고 최선을 다한 삶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하겠다. 생은 고통이요 그 고통 속에 깨달음을 얻는다면 영원히 살아간다는 경전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는 관습이다. 또 감탄한다.

 

(페르시아의 왕 다레이오스가 책사로 히스티아이오스를 부른다)

히스티아이오스여, 그대를 부른 용건이란 다름이 아니다. 내가 스키타이에서 귀환해 그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잠깐 동안이었는데 그대를 만나 대화를 하는 것 이상으로 간절한 소망이 달리 없었다. 그 이유는 재치와 성심을 겸비한 친구야말로 온갖 재보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두 가지 덕을 겸비하고 있는 것은 내가 몸으로 경험한 바에 의해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P. 414)

 

Ü 다레이오스는 지위와는 상관 없이 솔직 했으며 히스티아오스는 그 만큼 매력적이었다. 사람의 매력은 진정성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다레이오스는 한 가지를 더 보태어 재치를 꼽았다. 여유를 동반하지 않으면 재치는 없다. 나는 매력적인 사람인가. 다시 물어,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인가.

 

□ 헤카타이오스 (*: 헤카타이오스 (기원전 550~476)는 그리스의 선구적인 역사가로 헤로도토스도 그에게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다.) (P. 419)

 

Ü 헤로도토스는 이 책에서 헤카타이오스를 많은 부분에서 전용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헤로도토스를 앞선 또 하나의 위대한 역사가를 만난다.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기록의 전승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아리스타고라스가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스파르타인을 바다에서 3개월이나 걸리는 곳에 끌고 갈 생각인 것 같은데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소.”

그러나, 아리스타고라스는 설득을 거듭하며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사례를 하겠다고 말한 다음 우선 10달란톤의 금액을 제시했다. 금액이 차츰 오를 무렵, 클레오메네스 곁에 있던 8세 외동딸 고르고가 말했다.

 

아바마마 이제 그만 자리를 뜨시지요. 그러지 않으면 이 외국인에게 매수되고 맙니다.” (P. 427)

 

Ü 8세 공주의 구국이다. 이 장면에서 한참을 미소 지었다.

 

□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강대해졌으며 자유평등이 단순히 한 가지 점뿐만 아니라 모든 점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아테네가 독재 하에 있을 때에는 주변의 어느 국가도 전력 면에서 능가할 수가 없었는데 독재자로부터 해방되자 단연 타국을 제압해 최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압제 하에 있을 때는 독재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해 일부러 비겁한 행동을 했으나 자유롭게 된 뒤로는 저마다 자신을 위해 의욕을 불태운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P. 441)

 

Ü 체제의 변화가 대중의 힘으로 이어지는 광경이다. , 정치 System의 변화는 국면을 바꾸어 일반 대중의 삶의 질 변화로 이어진다. 이로써 정치는 개인에게 중요해진다.

 

□ 따라서, 아리스타고라스는 강대한 국력을 지닌 아테네가 자신들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힘주어 말하며 다급하고 절실한 처지에 어떤 일에도 응하겠다고 약속해 결국 아테네인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리스타고라스가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한 사람을 속일 수가 없었는데 3만의 아테네인을 상대로 해서 성공한 것을 생각하면 한 사람을 속이기보다 많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쉬운 듯 보인다. (P. 453)

 

Ü 8세 공주에게 보기 좋게 까였던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네를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헤로도토스의 마지막 말은 정치의 속성을 정확히 간파한다. 여전히 우리가 풀지 못하는 그 눈속임을 그 때 이미 알아차린 것이다.

 

□ 오네실로스가 아마투스를 포위 공격하는 한편 사르데스가 아테네, 이오니아의 연합군에 의해서 점령되어 불타버린 일, 또 그 연합을 성립시켜 이 계획을 꾸민 장본인이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였다는 것 등이 다레이오스 왕에게 보고되었다.

왕은 아테네인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물었다고 한다. 그 대답을 듣자 왕은 활을 집어 들고 화살을 재고는 하늘을 향해 쏘았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제우스여, 아테네인에게 보복할 것을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말했다 한다. 그러고는 하인 한 사람에게 식사 시중을 들 때마다 왕을 향해 전하, 아테네인을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세 번을 말하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P. 457)

 

Ü 이 증오는 결국 다레이오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에까지 이어져 세기의 전쟁으로 발전 된다. 충돌의 서막이다. 조여온다.

