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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0일 11시 41분 등록

***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헤로도토스의 후배 투키기데스가 자신의 생애에 대해 어는 정도 언급한 것에 비하여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에서 자신의 집안이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인터넷을 더 찾아봐도 이 책의 뒷부분에 부록으로 수록된 작가에 대한 언급보다 더 나아가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기록은 책에 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그는 그의 저서 서문 앞머리의 기록으로 보아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보다 오래된 문헌에서 그를 투리오이 사람으로 보고 있어 확실한 것은 없다. 헤로도토스의 출생 연도는 기원전 484년 정도로 예측된다.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 남부 도시 할리카르나소스의 명망 있는 집안 자손으로 태어났으며, 또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높은 수준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란 것만은 분명하다. 헤로도토스의 정치적 입장이나 주의는 복잡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그의 정치관을 바라본다면 적어도 전제정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고 반감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할리카르나소소ㅡ가 항구도시였던 것으로 보면 그는 귀족이었더라도 상공업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로도토스의 종교성은 그의 이름이 ‘여신 헤라가 내려 주신 자’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적 분위기가 강한 집안에서 자라,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전조나 신의 섭리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강한 종교성, 소박한 신앙은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헤로도토스 역사』를 통해서 본 헤로도토스는 실제로 그렇게 많은 곳들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내가 직접 보고 들었다’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책 곳곳에서 지형, 지물에 대한 묘사를 보면 굉장히 지리적 감각이 뛰어나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이 섬세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시절에 있었음직한 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혐오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책의 많은 곳에서 엿보인다.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자유롭고 진취적인 탐구심과 보수적인 인생관, 이 둘의 혼합으로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도리스계였지만 이오니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기풍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혼혈인이었을지도 모르는 헤로도토스는 민족적 배타심을 심하게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내려오는 설이 있을 때는 그 설들을 모두 적어주고 그가 제일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설을 근거를 들어 정리해가면서 서술했다. 이는 그가 책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쓰고자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헤로도토스는 허풍선이다, 또는 그의 역사에는 허구가 포함되어 있다”라고 고대 그리스의 몇몇 작가들이 주장을 하더라도, 그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시 할 수 없을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라는 것이 기록하는 자의 이야기이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야기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의 이야기는 사료로써 검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거론되는 신화나 신전의 계시와 같은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 그 시절 사람들의 종교관에 의해 추정해보면 회자될 만한 이야기이며, 헤로도토스의 종교관을 엿볼 수 있다.

역사를 통해 본 헤로도토스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며, 여행자임이 분명하다. 그 시절의 세계라고 규정되는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 연안 그리고, 흑해 북부와 아라비아 반도를 걸쳐 인도까지 여행을 하면서 듣고 본 것을 기록해 놓은 역사는 현대에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여행기이다.

 

** ‘내가 저자라면’ 

 

먼저 이 책의 장점은 그 시대를 세밀하게 풍습이나 지형까지 설명해가면서 역사서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설이나 신탁의 내용을 전달함으로써 그 시절의 종교관과 문화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면 헤로도토스가 얼마나 자세하게 시대를 표현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생활양식은 어떤가 하면,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그 마루 위에 오두막을 짓

      고 살며 그 오두막에는 제각기 마루를 잘라내 아래쪽 호수 면으로 통하는 덮개

      문이 곁들여져 있다. 어린아이는 굴러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해서 다리에 끈을

      매어둔다.”(410)

 

위의 문장이 특별한 것은 헤로도토스의 눈이 사람들 삶의 구석구석까지 가서 그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배 계층의 왕이 되는 과정이나, 그들의 족보들만으로 『역사』가 가득 채워졌다면 『역사』는 그렇게 훌륭한 역사서가 되지 못할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위대성은 다양한 민족과 계급 계층의 나눔 없이 각각의 문화와 삶들을 세세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의 제목에는 뮤즈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아직 그 뮤즈와 각 권과의 연관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역사서의 표준을 보여주고 있다. 지리적 설명을 하고, 제국의 통치자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을 이야기한다. 또한 지역이나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세세히 설명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쟁사같은 느낌이 더 드는 것은 문화사보다는 전쟁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기 때문이다. 출판사에서 책의 뒷 표지에 제7~9권에서 다루는 크세르크세스 그리스 원정을 역사의 중심부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이 부분이 가장 지루하고 힘들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성향 탓이겠지만,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보다는 사람들의 문화나 자연 환경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끊임없이 전개되는 전쟁이야기가 지루하고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 읽어가다 보니 병력의 수나 병력의 규모와 전술 등을 보면서는 영화 ‘300’을 보는듯한 생각이 들 정도로 내용에 집중할 수 있기도 했다. 이것이 헤라도토스의 서술의 힘인 듯하다.

이 책은 작가가 구성한 부분보다 후대에 구성한 부분이 더 많은 책으로 작가가 구성했을 것 같은 원전에 대한 평가와 출판사에 대한 평가로 나뉘어 말하고자 한다.

먼저 동서문화사에서 원서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스어판 번역인지, 영미나 유럽에서 출간된 책을 번역한 것인지 밝히지 않은 것은 큰 실수이다. 더욱이 뒤에 부록으로 나온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박현태 씨가 직접 학술적 조사를 통해 덧붙인 것인지, 번역하기 전 원서에 있던 내용인지 알 수 없게 한 것도 아쉽다.

시대성을 감안해서 본다면 정말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독보적인 역사서라 아니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다면 산만하지 않게 좀 더 시기별로 장소별로 나누어서 정치, 문화, 경제를 분류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헤로도토스처럼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를 서술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스스로가 작아짐을 느낀다. 그리하여 어떠한 평가보다도 존경의 말을 저자에게 전하고 싶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를 20페이지 이상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이 책이 역사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는 살짝 첨가하고, 대부분 이 책에서 내가 알게 되었던 흥미 있는 이야기나,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을 인용, 발췌했다. 또한 작은 제목을 모두 적어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고자 했다.

 

 

헤로도토스 역사

 

제1권 클레이오

인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망각되기 마련이다.(13)

전설시대의 동서항쟁

페르시아 쪽 학자들의 설에 따르면, 다툼의 원인이 된 것은 페니키아인이었다고 한다. 페니키아인은 이른바 홍해에서 이쪽 바다로 옮겨와,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곳에 정주했다.(13)

그 이래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적으라 생각하고 있다. 페르시아인은 아시아와 아시아에 사는 비(非)그리스 여러 민족을 자기들에게 소속되는 것으로 간주하고, 유럽과 그리스는 자기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5)

리디아의 옛 역사

크로이소스는 리디아인으로 알리아테스의 아들로 태어나, 할리스 강 서쪽의 여러 민족을 독재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15)

스파르타인 나라의 정식 명칭은 라케다이몬이었다. 또한 스파르타인이라고 하는 것과 라케다이몬이라고 할 때 그 사이에는 약간의 뜻 차이가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그다지 엄격하게 양자를 구별하여 사용치 않기 때문에 이 책에서도 편의에 따라 두 호칭을 혼용했다.(16-주석6)

기게스야, 지금 그대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어느 것을 택하는가는 그대의 선택에 맡기겠다. 하나는 칸타울레스를 죽이고 나와 리디아 왕국을 그대가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 앞으로는 칸타울레스가 하라는 대로 해서 그대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볼 수 없도록 말이다. 이와 같은 일을 꾸민 그분이나 나의 살결을 보는 용서할 수 없는 짓을 한 그대, 둘 중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18)

기게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기게스의 아들 아르디스이다.(20)

그 뒤 아르디스의 아들 사디아테스가 왕위를 계승, 12년 동안 통치했다. 그 뒤를 알리아테스가 이었다.(20)

페레안드로스는 킵셀로스의 아들로, 트라시불루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위와 같다. 페리안드로스는 킵셀로스의 아들로, 트라시불로스에게 예의 신탁을 알린 인물이다. 그는 쿠린토스의 독재자였다.(22)

리디아왕 알리아테스는 밀레토스에 대한 전쟁을 끝낸 뒤 죽었다. 재위 57이었다.(23)

클라우코스는 쇠의 용접 기술을 발명한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이다.(23)

크로이소와 솔론

할리스 강 서쪽으의 주민들은 거의 다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되었다.

