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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4일 02시 02분 등록

10기 레이스 3주차 북리뷰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2014.02.24, 이동희

 

1. 저자에 대하여 - 구본형(1954-2013)

 

매일 새벽 4시 방에는 불이 켜지고 컴퓨터를 켜는 소리가 들린다. 그 방에 주인은 매일 읽고 매일 쓰는 사람으로 스스로에게 혁명을 일으킨 작가인 구본형이다. “읽지 못하면 쓸 수 없다. 쓰지 못하면 깊이 알 수 없다. 깊지 못하면 사이비다.” 그분의 간단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다독, 다작, 다상량을 통해 다양한 고전을 현대의 삶에 끌고 와서 새로이 역어 창조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그분의 글의 특징이다. 그분의 글은 자기 경영에 대해 다루면서 그 기반을 고전과 인문학에 두고 있다. 그분의 글을 읽을 때면 세상의 모든 고전과 소통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표면적으로 알고 있던 고전과 인문학 서적의 내용을 심도 있게 때로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분에게 43세 나이는 스스로 변화하여 새로운 인생으로 뛰어드는 시작점이 되는 해이다. 글쓰기를 통해 1998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저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46세에 20년 동안 경영 혁신 총괄 전문가로 활동하였던 IBM을 퇴사하고 1인 기업가로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구본형의 명함에는 ‘변화경영 전문가’라고 적혀 있다. 마흔 여섯 살에 직장에서 나와 스스로의 정체성이 필요할 때 그를 지탱해준, 스스로 명명한 직업의 이름이다. 쉰 살의 중반을 맞아 그분은 ‘변화경영 사상가’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렀다. 말 그대로 기술적 전문인에서 변화에 대한 철학과 생각을 일상에 녹여내는 사상가로 진화하고자 한 것이다. 그분은 10년 동안 100명의 변화 경영 연구원들을 양성하고, 500명의 꿈벗 커뮤니티를 구성하여 더불어 '시처럼 산다‘(Life as a Poem)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는 그분은 스스로 이렇게 적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변화경영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다. 시는 젊음의 그 반짝임과 도약이 필요한 것이므로 아마도 그 빛나는 활공과 창조성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시처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시처럼 아름답게 살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자연과 더 많이 어울리고, 젊은 이들과 더 많이 웃고 떠들고, 소유하되 집착이 없는 자유로운 행보가 가능할 것이다.

 

삶의 모든 것들로부터 배우고 글을 쓰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전하던 그는 2013 4,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구본형은 17편의 KBS FM 라디오 고전읽기를 방송하였으며, 604편의 구본형 칼럼, 375편의 마음 편지를 남겼다. 유고집을 포함하여 22권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년도

주요 활동

1954

1월 충남 공주에서 태어남

1980

서강대학교 역사학과 대학원 졸업

1980

한국IBM에서 근무하면서 경영혁신의 기획과 실무 총괄

1991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

1992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제1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상 수상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출간

Ÿ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글 쓰기를 시작했고 자신의 혁명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저자는 본인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중 하나로 회고하였다.

Ÿ  전문가가 뽑은 '90년대의 책 100'에 선정

1999

낯선 곳에서의 아침출간

Ÿ  인문학과 경영학의 결합을 시도한 경영 서적으로 사람 중심의 자신의 생을 사는 변화 이야기를 기술하였다.

2000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출간

Ÿ  21세기 무한 경쟁 시대의 인문적 소양과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경영 기법을 제시하였다.

떠남과 만남출간

Ÿ  20년간 근무한 직장에서 퇴사한 직후 한달 반 동안의 남도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과거의 추억을 더듬어보고 돌아온 여행기이다.

1인 기업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설립

200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출간

Ÿ  저자는 책을 통해 더 이상 고용자에게 매달리지 말고 독자 스스로의 브랜드와 뜨겁게 재회하라고 주문한다.

Ÿ  동아일보가 뽑은 '2001년 전반기 읽어야 할 책 10'에 선정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출간

Ÿ  평사원에서 CEO까지 도약을 위한 삶의 경영 철학과 지침을 제시하였다.

Ÿ  2004년 리드앤리더 자문위원단이 뽑은 국내외비즈니스 명저 40’에 선정

2002

사자같이 젊은 놈들출간

Ÿ  자유로운 전문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자기 재능 발견법부터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윤리까지 현실감을 담아 조언해준다

2003

내가 직업이다출간

Ÿ  즐길 수 있는 '나의 일'을 찾도록 도와주는 9가지 원칙을 제시하였다.

2004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출간

Ÿ  자신의 기록에 기초한 자서전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한 개인의 역사로 인식하기 바랬다. 이를 나의 이야기 프로젝트 (Me-story Project) 라 했다.

일상의 황홀출간

Ÿ  자신의 일상을 일기형식을 빌어 기록한 것으로 소박한 일상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이야기하며 일상의 여유가 함께하는 즐거운 상상과 자기성찰을 보여준다.

2005

2005년부터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을 선발 연구원의 저서 출판을 도왔으며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을 돕는 일에 힘썼다.

코리아니티출간

Ÿ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차별성을코리아니티(Coreanity)’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하고, 한국인 기질과 특성에 맞는 한국형 경영모델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업경영론을 전개하였다.

Ÿ  경영2005년 저서코리아니티 경영은 한국의 문화적 DNA를 바탕으로 제 2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차별적 경영모델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음

2005년 삼성 SDS e캠퍼스는 활동 중인 3,000명의 강사 중에서 최고의 강사로 선정

2006

공익을 경영하라출간

Ÿ  공익분야의 경영혁신을 '현미경을 들여다 보듯 깊이 있게 성찰한 책'으로 평가 받았다.

2007

사람에게서 구하라출간

Ÿ  중국 고대의 리더십을 현대적 경영언어로 재해석해 놓은 인간중심경영의 교본

2008

세월이 젊음에게출간

Ÿ  젊은 직장인들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처럼 따뜻한 경력관리에 관한 조언이다.

2009

‘The Boss-쿨한 동행 출간출간

Ÿ  직장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상사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2010

필살기 출간출간

Ÿ  직장인이 자신을 차별적 전문가로 계발하는 원칙과 방법을 집중 탐구한 책이다.

2011

깊은 인생 Deep Life’ 출간

Ÿ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특별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도약의 순간과 과정을 집중 조명하여 포착한 책으로, 우리 내면에 잠재한 위대함의 발아를 돕기 위해 구상되었다.

2012

신화 읽는 시간출간

Ÿ  신화에서 찾은 인간 독법과 자기경영의 지혜를 신화 속에 숨겨진 의미를 다채로운 시각으로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신화 속 인간 모습의 성찰을 통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2013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출간

Ÿ  신화를 걷어내고 서양 철학과 문명의 전범典範 된 고대 그리스인의 이야기를 역사의 시선으로 읽는다. 그리스 유적을 답사하면서 신화 속에 가려진 영웅들의 역사에 주목하고 지혜롭고 도전적인 그리스인 이야기를 담아냈다

4월 별세 (향년 59)

유고집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출간

Ÿ  2009년부터 2012년해까지 월간지에 연재했던 '구본형의 편지'를 정리해 엮은 유고집이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 꿈을 잃고 사는 사람들과 신의 재능을 발휘해 프로로 나아가고 싶지만 두려워 망설이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유고집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출간

Ÿ  <구본형 칼럼〉으로 남긴 604편의 글 가운데 60편을 가려 뽑아 묶은 것이다.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변화경영의 교훈이 집약되어 있다

2014

유고집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출간

Ÿ  암 투병 과정에서도 마지막까지 방송했던 EBS FM 라디오고전읽기를 엮은 책이다. 그에게 변화경영의 화두를 안겨준 동서양 문학과 철학 고전 17편을 소개한다. 고전들을 통해 내면을 일깨우고,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독자들을 안내한다.

 

 

나는 2012년 시칠리로 떠난 변화경영연구소 하계 연수를 따라가면서 그분을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그분은 느린 사람이지만 빠른 사람이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역설이 삶에 녹아 있는 사람이었다. 매우 열려 있으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그분에게는 그분의 인생에 맞는 고독이 있었고 그 크기는 가늠해볼 수가 없었다. 마냥 즐거운 여행이었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시칠리를 여행하며 그분이 들려주었던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그분이 더 이상 사상가가 아닌 시인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고단한 여행길을 그렇게 절실히 즐기고 그 즐거움을 제자들과 나누는 것을 보면서 그분에게 행복이 무엇인가요?”라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분은 삶이 시가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었다. 모두들 그분를 노래하고 있었다.

 

2014년 그분는 자리는 비었지만 그에게서 공부한 연구원에 의해 그분가 약속한 연구원 10기를 모집하였고 2차 지적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그분의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으로 저자 소개의 글을 마친다.

 

글쓰기의 고뇌와 황홀을 느껴야 하느니 뽕맛 같은 황홀을 못 느끼면 삶이 별로니라. 불완전해야 사랑스러우니 너무 완벽해 지려 하지 마라. 하나님은 완벽하여 두렵고 그래서 사랑할 수 없지만 예수는 불쌍하여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랑이 바로 신의 마음이다. 좋은 책은 그런 마음으로 써야 할 것이니 고통을 사랑하고 방황을 안쓰러워 하고 길 없음에 절망하면서 쓰거라. 자신을 위한 등불이라 여기고 달려 들어야 하는 것이다. 좋은 글쟁이는 자신의 내면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내면에서 자기 운명의 실마리를 찾아 낼 수 있는 힘이 생길 때 그 사람의 글이 훌륭한 것이다. “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P18

우리는 언제 젊어지는가. 배움을 시작할 때다. 나이가 몇 살이든 배움을 시작할 때 우리는 더듬거리고, 뒤뚱거리고, 두려워하고, 떤다. 바로 이것이 젊음이다. 이때 우리는 어려지고 젊어지고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다. 한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크게 유행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말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역설하는 것 같았다. 내게 나이 듦이란 익숙한 삶에 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 주저앉아 배움이 없는 삶이라면 젊음이 아닌 것이다.

 

배움을 시작하는 것은 늘 어렵다. 모른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인생에 대한 바램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변화를 의미한다. 직장 생활이 10년이 넘고 20년이 넘으면 서서히 힘들어지는 부분이 있다. ,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어려워 진다. 이는 직장 생활을 기존의 지식과 관행을 더 활용하고 새로운 시도가 줄어들게 됨을 의미한다. 직장생활의 위기와 인생의 위기는 이 지점에서 나타난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부터 먹어볼 일이다.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기며 다시 배움의 길로 걸어가 본다.

 

P20

자기 안으로 침잠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글을 쓰게 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글쓰기가 죄절되었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깊고 조용한 밤에 스스로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답을 찾아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강력하고 확고하게 써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당신의 삶은 아주 하찮고 무심한 순간이라도 이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에 다가가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말로 표현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충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릴케의 말처럼 글쓰기가 죄절되었을 때 죽을 수 밖에 없는지 물어보자. 죽을 것 같지 않다. 그러면 글쓰기에 대한 나의 입장이 없다는 것이다. 계속 생각해봐야 한다. 글을 써야만 하는 이유를!

 

P21

다른 사람의 북소리에 발 맞춰가지 말고 자기 내면의 북소리에 맞춰 자신의 길을 가라는 릴케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것 같다. 릴케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 그 일이 간절하다면 그 일을 계속해라, 그리고 그 위에 네 미래를 건설해라.

 

P23

여기서 한 가지 부탁드린다면 미학적이고 비평적인 글을 되도록 읽지 마십시오. 그런 글들은 생기 없이 경직되어 돌처럼 딱딱하고 무의미한 편파적 견해이거나 오늘은 이러쿵 내일은 저러쿵 하는 노회한 언어 유희일 뿐입니다. 예술작품은 끝없는 고독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평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간직할 수 있으며 그 부당함에 대해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설명이나 서평이나 소개의 글은 무시하십시오. 당신 자신과 당신의 느낌이 옳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르십시오. 설사 당신이 틀렸더라도 당신은 내적인 삶이 지닌 자연스러운 성장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독자적이고 은밀하게 발전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런 발전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강요되거나 재촉당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은 만삭이 될 때까지 잉태되었다가 태어납니다. 모든 인상과 감정의 싹이 가슴속, 어둠 속, 무의식 속, 이성으로는 닿지 못할 어떤 불가사의 속에서 완성되게 하고 겸허한 마음과 인내심으로 새로운 명징성이 태어날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예술을 이해하거나 직접 창작할 때도 그렇습니다.

 

예술이나 창작은 물론이지만 새로운 시도는 늘 많은 비평을 받게 된다. 대부분 화를 내는 경우는 혹은 배척하는 경우는 상대나 대상을 잘 모르는 무지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므로 두렵고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새로운 시도는 받아들여지기 전에 많은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아는 자가 믿는 자가 더 큰 사랑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꺾고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새로운 시도는 큰 사랑의 토대 위에 있어야 되고 그 사랑의 실천 결과로서 창작과 새로운 시도가 이루지면 언젠가는 그 큰 사랑과 함께 받아들여 질 것이다.

 

P24

인내만이 전부입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 같다. 아니, 예술가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 이 한마디로 요약되는 것 같다. 마케터든 디자이너든 인내와 열정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뭔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내 길임을 깨닫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나만의 시각을 열고 외부의 시선에 예민해지지 않는 것이 비결이다.

 

인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P25

릴케는 그런 로댕에게서 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보는 법일까? 로댕은 항상 그런 말을 한다. 나는 무엇인가를 창조하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내는 건 창조물이 아니다. 나는 그저 자연을 발견할 뿐이다.” 바꿔 말하면 예술을 자연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다. 사실 로댕은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표출해내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예술은 더디게 가기를 원한다. 빨리 가는 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이 확실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작업을 하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는 한 방울, 한 방울 돌로 파고드는 물같이 느리고 조용한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P26

그는 보스프스베데에서 한 통의 편지를 더 쓰면서 남자의 내면에도 모성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모성은 생산과 창조로 이해해야 한다. 남성은 여성처럼 생명을 잉태하는 힘은 없지만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해내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릴케는 시를 잉태해 분만하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낸 고통을 즐기다 보면 고통이 아름다운 비탄의 소리를 내게 되고 그 소리가 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까운 사람이 멀어져도 괴로워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가깝다고 느꼈던 사람도 멀어진 것이니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기뻐하고 축하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릴케가 얘기하는 고독이었다. 누구와도 같이 갈 수 없는 자신만의 길에 들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고독의 선물의 상장이다.

 

진정한 고독은 무엇일까? 어떤 것이 고독일까? 고독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눌 수 없는 순간일까? 나눌 수 없는 고통일까? 고독은 자신만의 유일한 정신 세계로서 오직 나만이 있는 공간일까? 결국 나만의 우주가 되는가? 그 세계에서 내가 창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우주로 가기 위한 무언가를 만드는가? 고독의 결과는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타인을 위한 것인가? 고독만 생각해도 고독해지는 것 같지만 고독이 정말 뭔지 아직 잘 모르는 것 같다.

 

P26

축제 분위기 속에서 당신의 고독은 평소보다 참기 어렵더라도 그 위대함을 깨닫는다면 고독이 기쁠 것입니다. 위대하지 않은 고독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자문해보십시오. 고독은 한 가지밖에 없으며 그것은 위대하고 참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독은 릴케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단어다. 릴케의 고독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현대인의 특징을 바쁘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는 것처럼 얘기한다. 그런데 이렇게 바쁘게 시간을 쓰다 보면 결국 자기한테 남아 있는 시간은 아주 적다. 그 적은 시간조차도 술집을 기웃대고 이성을 흘깃대고 세상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자기를 위해서 쓰지 못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이다. 이렇게 자기만의 시간이 하나도 없는데도 자기 인생을 산다고 하겠는가.

 

P27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고독한 시간 말이다. 고독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러니까 홀로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릴케의 생각이었다.

 

P27

그렇게 자신의 꿈과는 다른 길을 어쩔 수 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 즐기는 것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일이 보이지 않을 때는 지금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그 일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P28

저는 당신의 소네트를 옮겨 적었습니다. 그 소네트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데다 형태도 고요하고 단아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보내준 시들 가운데 그야말로 최고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옮겨 적은 자신의 작품을 다시 음미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새로운 경험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옮겨 적은 시를 당신에게 보내드립니다. 다른 사람의 시로 생각하고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시가 어떤지 가슴 깊이 느껴질 것입니다.

 

P28

그리고 고독한 가운데 그 고독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뭔가가 당신의 내면에 있다고 해서 혼란스러워하지는 마십시오. 당신이 그런 바람을 침착하고 냉철하게 하나의 도구처럼 이용한다면 당신의 고독이 널리 확산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수련기는 언제나 길고 고립된 시간인 만큼 사랑은 오랜 세월 삶의 내부까지 깊이 파고드는 고독입니다.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승화되고 심화된 독거입니다. 사랑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헌신하고 전념하며 제2의 누군가와 하나가 되는 것은 개개인이 성숙해지고 자기 내부에서 그 무언가가 되고 세계가 되는 숭고한 계기입니다. 타인을 위해 세계가 되라는 것은 개개인에게 과도한 요구입니다. 젊은이들은 단지 그런 의미에서, 즉 자신을 갈고 닦는 일로써만 사랑을 이용해야 합니다.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승화되고 심화된 독거입니다.”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홀로 있는 나의 공간인가? 사랑과 대면하는 나의 실체인가? 사랑이 커지면 고독도 커지고 그래서 큰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 고독의 크기가 너무 커서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것인가? 사랑도 병이라고 했는데 결국 고독도 감당할 수 있는 범주가 있는가? 아니면 사랑을 키울수록 고독도 같이 커지고 이를 지키는 자신도 그 고독의 크기를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인가? 결국 모든 것을 걸고 사는 것 그것이 고독인가? 질문만 남는다.

 

P29

어린 시절 당신에게 주어졌던 그 위대한 사랑은 아직도 당신의 추억 속에 강하고 힘 있게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당신에게는 최초의 고독이었으며 당신이 자신의 삶에 대해 최초로 행했던 내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일까? 부모에 대한 사랑? 자기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이성에 대한 사랑? 최초로 고독했던 사랑은 언제였을까?

 

P29

릴케의 사랑에서 핵심은 각자에게 끔찍하게 따라붙은 고독을 서로 인정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은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 다름을 서로 보호해주어야 우리는 창조적일 수 있다. 릴케가 그렇게 많은 여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고독으로 서로를 보호해주는 관계, 그 자유로운 사랑 덕분에 가능했다.

 

사랑에 따른 고독을 지켜주어야 사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속하고 집착하게 된다. 고독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행동으로 풀자면 어떤 것일까? 상대방의 사랑방식을 인정해주는 것인가? 어느 선 이상은 묻지 않고 알려 하지 않는 것인가? 반대로 나는 어떤 것을 지켜주길 바라는가? 내 사랑에 대한 나의 고독이 어떻길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까? 들켜버린 내 마음? 뭘까? 질문만 남는다.

 

P30

그럼에도 시공간의 제약을 뚫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는 울림이 있다. 그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 아닐까 한다.

 

울림은 있는데 실체가 없어 어려운 것이 고전의 힘으로 보인다. 고전을 보고 나면 정신이 얼얼해져서 한방 먹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주먹의 실체는 잘 보이지 않아서 무엇에 맞았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그 주먹을 피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면 승부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승부할 수 있는 눈을, 힘을 키우자!

 

P30

당신은 이미 스쳐 지나간 여러 가지 커다란 슬픔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쳐 지나간 것조차도 고통스럽고 마음 상하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크나큰 슬픔이 당신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지는 않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먼 홋날 그 일이 일어나도 자신이 그 내부에서 변화하고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가슴속 깊이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일부가 되게 해야 합니다.

 

정말 이해가 잘 안 되는 문장이다. 번역이 문제인지 내 이해력이 문제인지?

 

P31

늘 미래만을 향하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현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행복도를 조사할 때마다 상위권에 오르는 국가의 국민들을 보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즐기고 느끼고 감탄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으면 삶은 아주 행복해지는 것 같다. 경제적인 풍요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릴케도 늘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 바로 여기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 (Carpe diem).