 

6권 에라토 (Erato)

 

□ 또 함상의 전투원은 언제나 실전장비로 대기시키는 등 연습 뒤에도 배를 해상에 정박시켜 이오니아군을 온종일 혹사시켰다.(*: 여기에 기술되어 있는 전투 훈련의 방법에 대한 것인데 피아가 일렬횡대로 전개하고 적함 2척 사이를 맹렬한 스피드로 뚫고 들어가 적함의 노를 비롯한 선구를 파괴해 행동의 자유를 빼앗은 다음 뒤돌아가 공격을 가하는 전법이다. 뒤의 펠로폰네소스 전투 때에는 해군이 이 전법으로 종종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무렵엔 이 전법인 최신예 공격법이었을 것이다.) (P. 469)

 

Ü 전쟁사에 남을 세계3대 해전(누가 정한 건지 모르지만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은 없다. 4대 해전에 포함될려나) 의 첫 번째 전투를 앞두고 있는 긴장감이 2500년을 거슬러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 포로가 된 밀레토스인은 그 뒤 수사로 호송되었는데 다레이오스왕은 그들에게 그 이상 위해를 가하지는 않고 이른바 홍해에 면한 암페라는 도시에 거주하게 했다. 이 도시 옆으로 키그리스 강이 흘러 바다까지 흘러들고 있다. 밀레토스의 국토는 도시와 평야는 페르시아인이 확보하고 산지는 페다사에 거주하는 카리아인에게 주었다. (P. 472)

 

그러나 다레이오스는 페니키아인이 밀티아데스의 아들 메티오코스를 데리고 오자 그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크게 우대했다. 즉 주택과 영지를 주고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을 하게 하고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페르시아 국적을 주었던 것이다. (P. 481)

 

Ü제국임에 하는 원천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관용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남몰래 페르시아의 팬이 되고 있다.

 

□ 스파르타의 왕에게 부여되고 있는 특권은 아래와 같다. 먼저 두 성직이 있는데 이는 제우스 라케다이몬과 제우스 우리니오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왕이 원하는 대로 어느 나라에 대해서나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스파르타 시민 누구도 이를 막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P. 487)

 

Ü 제사, 전쟁은 왕의 특권이었다. 권력을 확고히 하는 방편으로써 유용했을 터. 위정자에게 이러한 특권은 유용했으되 남용하여 전쟁이 난무한 인류사를 쓰게 된다. 그러나, 왕은 전시에 발진할 때는 선두, 철수 할 때는 후미에 섰다고 하는데 이것은 멋진 일이다. 리더의 면모다.

 

□ 왕이 사망해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면 신왕은 즉위와 함께 스파르타 시민 가운데 몇 사람이건 그가 왕 또는 국고에 지고 있는 부채를 면제한다.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에서도 새롭게 즉위한 왕은 모든 도시에 대해서 체납하고 있는 공세를 면제하는 것이다. (P. 489~490)

 

Ü 특별 사면과 같은 제도이겠다. ‘이 삶의 제일의 목적이 되고 권력이 되어버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만큼 당시의 사회가 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것은 반증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죄의 사면은 불가했던 것을 보면 도덕과 윤리의 풍경은 지금보다 엄격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어머님, 모든 신들과 특히, 이곳에 모시고 있는 수호신인 제우스의 이름을 걸고 간절히 바라오니 나의 아버지가 진실로 누구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데마라토스(스파르타의 왕)가 이 같이 말하자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아, 진실을 알고 싶다면 있는 그대로 사실을 털어 놓겠다. 어느 날, 아리스톤과 꼭 닮은 자가 나타나 잠자리를 같이 한 뒤 화관을 씌어 주었는데 아리스톤(데마라토스의 아버지)은 믿지 않았고 결국 신전에 물었다. 나중에 그 화관이 아스트라바코스(스파르타의 토착 영웅신) 신전의 영웅 묘에 있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 점술가에 물어본 결과 그 모습은 아스트라바코스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아리스톤도 이후에 이를 인정하고 그러한 일에 무지했음을 깨달으셨다. (P. 494~495)

 

Ü 출생의 이야기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신화다. 현존하는 자신의 유일한 신화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삶이 비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나의 신화는 무엇인가.

 

□ 클레오메네스는 칼을 받아들자 정강이에서부터 자기 몸 전체를 베기 시작했다. 살을 세로로 베면서 정강이에서 허벅지, 허벅지에서 엉덩이, 엉덩이에서 옆구리로 나아가고 마지막에 배에 이르자 이를 세로로 째고 최후를 마쳤다. (P. 497)

 

Ü 엽기, 호러다. 스파르타의 성질거 참.

 

그러나, 여자가 사내를 이겨 이를 물리치고

    아르고스에서 그 영예가 빛을 발할 깨

    아르고스의 수많은 여자들이 두 볼을 쥐어뜯고 슬퍼하게 되리라

    그리하여 후세까지 전해지리라

    세 번 똬리를 튼 무서운 큰 뱀이 창에 찔려 죽었노라고.” (P. 499)

 

계시의 신 아폴론이시여, 제가 아르고스를 점령할 수 있다고 왜 저를 속이셨습니까? 이제 그 신탁은 실현된 셈이군요!” (P. 500)

 

Ü 책 전체에 등장하는 델포이 무녀의 계시는 복선과 상징으로 그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로 당시의 사람들은 한번 계시를 받으면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의논을 거듭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나오는데 참 눈물겹다. 들어맞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걸로 봐서는 기록 당시의 선후가 가끔씩 의심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계시가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질 확률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50:50이다. 이건 코믹이기도 하다. 델포이 무녀들은 바로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50은 또 다른 계시의 의미를 부여하여 발뺌하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위의 계시로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데스는 P. 497에 나와있는 데로 죽었다. 가끔 아래와 같이 주옥 같은 말도 한다.