삶보다 오히려 죽음이 고귀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26)

인간의 생애는 모두가 우연입니다.(27)

제아무리 유복한 사람이라도, 만사가 잘 되어가는 평생을 끝마칠 수 있는 행운을 만나지 않는 한,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사람보다도 행복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는 없습니다. 돈이 썩을 정도로 있어도 불행한 사람이 많은가 하면, 재산은 없어도 좋은 운을 만난 사람 또한 많습니다, 매우 부유하지만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은, 행운이 있는 사람에게 비해서 딱 두 가지 이점을 갖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행운이 있는 사람은 불행한 부자보다도 많은 점에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전자는 욕망을 충족하거나 들이닥친 큰 재난을 견디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쪽보다 유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운이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에는 없는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습니다. 욕망을 채우거나 재난을 견디는 점에서는 부자와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그러한 일은 방지할 수가 있습니다. 몸에 결함이 없고, 병을 모르고, 불행한 일도 당하지 않고 자식 복이 있고, 모습도 아름다울 것입니다. 게다가 훌륭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왕께서 바라시는 인물, 즉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군가가 죽을 때까지 행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지언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야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습니다...(27-28)

크로이소스와 아드라스토스

외국인 살인의 부정을 씻어 받았던 아드라스토스가 이 멧돼지를 노려 창을 던졌다. 그러나 창은 표적을 빗나가 크로이소스의 아들을 찌르고 말았다. 즉, 아티스가 창에 찔려 쓰러진다는 꿈이 과연 실현된 것이다.(32)

크로이소스와 신탁

신탁은 모두 똑같은 대답을 하였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로 출병하면 대제국을 멸망시키게 될 것이며, 그리스 중에서 가장 강한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를 조사하여 이를 동맹국으로 하도록 권고한 것이다.(36)

크로이소스와 그리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그는 기존의 관제를 어지럽히거나 법률을 바꾸거나 하지 않고 종래의 국제에 따라 나라를 다스려 훌륭한 정치를 했다.(40)

페르시아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을 술을 마시면서 상의하는 습관이 있다. 그 상담에서 모두가 찬성한 일을 상담의 회장이 되었던 집 주인이 이튿날 술이 깬 상태로 있는 모두에게 제기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찬성을 하게 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폐기한다. 또 술에 취하지 않는 상태로 예비상담을 한 일은 술자리에서 다시 결정을 하게 된다.(86)

아이에게는 5세에서 20세까지 사이에 단 세 가지 것만을 가르친다. 승마, 궁술, 그리고 정직이 그것이다.(87)

아무리 국왕이라도 단 한 번의 죄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 그 밖에 일반 페르시아인도 자기 하인에게 한 번만의 과실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87)

페르시아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또한 말로도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페르시아에서 가장 창피한 일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다음에는 돈을 꾸는 일이다. 돈을 꾸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돈을 꾸는 자는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88)

“어이, 춤은 이제 그만 춰. 아까 파리를 불 때는 나오지도 않고 가만히 있던 주제에…….”

키루스가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스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이전에 키루스가 그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크로이소스에게 반란을 일으켜달라고 했을 때에는 말을 안 듣다가, 일이 끝난 지금에 와서는 키루스를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89)

리키아인은 자기 이름을 아버지 쪽이 아니라 어머니 쪽에서 따온다는 것이다.(105)

바빌론의 국토와 풍습

이 나라에는 의사가 없기 때문에 환자는 집에 두지 않고 광장으로 데리고 간다. 지나가는 사람은 자기가 그 환자와 같은 병을 앓은 적이 있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아픈 것을 본 일이 있으면 환자 옆으로 가서 병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준다. 자기가 그와 같은 병을 고쳤을 때 시도했던 요법, 또는 자기가 아는 다른 회복자가 시도했던 요법을 환자에게 가르쳐주고 시도해 볼 것은 권고한다. 그리고 누구나 환자에게 무슨 병이냐고 묻지 않고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서는 안 되도록 되어 있다. (119)

마사게타이 원정

 

제2권 에우테르페

이집트의 국토

키루스가 죽은 뒤, 캄비세스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캄비세스는 키루스의 아들로, 어머니는 파르나스페스의 딸 카산다네이다.(129)

이집트인은 프란메티코스가 왕이 될 때까지는, 자기들이 온 인류 가운데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란메티코스가 왕위에 올라 인류 가운데 어느 민족이 맨 처음 생겨났는지를 조사한 이래, 이집트인은 프리기아인이 자기들보다도 오래된 민족이고 자기들은 그 다음이라 생각하고 있다.((129)

인간계에 한정해서 그들이 하는 말 중 일치하는 것은, 1년이라는 단위를 발명한 것과 1년을 계절에 따라 열두 부분으로 나눈 것은 이집트인이 최초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별을 관찰하여 발견했다고 말하였다. 나는 달력을 계산하는 방법은 이집트인이 그리스인보다도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131)

열두 신의 호칭을 정한 것도 이집트인이 처음이고, 그리스인은 이집트인으로부터 그것을 배웠다고 한다. 또 신들의 제단이나 신상이나 신전을 세우는 것도, 돌에 모양을 조각하는 것도 이집트인이 창시한 것이라고 한다. (131)

현재 이 지역의 주민은 모든 다른 민족이나 이 지역 이외에서 사는 이집트인에 비해, 확실히 노력을 가장 적게 들이고 농작물의 수확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쟁기로 이랑을 만들거나 괭이를 사용하거나, 그 밖의 일반 농민이 수확을 올리기 위해 하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강물이 저절로 들어와 그륻의 농지를 관개하고 나서 물러나면, 씨를 뿌리고 밭에 돼지를 풀어 놓아 씨를 밟게 한다.. 그 뒤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일만 남게 된다. 그리고 나서 다시 돼지를 사용하여 곡식을 탈곡하면 수확을 얻게 된다.(136)

이오니아인의 견해에 따르면, 델타 지대만이 진짜 이집트라고 한다.(136)

나일은 리비아에서 시작하여 리비아를 두 부분으로 나누며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아는 사실에 입각해서 미지의 일을 추측해 보건대, 나일은 이스트로스 강(도나우 강)과 같은 정도의 거리에서 수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46)

이집트의 풍습

예를 들어 여자는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데, 남자는 집에서 베를 짠다. 배를 짜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씨실을 아래에서 위로 밀어 올리는데, 이집트인은 위에서 아래로 민다. 또 짐을 나를 때 남자는 머리에 이고 여자는 어깨에 멘다. 오줌을 눌 때 여자는 서서 누고 남자는 쪼그리고 않아서 눈다. 일반적으로 배변은 옥내에서 하지만, 식사는 집 밖의 길바닥에서 한다. 꼬 해야 하는 일이라도 부끄러운 일은 남몰래 할 필요가 있으나, 부끄럽지 않은 일은 공공연하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여자는 결코 성직에 않지 않는다. 신이 남신이건 여신이건 상관없다. 어는 경우난 사제의 일을 맡는 것은 남자이다. 부모의 부양에 대해서는 아들은 그럼 마음 없으면 강요당하지 않지만, 딸은 그럴 의지가 없어도 절대적으로 이 의무를 져야 한다.(147)

신들의 사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만 이집트에서는 머리를 짧게 깎는다. 또 다른 나라에서는 죽은 사람의 근친은 머리를 깍고 상복을 입지만, 이집트인은 사람이 죽으면 그때까지 짧게 자르고 있던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다. 그리고 다른 민족은 가축과 따로 생활하지만, 이집트인은 가축과 같이 산다.(147)

다른 나라 사람들은 보리와 밀을 주식으로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이들을 주식으로 한다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오리라라고도 하고 제이아라고도 불리는 곡식을 주식으로 삼는다. 이집트인은 곡식 가루를 발로 반죽하고 진흙은 손으로 갠다. 또 인분 비료를 모으는 데도 손을 사용한다.(147-148)

다른 가축도 죽으면 소와 마찬가지로 묻는다. 이것이 법률로 정해져 있기 때문인데, 소 이외의 가축도(희생물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도살을 하지 않는다(151)

헤라클레스에 관해서 나는 그가 12신 중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리스인이 알고 있는 또 하나의 헤라클레스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어느 곳에 가서도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떻든 간에 헤라클레스의 이름은 이집트인이 그리스인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인이 그것을 이집트인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리스인이라고 하는 것은 안피트리온의 아들에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붙인 사람들을 가리킨다.(152)

헤라클레스가 오래된 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153)

그리스인이 포세이돈을 안 것은 리비아인으로 부터이다. 본래 포세이돈이라는 신을 섬기는 민족은 리비아인 외에는 없고, 리비아인은 예부터 변함없이 이 신을 숭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집트인은 반신(헤로스)을 모시지 않는다.(157)

여러 가지 풍습이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전래되었던 것이다.(157)

헤시오도스나 호메로스도 나보다 기껏해야 400년 전 사람들로, 그보다 더 오래된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으나 그리스인을 위해 신의 계보를 세우고, 신들의 칭호를 정하고, 그 기능을 배분하여 신들의 모습을 그려서 보여준 것은 이 두 사람뿐이다. 그들보다 오래되었다고 일컬어지는 시인들도 내가 보는 바로는, 두 사람보다 뒤의 사람들이다. 위에서 말한 처음 부분은 도도네의 무녀들이 이야기한 것이고, 후반의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에 관한 것은 나의 설이다.(159)

