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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24일 08시 08분 등록
 <10기 레이스 북리뷰 3주차-조현연>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나를 만든 세계문학고전 독법


구본형・박미옥・정재엽, 생각정원, 2014.


1. 저자에 대하여


■ 구 본 형 ■

구본형1.JPG

 

•출생/사망

1954.1.15. 충남 공주 / 2013.4.13.

 

•활동분야

변화경영사상가. 변화경영연구소장. 강연, 칼럼, 저술 활동

 

•발 자 취

서강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역사학, 경영학 공부

 

 

1980년~2000년 한국 IBM 근무(경영혁신 기획과 실무 총괄)

 

 

1991년~1996년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

 

 

2000. 1인 기업 ‘구본형 변화경영 연구소’ 설립

 

 

2005.~ 연구원 제도 운영

 

 

EBS 라디오 <고전읽기> 진행

 

•저    서

1998. 익숙한 것과의 결별

 

 

1999. 낯선 곳에서의 아침

 

 

2000.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 떠남과 만남

具本亨 Bon-Hyung Goo

 

 

2001.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오늘 눈부신 하루를 위하여

<사진출처:yes24.com, 예스인터뷰>

 

 

2002. 사자 같이 젊은 놈들(미치지 못해 미칠 것 같은 젊음)

……

삶을 시처럼 살고 싶어하는

변화경영시인

변화경영사상가

……

 

 

2003. 내가 직업이다

 

 

2004.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일상의 황홀

 

 

2005. 코리아니티 경영

 

 

2006. 공익을 경영하라

 

 

2007.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 / 사람에게서 구하라

 

 

2008. 세월이 젊음에게

 

 

2009. 더 보스 : 쿨한 동행

 

 

2010. 구본형의 필살기

 

 

2011. 깊은 인생

 

 

2012. 신화읽는 시간

 

 

 

2013. 그리스인이야기        

<유고작>

2013.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2014.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축복


  “자기 경영은 자신의 미움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격앙되어 싸울 때는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적의와 증오를 갈무리하여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짐과 결별하고 피와 화해하는 신성한 의식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다 마지막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 단명함으로 처연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는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인생이니 내 품아 안아 들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편지>를 다시 들춰보다가 한 페이지에 시선이 갔다. 변화경영사상가로 소개된 저자의 명함이었다. 그때 내게 묘한 충동이 일었다.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려고 한 것이다. 친한 이들에게도 전화를 잘 하지 않는 나였다. 아무도 받지 않을 테니 걸어보겠다는 심사였을까. 그를 만난 일도, 이전에도 그에게 전화나 편지를 전한 일도 없다. 나의 이 충동은 어디서 연유했을까.

 1년 사이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많이 접한다. 마지막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저자에 대해서 좀더 담담하게 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와 아무런 인연이 없기에 그의 책에서, 여러 자료들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격앙되어 비평하진 않더라도 객관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와 마주친 일이 없으니 그렇다. 동시대를 겹쳐 살았지만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살다가 한 꼭지점을 마주하고선 더듬더듬 걸어 갔을 땐 늦었다. 여전히 그는 어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다. 하나의 에피소드라도 있다면 풀어내고 싶지만 그에 대해 아무런 해줄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그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 말고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나는 그저 주워들은 이야기, 곁가지로 들은 이야기들로 그의 생을 꿰맨다. 그래서 나는 그를 모르고 그렇게 또 그를 안다.

 나는 그를 조각조각 만났다. 글을 보았고, 그리하여 그의 생각을 보았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뒤에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고, 또 그보다 뒤에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면대면으로의 마주함이 아니라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와 나 사이엔 거리가, 전파가 존재했다. 처음 목소리를 듣고 나서 며칠 동안,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과 매치가 되지 않아 나홀로 애를 먹었다. 그 목소리는 그 자신의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나 혼자서 퍼즐을 맞추듯 그의 목소리로 온전히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내가 그에게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었기에 그러했을까.

 내가 책으로만 그를 접했을 때만 해도 그는 충분히 나에게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책에 대해서 평하고 거기서 새어 나오는 그의 인생을 조금 살펴본 것으로도 그를 평가하였다. 그리고 저자로서 그가 얘기한 삶과 구본형으로서의 삶이 같을까?에 대한 물음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에 좋은 글을 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인의 입을 통해서 그는 충분을 넘어서 다시 기대하게 해 주었다. 예비 연구원 설명회장에서였다. ‘구본형 중독주의자’들로부터 진심의 존경과 애정을 받는 모습에 활자로 엿본 그의 인생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가 떠난 후 추모회장 한켠에서 그를 추모하고자 했는데, 그때에도 ‘구본형 중독주의자’들로부터 그의 생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듣게 되었다. 에피소드들이니까, 기억이니까 하더라도 그의 생이 단순히 글로만 떠들었던 삶이 아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연구원과 꿈벗, 그리고 그에게 애정을 갖는 많은 독자들에게 그가 그 자체로 정말로 축복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도 그의 연구원과 꿈벗, 그에게 애정을 갖는 많은 독자들, 구본형 중독주의자들이 축복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구본형의 명명(命名)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에 이름에 관한 언급이 있다.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라티노스라고도 하고 나우시토스와 나우시노오스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모르면 어떤가? 그들은 그 후 한번도 자신을 세상에 알릴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 그 이름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p314~315)

 이름이란 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가 누구인지를 세상에 알리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 한 사람의 생애를 인지하고 기억한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거침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몰라도 상관없다고 외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관계하며 많은 이름을 얻게 된다. 그 속에 그들의 역할과, 행적과, 이상이 담겨 있다. '기억‘의 주체를 나로 볼 것인가, 타인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누군가에게 기억하게 하고 누군가에게 기억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결국 이 모두가 나의 ’알릴만한 일'에 따르는 귀결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제 이름으로 기억되려면 우리는 ‘세상에 알릴만한 일’ 하나쯤은 해야 한다.

 자, 그럼 우리도 잠시 비판적이 되어 보자. 당신은 이 작가를 아는가? 당신은 그를 어떻게 부르는가? 왜 그렇게 부르는가? 그가 행한 어떤 알릴만한 일로 그를 기억하는가? 그를 부르는 명명에 따라 그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구본형


 그는 1954년에 태어났고 2013년 4월 어느 날, 59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결별했다. 그가 익숙한 이 곳과 결별하게 된 것은 폐암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마지막까지 아픈 몸을 숨기고 EBS 라디오에서 『고전읽기』를 통해 ‘변화경영’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온전히 그의 생을 ‘축제’로 승화시켰다.

 그는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이후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좋은 역사학자이자 대학교수를 꿈꾸었으나 1980년이라는 한국의 시대적 현실 속에서 파생된 몇 가지 이유로 그 꿈을 포기하고 직장인이 되었다. 그는 회사원으로서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살았다며 ‘가끔 내가 가보지 못하고 끝나버린 역사학자의 길을 한숨 쉬며 되돌아보곤 했다(그리스인이야기, p450)’고 술회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지나간 삶에 대해 한번쯤은 회한을 갖기 마련이고, 그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알만한 글로벌 기업의 간부를 지냈다는 점, IMF의 고비 속에서도 한 직장에서 20년을 근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평범함을 넘어선, 안정적인 성공적 삶을 살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인간이 겪게 되는 자연스런 삶의 고민들을 겪고 있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40대란, 이른바 중년의 사춘기이다. 또한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이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욕구 5단계를 설명하며 마지막 단계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이야기하였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키워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픈 욕구라고 할 수 있는데, 욕구는 인간의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요인이 된다. 이와 같이 흔들리는 40대에 그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통해 자아실현의 욕구를 이루어나가고 있으니, 실로 인간의 욕구에 충실한 평범한 사람이자, 또한 강한 행동력으로 변화를 이루어가는 평범치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는 40대에 그가 늘 다루던 직장의 ‘변화경영’의 개념을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이루며 작가로서 내딛는다. 세 번째 책이 출판된 해, 마흔 여섯에 20년간 몸담았던 직장과 이별하며 1인 기업가로서 지금까지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매일 하루 두시간을 자기를 위해 쓰기를 강조하며 자신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두 시간씩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꾸준한 글쓰기는 매년 한권씩의 책을 출간한 결과로 나타난다(혹여, ‘안 보는데 어찌 알리오?’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를 가보면 안다. 홈페이지 칼럼이나 댓글 등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글의 업로드 시간이 새벽시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변화경영전문가


 구본형은 IBM에서 20년간 근무하였다. 그가 맡은 역할은 ‘변화경영’의 기획과 실무를 총괄하는 것이었고 IBM 본사의 말콤 볼드리지(Malcolm Baldrige) 국제 심사관으로서 아시아 태평양 지역 조직들의 경영혁신과 성과를 컨설팅했다. 그의 업무와 연관된 대표적인 저서가 『월드클래스를 향하여』(2000)이다. 이 책에서 그는 경영품질모델인 ‘말콤 볼드리지 모델’을 경영자와 직장인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공익을 경영하라』, 『아름다운 혁명, 공익 비즈니스』를 통해 변화에 무관한 듯 보였던 공공기관과 비영리조직의 변화와 혁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이라는 업무 영역에서의 활동은 1992년 한국능률협회로부터 제1회 '경영혁신대상' 개인 공로자상이라는 영광을 주었다. 직장을 나와서는 방송에 소개되기도 하고 현재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러 기업체 및 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강연을 통해 2005년에는 삼성 SDS E캠퍼스 강사 3,000명 중 최고의 강사, 기업 CEO들이 뽑은 최고 변화경영 이론가, 직장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강연자 1순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와 같은 활동이,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직장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 그가 ‘변화경영’ 분야에서 오래 일하고 그를 바탕으로 저서를 집필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저서를 직장인들의 업무 관련서로서의 실용서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은 그가 공부한 역사학과 경영학이 조화롭게 ‘변화’라는 주제와 만나 그만의 특징을 나타내며 인간의 근원적인 사색의 힘을 일깨우며 자아성찰과 함께 행동력을 일깨우고 있다. 아마도 책 속에 묻어 있는 치열한 자기 고민과 사색의 힘, 그가 겪은 경험들에서 우러나는 통찰력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처음 집필한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부터 『낯선 곳에서의 아침』, 『사자같이 젊은 놈들』, 『깊은 인생』등 그의 저서들은 변화를 하게끔 해주는 매뉴얼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실용서가 아니라 그 변화의 욕구를 관찰하고 자신의 내적인 동기를 탐험하게 하도록 해주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그가 말하는 변화의 개념을 보자. 그는 『낯선 곳에서의 아침』에서 변화란 살아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변화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들은 죽은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1년 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1년 동안 죽은 있었던 것이며,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지난 24시간 동안 죽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살아 있다. 매일 글을 쓰고 매년 책을 내고 있는 그는 어제와 같지 않고 1년 전과도 같지 않다.

 어쨌든 그는 ‘변화’라는 것을 익숙하게 알고 있지만 자기 삶에서 쉽게 적용하지 못하고 어렵게 느끼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변화경영’이라는 개념으로서 인문학적인 성찰과 경영학적인 마인드로 개인의 자기 혁명을 이끌어내도록 하고 있는 오래도록 이 분야를 다루고 익혀온 ‘변화경영의 전문가’이다.


3) 부지깽이 - 사부님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를 보다 보면 ‘부지깽이’라는 닉네임이 눈에 띈다. 부지깽이는 불을 지필 때 나무가 잘 탈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다. 닉네임의 주인은 저자 본인이다.『더 보스:쿨한동행』(2009)에서 그는 이상적인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는 좋은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이며 또한 ‘상사는 부지깽이, 부하는 땔감’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보다 앞서서 이미 스스로를 부지깽이라 칭하고 있다.


 “종종 나는 나를 ‘부지깽이’ 라고 부르곤 합니다. 어떤 감흥으로 그저 그렇게 불러 보았지요. 불이 꺼지려 하면 불씨를 뒤적여 불을 살려내고, 불이 너무 기세를 돋아 몽땅 태우려들면 누르고 벌려 불길을 가라앉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부지깽이지요. 그러다 종종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어 제 몸을 태우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를 ‘부지깽이를 든 사람’이라고 부를까 생각 중입니다1)”.


 이와 같이 스스로를 부지깽이라고 부르려면 땔감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땔감이란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의 연구원들과 꿈벗들이다. 이들을 가리켜 그는 ‘창조적 부적응자’라고 칭한다. 이들은 자기 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며 다른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길을 찾고자 하는 모색이 절망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이다2).

 그가 운영하고 있는 연구원 제도에서 연구원들은 매주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칼럼을 쓴다. 이러한 과정을 1년 동안 진행하여 50권의 독서와 50개의 칼럼을 쓰고 이후 자신이 쓰고자 하는 분야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들을 그가 이끌어 주고 있다. 또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운영하며 이른바 꿈벗을 양성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와 소망을 찾아 위대한 삶의 전환을 모색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서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한 단군의 후예 프로그램이 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날마다 새벽기상을 실천하며 꾸준한 글쓰기를 해 온 것과 같이 많은 이들에게 하루 2시간의 자기 혁명을 이루도록 새벽기상과 새벽활동을 습관화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그는 많은 땔감을 모아두었고 이들 땔감은 부지깽이의 손놀림 아래 열심히 불을 피우고 있다. 그리하여 이처럼 많은 땔감들을 통해 그는 ‘사부님’ 또는 ‘스승님’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가 운영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땔감과 함께 그 또한 성장한다. 연구원 제도를 진행하면서는 그 또한 함께 읽고 쓰는 과정을 하는 것이다. 또한 땔감의 습도와 종류에 맞추어 적절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가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반응하고 있는 모습은 역시 홈페이지의 무수한 댓글과 땔감에 대한 글들, 땔감들이 만들어낸 서문 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지깽이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직화된 학교라는 정형화된 틀 속에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이러한 연구소를 설립하여 땔감을 부지런히 만들어 나가고 있는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애정과 관심, 그 자신의 끝없는 변화와 자기혁명의 자세를 볼 수 있다.