 

에피키데스의 아들 글라우코스여, 그와 같은 맹세로

    다툼에 이겨 돈을 빼앗으면 당장은 좋으리라

    진실한 맹세를 하는 자도 면치 못하는 죽음, 맹세하고 싶으면 하라

    하지만 맹세의 신에게는 팔다리도 없는 아드님이 계셔

    그 일족, 그 가문을 완전히 없애기까지는 멈추지 않으리니

    진실한 맹세를 하는 자는 그 일족의 운이

    언젠가는 트일 날이 있음을 알라.” (P. 504)

 

Ü 선견지명이다. 이 사유의 시선은 2500년 후의 자본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

 

□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레이오스(* 제압하는 자), 다레이오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전사), 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아르타르크세스(* 위대한 전사)로 이어지는 3대 동안에 그리스를 엄습한 재앙은 다레이오스 이전의 20세대 기간에 발생한 것보다도 컸기 때문이다. 그 재앙이란, 하나는 페르시아인이 그리스에 가한 것, 또 하나는 그리스 안에서 수령들이 정권을 둘러싸고 서로 싸움으로써 초래된 것이다. (P. 508)

 

  Ü 그리스-페르시아 대첩의 시작이다. 대륙간 대규모 전쟁이다. 오늘날에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며 헐리우드는 저작권이 없는 이 얘기를 매번 우려먹고 있다.

 

□ 필리피데스는 이 때 사령관들의 지시로 아테네를 떠난 지 2일째에 스파르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장관들에게로 가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스파르타인 여러분, 아테네인은 귀국이 아테네를 지원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의 가장 오랜 도시로 손꼽히는 아테네가 이국민의 노예가 되는 것을 방관하지 말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에레트리아는 이미 예속이 되었으니 이 도시를 잃은 그리스는 그만큼 전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Ü 반목하던 두 도시는 거대한 외부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로 뭉친다. 전쟁이 다가온다.

 

□ 마라톤 전투의 대진 구도 (책의 내용에 따라 그림을 그려보았는데 용서하시라. 조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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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진영(up)      아테네 진영(down)

 

 

아테네는 주력부대를 날개부분에 배치하여 페르시아가 중앙을 공격할 때 중앙을 내어주고 측면 화력을 집중시킨다. 아테네가 결국 승리한다. (P. 516~518)

 

□ 그리스에서는 광범위하게 무참한 온갖 행위를 렘노스적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 (P. 529)

 

Ü 관용어인 것 같다. 외워두고 쓰자.

 

7권 폴림니아 (Polymnia)

 

□ 문제는 먼저 도전을 하느냐 아니면 도전을 받느냐 하는 것이오. 우리 국토가 모두 그리스인의 지배하에 들어가느냐 아니면 그들의 영토를 모두 페르시아의 판도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그에 따라 결정될 것이오. (P. 541)

 

Ü 다레이오스가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수습하고 그리스로의 원정을 준비하던 중 죽고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크세르크세스가 아버지가 준비하던 그리스 원정을 과연 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 끝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일단 벼랑으로 몰았다. 떨어져서 날아오르느냐의 문제는 훗날 이야기 될 것이고 전쟁의 결정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공략 뒤 4년간을 군대의 징집과 군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데 소비했다. 그리고 5년째에 접어들어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 실로 이 원정군의 규모는 유사 이래 최대였다. (P. 545)

 

Ü 이로써 기나긴 반목의 역사가 시작된다. 아직도 이어지는 이 지역의 불화는 그 역사가 매우 깊은 것이었구나. 이래서 역사란 무섭다.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전쟁의 모습이다.

 

□ 아비도스에서 해안까지의 거리는 7스타디온이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 다리가 개통되자마자 폭풍이 불어와 막 완성된 다리가 모두 파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크세를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에게 크게 노하여 가신들에게 바다에 300대의 채찍형을 가하고 또한 족쇄 한 쌍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으라고 명했다.

 

이 짜고 쓴 물 놈아, 너의 주인님께서 네게 이런 벌을 내리셨다. 너의 주인님께서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셨는데 네놈 쪽에서 먼저 주인님께 활을 당겼기 때문이다. 크세르크세스왕께서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너를 건너가실 것이다. 그리고 물론 네놈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는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거다. 네놈처럼 탁하고 짜고 쓴 물에게 그건 당연한 일이다.” (P. 551)

 

Ü 이런 자만의 모습은 복선이겠다. 그러나 매우 유머 있으신 분이다. 당시 크세르크세스의 권력이 바다즉 자연을 능가할 만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최대 제국이었으니 하느님과 동기동창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지금은 그리스로 출병하였고 바다로 도와 아테네로 가는 중이다. 그러나 아래에 나오는 바와 같이 이런 권력도 가끔씩은 흔들린다. 자기 내면으로부터.