하여튼 국민적 대축제 - 신체를 받들고 대열을 지어 걷고 참배를 위해 행렬을 짓는 것 같은 풍습은 이집트인이 창시한 것으로, 그리스인은 최그에 이르러 시작되었다는 데에 있다.(160)

이집트인은 국민적 대축제를 1년에 한 번 여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개최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대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르케미스를 위하여 부바스티스라고 하는 도시에 모여서 하는 축제이고, 그 다음으로는 부리리스라는 도시에서의 이시스 축제이다. 이 도시에는 이시스의 장대한 신전이 있고, 도시 그 자체가 이집트의 델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시스는 그리스로 말하자면 데메테르에 해당한다. 세 번째로 중요한 대축제는 사이스에서의 아테네 축제, 네 번째는 헬리오폴리스에서의 헤리오스(태양신)축제이고 다섯 번째는 부토에서의 레토 축제, 여섯 번째는 파프레미스에서의 아레스 축제이다.(160-161)

이들 동물 중 어떤 것을 죽이는 일이 있으면, 고의로 죽인 경우에는 사형이고, 고의가 아닌 경우에는 사제가 부과한 벌을 받는다. 그러니 이비스(따오기) 또는 매를 죽인 자는 고의든 아니든 사형을 면치 못한다.(163)

이집트의 생활양식

이집트인 중에서도 농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과거의 기록을 꼼꼼하게 보존하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나라 주민보다도 고사에 정통하다. 이집트인의 생활 방식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건강 유지를 위하여 매월 3일간 연속해서 구토제와 관장을 이용하여 체내의 정화를 꾀한다. 인간의 병은 모두 음식이 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집트인은 리비아인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민족이다. 생각건대 이는 기후의 변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병은 일반적으로 변화에서 기인되는 바가 가장 많은데, 그중에서도 기후의 변화가 가장 큰 원인이 된다.(168)

이집트인의 옷차림은, 다리 둘레에 술이 달린 카라시리스라고 하는 아마 내의를 입고 그 위에 흰 모직 옷을 걸쳐 입는다. 그러나 모직 옷은 성역에 갈 때는 입지 않고, 사신에 입혀서 매장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종교상 금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이른바 오르체우스교나 바코스교(이들은 본래 이집트에서 기원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피타골라스파의 계율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169)

이집트에서는 의술이 전문별로 분화되어 있다. 의사는 저마다 한 종류의 병만을 다룬다. 따라서 곳곳에 의사 투성이로, 눈 의사, 머리 의사, 북부 의사, 치아 의사, 환부가 분명치 않는 병의 의사 등등이 있다.(170)

이집트의 역사

사제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집트 초대의 왕인 민(Min)왕의 업적으로는, 먼저 제방을 쌓아 현재의 멤피스 땅을 안정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177)

사제들은 한 권의 책을 펴고 민 왕 이후의 330명에 이르는 왕 이름을 차례로 들었다. 이 엄청난 수에 이르는 세대에 걸쳐, 18명은 에티오피아인이고, 단 한 사람 순수한 이집트 여성이 있고, 다른 사람은 모두 이집트 남자들이다. 이 왕위에 있었던 여성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바빌론의 여왕과 마찬가지로 니토크리스라고 했다.(178)

사제들이 말한 바에 따르면, 세소스트리스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함대를 거느리고 ‘아라비아 만’을 출발하여, ‘홍해’ 연안의 주민들을 정복하고 다시 배를 몰아 물길이 얕아 항해를 할 수 없는 해역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179)

세소스티리스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페로스가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한다.(183)

사제들에 따르면, 프로테우스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람프시니토스였다.(189)

피라미드 시대의 여러 왕들

이집트에서는 람프시니토스 왕의 시대까지는 나무랄 데가 없는 정치가 실시되어 그케 번창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이집트의 왕이 된 케오프스는 국민을 비참한 상태로 빠뜨렸다고 사제들은 이야기하고 있다.(193)

피라미드 자체의 건조에는 20년이 걸렸다고 한다.(194)

에티오피아인의 이집트 지배, 12인의 왕, 미궁에 대하여

아시키스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아니시스 시 출신으로 그 도시와 이름이 똑같은 아니시스라는 장님이었다고 한다. 이 왕의 시대에 에티오피아이 왕 사바코스(사바카)가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쳐들어왔다.(200)

헤파이스토스의 사제가 왕이 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집트인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런데 이집트인은 왕을 위로 모시지 않으면 한시도 지낼 수 없는 국민이었으므로, 그들은 스스로 국토를 열둘로 나누어 12명의 왕을 세웠다.(206)

프산메티코스의 통치와 그의 후계자

프산메티코스는 54년에 걸쳐 이집트에 군림했는데, 54년 중 29년 동안은 시리아의 대도 아조토스를 계속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이를 점령하였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아조토스는 섹계의 도시 중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포위 공격에 견딘 도시이다.(212)

아마시스

아프리에스를 타도한 뒤 아마시스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사이스 주 출신으로, 태어난 고을은 시우프라고 했다.

“활은 가진 자는 이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때 당기지만, 사용하고 나면 늦추어 둔다. 활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당긴 상태로 두면 부러져서 막상 필요할 때 쓸모가 된다. 인간이 취할 자세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근엄해야 한다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때로는 편안한 마음으로 논다는 기분이 없다면,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어지러워지거나 멍청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치를 아리 때문에 이 둘을 적당하게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219)

이집트는 아마시스 왕 치세 때 유례없이 번영했다고 한다. 나일은 대지에, 대지는 인간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다주었고, 사람이 사는 도시의 수는 이집트 국내에서 2만에 이르렀다고 한다.(221)

 

제3권 탈레이아

캄비세스의 이집트 공략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오니아 및 아이올리스의 그리스인 부대를 포함해서 그가 지배하고 있던 백성을 이끌고 정벌하기 위해 떠난 상대는 다름아닌 아마시스였다.(225)

페르시아인에게는 왕가의 후예을 존중하는 기풍이 있어서, 페르시아에 반기를 들었을 경우에도 그 자손에게는 언제나 주권을 반환했기 때문이다.(233)

에티오피아인과 암모인에 대한 원정과 그 좌절

이집트 공략 뒤, 캄비세스는 세 가지 원정을 계획하였다. 노리는 상대는 카르타고인, 암몬인, 그리고 리비아의 남쪽 바다에 면하는 지역에 사는 에티오피아의 ‘장명족’이었다.(234)

캄비세스의 어지러운 마음

나로서는 핀다로스가 ‘관습이야말로 만물의 왕’이라고 노래한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247)

사모스와 스파르타의 항쟁

캄미세스가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고 있을 무렵, 스파르타는 사모스를 공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아이아케스의 아들로서 혁명을 일으켜 사모스의 정권을 잡은 폴리크라테스를 공격한 것이다.(247)

사모스인이 완성한 제3의 사업은 우리가 알기로는 세계 최대의 신전으로, 처음에 이 공사에 손을 댄 것은 피레스의 아들 로이코스라고 하는 그 고장 기사였다. 내가 사모스인에 대해 조금 길다 싶을 만큼 자세히 기술한 것은 그들이 이와 같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259)캄비세스의 죽음과 다레이오스의 등극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집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데다가 정신 이상을 일으킨 동안에, 마고스 사제 계급에 속하는 두 형제가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260)

“오타네스여, 이 세상에는 말로는 나타낼 수 없으나, 행위로써 나타낼 수 있는 일이 많소. 그리고 또 말로는 쉽지만 거기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소.(267-268)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독재자가 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좋은 일도 아니므로, 이제 그와 같은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오. 여러분은 캄비세스 왕이 어떻게 포악한 정치를 했는지 알고 있고, 또 마고스의 폭정도 몸소 겪었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독재체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조차도 한번 군주의 자리에 않으면 이전의 마음은 잊어버리고 마오. 현재의 영화로 교만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인데, 여기에 또 타고난 질투심이라는 것이 있소.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비행이 생기게 되는 것은, 하나는 영화에 싫증이 나서 교만한 마음을 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질투심이 저지른 결과요. 본디 독재자는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지니게 되므로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 따위는 가질 리가 없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의 국민에 대한 태도는 정반대가 된다오. 그는 즐겨 총애하고, 또 그 참소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소. 이 세상에 독재자보다도 그 말과 행동이 다른 자는 없고. 그는 적당히 칭찬하면 부족하다 화를 내고, 귀히 받들면 아첨꾼이라 해서 기분이 상했다 하니 말이오.(272)

독재자란 조상 전래의 풍습을 파괴하고, 여자를 범하고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소. 이에 반해 대중에 의한 통치는 먼저, 만민평등권이라는 아름다운 명목을 갖추고 있고, 다음으로는 독재자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직문의 관장은 추첨에 따르고, 관리는 책임을 가지고 직무에 임하며, 모든 국책은 공론에 의해 결정되오.(272)