4) 변화경영사상가


 그는 스스로를 변화경영사상가라고 칭한다. 이는 ‘변화경영전문가’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변화경영전문가라는 그의 역할을 충실히 해온 그 자신에 대한 또다른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매년 발간되는 그의 저서 속의 저자 소개에서도 나타난다. 그동안 변화경영전문가로서 소개되던 책에서 어느 날부터 ‘변화경영사상가’라고 소개되고 있었다(2008년 출간된 『세월이 젊음에게』에서는 여전히 변화경영전문가로 소개되고 있는데 2009년 『더 보스:쿨한 동행』에서부터는 변화경영사상가로 소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전환은 어떤 인식에서 이루어졌을까.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기술적인 컨설턴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이제 그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공부하여 알게 된 것과 체득한 깨달음을 마음대로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생각을 다루고, 태도를 다루고, 가치를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전환했다(깊은 인생, p98).”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명명에 주저함이 없는 그의 면면이 드러난다. 실제 그의 저서는 동서양의 철학이 넘나들고 특히 그가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화’에서 ‘변화’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미 그는 모든 저서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기 위한 생각들을 실천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화를 전면에 내세운 『신화읽는 시간』,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책이 발간된다.


5) 변화경영시인


 그는 전문가에서 사상가로 스스로를 명명하면서 언젠가는 ‘변화경영시인‘이라 부르고 싶다고 한다. 그것이 작가 인생 후반기의 진화 여정이라고 얘기한다. 그는 삶을 시처럼 살고 싶다고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시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시처럼 살고 싶다. 나고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무겁고 진지한 삶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그 바람길 위의 새처럼 가벼운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고 싶다. 내면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깊은 기쁨, 그것으로 충만한 자의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지. 어느 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사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문득 의미를 발견하여 말할 수 없는 헌신으로 열중하고, 평범한 한 여인이 문득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면의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하는 느닷없는 전환은 아름답다. 그것이 삶을 시처럼 사는 것이다(깊은 인생, p11)”


“나는 삶을 시처럼 살다 가고 싶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즐기고, 비가 내리면 비를 즐기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걷고,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아 그들이 커가는 것을 보고, 내 세계 하나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사람들과 삶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에게는 살아 있음의 흥분과 떨림이 중요하다. 나에게 있는 특별한 장점은 이렇게 감흥이 도도하게 일어나는 삶의 체험들을 책 속의 지식들과 뒤섞어 그 속에서 무엇인가 진득한 수프를 끓여내는 것이다(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p451)”


 삶을 시처럼 살고 싶은 열망은 2002년에도 보인다. 『사자같이 젊은 놈들』 속에 ‘시처럼 살고 싶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이미 작가는 오래 전부터 그가 살아가고픈 인생을 그리며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던 듯하다. 시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저자가 이야기하듯 깊은 인생을 진득한 수프로 끓여내는 일이라면 그는 그가 좋아하는 신화이야기를 가지고 『그리스인이야기』라는 진뜩한 수프를 마지막으로 끓여 내었다. 여기에서 그는 신화 속 영웅들의 삶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면서 또한 시로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신화 속 이들의 삶을 들려주며 종국에는 그들의 삶을 서사시처럼 읊어 내는 것처럼 그의 삶도 누군가에게, 또 그 자신에게 시로서 읊어 지리라. 그리고 그가 바랐듯이 ‘시처럼 살고 싶은 인생’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있어 그의 인생 또한 한 편의 시처럼 기억되리라.

 그가 떠난 후 그가 남긴 글들과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전한 내용을 토대로 세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 그가 남긴 글들에서 선별한 60편을 묶은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디오 고전읽기를 통해 남긴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다. 그가 사랑한 시, 그가 쓴 시들 역시도 한편으로 묶여졌으면 하며 ‘변화경영시인’으로 살다가 죽고 싶다고 한, 그에게 변화경영시인이라 불러본다.


참고 자료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http://www.bhgoo.com)

•‘태몽 혹은 인디언식 이름’,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마음을 나누는 편지」 중, 2008.2.15일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어떻게 발견할까-『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구본형, 채널예스인터뷰. 2012.9.25.

•각 저서들.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프롤로그 -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p11 여든 고령의 석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그는 고향을 향해 최후의 여행을 떠났다. 늙은 나이에 지친 석가는 대장장이 춘다가 공양한 음식 때문에 심한 설사로 더욱 힘들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석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법을 설했다. 아름답지 않은가. 그는 울고 있는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 울지 마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품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 “이별이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마지막 편지, 마지막 수업...마지막이라는 말을 알지 못합니다..

p12 무상하다. 그러니 애써라. 이것이 (석가의)마지막 설법이었다. 애처롭지 않은가! 우리를 울게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모두 불완전한 필멸이 것이자 불쌍한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음에 경탄하고 순간에 몰입해야 한다.

⇒ 무상함을 느끼는 것. 그러니 사람이다. 불완전하기에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

p12 고전은 바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는 것이다. 깊은 상처를 입힌다. 그것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사랑의 창이다. 불완전한 인간을 찔러 그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은 이것을 ‘에로틱 아이러니’라고 불렀다. 고전은 나를 바꾸는 지독한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삶에 기쁨을 쏟아주는 위대한 이야기다. 내면의 가치를 잃었다고 느낀다면 바로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삶의 지표를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 바로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삶의 황홀을 맛본 지 오래되었다면 내 영혼을 위해 바로 지금이 고전을 읽을 시간이다.

⇒ 고전(古典)이란? 첫째, 예전에 쓰인 작품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변함없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문학이나 예술 작품. 둘째, 어떤 분야의 초창기(草創期)에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이룩해 후대에 전범(典範)으로 평가 받는 저작 또는 창작물. 셋째, 진실에 진실한 작가가 쓴 글. 넷째,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등불을 밝히는 책...그리고 서양의 학문 전통에서 초기 세계의 주요 문명에서 씌여진 기본적인 책들. 즉, 고전은 2세기 이래의 그리스와 로마의 대표적 저술. 인도에서는 베다와 우파니샤드,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 장자의 저서, 이집트의 사자의 서와 마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함무라비 법전과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책들. 고전은 단순히 옛날 책이 아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의는, 사전적 의미와 더불어 ‘나의 정의’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Part1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chapter1 이룰 수 없는 꿈 하나를 별처럼 품다-<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젊음’에 대하여

p17 청년답다는 것은 높은 것을 향한 동경, 가치 있는 것에 대한 감격, 심원한 것에 대한 매혹, 영혼을 우리는 것에 흘리는 눈물이다. 속세를 살아나가는 기교는 속세에 닳고 닳은 사람들에게 맡겨놓으면 된다. 청년이 청년다울 때의 모습은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곧고 단순한 것이다. -가와이 에이지로

⇒ ~답다는 말처럼 이미지를 고정하는 것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답다라는 것은, 그에 대한 지향적인 느낌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또한 변화적이다.

p18 어찌하랴. 젊어서는 돈을 벌기 위해 젊음을 쓰고 나이 들어서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 인생의 역설인 것을.

⇒ 아하. 나도 이렇게 살고 있구나.

p18 우리는 언제 젊어지는가. 배움을 시작할 때다. 나이가 몇 살이든 배움을 시작할 때 우리는 더듬거리고, 뒤뚱거리고, 두려워하고, 떤다. 바로 이것이 젊음이다. 이때 우리는 어려지고 젊어지고 그리고 영원히 늙지 않는다.

⇒  배우고 익히다 보면 더 늙어가는 것 같은데....아, 그 열정만큼은 젊다.

p18 무엇이 젊은 것인가? 자아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늘 새로운 모험으로 자신을 내모는 사람들, 그들이 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젊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그것이 젊음의 본질을 파악했다. 이 책은 꿈을 향해 도전하는 세상의 모든 젊음에게 바치는 헌사다.

⇒ 새로운 모험에의 도전은 젊은 패기로서도 가능하고, 오랜 경험과 안정에서 나오는 여유로도 가능하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는지, 그것이 도전을 이룰 수 있는 조건이다.

p20~21 자기 안으로 침잠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글을 쓰게 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글쓰기가 좌절되었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깊고 조용한 밤에 스스로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답을 찾아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강력하고 확고하게 ‘써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당신의 삶은 아주 하찮고 무심한 순간이라도 이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에 다가가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말로 표현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충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첫 번째 편지 중(中)

⇒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아닌 것도 같고 맞는 것도 같고...깊은 밤 혹은 깊은 새벽 나도 끊임없이 자문, 자문 해 봐야겠다. 지금 나는 제대로 하는 것인가.

p22 릴케는 선배 시인으로서 첫째, 반어법에 대해 경고하며 사물의 깊이를 추구하라고 충고하고 둘째, 덴마크 작가 야콥센의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릴케는 자신에게 창작의 본질을 가르쳐 준 사람으로 시인 야콥센과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을 꼽으면서 특히 로댕은 당시 생존한 모든 예술가들 중에서 최고라고 덧붙인다.

p23 릴케는 훌륭한 독서 지침을 하나 알려준 것이다. 먼저 당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고 그 책이 마음을 울리면 그 사람의 또 다른 책을 읽어라. 그리고 그 사람의 책을 모조리 읽은 다음에는 그 사람이 인용한 다른 사람들의 책들을 읽어라. 이는 고전을 읽는 가장 훌륭한 독법인 것 같다.

⇒ 나의 독서법!!!

p23~24 예술작품은 끝없는 고독에서 나오는 것으로 비평으로는 도저히 다가갈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예술작품을 이해하고 간직할 수 있으며 그 부당함에 대해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설명이나 서평이나 소개의 글은 무시하십시오. 당신 자신과 당신의 느낌이 옳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따르십시오. 설사 당신이 틀렸더라도 당신은 내적인 삶이 지닌 자연스러운 성장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다른 인식으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이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독자적이고 은밀하게 발전하도록 내버려두십시오. 그런 발전은 모든 진보와 마찬가지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와야 하며, 강요되거나 재촉당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은 만삭이 될 때까지 잉태되었다가 태어납니다. 모든 인상과 감정의 싹이 가슴속, 어둠 속, 무의식 속, 이성으로는 닿지 못할 어떤 불가사의 속에서 완성되게 하고 겸허한 마음과 인내심으로 새로운 명징성이 태어날 시간을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바로 예술적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예술을 이해하거나 직접 창작할 때도 그렇습니다. -릴케

⇒ 많이 고독했는데, 예술작품은 안 나오고 자기한탄만 나온 듯...아직 발전이 안 된 것으로 생각하자. 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깊은 내면으로 침잠하자.

p25 로댕은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표출해내는 작가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예술은 더디게 가기를 원한다. 빨리 가는 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이 확실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해야 비로소 작업을 하는 작가였다. 그래서 그는 한 방울, 한 방울 돌로 파고드는 물같이 느리고 조용한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언제나 망설이다가....같은 망설임이 아니었나, 결과는 확연한 차이가...

   미켈란젤로에게 누군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그 형상은 처음부터 대리석안에 있었다. 나는 필요없는 부분들만 깎아냈을 뿐이다." "나에게 조각이란 돌을 깨뜨려 그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을 꺼내는 작업이다."

p26 릴케는 시를 잉태해 분만하기 위해서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독을 사랑하고 고독이 만들어낸 고통을 즐기다 보면 고통이 아름다운 비탄의 소리를 내게 되고 그 소리가 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까운 사람이 멀어져도 괴로워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가깝다고 느꼈던 사람도 멀어진 것이니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기뻐하고 축하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릴케가 얘기하는 고독이었다. 누구와도 같이 갈 수 없는 자신만의 길에 들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고독의 선물인 성장이다.

⇒ 자신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가깝다고 느꼈던 사람도 멀어진다....나는 나의 세계가 좁아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일견 이 말도, 그런 듯..어쨌든 누구와도 같이 갈 수 없는 자신만의 길에 들어서는 것, 그것은 해보고 싶은 일이다.

p29~30 사랑이 서로를 구속하지 않고 각자 자기 인생을 살아가도록 그 다름을 서로 보호해주어야 우리는 창조적일 수 있다. 릴케가 그렇게 많은 여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고독으로 서로를 보호해주는 관계, 그 자유로운 사랑 덕분에 가능했다.

p31 릴케는 슬픔을 일컬어 무언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슬픔과 고독은 우리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 고독, 슬픔...내면. 아, 예술은 늘 이런 단어와 맞닿아 있다..

타인에 대한 거리두기, 다시 말해 상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도시적 삶의 양식이 ‘자유’라는 감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고독’이라는 치명적인 질병도 함께 도사리고 있지요. 도시인들은 ‘고독’을 치유하기 위해서 ‘자유’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답답함’을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고독’을 감내해야 합니다. 대학가나 일반 회사에서 빈번히 행하는 엠티 혹은 동문회나 향우회 등도 이런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도시인의 ‘고독’을 치유하고자 시골과도 같은 ‘상상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바로 엠티, 동문회, 향우회 등의 목적이지요. 물론 ‘고독’을 치유하려는 과정에서 도시인들은 타인과의 원치 않는 밀접한 관계로 자신의 ‘자유’를 일정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p33 혁명가인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현재 이루어질 수 없는 꿈 하나를 별처럼 품자.” 가슴에 별을 품은 리얼리스트, 이런 모순적 상황이 바로 우리 인간의 조건이다. 가슴속의 별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리얼리스트가 되어 현실 속에서 분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 젊음의 조건이다.

⇒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나 그것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기를....현실적으로는 정말 1만 시간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할 것. 많은 시간의 노력이 꿈을 현실로 이루는 길이 될 것이다.


chapter2 다산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 <다산문선> ‘배움’에 대하여

p34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다. 옳고 그름이 그 하나요, 이롭고 해로움이 그 둘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가지 등급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좋고 옳음을 따르다 해를 입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름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 세 번째이고 가장 추한 것이 그름을 따르다 해를 입는 것이다. 기억하라, 그름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으려 하지만 끝내는 해를 입고야 할 것이다. 기억하라, 옳음을 따르다 보면 해를 입을 때도 있지만 그 또한 나쁜 것이 아니다. - 가와이 에이지로

⇒ 옳음을 따르다 해를 입을 때도 있다. 그 또한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음에 대한 가치가 제대로 서 있어야 할 때. 지금처럼 옳고 그름이 뒤죽박죽이며 오히려 그름이 당당한 목소리로 나아갈 때는 다르지 않을까. 마냥, 때를 기다리며 언젠가는 언젠가는 옳음에 대한 인정을 받으리라, 기다리고 인내하여야 할까?

p38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낳는 이치는 동과 정, 음과 양이 서로 그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이치를 알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이치를 살피고, 흥하고 망하는 운수를 헤아린다. - 정약용

p42 독서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깨끗한 일이다. 호사스러운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가 없고, 외진 시골의 수제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가 없다. 오직 벼슬아치 집안의 자제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고, 중년에 재난을 만난 너희들 처지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독서할 수 있는 것이다. 저들이 독서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뜻도 모르고 그냥 읽기만 하는 것은 독서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정약용

⇒ 독서는, 정말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이다. 책을 찍어 낼 수 있는 나무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글을 써 내는 작가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런 환경이 이어지길 바라고 바랄 뿐이다.

p43 다산은 올바른 독서를 위해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수많은 책을 읽는다 해도 그것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며,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독서는 자기 것이 된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 그 마음가짐의 핵심은 효도와 공경이라고 이야기한다.

p45 누가 봐도 비범했던 다신이 치열한 자기탐색과 수련을 통해 터득한 이 공부법이 과연 평범한 사람에게도 유효한 것일까? 다산은 양계를 시작한 아들에게 ‘계경(鷄經)’을 써보라고 권했다. 아들에게 문재(文才)가 있어서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닭을 치게 되었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니 아주 잘해보라는 격려였다. 닭에 대한 책을 읽고, 연구하고, 홰와 먹이도 바꿔가면서 실험하다 보면 멋진 사육법을 얻게 될 것이니, 그것을 적어 두라는 뜻이었다. 부족한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가장 평범한 사람도 한 분야를 파면 그 일에 대해서만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된다’고 격려해주었다. 얼마나 간단하고 핵심적인 조언인가!

