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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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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4일 10시 39분 등록

I.              저자에 대하여

 

 

이런 세상에 살면서, 나 개인의 심리나 취향, 다문화적 요리와 놀이, 주거, 관광, 레저와 같은 탈근대적 이야기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가 던진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개인에 국한된 시선을 들어 어디를 바라보아야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그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왜 신인가? 그의 결론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없이는 필연적으로 난관과 파국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오늘날 당면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그러니, 신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치들의 최고 정점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는 그의 최근 작품인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신』을 통해 신에 대한 심오하고도 방대한 이야기를 고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마치 바로 곁에서 하나하나 다정다감하게 읽어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책을 바치는 이, 즉 그의 딸을 향한 애정과 정성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이외의 책에서도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특유의 맛깔스러운 표현과 다정다감한 문체를 통해 작가와 독자 간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향후 이러한 형식의 책을 쓰기를 희망하는 한 명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과 작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인 그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철학과 인문학을 맛깔스럽게 버무려내어, 현대인의 삶과 인문학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을 보여주는 준다. 그의 책은. '지식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독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과 『다니』는 철학과 사회 사상, 과학지식, 진화론, 인류학 등 다양한 지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냈다. 이러한 소설은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했다.

그 외에도 독특하고 다양한 맛의 지식을 철학과 함께 버무려낸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문학 특유의 풍부한 감수성을 빌려 철학의 이해를 이끈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영화를 철학과 신학을 통해 해석한 『영화관 옆 철학카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십계명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 『데칼로그』,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키우는 도구로서의 논리학을 풀어낸 『설득의 논리학』,자기계발 팩션『기적의 양피지 캅베드』등의 저서가 있다.

 

[정보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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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명을 읽는 코드-신 저자 소개

http://www.yes24.com/chyes/ChyesView.aspx?title=003004&cont=5637

http://www.yes24.com/2.0/AuthorFile/AuthorFileD.aspx?authno=108984&Scode=008

http://blog.daum.net/bongahlim/6

 

II.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라바룸이라 불리는 이 휘장이 새겨진 로마군의 깃발은 서양문명의 중심축이 헬레니즘에서 헤브라이즘으로 옮겨 가는 것을 알리는 징표이자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7

 

1부  신이란 무엇인가

 

뭔가를 건네주려는 능동적 손가락과 그것을 받는 수동적 손의 모습을 통해 동적인 신과 정적인 아담의 대조적 자세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조가 전적으로 신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상징하는데 안성맞춤인 장면이지요. P.26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P.27

 

신이 영이라는 말은 신이란 모든 것에 침투하는 바람, 때로는 조용한 숨결로 때로는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에 침투하여 지배하는 바람이라는 뜻이다. P.27

 

천상세계의 존재의 지상세계의 존재물은 전혀 다른 것이어서 언어적 묘사가 불가능하지만,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의인화해서 표현할 테니 부디 새겨들으라는 뜻이지요. P.31

 

르네상스: 신 중심의 문화를 깨트리고 인간 중심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과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대 예술가들은 신보다는 인간을, 신앙보다는 이성을, 종교보다는 학문과 예술을 숭상하던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신을 그들 작품 속에 재현했습니다. P.35

 

핀다로스는 신과 인간이 크기와 힘에서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종족임을 주장했습니다. 인간이 신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될 수는 없어도 심성과 육체를 단련하여 신처럼 위대해질 수는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P.37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려던 그리스인들의 열망 P.38

 

고대나 중세 기독교에서 인간의 육체는 언제나 욕정과 죄의 온상이기 때문에 숨기고 가려야 하는 것이엇습니다. P.39

 

그리스인들이 인간의 육체를 신성화했다고는 해도, 단순히 육체의 자연적 아름다움에만 매혹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언습한 이데아의 미, 곧 우리의 정신에 선척적으로 아로새겨진 이상적 아름다움도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P.41

 