왕국을 징세구로 구분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레이오스는 왕위에 올랐다.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처음에는 키루스 다음에는 캄비세스가 평정한 아라비아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레이오스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아라비아인은 이전에 페르시아에 예속된 일이 없어서,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 때 통과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여 페르시아의 우방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276)

다레이오스는 페르시아와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결연을 맺어, 먼저 카루스의 두 딸인 아토사와 아르티스토네를 아내로 맞았다.(276)

다레이오스는 페르시아 본국에서 이와 같은 일을 한 뒤, 페르시안인의 이른바 사트라페이아라고 하는 20개의 행정구를 제정하였다.(277)

인도인은 많은 종족으로 나뉘어 서로 언어가 다르다. 유목민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고, 또 하천의 소택지에 살면서 갈대로 만들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아 이것을 생으로 먹는 종족도 있다. 갈대는 그 한 마디 만으로도 배 한 척을 거뜬히 만들 수 가 있다. 이 종족은 골풀로 짠 의류를 입고 있다. 골풀은 강가에서 베어내어 충분히 두드린 뒤 멍석을 짜듯이 짜서 이것을 동체 갑옷처럼 몸에 두른다.(282)

이 종족의 동방에는 유목을 업으로 하는 다른 인도인이 살고 있는데, 생고기를 주식으로 하며 파다이오이인이라고 불린다.(282)

인타프레네스와 오로이테스

“만약에 전하께서 한 사람만 구해주겠다고 하신다면 나는 형제를 택하겠습니다.”(291)

“전하께 말씀드리옵니다만, 신의 뜻이 계시면 저는 다른 남편도 맞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아들을 잃어도 또 아들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는 지금, 또 한 사람의 형제를 가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291)

데모케데스 이야기

다레이오스의 상처를 완치시킨 데모케데스는 커다란 저택에 살며 그리스로 돌아가는 일을 빼고는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는 신분이 되었다.(298)

다레이오스의 사모스 공략

그 뒤 다레이오스는 사모스를 점령했다. 그리스, 비그리스의 구별 없이 이것이 다레이오스가 점령한 첫 도시였다.(302)

바벨론의 반란과 진압

사모스의 공격으로 수군이 발진한 다음, 바빌론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충분히 준비를 갖춘 뒤의 반란이었다. 마고스의 지배시대부터 7인의 봉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또 이에 이은 동란의 시기를 통해서 그들은 농성에 대비해서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307)

 

제4권 멜포메네

스키타이 원정

바빌론을 점령한 뒤 다레이오스는 직접 스키타이인 원저에 나섰다. 바야흐로 아시아는 인구도 풍부하고 국고에 축적되는 수입은 막대했으므로 스키타이인에게 보복을 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침해한 것은 스키타이인 쪽이고, 그들은 페르시아인의 침공 이전에 메디아에 침입해 저앙하는 메디아인을 격파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313)

스키타이의 고대사

스키타이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세계에서 역사가 가장 새로운 민족이고 그 처음은 아래에 같았다고 한다.(315)

스키타이인은 처음에 아시아 유목민이었는데, 마사게타이인의 공격에 시달린 끝에 아락세스강을 건너 킴메르 지방으로 이동했따고 한다. 오늘날 스키타이인이 거주하는 지역은 일찍이킴메르인에게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킴메르인은 스키타이인이 대거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협의를 했는데, 의견이 둘로 나뉘어 팽팽히 맞섰다. 그 가운데 왕족의 견해가 더 뛰어났다.(318)

스키타이 북방 여러 민족

위에 열거한 지역은 모두 극한의 땅이고 1년 가운데 8개월간은 그 한기를 견디기 어렵다.이 기간에는 지면에 물을 쏟아도 흙은 나타나지 않으며 불을 피워야 겨우 흙이 드러날 정도이다. 바다는 얼어붇고 킴메르 보스포로스(케르치 해협)도 모두 얼어,앞에서 말한 참호 안쪽에 사는 스키타이인은 대거 얼음 위를 이동해 신데인의 나라까지 수레를 몰로 간다.(325)

세계의 형태와 구조

(아시아에서는) ‘홍해’로 불리는 남쪽 바다에 이르기까지를 페르시아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 북방에는 메디아인, 그 다음에는, 사스페이레스인, 사스페이레스인 다음에는 콜키스인이 살고, 이는 파시스강이 흘러드는 북쪽 바다에 이른다. 바다에서 바다에 걸쳐 위의 네 민족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대륙에서 더욱 서쪽으로 향해 두 개의 돌출부가 바다로 향해 있는데, 다음에는 이에 대해서 살펴보자.

돌출부의 하나는 북쪽 파시스강에서 시작해 바다로 향해 뻗고 흑해와 헬레스폰토스를 따라서 트로이지방의 시게이온 곶에 이른다. 한편 남쪽에서는 같은 돌출부가 페니키아인에 따라 미리아느도스 만에서 트리오피온 곶에 걸쳐서 바다 속으로 뻗어 있다. 이 돌출부에는 30개의 민족이 살고 있다

또 하나의 돌출부는 페르시아에서 시작해 ‘홍해’로 뻗어 있고 페르시아 본토와 여기에 이어지는 아시리아, 아시리아에 이어지는 아라비아가 여기에 있다. 이 돌출부는 다레이오스가 나일과 운하로 연결시킨 아라비아만에서 그친다. -실제로는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페르시아에서 페니키아 사이에는 광대한 토지가 이어지고, 이 돌출부는 페니키아에서 이쪽의 바다를 따라 시리아 팔레스타티나에서 이집트에 이르고 여기에서 그친다. 이 돌출부에는 세 민족이 살 뿐이다,(330-331)

아시아에 대해서는 다레이오스가 많은 발견을 하였다.(333)

스키타이의 하천

다레이오스가 원정을 기도하고 있었던 흑해는 스키타이인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무지몽매한 민족을 거느린 지역이다.(335)

스키타이의 풍습

스키타이인은 희생에 돼지는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 있고, 나라 자체에서 돼지의 사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342)

스키타이인도 외국의 풍습을 받아들이는 것을 매우 꺼린다. 어느 나라에 대해서나 그렇지만 특히 그리스의 풍습을 혐오하는 것은 먼저 아나카르시스, 이어서 스킬레스의 예를 통해서도 명확하다.(346)

다레이오스의 원정

다레이오스는 만드로클레스에게 은상을 내린 뒤 유럽으로 건너갔는데, 이오니아인에게는 흑해의 이스트로스 강가에서 항해할 것이므로 이스트로에 도달하기 전에 다리를 놓고 기다리도록 지시해두었다.(354)

다레이오스는 이곳을 떠나 이윽고 오도리소이국을 흐르는 아르테스코스란 다른 강변에 도달했다.(355)

아드로파고이인의 풍습은 세상에서 가장 야만적이다. 정으도 지키지 않는가 하면 아무런 벋도도 없다. 유목민이고 스키타이인과 비슷한 복장을 걸치며 언어가 독특하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민족 중에는 그들만이 인육을 먹는다.(361)

멜란클라이노이인은 모두 검은 옷을 걸치고 그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풍습은 스키타이식이다,(361)

부디노이인은 인구가 많은 대 민족으로 눈빛은 푸르고 머리칼은 붉은색이다. 이 나라에는 겔로노수란 목조의 도시가 있다.(361)

리비아 공격의 이전 역사

키레네 식민의 유래

40년간 왕위에 있었던 창설자 바토스, 그리고 16년간 통치한 그의 아들 아르케실라오스의 재위 기간에 키ㅔ네의 인구는 처음으로 식민으로 출발했을 때의 숫자 그대로였다. 그러나 ‘행복왕’으로 일걸어지는 3대째인 바토스 치세에 델포이의 무녀가 계시를 내려 모든 그리스인에게 리비아에 가서 키레네인과 함께 살라고 촉구했다. 그것도 처음에는 키레네인이 토지를 나누어 주겠다며 그리스인을 초청했기 때문이다. 그 신의 계시란 이렇다.

“아름다운 리비아 땅의 토지분배에 뒤처지는 자는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오리라.”(383)

리비아

이집트를 기점으로 해 서술하면 가장 가까운 지역에 사는 리비아인은 아디르마키다이인이고 그 풍습은 대략 이집트풍인데 복장은 리비아인과 다름이 없다. 이 종족의 여자들은 두 다리에 청도제의 고리를 끼우고 있다. 마리는 기레 기르고 몸에서 이를 잡으면 어는 여자나 입으로 씹어서 버린다. 리비아인 가운데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이 종족뿐이고, 또 아직 시집가지 않은 딸을 왕에 의해서 처녀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아르디마키다이의 영토는 이집트 국경에서 플리노스란 항구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에 이어지는 것이 길리가마이인이고 서쪽의 아프로디시아스 서에 걸쳐서 산다. 실피온이 자라는 지역도 이 지방에서 시작된다. 실피온은 플라테아 섬에서 시르티스의 입구에 걸친 지역에서 채취되는 것이다. 이 종족의 풍습은 다른 종족의 것과 비슷하다.