⇒ 슬슬주를 색실에 꿰어 간수하듯 붓과 책으로써....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고, 그것은 앞으로의 나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소박한 공부법, 그러나 치열한..

p49 '수오‘는 나를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나란 나의 본성을 의미한다. 나의 정체, 사실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평생을 나를 찾아다니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인 것 같다.

⇒ 나도 나를 잘 모른다. 안다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며 또 다른 나가 끼어든다. 정녕 삶은 나를 찾는 여정인건가.

p50 다산의 당호인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함이여, 겨울 시냇물을 건널 때처럼 조심하고, 유함이여, 사방에 다 듣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경계하라”에서 앞 글자를 따 ‘겨울 냇물을 건널 여’에 ‘사방을 두려워할 유’를 붙여 스스로 근심하고 경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p54 다산이 주장하는 토지제도는 이 모두를 보완한 여전제(閭田制)였다. 그에 따르면 우선 산골짜기와 시냇물을 중심으로 구역을 정하고 그 구역을 ‘여’라고 부른다. 대략 세 개의 여가 모여서 리가 되고 다섯 개의 리가 모여서 방이 되고 다섯 개의 방이 모여서 읍이 된다. 가장 작은 단위인 ‘여’에는 여장을 두어 공동 생산을 한다. 이때 각자의 노동량을 모두 기록했다가 나중에 이에 따라 수확을 차등 배분한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해도 땅이 좁고 토지가 척박해서 소출이 적으면 사람들이 떠나갈 것이다. 이렇게 10년 정도 자유롭게 이동하다 보면 안정될 것이고 이때 세액을 정하면 백성들이 안락헤 잘살 수 있을 것이다.

p56 선비는 평생을 배우는 학인(學人)이다. 그러면 이렇게 배워서 무엇을 할까? 지행합일(知行合一) 또는 학행일치(學行一致), 즉 삶 속에서 실천한다. 그래서 선비에게 또 다른 중요한 덕목은 수기(修己), 즉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다. 요컨대 선비란 학문을 익혀서 자기를 다스림으로써 이득이 되지 않아도 마땅히 지킬 것을 지키고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 배움은 배움 자체로서가 아니라 ‘행동’과 합일되어야 한다는 것...

p57~58 다산이 보기에 차별과 불평등을 바로잡는 것은 결국 정치였다. 그러나 평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로 이어져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해진다. 그래서 자유를 통한 성장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와 성장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듯이 자칫 양극화를 불러올 수 있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양극화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권력자의 책무다.

⇒ 세상의 많은 가치, 지켜져야 할 가치, 그 하나하나로서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들 모두가 조화롭게 이루어져야만 세상은 정말 살만한 것일 테다.

p60 다산은 명분론에 붙잡힌 허명뿐인 선비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던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선비의 본질에는 의리를 지키되 인정을 잃지 않고, 명분을 내세우되 실리를 버리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선비의 아량과 포용력이라는 것이다. 다만 선비는 곡학아세(曲學阿世), 즉 정도에서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는 일만은 삼가야 했다. 늘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중용을 지키는 선비의 길, 다산이 강조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chapter3 천 개의 운명과 변신… 모험을 선동하라! - <그리스 로마 신화> ‘도전’에 대하여

p61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은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화적 문맥을 읽어내는 것이다. 자기 것만 읽으면 독선과 독단에 갇히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것을 읽으면 메시지와 통찰을 얻게 된다.

⇒ 서양과 동양의 언어 차이가 생각난다. 관계지향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동양. 동양인의 문화적 맥락과 상황 중심의 언어를 구사한다고 하는데, 가만 보면 전혀 아닌 듯하다..관계성이 지나쳐 오히려 독선과 독단에 갇힌 사고와 언어를 내보이고 있는 게 아닐런지.

p62~63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추상적인 개념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의인화시켜 신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의 행적은 장대한 서사시가 되었다. 신화 속의 신들은 ‘몸을 입고 나타난 자연과 우주의 힘’이었던 것이다.

⇒ 추상을 형상화하는 힘. 이것이 작가의 힘이 아니겠는가.

p63 신화는 인간을 벗긴다. 아무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원시를 보여준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날것들을 신에게 뒤집어씌운 이야기들이다. 동시에 인간의 미덕과 통찰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신화란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로서 벌거벗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상징을 통해 들려준다.

p67 그리스인들이 품은 야생의 사유는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대목에서 피리의 절대 고수가 되기까지 몇 번이고 껍질이 벗겨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마르시아스의 예술 혼과 만나게 된다. 신을 닮으려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은 신이 우리에게 준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삶을 다 바쳐 그것이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고통을 딛고 창조적인 진보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도전임을 신화는 이야기한다.

⇒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몸이 떨린다. 껍질이 벗겨진다는 것이 매우 현실적인 통증으로 다가온다. 나는 껍질이 벗겨질 텐가, 절대 고수가 될 것인가.

p73 영웅들은 불운함에서 위대함으로 도약한 사람들이다. 이 도약의 순간이 중요하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나를 모험으로 초대하면, 내 마음이 그 모험에 응하면 두려워하지 말고 따라나서라. 조지프 캠벨은 그런 이야기를 한다. 내 마음속에 울리는 무엇인가가 생겨나면, 정말 그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집어넣는 마음으로 시작해라. 칼날 같은 길을 따라가라. 그 위험한 길이 네 길이다.

⇒ 마음 속 북은 늘 울렸던 것 같은데..늘 제자리인 이 느낌은 뭐지?

p74 만일에 에우리디케가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발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결국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야기에는 엄청난 상징성이 있다. 은둔의 철학자로 알려진 모리스 블랑쇼는 이를 “닿는 순간 사라지는 이 미칠듯한 부재”라는 말로 표현했다.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며 사라지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손 끝에 닿는 것은 바람뿐이었다고 묘사한다. 이 공허감이야말로 예술가들의 한계를 의미한다. 예술가가 영감을 받아 그려낸 무언가는 그의 머릿속에 떠올라 가의 가슴을 울렸던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뭔가 잡을 듯했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놓쳐버린 안타까움, 이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이 타고난 비극일 수밖에 없다.

p75 삶은 에우리디케처럼 사라질 것이다. 붙들 수 없는 것이다. 삶을 통해 얻었던 진귀한 체험들과 보석 같은 깨달음 역시 얻었다고 믿는 순간 사라져버리고 마는 허무한 것일지도 모른다. 할 수 없다. ‘에우리디케의 얼굴에 머물던 오르페우스의 마지막 시선’, 그 시선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단명한 삶을 시로, 노래로 살아야 하는 필멸의 인간이 지닌 운명이다.

⇒ 인간이 지닌 운명, 그리고 예술혼을 지닌 이의 운명. 늘 그렇게 안타깝고 애타게 혼을 불태워야 하는 숙명.

p77 "네가 네 사랑에 대해 그렇게 믿음이 강하지만 네 아내도 그럴까?“ 에오스가 케팔로스에게 남긴 이 말은 모든 관계의 아픔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사랑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늘 작은 것에 걸려 넘어진다. 사소한 오해로 위대한 사랑도 깨져버리는 것이다.

p79 과학자와 엔지니어와 발명가의 시조였던 다이달로스의 불행은 ‘왜?’라고 묻지 않는 그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노스 왕의 부인인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암소를 깎아준 것이 다이달로스였다. 그 결과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이 태어났다. 그는 주문자의 의도는 묻지 않고 맹목적으로 만들기만 했다. 이런 태도는 현대에도 문제가 되었다. 물리학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자기의 연구가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탄식했다. 이것 역시 ‘왜?’라고 묻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의 노력이 인류의 행복과 평화에 쓰이는지, 아니면 인류의 불행과 파멸에 쓰이는지 묻지 않았다는 것, 사유하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죄였던 것이다. 진정 존경받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고 싶다면 나의 능력과 기술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를 생각하는 사유하는 다이달로스가 되길 바란다.

⇒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유의 부재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인 답만을 맞추도록 가치와 정의에 대해서는 외면하도록 부추긴 계속 이어진 오늘날의 상황이 만들어진 비극이다.

p81 시시포스에 대해서는 알베르 카뮈의 해석이 가장 철학적이다. 그의 처방은 이렇다. “반항하라. 쉽게 평화를 갈구하지 마라. 나와 세계 사이의 팽팽한 대립에 굴복하지 말고 대립하라. 자유로워져라. 희망과 내일이 없는 조건 속에서 순수한 불꽃 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해라. 이것이 자유의 원리다. 열정을 가져라. 열정이란 주어진 모둔 것을 소진하는 것이다. 삶을 필사적으로 불태우고 최대한 많이 살아라. 이것이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전장, 도전의 원칙이다.”

⇒ 시시포스...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일을 하는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의 대명사로 묘사되곤 하던...아, 여기에 반항이라. 자유라..!

  반항하는 인간은 누구인가? ‘농(no)’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는 거부하지 체념하고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반항 운동의 시초부터 ‘위(yes)’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 이처럼 반항 운동은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되는 침해에 대한 절대적 거부에 근거해 있음과 동시에, 정당한 권리에 대한 막연한 확신, 보다 정확하게는 반항하는 사람이 가지는 “~할 권리가 있다”는 느낌에 근거해 있다. 반항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곳에서든 스스로 옳다는 감정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반항하는 노예가 ‘농’과 동시에 ‘위’를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그는 경계선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가 짐작하여 경계선의 이편에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그는 자기 속에 “애써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것, 사람들의 주의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열심히 증명하려고 한다.   - 카뮈, 반항하는 인간


chapter4 미친 듯이 사랑하고 미친 듯이 이별하라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고뇌’에 대하여

p82 실패란 무엇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인한 결과다. 두려움은 사랑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초록별 지구를 사랑하라. - 웨인 다이어

⇒ 실패가 두려움에 의한 결과라는 것. 많은 실패를 경험한 바로 매우 공감이 간다.

p83 괴테가 사회의 금기를 깨는 작품을 쓰기까지의 과정도 소설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 괴테는 “나는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다. 다만 어떤 한 줄도 내가 체험한 그대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베르테르의 이야기 역시 괴테의 이야기이되, 베르테르는 괴테가 아니다. 괴테의 체험이 그의 안에서 순화되고 편집되고 재창작되어 베르테르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p86 사랑은 인생의 발화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폭발한다. 이 굉장한 사건이 나와 다른 사람을 섞어버리면서 나와 그 사람의 경계가 없어지고 그의 눈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를 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경험이 우리를 영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에 접근해간다.

⇒ 삶은 자기다움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하는데, 가장 아름다운 자기 모습에 접근해 가는 것은 사랑이라는 경험이라면 삶은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까.

p87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친근한 사람까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일은 당연히 악덕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각자 마음속에 간직할 기쁨마저 빼앗아야겠습니까? 불쾌한 기분에 젖었으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불쾌감을 감추고 홀로 참아내는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오히려 불쾌한 기분이란 자신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속의 불만이 아닙니까? 자기혐오 아닙니까? 그런 자기 불만은 한심한 허영심이 일으키는 질투심과 언제나 결합되어 있죠. 자기가 행복하게 해준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을 견뎌내지 못하지요.“ - 괴테

⇒ 내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필요하다. 어차피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이니까 말이다. 행복한 사람을 견뎌내지 못하는 우리, 진정 내 안의 허영심과 질투때문이었구나. 불쾌감이란 감정은 진정 어리석은 욕망이었다.

p89~90 "당신 같은 사람들은“하고 내가 소리쳤네.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바로 ‘그건 바보짓이다. 그런 현명한 일이다. 그건 좋다. 그건 나쁘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게 뭡니까? 당신들은 어떤 행위의 밑바닥을 모두 파헤쳐보셨습니까?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명확히 밝혀보았던가요? 그랬더라면 그토록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겠지요.“ - 괴테

⇒ 모든 일은 사실과 진실로 나뉜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의 눈을 가지고 진실을 찾아 나서야 한다.

p90~91 "격정에 휩쓸리는 인간은 모든 사고능력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만취자나 미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아, 이성적인 인간들이란”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소리쳤네. “당신들은 격정! 만취! 광증!이라고들 하지요. 당신들 같은 도덕군자들은 만취자를 비난하고 미치광이를 혐오하면서 저 제사와 같이 그 옆을 지나갑니다. 그리고 바리새 사람처럼 하느님이 당신들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하지요. 나는 몇 번이나 취해보았어요. 나의 격정은 광증과 다를 바 없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위대한 일이나 불가능한 일을 해낸 비범한 인간은 옛날부터 만취자나 미치광이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내 나름으로 터득했기 때문입니다.”

⇒ 아, 이성적 인간들이란...나는 이성적인 인간이고 싶은데 이런 글들이나 행동들을 보면 참 감정적인 사람이구나 싶다. 격정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란 말이다. 즉 아직 미성숙한 사람인 듯, 나의 이 성숙함은 언제나 완성될련지.

p91 청춘은 쉽게 위로를 원치 않는다. 청춘은 격정과 고뇌를 거쳐서 성숙된다. 심장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시도했다는 의미니까. 원하는 것, 가슴의 언어를 좇다 보면 고통이 따를 수 있지만 그것이 바로 삶이다.

p92 청춘의 격정과 고뇌를 다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당대 새로운 문학사조였던 질풍노도 문학을 대표했다. 그래서인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이성주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새로 불어오는 슈트름운트드랑(Sturm und Drang), 즉 질풍노도 운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성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리히텐베르크, 레싱, 칸트 등은 질풍노도 운동에 우려를 표하기까지 했다.