아름다움은 오직 우리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 상기하게되는 지고한 신적 형상의 아름다움, 곧 이데아의 미에서 나옵니다. P.44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궁극적 바탕으로서 자신은 탄생하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탄생과 변화의 원인이 되는 무형의 원리를 가정해 부동의 운동자라고 부르면서 그것을 신이라고 했지요. P.51

 

다분히 존재론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이기도 한 이유로 신은 인간이 도무지 벗어나거나 떠날 수 없는 대상이며, 그의 말씀은 순종하면 필이 복을 받지만 거역하면 부득불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입니다. P.60

 

2부  신은 존재다

 

1880년 교황 레오 13세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신앙과 이성의 권위를 각각 높이면서도 둘을 친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신앙과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불화를 일거에 해소했다.”며 칭송하고 가톨릭학교들의 수호성인으로 공포했습니다. P.75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다. 이 명칭, 즉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P.75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은 사실상 일종의 또 다른 자기가 될 수 있었다. P.81

 

이 이름들은 인간이 신에게 붙인 이름일 뿐 신이 자신에 대해 밝힌 명칭은 아니지요. (중략) 만물의 궁극적 근원인 신에게는 이름이 없고 또 당연히 없어야 합니다. P.83

 

신은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자신의 속성상 그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그 무엇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무한정자라야 합니다. P.84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P.86

 

한마디로 신은 그 어떤 무엇으로 있지 않고 그저 또는 그저 그로 있다는 것이다. P.95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 지는 법이다. P.97

 

신이 그의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나는 존재다라고 한 대답에는 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말이지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존재물이라는 것입니다. P.99

 

존재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인식만이 진리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존재물은 변한다. 그러므로 존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거짓이다. P.106

 

같은 종류의 사물들 사이에도 이데아가 많이 또는 적게들어 있기 때문에, 사물들의 성질에는 언제나 더 또는 덜같은 질적 차이가 단계적으로생깁니다. P.112

 

신은 단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우주만물에 본질과 존재 그리고 이름을 주는 완전한 자다. 그리고 우주만물은 다양하고 일시적이며 끊이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자다. 따라서 신만이 진리의 근거이며, 우주만물에 대한 지식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일 뿐이다. P.114

 

신이 계층적 질서를 통해 자연의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지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단계적으로 설정했으니까 그것을 따르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P.120

 

제도가 피라미드식 계층 구조를 따른다는 것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지위나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더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뜻합니다. P.125

 

신이 그 사람을 거기로 불러낸 인생의 지위에 따라 주어진 자기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교리이지 사회윤리였습니다. P.126

 

일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넘쳐흐로고, 그 넘치는 풍요함이 또 다른 존재를 만든다. P.133

 

존재한다는 것은 본질에 의해 제한되고 규정된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P.135

 

그리스 언어가 정지적인 데 반해 히브리 언어는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P.144

 

그리스인들에게 존재란 영원불변 한 것이었습니다. 무언가가 영원불변 하다는 것은 언제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므로 존재는 논리적으로는 결코 변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변화하도록 만들 수도 없지요. 다른 무언가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존재의 자기동일성이 깨지고 말지요. P.146

 

인격은 끊임없는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P.147

 

그리스인들은 존재든 존재물이든 모두 탈 시간화 함으로써 그 변치 않는 본질을 통해 '개념적으로' 파악했고, 히브리 인들은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시간 안에서 그 운동과 변화를 통해 '실존적으로' 파악했지요. P.150

논리학은 철저하게 탈시간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서양문명이 탈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우리에게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P.152

존재란 생성과 작용의 '탈 시간화'된 모습이고 생성과 작용이란 존재의 '시간화'된 모습에 불과합니다. 불변이란 변화의 탈 시간화된 현상이고, 변화란 불변의 시간화된 현상일 뿐이지요. P.153