길리가마인의 서쪽 지방에는 아스비스타이인이 이어진다. 키레네 앞쪽에 사는 종족이고 그들의 나라는 바다에 도달하지 않는다. 해변 지대에는 키레네인이 살기 때문이다. 사두마의 전차를 다루는 기량은 리비아 중에 이 종족을 따를 종족이 없다. 그들은 키레네인의 풍습 대부분을 열심히 모방하고 있다.

아스비스타이 서쪽에 연이어서 있는 것이 아우스키사이인이다. 그들은 바르케에서 서쪽, 에우스페리데스 부근의 바다에 걸쳐 살고 있다. 아우스키사이 영토 중간쯤에 바칼레스라는 소수 종족이 사는데 이 지역은 바르케영내의 도시 타우케이라의 부근에서 바다에 이르고, 그 풍습은 키레네에 사는 리비아인과 같다.

아우스카이 서쪽에는 나사모네인이 살고 있다. 대인구를 거느린 종족으로, 여름철에는 가축을 해안에 남겨두고 대추야자 열매을 채취하기 위해 아우길라라는 곳으로 올라간다. 이곳에는 대추야자가 자라고 모두 열매을 맺는다. 또 메뚜기를 잡아 햇볕에 말린 다음 빻아서 우유에 타 마신다.

이 종족은 많은 아내를 거느리는 풍습이 있고 마사게타이인과 똑같이 사내는 누구나 아내를 공유하고 서로 관계를 맺는다. 관계를 가질 때에는 집 앞에 장대를 세우는 것으로 표시한다. 나사모네스의 사내가 처음으로 혼례를 올릴 때에는 첫날밤에 신부가 모든 손님과 잇따라 관계를 갖는 풍습이 있다. 손님은 신부와 관계를 가지면 저마다 집에서 가져온 물품을 신부에게 선물한다.(388-389)

마카이인 다음에는 긴다네스인이 산다. 이 종족의 여자는 어느 여자건 가죽으로 된 띠를 두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같다고 한다. 여자는 사내에게 몸을 맡길 때마다 그것을 다리에 하나씩 두른다. 그리고 가장 많은 띠를 두르고 있는 여자가 가장 많은 사내의 사랑을 받았다고 해 최고의 여성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391)

방패도 투구도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전해진 것은 내가 단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392)

테베를 기점으로 열흘을 걸어간 곳에서 맨 처음 만나는 종족은 암몬인이고, 이곳 신전은 테베의 신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테베에서도 제우스 신상의 얼굴은 수컷 양의 모습이기 때문이다.(393)

이 가라만테스족은 동굴에서 사는 에티오피아인을(트로글로디타이 아이티오페스) 사두마차로 사냥한다. 이 에티오피아인은 우리가 아는 한 모든 인간 가운데서 가장 빠른 인종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뱀, 도마뱀, 그 밖의 파충류를 주식으로 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어느 언어와도 다르고 마치 박쥐의 울음소리처럼 들린다.(394)

이곳 주민의 이름은 이 산의 이름을 따 아틀란데스인으로 불린다. 이 종족은 살아있는 동물을 먹지 않고, 또 꿈도 꾸지 않는다고 한다.(394-395)

현재도 사하라 사막의 주민은 대부분 채식이라고 한다.(395-주석266)

이와 같이 이집트에서 트리토니스 호에 걸쳐서는 유목 리비아인이 산다. 그들은 육식이고 우유를 마시는데, 이집틍니과 같은 이유로 암소고기는 먹지 않고 돼지도 기르지 않는다. 키레네의 여자들도 이집트의 이시스 여신을 의식해 암소고기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믿으며, 이 신을 위해 단식도 하고 축제까지 벌인다. 또 바르케의 여자들은 암소 외에 돼지고기도 입에 대지 않는다.(395)

막시에스에 이어서 자우에케스라는 리비아인이 사는데 이 종족은 전장으로 나갈 때 여자가 전차를 몬다.(398)

에우에스페리데스인이 사는 토지도 비옥하다. 이곳은 가장 풍작일 때 (파종량의) 100배의 수확이 있다. 그러나 키닙스 지방에서는 300배에 달한다.

한편 키레네 지방은 리비아 유목민이 사는 지역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지구인데, 놀랍게도 이 지역에서는 수확기가 세 번이나 있다. 먼저 해안지방의 곡물수확기가 다가오고 이 수확이 끝나면 다음은 해안지대 위쪽의 구릉지로 불리는 중단의 지역이 수확을 재촉한다. 이 중단 지역의 곡물 수확이 끝날 무렵에는 최상단 지역의 곡물은 이미 결실을 해 수확을 기다린다. 이렇게 해서 최초이 수확물이 다 소진되었을 때쯤에 그것과 때를 같이 해서 마지막 수확물을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키레네인의 수확기는 8개월에 걸친다.(400)

바르케 점령

한편 페레티메를 지원하는 페르시아군은 아리안데스의 명에 따라서 이집트를 떠나 바르케에 도착하자 아르케실라오스를 살해한 책임자를 인도하도록 통고하고 도시를 포위했다. (401)

페레티메도 그 생애를 행복하게 마칠 수는 없었다. 바르케인에게 보복을 가하고 리비아에서 이집트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이다. 그녀는 살아서 온 몸에 구더리가 들끓는 예상치 못한 괴로움에 시달렸다. 이간이 너무나도 가혹한 복수를 시도할 때에는 신들의 증오를 사게 된다는 것을 이 일로도 알 수 있다.(402)

 

제5권 테릅시코레

트라카이 및 마케도니아 공략

페린토스군은 교외에서 침입군에 대치해 전열을 가다듬었는데 이때 그들이 도전해 와 세 번의 1대 1 맞대결이 이루어졌다. 사람과 사람, 말과 말, 개와 개와의 맞대결이다.(404)

트라키아인은 세계에서 인도인에 이어 가장 큰 민족이다.(405)

트라우소이족의 풍습은 다른 트라키아인과 대체로 같은데 아이가 태어났을 때와 사람이 죽었을 때에 아래와 같은 행동을 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은 그 아이 주위에 둘러앉아 인간에게 일어나는 온갖 불행을 모두 헤아리고 이 아이도 태어난 이상 이와 같은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면서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수많은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더없는 행복의 경지로 들어간 것이라고 해서 기쁨 속에 땅에 묻는 것이다. 다음으로 크레스토나이오이족 북쪽에 사는 부족의 풍속은 아래와 같다. 여기에서는 사내가 모두 많은 아내를 거느린다. 그런데 남편이 죽으면 어느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아내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또 죽은 사내의 친구들도 이 일에 끼어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뽑히는 영예를 얻은 여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부족민으로부터 찬양을 받고,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족의 손에 의해 남편의 묘 위에서 인후가 깨여져 남편과 함께 매장된다. 한편 남은 아내들은 자신들의 불운을 탄식한다.- 그녀들에게 이처럼 치욕적인 일은 없는 것이다.(405)

그 밖에 트라키아인에게는 또 이런 풍습이 있다. 자기 아이를 다른 나라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또 미혼인 딸은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둬 좋아하는 사내와 관계를 맺는 것을 허용하는데 기혼인 딸은 엄격하게 감시한다. 그들은 아내를 그 부모로부터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사는 것이다. 또 문신을 하고 있는 것이 좋은 출신성분의 표시가 되어 문신을 하지 않으면 출신이 천한 것으로 간주된다. 노동을 하지 않는 자가 가장 훌륭한 인간이고 토지를 일구는 자는 하찮게 여겨진다. 전쟁과 약탈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인 것이다. (406)

히스티아이오스와 아리스타고라스

“히스티아이오스여, 그대를 부른 용건이란 다름이 아니다. 내가 스키타이에서 귀환해 그대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잠깐 동안이었는데, 그대를 만나 대화를 하는 것 이상으로 간절한 소망이 달리 없었다. 그 이유는 재치와 성심을 겸비한 친구야말로 온갖 제보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414)

스파르타의 정세- 클레오메네스와 도리에우스

스파르타에서는 레온의 아들 아낙산드리데스가 이미 사망해 왕위에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왕은 아낙산드리데스의 아들 클레오메네스였는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그 가문에 따른 것이지 자질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었다.(421)

아리스타고라스, 스파르타의 지원요청

아이스타고라스는 이때 온 세계의 지형과 함께 해양과 하천이 모두 새겨져 있는 동판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425)

수사에 이르는 ‘왕도’