 

□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의 해면이 온통 함선으로 뒤덮이고 해안과 아비도스의 평지가 모두 군대로 가득 찬 광경을 보고 스스로 자신의 행운을 축복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저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누구 한 사람 100살까지 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절로 슬퍼지는구려. 사람의 목숨이란 얼마나 덧없이 짧은 것이오.”

 

아르타바노스여, 인생이란 과연 그대가 말한 그대로이지만, 그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냅시다. 게다가 우리는 현재 행운을 누리고 있는 만큼 불행한 일 따위는 생각지 말도록 합시다. 그런데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소. 만일 그대가 그만큼 생생한 꿈을 꾸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처음의 의견(전쟁 반대)을 굽히지 않고 나의 그리스 원정을 제지하려 했을 것 같소, 아니면 역시 생각을 바꾸었을 것 같소? 숨김없이 말해 주시오.”

 

제가 아는 한 폭풍이 불 때 우리의 이 함대를 수용하여 안전하게 지켜 줄 만큼 항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항구는 단지 하나에 그치지 않고 전하께서 앞으로 수군을 진격시키실 해안 일대에 걸쳐 많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항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하, 저는 전하께서 인간은 우연한 사태를 제어할 수 없고 도리어 거기에 자신을 맡길 수밖에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전하께서 계속해서 진군하시면 하실수록 육지 자체는 전하께 점점 더 적의를 나타낼 것입니다. 요컨대 맞서는 자가 없다 하더라도 나날이 늘어 가는 거리 때문에 반드시 식량난에 봉착하게 될 거라는 이야깁니다. “

 

아르타바노스여, 그대가 한 말은 하나같이 다 옳소. 하지만 그렇게 무엇이든 두려워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고려하지 마시오. 어떤 사항에 대해 온갖 가능성을 일일이 따진다면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어느 쪽 주장이 옳은가 그 가능성은 반반이오.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확실한 것을 알 수 있겠소? 나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러므로 성공은 기꺼이 결행하는 자에게 주어지게 마련이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뭇거리며 몸을 사리는 자에게는 다가오지 않소.” (P. 557~559)

 

Ü 생의 임시성은 느닷없이 온다. 크세르크세스에게 지금은 난데 없는 일이다. 수많은 자신의 병사를 보고는 리더에게 오는 큰 압박을 그대로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흔들리고 있는가. 내 사견은 그의 부담 앞에 무참함으로 이만한다.

 

(장군들을 불러모으고는) “내가 그대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오. 우리 페르시아의 선인들께서 수행하신 위대한 업적에 흠을 내지 말기를 그대들에게 부탁하기 위해서요. 우리 앞에 놓인 대업을 수행함에 있어 용기를 한껏 발휘해 주시오. 우리 각자는 물론 모두가 분기해 주시오. 우리 모두의 복지야말로 우리가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성스런 목표이기 때문이오. 이번 전쟁에서 최선을 다해 주시오. 그 이유는 우리가 공격할 상대는 용감한 민족이며 한번 그들을 진압하면 아무리 천하가 넓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맞설 만한 군대는 더 없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러니 이제 페르시아의 국토를 다스리시는 신들께 기원을 한 뒤 저 땅으로 건너가도록 합시다.” (P. 561)

 

Ü ‘170만 대군’(논란의 여지는 있다)을 이끄는 리더의 출사표다.

 

□ 전군이 다리를 건너 유럽 땅에서 진군을 시작하려 할 때 기이한 전조가 나타났다. 그 의미를 쉽게 판단할 수 있었음에도 크세르크세스는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전조란 말이 토끼를 낳은 것이었다. 즉 크세르크세스는 처음에는 위풍당당하게 자신감을 갖고 그리스로 병력을 진격시켰지만 마침내는 겨우 목숨을 건진 채 본래의 장소로 도망쳐 돌아가게 되리라는 암시였다. (P. 562)

 

□ 원정군의 병력 점검

정확한 숫자는 알 수는 없지만 육상 부대의 총인원이 70만에 이르렀던 것만은 확실하다. 병력 점검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졌다. 우선 1만 명을 될 수 있는 대로 한곳으로 밀집시켜 모은 다음 그 둘레에 원을 그렸다. 그러고 나서 담을 쌓아 올렸다. 이렇게 한 다음 차례로 남은 병력을 돌담 안으로 집어넣는 식으로 하여 모든 병력의 수를 헤아렸던 것이다. 병력 수의 점검이 끝난 뒤에는 민족 별로 편성을 마쳤다. (P. 564)

 

Ü 인원 파악의 방법이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었는데, 기발하다.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육.해상 병력의 총원을 170만 명으로 보고 있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10만 명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을 한다.

 

데마라토스여, 그리스 놈들이 감히 내게 맞서 저항할 것인지 어떨지 그대에게 묻고 싶소.”