신은 ‘시간 밖에서는’ 영원히 안식하지만, ‘시간 안에서는’ 부단히 활동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생각은 신의 창조 활동과 함께 시간이 생겨났고, 따라서 신의 영원성이란 시간안에서의 무한함이 아니라 시간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신은 세계에 대해 초월적 존재이자 동시에 내재적 존재이고, 모든 존재물은 세계 안의 존재라는 교리와 연결된다. P.154

모순되는 두 개념을 하나로 묶어 사용하는 이 논법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한 그리스적 사고와 히브리적 사유를 종합한 기독교적 신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P.154

사실 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퍼텐셜은 '존재의 장'보다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언급한 '형상 없는 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신은 만물을 무에서 창조했지만 무에서 직접 이끌어 낸 것은 아닙니다. 우선, 무에 가까운 어떤 원물질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만물을 창조했다는 거에요. P.163

누군가가 퍼텐셜이 곧 신이라고 한다면, 그는 스피노자와 아인슈타인이 믿는 신, 곧 우주와 하나인 범신론에서의 신을 말하는 것일지언정,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인 야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요. P.165

 

 

오죽하면 칼 바르트가 "모든 인간적인 것과 무한한 질적 차이로 대립하고 있으며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알고 체험하고 경배하는 것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 분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래서 신에 대한 모든 상상, 모든 형상화, 모든 규정과 언급은 사실상 부질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P.166

 

우리는 '바다'라는 비유를 통해서, 우선 신이 암암리에 사람처럼 생겼으리라는 끈질긴 망상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바다가 우주마저 포괄하고 초월할 만큼 무한하다는 점에서 '신은 없는 곳이 없다'는 오랜 주장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지요. 동시에, 신이 유일하다는 교리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 선포가 아니라, 존재의 바다가 무한히 광대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포괄하며 그의 바깥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바다가 그 자신은 무형이지만 모든 유형적 존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형체가 없는 신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교설을 이해할 수도 있지요. P.171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P.187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경험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도록 한계 지어졌어요. 그럼에도 이성이 자신의 추론을 경험할 수 없는 무한한 대상에까지 확장해 나가면, "이성은 하나의 길(경험적인 길)에서든 또 다른 길(선험적인 길)에서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단지 사변의 힘으로 감성세계를 초월하려고 그 날개를 펴지만 헛수고에 그칠 뿐"이며 필연코 오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191

 

하나는 다윈의 진화론이 반드시 무신론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뿐 아니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신은 진화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창조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여지를 이미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P.206

 

칸트는 이 같은 내용 없는 사고들이 떠도는 영역을 폭풍이 이는 광대무변한 바다또는 가상의 본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가상'의 사전적 의미는 주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는 않는 거짓 현상이지요. P.212

 

형이상학은 사상사를 통해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찾아내려는 시도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가장 존경할 만한 권위에 입각해서 실재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실재는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 없는 가상체라는 것, 아무리 정밀한 인간지성이라도 결코 현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마야의 베일을 찢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P.213

 

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주된 태도가 사유였다면, 히브리 인들의 태도는 경험이었지요. 히브리 인들에게 신의 현존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는 건 논증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행위를 경험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어요. P.220

 

종교적 경험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진술이나 추론, 비판, 반성 같은 지적 활동의 산물인 철학적, 신학적 이론은 부수적 요소라는 말이지요. 요컨대 종교적 경험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 현상이 생겨나게 하고 종교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살아 있는 샘물'인 것입니다. P.221

 

모든 사람이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지요. 하나는 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그것이 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식으로 그것의 가지를 부인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신비롭거나 기적과도 같은 종교적 경험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데는 많은 학자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왔습니다. P.222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P.230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P.235

3부 신은 창조주다

회의주의가 '이성의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기독교적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준비단계로 작용했다는 점입니다. P.250

 

"주여, 언제까지 진노를 그치지 않으시렵니까? 원하옵건대 지난날에 저지른 죄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합니까? 내일입니까? 또 내일입니까? 왜 지금은 안 됩니까? 왜 바로 지금 이 시간에 나의 더러움을 벗어 버릴 수 없나요?" P.256