밀레토스의 아리스타고라스가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에게 페르시아 왕에게 도달하기까지의 노정을 3개월로 잡고 말한 것은 정확했던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흥망

무릇 인간으로서 죄를 범하고 그 벌을 받지 않는 자는 없나니.(430)

페이시스트라토스가와 스파르타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음에도 스파르타인들은 신의 뜻에 관한 일은 인간관계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433)

클레이스테네스와 이사고라스

아테네는 그 이전에도 이미 대국이었는데 독재자로부터 해방되기에 이르자 더욱 강대해졌다. 그 무렵 두 인물이 아테네에서 지배적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알크메온가의 일족인 클레이스테네스로 이 사내가 바로 델포이의 무녀를 매수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 한 사람은 테이산드로스의 아들 이사고라스로 명문가 출신인데, 그 선조에 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그의 동족이 ‘칼리아의 제우스’에게 희생을 바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434-435)

클레오메네스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네인이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도 자기에게 심한 모욕을 준 것으로 보고 펠로폰네소스 전역에서 병력을 모았다. 단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는데, 그의 본마음은 아테네 국민에게 보복을 가하고 이사고라스를 독재자로 세우려는 에 있었다. 클레오메네스가 아크로폴리스에서 철수했을 때 이사고라스도 그와 행동을 같이 한 것이다.(439)

아테네와 이이기나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강대해졌으며, 자유평등이 단순히 한 가지 점뿐만 아니라 모든 점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아테네가 독재하에 있을 때에는 주변의 어느 국가도 전력 면에서 능가할 수가 없었는데, 독재자로부터 해방되자 단연 타국을 제압해 최강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압제 하에 있을 때는 독재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해 일부러 비겁한 행동을 했으나, 자유롭게 된 뒤로는 저마다 자신을 위해 의욕을 불태운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441)

고대 그리스 여성의 옷차림은 크게 나누어 이오니아식과 도리스식의 두 종류가 있었다. 도리스식은 거의 소매가 없고 꿰매지 않았기 때문에 어깨언저리에서 브로치로 고정을 해야 했다. 그에 반해서 이오니아식은 소매가 있고 또한 꿰매어져 있었기 때문에 브로치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445-주석52)

크린토스인의 독재반대 연설

“정말로 천지가 뒤바뀌어 하늘이 지하로 숨고 땅이 하늘에 걸릴지 뉘 알겠소. 또 인간이 바다 속에 살고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 올지도 모르겠소. 스파르타 여러분이여, 만일 그대들이 만민 동권의 원칙을 파기하고 그리스 국가들에 독재제를 펴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이처럼 부당하고 잔인한 행위는 없을 것이오. 국가의 정치는 독재제가 좋다고 진실로 생각하신다면 귀국이 솔선해서 자국 내에 독재자를 세우고, 그런 연후에 다른 나라에게도 똑같이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오. 독재정치의 경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에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엄중하게 경계를 하고 있는 귀국이, 부당하게도 동맹국에 그것을 시행하려 하다니요. 만일 귀국이 우리처럼 독재제의 경험이 있다면 이 체제에 대해서 지금보다 더욱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이오.(447)

시게이온의 싸움

아테네인은 군선 20척을 이오니아인의 원군으로 파견할 것을 의결하고, 그 지휘관으로서 아테네 시민이 가운데 모든 점에서 명성이 높았던 멜란티오스를 임명했다. 이 함대 파견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불행한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453-454)

사르데스의 파괴

사르데스의 인가는 대부분이 갈대로 만들어지고, 벽돌로 지어진 집도 그 지붕은 갈대로 이어져 있었다.(455)

키프로스의 배반과 그 진압

키프로스의 시 가운데 가장 장기간 포위를 견데 낸 것은 솔로이였는데, 페르시아군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밑으로 파고 들어가 5개월 만에 이를 공략했다.(461)

이오이아인의 패배, 아리스타고라스의 죽음

키프로스인은 자유의 몸이 된 지 1년 만에 또 다시 페르시아의 압제에 시달리게 되었다.(461)

 

제6권 에라토

히스타이오스의 활약

이 구두는 그대가 만들었고 그것을 아리스타고라스가 신은 것 뿐이오.(465)

에게 해와 헤레스폰토스 연안 도시 공략

이오니아는 세 번이나 쓰라림을 맛보았는데, 이 3회 가운데 최초는 리디아인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두 번은 페르시아인에 의한 것이다.(477)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본토 공략

마르도니오스가 아시아의 연안을 따라서 항행해 이오니아에 닿았을 때의 일이다. 오타네스가 페르시아의 일곱 장로를 앞에 두고 페르시아는 민주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의견을 말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으려는 그리스인에게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마르도니오스는 이오니아의 독재자를 모두 추방하고 각 도시에 민주제를 실시한 것이다.(482)

타소스의 굴복

그 이듬해 타소스가 모반을 기도하고 있다는 이웃나라로부터의 호소가 있었기 때문에, 다레이오스는 먼저 타소스에 사자를 보내 성벽을 파괴하고 그 함선을 아브데라로 돌리도록 명했다.(483)

스파르타의 정정

아리스토데모스의 쌍둥이 어머니가 눈치를 못 채도록 주의하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젖을 물릴 때에도 목욕을 시킬 때에도 반드시 장자 쪽에 먼저 손길을 주었다.(486)

한편 스파르타인은 아래와 같은 풍습이 이집트인과 흡사하다. 두 나라 모두 포고사항 전달자, 피리연주자, 요리사는 세습적으로 그 직업을 계승하여, 피리연주자의 아들은 피리연주자, 요리사의 아들은 요리사, 포고사항 전달자의 아들은 포고사항 전달자가 되는 관습이 있다.(490)

아리스톤이 사망해 데마라토스가 왕위에 올랐다.(492)

아이기나와 아테네의 싸움

아이기나인은 동족끼리 골육상쟁을 하면서 쳐들어온 아테네군과는 70척의 배로 해전을 벌였다. 그리고 여기서 패하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르고스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르소스인은 앞서 클레오메네스에게 나포된 아이기나의 함선이 아르고스 령에 접안해 스파르타군과 함께 상륙을 감행한 일을 따지고 이번에는 아이기나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했다.(506)

페르시아 원정군, 여러 섬을 거쳐 마라톤에 이르다.

이들 왕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고치면 다레이오스는 ‘제압하는자’ 크세르크세스는 ‘전사’,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위대한 전사’란 뜻이다.(509)

‘제압하는 자’의 원어는 ‘일을 행하는 자’란 뜻도 된다.(509-주석81)

마라톤 전투

아테네, 스파르타 간의 거리는 200킬로미터가 넘는다. 2일간에 이를 주파했다면 하루에 100킬로미터 이상을 달리는 셈이 된다.(512-주석91)

밀티아데스의 일

스파르타 병력 2천이 만월 뒤에 아테네에 도착했다. 전투에 늦을 새라 필사적으로 강행군을 계속한 탓에 스파르타를 떠난 지 3일 만에 아티카의 땅을 밝은 것이다. 그들은 전투에는 비록 때를 맞추지 못했으나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에 사로잡혀 마라톤으로 가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테네인의 용기와 그 무공을 찬양한 뒤 귀국했다.(519)

밀티아데스의 지휘 아래 아테네인은 렘노스를 점령한 것이다.(530)

 

제7권 폴림니아

크세르크세스의 원정 준비

마라톤 전투 소식이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다레이오스왕에게로 전해졌다.(531)

이 세상에 비방이나 중상만큼 나쁜 짓은 없네. 사람을 비방할 때에는 반드시 가해자 두 사람과 피해자 한사람이 있게 마련이네. 먼저 비방하는 자에게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헐뜯었다는 죄가 있고, 또 한 사람에게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비방을 믿은 죄가 있지. 한편 비방을 받는 자는 한 사람으로부터는 중상을 당하고 다른 또 한 사람으로부터는 악인으로 간주된단 말일세.(540)

“전하, 제 생각으로는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유익한 조언을 하는 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 가치는 똑같다고 봅니다. 전하께서는 이 두가지 덕성을 갖추고 계신데도 나쁜 자들이 전하 곁에 있기 때문에 그 덕성이 가리워졌던 것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말하는 데로, 본디 바다는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쓸모 있지만 불어오는 질풍이 그러한 바다의 본성을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543)

원정군의 출발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공략 뒤 4년간을 군대의 징집과 군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데 소비했다. 그리고 5년째에 접어들어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섰다.(545)

기원전 484년 봄부터 기원전 480년 봄까지의 일.(545-주석17)