⇒ 이제야 말하지만 질풍노도의 시기는 어느 한때로 정해지는 것이 아닌듯 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기도 하고 자신을 찾는 것,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이 그것이라면 질풍노도의 시기는 어느 발달단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p96 한때는 사랑으로 온 세상이 환했지만 이제는 점점 암흑으로 변해간다. 마치 꽃봉오리가 폈다가 떨어져 시드는 것 같다. “사랑이야말로 저항할 수 없는 욕망으로 욕망하는 것”이라는 버트런트 러셀의 말처럼 베르테르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의 욕망과 열병에 빠져들어 한때는 꿈같은 행복을 누렸지만 이제 그에게는 절망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러셀은 “이 세상에 모든 조심성 중에서 사랑에 조심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포기하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지만 사람에 대한 사람, 그 상처가 두려워 사랑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구원받을 수 없다“

   

chapter5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찾는 삶 - <허클베리 핀의 모험> ‘성장’에 대하여

p102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성한 정신이다. 그러나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싸늘한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물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사무엘 울만

⇒ 맞아, 청춘이란,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언젠가는 청춘이고 싶기보다는 노년이고 싶었다. 오랜 경험의 완숙미와 여유를 가지고 싶었었다. 불완전하고 미숙하고 뭔가 자꾸 흔들리는 청춘에 대해 잊고서 말이다. 그런데 청춘이란 자꾸 뒤돌아보게 만드는 단어이다.

p104 "어떤 사람은 지위를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영웅을 숭배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권력을 좇고, 또 어떤 사람들은 신을 숭배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인 사실 하나는 한결같이 모두 돈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

⇒ 돈이 생겨난 이래, 정말 무시하지 못할 그 힘. 그에 의해 모든 희로애락이 생기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든 결국 돈은 숭배되고 있다. 아닌듯해도.

p104 자본주의의 핵심은 햇빛이 날 때 우산을 빌려 주었다가 비가 내리는 순간 돌려달라고 하여 이익을 높이는 메커니즘이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 자본주의적 삶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강신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그것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에게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란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깊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겠지요. 정열적인 시인들로부터 냉철한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문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의심하고, 나아가 상처받은 인간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p104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펼치면 대뜸 경고의 글이 나오니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동기를 찾으려고 하는 자는 기소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으려고 하는 자는 추방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서 군 사령관.G.G."

⇒ 당대의 얼마나 많은 책들이 무수한 경고문을 달았어야 했는지, 찢겨져야 했는지, 출간도 되지 못했는지를 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책 앞에선 경건해지기보다 더욱 날뛴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행해지는 악행들. 그 속에서 사라져간 많은 안타까운 글들과 사유...

P107 거짓말도 그 자체로는 악덕이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연히 나쁜 일이다. 그러나 어린 소년이 외부의 억압에 맞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또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는 이를 임기응변이라고 부른다.

⇒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서 관대한 편인 것 같다. ‘선의의 거짓말’을 판별하는 기준이나 가치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인데, 최근 기사에서 “선의의 거짓말도 처벌받는다”를 접하고 놀라 기사를 접했다. 그 내용은 범죄를 저지른 지인을 위해 대신 죄를 뒤집어썼다가 발각되었다는, 음주운전을 한 적이 있는 이가 가중처벌이 될 것을 걱정해 지인이 대신 운전을 했다고 한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본 순간, 당연 이것은 ‘선의의 거짓말’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친구를 지키기 위한 거짓말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부당함에 맞선 것도 아니오, 잘못된 행동에 대한 두둔이지 않은가. 세상에는 이런 잘못된 ‘선의의 거짓말’들이 넘치는 듯하다. 자기 이익을 위해 행하는 일을 ‘너를 위해서’라는 포장으로 둔갑되어 많은 거짓말들이 정당화를 외치며 이루어진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P115 "좋아, 그러면 지옥에 가자.“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한마디다. 소년이었던 헉이 훌쩍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한마디이기도 하다. 헉이 들여다본 어른의 세계에서 노예는 주인에게 묶인 채 도망가면 안 되는 존재다. 그래서 헉은 탈출한 노예인 짐과 함께 있으면서 당연히 죄의식을 갖는다. 사회가 원하는 것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괴리는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헉은 ‘짐은 내 친구야.내가 도와줘야 돼. 맞서 싸워야 해. 지옥이라도 가겠어’라고 각성하게 된다.

⇒ 어리기 때문에, 어린 것은 순수하기 때문에라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어린’ 이유가 아니라 삶에서의 가치를 무엇을 두느냐의 생각과 의지의 발로다. 요즘처럼, 수많은 청소년들의 생각없음이 만연한 상황을 보면 이 시대의 교육이 어떻게 흘러 가고 있는지 안타깝다.

P120 어떻게 보면 흑인들은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자유인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흑인들 사이에는 우리가 ‘쟁취한 자유’가 아니라 ‘수동적 자유’, 다시 말해 백인이 찾아준 자유라는 인식이 있었다. 오랫동안 심리적으로 부채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짐이 가만히 있다가 왓슨 양 덕분에 해방된 것이 아니다. 짐은 스스로 자유를 찾아 나와 온갖 고난을 겪었다. 짐은 자기 힘에 의해 그리고 친구의 도움에 의해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자유를 찾았고 왓슨 양은 그저 그렇게 쟁취된 자유를 인정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남북전쟁 이면에 가려져 있던 자유를 향한 노예들의 투쟁을 기리고 있는 셈이다.

P121 마크 트웨인이 말했듯이 “교육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chapter6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에 대하여

p122 메뚜기 한 마리가 어깨에 앉았다. 그 순간 나는 소나무가 되었다. 아몬드나무가 꽃을 피워냈다. 나는 젊은 여인의 얼굴에서 노파의 얼굴을 읽어내려는 태도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리스라는 노파의 얼굴에서 이제는 사라져버린 소녀의 생기와 젊음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 메뚜기 한 마리가 어깨에 앉았다. 그 순간 나는 펄쩍 뛰며 메뚜기를 털어낸다....나는..나는 무엇들을 읽어내고 있는 것일까.

P122 우리는 현대의 시시포스다. 끊임없이 굴러 내리는 바위를 언덕으로 밀어 올려야 했던 그처럼 우리는 돈의 노예로, 시간의 노예로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노예의 삶을 거부하는 그리스인 조르바. 그에게 자유란 화산에서 거침없이 뿜어 나오는 용암과 같았다. 그를 통해 무엇을 가짐으로써 얻는 자유가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따라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치열한 삶의 목소리로, 과장되지 않은 맨얼굴의 언어로.

⇒ 노예의 삶을 거부했는데, 여전히 노예이다. 물리적인 노예에서 벗어나 참으로 노예를 벗어나는 줄 알았건만 더욱 더 또렷하게 부각되는 밥..그리하여 또 다시 노예로..완전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신적인 자유를 얻기 위한 기나긴 투쟁!

P124 어느날 조르바는 살구나무 묘목을 심고 있는 노인에게 다가가 왜 묘목을 심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처럼 삽니다.”

     그러자 조르바가 말했다. “나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삽니다.”

⇒ 내일 죽을 것처럼 사는듯해도 열정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 나. 진실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좀더 강력한 펀치가 필요한 것일까.

P125 얼핏 조르바는 제멋대로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르바는 가치관이 아주 뚜렷한 사람으로 세상과 몸으로 부딪히며 인생을 배워왔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순간 우리는 ‘아, 이런 삶도 존재하는구나, 이렇게 살아도 참 좋겠구나’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가운데 다른 사람이 강요한 윤리가 아니라 나의 윤리대로 살아가는 자유인, 그가 바로 조르바다.

⇒ 나의 윤리대로 살아가는 자유인~! 아닌듯 하면서도 나는 나의 윤리대로 살고 있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그럼 또 난 그런가? 싶다가도, 아닌 것도 같고...

P130 조르바에게 춤은 기쁨뿐 아니라 슬픔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 앞에서 춤을 췄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리는데도 그는 춤을 춘다. 그의 행동은 비상식적이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행동, 조르바에게 춤은 유희나 놀이 같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저 가장 진실한 자기표현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슬퍼도 춤을 추고, 기뻐도 춤을 춘다. 마음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슬픈 순간의 춤은 일종의 살품이인 것이다.

⇒ 구본형 선생님도 춤을 추셨다고 했던가. 마지막을 축제처럼...모두가 그렇게...축제라는 책이 잠깐 스친다.

P130 나는 침대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마음이 심란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이 되기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들에 변명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내 인생을 돌아보니 미적지근한 데다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

     - 니코스 카잔카키스

⇒ 인생을 돌아보면 가장 후회되는 것이, 내 인생의 색깔과 온도가 미지근하다는 것!

P135~136 조르바와 오르탕스 부인의 관계가 사랑인지 아닌지.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이 든 사람들의 추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핵심에는 서로가 베터 퍼슨(better person), 즉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것도 포함된다. 왠지 이 사람하고 있으면 내 마음속에 선함이 가득 차고 인류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고 기쁨이 가득 차는 것.

p138 사실 조르바는 주어진 삶에서 절대로 후퇴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질문한다. 이 질문이 바로 그럴듯한 답을 이끌어내는 위대한 질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답에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이제는 질문에 익숙한 사회, 질문이 더 위대한 사회로 옮겨갔으면 한다.

p143 모든 사업이 쫄딱 망하던 날 ‘나’는 조르바가 자신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춤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점잔만 뺐던 ‘내’가 드디어 춤바람이 났다. 어떻게 ‘나’와 조르바는 사업이 망했는데도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을까? 모든 것이 실패하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드는 해방감과 성숙이 두 사람을 지배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 얘기를 한다. ‘내 혈관 속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가슴은 선한 마음이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양이었던 사람이 사자가 되었다. 인생의 슬픔은 잊히고 고삐는 사라졌다. 짐승이고, 하느님이고, 모두가 인간과 화합하는 우주의 일부가 되는 기분이었다.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이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내‘가 아니라 마치 조르바가 말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친 것과 해탈은 백짓장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을 축복으로 생각하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고독과 싸우는 것입니다. 고독해지는 내 모습과의 싸움입니다. 세계를 풍경으로 볼 게 아니라 세계에 몰입할 걸 찾아야 해요. 그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건 맞아요.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커다란 행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떨어져 나오면 아무것도 못 만지는 세상만 남아요. 그 순간 우리는 제대로 몰입할 대상을 만날 가능성마저도 잃게 되겠지요. 그러니 용기를 내야죠. 제대로 살려면,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에게는 몰입할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니까요. 모기에 물릴 각오로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물고기를 잡는 행운을 기대할 수 있겠어요? -강신주

p144 '나‘는 조르바를 통해 원시를 만났다면 조르바는 ’나‘에게서 무얼 얻었을까? 아마 원시인 조르바는 ’나‘에게서 문명을 갖다 쓰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마 두 사람은 원시와 문명을 나누지 않았을까? 결국 두 사람의 만남은 선과 악, 원시와 문명, 이런 대극적 가치들을 통합할 기회가 아니었을까.

⇒ 타인은 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그들에게 무엇을 줄 만큼의 역할을 가지고 행동하는가. 물론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나도 모르게 나에게서 좋지 않은 가치들만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도 참 슬픈 일일 것이다.

p145 "아니에요. 두목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르죠. 그것뿐이에요. 두목, 당신은 긴 줄에 묶여 오고 가면서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를 거예요.”

     나는 오기를 부렸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 늘 언젠가는 자를 거라 외치지만 그럼에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나의 줄...한쪽 발을 걸치고서..늘 걸치고 있다....어느 한쪽이라도 완전히 발을 빼야 어느 방향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

p148~149 어떤 삶에 던져지든 그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조르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뭔가를 깨달아가며 생의 도약을 하던 사람. 현실 도피란 없는 사람. 나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 생각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아마도 뇌와 심장이 누구보다 가까웠을 사람. 마초 중에 마초고 고집도 세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던 사람. 마냥 불사신같던 조르바가 죽었다. 생전에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해본 조르바는 죽음의 순간 아직 자기가 해보지 못한 것이 많다고 아쉬워한다. 그럼에도 그에게 죽음은 환희였을 것이다.

⇒ 한때는 오기로서도, 진중하게 열정적으로 살았더랬다. 어느 순간 이렇게 풀려버리게 되었을까. 내 삶에서 생에서 과거를 되돌아 보았을 때 무엇이 나를 오늘의 나로 만들었을까. 내게도 죽음이 환희가 되려면 살아 있는 이때,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이다. 무엇엔가 미련이 생기지 않도록..

p149~150 날 데려가시겠소? 그럼 난 당신의 사람이 되겠소.

     난 정말 일을 잘하는 사람이오.

일할 때는 날 건드리지 마시오. 뚝 부러질 것 같으니까.

일에 몸을 빼앗기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 그 자체가 될 만큼 긴장한단 말이오.

그러니 당신이 날 건드리면 난 부러질 밖에.

그러나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거요.

인간이 뭔지 아시오? 자유요, 자유.

자유가 뭔지 아시오? 확대경으로 보면 세균이 물속에 우글거리지.

어쩔 테요. 갈증을 참을 테요. 확대경을 부숴버리고 물을 마실 거요?

난 물을 마실 거요. 그게 자유요.

……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외칠 수 있으면..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무언가 두렵다. 내가 사는 세상은 늘, 이렇게 불완전하다. 좀더 자유로울 수 있기를..그 희망을 위해 산다.


chapter7 비범한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은 정의로울까? - <죄와 벌> ‘정의’에 대하여

p152 정의의 문제는 늘 그 시대의 눈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한 사람은 악을 응징함으로써 선을 표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오직 세상 속에 선을 확대하고 선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례로 구현함으로써 사람들을 일깨우고 참여하게 만든다. 폭력을 응징하는 폭력이 정의가 아니듯, 테러를 응징하는 테러 또한 선이 아니다. 뒷골목 조무래기 깡패도 자신의 세력 확장을 위해 그렇게 한다. 그래서 힘은 곧 선이 아니며,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보복은 보복을 낳고 피가 피를 부르는 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며, 역사의 교훈이었다. 잘못 사용된 힘처럼 위험한 죄악은 없다.

⇒ 시대를 초월한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것. 절대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것...

p157 작가의 인생처럼 병적이고 음산한 분위기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이런 음침한 속에 드러나는 도스토엡스키의 매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형 취소 직후에 형한테 보냈던 편지를 읽어보아야 한다. “형, 나는 기운을 잃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서 살든 그것 역시 삶이고 삶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떤 재난이 몰아닥친다 해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바로 거기에 인생의 과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스토옙스키는 어둡고 음산한 가운데도 기대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p160 라스콜리니코프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나폴레옹과와 이과. 이과는 말 그대로 사람의 몸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이를 의미한다. 반면 나폴레옹과에 속한 비범한 인물들은 선악을 초월한 존재들로, 새로운 윤리, 법,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살인, 방화, 파괴 등이 허용된다.