 

나는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 자체보다는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날 때 특히 봄바람을 좋아한다. 자연이 나를 쓰다듬고 지나가며 나를 위로하고 고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바람은 항상 현재만 있다. 어제의 바람도 내일의 바람도 없다. 이 순간의 바람만이 있다. 그 바람이 나를 스치고 간다. 이 시간도 그렇게 따스하게 그리고 아스라이 사라져 간다. 지금 이순간을 바람처럼 느끼고 살 수 있기를 바래본다.

 

P31

릴케는 고독을 자기 방에 있다가 어떤 준비도 없이 느닷없이 산꼭대기에 세워지는느낌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벽도 지붕도 사라지고 홀로 깊은 산속에 서 있는 불안한 느낌. 그래서 뭔가 파멸에 몰릴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것도 체험해보아야 한다고 릴케는 말한다.

 

파멸에 몰릴 것 같은 느낌은 뭘까? 송두리째 내가 빠져들어 더 이상 이전의 나가 아니어야 한다는 자각인가? 그래서 사랑이 두려운 것인가? 사랑이 오면 고독해지므로? 그 사랑은 내가 주는 사랑이라 나만이 감내해야 하므로? 그래서 나를 던져야만 할 수 있는 사랑이므로? 사랑한다는 것에 두려움은 그 고독만큼이나 크다. 나를 앗아간 그 사랑이 기쁘지만 두려운 이유이다.

 

P32

우리는 우리 존재를 되도록 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 심지어는 전대미문의 것까지도 그 안에 들어가도록,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용기입니다. 어째서 당신은 어떤 불안감이나 고통이나 우울함을 당신의 삶에서 쫓아내려 합니까? 그런 것들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용기는 두려움의 실체이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지만 용기는 실체가 있다. 용기는 사람을 행동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걷어내고 믿음을 키운다. 용기는 믿음으로 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 오늘도 yes의 삶을 살아보자.

 

P32

언젠가 시간이 돼서 산달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질문을 가져라. 질문을 품고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해답을 안으로 들어가게 될 거다라는 릴케의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그저 잘 들어주기만 하면 스스로 얘기하면서 정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려운 질문 일수록 단번에 답이 나오지 않지만 서서히 퍼즐이 맞춰지며 형체가 나오듯이 질문의 답도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니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도 잊지 않고 계속 물어볼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P32

혁명가인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현재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하나를 별처럼 품자.” 가슴에 별을 품는 리얼리스트, 이런 모순적 상황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조건이다. 가슴속의 별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기를 바라면 리얼리스트가 되어 현실 속에서 분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 젊음의 조건이다.

 

P34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옳고 그름이 그 하나요, 이롭고 해로움이 그 둘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가지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좋고 옳음을 따르다 해를 입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름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 세 번째고 가장 추한 것이 그름을 따르다 해를 입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름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으려 하지만 끝내는 해를 입고야 말 것이다. 옳음을 따르다 보면 해를 입을 때도 있지만 그 또한 나쁜 것이 아니다.

 

P36

다산 시의 특징을 몇 가지 정리하면 우선 사실적이고 세세하고 정교하다. 그 다음으로 파리를 조문하는 내용 등의 우화시가 눈에 띈다. 그리고 중국을 따르지 않는 주체성이 두드러진다.

 

P36

만리장성의 남쪽, 오령의 북쪽에 세운 나라를 중국이라 하고 요하의 동쪽에 세운 나라를 동국이라 한다. 동국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 유람하는 것을 감탄하고 자랑하며 부러워한다. 내 소견으로는 중국이 왜 중앙이 되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동국이 왜 동쪽이 되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

 

P38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낳는 이치는 동과 정,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이치를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이치를 살피고, 흥하고 망하는 운수를 헤아린다.

 

현명한 사람은 죽을 자리를 안다고 한다. 그 만큼 매사 철저하기 때문에 그 이치를 따라가면 어디에서 문제가 봉착될 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흔들림이 있다면 미래는 변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이 변하는 것이고 지금이 흔들리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사람만이 그 죽을 자리를 알리라.

 

P40

1801년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 다산은 처음에는 동문 주막에 딸린 작은 방에 살면서 사의제(四宜齊)라는 당호를 붙였다. 생각, 행동, 용모, 언어 등 네 가지를 조심하자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다산은 천주교도로 강진 사람들의 배척을 받다가 백련사에서 혜장선사를 만나 180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다산은 혜장선사와 사귀면서 유배 생활의 동반자가 되어줄 다도를 익힌다.

 

정약용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은 사실 나와는 좀 거리가 있다. 그의 철저함과 자제력은 나로서는 천성적으로 불가하기 때문이다. 배울 것은 배우자는 심정이 들지만 나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P40

1806년 다산은 거처를 제자인 이학래의 집으로 옮겼다가 1808년에는 도암에 있는 다산초당으로 옮겼다.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외가였던 해남 윤씨들 덕분이었다. 귤동에 살던 윤단이 손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정약용을 초빙하면서 산정을 내주었고 여기 다산초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때부터 다산은 좀 더 여유로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다산이 유배 와서 이 작은 집 한 채를 얻기까지 무려 8년이 걸린 셈이다. 편히 자고 일어나 정진할 수 있는 반듯한 장소 한 곳을 얻기가 그렇게 어려운 과정이다.

 

P41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하며 세상으로부터 잊혀가는 다산, 책을 쓰고, 제자를 기르고, 차를 다리는 행위들이 외로움을 이기고 자신을 잊어버린 세상과 화해하기 위한 처절한 수련이었을 것이다.

 

P41

오늘날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훌륭한 집안 자제들이 관직에 올라 집안을 크게 일으키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폐족이다. 만약 폐족의 처지에 잘 대처해서 처음의 가문보다 더 온전히 아름답게 만든다면 이 또한 기특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폐족의 처지에 잘 대처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뿐이다. 독서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깨끗한 일이다. 호사스러운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가 없고, 외진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오직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중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처지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독서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독서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뜻도 모르고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독서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P42

폐족이 됐다는 것은 조상이 죄를 지어 자식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과거를 보지 못하게 되어 실망했을 아들들에게 다산은 이제 과거를 잊고 오직 스스로의 인격을 도야하기 위한 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평생 솔선수범해 공부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던 다산은 아들들에게 몸소 스승이 되어주기도 한다.

 

P42

다산은 올바른 독서를 위해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수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그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며,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독서는 자기 것이 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 마음가짐의 핵심은 효도와 공경이라고 이야기한다.

 

P45

요즘 학문하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다. 구경과 구류백가에 나오는 수많은 책의 이름과 항목들이 모두 슬슬주다. 이것을 꿰미로 꿰지 않는다면 이 또한 얻는 대로 곧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P45

부족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장 평범한 사람도 한 분야를 파면 그 일에 대해서만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고 격려해주었다. 얼마나 간단하고 핵심적인 조언인가

 

P46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병든 아내가 헌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가져온 훈염으로 붉은 빛이 담황색으로 변해서 소첩으로 만들기에 알맞았다. 치마폭을 잘라서 조그만 첩으로 만들어 손 가는 대로 타이를 말을 써서 두 아이에게 보낸다. 아이들이 뒷날 이 글을 보고 감회가 새로워 어버이의 자취와 손길을 생각한다면 그리운 마음에 틀림없이 뭉클할 것이다. 이 소첩을 하피첩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는 붉은 치마를 의미한다.

 

P46

<하피첩>에는 여러 경구들이 많은데 그중 다 완전하다 해도 구멍 하나만 새도 깨진 항아리가 된다. 모든 말을 미덥게 하다가도 한마디만 거짓말을 하면 도깨비처럼 되니 말을 늘 조심하거라라는 말과 근과 검, 부지런함과 검소함.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으니 일생 동안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다.

 

P47

이 책 제목을 촌병혹치라고 했다. 촌이라고 한 것은 비속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혹이라고 한 것은 의심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으로 잘 쓰기만 하면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어떤 의원들은 약재의 성질과 기운을 구별하지 않은 채 찬 약과 더운 약을 뒤섞어 나열하기도 한다. 이쪽과 저쪽이 서로 모순되어 효험을 보지 못하는 그런 의원들과 비교한다면 차라리 내 처방이 나을지 어찌 알겠는가. 약을 간략하게 뽑아서 반드시 필요한 처방만 가렸으니 그 효과가 완전하고 빠르지 않겠는가. 간략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널리 고찰해야 하는데, 참고한 책이 몇 십 권밖에 되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만약 내 뒷날 다행히도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가게 된다면 이 책을 바탕으로 좀 더 깊게 연구할 것이다. 그때는 이라는 이름을 고칠 수도 있을 것이다. 상편은 술병으로 끝내고 하편은 색병으로 끝낸다. 세상을 깨우치고 건강을 지켜내는 내 깊은 뜻을 부친 것이다.

 

간략하다는 것은 명징하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도 검토가 잘된 일일수록 보고가 짧다. 된다 안 된다. 가부만 보고 하면 된다. 또는 좋다 나쁘다 얼마나 좋다 나쁘다. 이렇게 간략하게 보고가 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근거가 명징하게 검토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토가 부실하면 늘 말이 많고 조건이 많이 붙는다. 그러면 보고 자체가 많은 위험요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보고를 받는 사람은 불안하기 만하다. 그래서 다시 검토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단순하다. 그것은 이치가 명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치를 아는 이는 없으므로 해석이 분분하여 복잡하게 보일 뿐이다. 결국 아는 것이 일천하니 세상이 복잡해 보일 뿐이다.

 

P49

수오재는 큰 형님이 자기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 이 이름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사물 가운데 나보다 더 절실 한 것은 없다. 그러니 굳이 지키지 않아도 어디로 가겠는가.

 

P49

다산의 삼형제는 모두 천주교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고 정약현만이 사위였던 황사영의 백서사건까지 무사히 피하고 유일하게 마천의 본가를 지킨다. 그래서일까, 수오재라는 당호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P50

자기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그만둘 수가 없는 일이다. 자기가 하고 싶어도 남이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하지 않는 일은 그만들 수가 있는 일이다. 그만둘 수 없는 일은 언제나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아주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그만 두었다. 아주 부득이한 일이더라도 남이 모르게 하려던 일은 그만두었다. 참으로 이렇게 된다면 천하에 무슨 일이 있겠는가.

 

정말 가슴을 파고드는 문장이다. 그만 두었다. 이 말이 표현하고 있는 간결함과 마음 가짐은 참으로 배울 만한 것 같다. 그만 두었다. 오늘도 수많은 그만 둘 것을 안고 사는 나로서는 정약용으로부터 크게 배울 것이 이 그만 두었다이다.

 

P50

단산의 당호인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함이여, 겨울 시냇물을 건널 때처럼 조심하고, 유함이여, 사방에 다 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경계하라에서 앞 글자를 따 겨울 냇물을 건널 여사방을 두려워할 유를 붙여 스스로 근신하고 경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근신하고 경계하는 태도는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드러난다. 다산은 편지 한 장을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 번 세 번 읽어보면서 축언하기를,

 

요즘 이메일을 많이 쓰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우선은 철자가 틀리는 것, 문장이 완성이 안되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명확하지 않은 것, 줄줄줄 계획 없이 쓰다 보니 내용의 우선 순위와 중요성 상실 및 중복되는 등의 혼란이 많다. 이는 한번에 쓰고 바로 보내는 부주의함 때문이다. 이메일을 쓸 때도 두 번, 세 번 읽어 보고 보내기를 해야 할 것이다.

 

P51

백성이 해로운 곳을 피하는 것은 마치 불이 습한 곳을 피하는 것과 같다. 논밭이 적어서 사람의 힘이 남아돈다는 것을 알았거나 힘은 배로 드는데 곡식의 생산량이 적다는 것을 알았거나 추수 때 나누어주는 곡식이 적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쟁기와 따비를 짊어지고 처자를 데리고 떠나면서 저 살기 좋은 땅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백성이 해로운 곳을 피하는 것은 마치 불이 습한 곳을 피하는 것과 같다. 좋은 것은 백성이 잘 안다. 그러니 제발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P52

같은 실학자인 박지원의 북학파가 상공업을 중시했다면 정약용은 선비로서 백성의 삶과 직결된 농업에 관심을 쏟았다. 목민관으로 일하면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다산으로서는 그들의 삶과 직결되는 농업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가 없었다.

 

P53

다산이 주장하는 토지제도는 이 모두를 보완한 여전제였다. 그에 따르면 우선 산골짜기와 시냇물을 중심으로 구역을 정하고 그 구역을 라고 부른다. 대략 세 개의 여가 모여서 리가 되고 다섯 개의 리가 모여서 방이 되고 다섯 개의 방이 모여서 음이 된다. 가장 작은 단위의 에는 여장을 두어 공동 생산을 한다. 이때 각자의 노동량을 모두 기록했다가 나중에 이에 따라 수확을 차등 배분한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해도 땅이 좁고 토지가 척박해서 소출이 적으면 사람들이 떠날 것이다. 이렇게 10년 정도 자유롭게 이동하다 보면 안정될 것이고 이때 세액을 정하면 백성들이 안락하게 잘살 수 있을 것이다.

 

P53

다산은 당시 군정의 비합리성을 풍자하는 <애절양>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시의 소재가 되어준 것은 1803년 유배 중이던 다산이 전해들을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어느 백성이 태어난 지 3일 된 아이가 군적에 올라 이정에게 군포 대신 소를 빼앗기자 칼로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울컥하는 기분을 참지 못한 다산은 이 시를 지어 군적에 올라서는 안 되는,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에게까지 군포를 거둬들이는 부패한 사회상을 비판했다.

 

P55

양반이 많아지면 노동력이 줄어들고 노동력이 줄어들면 토지의 생산력도 높아지지 못합니다. 토지의 생산력이 높지 못하면 나라가 가난해지고 나라가 가난해지면 선비를 힘쓰도록 격려할 수 없습니다. 선비가 힘쓰지 않으면 백성들은 더욱 곤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근본 원인을 살펴보면 바로 군포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은 양인에게만 거두는 군포제도를 폐지하지 않으면 태평성대의 정치를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P56

선비는 평생을 배우는 학인이다. 그러면 이렇게 배워서 무엇을 할까? 지행합일 또는 학행일치, 즉 삶 속에서 실천한다. 그래서 선비에게 또 다른 중요한 덕목은 수기, 즉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다. 요컨대 선비란 학문을 익혀서 자기를 다스림으로써 이득이 되지 않아도 마땅히 지킬 것을 지키고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사람만 있으면 그 사회는 문제가 없을 텐데늘 마땅히 할 일은 안하고 남 탓만 하고 있다.

 

P57

정의 뜻은 바로잡는다는 말이다. 다 같은 백성인데 누구는 토지의 이로움을 남들 것처럼 아울러 가져 부유한 생활을 하고 누구는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가난하게 살 것인가. 그래서 토지를 계량하여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어 그 질서를 바로잡으니 이것이 바로 정이다. 다 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풍요로운 땅이 많아서 남은 곡식을 버릴 정도고 누구는 척박한 땅도 없어서 모자라는 곡식을 걱정해야만 할 것인가. 그래서 배와 수레를 만들고 저울의 규격을 세워, 그 고장에서 나는 소산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환하여 바로잡으니 이것이 바로 정이다. 다 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제멋대로 삼켜서 커지고 누구는 연약한 위치에서 자꾸만 빼앗기다가 멸망해갈 것인가. 그래서 군대를 조직하고 죄 있는 자를 규탄하여 멸망할 위기에 있는 자를 구제하고 세대가 끊긴 자를 이어가게 하여 바로잡으니 이것이 바로 정이다. 다 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불량한 데다 악독하면서도 육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누구는 온순하고 부지런한 데다 정직하고 착하면서도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그래서 형벌로 징계하고 상으로 권장하여 죄와 공을 가르는 것을 바로잡으니 이것이 또한 정이다. 다 같은 우리 백성인데 누구는 멍청하면서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악을 퍼뜨리고 누구는 어질면서도 아랫자리에 눌려 있어 그 덕이 빛을 못 보게 할 것인가. 그래서 붕당을 없애고 공평하고 바른 도리를 넓히며 어진 이를 등용하고 못난 자를 몰아내 바로잡으니 이것이 바로 정이다.

 

P59

선비이자 인간으로서 다산의 이중성이 잘 드러난다. 아무리 뜻이 있어도 선비 역시 인간이므로 충성을 받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고수는 순임금의 아버지였다. 고수는 장님이라는 뜻으로, 아둔함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는 순임금의 어머니가 죽자 후처를 얻는다. 후처와의 사이에서 상이라는 아들이 태어나는데 고수와 후처와 상은 수없이 순을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가령 순에게 지붕을 고치라고 하고는 순이 지붕으로 올라간 사이에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지르는 식이었다. 다산은 그런 일들을 당하면서도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 순임금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감정이 있는 인간으로서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사이에 아무리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다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원망이라도 하는 것이 인간답지 않느냐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다.

 

누구나 의견을 낼 수는 있다. 문제는 그 의견을 윗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꼽냐 꼽으면 네가 왕 해라. 위아래가 같이 자유로이 의견을 내고 절충하여 방향을 잡을 수는 없을까? 실제 윗사람은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아랫사람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데. 나도 반성할 것이 없는지 볼일이다. 원망을 듣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원망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할텐데 말이다.

 

P60

다산은 명분론에 붙잡힌 허명뿐인 선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던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선비의 본질에는 의리를 지키되 인정을 잃지 않고, 명분을 내세우되 실리를 버리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아량과 포용력이라는 것이다. 다만 선비는 곡학아세, 즉 정도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는 일만은 삼가야 했다. 늘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중용을 지키는 선비의 길, 다산이 강조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P61

도전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그러나 도전하는 인생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도전하면 피곤하다. 그렇다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면 삶이 가치 없어진다.

 

도전도 병인데 정말 많이 힘들기는 하다. 그러다 몸도 상한다. 몸이 상하면 도전해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조바심을 갖지 말라 했다. 모든 것은 과정이 있는 법이다. 그 과정을 소홀히 하면 외롭게 되고 그러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러니 도전에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그 인내를 지탱해주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을 키우는 것 만이 더 큰 도전을 만들어 낼 것이다.

 

P61

<그리스 로마 신화>는 옛날이야기다. 그것도 남의 나라 옛날 이야기다. 왜 우리는 남의 나라 옛날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일까? 가장 그럴듯한 답은 세계와 진정한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서다.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리제이션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화적 문맥을 읽어내는 것이다. 자기 것만 읽으면 독선과 독단에 갇히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것을 읽으면 메시지와 통찰을 얻게 된다.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전세계가 하나로 묶여가고 있다. 나는 요즘 상상한다. 앞으로 100년 뒤에 지금의 국가체제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아니면 200년 후 1000년 후에도 말이다. 현재 정치 구조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전세계의 정치는 어떻게 발전해야 할까? 궁극적으로 인류는 무엇을 시험하고 있을까? 어떤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인류는 무엇을 증거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을까? 그 궁극의 해답은 인간 존재의 가장 핵심인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것일 거란 예상은 해보지만 이 많은 사람의 마음에서 사랑을 꽃피울 수 있을까? 메말라가는 사람들의 사랑을 키울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의 마음으로 전세계가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종교도 정치도 아닌 사람의 마음으로 나누고 보태고 말이다. 인류의 욕망이 이를 어떻게 할까? 개인의 욕망은 어떻게 이 것과 조화할까?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남을까? 세상이 지금까지 변해 왔듯이 앞으로도 변할 것이다. 앞으로 1000년 뒤에는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사람은 늘 새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간에 새롭게 접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궁금하고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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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멋진 이유는 그 동안 보지 못한 풍광과 세속을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은 여행이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문법을 많이 접할수록 삶은 풍부해진다. 책의 꽃은 고전이다. 그리고 고전의 시작은 신화다. 그래서 우리는 신화를 읽는다. 내가 여행한 곳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곳은 그리스였다.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찾았지만, 그곳엔 돌기둥밖에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 거대한 신전은 사라져도 이야기는 남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스의 위대함은 이야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전은 인간 내면의 여행이요 인류 역사의 여행이요 다양한 삶에 대한 여행이다. 그리고 그 고전을 현대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고전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변하지 않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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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의인화시켜 신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의 행적은 장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몸을 입고 나타난 자연과 우주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의 신들을 보면 마음을 보는 것 같다. 마음 속에 수만은 신들이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것 같다. 조화롭게 사는 듯해도 신들은 늘 시기한다. 늘 서로의 능력을 과시하려 한다. 신들은 영원하다. , 인류 마음 속에 깃든 이 신들이 영원한 것이고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이 신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 할 것이다.