여기서 연합군의 행군 순서를 보면 치중대와 짐을 실어나르는 짐승이 선두에 서서 진군했고, 그 뒤를 이어 여러 민족의 혼성 부대가 민족별로 편성되지 않고 서로 섞인 채 행진했다. 모든 부대의 반 이상이 부근에는 얼마쯤 간격이 두어져, 이들 부대가 다음에 계속되는 대왕 직속 부대와 섞이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대왕의 직속 부대를 보면 페르시아 전역에서 선발된 1천 명의 기병이 진군했고, 그 뒤를 이어 역시 전국에서 선발된 친위대 1천 명이 창끝을 밑으로 행한 채 행군했다. 그리고 화려한 마구로 장식된, 네사이온 말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신마 열 마리가 그 뒤를 이었다. 네사이온 말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메디아국에 있는 네사이온이라는 광대한 평원에서 거대한 말들이 나기 때문이다. 이 열 마리의 말 뒤에서는 여덟 마리의 백마가 끄는 제우스의 전차가 뒤따랐다. 그리고 말 뒤에서는 고삐를 쥔 마부가 걷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든 이 수레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차 뒤에는 크세르크세스왕이 네사이온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가고, 페르시아인 오타네스의아들 파티람페스가 마부로서 그 곁에 있었다.(554-555)

헬레스폰토스 도착과 바다를 건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부딪히게 되는 것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슬픈 일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이렇게 짧은 인생이지만 삶보다는 죽음을 원하는 일이 한 번도 아닌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겪지 않을 만큼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불행이나 병마에 시달리는 자에게는 이 짧은 인생마저 너무 긴 듯 느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이 괴로운 나머지 죽음이 인간이 가장 원하는 도피처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에게 인생의 감미로움을 맛보게 해주신 신의 마음속에 실은 악의가 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557)

“아르타바노스여, 그대가 한 말은 하나같이 다 옳소. 하지만 그렇게 무엇이든 두려워하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고려하지 마시오. 어떤 사항에 대해 온갖 가능성을 일일이 따진다면 결국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될것이오. 오히려 만사를 대담하게 결행하고 염려되는 위험을 반쯤은 감수하는 편이, 사전에 온갖 위험을 피하기 위해 행동을 회피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오. 그대가 다른 자들의 의견에 일일이 반대할 때 그 주장이 확실히 옳음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대의 반론 또한 그대의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틀린 것일지도 모르오. 어느 쪽 주장이 옳은가 그 가능성은 반반이오.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확실한 것을 알 수 있겠소? 나는 그것은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성공은 기꺼이 결행하는 자에게 주어지게 마련이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뭇거리는 몸을 사리는 자에게는 다가오지 않소.(559)

일의 초반에는 결말을 모두 꿰뚫어 볼 수 없다는 옛말이 진리임을 아무쪼록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560)

원정군의 병력 점검

여러 민족이 각각 파견한 병력 수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다. 따라서 나도 정확하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육상 부대의 총인원이 70만에 이르렀던 것만은 확실하다.(563)

우선 1만명을 될 수 있는 대로 한곳으로 밀집시켜 모은 다음 그 둘레에 원을 그렸다. 그리고 나서 그 1만명을 빼낸 다음 원을 따라 배꼽 높이로 돌담을 쌓아올렸다. 이렇게 한 다음 차례로 남은 병력을 돌담 안으로 집어넣는 식으로 하여 모든 병력의 수를 헤아렸던 것이다. 병역 수의 점검이 끝난 뒤에는 민족별로 편성을 마쳤다.(565)

다만 여자의 몸이면서도 그리스 원정에 참가하여 나로 하여금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아르테미시아에 대해서만은 언급할 수밖에 없다.(576)

본디 우리 그리스는 옛날부터 가난을 타고난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예지와 엄격한 법의 힘으로 용기의 덕을 몸에 익혀 왔습니다. 이 용기 덕분에 그리스는 가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전제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 도리스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그리스인에 대해서서 찬탄을 금치 못하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리려 하는 것은 이들 모든 그리스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스파르타인에 대해서만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먼저 그리스인에 예속을 강요하시는 전하의 제안은 절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란 것입니다. 나아가 설령 다른 그리스인 모두가 전하의 뜻에 따르게 된다 하더라도 스파르타인만은 반드시 전하께 맞서 전쟁을 벌이리라는 것입니다. 병력 면에서 대체 그들이 어느 정도이기에 그렇게 나올 것 같은가 하고 묻지 마십시오. 예컨대 1천의 병력을 가지고 출격할 수 있을 때에는 그 1천명을 가지고 싸울 것이며, 또한 1천보다 적든 많든 상관 않고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578)

그들은 자유스럽습니다만 전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법(노모스)이라는 왕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정도는 전하의 신하들이 전하를 두려워하는 정도를 훨씬 능가합니다. 여하튼 그들은 이 왕이 명하는 대로 행동하는데, 이 왕이 명하는 것은 언제나 한 가지, 즉 어떠한 대군을 맞이하더라도 결코 적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말고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적을 제압하든지 자신이 죽든지 하라는 것입니다.(580)

트라키아에서 테살리아까지

테살리아의 원주민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페네이오스 강이 흐르는 저 협곡은 신 포세이돈이 만든 것이라 하는데, 이것은 이치체 맞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가 포세이돈이므로, 지진으로 인한 협곡의 군열이 궁극적으로 이 신의 소행이라고 믿는 자라면, 저 협곡을 보고 당연히 포세이돈의 작품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589)

아테네와 스파르타

“히다르네스 각하, 저희에 대한 각하으 충고는 충분히 알지 못하신 데서 나온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한쪽 면에 대해서는 잘 아시지만, 다른 한쪽 면에 대해서는 모르십니다. 즉 노예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시지만, 자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한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그것이 단지 아니면 쓴지 모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한번 자유의 맛을 알게 되신다면, 자유를 위해서는 창뿐만 아니라 손도끼라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하실 것입니다,”(592)

첩자와 사절 파견

우리 아테네인은 그리스 민족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주거지를 옮긴 일이 없는 유일한 민족이 아닙니까? 또한 서사인 호메로스도 그 옛날 일리온으로 군대를 진격시키고 그것을 통솔했던 가장 뛰어난 용사는 바로 우리 아테네인이었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아테네인은 그 점에 대해 결코 브끄럼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607-608)

우리 아테네인은 그리스 민족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주거지를 옮긴 일이 없는 유일한 민족이 아닙니까? 또한 서사시인 호메르스도 그 옛날 일리온으로 군대를 진격시키고 그것을 통솔했던 가장 뛰어난 용사는 바로 우리 아테네인이었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608)

테르모필라이의 진군

그리스군이 둘로 나뉘어 서둘러 출격하는 동안 델포이인은 자국과 그리스 전역의 안부를 우려하여 신탁을 구했다. 그랬더니 사바의 바람에게 기원하라는 신탁이 내렸다.(617)

테르모필라이 전투

그리스군은 나라마다 각각의 지휘관을 받들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신망이 높아 전군의 지휘를 맡고 있었던 자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였다.(627)

스파르타에서도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에 태어난 자식과 왕이 된 뒤에 태어난 자식이 있을 경우, 왕위는 뒤에 태어난 자식이 계승하는 것이 관습이라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는 데마라토스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와 같이 주장했고, 다레이오스는 그 주장이 정당함을 인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설사 이 같은 진언이 없었다 하더라도 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올랐을 것 같다. 왜냐하면 모든 권력을 아토사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632)

레오니다스는 이 격전의 와중에서 질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쓰러졌고, 다른 이름 있는 스파르타인들도 그와 운명을 같이 했다. 나는 용명을 휘날린 이들의 이름들 들어 알고 있다. 나아가 전군 300명의 이름도 들어 알고 있다.(636)

기원전 44년에 스파르타인은 레오니다스의 유골을 테르모필라이에서 스파르타로 옮겨 매장하고 그 묘소 위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비에는 300명의 용사들 이름이 새겨졌다고 파우사니아스는 전하고 있다.(636-주석221)

 

제8권 우라니아

아르테미시온 해전

이는 모두 페르시아의 우세한 전력을 낮추어 그리스군과 똑같이 만들려 한 신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649)

아테네 점령과 그리스의 해전 준비

페르시아군은 파라포타미오이를 지나 파노페이스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부대를 둘로 나누고 각기 다른 진로를 택했다. 크세르크세스 자신이 이끄는 가장 강대한 부대는 아테네를 목표로 진군하여 오르코메노스 근처의 보이오티아로 침입해 갔다. 대부분의 보이오티아인은 페르시아 측에 투항한 상태였고, 알렉산드로스가 파견한 마케도니아군이 각지에 배치되어 보이오티아의 도시들을 전화에서 구원하려 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인은 보이오티아의 인심이 페르시아 쪽으로 기울여 있음을 크세르크세스에게 명백히 보여줌으로써 보이오티아를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부대가 이 방면으로 향하고 있을 때 다른 한 부대는 안내자와 함께 파르나소스 산을 오른쪽으로 바라보면서 델포이의 신역으로 행했다. 이 부대도 포기스를 지날 때 길에 있는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고 파괴해 버렸다.(656-657)