     이는 벌벌 떨면서 기존의 질서를 쫓아가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을 은유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 같은 사람은 이 같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세도 가장 비루하고 끔찍하고 간악하기 때문에 존재 가치가 없으니 자신처럼 나폴레옹과에 속한 사람이 인류를 위해 죽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생각을 실행한다.

p165~166 "나는 비범한 사람이 불법한 행위를 저질러도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렇게 암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말한 비범한 사람은 어떤 종류의 장애를 초월하는 권리를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공식적인 군리는 아니라 자기 양심을 뛰어넘을 권리입니다. 그것도 그의 사상이 인류를 위한 신념으로 인정받을 때나 인정되는 거죠. 내 논문을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자세히 설명해드리죠. (……) 리쿠르고스, 솔론, 마호메트, 나폴레옹 같은 사람들은 새로운 법을 만들고 그 법으로 사회 질서를 파괴한 것만으로도 이미 범죄를 저질렀어요. 그들은 피를 흘려야 할 상황이 닥치면 서슴없이 피를 쏟게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까지 인류를 위한 개혁가나 입법가들은 모두 소름 끼치는 살인자입니다. (……) 누구든 위인까지는 못 되더라도 남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사람은 본질적으로 범죄자를 면하지 못하니까요.(……)“- 도스토옙스키

p167 포르피리의 질문대로 ‘법을 초월할 권리를 가진 비범한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눈 사실 도스토옙스키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 법을 초월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법을 다시 만들어야지...

p171 포르피리는 법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법이란 권리와 자유를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회적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정의의 최전선에 세워둔 첨병이다. 하지만 법으로 정의가 완벽하게 지켜지는 것일까?

⇒ 그나마 법이라도 있으니 최소한 지켜지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법이라는 것이 전혀 필요없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법이라는 것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고 그 적용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사람이 법이다! 이 진리만 지켜줄 수 있다면.

p180 1633년 로마의 종교재판정에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신성모독과 불복종이라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360여 년이 지난 1992년 교황청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내려졌던 그 당시의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과거의 법은 유죄를 판결했고 현재의 법은 무죄를 판결한다. 법은 정의를 판결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며 유동적인 기준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법을 대신할 정의의 기준으로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죄와 벌>을 통해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chapter8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 <데카메론> ‘성’에 대하여

p181~182 고전 목록에서 <데카메론>이 빠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건강한 ‘성적 욕망’을 다루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나는 <데카메론>을 읽을 때마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여름날 빨랫줄에 널려 있는 속옷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가 ‘성’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하는 음침하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것이 아니라 뽀송뽀송하고 빳빳하고 비누향이 향긋한 속옷 같은 유쾌함이 있다는 뜻이다.

⇒ ‘성’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밝고 경쾌해질 수 있건만, 갇혀 두고 더러운 이미지만을 부각시키니 음지로만 빠져드는 것 아닐까.

p191 기본적으로 <데카메론>을 읽을 때는 선악의 판단을 접어두어야 한다. 극한의 상황을 피해 숨어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누는 재미있는 음담패설이기 때문에 선악의 판단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수녀들도 도사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상식을 깨는 수녀들의 행태가 낯설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오, 이성주의자들이란! 앞서 베르테르가 얘기했듯이 미리 판단치 말고 상황을 보면서, 생각을 해야 하겠지.

p199 사랑하지만 집착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직 관계만을 원할 뿐, 관계를 통해 다른 것을 원치 않을 때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러나 사랑은 종종 집착으로 이어진다. 사랑이 집착으로 흐르지 않게 막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가 아니니 집착하는 순간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자신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되 집착하지 않는 것, 이 어려운 존재 방식이 인간 삶의 과제가 아닐까? 주어진 본성 속에서 개인에게 남겨져 있는 그 선택에 따라 우리는 성자도 악한도 될 수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 그 스펙트럼은 너무나도 광범위한 것 같다.

⇒ 알랭 바디유는 말했지.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p205 농담이 성공할 때 ‘친교’는 두터워진다. 친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웃는다면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소중한 일이다. 우리가 같이 웃는 그 순간 뿌리 깊은 인간적 갈망이 충족된다. 같이 느끼고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서로에게 닿는 것이 바로 농담인 것이다. 여기서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사람들을 웃겼던 농담들을 통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가 될 것 같다.

  

chapter9 새로운 인간학의 탄생 - <향연> ‘사랑’에 대하여

p215 재능이란 사랑만큼 신비한 것이다. 그것은 돌연 그것이 아닌 것들을 버리게 하고 아무 보상 없이도 온 몸을 바치게 한다. 또한 욕망처럼 커다란 자기 격려는 없다. 하고 싶은 것을 통해 배우는 우리는 유일한 자기가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은 다짐이 없이도 우리를 늦게까지 깨어 있게 하고, 새벽에 일어나게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다른 일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것은 떠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야 한다.

⇒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깨어 있긴 하다. 다만 내 눈이 흐리멍텅한 채로 있느냐 아니냐가 달라질 뿐.

p215 이런저런 사랑의 정의 중에 프랑스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샤토브리앙의 말이 인상에 남는다. “사랑은 커지지 않는 순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새로운 사랑의 방법과 언어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자니 사랑에는 정말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p216 소크라테스는 다른 4대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저서를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통해 기억을 환기시킬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문자를 믿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고, 결국 문자는 진리 자체를 나타내지 못하고 오직 진리의 외피만을 나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자에 대한 불신 탓에 그는 저서를 남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처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그의 사상과 행적에 대해 기록을 남겨두었다. 특히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p222 원래 사람은 둘이 한 몸이었다. 그래서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 남자와 여자가 붙은 세 종류의 성이 있었다. 완벽한 존재였던 인간에게 위협을 느낀 신이 인간을 갈라놓는다. ‘반쪽을 찾아다닌다’는 말은 바로 <향연>의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완벽한 존재에서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면서 그 결핍, 소외, 부재에서 욕망이 생겨났다. 이는 서양철학의 중요한 가설로 아리스토파네스에게서 시작되었다.

⇒ 아, 그래서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했던가.

p223 소크라테스의 논지는 간단했다. 결국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동사이니 대상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에로스가 사랑한다고 하면 그 대상은 무엇일까? 바로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하므로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에로스 자체가 아름답지 않아서다. 그러니까 에로스가 아름답다는 아가톤의 주장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p224 철학자 헤겔은 “인간의 욕망은 충족보다 늘 한 걸음 앞서 간다”고 말했다.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에 결핍이 일어나고 그 결핍이 다시 욕망으로 바뀌면서 끊임없이 욕망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학의 저주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한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라캉, 《에크리》

p225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좋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왜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는가’라는 또다시 물을 필요가 없지요. 답은 여기서 끝나기 때문이죠.“

    “옳은 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런 욕구와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언제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까? 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공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 그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언제나 사랑하는데 왜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모를 것도 없네요. 우리가 여러 가지 사랑에서 한 가지만 떼어내 여기에다 사랑이라는 전체 이름을 붙여놓고 다른 사랑에는 다른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죠.” - 향연

p227 '사랑에서 그 일부를 떼어내 거기에다 사랑이라는 전체의 이름을 붙여 놓고 다른 부분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플라톤은 사랑 그 자체, 그러니까 사랑의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그 이데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한 단면에 사랑이라는 이름 전체를 붙인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을 한 사람, 한 무리, 그리고 인류 전체로 넓혀가다가 결국 사랑 그 자체에 이르는 것이다. 디오티마의 이야기는 사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린 플라톤의 철학이다.

p227 무지에 따르는 어리석음, 무지로 인한 만용 등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생각을 통해 옳은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실용성이 아닐까 한다.

p229~230 <향연>에서 가장 중요한 의견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원래 하나의 완전한 존재였던 인간이 쪼개지면서 상실, 결핍, 소외, 분리, 부재함에서 욕망이 생겨났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욕망론이다. 두 번째는 디오티마의 욕망론이다. 반쪽을 찾는 욕망이 절대적이더라도 그 반쪽이 아니라면, 그래서 전체가 되더라도 선한 전체가 아니라면 욕망을 채워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디오티마는 단순히 지식만이 아니라 지식도 낳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정신적 임신, 이것이 바로 지혜와 절제와 정의다. 지식에 대한 열정도 근본은 에로스에서 비롯된다.

욕구나 욕망은 모두 어떤 결여를 전제로 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욕구가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욕망은 단순한 충족을 뒤로 미루고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구보다 좀 더 복잡합니다. 욕망이란 욕구가 기묘하게 뒤틀려져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욕망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지요. 인간과 달리 동물은 단순한 욕구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동물이나 인간은 모두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배고픔에 대한 직접적인 충족을 미룰 수 있습니다. 인간은 애피타이저를 먼저 먹고 완전한 충족은 뒤로 미루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p233 사랑이 어떻게 냉정할 수 있느냐고, 쿨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랑 그 자체와 통찰만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도 있다. 우리의 사랑이 새로워질 때마다 우리는 사랑 그 자체에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사랑을 하면 할수록 사랑이 자라고 그 외연이 넓어지는 것은 아닐까?

⇒ 영화의 한 장면으로 무수히 패러디 된 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사랑에 대한 무수한 정의가 많지만 사랑은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가장 마음에 와 닿을 듯하다. 사랑이라는 순간에는 그 어느 문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러나 그 사랑이 끝나고 나면 세상 모든 글귀들이 내 것인 것만 같은 착각..



Part 2  거침없이 모험을 선동하라


chapter10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 - 「오디세이아」 ‘인생’에 대하여

p237 “자넨 왜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왔나?”

     “불행을 찾기 위해서지요.”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즈>

⇒ 조만한 불행을 찾기 위해 뛰쳐나갈 예정이다.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행에 맞서 자신을 견고하게 단련할 수 있다. 편안함만 알고 있다면 인간이라면 겪어야 할 고통이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될 수도 있다. 즉 자발적 불편함은 일종의 예방주사인 셈이다. 아주 강도가 약한 미량의 바이러스에 자신을 노출시켜 우리를 쇠약하게 만들 수도 있는 질병으로부터 지켜줄 면역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자발적 불편함은 보험료라고도 볼 수 있다. 일단 지출하면 수혜를 받을 자격을 주는 보험료 말이다. 언젠가 우리가 불행의 희생양이 될 때, 우리가 경험했던 불편함은 원래 겪어야 하는 것보다 그 강도를 상당히 약화시켜준다. -윌리엄 어빈, 직언에서.

p238 초라한 것, 불완전한 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 완전함을 향해 항해한다. 그래서 인생은 항해고 모험이다. 흰 구름이 비치는 푸른 바다가 갑자기 까매지면서 풍랑이 이는 장면보다 인생을 더 잘 비유하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행복한 삶을 늘 바라지만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들이 생기고 불운과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이 곧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험이나 불행이 닥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불은과 위기는 찾아온다. 그래도 우리는 신을 버리지 못한다. 누군가 커다란 파도에 떠밀려 바위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한 일을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불행한 일을 만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게 하소서.”

⇒ 실패는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라 했다. 불완전하니까 두려움도 갖는 것일지도...

p239 학자들은 기원전 8세기경 이오니아 지방, 그러니까 지금의 터키 해안 출신인 호메로스라는 개인을 저자로 추정하고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작성된 파피루스 본이 발견되어 과학적으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대략 기원전 8세기경의 것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덧붙여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모두 호메로스의 작품이냐는 논란도 있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문체, 구성, 문체 등이 너무나 다르다 보니 불거진 논란이었다. 하지만 이 논란도 두 작품 모두 호메로스의 작품이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기원전 12세기경부터 전승되어오던 이야기를 호메로스라는 걸출한 천재가 재구성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p242 오디세우스의 항해는 인생을 상징한다. 그래서 목적지는 아내 페넬로페이아가 기다리는 이타카지만 사실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 인생이듯 그의 항해에도 결국 궁극의 목적지는 없다. 어디엔가 안주하고 주저앉는다면 삶은 한없이 보잘것없어지니 말이다. 바다로 나가 그 풍랑 속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p243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

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

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카가 너를 풍요롭게 해주길 기대하지 마라.


이타카는 아름다운 여행을 선사했고

이타카가 없었다면 네 여정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인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 콘스탄틴 카바피(Constantine Cavafy) <이타카>

⇒ 언젠가는 이르게 될 이타카. 서두르지 말라. 하지만 시작, 발걸음조차 떼지 않는다면 아주 먼 훗날이라도 닿을 수 없을 것이리라.

p252 최고의 모험은 저승으로의 모험이고 최고의 시련은 죽음을 보는 것이다. 죽음 근처에 가보아야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었을까? 아니, 삶과 죽음은 그렇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결국 죽음마저도 삶의 일부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는 파도와 풍랑을 헤치는 모험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뇌까지도 파고드는 내적 모험까지 담고 있다.

p255 스스로 자초하지 않은 것이라도 신이 내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피하지 않겠다. 자신이 예기한 것이든 예기치 않은 것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리라.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의 삶의 태도였다. 그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벌거벗겨져도 자기 운명에 최선을 다해 맞서며 지혜로운 해답을 만들어낸다.

⇒ 운명이란 말은 참 체념적으로 느껴지게 할 때도 있고 선동적으로 느껴지게 할 때도 있다. 지금 나는, 어느 쪽으로 더 치우쳐 있을까.

p260 결혼은 무엇일까?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결혼이 연애와는 다르다고 했다. 결혼은 분리되어 있던 반쪽이 재회하여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연애는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버리지만 결혼은 서로의 영적인 통일성을 인식한 두 사람이 분리된 생활을 접고 하나로 사는 것이다. 결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만남이다. 자기로 인해 맺어진 관계를 무엇보다 소중한 관계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진정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다.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부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결혼은 연애가 아니라 시련이다. 관계라는 신 앞에서 바쳐진 자아라는 제물이 겪는 시련 말이다. 바로 이 관계 속에서 남녀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p265 그리스 비극은 이간이 지닌 중요한 부정적 감정으로 복수를 다룬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그 시대 전사들에게는 게임의 룰이었다. 플라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비윤리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을 위한 교과서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인들의 생활 방식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전사의 갑옷을 벗고 다시 생활인으로 돌아와 나그네에게까지 친절을 베풀었다. 왜냐하면 신은 항상 나그네의 초라한 복장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p267 오디세우스의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항해할 운명을 타고난 그는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리스라는 척박한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기에 그리스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끊임없이 바다로 나가야했던 그리스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p267 <오디세이아>는 모험과 바다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정리가 된다. <오디세이아>를 읽을 때 우리의 마음은 삶이라는 바다를 그린다. 현대인인 우리는 오디세우스의 삶에서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을 배운다. 절대 좌절하지 않고 행복을 찾아가는 법 말이다. 삶은 각본이 없고 예측도 불가능한 모험이다. 바닥에 처박히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런 추락은 미래에 벌어질 아주 좋은 일의 전조일 수 있다.