 

P63

에로스는 화살을 쏜 적이 없고, 에리니에스는 핏물을 흘리면 누군가를 증오하지도 않고, 보복하기 위하여 내 뒤를 쫓지 않는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분노와 증오와 보복은 지금 여기에서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강남역 사거리와 광화문 앞에서 요동치며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죽은 옛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지금의 날것인 것이다.

 

P63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들이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로서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들려준다.

 

무심하게 보던 것들이 마음을 담아 보게 된다. 그러며 아프고, 슬프고, 놀랍고, 대단하고, 의아하다. 신화는 마음을 담아 봐야 한다. 내가 신이 되어야 하고 내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읽어야 한다.

 

P63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끊임없는 고민과 좌절. 그것은 인간이 무언가에 도전하기 때문에 맛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은 왜, 무엇에 도전하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이 물음에 생각을 주는 책이다. 인간이 왜 도전하고 성공과 좌절의 경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다. 대개 신화 속의 도전에는 패턴이 있다. 아주 평범한 인간, 그것도 아주 불운할 가능성이 높은 인간이 주인공이 된다. 그는 어느 순간 모험에 초대받고 고행을 시작한다.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가면서 그는 스스로 영웅이 되고 자기가 떠났던 초라한 곳으로 돌아와 그곳을 변화시킨다. 또 다른 도전의 패턴은 뛰어난 인간이 무모하게 신에게 도전했다가 예정된 패배를 맞고 처절하게 파멸하는 것이다.

 

P66

신들이 자비롭다고 누가 그러더냐. 인간이 아니더냐. 신들은 인간이 무릎을 꿇을 때만 자비롭다. 다른 신들이 정의롭지 못할 때만 정의롭다. 너희가 무릎을 꿇지 않고 감히 신들과 겨룰 때는 신들의 마음속에 아무런 자비도 없다. 사티로스의 가락과 음악의 신의 가락도 가려듣지 못하는 네 귀가 귀냐, 네게 귀 같은 귀를 붙여주마.”

 

가진 자들은 늘 그렇다. 신도 그렇고 인간도 그렇다. 무릎을 꿇은 자에게만 자비를 베푼다. 좀 처절하지만 현실이다.

 

P66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어 그리스 로마 신화가 다시 주목받으면서 마르시아스는 예술가들에게 숭배 받게 된다. 예술가들은 마르시아스 같은 처지가 되더라도 신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는 엄청난 갈망을 품기 때문이다. 단테도 <신곡>에서 아폴론이여, 내 가슴속에 들어와서 마치 마르시아스를 사지부터 껍질을 벗겨놓은 것처럼 내게도 영감을 주십시오라고 갈구한다.

 

예술가의 입장에 있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 처절함이 부럽다. 이 영감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영감을 통해 창조한 예술 창작품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영감이란 것이 실체가 없이 마냥 기다려야만 나오는 것이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영감도 결국 더 깊이 사랑하는 것 아닐까 한다.

 

P66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과 반인반수의 결말은 비참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신의 권력과 재능을 탐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만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오만이 있다. 하나는 과거의 성공을 우상화하는 오만이다. 그 끝은 파멸이다. 모든 성공한 것들의 파멸 속에는 우상화된 오만이 숨어 있다. 이때 오만은 성장을 멈추게 하는 치명적인 악덕이다. 또 하나의 오만은 신으로부터 가혹한 징벌을 당하더라도 신의 경지에 다다르려는 오만이다. 이는 껍질을 벗겨지는 극한의 고통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창조적 진보를 계속하게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인들이 품은 야생의 사유는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대목에서 피리의 절대 고수가 되기까지 몇 번이고 껍질이 벗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마르시아스의 예술 혼과 만나게 된다.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이 우리에게 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다 바쳐 그것이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고통을 딛고 창조적인 진보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도전임을 신화는 이야기 한다.

 

P67

이번에는 신화에 나오는 대표적인 영웅들을 만나보자. 물론 이들은 영웅이지만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다. 완벽한 인간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웅들은 처음부터 위대한 영웅이 아니었다. 평범한, 어쩌면 평범하지도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왕이나 신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편모 슬하에서 자라거나 나라에서 쫓겨나 불운하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영웅의 모험에 초대받는다. 그들은 기꺼이 또는 강제적으로 모험에 참여해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다시 자기가 떠났던 비극적 배경으로 돌아와 대중의 지도자가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영웅은 나보다 큰 것에 나를 바친 사람들이다.

 

대한 민국 사람 중 만은 사람이 이미 완벽한 인간이다. 왜냐 하면 모두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 매력 없다. 모두 솔직해 지면 좋겠다. 나도 말이다.

 

P70

어쨌든 배신이 있었고 테세우스는 그 대가를 단단히 치른다. 젊어서는 어버지를 죽게 했고 만년에는아리아드네의 동생 파이드라를 아내로 맞았다가 아들인 히폴리토스를 잃게 된다. 히폴리토스를 좋아하던 파이드라가 사랑을 거부당하자 그를 모함해 죽였던 것이다.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비참한 말로를 맞는 테세우스를 통해 결국 인간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P72

옛사람들은 옛 땅에서 쫓겨나 시련을 겪다가 새로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지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땅은 없다. 따라서 21세기 청년들은 자기 회사를 세우는 것이 자기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뜻을 세우고 고난을 거쳐서 좋은 회사를 만들고 훌륭한 CEO가 되면 그것이 바로 현대의 아이네이아스가 되는 길이다.

 

P73

렇게 영웅들은 불운함에서 위대함으로 도약한 사람들이다. 도약의 순간이 중요하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나를 모험으로 초대하면, 내 마음이 그 모험에 응하면 두려워하지 말고 따라나서라. 조지프 캠벨은 그런 얘기를 한다. 내 마음속에 울리는 무엇인가가 생겨나면, 정말 그 일이 내일이라고 생각하면 사자의 입 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마음으로 시작해라. 칼날 같은 길을 따라가라. 그 위험한 길이 네 길이다.

 

무당은 두려움이 없다. 칼날 위에서 춤을 춘다. 우리도 무당이 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걷어내자. 훌쩍 뛰어 보자.

 

P73

그리스 로마 신화는 로맨틱하고 애절한 사랑부터 비열하고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랑까지 우리가 아는 온갖 종류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사랑은 개인이 아닌 관계의 부분이다. 물론 짝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으나, 상대가 나타나서 내게 강한 임팩트를 주지 않았다면 짝사랑이란 말도 무의미한 것이다. 신화는 사랑 이야기를 통해 관계의 실체를 보여주곤 한다.

 

P74

말일에 에우리디케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발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결국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에는 엄청난 상징성이 있다. 은둔의 철학자로 알려진 모리스 블랑쇼는 이를 닿는 순간 사라리즌 이 미칠 듯한 부재라는 말로 표현했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며 사라지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바람뿐이었다고 묘사한다. 이 공허감이야말로 예술가들의 한계를 의미한다. 예술가가 영감을 받아 그려낸 무언가는 그의 머리속에 떠올라 그의 가슴을 울렸던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뭔가 잡을 듯했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안타까움, 이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타고난 비극일 수밖에 없다.

 

나는 오르페우스가 돌아본 이유가 의심이 아닐까 한다. 그 의심을 부러 일으킨 것은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고 말이다. 왜 의심이 들었을까? 하데스를 믿지 못한 것일까? 신인데? 무엇을믿지 못했을까? 가질 것 같은 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 것이 되어버린 상황. 꿈에서 깨어나 꿈의 기억은 있고 그 느낌은 있으나 실체가 기억이 나질 않을 때. 이건 선택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오르페우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계속 갈 것인지 돌아 볼 것인지. 왜 돌아 봤을까? 내 사랑을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조바심에? 오지 않을까 불안해서? 살아 돌아오지만 나를 떠날까 봐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나지만 이건 오르페우스의 잘못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비난하지는 못하지만 안타까움만 남는다. 모든 사람이 인생의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낙원을 향해 믿고 살아가지만 의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좌절되듯이 우리 마음 속 에우리디케 또한 그렇게 사라질 지 모른다. 의심이 그 시작일 것이다.

 

P75

하지만 이것이 비단 예술가들만의 고뇌일까? 이는 모든 인간들의 고통이기도 하다. 삶은 에우리디케처럼 사라질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삶을 통해 얻었던 진귀한 체험들과 보석 같은 깨달음 역시 얻었다고 믿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 ‘에우리디케의 얼굴에 머물던 오르페우스의 마지막 시선’, 그 시선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단명한 삶을 시로, 노래로 살아야 하는 필멸의 인간이 지닌 운명이다.

 

P76

오라, 감미로운 아우라여, 와서 내 가슴 위로 지나가다오. 그대는 알리라.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대가 있기에 이 숲도, 홀로 이 숲을 헤매는 것도 즐겁구나.”

 

P77

네가 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믿음이 강하지만 네 아내도 그럴까?” 에오스가 케팔로스에게 남긴 이 말은 모든 관계의 아픔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사랑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늘 작은 것에 걸려 넘어진다. 사소한 오해로 위대한 사랑도 깨져버리는 것이다.

 

P77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읽을 때마다 다르게 보이고, 또 다르게 읽힌다. 예를 들면 맨 처음 페르세우스 이야기를 읽을 때는 나도 페르세우스같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페르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메두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악명 높은 괴물이었으나, 알고 보면 그녀는 포세이돈에게 농락당하고 아테나에게 저주받은 희생자다. 테세우스 이야기에서는 아리아드네가 보인다. 신화를 읽으면서 뭘 느껴야 하는지, 또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P78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으로 자신의 아름다운 이상형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상형을 만들어갈까? 피그말리온 효과의 대표적인 인물이 루 잘로메가 아닌가 생각한다. 니체, 릴케, 프로이크 등에게 연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당시 지식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 그런데 루 잘로메는 자기가 만난 모든 남자들로부터 지식과 예술을 배움으로써 자기 인생을 조각했던 여인이다. 우리에게는 삶이라는 재료가 주어졌고 이 재료를 토대로 꿈을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몫이다.

 

P79

과학자와 엔지니어와 발명가의 시조였던 다이달로스의 불행은 ?’라고 묻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 예를 들어 미노스 왕의 부인인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암소를 깎아준 것이 다이달로스였다. 그 결과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이 태어났다. 그는 주문자의 의도는 묻지 않고 맹목적으로 만들기만 했다. 이런 태도는 현대에도 문제가 되었다. 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며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자기의 연구가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이것 역시 ?’라고 묻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쓰이는지, 아니면 인류와 불행과 파멸에 쓰이는지 묻지 않았다는 것,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 이 것이 죄였던 것이다. 진정 존경받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고 싶다면 나의 능력과 기술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생각하는 사유하는 다이달로스가 되길 바란다.

 

공학의 은 하늘의 이치와 땅의 자원으로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모르고 공학을 논할 수 없다. 공학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이치에 맞게 세상의 재화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과학이나 공학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간을 모른다는 편견이 있다. 인간의 마음에 다소 무딘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무시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현재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어찌 인간을 고려하지 않은 기술 덕분이겠는가 말이다. 인간에 대해 더 고심하고 중심에 인간을 두고 일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세상의 이로움은 반드시 사람에 이르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해로운 것이 되어 곧 사라질 것이다.

 

P81

시시포스가 산꼭대기에 바위를 밀어 올리며 느꼈을 절망은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똑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는 직장인의 절망과 비슷할 것 같다. 시시포스에 대해서는 알베르 카뮈의 해석이 가장 철학적이다. 그의 처방은 이렇다. “반항하라. 쉽게 평화를 갈구하지 마라. 나와 세계 사이의 팽팽한 대립에 굴복하지 말고 대립하라. 자유로워져라. 희망과 내일이 없는 조건 속에서 순수한 불꽃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해라. 이것이 자유의 원리다. 열정을 가져라. 열정이란 주어진 모든 것을 소진하는 것이다. 삶을 필사적으로 불태우고 최대한 많이 살아라. 이것이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전장. 도전의 원칙이다.”

 

매일 반항하면 회사에서 쫓겨난다. 반항을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게 할 것인가? 일상이라는 반복의 틀이고 매일의 업무에 대한 반항일 것이다.  

 

P82

실패란 무엇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결과다. 두려움은 사랑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초록별 지구를 사랑하라.

 

거꾸로 두려움이 없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실패를 하겠지만 계속 도전해서 이루리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정말 그 일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랑의 끝이 행복하지만은 않다. 비극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개인의 일이라 힘든 것이다.

 

P82

삶은 무자비하게 당신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을 해야 하다. 느껴야 한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구에 온 이유니까. 가슴이 모험을 하게 하라. 통째로 삼켜지는 듯한 짜릿함을 느껴라. 사랑이 깊을수록 그 끝은 더욱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으니

 

P83

괴테가 사회의 금기를 깨는 작품을 쓰기까지의 과정도 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괴케는 나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한 줄도 내가 체험한 그대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베르테를의 이야기 역시 괴테의 이야기이되, 베르테르는 괴테가 아니다. 괴테의 체험이 그의 안에서 순화되고 편집되고 재창작되어 베르테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P86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폭발한다. 이 굉장한 사건이 나와 다른 사람을 섞어버리면서 나와 그 사람의 경계가 없어지고 그의 눈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를 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경험이 우리를 영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에 접근해간다.

 

그녀의 눈 속에 비친 나를 제대로 본지가 참 오래 되었다. 다시 봐야겠다.

 

P87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친근한 사람까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일은 당연히 악덕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각자 마음속에 간직할 기쁨마저 빼앗아야겠습니까? 불쾌한 기분에 젖었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불쾌감을 감추고 홀로 참아내는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오히려 불쾌한 기분이란 자신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속의 불만이 아닙니까? 자기혐오 아닙니까? 그런 자기 불만은 한심한 허영심이 일으키는 질투심과 언제나 결합되어 있죠. 자기가 행복하게 해준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을 견뎌내지 못하지요.

 

P87

네가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들의 기쁨은 함께 기뻐해줌으로써 그 행복을 더해주는 것뿐이다. 만일 친구의 영혼이 불안한 격정에 시달리고 괴로움에 갈가리 찢겼다면 친구에게 진정제라도 한 방울 건넬 수 있을까? 꽃피는 젊은 시절에 당신에게 짓밟힌 처녀가 마지막으로 무서운 병에 걸려 비참하게도 병석에서 텅 빈 눈으로 망연하게 허공을 더듬으며 창백한 이마에는 간간이 죽음의 땀만 흘러내린다고 합시다. 당신은 저주받은 사람처럼 침대 앞에 서서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것입니다. 그리하여 눈 앞의 죽어가는 여인에게 한 방울의 강장제, 한순간의 생기를 불어넣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치고 싶다는 불안한 심정에 마음속 깊이 경련을 일으킬 것입니다.

 

P88

당신은 무슨 일에나 지나치게 몰두합니다. 그건 당신을 파멸시킬지 몰라요. 주의하세요.” 오오 나의 천사여! 난 그대 때문에 살아야만 해요!

 

레이스에 지나치게 몰두합니다. 이건 나를 파멸시킬지 몰라요. 주의하세요. 오오 나의 변경연이여! 난 그대 때문에 레이스를 해야만 해요!

 

P90

아아, 이성적인 인간들이란!”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소리쳤네. “당신들은 격정! 광증!이라고들 하지요. 당신들 같은 도덕군자들은 만취자를 비난하고 미치광이를 혐오하면서 저 제사와 같이 그 옆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바리새 사람처럼 하느님이 당신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지요. 나는 몇 번이나 취해보았어요. 나의 격정은 광증과 다를 바 없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위대한 일이나 불가능한 일을 해낸 비범한 인간은 옛날부터 만취자나 미치광이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내 나름으로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P91

베르테르와 알베르트의 성격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둘은 자살을 놓고 아주 격정적으로 대립한다. 자살은 신이 내려준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악이라는 것이 알베르트를 비롯한 당대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병에 걸려서 죽으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기듯이 자살하는 사람에게도 자살할 수밖에 없는 병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에 몸부림치다 죽게 된다든가, 사랑에 배신당해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질병에 걸려 죽는 것이기에 죄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P91

청춘은 쉽게 위로를 원치 않는다. 청춘은 격정과 고뇌를 거쳐서 성숙된다. 심장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시도했다는 의미니까. 원하는 것, 가슴의 언어를 좇다 보면 고통이 따를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삶이다.

 

P92

시대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질풍노도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 단어를 듣는 순간 , 이건 나를 위한 단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대개는 질풍노도 시기라고 하면 젊은 시절을 꼽지만 내 경우는 젊은 시절이 아닌 마흔세 살 때였다. 그 때 회사를 그만두고 미지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불혹의 나이에 진로로 질풍노도를 겪었다면 젊은 베르테를는 사랑의 열병으로 질풍노도를 겪고 있다.

 

마흔세 살 나도 용기가 필요하다. 질풍노도. 이제 수명이 늘어나서 질풍노도를 30 ~ 40 대에 겪는 것 같다. 대상은 다르지만 말이다.

 

P92

베르테르가 좋아했던 호두나무가 잘린 것이다. 잘려나간 호두나무는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계몽주의, 이성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질풍노도 운동이 벌어지기까지 중용한 역할을 한 사람이 루소였다. 루소의 주요 주장은 문명의 사슬을 끊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연을 상징하는 호두나무를 베르테르에게 굉장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베르테르는 그런 호두나무가 베어진 것을 보고 자기가 믿었던 무언가가 어이없이 자려 나간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는 결말에 대한 강력한 복선이 된다.

 

P95

이제 당신과 헤어질 때 내 마음은 무섭도록 흥분해 있었고 착잡한 감정이 내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기쁨도 없이 당신 곁에 머무는 내 신세가 처참하게 느껴졌습니다. 간신히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 하느님! 당신이 내리신 최후의 위안은 아주 쓰디쓴 눈물이었습니다! 수 많은 계획과 희망들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쳤지만 결국에는 단 하나의 생각이 아주 굳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죽어버리자는 생각이! 나는 누웠지요. 다음 날 아침 고요히 잠을 깨어났을 때도 그 생각은 굳건히 가슴속에 박혀 있었습니다. 나는 죽을 것이다! 절망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참고 견디다가 당신을 위해 이 목숨을 희생하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P95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 그 언덕에 오르게 되면 나를 기억해주세요. 그렇게도 자주 골짜기를 통해 그 언덕을 오르던 나를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무성한 풀들이 석양의 햇빛을 받으며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릴 때면 멀리 교회 묘지에 있는 내 무덤도 한번 바라봐주세요.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침착했는데 지금 나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습니다. 이 모든 광경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96

한때는 사랑으로 온 세상이 환했지만 이제는 점점 암흑으로 변해간다. 마치 꽃봉오리가 폈다가 떨어져 시드는 것 같다. “사랑이야말로 저항할 수 없는 욕망으로 욕망하는 것이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베르테르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욕망과 열병에 빠져들어 한때는 꿈 같은 행복을 누렸지만 이제 그에게는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러셀은 이 세상에 모든 조심성 중에서 사랑에 조심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포기하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 그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겁쟁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처 없이는 더 아름다운 사랑을 해낼 원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은 정말 중요한 건 사랑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키워라.

 

사랑에 조심하지 않으면 무얼 조심해야 할까? 좀 헷갈린다. 사랑은 무언가?

 

P99

지금과 마찬가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쓰일 당시에도 자살은 물론이고 유부녀에 대한 사랑 역시 죄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괴테는 그 두 가지에 모두 도전한다. 그는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금기시된 사회 규범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고, 이제 그의 작품은 고전이 되었다. 질풍노도 운동에 동조했던 괴테는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의 생각에 따라 육체를 죽임으로써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도 자유의지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 죄악일 수 있을까라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괴테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내 사랑이 후세에는 이루어지기라는 희망을 품고 죽는 것이 어째서 죄악인지 물으며 죄악이라고 욕하기 전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해달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그 절절함에 대한 이해. 하지만 베르테르 신드롬으로 인해 많은 청춘들이 자살을 해버렸다. 소설이 소설이 아닌 것이 이때문이다.