 

전하,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다른 모든 그리스인이 전하의 뜻에 따르게 된다 하더라도 스파르타인만은 반드시 전하께 맞서 전쟁을 벌이리라는 것입니다. 예컨데 1천 병력을 가지고 출격할 수 있을 때에는 그 1천 명을 가지고 싸울 것이며, 또한 1천보다 적든 많든 상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파르타의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말을 흘려 듣고 웃으면서 그를 돌려 보냈다.” (P. 577~580)

 

Ü 곳곳에 복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 크세르크세스는 육상 부대를 세 부대로 나눈 다음 그 중 한 부대는 해상 부대와 접촉을 유지하면서 해안을 따라 진군케 했다. 이 부대를 지휘한 것은 마르도니오스와 마시스테스였다. 그리고 다른 한 부대는 명에 따라 내륙을 통해 진군했는데 제 3의 부대는 크세르크세스와 함께 진군 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주력 해상 부대는 암펠로스 곶으로부터 팔레네 지역에서 바다 쪽으로 가장 돌출된 카나스트론 곶을 향해 지름길로 곧장 나아간 뒤 만나는 도시로부터 선박과 병력을 징발했다. (P. 586)

 

Ü 진군의 풍경이다. 아래 지도가 참고 될 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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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서 나는 대다수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말을 해야만 하겠다. 비록 그렇게 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한 나는 기꺼이 그것을 여기에 적어야 할 것이다. 만약 아테네인이 다가오는 위기에 겁을 집어먹고 조국을 포기했거나 비록 포기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항복해 버렸다면 해상에서 페르시아 왕을 맞아 싸우려는 자는 없었을 것이다. (P. 594)

 

Ü 헤레도토스의 견해다.

 

□ 왕은 첩자들에게 입국 목적을 물은 뒤 친위병들을 불러 그들을 안내하여 보병 및 기병 모든 부대를 마음껏 구경시킨 다음 어디든 그들이 바라는 곳으로 무사히 떠나도록 해 주라고 명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만일 첩자들이 죽고 말았다면 그리스 측은 비할 데 없이 강대한 페르시아군의 위세를 사전에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사히 그리스로 돌아간다면 그리스 측은 이쪽의 전력을 알고 현재 진행중인 원정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들이 말하는 자유를 포기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전쟁을 벌이는 노고 따위는 전혀 필요 없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P. 598)

 

Ü 그리스가 페르시아 종군의 모습을 사전에 파악하기 위해 보낸 첩자를 붙잡은 뒤 페르시아의대응 방법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병법 중 제일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는 현지 사정에 너무 어두웠던 것 같다. 전쟁 준비는 잘하였지만 전투 준비는 취약하였다.

 

□ 나로서는 크세르크세스가 과연 아르고스에 사자를 보냈는지 또한 아르고스의 사절이 수사로 올라가 우호 관계에 대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게 질문 했는지 그 진위에 관해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P. 601)

 

Ü 개인적으로 헤로도토스의 견해나 이러한 사실에 대한 고민하는 부분에 마음의 시선이 간다. 역사적 사실 앞에서 헤로도토스는 자기검열하고 있으며 엄격함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앞에 조심스런 역사가의 면모 그것이다.

 

□ 그리고 3대째의 크레타인(* 최후로 크레타에 침입한 그리스인, 즉 도리스인을 가리킨다)이 겨우 살아남은 주민들과 함께 이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P. 613)

 

Ü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묻혀 있다는 그 크레타가 맞는가. 조르바의 직계 조상인가.

 

이제부터는 개인 사견은 자제하고 전쟁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다.

 

□ 페르시아 함대가 세피아스에 이르고 육상 부대가 테르모필라이까지 진군하는 동안 페르시아는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 총 병력은 그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P. 618)

 

□ 페르시아의 해상부대는 마그네시아 지방의 카스타나이아시와 세피아스 곶의 중간 지점에 가로 놓여 있는 해안에 이르러 정박한다. 그런데 날이 밝자 그 때까지 쾌청하고 바람도 잠잠하던 날씨가 돌변하여 바다가 용솟음치기 시작하고 격심한 폭풍과 맹렬한 동풍이 페르시아 함대에 몰아쳐 왔다. (P. 620)

 

이 조난에서 페르시아군은 최소한 400척 이상의 함선과 수많은 병사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상실했다고 전해진다. (P. 621)

 

□ 테르모필라이 전투

크세르크세스 왕은 말리스 지방의 트라키스 지역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리스군은 산마루에 포진해 있었다. 대부분의 그리스인은 이곳을 테르모필라이라 부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이나 인근 주민들은 단지 필라이()라고만 부른다. (P. 626)

 

그리스군은 나라마다 각각의 지휘관을 받들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신망이 높아 전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던 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였다.

 

레오니다스는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만 친히 선발한 전통의 ‘300인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라이로 왔다. (P. 627)

 

□ 페르시아의 척후병은 단지 성벽 앞쪽에 포진해 있는 부대의 동정만을 살필 수 있었다. 마침 그리스 병사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운동을 하거나 머리를 빗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척후병은 이 모습을 바라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 부대의 병력 수와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을 빠짐없이 조사한 뒤 무사히 되돌아갔다.