⇒ 삶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소소한 일들에 대해 충분히 예측가능하다고 되뇌어도, 아무리 점술가들을 찾아가더라도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른다.


chapter11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날개가 있다 - <탈무드> ‘지혜’에 대하여 b

p269 유대인은 5000년간 수많은 박해와 추방, 대말살과 피난 등 잔혹한 삶을 살면서도 유대교를 버리지도, 민족성을 잃지도 않았다. 이런 유대인들을 이렇게 표현한다면 과한 것일까? “사람의 눈에는 검은 부분과 흰 부분이 있는데, 검은 부분보다 흰 부분이 더 많다. 그러나 사람은 희고 밝은 부분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검고 어두운 부분을 통해서 본다. 결국 유대인이 이렇게 많은 인재를 배출해낸 이유는 남다른 고통과 시련, 그 속에서 생겨난 지혜 덕분이다.”

⇒ 정말로 유대인들의 지혜는 탈무드에서 나온 것일까? 기독교인들의 윤리는 성경인 것이고? 경전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생각해 보면.....우리나라에는 무엇이 있다고 말을 해야 하나....

p270~271 <탈무드>는 인간 삶과 동떨어진 저 꼭대기의 신을 경배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더 높은 윤리적 차원을 확보하도록 도와주기 위한 책이다. 율법은 삶을 제한하는 명령이나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목소리이자 실천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유대인에게는 종교와 삶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을 이야기하지만 법학서가 아니고, 역사를 담았지만 역사서가 아니고, 신학서도 아니고, 철학서도 아니고……재미있는 이야기로 문화, 사회, 경제 분야 등의 지식과 지혜를 두루두루 들려주는 이 책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탈무드>는 인간의 지적활동과 관련된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 인문서’다. 또한 <탈무드>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실제적 삶에서 거론되어온 문제를 주제로 삼아 역경을 극복하는 지혜를 담은 ‘실용적 인문서’다.

p271~272 <탈무드>의 지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수천 년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본성과 고뇌에 대한 물음, 문제의 근원과 해결법에 대한 물음 등을 논쟁하면서 얻은 지혜의 책이란 뜻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에게 “계속 질문하라”고 말한다. '질문이 답보다 위대하다‘는 의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에게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뭘 가르쳐 주셨니?”라고 묻는다면 유대인들은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무슨 질문을 드렸니?”라고 묻는다. 그래서인지 <탈무드>는 정답을 알려주는 상식 책이 아니다.

⇒ 정말로 애들한테 오늘 “뭐 배웠니?”라는 질문만을 수없이 한 것 같다. 어린 아이들의 끊임없는 예측할 수 없는 질문들에 지쳐 답하기를 피한 적도 있고 그들의 눈을 다른 데로 돌리려 애쓴 적도 있다. 이런, 이런 자세로 아이들을 대하였다니...

p274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무거운 것은 무엇일까? 반대로 속이 비었을 때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지갑이다. 한마디로 진짜 무거운 것은 빈 지갑이라는 것이다. 마음이 무거워지니까.

⇒ 나는 지금 마음이 무지 무겁소....

p274 <탈무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제일 먼저 “거래에서 정직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는 것이다. 유대인은 종교가 삶속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록 생존을 위해 상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더라도 자신이 처한 환경을 존중하고 토라와 랍비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이끌고자 노력한다.

p275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해 돈에 대해 배우라는 것이 아니다. 돈에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배우라는 것이다. 부모가 돈에 대해 건전한 관념을 자식에게 가르친다면 그는 인생과 돈에 대한 좋은 생각을 하게 된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돈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만큼 돈에 방해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살고 싶은 곳, 입고 싶은 옷,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만 있다면 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탈무드

⇒ ...그래도 쬐금, 돈은 의미가 있지 않나요.......

p276 유대인에게 돈은 자신을 지켜주는 권력이었다. 새로 정착한 타국에서 배척당하지 않으려면,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이 얕잡아보지 않을 힘이 필요했으리라. 돈은 모든 것을 움직인다. 그러니까 돈이야말로 유대인이 새로운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가장 좋은 중개인이다. 무거운 지갑은 마음을 가볍게 하고 빈 지갑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행복해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p278 아렌트는 이런 평가를 남긴다. “누구에게든지 악의 평범성이 있다. 악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악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에 무능력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흔히 ‘원수를 사랑하라, 죄를 용서하라,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데 이 말을 실천하려면 생각의 힘이 따라야 한다. 사유하는 사람은 우선 잘못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고, 만약 잘못하더라도 뉘우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

⇒ 사유하지 않는 아이들. 하긴, 생각할 시간도 없는 아이들....악의 평범성이 대중화되어 널리 널리 퍼지고 있다. 세상이 무섭다.

p280 아이에게는 아이의 운명이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처럼 되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대신 너 자신이 되라고 얘기한다.

p281 유대인의 유머는 슬픔의 땅에서 싹튼 웃음이기 때문에 그 속에 눈물이 고여 있을 수밖에 없다. 눈물만으로는 살 수 없는, 웃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환경과 유머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p284 모든 지배자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 왕이 어느 날 우연히 운을 만나 선언했다. “사람의 행복은 부에 있는 것이므로 나는 너보다 강하다.” 그러자 운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인간의 부는 운에 달려 있습니다.”

⇒ ‘운’ 결코 무시할 수 없는...노력하는 자에게 운도 따른다고 하는데...정녕 그럴까?

p286 운이 좋아지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우선 이유없이 즐겁다.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꼭 이루고 만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셋이야말로 행운을 불러들이는 열쇠다. 늘 즐거워하고 무엇인가로 바쁘고 목표를 향해서 애를 쓰면 당연히 운이 따르지 않을까? 여기에 더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는 보상을 바라지 마라. 그러면 언젠가 그 사람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도움을 받을 때 ‘오, 내가 운이 좋네’라고 여길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이 베푼 일에 대한 보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이는 행운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기대대로 보답이 없으면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 그러니까 ‘주고 잊어라!’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 가 생각난다.

   하늘의 무지개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릴 때 그러하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아니면 나 죽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오니 내 인생의 하루 하루가

   자연의 숭고함 속에 있기를...

p289 새는 날개로 이것저것 시도해보지만 무엇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는 다시 하느님을 찾아가서 “왜 날개를 달아줬습니까? 짐만 될 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예전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하느님이 말했다. “내가 그걸 왜 짐처럼 달아줬겠느냐. 너 스스로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우리는 모두 저마다 날개를 가지고 있다. 날개의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그저 짐이라고 생각했던 날개를 펼치는 날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자기를 찾는 것, 우리고 고전을 읽으면서 풀어야 될 가장 중요한 과제다.

⇒ 날개가 없는 것도 날개를 쓸 줄 모르는 것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나의 날개는 있는가.


chapter12 사랑을 준다는 것의 의미 - <사랑의 기술> ‘사랑’에 대하여

p290 인생은 선물이며 도전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라는 식의 질문은 무의미하다. 만약 손익계산서를 가지고 셈한다면 인생은 결국 살 만한 가치가 없게 될 것이다. 인생의 뜻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다. -에리히 프롬

⇒ 현실에서의 사랑은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설사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당장 대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언젠가는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p294 미성숙한 사랑은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게는 그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p295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다른 사람과 융합되는 것이다. 여기서 융합은 무조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로 태어났을까? 이 물음을 쭉 따라가다 보면 마주치는 꼭짓점에 사랑이 있다.

p296 삶은 결국 성장이고 우리는 성장을 통해 사랑하는 능력을 키워간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리히 프롬이 생각하는 사랑의 확산이다. 재미있게도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하나의 온전한 존재가 둘로 갈라진 후 쪼개진 반쪽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욕망론의 기본이었다. 그래서인지 에리히 프롬도 분리를 극복하는 힘을 배워나가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프롬은 분리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도취적 합일과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 창조적 활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부분적 해답일 뿐, 완전한 해답은 아니라고 한다.

사랑은 늘 새롭다. 생에 한 번을 겪든 두 번을 겪든 혹은 열 번을 겪든 사랑은 늘 우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한다. 사랑은 우리를 지옥에서 떨어뜨릴 수도 있고, 천국으로 보낼 수도 있다. 사랑은 늘 어딘가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그저 그걸 받아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생명의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따기 위해 손을 뻗을 용기가 없어서 그걸 피한다면, 우리는 굶주림으로 죽게 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나서야 한다. 비록 그것이 몇 시간, 혹은 며칠, 몇 주에 이르는 실망과 슬픔을 뜻한다 해도,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순간, 사랑 역시 우리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한다. -파울로 코엘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p297 에리히 프롬은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수동적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빠지는 사랑, 그것이 바로 수동적 사랑이며 그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엄청난 기대감과 희망 속에서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런 사랑은 대부분 실패하도록 운명 지어졌다”고 말한다. 서로를 알아갈수록 희미해지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결국 사랑은 자기를 다 내준다는 적극성을 의미하는데 이는 훈련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 많은 상처와 실패와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배양되지 않는 것이다.

p299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을 타인과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자신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는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에리히 프롬

⇒ 철학자들은...결국 같은 것일까..인간을 타인과 결합시키는 힘, 사랑. 사랑은 둘의 경험...

p301 인간의 비밀을 아는 절망적인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힘, 즉 그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게 해서 그를 우리의 사물, 우리의 소유물로 바꿔놓은 힘으로부터 생긴다. 인간의 비밀을 알려는 이런 시도의 궁극적 단계는 극단적인 가학성 음란증, 즉 인간을 괴롭히고 고문해서 고통 속에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도록 강요하는 욕망과 능력이다. -에리히 프롬

p305 원시종교 단계에서 인류는 모계 중심의 여신 사회를 이루었을 것이다. 여신은 자식이 좋든 싫든 나쁘든 선하든 무조건 사랑을 주었다. 그러나 종교가 부계 중심으로 옮겨가며 명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식들은 멸망하고 파멸하게 된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아이를 키우고, 나중에는 아버지가 절도와 원칙과 규칙을 부과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사랑을 주지 않는 단계를 밟는다. 그런데 둘 다 완전하지 않으므로 자기 안에서 어머니 같은 모습과 아버지 같은 모습을 조화시켜야 비로소 성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p309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에리히 프롬은 이 부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보편성이 자기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기애라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바꾸고 좀 더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프롬은 말한다.

⇒ 사랑에 실패했다고 하는 이들이 스스로 가치를 상실하고 자살에 이르는 것은 이처럼 자기애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실패하여 떠나가는 사랑에 대해 해코지 하는 이들, 요즘 참 많아지고 있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생각으로 사랑이 증오가 되며 살인으로 이어지는 요즈음....그것도 결국 과한 자기애로 인해 벌어진 것일 터. 결국 과한 자기애 역시 합리적인 자기애를 상실한 탓이다.

p309~310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없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내면에 숨어 있는 가능성을 믿어주려면 나의 신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행위에 대해 내 믿음이 없다면 사랑의 힘을 키워가기 어렵다. 자기가 흔들리고 있으면 상대방에게 믿음을 주기 어렵다. 그러면 상대방도 나를 믿고 사랑하기 어렵다. 신앙은 결국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약속하고 지키려면 자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약속을 지키면 자기에 대한 신뢰는 점점 상승하게 된다.

알고 있다. 사랑이 댐과 같다는 것을. 아무리 조그만 틈일지라도 방치하여 물이 새어나오게 내버려두면, 그 작은 틈이 곧 댐을 무너뜨리라는 것을. 거센 물살의 힘을 막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댐이 무너지면,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무엇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내가 나의 연인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파울로 코엘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p310 자기를 꽉 잡고 있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관찰하는 것 말이다. 에리히 프롬도 우리에게 각자의 정신적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울해지면 그 우울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물어보고 분노가 생기면 분노라는 정신적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라고 말한다. 그 분노가 타당한 것인지, 어디서 발생한 것인지, 과거의 어떤 상황이 증폭된 것인지 등을 스스로에게 물어 봄으로써 스스로를 믿고 신뢰하고 자신의 결정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성인이 될 것이다.


chapter13 한국인을 말하다 - <삼국유사> ‘전통’에 대하여

p315 남을 아는 것은 과연 똑똑하다 할 만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밝은 것이다. 남을 이기는 것은 과연 힘이 세다 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진정 강한 것이다. 그 자리를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오래 사는 것이다. - 노자의 <도덕경>

⇒ 이 말이 떠오르는데,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

p317~318 신화가 기본적으로 인류의 무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인지 서로 교류가 없어도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다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해와 달의 신인 아폴론과 아르테미스는 남매지만 우리의 연오랑 세오녀는 부부다. 한편 중국 신화엣 태양을 상징하는 새는 까마귀다. 우리의 연오랑과 세오녀의 가운데 들어가는 ‘오’자는 까마귀를 뜻한다. 태양의 신 아폴론의 신조도 까마귀다.

p327 어머니가 길을 가다가 산기를 느끼고 길가의 밤나무 아래서 낳았다는 원효. 그렇게 낮은 곳에서 태어난 원효는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깨달음을 얻는다. 반면 의상은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를 사모한 산둥의 아름다운 처녀 선묘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의상의 귀국길을 지켜주었고 이후 영주 부석사 선묘각 속의 영정으로 남았다. 의상은 사랑조차도 단정했다. 그러나 원효에게 사랑은 폭풍이었다. 그는 파계하고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는다.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인의 살맛을 보아야 하는 보통 사람이었던 것이다. 의상은 늘 대쪽 같고 원효는 늘 갈대 같다. 그래서 의상은 법사가 되었지만 원효는 토착 불교를 통해 대중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 어릴 때는 의상보다 원효가 그렇게 스님으로 보였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또 다르다..어린 시절의 나는 좀더 격정적이고 감정적이었었던가. 그렇다고 지금 더 이성적이진 않은데..

p327 사람은 생긴 대로 살게 마련이다. 밤나무는 밤나무의 삶을 살고 감나무는 감나무의 삶을 산다.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매일 열심히 자라 해마다 더 많은 밤과 감을 생산해낸다. 인간도 그렇다. 의상이 원효여서도 안 되고 원효가 의상이어서도 안 된다. 원효는 원효이어야 하고 의상은 의상이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 맞는 삶이다. 제 생긴 대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처럼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위로는 없다. 직장에서도 또 가정에서 주어진 역할을 해내기 위해 모두가 다 똑같은 연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디에 있든 가장 자기다울 때 가장 풍성하게 기여하게 마련이다. 좋은 감나무인데도 열심히 자신을 키워 감을 주렁주렁 달지 못하는 감나무가 있다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p329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균형을 잡아간다는 것이다. 가지고 태어난 것과 살면서 얻은 것, 현실과 꿈, 사실과 허구, 지금과 미래가 실처럼 얽힌 양극단 사이의 어느 점을 선택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힘겹게 느껴지는 바로 그때가 우리 안에서 더 깊은 힘을 찾아내는 기회가 된다. 시련에 대한 부정은 결국 삶에 대한 부정이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예”라고 말할 수 있어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신의 길을 따라 걷다가 혹시 새똥이 옷깃에 떨어지더라도 너무 화를 내지도 말고 그것 닦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마시길. 여러분이 현재 처한 상황을 웃음으로 바라보면 영적인 거리를 얻게 될 테니까.