 

P101

가끔 나는 대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미래와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러면 가끔 이런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있다. “선생님이 우리 나이라면 정말 뭘 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사랑을 하세요, 사랑을.” 달콤함과 씁쓸함,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뇌, 사랑에는 인간이 성숙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P101

대신 지금은, 사랑하기 좋은 지금은 미친 듯이 사랑하고, 미친 듯이 이별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사랑에도 때가 있는 법이니까.

 

사랑에 미치지만 사랑이 끝나면 그 사랑으로 인해 비롯되었던 고독도 사라지려나? 아니면 대상 없는 고독만이 그 자신을 괴롭히려나? 선택이 필요할 것 같다.

 

P102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성한 정신이다. 그러나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싸늘한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물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청춘들은 나이라고 말할 테고 나이 든 사람은 마음가짐이라 말할 것이다. 나이 듦은 서글픈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P103

트웨인은 허클레비 핀이라는 소년을 전면에 내세워서 물질주의 위주의 교육을 거부하고 노예제도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한다. 특히 거짓말을 바 먹듯이 하는 헉 핀이 노예인 짐을 만나면서 삶의 부조리를 깨닫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이 책은 생의 진한 페이소스 (pathos)를 전한다. 산다는 것, 성장의 진정한 의미를 트웨인은 끊임없이 캐묻고 있다.

 

P104

어떤 사람은 지위를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영웅을 숭배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을 좇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을 숭배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인 사실 하나는 한결같이 모두 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돈은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돈처럼 많은 말을 하는 것도 없다. 돈은 사람이 벌고 사람이 쓰기 때문일까?

 

P104

모든 것을 상업적 관계로 이해하려는 뚜렷한 특성, 이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자유로운 성취의 길이 열린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미국 사회의 한계가 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햇빛이 날 때 우산을 빌려 주었다가 비가 내리는 순간 돌려달라고 하여 이익을 높이는 메커니즘이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상업적 관계가 편할 수 있겠다. 마음 쓰지 않고 숫자만 생각하면 되니 손해 보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옆에 사람이 없다. 외롭다. 결국, 비용이 든다. 상업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사랑에도 비용이 드는 것은 자명하다. 그 것이 돈이 될지 시간이 될지 목숨이 될지 그건 선택이다.

 

P104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서 군 사령관. G.G.”

 

P107

소년의 거짓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사실 거짓말도 그 자체로는 악덕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연히 나쁜 일이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외부의 억압에 맞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또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이를 임기응변이라고 부른다.

 

P109

빌지워터, 좋든 싫든 이 좁은 뗏목 위에서 오래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 자네가 그렇게 심술을 부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고 최대한 활용한다. 이게 내 좌우명이지, 우리가 여기서 만났다고 나쁠 것은 없다네. 먹을 것도 충분하고 생활도 편안하니까. 그러지 말고 다들 악수나 하세, ? 그리고 서로 친구로 지내는 거야.”

 

P113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 나중에야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더군. 좋아, 편지를 써야겠어. 놀랍게도 이렇게 생각하자마자 내 고통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모두 사라져버렸어. 그래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종이와 연필을 꺼내 이렇게 썼지. “왓슨 양. 달아난 검둥이 짐은 피크스빌에서 2마일 하류에 있어요. 펠프스 씨가 붙잡고 있으니 현상금을 보내주시면 녀석을 넘겨줄 겁니다. 헉 핀 올림.” 헉은 편지를 쓰자마자 기분이 좋아졌고 생전처음으로 모든 죄가 씻겨간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의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편지를 보내면 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시 노예가 되는 것일까? 그는 생각을 거듭했다. 더불어 짐과 함께 강을 따라 내려온 여행을 다시 떠올린다.

 

한 순간의 마음속 불편함을 그냥 지나치며 살아온 인생이다. 어떨 때는 그 마음이 걸려 돌아보기도 하고 고쳐보기도 하지만 그 불편한 마음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모두 살피지 못했다. 마음에 떠오를 때 그 불편한 것들을 바로 바로 봐줄 수 없을까? 해보고 싶은 것이다.

 

P114

그때 문득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그 편지를 보게 되었지. 편지는 가까운 곳에 놓여 있었어. 나는 그럴 집어 들었어. 나는 덜덜 떨고 있었지. 둘 중 하나는 정하고 나면 되돌릴 수가 없잖아.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 나는 잠시 생각하고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지. 좋아. 그러면 지옥에 가자.” 그러고 나서 나는 편지를 찢어버렸다.

 

인생을 버린 것이다. 지옥에 가자고 결심을 했으니 말이다. 친구와 신념과 미래를 위해 인생을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곳이 지옥이라도 천국일 것이다.

 

P115

좋아, 그러면 지옥에 가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한마디다. 소년이었던 헉이 훌쩍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한마디이기도 하다. 헉이 들여다본 어른의 세계에서 노예는 주인에게 묶인 채 도망가면 안 되는 존재다. 그래서 헉은 탈출한 노예인 짐과 함께 있으면서 당연히 죄의식을 갖는다. 사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괴리는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헉은 짐은 내 친구야. 내가 도와줘야 돼. 맞서 싸워야 해. 지옥이라도 가겠어라고 각성하게 된다.

 

이제 헉은 자기 세상을 갖게 되었다.

 

P120

헉이 짐을 풀어주자고 했을 때 톰이 쉽게 허락했던 이유가 나온다. 그동안 헉과 톰 그리고 짐이 그렇게 고생했는데 정작 짐에게 자유를 준 것은 왓슨 양이었다. 왓슨 양의 유언 덕분에 친구들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어버렸다. 다들 실컷 고생만 하고 너무 허무하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대목이 대단히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흑인들은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흑인들 사이에는 우리가 쟁취한 자유가 아니라 수종적 자유’, 다시 말해 백인이 찾아준 자유라는 인식이 있었다. 오랫동안 심리적으로 부채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짐이 가만히 있다가 왓슨 양 덕분에 해방된 것이 아니다. 짐은 스스로 자유를 찾아 나와 온갖 고난을 겪었다. 짐은 자기 힘에 의해 그리고 친구의 도움에 의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자유를 찾았고 왓슨 양은 그저 그렇게 쟁취된 자유를 인정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남북전쟁 이면에 가려져 있던 자유를 향한 노예들의 투쟁을 기리고 있는 셈이다.

 

P121

마크 트웨인이 말했듯이 교육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의 명언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바로 허클베리 핀의 이야기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학교가 아닌 미시시피 강가에서 세상을 배운 허클베리 핀. 그는 기성 체제에 안주하는 대신 물음을 끊임없이 캐묻고 자신의 답을 찾아간다. 자신의 길을 가려는 그 열정과 도전정신, 그것이 삶을 산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P122

혼자 순이온으로 갔다. 메뚜기 한 마리가 어깨에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소나무가 되었다. 아몬드나무에게 신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아몬드나무가 꽃을 피워냈다. 나는 젊은 여인의 얼굴에서 노파의 얼굴을 읽어내려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리스라는 노파의 얼굴에서 이제는 사라져버린 소녀의 생기와 젊음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P122

우리는 현대의 시시포스다. 끊임없이 굴러 내리는 바위를 언덕으로 밀어 올려야 했던 그처럼 우리는 돈의 노예로 시간의 노예로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노예의 삶을 거부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그에게 자유란 화산에서 거침없이 뿜어 나오는 용암과 같았다. 그를 통해 무엇을 가짐으로써 얻는 자유가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치열한 삶의 목소리로, 과장되지 않은 맨얼굴의 언어로.

 

돈의 노예이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다.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들 말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 교육이 결국 우리의 현실을 망치고 있다. 돈의 노예가 아니라 자녀의 미래의 노예가 되어 현재의 자녀는 물론 부모의 삶도 송두리째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국가나 권력층은 이게 중산층 이하를 관리하는데 한결 나을 것이다. 이 틀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P123

주교의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구원이 아니라 외쪽에는 악의 날개, 오른쪽에는 선의 날개를 달고 세상을 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신에게조차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 인간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가 투쟁적인 인간상을 부르짖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부터 알아야 한다.

 

P123

카잔차키스가 어린 시절 크레타는 터키에 종속되어 있었고 카잔차키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크레타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히 아버지인 미할리스는 카잔차키스의 기억 속에 영웅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홉 살이던 카잔차키스에게 학살당한 그리스인의 발을 만져보게 한다. 그때 그는 물어본다. “이 사람들은 왜 죽었나요?” 아버지는 대답한다. 이 사람들을 죽인 것은 자유라고.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죽게 만든 것도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P124

니체의 사상은 대표적인 저서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대변된다. 차라투스트라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는 아주 단순하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 싸우고 이 세상에는 신과 악이 공존하며 강한 자가 선의 기준을 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강요된 선 속에서 살아가는 셈이다. 그래서 니체의 초인이란 스스로 선과 악을 구별하고 자기의 선을 따르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고 그 초인이 인류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는 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 메시지다.

 

니체의 초인 다소 위험한 사항이다. 초인이 초인이 아닌데 초인이 되어 군중을 이끌면 세상은 허황된 믿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히틀러처럼 말이다. 군중이 초인을 모르는데 초인을 판단할 아무런 기준도 없는데 어떻게 초인이 이끄는 사회가 올까? 불가능하다.

 

P124

이후 카잔차키스는 작가로서, 정치가로서 평생 조르바와 같은 삶을 지향한다. 그는 조르바로 상징되는 원시를 문명과 결합시키고 선과 악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는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려 했던 사람으로 남게 된다. 카잔차키스의 일생은 조르바의 한마디로 요약된다. 어느 날 조르바는 살구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가 왜 묘목을 심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 그러자 조르바가 말했다. “나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삽니다.”

 

우리는 어릴 때 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는 말을 학교에서 배웠다. 스피노자가 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근거가 없다고 한다. 과연 누가 했을까? 사람들의 시선을 미래로 옮겨 놓고 오늘에 주어진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말인지?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말라는 말인지? 해석하기에 따라 달리 들린다. 아무튼, 조르바의 삶이 더 좋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난 매일 나무를 심고 싶지는 않으니까!

 

P125

얼핏 조르바는 제멋대로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르바는 가치관이 아주 뚜렷한 사람으로 세상과 몸으로 부딪히며 인생을 배워왔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순간 우리는 , 이런 삶도 존재하는구나, 이렇게 살아도 참 좋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강요한 윤리가 아니라 나의 윤리대로 살아가는 자유인, 그가 바로 조르바다.

 

사회의 윤리와 나의 윤리가 충돌할 때 힘들어진다.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어 보면 충돌을 회피하는 방법도 알게 되겠지만 마음은 힘들 것이다. 자신의 윤리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자연의 윤리인가?

 

P126

궁금해하는 에게 조르바는 항아리를 만들 때 거추장스러워서 잘라버렸다고 알려준다. 그는 절대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다. 조르바의 조르바다운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바로 이 이야기다.

 

조르바를 읽으면서 참으로 기이한 인간이다 생각한 부분이다. 그래서 좋은 그릇을 만든 것인가?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니었을까?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까? 그의 성정에 대한 나의 판단은 이 부분에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머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으로 조르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P126

결국 중요한 것은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유다. 요리사, 도공, 광부, 잡화상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조르바는 이미 그런 진리를 알고 있다. 하지만 크레타의 독립군으로 터키와의 전투에 가담했던 조르바에게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왜 씨앗은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뜨거운 피와 더러운 거름을 필요로 하는지. 왜 진창에서 피투성이로 굴러보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는지. 그래서 조르바는 60에도 여전히 떠돌아다닌다. 삶 속에서 괴로워하며 더듬더듬 자기 길을 찾아가기 위해, 그렇게 구원을 찾기 위해.

 

차라리 혼란의 시대에 태어났다면 세상살기는 힘들었어도 재미있었을 것인데 말이다. 요즘은 머누 안정적인 세상이다. 일면으로 보면 태평성대다. 과연 이 시대는 얼마나 갈 것인지? 세상에 전쟁에 대한 준비가 없어지면 굶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다.

 

P126

는 우리가 짐승이라는 걸 알고 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 이기심이라는 걸 안다. 그러면서 짐승은 우리의 현실이고 인간은 우리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짐승이라고 해서 짐승으로 남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P127

는 자기가 읽었던 책에 갇히고 자기가 쓰는 언어에 매여서 누군가에게 배운 삶을 살고 있다. ‘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진실한 삶이고 는 조르바에게서 그것을 본다. 삶의 진창 속에서 뒹굴고 있는 조르바. 인간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불신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조르바.

 

모든 것을 몸으로 배울 수는 없다. 마음만이라도 배우자. 조르바

 

P127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타파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속에 살면서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다. 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 같은 보랏빛 바람에 둘러싸인 구름이다.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확실한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하다.

 

P128

나는 보다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헤헤, 있다고요? 어디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설명할 수 없어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보여줄 것이 없는 것이겠죠.”

 

P128

조르바는 학교 앞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말도 잘한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러시아 친구들하고는 몸으로 말을 한다. 사랑을 나눌 때처럼. 사랑할 때는 매 처음에는 말로 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글로 쓰고 글이 통하지 않으면 창가에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마저 통하지 않을 때 바로 춤이 등장한다. 그래서 춤은 원시의 강력한 언어다.

 

P129

마치 고무로 만든 사람처럼 그는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정복하고 날아가려는 듯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보고 있으면 늙은 몸 속에 그 몸을 들어다 어둠 속에 유성처럼 날리고 싶어 안달하는 영혼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공중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땅으로 덜어질 때마다 그의 몸은 몹시 흔들렸다. 그래도 그의 불쌍한 육신은 다시 더 높이 뛰어올랐다가 쉴 새 없이 다시 땅에 떨어졌다. 조르바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은 놀라우리만치 비장했다. 그는 소리도 더 이상 지르지 않았다. 이를 악문 그는 불가능을 이루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조르바! 조르바! 그만해요. 그만하면 됐어요.” 이윽고 조르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의 얼굴은 행복에 빛나고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은 이마에 들러 붙었고 갈탄 가루와 뒤섞인 땀방울이 뺨과 턱으로 흘러내렸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잠시 후 그가 중얼거렸다. 이제 좀 살겠네요. 피를 좀 쏟아낸 기분입니다. 이제 말할 수 있겠어요.”

 

P130

조르바에게 춤은 기쁨뿐 아니라 슬픔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 앞에서 춤을 췄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리는데도 그는 춤을 춘다. 그의 행동은 비상식적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행동. 조르바에게 춤은 유희나 놀이 같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저 가장 진실한 자기표현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슬퍼도 춤을 추고, 기뻐서 춤을 춘다.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슬픈 순간의 춤은 일종의 살풀이인 것이다.

 

조르바의 춤을 보고 나도 춤을 추고 싶어졌다.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P130

나는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마음이 심란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되기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들에 변명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미적지근한 데다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행이었다.

 

똑똑, , 뭐하니? 그냥 미적지근한 몽롱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 그래서 되겠니? 어쩝니까? 하고 있는 게 요모양 요꼬라지인데요! 나와!, 왜요? 그냥 나와! 어디로 가게요? 아무튼 나와! 싫어요. 나오라니깐. 그러고 있겠지 아마도.

 

P131

하느님, 회사의 이익 그리고 과부가 조르바의 머릿속에서는 아무 모순도 없이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갈등은 넘는 포용력이 있어야 조화를 찾을 수 있다. 그 포용력을 감당할 사랑이 있어야 한다.

 

P131

옷을 입고 바닷가로 나가보았다. 빨리 걸으니 위험이나 죄악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아침에 오지도 않은 미래를 엿보려던 내 헛짓이 신에 대한 모독 같았다.

 

P132

나비의 연약한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 오늘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두르지 말고 안달하지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바위에 앉아 새해 아침을 생각했다. 그 불쌍한 나비라도 내 앞에 나타나 날개를 움직이며 내 갈 길을 알려준다면 좋을 텐데.

 

P132

사실 사람들은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안달하며 되지 않을 일에 힘을 쏟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고 우주의 리듬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들에게는 힘든 일이다. 억지로라도 빠른 시일 내에 뭔가를 이루고 싶어하는 욕망과 욕심이 부작용과 부자연스러움을 낳고 결국 우리는 슬픔과 후회 속으로 끌려들어 가게 된다.

 

P134

나이 먹어가는 것을 인정하는 건 정말 창피한 노릇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별짓을 다하는 거죠. 더워서 바닷물에라도 뛰어들고 나면 감기에 걸려 기침이 나옵니다. 그래도 두목, 나는 창피해서 기침을 꾹꾹 삼켜버리고 맙니다. 내가 기침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없을 겁니다. 두목은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만 그러는 줄 아시겠지만 아니에요. 나 혼자 있을 때도 그럽니다. 나는 조르바 앞에서도 창피하거든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조르바 앞에서도 창피하다는 겁니다.

 

이동희 앞에서도 창피하다는 겁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 삼가 할 수 있고 그만둘 수 있다면 좋겠다. 이동희 앞에서 이동희가 창피하지 않게 하고 싶다.

 

P134

그러나 그도 나이 먹는 것은 두렵다. 나이 먹은 표시가 날까 봐, 나이로 인해 자유롭지 못한 육체가 될까 봐.

 

P134

조르바는 편지를 끝맺으면서 자신은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라고 묻는다. 사실 조르바는 여자든 남자든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135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 왜, 어째서라고 묻는 조르바, 그는 책에 적힌 지식이 딱딱한 죽은 지식이라고 말하고 는 바로 그 조르바에게서 살아 있는 지식과 지혜를 배운다.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조르바다. 그러니 그는 보통 사람과 다른 것들을 체득할 수밖에 없다. 그는 벌거벗은 원시의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P135

그런 그녀를 다시 여인이게 해주고 현재를 가지게 도와준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조르바와 오르탕스 부인의 관계가 사랑인지 아닌지.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이 든 사람들의 추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핵심에는 서로가 베터 퍼슨, 즉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도 포함된다. 왠지 이 사람하고 있으면 내 마음속에 선함이 가득 차고 인류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고 기쁨이 가득 차는 것. 그런데 오르탕스 부인에게 삶을 제공한 사람이 조르바이니 이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 있을까.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다. 조르바의 사랑은 철학이 있는 사랑이다. 과거가 있는 여인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은 조르바는 꼼짝없이 그녀와 결혼해야 할 위기에 처해 있다.

 

P137

그래요. 당신이 그 잘난 머리로 다 알아듣죠.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저놈은 틀리다.’ 그래서요?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은 뭘 하는지. 그저 침묵하죠.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마치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도대체 뭘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조르바는 자신보다 많이 아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말뿐이다.!’라고 일갈한다. 이 말을 하는 동안 네 심장이 뛰고 있느냐, 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느냐? 네 몸이 메 말에 반응하고 공조하느냐?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해라. 몸으로 하면 모든 것이 따른다. 이런 의미일 것이다. 사실 리더십은 모범이다. 모범이 곧 리더십이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거룩한 십자가난 낡은 기둥에서 떼어낸 나무조각이나 다를 것이 없다.

 

P138

사실 조르바는 주어진 삶에서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질문한다. 이 질문이 바로 그럴듯한 답을 이끌어내는 위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답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질문에 익숙한 사회, 질문이 더 위대한 사회로 옮겨갔으면 한다.

 

P140

내 조국으로부터 구원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원받고, 돈으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나는 짐을 덜어내기 시작했어요. 가지는 족족 덜어버리는 거죠.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었습니다. ,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해탈하는 방법을 찾은 겁니다. 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가지는 족족 덜어버린다. 가지는 것은 쟁여놓고 안 풀려고 쌓아놓으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것에 정신이 매여서 헤어나질 못한다. 덜어버리는 거죠!

 

P141

조르바! 이리 와봐요! 내게 춤 좀 가르쳐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좋아요! 이리 와요!”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변했어요. , 놉시다!”

 

, 놉시다!