 

우구스티누스가 자기 삶의 신적 근거를 깨달았을 때 '자율'적이던 자신의 모든 과거가 적어도 그에게는 '신율'적으로 드러났던 겁니다. P.266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물리적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지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란 한 형상이 다른 형상으로 바뀌는 사물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옵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P.275

 

창조론과 빅뱅이론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겁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립하는 두 이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물론, 한발 더 나아가 히브리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 유신론적 성격과 유물론적 성격, 종교적 믿음과 이성적 사고가 여전히 대립하면서 공존하는 서양문명의 이중적 성격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277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만물을 정하셨으며, 그가 우리에게 주신 유익과 은혜, 하나님의 권세와 은혜를 우리가 묵상케 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찾고 찬양하고 사랑하도록 자극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바, 그 사실을 그가 유지하는 질서를 통해 보여 주셨다. P.292

 

데카르트는 "신이 만물을 창조할 때 다른 목적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모든 사물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음직한 일이 아니다" 라며 인본주의를 강력하게 거부했지요.

P.295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주는 여러 집합체 중 하나일 수도 있다.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가 각기 다른 물리법칙을 따르면서 고유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중 우리가 속한 우주는 아마도 복잡성과 의식이 허용되는 우주일 것이다. P.296

 

비드켄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언어놀이’에는 그 언어놀이를 구성하는 풍습, 제도, 문화를 비롯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 반영됩니다. 따라서 언어란 그 언어가 사용된 언어놀이 안에서만 일정한 의미를 갖지요. 그러므로 “언어놀이가 변하면 그때는 개념상의 변화가 생기고 개념과 더불어 단어들의 의미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P.302

 

비트겐슈타인은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P.303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이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P.305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러지 않은 채 성급히 어떤 일치나 합의를 끌어낼 목적으로 하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거나, 획일화를 위한 강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설사 그것이 옳은 자가 그른 자에게 베푸는 선의라는 겉옷을 입고 나타날 때조차-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P.311

 

영원에는 시간의 흐름이 없고 과거와 미래가 모두 현재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 밖의 시간'이자 모든 시간의 근원인 '신의 시간'이 가진 성질이지요. P.319

 

미래란 장차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어떤 시간적 과정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점차 자라나듯이 영원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시간인 역사로 순차적으로 "침입해 들어옴"일 뿐이지요. 따라서 그것은 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만물을 급진적이고 가차 없이 새롭게 합니다. P.321

 

일자, 곧 신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함! 바로 이것이 플로티노스가 발견한 영원한 삶을 얻는 구원의 방법이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적 언어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하셨나이다" 라고 고백한 의도이며, 우리 삶에 주어진 시간의 궁극적 의미이고 가치이지요. P.331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마음(영혼)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P.334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삶은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P.337

 

인간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는 ‘무의식적 기억’은 단지 잊었던 옛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그것은-마치 아우구스티누스의 ‘상기’처럼-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시간에 의해 분산된 여러 상들을 모아 이전까지는 감춰져 있던 삶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일을 합니다. 그 결과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아 주는 일을 하지요. 또한 미래를 기대하게도 만듭니다.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갈파한 대로 “새로운 여러 가지 상을 지나간 것과 연관시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의 행위나 사건, 희망을 구성하게”한다는 것이지요. P.342

 

역사란 물리적 시간에 의한 단순한 자연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통일체 안에서 여러 가지 사건을 연쇄적 또는 인과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 P.344

 

신이 세계에 내재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피조물들과 부단히 관계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인도한다는 뜻이지, 우주공간 어느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P.352

 

"신은 그가 창조하지 않은 질료, 즉 마니교에서 말하는 악하고 추한 질료로부터 물질을 창조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은 선한 신에 의해 무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물질도 선하고 아름다우며 물질로 구성된 인간의 육체와 세계 역시 선하고 아름답다." 한 마디로 창조는 그 근거와 결과가 모두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었어요. P.367