⇒ 살아간다는 것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간다는 것이라면, 나는 지금 어디에 치우쳐 있을까. 양팔을 들고서 비틀려 있는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p333 우리가 엎어진 곳, 바로 그 자리에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야 된다.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의 성장이 시작된다.

⇒ 우리가 엎어진 곳. 아니 내가 엎어진 곳..나는 늘 그 곳에서 엎어진다....두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시 넘어지기도 하고, 시간이 흘러 또다시 그곳에서 넘어진다. 이런, 무의식이 나를 가로막는가.

p343~344 김대성은 세 번의 탄생을 통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탄생은 바로 곰을 죽임으로써 발심(發心)을 얻은 것을 의미한다. 이 세 번째 탄생은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세속과 인연을 끊고 수행자의 길을 걸을 때는 용맹정진하겠다는 초심이 가득하다. 그러나 수도자의 삶도 역시 삶이기 때문에 점점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게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발심이다. 발심이 안 되면 수행자로서 끝까지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대성 역시 좋은 곳에 태어난 것으로 끝이 아니니 항상 마음을 다스리고 수행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곰의 꿈을 꿨던 것 같다.

⇒ 단군의 후예에서 자주 듣던 말이 나왔네. 발심(發心).

   그런데 단군신화에서 곰은 호랑이가 도망감으로써 100일도 되기 전에 인간이 되었다는 것!!!! 우씨, 그럼 이건 경쟁자만 이기면 된다는 거야?!^^::::::

p345 "대붕(大鵬)은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산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간다.“ 백범 김구 선생의 좌우명이다. 대붕은 <장자>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새다. 하늘을 날기를 꿈꾸던 물고기가 결국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되어 9만리를 날아가는데 그 새가 바로 대붕이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진실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려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바로 대붕과 김구 선생에게서 배우는 도전의 자세다.

p347 원래 불교 초기에는 관음보살이 남자로 그려졌다고 한다. 그러다 당나라 때부터 탱화나 불상들을 보면 관음보살이 어머니 같은 마음을 가진 여자로 그려진다. 불교에서는 부처와 보살이 있는데 현세불, 즉 싯다르타는 이미 인멸하시고 한참 후에 미래불인 미륵불이 오게 된다.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는 보살들이 중생을 구제하고 구원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 중 가장 어머니 같고 자애로운 분이라 ‘대자대비 관음보살’이라 불리기도 한다.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같은 분이 관음보살의 현신이라 여겨진다. 관음보살은 십이면관음, 천수천안관음 등 여러 모습을 지니고 있다. 관음보살은 보관을 쓰고 장신구들을 많이 달고 손에 보병(寶甁)이나 연꽃을 드는 등 여성처럼 보인다. 모성의 특징을 가장 많이 보이는 보살이라서 여성처럼 묘사되는 듯하다.


chapter14 토크빌은 어떤 민주주의를 보았는가? - <미국의 민주주의> ‘선택’에 대하여

p351 통치 권력은 사회를 모두 장악한 다음 획일적이고 복잡하고 촘촘한 규칙의 그물로 뒤덮어서 아무리 독창적이고 정력적인 사람이라도 군중을 초월하여 이 그물을 뚫고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런 권력은 생존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방해한다. 폭정화하지는 않지만 국민을 억압하고 생기를 잃게 하며 우둔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침내 국민은 한때의 겁 많고 근면한 동물로 전락하게 되며 정부는 그 목자가 된다. -토크빌

⇒ 선한 목자를 만나야 하건만...

p351 "정치란 대중이 있는 곳에서 시작한다. 수천 명이 아니라 수백만 명이 있는 곳에서.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정치가 시작되는 곳이다.“ -레닌

p354 <미국의 민주주의> 서론에서 토크빌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농노는 자신의 열등한 처지를 당연한 자연 질서의 결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평등과 비참함이 있어도 두 계급 모두 타락하지 않고 안정, 힘, 영광을 구가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어 계급 차별이 사라지고 인류를 갈라놓았던 장벽들도 무너지고 있다. 재산과 권력이 쪼개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성의 빛이 퍼지면서 모든 계급이 평등을 향해 움직이고 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토크빌은 이런 추세에 맞춰 미국을 연구함으로써 프랑스에도 적용할 수 있는 유용한 사례와 경험을 찾아보고 연구하고 싶었다고 한다.

p355 토크빌은 민주주의에서 가장 두려운 점으로 다수의 횡포를 꼽았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가 자유롭기 때문에 무질서로 흐를 거라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해악에 지나지 않고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는 노예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물처럼 촘촘한 규칙들 속에서 사람들이 창조력을 잃어가며 시민화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적 견해의 본질은 ‘어떠한 의견’을 주장하느냐가 아니라 의견을 ‘어떻게’주장하느냐에 있다. 자유주의자는 자기 의견을 독단적이지 않고 잠정적으로 주장하며,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언제든 주장을 철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과학자가 자기 견해를 주장하는 방법으로서 신학자의 경우는 이와 반대이다. 그럼, 그렇고 말고!

p361~362 미국의 위험은 흔히 말하듯이 과도한 자유가 아니라 다수의 폭정을 견제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 있다. 여론, 입법부, 행정권 등 어디에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든 이 모두는 다수에 의해 인정된 기구들이다. 공권력도 다수에 의해 임명된 것이고 배심원도 다수의 지지로 구성된 것이다. 이런 폭정을 피하기 위해 입법부는 다수의 노예가 되지 않게 구성되어야 하고 행정권은 안정적인 독립권을 갖추어야 하며 사법부는 다른 두 기구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미국 내에서 다수의 폭정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거기 맞설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토크빌

⇒ 많은 경험을 하진 않았지만 어느 곳이나 과도한 자유가 문제시 되진 않는 듯하다. 가진 자들의 과도한 자유는 그들로 인해 정당화되거나, 정당화되진 않지만 그대로 밀고 나가 그냥 그것이 당연한 듯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른바 시민들의 모든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한다.

p362 다수는 소수를 억압해도 되고, 소수의 의견은 가치 없는 것인가?

p364 인간의 평등이 고귀하기 때문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리기도 한다. 과도할 경우 정치적 자유가 개인의 평온과 재산과 삶을 더럽힌다는 점은 편협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분명하게 드러나다. 반면 주의력이 깊고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평등의 위험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위험을 지적하는 것을 회피한다. 그들은 그런 재앙을 먼 훗날 미래 세대에나 닥쳐올 것이라고 말한다. 자유에 대해 가끔 초래되는 악은 간접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나며 누구나 거기 감염되어 있다. 극단적인 평등이 초래하는 악은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은 점점 사회 체제 속으로 침투해 이따금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주 파괴적인 상태가 되어버리면 습관화되어 더 이상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 자유에 따르는 이익은 시간이 지나야 나타난다. 그래서 언제나 그것이 발생하는 근본 원인을 오해하기 쉽다. 평등에 의한 이익은 즉각적이다. 그래서 이것은 언제나 그 원천에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정치적 자유는 일정 수의 시민에게 고양된 기쁨을 주곤 한다.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날마다 작은 기쁨을 수없이 준다. 평등의 매력은 순간순간 느껴지며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다. 아무리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라도 그 매력에 무감각하지 않으며 저속한 사람들도 그것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그러므로 평등이 불러일으키는 정열은 강렬하고 전체적이다. - 토크빌

p365 너도 나도 노예라면, 너도 나도 가난하다면 그래도 살 만하다. 그런데 나는 부자고 너는 더 부자면 못살겠다. 그것이 바로 평등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다.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평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평등은 늘 저렇게 취급받을 것이며 우리 스스로도 평등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p367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는 태도인 이기주의는 일종의 본능으로, 민주 사회와는 무관하게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수없이 변하는 사회에서 구성원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 외에는 관심이 없다. 옆 사람에게 빚진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고……. 나 자신이 내 운명의 신이다. 그렇게 모든 관계는 끊어지고 내게로 모든 것이 응축되면서 우리는 외로운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개인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개인주의의 가치가 팽배한 요즘 이기주의보다 개인주의가 낫다고 하는데, 비교 불가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또다른 이름이다.

p370~371 한편에서는 권위와 억압이,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와 복종이 서로 대립하는 상태는 민주주의라고 말하기 힘들다. 이러한 시대는 혁명의 시대일 뿐이다.

지금은 혁명의 시대...언제까지 혁명의 시대가 되어야 하나. 아니, 혁명의 시대도 되지 못하고 있다. 혁명을 외칠 수 있는 모든 상황임에도 외치는 자 없고, 외치는 자, 입이 막혀 버린다.

p377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어버린다.“ - 장 자크 루소

오, 지금 나는 노예가 되어 있다.


chapter15 보다 완전한 세계를 그리다 - <동방견문록> ‘여행’에 대하여

p378 세상은 한 권의 책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겨우 한 페이지를 읽을 뿐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내 몸이 우주의 일부임을 느꼈다. 땅 위를 걸으며 대지와 하나됨을 느꼈다. 방랑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며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도 느꼈다. 편견과 편협과 고집스러움이 여행을 통해 치유되었다. - 구본형

책이 여행이 될 수 있음이 얼마나 좋은가. 공간적인 여행, 시각적인 여행이 경험이 매우 부족한 내게 책은 대체물이었다. 그 속에서 행복하고 즐거웁게 여행을 했다. 그러나, 책으로도 위안받지 못할 실제 여행에 대한 그리움과 이끌림..방랑자가 되어 느끼고 싶다.

p379 자기들만의 좁은 세계에 갇혀 있던 유럽 사람들에게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르코 폴로의 글은 “그대들은 믿지 못하겠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언제나, 누구나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 있으면 믿지 못한다.  보지 않은 자의 우기는 말이 더욱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질 때가 있으니까. 좁은 세계도 문제이겠거니와 그 시각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도 문제일 터. 우물안 개구리 식 사고에서 벗어나기. 그러려면 더 많은 세계로...그것이 실제의 경험이 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사유를 통해서 확장시켜 나가야 하겠다.

p384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에는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가 열린다.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등은 탐험에 나서기 전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반드시 읽고 공부했다. 세계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에게 <동방견문록>은 경전이었던 셈이다.

p390~391 몽골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당시 가장 빠른 병기인 말을 보유했다는 점이다. 그다음으로는 유목민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칭기즈칸 몽골군은 10만이 되지 않았다. 10만도 안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당시 세계라고 일컬어진 곳들을 모두 정복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어딘가 정착하지 않는 유목민의 정신을 노마드 정신이라고 부른다.

p397 강력한 왕권을 통해 권력과 부가 집중되면 대단한 유적을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간신히 암흑기를 빠져나온 중세 유럽인의 눈에 강력한 왕권이 만들어낸 화려한 동양의 도시들은 어떻게 보였을까?

피라미드, 만리장성, 경복궁, 나아가 현대의 마천루는 문명의 상징일까요, 아니면 야만의 상징일까요? 거대한 건물들은 소수의 사람이 다수의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유산들 대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야만의 상징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약하다고 지배하지 않고 강하다고 복종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누구도 자유정신을 잃지 않았다면, 몇몇 철없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거대 문명은 가능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모든 화려한 문물에는 억압과 지배라는 동물적 야만성이 숨어 있습니다. 누가 피라미드와 경복궁의 돌을 옮겨 쌓았을지 상상해보세요.-강신주

p404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지나쳐 갔더라면 더 멋졌을 것이다.” -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기 얼마 전 항해 도중 사망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한 부하(?)들이 결국 신대륙을 발견했다. 항해의 시작이 콜럼버스에 의해서였고 그가 대장이었기에 신대륙의 발견자는 콜럼버스가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여 신대륙을 보았고 느꼈느냐?


chapter16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다 - 그리스비극1 「오이디푸스 왕」 ‘운명’에 대하여

p405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팍한 사람,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도 가지지 못할 사람, 한마디로 최하 중에 최하의 사람. 그래, 설령 그 말이 옳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이것이 나의 야망이다. - 고흐

p405~406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과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은 다르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내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면서 인간은 더 깊은 성찰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집 알레프의 <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1829년~1874년)의 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무리 길고 복잡한 운명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삶은 실질적으로 ‘단 하나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게 되는 순간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의 냉혹한 미래가 아킬레우스의 멋진 이야기 속에 반영된 것을 보았으며, 스웨덴의 카를 12세는 알렉산더 왕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p410 인간이 예상하는 미래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미래가 반복하면서 인간의 지혜와 신의 지혜가 부딪히는 장면이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이론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무의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의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이론이 바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나온 것이다.

p414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는 오이디푸스 같은 인간 최고의 지성조차도 모르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신이 내린 운명 말이다. 운명에 대한 궁금증은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귀착된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그리스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다. 지금은 각종 기상 정보를 모아 내일의 날씨를 예고하는 식으로 과학적 방법을 통해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점을 쳤다. 그리스비극에 신탁을 받거나 점을 치는 장면들이 종종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 아아, 마크툽!!