 

P142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아요. 당신만큼 사랑해본 사람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은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부족해요. 춤으로 보여드리지. , 갑시다!” 그가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마치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그는 하늘에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쩌시려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고 날아오르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날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빠르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P143

모든 것이 실패하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드는 해방감과 성숙이 두 사람을 지배했던 것 같다. 그래서 는 이런 얘기를 한다. “내 혈관 속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가슴은 선한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양이었던 사람이 사자가 되었다. 인생의 슬픔은 잊히고 고삐는 사라졌다. 짐승이고, 하느님이고, 모두가 인간과 화합하는 우주의 일부가 되는 기분이었다.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 놉시다!” 가 아니라 마치 조르바가 말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친 것과 해탈은 백짓장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P145

두목, 내가 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산투르를 켜려면 마음이 느긋해야 해요. 한 달, 아니면 두 달? 그 정도는 지냐야 켤 수 있겠죠. 그때야 우리 두 사람이 영원히 이별한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겠지요?” “영원히요!”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는 이 엄청난 말을 혼자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말이 되어 나올 것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몹시 놀랐다. 그래요, 영원히지요. 다시 만나자느니 수도원을 짓자는 것은 병든 놈을 일으켜 세울 때 하는 말이죠. 나는 그런 말은 믿지 않아요. 그런 것은 바라지 않으니까. 우리가 그런 위로나 주고받을 만큼 나약한 계집들입니까? 물론 아니지. 그러니 우리는 영원히 헤어지는 겁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영원히 작별이다. 빠이 빠이

 

P145

아니에요. 두목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르죠. 그것뿐이에요. 두목, 당신은 긴 줄에 묶여 오고 가면서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버리지 못했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에요.”

 

묶인 줄이 길다고 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서 자랑질이다. 줄이 좀 길다고. 그래서 자유롭다고. 내가 친구에게 한 행태다. 뭐가 길지?

 

P146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것을 도박에 걸어야 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좋은 머리가 있으니 잘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상점 주인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스러운 상점 주인이지요. 가진 것을 모두 걸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두니까요. 이러니 줄을 자를 수는 없지요. 아니, 아니야! 더 붙잡아맬 뿐이지. 줄을 놓쳐버리면 머리라는 바보는 허둥댑니다. 그러면 끝장이죠.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는다면 살맛이 나겠어요? 노란 카밀레 맛이죠. 멀건 카밀레 차 말이오. 럼주 맛이 아니지요. 이 줄을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148

잠깐만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것이 와서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 하려거든 빨리 꺼지라고 이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려주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 한 것이 있어요. ,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P148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거칠게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붙잡고는 먼 산을 바라보면서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P148

어떤 삶에 던져지든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르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뭔가를 깨달아가며 생의 도약을 하던 사람, 현실 도피란 없는 사람. 나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 생각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아마도 뇌와 심장이 누구보다 가까웠을 사람. 마초 중에 마초고 고집도 세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던 사람. 마냥 불사신 같던 조르바가 죽었다 생전에 하고 실은 일을 모두 해본 조르바는 죽음의 순간 아직 자기가 해보지 못한 것이 많다고 아쉬워한다. 그럼에도 그에게 죽음은 환희였을 것이다.

 

P149

우린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건 물리적 변화고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 변화고 포도주가 성체로 쓰이는 것은 최후의 변화라고 얘기한다. 우리의 목표는 성화, 메토이소노다. 라만차의 풍차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던 돈키호테. 우스꽝스럽고 무모한 도전의 대명사이지만 조르바가 말했듯이 바보가 되지 않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할 수가 없고, 그러면 진정한 자유도 얻을 수 없다. 남들은 바보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솟구치는 마음의 진실을 따라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P150

그로 인해 나는 묘비명에 이렇게 썼다.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P151

인간들은 공격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등하게 인간이 그런 공격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인간의 진화는 육체적인 것에서 문화, 도덕, 정신적인 것으로 진행되어왔다.

 

P151

우리는 불의의 바퀴에 희생자들의 상처를 묶는 붕대에 불과해서는 안 된다. 그 불의의 바퀴가 멈추도록 바퀴에 쐐기를 박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정의는 결코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우선 불의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느껴야 한다. 난 아직 이런 느낌을 느껴보질 못했다. 공감하지 않으려 했다. 애써 피해 왔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비겁하게 만들어 왔다. 그러면서 어딘가에는 씀이 있다고 애써 변명을 해 왔다. 쐐기는 어떻게 박을 것인가? 행동해야 한다. 바퀴 앞에서 바퀴를 붙잡던가 망치로 쐐기를 박던가 무엇이던 해야 한다. 비겁한 놈,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다.

 

P152

정의의 문제는 늘 그 시대의 눈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은 악을 응징함으로써 선을 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오직 세상 속에 선을 확대하고 선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 사례로 구현함으로써 사람들을 일깨우고 참여하게 만든다. 폭력을 응징하는 폭력이 정의가 아니듯, 테러를 응징하는 테러 도한 선이 아니다. 뒷골목 조무래기 깡패도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그렇게 한다. 그래서 힘은 곧 선이 아니며,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며, 역사의 교훈이었다. 잘못 사용된 힘처럼 위험한 죄악은 없다.

 

힘있는 사람은 외롭다. 그래서 어쩔 줄을 모른다. 불안하다. 그 힘을 주체를 못한다. 왜 자기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힘이 자기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그 힘이 그 힘을 맡긴 사람을 위해 쓰이게 노력한다면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을 것이다.

 

P154

가난에 관해서라면 라스네르보다는 도스토옙스키가 훨씬 잘 알았다. 도스토옙스키는 끊임없이 빛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1865년 그는 돈 문제를 잊고 집필에 집중하기 위해 독일 비스바덴으로 떠났다. 거기서 그는 또다시 도박에 빠져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은 순간 <죄와 벌>이 탄생했다. 머릿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빈털터리가 되는 것과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 틀로 짜인 것이다. 토스토옙스키는 궁핍 속에서 집필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1866 1 <죄와 벌> 1부가 <러스크베스트니크>라는 문예지에 실렸다.

 

P157

라스콜리니코프는 허둥대며 밖으로 나왔다. 마음의 혼란은 더욱 커졌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무엇인가에 놀란 듯이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가까스로 거리로 나오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혐오스러운 짓인가. 내 머리 속에 그런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니. 이 끔찍한 생각을 꼬박 한 달 동이이나 하다니, 정말 싫다. , 끔찍해.”

 

범죄의 시작은 자기 혐오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니 자기 사랑을 키워야 한다.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스스로를 혐오로부터 건지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한다.

 

P157

작가의 인생처럼 병적이고 음산한 분위기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음침함 속에 드러나는 도스토옙스키의 매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형 취소 직후에 형한테 보냈던 편지를 읽어보아야 한다. “, 나는 기운을 잃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서 살든 그것 역시 삶이고 삶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떤 재난이 몰아닥친다 해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바로 거기에 인생의 과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스토옙스키는 어둡고 음산한 가운데도 기대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P160

라스콜리니코프가 아무 원한도 없이 살인에 나선 이유는 뭘까? 그 답을 열려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나폴레옹과와 이과. 이과는 말 그대로 사람의 모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이를 의미한다. 반면 나폴레옹과에 속한 비범한 인물들은 선악을 초월한 존재들로, 새로운 윤리, ,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살인, 방화, 파괴 등이 허용된다. 이는 벌벌 떨면서 기존의 질서를 쫓아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윤유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 같은 사람은 이 같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비루하고 끔찍하고 간악하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없으니 자신처럼 나폴레옹과에 속한 사람이 인류를 위해 죽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생각을 실행한다.

 

P161

우선 죄와 벌이 집필되던 시기는 1860년대 중반이다. 그런데 그보다 5년 전쯤에 러시아에 농노해방이 일어나게 된다. 해방된 농노들이 대거 도시로 흘러들어 도시 빈민을 이루게 되고 제정러시아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놓인다. 곳곳에서 지주에 대한 살해 협박이 난무하고 실제로 도스토옙스키의 아버지도 농노에게 살해되었다. 혼돈 속에서 사회와 정의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작가는 자신과 같은 고민에 횝싸인 주인공을 내세운 것이다. 대의를 위해 살인하는 창백한 살인자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탄생했다.

 

P165

대체로 잘 이해했지만 정확하지는 않군요. 나는 비범한 사람이 불법한 행위를 저질러도 된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렇게 암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말한 비범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장애를 초월하는 권리를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공식적인 권리는 아니라 자기 양심을 뛰어넘을 권리입니다. 그것도 그의 사상이 인류를 위한 신념을 인정받을 때나 인정되는 거죠.”

 

P166

그렇군요.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도 좋을 비범한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라스콜라니코프는 같은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새로운 사상을 제창하는 선구자, 아니 새로운 이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위대한 천재, 인류의 참된 완성자는 몇 억 명의 인간이 살다 죽어간 뒤에야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객관화가 불가한 것은 결국 허상이 된다. 환상을 만들게 된다.

 

P170

소냐에 대한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아마 처음부터 사랑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마음의 상처, 영혼의 타락, 자신은 구제받을 수 없다는 생각 등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아니었을까? 거리의 여인이 되어버린 소냐는 종교로 구원받을 수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성경 구절을 읽어달라고 하고 소냐는 라자로의 부활을 읽어준다. 라스콜라니코프는 살인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구원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

 

P171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 포르피리는 라스콜라니코프의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에게 연민도 보인다. 포르피리는 법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법이란 권리와 자유를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정의의 최전선에 세워둔 첨병이다. 하지만 법으로 정의가 완벽하게 지켜지는 것일까?

 

P172

그럼, 그럼 이렇게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낫겠어요. 난 자만심이 강하고 질투심도 많으며 근성이 삐뚤어지고 비열하고 집념이 깊은 사내라고 말이오. 어쩌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소냐, 강한 자만이 권리를 갖는 거에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자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예요. 허리를 굽히는 자만이 권력을 주울 수 있어요. 왜 이토록 불합리한 세상의 꼬리라도 흔들어 보려는 사람이 없을까요? 그래서 결단을 내렸어요.” “나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그 일을 한 거예요. 오로지 나를 위해 죽였소.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어요. 내가 평범한 인간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어요.”

 

P173

안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작정이에요? 무엇을 믿고 무엇을 외치며 살아갈 건가요?”

 

P174

그래도 내가 감옥에 간다면 면회 와주겠어요?” 물론이죠. 가고말고요 두 사람은 폭풍으로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처럼 슬픔에 잠긴 채 나란히 앉았다. 그는 소냐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느꼈다. 이렇게까지 사랑받고 있다니 이상하게 쓰리고 아릿한 기분이었다. 그가 소냐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자 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소냐를 만나면 자신의 고통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이 온통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느끼자 오히려 더 불행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알아서 행복하지만 그 마음을 지켜줄 수 있는 처지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비통함에서 더 불행해지는 느낌. 돌이킬 수 없지만 나아갈 수도 없는 좌절감.

 

P174

이 책에서 라스콜라니코프가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다. 선과 악을 가를는 정의란 무엇일까? 존 롤스의 정의론을 보자 롤스 이전 선양의 정의론은 대부분 공리주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다수에게 공평한 일이라면 소수가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하버드 대학의 정치철한 교수였던 존 롤스가 정의의 원리에 대해서 두 가지 주장을 하게 된다. 하나가 평등의 원리다. 이는 정의의 기준이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된다는 원리다. 따라서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정의의 원칙에 위배된다. 두 번째 정의의 원리는 기회 균등의 원리다. 이는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불평등이 용인된다는 것이다.

 

P175

라스콜라니코프가 최소 수혜자들에게 정의를 찾아주기 위해서 그들을 착취하고 있는 노파를 죽였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정의인가? 라스콜리니코프는 여전히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소냐의 발에 키스를 하면서도 머리로는 여전히 나는 이를 죽였다. 죽여야 될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허무주의적 초인주의 같은 것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P176

소냐는 아무 말 없이 서랍에서 십자가 두 개를 꺼냈다. 이제 내가 감옥살이를 하면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셈이네요. 그런데 왜 우는 거죠? 당신이 울면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요?”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감동이 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동안 그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이 여자는 왜 나를 위해 우는 걸까? 어째서 어머니나 두냐처럼 나를 감싸는 걸까? 유모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P177

그는 센나야 광장으로 들어섰다.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서 당신이 피로 더럽힌 땅에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말해요. 그러면 하느님이 당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거예요.” 문득 소냐가 한 말이 떠오르자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는 광장의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환희와 감격을 느끼면서 땅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또 한 번 절했다. 그는 50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소냐를 보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의 비장한 행진을 계속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가 자기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이 벅찬 감동으로 끊어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운명의 장소에 다다르고 있었다.

 

 

P180

나는 정의가 지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의미다. 그 동안 정의는 법을 통해 집행되어왔지만 사실 법은 부자와 권력자에게는 늘 유리하고, 가난하고 힘 없는 하층민들에게는 늘 불리하게 작동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현실을 묵인해왔던 우리는 모두 공법이다. 이제는 모두 사람에게 공평하게 정의가 집행되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P180

법은 정의를 판결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며 유동적인 기준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법을 대신할 정의의 기준으로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죄와 벌>을 통해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P181

비참할 때 행복했던 때를 회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는 법이지요. 어느 날 우리는 란첼로토에 대해, 사랑이 그를 어떻게 옭아맸는지를 읽고 있었는데 연인이 열망하던 입술에 입을 맞추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이 사람은 온통 떨면서 나에게 입을 맞추었지요. 그 책을 쓴 사람은 갈테오토였고, 우리는 그날 더 이상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습니다.

 

P181

세상을 밝히는 아름다운 단어는 무척 많지만 으뜸은 사랑이 아닐까 한다.

 

P183

이탈리아 문예주의자 데상티스는 단테의 신곡과 대비되는 인간의 노래라는 의미로 데카메론을 인곡이라고 불렀다. 단테가 높은 이상을 내걸었다면 보카치오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대상과는 거리를 두고 미소와 풍자를 섞음으로써 근대 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P188

살아생전 나쁜 짓을 일삼던 차펠레토가 죽어서 성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첫 번째로 데카메론에 실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테나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처럼 르네상스 초창기 인물들에게 종교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보카치오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 것 같다. 아니면 기만과 위선을 까발리겠다는 선전포고일지도 모르겠다. 차펠레코처럼 겉만 번드르르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진 악당들이 당대의 종교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고발일 수도 있다. 혹은 지독히 나쁜 인생을 살았어도 신은 항상 구원과 용서를 베풀 준비가 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P193

수행하는 수도사나 수녀나 승려에게 이성은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유혹이고 장애물이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항상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지족선사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근현대로 넘어오면 경봉스님의 일화도 유명하다. 한 여인이 내를 못 건너겠다며 업어달라고 하자 경봉스님이 나서서 선뜻 그녀를 업어준다. 은근히 질투심이 일어난 다른 승려가 어떻게 스님이 여인을 업어줄 수 있느냐고 하자 경봉스님은 아니, 너는 아직도 그 생각을 하고 있나? 나는 벌써 잊어 버렸는데라고 대답한다. 수행의 깊이를 드러내는 일화다.

 

P199

신으로, 종교로, 도덕으로 덮어도 결국 인간의 본성은 감출 수 없는 것일까? 물고 물리는 삼각관계에 빠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연적에 대한 미운 마음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질고 잔혹한 위계를 통해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아름답지 못하면 남은 둘이 잘되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며 상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다. 결국 삼각관계는 완전히 파괴되고 잔인한 상처만 남게 된다.

 

P199

사랑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직 관계만을 원할 뿐, 관계를 통해 다른 것을 원치 않을 때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집착으로 이어진다. 사랑이 집착으로 흐르지 않게 막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가 아니니 집착하는 순간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되 집착하지 않는 것, 이 어려운 존재 방식이 인간 삶의 과제가 아닐까? 주어진 본성 속에서 개인에게 남겨져 있는 그 선택에 따라 우리는 성자도 악한도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 그 스펙트럼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것 같다.

 

자신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어떤 상태일까? 오직 관계만을 원할 뿐, 관계를 통해 다른 것을 원치 않을 때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순수한 사랑만이 숭고하고 그래서 그러한 순수한 사랑을 해야 하나? 성자도 악한도 아닌 일반인으로서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밀당이라도 해야하나.

 

P205

어떠냐, 이 거짓말쟁이야. 다리가 둘이란 것을 알겠지?” 키키비오가 우물쭈물하더니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나리는 어제저녁에 훠이, 훠이하고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셨더라면 그 학도 한쪽 다리마저 내놓았을 텐데요.” 쿠라도는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이제까지의 노여움을 털어내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키키비오, 네 말이 맞다. 그랬으면 되었을걸.” 키키비오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재난도 면하고 주인과의 사이도 원만해졌습니다.

 

두려움이 걷히고 안도가 밀려온다. 한번 잘못한 농담은 참 수습하기 어렵다. 하지만 끝까지 농담으로 가야 한다. 한 순간 진지해지면 애초에 모든 것이 농담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농담으로 시작한 것은 농담으로 끝낼 수 있어야 한다.

 

P205

농담이 성공할 때 친교는 두터워진다. 친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웃는다면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소중한 일이다. 우리가 같이 웃는 그 순간 뿌리 깊은 인간적 갈망이 충족된다. 같이 느끼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서로에게 닿는 것이 바로 농담인 것이다.

 

P208

남편의 질투가 오히려 아내의 불륜을 부추긴 경우다. 질투에 눈이 멀어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남자들의 단순함, 오기 때문에 두 눈을 빤히 뜨고도 아내에게 번번이 골탕을 먹는다. 현실에서 여성의 지위는 지극히 낮았지만 이야기 속의 여인들은 통쾌하고 당당하게 남편들 우위에 선다.

 

웃음만 나온다. 여자란 요~ . ~ .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 . 그런 것인가? 남자들은 다 바보다. 여자 앞에서는 다 바보다. 모든 것을 던졌기에 바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발 그 바보스러움에 여자들이여 놀라지도 불평도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대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말쑥하게 이야기 하고 당신을 매혹하겠지만 그것은 유혹이지 사랑이 아니라오! 부디 바보라고 놀리지도 말아 주오!

 

P213

데카메론은 한마디로 인곡이다. 그 속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낯 뜨거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선악 판단을 초월한 이야기들 말이다.

 

P213

또한 데카메론에는 낙천성이 살아 숨쉰다. 보카치오는 페스트로 피렌체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나가는 지옥 같은 상황을 우리 인간이 뿌리내린 현실이라 생각하고 절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세상이 아무리 암담하더라도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바로 보카치오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일 것이다.

P215

재능이란 사랑만큼 신비한 것이다. 그것은 돌연 그것이 아닌 것들을 버리게 하고 아무 보상 없이도 온몸을 바치게 한다. 또한 욕망처럼 커다란 자기 격려는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통해 우리는 유일한 자기가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다짐이 없이도 우리를 늦게까지 깨어 있게 하고, 새벽에 일어나게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다른 일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것은 떠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요즘 레이스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데 더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그런 것인가?

 

P21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테마는 뭘까?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인지 사랑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지만 완벽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사랑의 한 부분밖에 말하지 모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사랑의 정의 중에 프랑스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샤토브리앙의 말이 인상에 남는다. 사랑은 커지지 않는 순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사랑의 방법과 언어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자니 사랑에는 정말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삼라만상이 변한다. 매 순간 변한다. 나도 변한다. 그녀도 변한다. 우리 사랑은 영원할까?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면 매 순간 노력해야 한다. 나도 변했고 그녀도 변했으므로. 결국 사랑은 정진해야 할 수행의 한 방법이다. 사랑하려면 나를 바쳐야 하는 것이다. 머리로는 돌아가는 이 말들이 왜이리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걸까? 난 심장이 없나? 나의 이 덤덤함은 뭐지?

 

P216

<향연>의 주인공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다. 사실 이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진 것으로 소크라테스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문답법을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고 다녔던 소크라테스, 그리고 철학은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모두 우주의 본질을 파헤치던 자연철학자들이었고 소크라테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학이 시작됐다.

 

P219

한마디로 사랑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P220

그는 인간의 영혼을 아름다움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동물의 몸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 아니 존재하는 모든 것에도 깃들여 있습니다. 의술이란 충족과 배설을 둘러싸고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랑의 현상들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들 가운데 아름다운 사랑과 추한 사랑을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이 최고의 의사입니다. 변화를 일으켜서 한 종류의 사랑을 다른 종류의 사랑으로 바꾸어주거나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이야말로 명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P222

원래 사람은 둘이 한 몸이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가 붙은 세 종류의 성이 있었다. 완벽한 존재였던 인간에게 위협을 느낀 신이 인간을 갈라놓는다. ‘반쪽을 찾아 다닌다는 말은 바로 향연의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완벽한 존재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그 결핍, 소외, 부재에서 욕망이 생겨났다. 이는 서양철학의 중요한 가설로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시작되었다.