 

신은 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답지만 인간과 세계는 불온전하게 선하고 아름다우며,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지요. P.369

 

모든 피조물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신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무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P.371

 

기독교는 성육신과 함께 시작했고 성육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삼는 또 다른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완연히 갈라서지요. 그만큼 성육신은 기독교의 본질이자 핵심입니다. P.384

 

플라톤은 "선이란 그것을 소유한 존재는 언제나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충족되며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설명했지요. '선자체'로서의 '일자'는 언제나 완전하게 자족적이기에, 그에게는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P.398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넘쳐흐르는 풍요라는 자신의 본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창조가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P.400

 

자연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는 분명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며, 바람직할 수도 있고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지요. 자연과는 달리 인간과 사회는 언제나 가치지향적이고, 또 항상 그래야만 합니다. 따라서 역사는 진보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자연을 따라 인간사회에서도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스펜서의 사회다윈주의와 함께 자유, 평등, 박애를 지향하던 이성과 계몽의 역사가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P.425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본질이 무사유라고 설파했지요. 무사유는 일반적으로 '사려 깊지 못함'을 뜻하지만, 그녀는 이 단어를 보다 실천적 의미로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반성의 불능 또는 거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P.429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는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여긴다. P.443

 

인간을 극대화한다고 해서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극대화가 영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P.474

 

4부 신은 인격적이다

 

바울이 자기 사상으로 예수의 복음을 윤색해서 기독교를 일구었다는 게 바울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비평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바울의 가르침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용어와 수사학적 표현 형식에서 그랬을 뿐이며 내용에서는 구약성서와 예수가 전한 복음의 핵심에 닿아 있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P.514

 

그는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의 삶과 역사에 부단히 참여하여 관계를 맺는 2인칭의 신, '신적인 너'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인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언제나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 라는 인격적 입장에서 파악했지요. P.546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P.576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듣지는 않사오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것에든 주님의 응답을 받사옵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원하려는 사람이 주님의 가장 훌륭한 종이옵나이다. P.576

 

종교적 인간은 결국 '실존의 처절한 절망감' 속에서만 '무한한 자기체념'을 할 수 있으며, '윤리적 영웅'이 아닌 '나약한 죄인'으로서,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을 통해서만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용납되는 구원에 이를 수 있지요. 바로 이것! 자신마저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을 신이 용납한다는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총의 본질입니다. P.609

 

5부 신은 유일자이다

 

한 세계를 지배하는 신 개념은 그 세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신 개념은 언제나 그 시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의 외연이자, 그 정점이지요. 바꾸어 말해 그 세계가 숭배하는 신 개념에 속하지 않은 세계의 가치는 없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다. P.624

 

유일신 개념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의 근거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P.624

 

일자의 초월성은 오히려 모든 존재물을 포괄하는 바탕이자 존재에 대한 긍정이지요. 존재물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초월자이지만, 일자 입장에서 보는 일자는 포괄자 입니다. 요컨대 일자는 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규정할 수 있는 것들의 바닥에 갈리는 심연이 되며, 한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한정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것들이 그 안에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포괄자에요. 기독교의 신이 갖는 유일성도 바로 이렇습니다. P.640

 

신성은 고유한 것이며 아버지 됨은 고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둘을 결합하여 ‘나는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아들을 고백할 때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과 고유한 것을 하나로 묶어서 ‘나는 성자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해야 옳다. 이와 같이 성령에 대해 말할 때도 호칭에 알맞게 불러 ‘나는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한 분 신성 안에서 하나 됨이 온전하게 보존되며, 이와 동시에 각자에 대해 인지되는 고유한 것들의 차이를 통해서 위격들의 고유성이 고백된다. P.705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신이 갖는 유일성은 포괄성이지 배타성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것은 통일성이지 단일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단일성이 배타성의 전제이자 결과이듯, 다양성은 통일성의 전제이자 결과지요. 따라서 누구든 “신은 유일하다”라고 외치려면, 그는 그 말이 ‘신의 이름으로’ 타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망언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 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P.732