아크로폴리스에는 대지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에레크테우스의 신전이 있다. 그곳에는 포세이돈과 아테네가 이 땅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서로 다툴 때 그 권리의 증거로서 삼았다는 전설의 올리브나무와 바닷물이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의 방화로 신전과 함께 이 올리브나무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화재가 있는 다음날,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희생을 바치라는 명을 받은 아테네인들이 신전까지 올라갔을 때 1페키스 정도의 싹이 그루터기에서 자라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은 이들 아테네인이 전하는 바에 따른 것이다.(664-665)

살라미스 해전

“테마라토스님, 아무래도 페르시아 대왕의 군대에 큰 재난이 닥치게 될 모양입니다. 아티카에는 이미 아무도 남지 않으니 저 먼지구름과 비명 소리는 신의에 의해 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테네군과 그 동맹군을 구원하기 위해 엘레우시스로부터 왔을 것입니다. 만약 저것이 펠로폰네소스로 향하게 된다면 육상에 있는 왕 자신과 그 군대에 위기가 미칠 것이며, 또한 살라미스의 해상 부대 쪽으로 향하게 된다면 대왕은 분명 해상 부대를 읽게 될 것입니다. 아테네인은 매년 모신과 여신을 위해 축제를 벌이고 있으며, 아테네인은 물론 그 밖의 그리스인도 희망하는 자는 누구나 그 비밀 의식에 입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듣고 계시는 소리는 그 축제 때 울려 나오는 이아코스의 절규입니다.”(669)

왕이시여, 훌륭한 인간은 못난 종을 못난 인간은 훌륭한 종을 거느리게 마련이라는 것을 명심해 두시기 바랍니다.(671)

펠로폰네소스에는 7개 종족이 살고 있다. 그 중 아르카디아인과 키누리아인 두 종족은 토착민으로 옛날이나 오늘이나 같은 지역에서 줄곧 거주하고 있다. 아카이아족은 펠로폰네소스 바깥으로 나간 적은 없지만 원지를 떠나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나머지 도리스인,아이톨리아인, 드리오페스인, 렘노스인들은 외래인이다. 도리스인이 거주하는 도시는 상당히 여러 곳이고 또한 잘 알려져 있지만, 아이톨리아인이 거주하고 있는 곳은 엘리스 지방뿐이다. 드리오페스인은 헤르미오네(헤르미온)와 라코니아 지방의 카르다밀레 맞은편 아시네에 거주하고 있다. 파로레아타이인은 모두 램노스계 주민이다. 키누리아인은 토착민이자 유일한 이오니아계 주민으로, 장기간에 걸쳐 아르고스인의 지배를 받아 도리스화되어 있다. 이른바 오르네아이인으로 스파르타 주변 주민(페리오이코이)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673)

페르시아 병사들은 대부분 헤엄을 칠 줄 몰라 바다에 빠져 죽었다. 또한 전선의 함선들이 도망치기 시작할 즈음에 페르시아 함대는 그 태반이 격침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방에 배치되어 있던 부대가 왕 앞에서 수훈을 세워 보이고자 조급하게 함선들을 전방으로 전진시키려 서둘다가, 도망치려던 자기편 함선들과 대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681)

크세르크세스의 퇴각

크세르크세스는 패전을 깨닫자, 그리스인들이 그들 스스로 아니면 이오니아인들의 사주로 선교를 파과하기 위해 헤레스폰토스로 가지 않을까 염려앴다.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꼼짝없이 유럽에 갇혀 파멸할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684)

결국 다른 그리스인들은 질투심이 일어 결정을 미루고 저마다 자국으로 돌아갔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전쟁에 참가한 그리스인 중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라는 명성은 그리스 전역에 널리 퍼져 갔다. 테미스트클레스는 승리의 수훈자였음에도 살라미스의 해전에 참가했던 부대로부터 영예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인은 그를 정중하게 맞아 공적을 크게 찬양하고, 에우리비아데스에게 무훈상으로 올리브 관을 수여한 것처럼 테미스토클레스에게도 올리브관을 내렸다. 아울러 스파르타에서 가장 훌륭한 전차도 하사했다. 이렇게 한 다음 그가 귀국할 때에은 ‘기사’라 칭하는 스파르타군 정예 300명이 테게아 지구 국경까지 배웅했다. 스파르타인의 배웅을 받은 자는 세계에서 테미스토클레스 단 한 사람뿐이다.(696)

마라도니오스의 아테네 교섭

한편 파르나케스의 아들 아르타바조스는- 그는 이전부터 페르시아인 사이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플라타이아 전투 이후는 더욱 그 명성이 높아졌다. -마라도니오스가 선발한 부대 중에서 6만의 병사를 끌고 왕을 선교까지 배웅했다.(697)

 

제 9권 칼리오페

마르도니오스의 아티카 침공과 철수

마라도니오스는 아테네 측의 회답을 듣자, 곧 테살리아에서 전속력으로 군대를 출격시켰다. 그리고 지나가는 모든 지역에서 병력을 징발했다. 테살리아 여러 왕들은 이전 행동을 후회하기는커녕 더욱더 적극적으로 페르시아군을 격려했고, 전에 크세르크세스 도주시에 동행하여 배웅했던 라리사의 토락스 같은 자는 이제 드러내 놓고 마르도니오스의 그리스 침공을 격려했다.(708)

플라타이아 포진

스파르타군은 지협에 도착하자 진을 쳤다. 그 밖의 펠로폰네소스의 제국도 이 소식을 듣고, 뒤에서 보고만 있는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회생을 통해 길조의 점괘를 얻은 뒤 펠로폰네소스 연합군은 지협을 출발하여 엘레우시스에 도착했다.(716)

그러자 아테네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침략자를 격퇴하자는 데에 있지, 토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테게아인이 먼저 유사 이래 두 나라 국민이 각각 세운 공적을 이야기하자 했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소. 우리는 아르카디아인과 같은 자들을 능가하며 언제나 무용의 영예를 빛내 왔기 때문이오. 우리 쪽에야말로 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만한 전통적인 권리가 있다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명백히 밝힐 것이오.(720)

그리스 제국 중에서 실로 우리 나라만이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호로 도전하여, 그 어려운 싸움에서 모두 46개에 이르는 민족을 격파하여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오!(721)

스파르타 병사 한 명당 7명씩 있던 노예병들을 제외하면 도무 중무장병으로, 그 총수는 3만 8700명이었다. 한편 경무장 병력으로는 우선 순수 스파르타인 부대에 병사 1명당 7명씩 배속되어 있었던 3만 5000명의 병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전투용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음으로 그 밖의 스파르타 부대 및 그리스 모든 부대의 경무장 병력 수는 중무장병 1명당 1명씩의 비율로 1만 4500명이었다. 이리하여 전투 능력이 있는 경무장병의 총수는 6만 9500명이었다.(722)

플라타이아 전투

전군이 민족별, 군단별로 배치를 마친 다음, 두 군은 다음날 동시에 희생식을 행했다. 그리스군에서 희생식을 집행한 것은 아티오코스의 아들 테이사메노스로, 그는 점술가 자격으로 종군하고 있었다.(724)

천하가 아무리 넓다하더라도 스파르타 시민권을 얻은 외국이능 이 두 사람밖에 없다. 다섯 번의 대전쟁이란 첫 번째는 플라타이아 전투, 그 다음은 테게아인과 아르고스인을 상대로 싸웠던 테게아 전투, 그 다음은 만티네이아를 제외한 전 아르카디아인을 상대로 싸웠던 디파이아 전투, 그 다음은 이스토모스 부근에서의 대 메세니아 전투, 마지막은 아테네 및 아르고스를 상대로 했던 타나그라 전투를 말한다. 이 타나그라 전투가 다섯 번의 전투 중 최후의 전투였다(726)

한편, 아테네인의 행동은 다음과 같았다. 말과 생각이 서로 다른 스파르타인의 습관을 잘 알고 있던 아테네인은 처음 위치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진영이 이동하기 시작하자, 과연 스파르타군이 이동하려는지 아니면 전혀 철수 의지가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734)

미칼레 전투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 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아테네 부대였다. 아테네 인 중에서는 판크라티온에 뛰어나, 에우토이노스의 아들 헤르몰리코스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756)

크세르크세스의 시련

크세르크세스는 사르데스에 머무르는 동안 그곳에 있었던 마시스테스의 아내를 연모하게 되었다. (758)

그리스군의 세스토스 공략

한편 헬레스폰토스를 목표로 마칼레를 떠난 그리스군은 역풍의 방해를 받아 우선 렉톤 부근에 점시 정박해 있다가 아비도스에 도착했다.(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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