 

결국 가설에 따른 논리 전개였다는 말인가? 만약 인간이 완벽한 존재라면? 그걸 깨닫지 못할 뿐이라면? 그러면 그 결핍, 소외, 부재에서의 욕망은 어떻게 설명될까?

 

P223

그러자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논리를 하나씩 깨기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지는 간단했다. 결국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동사이니 대상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에로스가 사랑한다고 하면 그 대상은 무엇일까? 바로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므로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에로스 자체가 아름답지 않아서다. 그러니까 에로스가 아름답다는 아가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P223

아름다움을 생성하는 강한 힘인 에로스, 사랑에 대한 빛나는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고전 향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자신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이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런 신탁이 나왔는지 고민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은 다은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 바로 무지에 대한 지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후 그는 현명한 자들을 찾아 다니며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준다.

 

P224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을 논박했던 것처럼 애로스는 아름답지도 않고 좋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추하거나 나쁘지도 않다면서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추하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은 전혀 갖지 못한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 가사자와 불사자의 중간인 정령이라고 주장한다. 에로스는 아버지가 풍요의 신인 포로스이고 어머니가 가난의 신인 페니아이기 때문에 충족과 결핍을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한다고 한다. 그래서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욕망은 충족보다 늘 한 걸음 앞서 간다고 말했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에 결핍이 일어나고 그 결핍이 다시 욕망으로 바뀌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학의 저주다.

 

왜 저주라는 표현을 썼을까? 무엇이 저주라는 것인가? 끊임없는 욕망의 성장이 저주인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에서 저주를 느끼는 것인가? 그래서 그 욕망의 끈을 끊고 해탈하라는 것인가?

 

P226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일반적으로 좋은 것과 행복에 대한 욕구가 모두 강력하고 교활한 사랑이지요. 하지만 축제든 운동 경기든 철학이든 다른 길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을 보고 사랑하고 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반면 여러 가지 사랑 가운데 하 가지 것을 추구하고 여기 전념하는 사람만이 사랑이란 이름을 독차지해서 사랑하고 있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리지요.

 

사람으로 치면 이 사람 저 사람 사랑을 뿌리고 다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것이네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랑을 하는 것인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인 것? 허영심에 사로잡힌 것인지?

 

P227

사랑에서 그 일부를 떼어내 거기에다 사랑이라는 전체의 이름을 붙여 놓고 또 다른 부분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플라톤은 사랑 자체, 그러니까 사랑의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 이데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한 단면에 사랑이라는 이름 전체를 붙인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을 한 사람, 한 무리, 그리고 인류 전체로 넓혀가다가 결국 사랑 그 자체에 이르는 것이다. 디오티마의 이야기는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린 플라톤의 철학이다.

 

P227

철학은 복잡해 보인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으면서 아이히만의 가장 큰 범죄는 사유의 불능,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철학은 사유다. 그리고 사유의 목적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생각만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한다. 대게 불이익이 생기고, 내가 위험해져도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용기만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한다. 철학은 사유를 통해 신념화하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역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람이었다. 철학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신념을 가진 체계적인 생각을 일상생활에 지혜롭게 적용하면 그것이 바로 철학적인 삶이다.

 

아는 바를 행하는 것이 철학이다. 당신의 철학은 무엇인가? 그냥 막 사는 것인가? 아니면 정돈된 생각이 있고 이를 지키기 위한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철학자이다. 그게 도대체 뭔가? 알고 싶다.

 

P227

무지에 따르는 어리석음, 무지로 인한 만용 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생각을 통해 옳은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행위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실용성이 아닐까 한다.

 

P229

향연에서 가장 중요한 의견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원래 하나의 완전한 존재였던 인간이 쪼개지면서 상실, 결핍, 소외, 분리, 부재함에서 욕망이 생겨났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욕망론이다. 두 번째는 디오티마의 욕망론이다. 반쪽을 찾는 욕망이 절대적이더라도 그 반쪽이 올바른 반쪽이 아니라면, 그래서 전체가 되더라도 선한 전체가 아니라면 욕망을 채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디오티마는 단순히 지식만이 아니라 지식도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적 임신, 이것이 지혜와 절제와 정의다. 지식에 대한 열정도 근본은 에로스에서 비롯된다.

 

P231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남녀의 사랑도 있고 부모 자식의 사랑도 있고 인류의 사랑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의 원형은 사랑 그 자체다. 사랑에 대한 이데아를 가져야 우리는 불완전한 현실 세계에서 자신을 성장 시켜 의미 있는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인류가 시험하고 있는 것은 결국 사랑의 실체를 알아내는 것이다. 긴 인류를 통해 신이 시험하고 있는 것은 사랑으로 인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사랑의 궁극의 실체는 무엇인가?

 

P233

우리는 향연을 읽으면서 극과 극인 육체와 영혼, 지혜와 지식, 그 사이의 어디쯤엔가 서 있는 우리 자신을 깨닫고 어디를 향해야 할지 그 지향점을 찾게 된다. 이는 고전의 아주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P233

사랑이 어떻게 냉정할 수 있느냐고, 쿨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랑 그 자체와 통할 만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도 있다. 우리의 사랑이 새로워질 때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이 자라고 그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처럼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면 우리의 사랑도 무한대로 커질 것이다. 그러니 사랑을 멈추면 안 된다.

 

P237

내 아들을 좋아하는 마음이나 늙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나 페넬로페이아를 기쁘게 해주었을 뒤늦은 사랑조차도 내 마음속에서 세상과 인간의 사악함과 고귀함에 대한 경험을 얻고 싶어하는 열망을 억누를 수 없어 나는 나를 버리지 않을 몇몇 동료와 함께 배 한 척을 타고서 망망대해로 나갔다. , 형제들이여, 태양 너머 인간이 살지 않는 나라를 경험하고 싶은 열망을 거부하지 마라. 그대들의 근본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덕과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P237

자넨 왜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왔나?” “불행을 찾기 위해서지요.”

 

P238

초라한 것, 불완전한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완전함을 향해 항해한다. 그래서 인생은 항해고 모험이다. 흰 구름이 비치는 푸른 바다가 갑자기 까매지면서 풍랑이 이는 장면보다 인생을 더 잘 비유하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행복한 삶을 늘 바라지만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기고 불운과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험이나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불운과 위기는 찾아온다. 그래도 우리는 신을 버리지 못한다. 누군가 커다란 파도에 떠밀려 바위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한 일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불행한 일을 만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 오디세이아에 흐르는 기조가 바로 이것이다. 10년간 방랑하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우리 인생의 축약판이다.

 

P239

그렇다면 두 작품이 무려 2700여 년이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경쟁력은 무엇일까?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삶의 방식은 전쟁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들어 내고 그들을 통해 우리와 닮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측 인간의 고뇌와 도전, 좌절과 꿈을 통해 인간 통찰의 정수를 담아냈다. 그것이 바로 이 두 작품의 매력이자 경쟁력이다.

 

P243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기를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콘스탄틴 카바비의 시 <이타카>의 마지막 구절처럼 이타카는 그 무엇도 나눠줄 것이 없는 불모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타카는 오디세우스의 여정이 시작되고 끝나는, 그리고 삶이 시작되고 끝나는 종착점이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마치 내가 오디세우스인 것처럼 가슴이 뛴다. 언젠가는 사랑에도 매이지 않는 오디세우스처럼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

 

P252

최고의 모험은 저승으로의 모험이고 최고의 시련은 죽음을 보는 것이다. 죽음 근처에 가보아야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아니, 삶과 죽음은 그렇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 죽음마저도 삶의 일부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는 파도와 풍랑을 헤치는 모험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까지 파고드는 내적 모험까지 담고 있다.

 

P255

스스로 자초하지 않은 것이라도 신이 내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피하지 않겠다. 자신이 얘기한 것이든 얘기치 않은 것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리라.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의 삶의 태도였다. 그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벌거벗겨져도 자기 운명에 최선을 다해 맞서며 지혜로운 해답을 만들어냈다.

 

P260

결혼은 무엇일까?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결혼이 연애와는 다르다고 했다.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반쪽이 재회하여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연애는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버리지만 결혼은 서로의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한 두 사람이 분리된 생활을 접고 하나로 사는 것이다. 결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만남이다. 자기로 인해 맺어진 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관계라는 신 앞에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시련 말이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남녀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그래서 결혼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구나. 결혼은 시련이다. 이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했거늘 그렇지 못했다. 오랜 연애의 결과 결혼을 한바 결혼과 연애의 차이를 몰랐다. 그래서 보다 나은 결혼의 꿈을 꾸지 못했다. 아직도 연애를 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봐야겠다.

 

P265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지닌 중요한 부정적 감정으로 복수를 다룬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그 시대 전사들에게는 게임의 룰이었다. 플라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비윤리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을 위한 교과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전산의 갑옷을 벗고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와 나그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었다. 왜냐하면 신은 항상 나그네의 초라한 복장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P267

죽을 때까지 항해할 운명을 타고난 그는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리스라는 척박한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기에 그리스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끊임없이 바다로 나가야 했던 그리스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다는 두려운 곳, 미지의 세상이었다.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수많은 괴물들은 결국 그런 두려움들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그런 두려움들을 모두 정복함으로써 바다에 대한 안내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오디세이아를 읽고 용기를 내서 바다로 나갔다. 오디세이아는 한때 그리스인들의 민족 시였고 지금은 인류의 고전이 되었다. 오디세이아는 모험과 바다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정리가 된다.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삶이라는 바다를 그린다. 현대인인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삶에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배운다. 절대 좌절하지 않고 행복을 찾아가는 법 말이다. 삶은 각본이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모험이다. 바닥에 처박히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런 추락은 미래에 벌어질 아주 좋은 일의 전조일 수 있다. 돌아보면 자신에게 닥쳐온 모든 일들이 좋은 일이었다던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말이 오디세우스의 모험에도, 그리고 우리의 모험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P270

탈무드는 인간 삶과 동떨어진 저 꼭대기의 신을 경배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더 높은 윤리적 차원을 확보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책이다. 율법은 삶을 제한하는 명령이나 경위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목소리이자 실천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유대인에게는 종교와 삶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을 이야기하지만 법학서가 아니고, 역사를 담았지만 역사서가 아니고, 신학서도 아니고, 철학서도 아니고재미있는 이야기로 문화, 사회, 경제 분야 등의 지식과 지혜를 두루두루 들려주는 이 책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탈무드는 인간의 지적 활동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인문서. 또한 탈무드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실제적 삶에서 거론되어온 문제를 주재로 삼아 역경을 극복하는 지혜를 담은 실용적 인문서다.

 

P271

그렇다면 탈무드의 지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수천 년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본성과 고뇌에 대한 물음, 문제의 근원과 해결법에 대한 물음 등을 논쟁하면서 얻은 지혜의 책이란 뜻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계속 질문하라고 말한다. 질문이 답보다 위대하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뭘 가르쳐 주셨니라고 묻는다면 유대인들은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드렸니?” 라고 묻는다.  그래서인지 탈무드는 정답을 알려주는 상식 책이 아니다. <Both Sides Now>라는 노래를 들어봤는가? 성숙한 지혜를 갖게 되면 한쪽에만 집착하는 습관을 벗어나서 상반된 측면을 모두 고려하게 된다. 탈무드는 진자의 추처럼 양극단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라고 말한다. 바로 중용이 탈무드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인 것이다.

 

P273

돈은 선도 악도 만능도 아니다. 선악 판단은 돈의 주인인 인간의 몫이다. 유대인 역시 중용, 즉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돈에 대한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버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돈을 버는 것은 쉽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은화는 둥글어서 이쪽으로 굴러올 듯하다가 저쪽으로 굴러가 버린다. 우리는 매일 돈을 좇지만 인생에서 그것 말고도 추구해야 할 것이 많다. 돈은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몰고 가지 않는다. 돈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돈이 인생을 환하게 밝혀준다고 여기거나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인간에게 돈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돈에 지배당하지 않고 돈을 지배하는 것이다.

 

P274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 반대로 속이 비었을 때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지갑이다. 한마디로 진짜 무거운 것은 빈 지갑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지니까.

 

P275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돈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만큼 돈에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고 싶은 곳, 입고 싶은 옷,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만 있다면 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P277

이런 충고가 있다. “사람은 나무처럼 단단하지 말고 갈대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네가 받은 모욕을 용서하라.어느 랍비는 잠자리에 들면서 나를 곤경에 빠뜨린 어느 누구라도 용서해주옵소서라고 기도드렸다. 말다툼을 줄이고 빨리 화해시킬 현명한 충고가 있다. “내가 친구에게 작은 잘못을 했다면 그것을 크게 생각하고, 내가 친구에게 크게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을 작게 생각하며, 그가 내게 작게라도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을 크게 생각하고, 그가 내게 큰 잘못을 했다면 그것을 작게 생각하라.”

 

P278

아렌트는 이런 평가를 남긴다. “누구에게든지 악의 평범성이 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악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에 무능력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 죄를 용서하라,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이 말을 실천하려면 생각의 힘을 따라야 한다. 사유하는 사람은 우선 잘못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고, 만약 잘못하더라도 뉘우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 아마도 유대인 중에는 나치의 대학살을 용서한 사람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모두 탈무드가 말하는 용서에 대해 한번 이상은 생각해봤을 것이다.

 

더 열심히 생각하자. 생각 없이 살았던 많은 부분들에서 놓친 부분들을 다시 바라보자.

 

P279

부모는 그저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해라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만약 아이가 스스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하면 후회 없이 노력하라고 조언해줄 뿐이다. 이처럼 아이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부모의 마음대로 뭔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 유대인 부모들의 교육 방식이다.

 

P280

아이가 이야기나 예화를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게 해라. 그래서 탈무드 속에는 지혜로운 예화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보다. 탈무드는 계속 말한다. 대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라. 그 대신 좋은 질문을 해라. 그래서 탈무드는 많은 질문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또한 탈무드는 친구를 잘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누구와 함께 인생을 살지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남을 초월하기 전에 자신부터 초월하라고도 말한다. 흔히 오늘날은 경쟁 사회라며 타인을 앞지르는 방법을 배우는 데 급급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경쟁 상대는 어제의 자신이다. 그러니 어제의 자신을 넘어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중요하게 탈무드는 자선, 그러니까 배려를 통해서 삶을 가르치라고 한다.

 

P281

우리는 영화 속의 찰리 채플린을 보면 웃지만 그 안에는 많은 울음이 섞여 있다. 채플린의 유머는 산업사회의 기계화가 불러온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인의 유머는 슬픔의 땅에서 싹튼 웃음이기 때문에 그 속에 눈물이 고여 있을 수밖에 없다. 눈물만으로는 살 수 없는, 웃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환경과 상황에 유머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P282

이런 유머는 급속한 성장을 거듭한 한국 사회에도 더없이 필요하다.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는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굳은 표정으로 작은 일에 죽을 듯이 화를 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에게 나쁜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정신적 근육이 정말 절실하게 필요하다. 정신적 근육을 키워주는 가장 훌륭한 운동기구가 바로 유머다. 눈물을 웃음으로 닦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P286

운이 좋아지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세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이유 없이 즐겁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꼭 이루고 만다. 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셋이야말로 행운을 불러들이는 열쇠다. 늘 즐거워하고 무엇인가로 바쁘고 목표를 향해서 애를 쓰면 당연히 운이 따르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마라. 그러면 언젠가 그 사람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도움을 받을 때 , 내가 운이 좋네라고 여길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이 베푼 일에 대한 보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이는 행운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기대대로 보답이 없으면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 그러니까 주고 잊어라!’ 또한 당장의 이익을 좇아 행동하지 마라. 그러면 그 순간에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 운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되면 잠깐 손실을 입을지 모르지만 언젠가 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운은 당신이 뿌린 씨앗이다.

 

P288

그렇게 궁지에 빠진 아들은 아버지가 얘기 했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막내아들은 남은 돈으로 음식을 장만해서 아버지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막내아들을 찾아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난 뒤 손님들이 말했다. “막내아들만이 아버지 친구들을 잊지 않고, 이렇게 챙겨주는구려. 만년에 재산을 다 잃어 아들에게 재산도 제대로 남겨주지 못했다던데…. 우리가 조금 보태주면 어떻겠소?” 글 자리에서 손님들은 각각 새끼를 밴 암소 한 마리씩과 돈은 조금씩 모아주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자 송아지가 차례로 태어나 막내아들은 그 송아지들을 좋은 값에 팔았다. 막내아들은 어느새 운이 붙어서 형들보다 부유해졌을 뿐만 아니라 옛날 아버지 보다 더 부자가 되었다.

 

P289

그래서 새는 다시 하느님을 찾아가서 왜 날개를 달아줬습니까? 짐만 될 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하느님이 말했다.내가 그걸 왜 짐처럼 달아줬겠느냐. 너 스스로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우리는 모두 저마다 날개를 가지고 있다. 날개의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그저 짐이라고 생각했던 날개를 펼치는 날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자기를 찾는 것, 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풀어야 될 가장 중요한 과제다.

 

P290

인생은 선물이며 도전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라는 식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만약 손익계산서를 가지고 셈한다면 인생은 결국 살만한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인생의 뜻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다.

 

P290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사랑받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고 학력으로 휘감고 몸을 치장하고 고혹적인 웃음을 가지려는 것은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사랑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주는 것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것이 넘쳐나는 환희다. 내 안에 살아 있는 떨림을 준다는 것이다.

 

P291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듯 사랑은 사랑으로만 교환되는 것이다. 사랑은 분리를 극복하고 서로 일체가 되려는 노력이다. 사랑의 불꽃이 이 가슴에 타오를 때 저 가슴에서도 사랑이 깃든 줄 알게 되니 사랑은 오직 사랑할 줄 아는 힘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다.

 

P291

에리히 프롬은 여기저기 흩어져 떠도는 사랑의 개념들을 모아 꿰맞추어 우리에게 사랑학을 제공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피상적인 접촉 외에는 진정한 관계에서 소외된 채, 소비하는 것을 행복 삼아 살아가고 있다. 세계는 우리의 거대한 식욕에 대한 커다란 유방이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며,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며, 그래서 영원히 실망하는 자다. 물질적인 대상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되고 말았. 스스로 사랑하는 힘을 상실하고 영화 스크린 속의 감상적 사랑에 도취된 사랑의 구경꾼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P293

프로이트에게 성적인 부분만 채워지면 사랑은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에리히 프롬은 거꾸로 사랑이 채워져야 성적인 것도 만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에리히 프롬처럼 사랑을 아주 고귀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과 짐승의 중간쯤에 있는 인간성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프로이트의 통찰력이 더 맞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P294

프롬은 우리가 사랑을 배우지 않고 생각만 하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오류는 우리가 사랑하는 법이 아니라 사랑받는 법을 먼저 배우려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자신이 사랑을 오래 못 하게 되면 환경을 탓한다는 것이다.

 

P294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가?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가? 아니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기술은 사랑에 대해서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그 핵심을 전달해주는 아름다운 책이다. 외로움은 인간의 조건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으로 외로움을 극복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쉬지 않고 연애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연 그렇게 외로움이 채워지는지는 의문이다. 에리히 프롬이 행위를 통해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듯이 그 사람의 행위를 보면 분리와 폐쇄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하는지를 알 수 있다.

 

P296

삶은 결국 성장하고 우리는 성장을 통해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간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리히 프롬이 생각하는 사랑의 확산이다. 재미있게도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둘로 갈라진 후 쪼개진 반쪽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서구 욕망론의 기본이었다. 그래서인지 에리히 프롬도 분리를 극복하는 힘을 배워나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프롬은 분리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도취적 합일과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 창조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부분적 해답일 뿐, 완전한 해답은 아니라고 한다.