 

자기성찰은 문명의 자기파괴적 잠재력이 상존하는 ‘위험사회’에서, 피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유동하는 공포’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 우리가 이 같은 자기성찰을 얼마나 철저하게 또 얼마나 지속적으로 하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다렸을 겁니다. P.799

 

자고로 모든 위험한 선택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신념입니다. 전자는 전근대적 개념이고 후자는 근대적 개념이지요. 탈근대적 이야기 안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혹은 의사 없는 환자처럼 허둥대기 시작했고, 거리에는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아다닙니다. 그래요. 바우만이 이름 붙인 유동하는 공포지요. P.806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겠지요. 여기서부터 희망입니다. 역사는 불행히도 가치의 파편화를 낳았고 파편화된 가치들은 인간과 세계를 위기로 몰고 있지만, 어둠이 내리면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오르지요. 고대가 저물어 갈 무렵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종합이 이뤄졌고, 중세가 황혼에 물들 때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 길을 찾아야 할 때 입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의 인문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인지도 모릅니다. P.810

 

인간의 지식은 그 입장과 위치에서만 합당하고 그의 시간은 하나의 찰나이며, 그의 공간은 하나의 점. 어떤 차원에서든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라면 이른들 늦은들, 이곳이든 저곳이든 어떠리. 오늘 복 받은 자 온전히 복 받고 있느니라. 천년 전부터 복 받은 자와 다름 없이. P.811

 

III.           내가 저자라면

 

30여년간 신앙활동을 하며 하나 둘 지식을 습득했지만, 여전히 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나름

대로의 주관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 오랜 의문과 갈증을 해소해준 책이 바로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조각조각이 모여 조금씩 그림을 완성시켜

나가는 기분이었다.

 

잘 모를수록 어렵게 말한다고 했던가. 시중의 많은 책들이 전문용어를 남발하며 자기들만의 잔치

에 빠져있는 것과 달리 그는 '디아트리베'라는 고대의 수사학을 활용하여 무지한 이도 쉽게 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도록 유도한다. 마치 바로 곁에서 다정다감하게 읽어주는 듯한 문체를 통해

작가와 소통하고 있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형식은 오랜 시간 내공을 쌓아온 이의 여유를

느끼게끔 해주었다.

 

또한 신과 연관된 서양의 고전들과 예술작품들을 풍부하게 활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철학과 플로티노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중세철학, 그리고 하이젠베르크, 리요타르, 비트겐슈타인 등 근현대 철학을 괴테, 셰익스피어, 단테, 밀턴 등의 문학과 미겔란젤로, 빙켈만 등의 예술작품과 예술이론을 연계하여 한편의 대서사시를 펼친다.

 

그의 집요함과 방대한 지식은 내 지식의 미천함과 모자람을 처절히 느끼게 해 주었다. 막연히 책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네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무엇이냐라고 누군가 계속 말을 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야기를 할 것 인가. 더 많은 경험과 읽기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메인 주제를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 어떠한 집요함과 몰입으로 책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 그의 책을 통해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바로 보고 그 해결책을 마련할 기반을 제공하기 위함이 책의 목적이라 밝힌 것에 비해 그 해결책에 대한 제시는 다소 빈약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5부로 구성된 각 챕터의 마지막에 철학자별 주요 사상의 흐름에 대한 정리와 독자들이 생각해볼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방대한 흐름 중간 중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쉼터를 마련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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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13:30:08 *.124.233.1
서영님! 지난 4주간의 즐겁기도 했지만 고단하기도 했던 레이스 완주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쉽지만은 않았던 한 달이었지만, 함께 달리며 좋은 인연 맺을 수 있어서 고마운 시간이었습니다.
홀가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한주 시작하시길 바랄께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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