 

이 보고를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그 진의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스파르타군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눈앞에 두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데마라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생사를 건 모험을 시도하기 전에 머리칼을 손질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전하, 만약 전하께서 이자들과 아직 스파르타 본국에 머물러 있는 나머지 부대를 격파하면 전하의 진격로 앞에서 저항할 민족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전하께서 맞이하는 상대야말로 그리스의 수많은 나라 중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P. 629)

 

크세르크세스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크세르크세스는 4일을 기다리며 그동안 끊임없이 그리스 부대가 도주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5일째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철수하지 않자 노여움을 터뜨리며 메디아인과 키시아인 부대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여 자기 앞으로 생포해 오라 명했다. Ü 드디어 시작이다.

 

좁고 제한된 지역에서의 전투였고 페르시아군의 창은 그리스군의 창에 비해 짧았기 때문에 수적인 우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공격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관전하던 페르시아 왕은 자군을 염려한 나머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세 번이나 벌떡 일어섰다고 한다. (P. 630~631) Ü 만만치 않음을 처음으로 느낀다.

 

□ 레오니다스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이 땅에 남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이 땅에 머문다면 그 영예는 만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며 스파르타도 그 번영을 계속하리라고 믿었던 것이 틀림없다. (P. 635)

 

반면, 페르시아는 전사자가 다수에 이르렀는데 부대장들이 그들 뒤에서 닥치는 대로 채찍으로 내려치면서 앞으로 몰아댔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 떨어져 죽는 자도 적지 않았지만 산 채로 자기 동료들의 발에 짓밟혀 죽는 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은 자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P. 636) Ü 두 대륙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 결과는 이미 알 수도 있겠다.

 

□ 레오니다스는 이 격전의 와중에서 실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졌고 다른 이름 있는 스파르타인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했다. 나는 용명을 휘날린 이들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다. 나아가 전군 300명의 이름도 들어 알고 있다. (P. 636)

 

그들은 모두 한 덩어리로 진을 쳤다. (P. 637) Ü 밀집장창부대라 불리는 팔랑크스(Phalanxes)전법이다. (아래 고대 그리스 국가의 전법, 팔랑크스 대형) --> 역시 그림 첨부가 되지 않아 자세한 설명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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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자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명이 새겨져 있다.

 

일찍이 이 땅에서 300만 명의 군대와 맞서 싸운

펠로폰네소스 4000의 병사

 

여행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가 그들의 명을 수행하고 여기에 누워 있다고

 

여기 그 옛날 스페르케이오스의 조수를 넘어 공격해 온

메디아인에게 살해된 이름 높은 메기스티아스가 누워 있나니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스파르타인과 죽음을 같이한 점술가여 (P. 637~638)

 

Ü 영화 ‘300’은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헐리우드식으로 각색했구나.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페르시아인을 흑인으로 묘사했다든지 앵글로를 영웅시하는 서양화 일변도의 줄거리 등.

 

□ 크세르크세스는 레오니다스의 시체에 이르러 스파르타의 왕으로 지휘를 맡았던 자라는 말을 듣자 신하에게 명하여 그의 목을 잘라 말뚝에 매달게 했다. 왕은 그에게 얼마나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아는 한 페르시아인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도 전장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병사를 정중히 다루는 전통이 있었다. (P. 642) Ü 그러나, 사사로운 분노 앞에 이성을 잃어간다.

 

□ 레오니다스의 아내였던 고르고 (P. 643) Ü 고르고, 고르고, 아 귀여웠던 8세 공주, 5권에서 아버지에게 매수되기 전 자리를 뜨라 했던. 한 건 할 것 같드라니 영웅의 아내가 되어 있었네.

 

8권 우라니아 (Urania)

 

□ 아르테미시온 해전

그리스 해상부대는 아르테미시온에 이르러 많은 적선이 아페타이에 입항해 있고 그 지역 일대가 군대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되었다. (P. 645) Ü 이제 해상에서 힘의 진공상태가 연출된다.

 

□ 그리스 부대는 첫 신호가 떨어지자 먼저 뱃머리를 이국 함대쪽으로 향하게 하고 후미는 전형 중앙 쪽으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신호와 함께 좁은 해역에 갇혀 정면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태세를 갖춘 채 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적선 30척을 나포하고 나아가 살라미스 왕 고르고스의 동생이자 케르시스의 아들인 필라온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해전은 악전고투를 되풀이했지만 끝내 승패를 결정짓지 못한 채로 밤을 맞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해전은 이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P. 648)

 

□ 해전에서 전사한 페르시아군의 시체는 해안으로 떠밀려 왔는데 이러한 사태에 공포를 느낀 페르시아 병사들은 거듭되는 재난으로 이윽고 종말이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P. 649)  Ü 항상 전쟁은 내부에서 먼저 무너진다. ‘공포로 인하여. 전투는 화력보다는 바로 간댕이싸움인 것이다.