 

P297

그런데 그런 동질화가 과연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 동질화라는 것, 여기서 표현한 대로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각을 나누고,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고 해서 우리가 같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는 절대 일체감과 동질감을 찾아낼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동질감과 일체감, 이 조화로운 감정은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오는 능력이 아니라 꾸준히 키워야 하는 능력이다. 마치 육체의 힘을 키우듯이 사랑할 수 있는 힘들을 훈련해야 한다. 이것이 에리히 프롬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이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수동적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빠지는 사랑, 그것이 바로 수동적 사랑이며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엄청난 기대감과 희망 속에서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런 사랑은 대부분 실패하도록 운명 지어졌다고 말한다. 서로를 알아갈수록 희미해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결국 사랑은 자기를 다 내준다는 적극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훈련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많은 상처와 실패와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배양되지 않는 것이다.

 

P297

자신의 개성을 안다는 것은 원래 자기 자신에 대해 안다는 의미다. 흔히 생각하듯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가 그럴 수밖에 없는, 타고난 힘을 아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개성대로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연인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그것이 평등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과 평등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

 

P299

받기보다는 주면서 행복해하는 것이 성숙한 사랑이다. 그래서 공서적 사랑이 미성숙한 사랑이라면 성숙한 사랑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랑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에리히 프롬은 생산적 활동과 비생산적 활동의 유일한 기준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오해받는 비생산적 활동들에는 재미있게도 착취형 행동들이 포함된다. 이는 연인이든 재산이든 권력이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음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저축형 활동이 있다. 이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불안해서 개미처럼 뭔가를 자꾸 쌓아두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쌓아둔 것에서 뭔가 빼주면 빼앗긴다는 생각에 상실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나눠줄 수 없다. 아주 인색한 사람들이 바로 저축형 인간에 속한다. 우리에게 가장 시사적인 것은 시장형 인간이다. 그들은 준 만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교환가치만을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이렇게 묻는다. 준 만큼 받아야 하는 사랑이라면 과연 생산적인 활동이냐고, 결국 지금 뭔가를 주면서 다시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시장형 인간일 것 같다.

 

P300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의 모든 활동은 일정하게 기성품화되어 있다. 정말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낸 것 같은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하나의 개인이며 단 한 번의 인생을 얻은 자임을 깨달을 것인가. 방법은 능동적으로 쳇바퀴를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도 능동적으로.

 

P301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존재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P301

능동적인 사랑에는 보호와 책임이 따른다. 어머니가 무기력한 아이에게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무조건적으로 주는 것처럼. 책임이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만 책임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 가족으로서 ,동료로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같은 인류로서 자신의 책임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책임감 없이는 사랑을 얘기할 수 없다. 더불어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책임은 쉽게 지배와 소유로 타락할 수 있다. 존경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즉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끝으로 어떤 사람을 존경하려면 그를 잘 알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보호와 책임은 지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맹목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을 파고드는 지식이 중요하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여 상대의 관점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P302

어린아이는 어떤 것을 알기 위해 분해하고 부숴버린다. 또는 동물을 해부하기도 하고 나비의 날개를 잔인하게 잡아 뜯기도 한다. 이런 잔인성의 동기는 더욱 깊은 것,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소망에서 나온다.

 

P302

사랑으로 그 사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까? 가학성 음란증, 즉 사디즘은 상대방의 비밀을 알아내 소유하기 위해서 아주 잔인한 방법을 쓴다. 어린아이들이 나비가 궁금해 나비의 날개를 찢는 것처럼 잔인한 짓을 벌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나를 던져줌으로써 나를 알게 되고 상대방을 알게 되고 마침내 서로 합일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의 행위에 있는 것이다.

 

P303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의 인생 초반을 지배하며 인생의 모범을 제시하면 아이는 그 모범 속에서 살다가 점차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어른이 된다. 아이는 체득한 어머니의 모성과 아버지의 부성을 내면에 간직함으로써 성숙한 어른이 된다. 그러니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다를 가져와서 내 안에서 종합하고 조화시켜야 한다.

 

P304

우선 프롬은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사랑이 붕괴되었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 시장형 인간들이 대거 등장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시장형 인간은 앞서도 말했듯이 교환가치에 집착하며 주는 만큼 받아내려고 한다. 네가 사랑해주는 만큼 나도 사랑해주겠다는 기브 앤드 테이크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하지만 이런 사랑은 프롬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아니다.

 

P305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사이에 나타나는 이런 차이는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원시종교 단계에서 인류는 모계 중심의 여신 사회를 이루었을 것이다. 여신은 자식이 좋든 싫든 나쁘든 선하든 무조건 사랑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가 부계 중심으로 옮겨가면 명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은 멸망하고 파멸하게 된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절도와 원칙과 규칙을 부과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사랑을 주지 않는 단계를 밟는다. 그런데 둘 다 완전하지 않으므로 자기 안에서 어머니 같은 모습과 아버지 같은 모습을 조화시켜야 비로소 성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했던 이야기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라서 한 번 강조해본다.

 

P307

가끔 우리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부부를 만나곤 한다. 그러면 우선은 저 말이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살다 보면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문제까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의견이 다르면 티격태격하게 되고, 티격태격하다 보면 서로 해서는 안 될 말도 하게 되고, 그러다 후회하고 화해하면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고 서로를 깊이 알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애써 문제를 만들지 않는다는 의미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껍데기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면 우리는 거짓 평화밖에 얻을 것이 없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투사적 메커니즘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고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나쁜 점, 부족한 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고는 마치 조언을 하는 것처럼 이것저것 고치라고 지적하고 결국은 싸움이 벌어진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투사적 매커니즘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P308

아직 젊다면 미래의 사랑을 위해서 그리고 지금의 사랑을 위해서, 만일 나이가 들었다면 옛 사랑을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현재의 사랑을 다지기 위해서 <사랑의 기술>을 읽어보면 좋을 거 같다.

 

P308

훈련의 요건으로 우선 정신 집중이 필요하다 내가 오직 이 일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잠깐 푹 빠졌다가 잊어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세 번째로 인내가 필요하다. 집중하는 매 순간들을 계속해서 인내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최고의 관심을 쏟아야 한다. 사랑의 기술을 익힐 때도 마찬가지다. 집중하고 인내하고 관심을 쏟아라. 그러면 사랑할 힘을 키워갈 수 있다.

 

P309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자아도취를 경계하지 않으면 상대방과 합일할 수 없다.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기 혼자로 족하기 때문이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술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객관성이다. 객관성을 찾으면 사랑을 2분의 1쯤 실천한 것이다. 두 번째로 객관성에는 이성이 요구된다. 세 번째로 이성을 사용할 때는 정서적으로 겸손해야 한다. 여기서 겸손이란 내가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 보고 나의 부족한 면과 좋은 점을 알아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비교를 통해 객관화 해야 한다. 그냥 남편이니 받아드리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가급적 빨리 해야 겠다.

 

P309

한편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에리히 프롬은 이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보편성이 자기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기애라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바꾸고 좀 더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프롬은 말한다.

 

P310

여기서 신앙은 자기 확신, 신념, 신뢰를 의미하지 않을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내면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믿어주려면 나의 신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행위에 대해 내 믿음이 없다면 사랑의 힘을 키워가기 어렵다. 자기가 흔들리고 있으면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다.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믿고 사랑하기 어렵다. 신앙은 결국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약속하고 지키려면 자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약속을 지키면 자기에 대한 신뢰는 점점 상승하게 된다.

 

P311

자기를 꽉 잡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관찰하는 것 말이다. 에리히 프롬도 우리에게 각자의 정신적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해야 된다고 말한다. 우울해지면 그 우울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물어보고 분노가 생기면 분노라는 정신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라고 말한다. 그 분노가 타당한 것인지,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 과거의 어떤 상황이 증폭된 것인지 등을 스스로에게 물어봄으로써 스스로를 믿고 신뢰하고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성인이 될 것이다.

 

40이 넘어서야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말이다. 회사에 매여 하루 하루를 살다 보니 내 생각과 행동에 대해 객관적인 feedback을 주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가끔 보는 친구들도 그렇고 회사 동료들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외부의 힘을 빌리기로 했고 나에 대해 심리 분석을 맡겨도 보고 나를 그 기준으로 분석도 해보았다. 나에 대해 더 잘 알아야겠다는 결론이지만 조금은 알게 된 것도 있다. 막연히 그러고 싶은 것과 실제 내가 그런 것들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나를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인데 정작 나 자신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P311

그럼 믿음이 생기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용기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과거의 자신과 단절한다는 의미에서 번지점프를 한다. 어떤 결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번지점프다. 그런데 번지점프에는 용기 외에도 내 발에 묶인 줄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있어야 한다.

 

P311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즉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삶의 기본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누구든 격리와 소유만이 자신의 안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방어 기구에 가두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고 그 가치에 따라 도약하고 거기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P312

공정성의 윤리는 중용과 혼동되기 쉽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격언은 다른 사람과의 교환에서 공정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격언의 본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의 좀 더 대중적인 표현이었다. 사실 유대교의 규범은 공정성의 윤리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 즉 이웃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이웃과 하나가 되라는 것이지만 공정성의 윤리는 책임감이나 일체감을 느끼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것이다.

 

P313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마디로 사랑하고 싶어도 세상이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세상의 원칙을 따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 세상이 어떻든 우리는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를 바꿈으로써 시작된다.

 

P315

남을 아는 것은 과연 똑똑하다 할 만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밝은 것이다. 남을 이기는 것과 과연 힘이 세다 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진정 강한 것이다. 그 자리를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오래 사는 것이다.

 

P315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마치 지구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의 문명으로 수렴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과정을 지배하는 두 개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나는 룰을 만드는 자가 룰을 따라야 하는 자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P316

글로벌 시대의 차별화의 원천은 자기다움이다.

 

P327

사람은 생긴 대로 살게 마련이다. 밤나무는 밤나무의 삶을 살고 감나무는 감나무의 삶을 산다.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열심히 자라 해마다 더 많은 밤과 감을 생산해낸다. 인가도 그렇다. 의상이 원효여서도 안 되고 원효가 의상이어서도 안 된다. 원효는 원효여야 하고 의상은 의상이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맞는 삶이다. 제 생긴 대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처럼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위로는 없다. 직장에서 또 가정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내기 위해 모두가 다 똑 같은 연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디에 있든 가장 자기다울 때 가장 풍성하게 기여하게 마련이다. 좋은 감나무인데도 열심히 자신을 키워 감을 주렁주렁 달지 못하는 감나무가 있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P329

지나고 나면 인생은 꿈 같은 것이다. 삶에는 정해진 아무런 목적도 없다. 삶의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삶 자체다. 여행의 목적이 목적지에 닿는 것이 아니라 여행 자체인 것과 같다. 하지만 인생이 현실만으로 만들어졌다고 여기지 말자. 현실에 갇히면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P329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가지고 태어난 것과 살면서 얻은 것, 현실과 꿈, 사실과 허구, 지금과 미래가 실처럼 얽힌 양극단 사이의 어느 점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힘겹게 느껴지는 바로 그때가 우리 안에서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가 된다. 시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라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신의 길을 따라 걷다가 혹시 새똥이 옷깃에 떨어지더라도 너무 화를 내지 말고 그걸 닦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마시길. 여러분이 현재 처하나 상황을 웃음으로 바라보면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될 테니까.

 

P343

김대성은 세 번의 탄생을 통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탄생은 바로 곰을 죽임으로써 발심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이 세 번째 탄생은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세속과 인연을 끊고 수행자의 길을 걸을 때는 용맹정진하겠다는 초심이 가득하다. 그러나 수도자의 삶도 역시 삶이기 때문에 점점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발심이다. 발심이 안 되면 수행자로서 끝까지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대성 역시 좋은 곳에 태어난 것으로 끝이 아니니 항상 마음을 다스리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곰의 꿈을 꿨던 것 같다.

 

발심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자주해도 괜찮을 것이다. 매일 한다 해도 좋을 것이다. 발심해서 정진하자. 매일 매일 발심하면 점차 자아지지 않을까 한다.

 

P344

그렇게 며칠이 지나 어느 날 어머니가 이전에는 거친 음식을 먹어도 마음이 편했는데 요즘은 쌀밥을 먹어도 속을 찌르는 것 같으니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답니다.  딸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어머니가 너무 속이 상해 소리 내서 통곡을 했답니다. 딸은 자기가 어머니의 배를 부르게 해드리는 것만 생각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은 생각지 못한 것을 탄식하면서 저렇게 껴안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P345

지은의 이야기는 효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물질적으로 편하게 해드리는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편하게 해드리는 것, 이 시대의 자신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 싶다.

 

P345

대붕은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산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간다.” 백범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다.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말고 우리의 갈 바,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험난한 시련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각오가 남다르다.

 

P345

물론 도전에 응한다면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도전은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팔팔열차도 청용열차도 아니다. 그것은 진짜 삶이다. 오직 거기에만 진짜 떨림이 있다. 결과를 미리 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삶에 용감하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순간에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면 어떤가? 한 번 울고 다시 일어나 걸으면 된다.

 

P346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그 꽃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내게 남편이 없음을 비웃는 것이다. 개구리는 눈이 불거져 나와 성난 모습을 지녔으니 이는 병상의 상징이다. 옥문은 여자의 생식기니 연자는 음이고 음은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이니 적병이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P348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신분도 천한 욱면이 열심히 염불을 하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굉장히 소박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를 계집종의 성불담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이면을 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 보는 단순한 이해 방식이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는 한번이라도 욱면처럼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P349

이것이 고전을 읽을 때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이건 불교 얘기니까 읽을 필요 없어’, ‘이건 옛날 애기니까 읽을 필요 없어라고 생각하면 우린 고전에 접근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시야는 나와 관계있는 극히 협소한 범위로 좁혀지고 만다. 그러나 고전을 읽으면서 나는 욱면처럼 살아본 적이 있나?”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금 당장 내가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고전에서 의미를 읽어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따라 독서의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P350

역사가인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는 과거의 눈이 아니라 현재의 눈으로 보아야 역사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삼국유사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몫이다.

 

P351

통치 권력은 사회를 모두 장악한 다음 획일적이고 복잡하고 촘촘한 규칙의 그물로 뒤덮어서 아무리 독창적이고 정력적인 사람이라도 군중을 초월하여 이 그물을 뚫고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런 권력은 생존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방해한다. 폭정화하지는 않지만 국민을 억압하고 생기를 잃게 하며 우둔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침내 국민은 한때의 겁 많고 근면한 동물로 전락하게 되며 정부는 그 목자가 된다.

 

P351

레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치란 대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수천 명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있는 곳에서,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P352

민주주의는 그 개념의 발상지인 그리스 시대부터 회의적이었다. 어리석은 대중에 휘말리는 정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을 거대한 비개인적인 힘이라고 부르거나 이름도 없는 너절한 인간들로 폄하해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현재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그럴듯한 장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가 E.H. 카는 그 이유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이 아닐 수 없고 개인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름도 없는 수백만의 사람들이야말로 많든 적든 간에 무의식적으로 협력하여 하나의 사회적 힘을 형성하는 개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에서 수의 문제는 늘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주의의 매우 핵심적 개념이다.

 

P354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처지를 당연한 자연 질서의 결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평등과 비참함이 있어도 두 계급 모두 타락하지 않고 안정, , 영광을 구가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어 계급 차별이 사라지고 인류를 갈라놓았던 장벽들이 무너지고 있다. 재산과 권력이 쪼개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성의 빛이 퍼지면서 모든 계급이 평등을 향해 움직이고 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P355

토크빌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두려운 점으로 다수의 횡포를 꼽았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가 자유롭기 때문에 무질서로 흐를 거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해악에 지나지 않고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는 노예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물처럼 촘촘한 규칙들 속에서 사람들이 창조력을 잃어가며 소시민화된다는 것이다.

 

P355

먼저 토크빌은 국민이 주권을 가지는 나라, 즉 민주주의 국가의 필수조건으로 언론의 자유를 꼽는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 사람들의 다른 생각을 알고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P356

그래서 편집자들의 견해는 독자들에게 별로 영향력이 없다. 이런 언론이지만 언론 자체의 힘과 영향력은 막강하다. 언론은 정치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정보를 통해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을 도와주고 지역 사회의 이해관계를 조정한다. 많은 출판물들이 같은 입장을 취할 경우 발생하는 여론의 압력을 이겨내는 것은 누구에게든 쉽지 않다. 그래서 미국의 많은 신문들이 개별적으로는 별로 힘이 없지만 전체적으로는 국민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을 갖는다. 언론의 자유가 주어지고 이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애착을 갖는다. 여러 견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현재로서는 최선의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자유롭고 급격히 변화하여 유행하는 사상을 접하기 쉬운 시대에는 절대적인 견해는 없어진다. 순교자도 없고 배교자도 없는 것이다.

 

P357

언론의 자유와 더불어 토크빌을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로서 집회결사의 자유를 손꼽았다. 그는 결사가 여러 사람의 노력을 결집시킴으로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고 이는 글로 쓰는 언어 이상의 효과를 낸다고 주장한다. 토크빌의 주장에 다르면 우선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규칙을 정함으로써 결사가 성립된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만나서 자기 집단을 대표할 대표자를 선출한다. 결사의 크기에 따라 그 영향력은 달라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사는 폭력적이고 비합법적인 힘을 행사하기보다는 합법적으로 여론을 통한 압력단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P358

미국은 주로 영국의 청교도들이 건립한 나라였다. 본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온 그들은 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미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태생적으로 평등과 자유라는 문화적 유산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거제도도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국민들이 참정권을 갖고 지도자를 뽑는 모습에 토크빌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P359

귀족정치에서는 상부 권력층이 부유한 사람들이라 오직 권력만을 바란다. 민주정치에서 정치가들은 가난하여 재산을 쌓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귀족정치의 지도자들은 돈에 대한 욕망이 크지 않아 별로 부패할 필요가 없지만 민주정치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다.

 

P360

토크빌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장점으로 공공정신과 준법정신을 꼽는다. 개인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평범한 사람들조차 공공의 이익을 위해 애쓰고 국민의 이름, 국가의 이름으로 정해진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P360

그럼에도 그들은 타운이나 카운티의 일에 열정적인 관심을 갖는다. 무엇 때문일까? 가장 큰 이유는 공공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하층민들은 나라가 잘살아야 내가 번영한다는 것을 잘 안다.

 

P360

권리는 중요한 개념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타인의 소유에 대해 아무 인식 없이 자라다가 점차 타인의 소유를 배려하고 마침내 타인의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는 법을 배우게 된다.

 

P361

개인의 사적인 이익을 권리의 개념과 결부시키는 것은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자신의 이익에 대한 집착은 인간에게 가장 변화지 않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P362

미국 내에서 다수의 폭정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거기 맞설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1812년 볼티모어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많은 사람이 전쟁을 지지했다. 반면에 전쟁에 반대한 신문사는 그 때문에 군중의 습격을 받았다. 그 신문사의 편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감옥에 수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미쳐서 날뛰는 군중들은 감옥까지 부수고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했다. 한 명은 피살되고 나머지는 죽도록 구타당했다. 그리고 폭행범들은 재판에서 배심원들에게 사면되었다. 다수파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대될 경우 언제든지 폭도로 변할 위험이 있다.

 

P362

토크빌이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다수의 힘이 우리의 신체뿐만 아니라 사상과 영혼까지도 지배할 수 있다. 아무리 시시한 견해라도 다수의 견해이고 다수가 동의한 의견이라면 거기 따라야 한다는 것이 미국인들의 규칙이기 때문에 다른 의견을 내면 정신적인 박해를 받게 된다. 다수는 소수를 억압해도 되고, 소수의 의견은 가치 없는 것인가? 민주 사회에서 여전히 문제가 되는 질문이다.

 

P363

한편 미국은 기본적으로 영어를 썼지만 영국식 영어와는 차이가 있었다. 토크빌은 그런 차이가 민주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변화가 없는 귀족 사외에서는 언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처럼 다이내믹한 사회나 날로 성장하는 경제나 상업 분야에서는 과거의 언어만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새로운 신조어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기존 단어에 새로운 뜻이 추가되면서 영어에도 뚜렷한 차이가 보인다는 것이다.