 

아 마르도니오스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런 인간들과 싸우게 만들었는가. 금품이 아닌 명예를 걸고 경기를 행하는 자들과!” (P. 654)

 

Ü 품위와 자존의 문제로 전쟁에 임한 자와 돈의 문제로 전쟁에 임한 자는 이렇게 다르다.

 

□ 패전을 거듭하던 페르시아군은 포키스 전역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테살리아인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는 곳마다 모두 불과 칼로 황폐화 시켰고 도사와 사원도 불질러 버렸다. 또한 산 부근에서 포키스인 몇 명을 추적하여 포박하고 수명의 부녀자를 윤간한 뒤 살해해 버렸다. (P. 656) Ü 이성을 잃어 페르시아 답지 못한 모습이다. 훗날 십자군 원정에 대응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 살라미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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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라미스 해전도 

좁은 해역에서 많은 함선을 맞아 싸우게 될 경우에는 사태가 우리 기대 대로 진행되는 한 함선을 적게 가지고 있는 우리가 대승을 거두게 될 것이오. 좁은 수역에서의 해전은 우리가 유리하며 넓은 수역에서는 적이 유리하기 때문이오. (P. 667)

 

Ü 사지가 되어 버린 바다를 놓고 대치하고 있다.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발칸반도의 끝의 작은 섬 살라미스는 반도와 섬 사이 좁은 수역이 조성되어 있다.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이 승전으로 이끈 명량해전을 상상할 수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실제 전선의 기동성에도 차이가 나서 좁고 강한 그리스 전선과 넓고 큰 페르시아 전선은 이 지역 해전의 승패를 예견해 준다. (아래 그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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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배                                                    페르시아의 배

 

(페르시아의 전략가 마르도니오스는 살라미스 해전을 앞두고 말한다)

해전을 벌이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는 그리스인이 우리에 비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만큼이나 훨씬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서둘러 해전을 벌이시지 않고 수군을 육지가 가까운 지금 이곳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든지 또는 나아가 펠로폰네소스로 진격시킨다면 일은 당초 계획대로 쉽게 진행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서둘러 해전을 벌이시다 만약 수군이 패하게 된다면 그 화는 육군에게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시지만 못난 종들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P. 671)

 

Ü 크세르크세스가 마르도니오스의 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뼈아프다. 역사 대대로. 그러나 마르도니오스는 여자다. 여기에 크세르크세스의 인재 등용의 포용성이 엿보인다. 당시 여자는 시민권도 가지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최 측근의 전략가로 여성을 등용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힘든 일이 아닌가.

 

□ 그리스군은 전 함선을 동원하여 바깥 바다로 나아갔고 그와 동시에 페르시아군이 곧 그들을 향해 육박해 왔다. 전면전의 시작이다. (P. 678)

 

대부분의 페르시아 함선은 아테네군과 아이기나군에 의해 파괴되어 항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스군은 질서 정연하게 전투에 임한 데 반해 페르시아군은 이미 전열이 흐트러져 더 이상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페르시아군은 이날 최선을 다해 싸웠다. (P. 679)

 

□ 페르시아 함선들은 겨우 아테네군의 추격에서 벗어나자마자 이번에는 아이기나 부대의 포위망으로 돌진하는 꼴이 되었다. (P. 681) Ü 섬 곳곳에 숨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해전이 끝난 뒤 그리스군은 아직 해역에서 표류하고 있는 파손된 선체를 모두 살라미스로 끌고 간 다음 새로운 해전에 대비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왕이 남은 함선을 이용해 공격해 오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P. 683)

 

□ 크세르크세스의 퇴각

크세르크세스는 패전을 깨닫자 그리스인들이 그들 스스로 아니면 아오니아인들의 사주로 선교를 파괴하기 위해 헬레스폰토스로 가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꼼짝없이 유럽에 갇혀 파멸할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군도 자군 병사들도 그 계획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라미스 섬에 이르는 길을 만들기로 했다. (P. 684)

 

□ 만약 전하께서 이 땅에 머무르지 않을 결심이시라면 주력군을 이끌고 고국으로 철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군대 중에서 30만을 선발해 어떻게하든 그리스를 예속시켜 전하께 넘겨드리도록 하겠습니다. (P. 686)

 

크세르크세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여 그에게 잔류하도록 진언했다 하더라도 결코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공포는 그 정도로까지 심했던 것이다. (P. 687)

 

□ 퇴각할 때 크세르크세스와 동행하던 많은 페르시아인으로 배는 만원이었다.

전하, 이 많은 승객을 어떻게 처리하지 않는 한 방도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페르시아인들이여, 지금이야말로 그대들의 충성을 증명할 순간이오. 지금 내 안전은 그대들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오.”

크세르크세스가 이렇게 말하자 페르시아인들은 왕 앞에 엎드려 절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P. 694) Ü 퇴각은 비참하다.

 

9권 칼리오페 (Calliope)

 

□ 플라타이아 포진/전투

(페르시아의 남은 30만 군과 그리스군이 다시 전투에 임한다)

마르도니오스는 그리스군이 평지로 내려오지 않자 모든 기병대를 동원해 공격했다. 싸움중에 페르시아의 지휘관 마시스티오스가 사망하는데 마시스티오스는 마르도니오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뒤이어 그리스군은 산지에서 내려와 플라타이아로 진격하기로 결의했다. (P. 718)

 

마르도니오스는 스파르타군 전면에 페르시아인 부대를 배치했다. 페르시아인 부대는 그 병력이 스파르타군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으므로 전열이 두터워 그것이 테게아군 전면에까지 미쳤다. (P. 723)

 

□ 두 군이 대치한 지 10일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P. 728)

 

(전쟁이 시작되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페르시아는 밀리고 있었다) 페르시아군은 용기와 힘은 뒤떨어지지 않았지만 무장이 견고하지 못한 데다가 훈련이 미숙했고 전술에도 매우 약했다. 그들은 혼자 또는 10인 안팎 병사들이 한 무리가 되어 스파르타군 속으로 돌진해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마르도니오스는 백마를 타고 싸웠으며 그 주위에는 선발된 최정예병 1000명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가 이르는 지점에서 페르시아군은 적을 가장 격렬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곧 싸움 중에 그가 전사하고 또한 그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최강 부대도 무너지자 잔존 부대는 스파르타군 앞에 무릎을 꿇고 퇴각했다. 그들이 타격을 입은 가장 큰 원인은 무장이 덜 된 복장이었다. 중무장한 적을 상대로 경무장을 하고 싸웠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스파르타인이 받았던 신탁 그대로 레오니다스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마르도니오스가 치렇고 파우사니아스는 유사 이래 다시 없던 대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군은 플라타이아에서 스파르타군에게 격파되어 패주하자 뿔뿔이 흩어져 그 진지 및 앞서 테베 지구에 세워 두었던 목조 요새로 숨어 들어갔다. 싸움은 이와 같이 끝났다 (P. 736~739)

 

 

3. ‘역사’, 그러나 (내가 저자라면)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은 인간애가 없다면 이 글은 완성될 수 없었음을 확신한다. 책의 말미에 있는 해설을 보면 그의 장도를 말해주는데 동쪽으로 바빌론 또는 수사,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남쪽으로는 나일강 상류의 시에네, 북쪽으로는 흑해, 우크라이나 남부 주변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친 것으로 보인다. 놀랄 만한 대장정이다.’ 라고 했다. ‘사실에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호기심이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역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성장과 조직, 지리와 사회구조, 역사의 기록 등 시대를 통과하며 축적된 사회적 지식이 한꺼번에 표출된 듯한 대작이다. 이러한 대작 앞에 아쉬운 점을 얘기하고 허점을 얘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연구원이 될 것임에 하지 않을 수 없겠다. 구성의 보완과 추가 설명의 아쉬움을 어렵게 꺼내본다.

 

우선, 서사를 구분하는 책의 분류법은 너무 광범위하다. 9명 뮤즈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나누어진 꼭지는 서술상 큰 의미가 없으므로 읽는 이로 하여금 아무런 체계를 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어지는 사건에 대한 연결을 흩어놓아 집중력을 잃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로도토스 자신의 분류법은 아니고 후대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교정자들의 구분이었겠으나 책을 읽어 내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구성해보자. 당시의 Key Word전쟁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이 대륙간의 문화적 충돌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크게 전쟁과 문화, Two tract으로 구성한다. 출발은 그리스와 페르시아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사회구조, 조직, 성장의 배경, 역사의 기록 등 동시대의 모습을 이원화하여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리고 3부부터는 전쟁의 모습이다.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 등 주요 전쟁의 양상과 거기서 벌어지는 전략적 일진일퇴를 자세히 묘사한다.

 

또 하나는 2500년 후의 독자가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곧 바로 책에 붙어 앉아 몰두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모든 남자가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하는 시대였고 사용하는 각종 병기 또한 지금과 같이 예리하지 못해서 칼이 있더라도 베지 못하고 상대를 쳐서 죽여야 하는 디테일의 모습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전투의 런타임이 그리 길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진을 짜서 싸우는 남자들의 '우정'이 이 시대를 규정 지을 만큼의 사회, 문화적 키워드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러한 배경뿐만 아니라 당시 문화적, 시대적 상황들이 사전에 설명되었다면 책을 읽어 내리는 매우 유용한 지침이 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 책을 재구성하는 편집자가 된다면 이러한 시대에 대한 배경 지식을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넣지 않았겠나 싶다.

 

그러나, 위의 별볼일 없는 토로는 역작 앞에 뭍자. 전쟁이 생활이었던 시대, 전투가 일상화된 살육의 시대에 병법서를 쓰지 않고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Historiae’ 를 평생에 걸쳐 집필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 기록들이 지금까지 내려와 어두운 방에서 나와 교감하고 있는 사실은 더 경이롭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헤로도토스에게 감사한다. 그것으로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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