 

P364

인간은 평등이 고귀하기 때문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리기도 한다. 과도할 경우 정치적 자유가 개인의 평온과 재산과 삶을 더럽힌다는 점은 마음이 편협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분명히 드러난다. 반면 주의력이 깊고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평등의 위험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위험을 지적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들은 그런 재앙을 먼 훗날 미래 세대에나 닥쳐올 거이라고 말한다. 자유에 의해 가끔 초래되는 악은 간접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며 누구나 거기 감염되어 있다. 극단적으로 평등이 초래하는 악은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은 점점 사회 체제 속으로 침투해 이따금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주 파괴적인 상태가 되어버리면 습관화되어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 자유에 따르는 이익은 시간이 지나야 나타난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오해하기 쉽다. 평등에 의한 이익은 즉각적이다. 그래서 이것은 언제나 그 원천에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정치적 자유는 일정 수의 시민에게 고양된 기쁨을 주곤 한다.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날마다 작은 기쁨을 수없이 준다. 평등의 매력은 순간순간 느껴지며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라도 그 매력에 무감각하지 않으며 저속한 사람들도 그것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그러므로 평등이 불러일으키는 정렬은 강렬하고 전체적이다.

 

P365

토크빌 시대에는 아직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이미 1권의 끝에서 그는 세계의 반은 민주주의 아니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화될 위험이 있고 미국과 러시아가 이를 주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평등을 바탕으로 자유가 손실된 사회다. 너도 나도 노예라면, 너도 나도 가난하다면 그래도 살 만하다. 그런데 나는 부자고 너는 더 부자면 못살겠다. 그것이 바로 평등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다.

 

P367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태도인 이기주의 일종의 본능으로, 민주 사회와는 무관하게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수없이 변하는 사회에서 구성원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 외에는 관심이 없다. 옆 사람에게 빚진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고….. . 나 자신이 내 운명의 신이다. 그렇게 모든 관계는 끊어지고 내게로 모든 것이 응축되면서 우리는 외로운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P368

민주 국가에서는 누구든 안정된 삶을 위해서 재산이 필요하다는 것과 재산은 노동을 통해 획득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회 전체가 노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생계에 필요한 돈을 위해 노동을 한다. 그래서 민주 사회에서는 직업 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 무슨 직업이든 결국 돈을 버는 수단이니까.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일하기 때문에 돈을 받고 일한다고 멸시당하지 않는다. 물론 보수가 많은 직업이나 적은 직업, 일이 힘든 직업이나 덜 힘든 직업 간의 차이는 있어도 정직한 직업이면 무엇이든 명예스러운 직업이다.

 

P369

귀족주의 사회에서 주인과 종은 각자 계급을 형성하고 독특한 관습이나 생활 태도를 유지하지만 민주 사회에서는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사이에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미국 사회에서는 하인 계급 특유의 노예근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에는 하인들 사이에 서열이 없고, 또 하인이라도 주인과 거의 동등하다. 하인도 조건을 갖춘다면 언제든지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는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다. 주인은 명령하고 하인은 복종할 뿐이다. 그리고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의 관계는 계약에 근거해 일시적으로 발생한다. 이 관계를 벗어나면 주인이나 하인이나 결국 같은 시민이다. 계약은 주인이 명령하고 하인이 복종하는 유일한 근거다.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는 같은 일에 종사하며 날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는 다르다.

 

P372

일단 항구적인 민주 사회가 자리를 잡으면 거대한 야심은 다시 작아진다. 모두가 평등해지고 특권이 없어지면 누구든 앞서 가기를 바래도 단번에 이를 충족시키는 일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대한 야심을 품지 않는다. 민주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야심을 가지라고 고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너무 볼품없고 왜소해지지 않도록 큰 욕망을 가지라고 격려할 필요도 있다. 겸손은 현대인에게는 유익하지 않다. 현대인의 자신을 높게 생각하고 더 큰 것을 이루고자 하는 자존심이 필요하다.

 

P372

토크빌은 땅을 개간하고 돈을 모으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소시민화된 미국인들을 보며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말고, 귀족주의 사회처럼 이상적이고 원대한 담론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그는 미국인들이 인류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도약을 위한 일들을 고민했으면 했던 것이다.

 

P372

평등 없이 민주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평등만으로는 건강하고 생산적인 사회를 만들기 어렵다. 사회주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비생산적인 것도 평등의 원칙 탓이다. 최고의 경쟁력이나 예술성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도 평등의 원칙 탓이다.

 

P373

평등이라고 하는 것은 너와 내가 같다는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이 자꾸 작아지면서 전체 국민은 존재하지만 개개인은 자꾸 사라져간다. 그러면서 소시민이 되어 일상에만 전념하게 된다. 토크빌은 평등을 옹호하면서도 우리가 스스로 선출한 통치자들, 우리보다 훨씬 많은 정보와 훨씬 커다란 권력을 가지 사람들에게 무조건 복종할 가능성이 있음을 우려했다. 민주주의 국가가 아주 쉽게 전체주의 국가로 흘러가는 경우가 그렇다. 또는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의 경우가 그렇다. 위대한 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위험을 떠안아야 하고 그런 위험은 평등에서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P374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평등하고 동일한 군중의 삶 속에서 싫증나게 겪는 사소한 쾌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그들 각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운명에는 무관심하다.

 

P375

정부는 매일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별 쓸모 없게 함으로써 자유로운 행위의 횟수를 줄여버린다. 그래서 정부는 인간의 의지를 아주 좁은 범위에 제한시키고 점차 인간으로부터 스스로 활동하고자 하는 의욕을 박탈해버린다.

 

P375

최고의 통치 권력은 사회 구성원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다루게 되면 그 다음으로 그 힘을 전체 사회로 확장하게 된다. 통치 권력은 사회를 모두 장악한 다음 획일적이고 복잡하고 촘촘한 규칙의 그물로 뒤덮어서 아무리 독창적이고 정력적인 사람이라도 군중을 초월하여 이 그물을 뚫고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인간의 의지가 분쇄당하지는 않지만 약화되고 굴절하며 종속적으로 된다. 인간이 정부에 의해 행동을 강요당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행동의 제한을 받는다.

 

P376

즉 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생각에서 그들이 보호받고 있다고 자위한다. 모든 사람은 속박을 허용한다. 그들을 속박하는 사람이 한 개인이나 한 계급이 아니라 전체 국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를 통해서 국민들은 그들의 주인을 뽑고 한동안 의존 상태를 털어버리다가 다시 의존 상태로 빠져든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제 권력과 국민 주권 사이의 타협에 완전히 만족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 권력에 의탁함으로써 개인의 독립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했다고 생각한다.

 

P377

민주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통찰 없이는 운영될 수 없다. 그래서 장점만큼 위험도 많이 내포되어 있다. 민주주의 시대가 안고 있는 해악 중에 대표적인 것을 물신주의와 세속주의다. 새로운 정치체제였던 민주주의 하에서 기존의 종교, 철한, 문학 등 풍요로운 지적 자산은 힘을 잃고 미국인들은 돈과 성공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습적인 신분이 돈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신분으로 바뀌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P377

그러나 여전히 미국의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않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상위 1퍼센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미국 정치, 아니 민주정치 아닌가. 그래서인지 장 자크 루소의 말이 비범하게 느껴진다.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버린다.”

 

P378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겨우 한 페이지를 읽을 뿐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우주의 일부임을 느꼈다. 땅 위를 걸으며 대지와 하나됨을 느꼈다. 방랑이야 말로 삶의 본질이며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느꼈다. 편견과 편협과 고집스러움이 여행을 통해 치유되었다.

 

P390

우선 당시 가장 빠른 병기인 말을 보유했다는 점이다. 그 다음으로는 유목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칭기스칸의 몽골군은 10만이 되지 않는다. 10만도 안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당시 세계라고 일컬어진 곳들을 모두 정복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어딘가 정착하지 않는 유목민의 정신을 노마드 정신이라고 부른다. 우리 역시 현대의 유목민이다. 우리는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들고 자동차로 끊임없이 이동하며 한곳에서 일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칭기즈칸이야말로 21세기의 노마드 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P398

그러나 대칸은 미엔 왕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그 탑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절대 그것을 허물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타타르 인들은 죽은 사람의 물건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기 때문이다.

 

P403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했던 두 가지 일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우선 그는 질문할 것이 있다고 들이닥친 수바드라라는 인물에게 답을 해주고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자등명법등명이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남긴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해라 또한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해라.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라. 이런 가르침을 유언으로 남기고 석가모니는 열반에 들었다.

 

P404

그의 관점은 동방견문록에 영감을 받아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던 유럽인들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 이후 유럽인들은 그때껏 세계의 끝인 줄 알았던 포르투갈의 코보다로카에서 대서양을 향해 출항했다. 그때껏 세계의 끝으로 여겨졌던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인식을 갖게 해준 것은 마르코 폴로였지만 그 결과물인 유럽인의 신대륙 발견이 인류에게 득만 주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마크 트웨인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말했듯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참 멋진일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지나쳐 갔더라면 더 멋졌을 것이다.”

 

P405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도 가지지 못할 사람, 한마디로 최하중에 최하의 사람. 그래, 설령 그 말이 옳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이것이 나의 야망이다.

 

P405

그리스비극은 인간학의 총체다. 인간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조건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비극을 바라지 않지만 결국 인간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온갖 슬픔, 고통, 고뇌를 겪으며 인류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비극은 보여준다. 결국 인간은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다르다. 아모르 파티, 내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더 깊은 성찰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P408

오이디푸스 왕에 나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두 가지를 암시하는 것 같다. 우선 아무도 풀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풀어낸 오이디푸스가 가장 영리한 사람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이디푸스 왕이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지 보여준다. 즉 이 이야기가 인간의 본질을 캐묻고 있음을 암시한다.

 

P410

인간이 예상하는 미래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미래가 반목하면서 인간의 지혜와 신의 지혜가 부딪히는 장면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무의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론이 바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P414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오이디푸스 같은 인간 최고의 지성 조차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신이 내린 운명 말이다. 운명에 대한 궁금증은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귀착된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그리스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다.

 

P415

사자는 자신이 아기이던 오이디푸스를 라이오스의 목동에게서 얻어 자식이 없던 폴리보스에게 바쳤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라이오스의 목동은 살해 현장의 목격자와 동일인으로 드러난다. 조금씩 퍼즐이 맞춰져가면서 서서히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에게 모르는 게 약이라고 그만 들춰내라고 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향해 가는, 그 비극 속으로 걸어 들어 가는 위대한 자의 모습이다.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는 위대한 인간 오이디푸스 드디어 그는 살해 현장의 목격자이자 아기인 자신을 내다버렸던 늙은 목자와 마주하게 된다.

 

P418

사실 그리스비극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처럼 느껴진다. 그리스비극의 핵심은 절제와 한계, 즉 아폴론적인 상태를 돌파해서 열정과 도취의 상태, 즉 디오니소스적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상태란 한 번 죽음으로써 시작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비극은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아모르 파티, 바로 내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위대한 장정이 바로 인간의 실이라고 그리스인은 생각했다.

 

P418

니체는 말했다.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가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우리는 예술을 가지게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악한 진실 앞에서 스스로 눈을 찌르고 끝까지 진실을 견뎌내야 하는 자로 선택되었다.

 

P419

도대체 누가 인생의 한계를 넘어서 광기로 그대의 인생을 덮쳤나요?” 가장 고귀하고 지혜로운 자에게 가장 비천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자로 전락한 오이디푸스, 그에게 이런 운명을 내린 신은 누구였을까. 이성의 신이자 태양의 신이자 빛의 신인 아폴론이다. 아폴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는 모든 것이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어둠이 모든 것이 개체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통합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눈으로, 이성으로 쳐다볼 때 오이디푸스라는 개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비극에 처해 눈이 멀고 암흑에 갇힌 그는 새롭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으로 새로운 오이디푸스로 재탄생하는 것, 이를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탄생이라고 부른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는 테베에서 쫓겨나 정처 없이 떠돌다 콜로노스의 신성한 숲에 당도한다.

 

P421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로서 영문도 모른 채 우주의 부름을 받고는 가장 불운한 삶의 기를 견뎌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그는 불행에 협력하여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추방당함으로써 그 불행을 정점까지 끌어올렸던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그렇게 불행의 절대적 의미를 완성하자 그를 몰아세우었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춰 서고 그는 인간의 한계 너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신을 느끼는 순간 비로소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리하여 그의 시체는 아테네와 그리스 전체를 수호하는 성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P422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와 새로운 테베 왕인 크레온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 둘의 갈등을 통해 소포클레스는 개인의 양심과 국가의 법 중에 무엇이 먼저인가에 대한 물을 던진다. 양심과 법,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나? 선택은 각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이 갈림길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든 비극이 뒤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대립은 충돌과 희생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용과 배려가 중요하고 이를 통한 공존의 길이 절실한 것이다.

 

P426

삶은 다른 것과의 관계 맺기.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자신과 다른 것을 잘 참지 못하고 틀린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상대를 동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한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사용하고, 나이 든 사람은 삶의 연륜을 이용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을 통해 자신과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갈등관계에 빠지게 된다. 이윽고 투쟁관계로 돌입하고 서로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P429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강한 안티고네, 비극을 읽을 때면 늘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난 벽에 부딪혀 나동그라지는 모습, 벽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우리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공포와 고뇌와 슬픔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소소한 고민들을 떨쳐버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삶의 메시지가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P429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이해관계의 양극단에 서 있다. 국가의 이성을 상징하는 크레온과 인간의 정념을 대표하는 안티고네. 인간의 법을 대표하는 크레온과 자연의 법을 존중하는 안티고네. 이렇게 조직과 개인이 부딪히면 결국 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가와 개인,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이 상생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다.

 

P432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496년에 태어나 406년에 죽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최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면서 신의 힘은 약화되고 국가의 힘, 국가의 법, 권력자들의 권위가 점점 힘을 얻어갔다. 크레온의 오만은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P436

너무도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은 후회, 앞서 찾아오는 깨달음은 통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후회와 회한 속에서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통찰도 얻지 않을까? 고전들을 뒤져보면 무수한 슬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만이 언젠가 구원을 받게 된다.

 

P437

그 동안 우리는 안티고네를 통해서 정의를 보곤 했다. 하지만 이제 거기서 배려를 보게 된다. 서로를 향해 전차처럼 달려드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해법도 없다. 배려를 상실한 사람들에게는 비극만이 남을 뿐이다. 그런 파국으로 가기 전에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다르다는 것이 열등하거나 악의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이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배려다. 배려를 통해 다름을 껴안는다면 나의 지평이 넓어지고 나는 하나의 완결된 인간을 향해 걸어가게 될 것이다.

 

P440

너는 현명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너무 진지할 것 없다. 지나친 진지함은 너를 괴롭힐 것이다. 삶은 즐거운 활동이다. 그 가치가 아무리 크고 무거워도 기쁨으로 해야 한다. 황홀하지 않은데 몰입할 수 있겠느냐?


 

3. 내가 저자라면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a. 책의 구성에 대하여

 

2014년 현재는 20세기 그렇게 꿈에 그리던 미래의 모습을 담고 있던 21세기의 상상의 년도이다. 과연 20세기에 상상하던 미래가 지금 이루어져 있는가? 세상이 그렇게 바뀌었는가? 우리는 다시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20세기 산업화 시대에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많은 폐해를 해결하지 못하고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아직도 그 영향에 놓여 있으며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버텨나가고 있다. 꿈도 찾지 못하고, 뜨거운 가슴의 열정도 식어버린 채 주어진 환경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은 다양한 고전들 가운데 인간의 문제에 집중하여 인간의 본질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고전들을 선별하였고, 고전들 속의 이야기들을 통해 삶에 대해 들려준다. 고독에 대해 진실로 자신의 삶에 대해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 하고, 사랑하라 하고, 사랑의 방법을 들려 준다. 삶은 여행이라 하고 여행의 황홀함과 고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사회 속의 나를 생각하게 하여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자세를 알게 하고 마지막으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이를 승화시켜 삶을 완성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살아서 격어야 될 많은 삶의 요소들을 고전을 통해 제시하고 이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으며, 이 책들을 통해 독자들이 자신의 삶에 변화를 주기를 바라고 있다. 책 내용 중에 곳곳에 저자의 생각을 정리해 둔 부분이 고전을 전부 읽지 않아도 고전에서 발췌한 부분이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을 잘 요약해주었고 고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책 자체가 여행이었고 여행을 통해 다시 삶을 돌아보게 하는 매력이 있다. 또한 고전에 대한 독법을 사이 사이에 넣어 두어 보여지는 것만이 아닌 이야기의 이면에서 느껴야 할 것들을 잘 집어주어 내용에 치중하지 않고 잠시 떨어져서 이야기를 다른 각도에서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것이 좋은 점이다.

 

b. 감동적인 장절

P31

늘 미래만을 향하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현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행복도를 조사할 때마다 상위권에 오르는 국가의 국민들을 보면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즐기고 느끼고 감탄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으면 삶은 아주 행복해지는 것 같다. 경제적인 풍요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릴케도 늘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 바로 여기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카르페 디엠 (Carpe diem).

 

나는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 자체보다는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날 때 특히 봄바람을 좋아한다. 자연이 나를 쓰다듬고 지나가며 나를 위로하고 고무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바람은 항상 현재만 있다. 어제의 바람도 내일의 바람도 없다. 이 순간의 바람만이 있다. 그 바람이 나를 스치고 간다. 이 시간도 그렇게 따스하게 그리고 아스라이 사라져 간다. 지금 이순간을 바람처럼 느끼고 살 수 있기를 바래본다.

 

조르바! 이리 와봐요! 내게 춤 좀 가르쳐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좋아요! 이리 와요!”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변했어요. , 놉시다!”

 

, 놉시다!를 통해 변화한 모습이 보인다. 조르바에 동화된 조르바로부터 배운 삶에 대한 태도.

 

c. 보완점

 

책은 두 개 구분으로 나누었다. 우선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다음은 거침없이 모험을 선동하라 이다. 책의 내용에서 욕망은 좋은 뜻으로 사용된 부분이 없는데, 큰 구성의 제목에 욕망이 있는 것이 책의 내용과 다소 괴리감을 주는 부분이 있다. 욕망을 넘어서는 사랑이 이 책의 전체를 흐르는 맥락인데 욕망을 내세운 면이 아쉽다. ‘사랑에 대하여또는 사랑하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같은 제목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 제목인 거침없이 모험을 선동하라는 제목도 삶이 여행이고 여행 중의 시련과 기쁨에 대해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삶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주제인 것에 비해 다소 도발적으로 보인다. 제목으로는 운명을 넘어선 여행으로의 삶을 제안해 본다.

 

책에 언급된 고전에 대해 선정의 배경과 그 책이 주는 의미가 절 요약이 되어 전달이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고전의 내용 중에 저자의 생각을 달아 놓았기는 하였으나 해당 저서에 대한 전체적인 의미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더 보완하였다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책의 주제를 파악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좋은 지침이 되었을 것이다.

 

구본형 저자의 생전 저작들의 맥을 잊는 면에서 본 저서는 아쉬움이 남는 면이 있다. 이는 변화경영사상가로서 각각의 책들이 변화경영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라디오 고전읽기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전체의 맥락을 재해석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으로 출판을 결정하였다면 소개된 고전들이 어제보다 아름다워지고 싶은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면 되는지에 대한 부분이 더 강화되면 좋겠다. 책의 내용에 보면 슬슬주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생전의 구본형 저자의 꿰는 솜씨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다.

 

 

북리뷰 -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3주차 (이동희).docx

IP *.255.17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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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15:46:01 *.133.122.91
키햐~~ 동희씨의 성실한 글읽기가 이 한 편의 북리뷰에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북리뷰하시느라 정말 고생많으셨지요? 

 

저자 소개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각 글에서 개인적인 상념을 하나하나 대조하여 쓰신 것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건, 시간이 많다고, 책이 더 앏다고해도 열정이 없으면 이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동희씨- 혹시 '내가 저자라면' 부분은 Yes24나 인터넷 교보문고에 계정이 있으시면 북리뷰에 올려주실 수 있을런지요..? 그러면 더 많은 분들과 더 많이 이 책에 대해서 교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혼자보기 너무 아깝지 않나요? 좋은 것은 함께 나누시죠^^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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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6 16:12:48 *.94.41.89

Yes24와 aladin에 리뷰 올렸습니다. 

책준비하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을 것같습니다.

좋은 책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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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1 17:13:51 *.160.136.111

구본형 선생님을 꾸준히 봐왔던 찰나와 전체적 안목이 돋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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