   일어날지 어떨지 모르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지만, 꼭 일어나고야 마는 운명은 반드시 일어나는 법, 정해진 때에 어김없이. 그것도 모르고 바보는 항상 ‘아아 슬프다’고 외친다. -아라비안 나이트 中

p418 사실 그리스비극은 막장 드라마보다 더 막장처럼 느껴진다. 그리스비극의 핵심은 절제와 한계, 즉 아폴론적인 상태를 돌파해서 열정과 도취의 상태, 즉 디오니소스적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상태란 한 번 죽음으로써 시작되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비극은 신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 속에서 우리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아모르 파티, 바로 내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위대한 장정이 바로 인간의 길이라고 그리스인은 생각했다.

p418 니체가 말했다.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가 우리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우리는 예술을 가지게 되었다.” 오이디푸스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악한 진실 앞에서 스스로 눈을 찌르고 끝까지 진실을 견뎌내야 하는 자로 선택되었다.

⇒ 오이디푸스! 그가 가진 운명과 이야기들이 많은데 프로이트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알려진 사나이...‘아버지처럼 자유롭게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다’는 원망(願望)이 ‘아버지와 같이 되고 싶다’는 선망으로 변하여 부친과의 동일시(同一視)가 이루어지며 여기에서 초자아가 형성된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했다. 그눈 후세대까지 이렇게 명명되는 운명이었다.

p419~420 “도대체 누가 인생의 한계를 넘어서 광기로 그대의 인생을 덮쳤나요?” 가장 고귀하고 지혜로운 자에서 가장 비천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자로 전락한 오이디푸스. 그에게 이런 운명을 내린 신은 누구였을까. 이성의 신이자 태양의 신이자 빛의 신인 아폴론이다. 아폴론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는 모든 것이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어둠이 내리면 모든 것이 개체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통합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눈으로, 이성으로 쳐다볼 때 오이디푸스라는 개체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제 비극에 처해 눈이 멀고 암흑에 갇힌 그는 새롭게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죽음으로 새로운 오이디푸스로 재탄생하는 것, 이를 우리는 디오니소스적인 탄생이라고 부른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는 테베에서 쫓겨나 정처 없이 떠돌다 콜로노스의 신성한 숲에 당도한다.

⇒ 니체에 의하면 디오니소스적이란 몰아적도취이고 열광이며 생성의 근원에 있는 깊은 에너지, 아폴론적인 것은 개체화의 원리에 근거를 두는 관조이며, 꿈을 미적인 가상으로서 영원화하는 것..사전을 통한 의미는 너무 어렵게 설명되었다. 한마디로 아폴론적인 것은 태양의 신의 이미지처럼 강하고 밝은 느낌,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헤라의 눈을 피해 다니다 결국 아버지인 제우스의 넓적다리에서 태어난 것처럼 어둡고,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느낌....또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적인 것...도취와 황홀, 술이 생각나는..


chapter17 배려를 통해 다름을 껴안다 - 그리스비극2 「안티고네」 ‘화해와 공존’에 대하여

p422 자기 경영은 자신의 미움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격앙되어 싸울 때는 진흙탕의 개처럼 싸우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적의와 증오를 갈무리하여 인간다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짐과 결별하고 피와 화해하는 신성한 의식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야 할 운명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순간은 다 마지막입니다. 사라지는 것은 그 단명함으로 처연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지는 것들을 위한 마지막 인사는 그것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나의 인생이니 내 품아 안아 들이는 것입니다.  - 구본형

⇒ 기업 경영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자기 경영이 더욱 더 어렵게 느껴진다.  사라지는 것은 그 단명함으로 처연하게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슬픔이고 눈물이다..

p426~427 삶은 ‘다른 것과의 관계 맺기’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자신과 다른 것을 잘 참지 못하고 틀린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상대를 동화시키기 위한 시도를 한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사용하고, 나이 든 사람은 삶의 연륜을 이용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을 통해 자신과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갈등관계에 빠지게 된다. 이윽고 투쟁관계로 돌입하고 서로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p427~428 안티고네: 그 명령을 내린 것은 제우스가 아니었으니까요. 하계의 신들과 함께 사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글로 씌어진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하늘의 법을 한낱 인간에 불과한 왕의 명령이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법은 어제 오늘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저는 한 인간의 의지가 두렵다고 해서 하늘의 법을 어기고 신들 앞에서 죄인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명령이 없었다고 해도 어차피 죽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명대로 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득이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수많은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죽음을 득이라 생각지 않겠어요. 이런 운명이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다만 내 어머니의 아들을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시신으로 밖에 내버려두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고통이었을 겁니다. 내게 이것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요. 내가 어리석어 보인다면 어리석은 자의 눈에만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p429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강한 안티고네. 비극을 읽을 때면 늘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난 벽에 부딪혀 나동그라지는 모습. 벽은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다. 우리는 그 조건을 받아들여 공포와 고뇌와 슬픔 속으로 걸어들어 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소소한 고민들을 떨쳐버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죽임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삶의 메시지가 되는 이유가 거기 있다.

p429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이해관계의 양극단에 서 있다. 국가의 이성을 상징하는 크레온과 인간의 정념을 대표하는 안티고네. 인간의 법을 대표하는 크레온과 자연의 법을 존중하는 안티고네. 이렇게 조직과 개인의 부딪히면 결국 비극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가와 개인, 인간이 법과 자연의 법이 상생의 길을 찾지 못한다면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다.

⇒ 안티고네의 죽음이 한 개인의 죽음으로 인식되지 않고 문화간 충돌로서 확장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공감한다. 문명의 충돌로 인해 나타난 비극적인 결과들이 고대에도 현대에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물며 한나라 안에서도 한 지역에서도, 한 가정과 한 가정간의 문화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p431 약한 자들의 마지막 보루는 죽음이다. 죽음은 자기 신념에 대한 과격한 변호다. 그래서 안티고네에게 다른 대안은 없다. 크레온이 그렇게 몰아가고 있기 때문에.

p436 너무도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 이것이 비극의 핵심이다. 뒤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은 후회, 앞서 찾아오는 깨달음은 통찰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많은 후회와 회한 속에서 우리는 자기 삶에 대한 통찰도 얻지 않을까? 고전들을 뒤져보면 무수한 슬픔과 고통을 겪은 사람들만이 언젠가 구원을 받게 된다.

⇒ 후회를 덜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 것이 아니겠는가.


에필로그 - 어제보다 아름다워지려는 사람들을 위한 인생 지도


p440 너는 현명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너무 진지할 것 없다. 지나친 진지함은 너를 괴롭힐 것이다. 삶은 즐거운 활동이다. 그 가치가 아무리 크고 무거워도 기쁨으로 해야 한다. 황홀하지 않은데 몰입할 수 있겠느냐?

⇒ 그래 즐겁게 몰입하자...내 비록 안티고네를 좋아해도 너무 진지하진 말자.......!


 

3. ‘내가 저자라면’


■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1부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이룰 수 없는 꿈 하나를 별처럼 품다 -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젊음’에 대하여

    다산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 <다산문선> ‘배움’에 대하여

   천 개의 운명과 변신… 모험을 선동하라! - <그리스 로마 신화> ‘도전’에 대하여

    미친 듯이 사랑하고 미친 듯이 이별하라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고뇌’에 대하여

   끊임없이 묻고 답하며 찾는 삶 - <허클베리 핀의 모험> ‘성장’에 대하여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에 대하여

   비범한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은 정의로울까? - <죄와 벌> ‘정의’에 대하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 <데카메론> ‘성’에 대하여

   새로운 인간학의 탄생 - <향연> ‘사랑’에 대하여

 

2부 거침없이 모험을 선동하라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법 - 「오디세이아」 ‘인생’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날개가 있다 - <탈무드> ‘지혜’에 대하여 b

   사랑을 준다는 것의 의미 - <사랑의 기술> ‘사랑’에 대하여

   한국인을 말하다 - <삼국유사> ‘전통’에 대하여

   토크빌은 어떤 민주주의를 보았는가? - <미국의 민주주의> ‘선택’에 대하여

   보다 완전한 세계를 그리다 - <동방견문록> ‘여행’에 대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다 - 그리스비극1 「오이디푸스 왕」 ‘운명’에 대하여

   배려를 통해 다름을 껴안다 - 그리스비극2 「안티고네」 ‘화해와 공존’에 대하여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은 동서양의 문학과 철학 17개의 고전을 다루고 있다. 이를 크게 두 부분, 욕망과 도전으로 나누어 분류하고 각각에 또다른 키워드를 제시하면서 책의 내용을 풀어나간다. 제1부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에는 젊음, 배움, 도전, 고뇌, 성장, 자유, 정의, 성, 사랑이라는 9개의 키워드를 제2부 ‘모험을 선동하라’는 인생, 지혜, 사랑, 전통, 선택, 여행, 운명, 화해와 공존이라는 8개의 키워드를 핵심으로 선정하고 있다.

 고전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되새김하며 풀어나가는 책으로 고전을 소개하는 내용으로도 무방하다. 따라서 순서대로 읽어나간다거나 할 필요없이 목차를 보고 ‘필’이 오는 제목을, 책을 선택하여 각 장을 독립적으로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타인의 독서록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일기를 읽는 것만큼이나 짜릿하다. 어떤 문장과 단락을 좋아하는지 비교해 보기도 하고 세상에 대해 가지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선택하는 책에서 취향을 읽어내기도 한다. 그러하기에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는 “아하, 이런 책이었어?“라는 생각을 읽은 책에서는 ”음, 그렇군“ 하고 읽게 된다.

 고전에서 발췌한 부분, 그에 따른 사유의 연결이 이어지며 특히 어느 부분만이 감동적이다라고 하기 어렵게 전반적으로 마음에 와 닿았다. 좋아하던 책은 좋아하였기에, 읽어보지 못한 책을 그렇기에 감동적이다. 그간 저자의 책에서 많이 다루어 익숙한 신화를 제외하고 동양의 고전과 접목한 화두는 또 다르게 다가왔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도 좋았고, 자유를 외치는 그리스인 조르바도, 고뇌에 가득찬 베르테르와 라스콜리니코프도, 안티고네 이야기도 좋다. 그들의 이야기가 좋고 거기에 따른 생각 또한 좋다. 오디세우스와 오이디푸스는 익숙함인지 그들의 운명과 인생에 대한 애잔함 때문인지 자꾸 들여다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프롤로그에서 석가가 아난에게 최후의 순간까지 법을 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난아, 울지 마라. 이별이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품고 있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

 태어나고 생겨나고, 조건 지어진 것은 모두 그 자체 안에 사멸할 성질을 품고 있다....이 문구로 저자가 떠올려지며 마음이 아릿해지지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제일 먼저 나온 책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가 떠오르며 마음이 먹먹해지며 첫 장을 들어가는데 미적거리게 만들어서인지 또한 글쓰기에 대한 글들이 이어져서인지 기억에 남는 장이 되었다. 그 중 한 부분이다.

  

        자기 안으로 침잠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글을 쓰게 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시고 글쓰기가 좌절되었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깊고 조용한 밤에 스스로 자문해보십시오. 나는 글을 써야 하는가? 답을 찾아 내면으로 깊이 파고드십시오. 그리고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당신이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강력하고 확고하게 ‘써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성에 따라 세우십시오. 당신의 삶은 아주 하찮고 무심한 순간이라도 이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자연에 다가가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말로 표현해보십시오. 제가 당신에게 해줄 충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 보완점


왜 하필 이 책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고전의 선정 기준이었다. 왜 하필 이러한 책들일까? 책으로부터 저자가 강조하는 변화경영의 화두를 이끌어 내는 방식은 익숙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고민과 가치들을 어떤 책에서 이끌어 내느냐는 이 책의 핵심이기도 하다. 책의 선정 기준을 보니 저자가 마지막까지 방송했던 EBS FM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방송한 내용을 책으로 엮으며 저자가 남긴 칼럼과 편지들에서 내용들을 취합했다.

 라디오 「고전읽기」에서 소개한 책은 거의가 책에 실려 있다. 빠진 부분은 <박문수전>, <주생전>, <박씨부인전>, <할아버지의 기도>이다. <할아버지의 기도>는 2000년대에 출간되어 고전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근간이므로 제외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고전만 빠진 것 같아 아쉽다. 특히나 주로 신화속에서 변화경영을 이끌어 내는 저자였던 만큼 저자가 늘 이야기하던 책에서는 안정감과 익숙함으로 편안하게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나라 고전이야기에서 다루는 화두는 어떨까라는 호기심과 낯섬에서 설레임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이 책들이 제외된 것이 조금 아쉽다. 그러므로 익숙하지 않은 책들에서 익숙하지 않은 화두를 읽어내는 혜안들로서 저자가 읽은 다른 책들, 그의 제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읽어 내려간 다른 더 많은 책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낼 2탄을 기대한다. 


왜 이 키워드인가?

 

 책을 읽기 전 목차를 통해서 먼저 본 것은 어떤 책이 있는가였고 두 번째는 왜 이렇게 나누었을까, 그 다음으로는 키워드였다. 크게 욕망과 도전으로 분류하였고 내면의 가치들에 따른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분류하고 정리하였을까라는 생각을 거듭 했다. 어떻게 보면 어느 책에서든 저자가 제시한 다른 키워드, 내면적 가치들을 대입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랑’을 한번 보자. 저자는 저자는 도전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베르테르의 사랑에서도 데카메론, 향연에서도 와 닿는다.

 - 고뇌에 찬 사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에로틱한 사랑, <데카메론>

 - 관념론적 사랑, <향연>

 - 방법적 사랑, <사랑의 기술>

 그러므로 큰 주제를 두고서 그 주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형태로 얘기하는 책들을 배치하여 또다시 다양한 시각으로 그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방법 또한 흥미로울 듯하다. 인간의 삶에서 요구되는 가치는 다양하고 그 가치에 대한 관념과 사유는 다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들을 어떻게 이끌어 내서 내게로 적용해야 할 지 모르는 많은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1) ‘태몽 혹은 인디언식 이름’, 마음을 나누는 편지 중, 구본형변화경영연구소 홈페이지, 2008.2.15.


2)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어떻게 발견할까 -『구본형의 신화 읽는 시간』, 구본형, 채널예스인터뷰. 2012.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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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18:50:33 *.133.122.91

현연씨- 이 리뷰를 보고, 이런 북리뷰를 올리신 분은 과연 어떤 분이실까, 정말 궁금합니다. 이 글을 읽으며 꼼꼼하고 촘촘하게 리뷰를 하신 분이 누구실까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저자에 대하여 부분, 마음에 무찔러드는 글귀, 내가 저자라면, 이 세 파트 모두 힘겹게 이루어내신 것 같아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앞으로도 이렇게 꼼꼼한 읽기, 쓰기 과정을 지속적으로 해나시라고 부탁드리고 싶네요. 

마지막, 내가 저자라면, 부분을 예스24나 교보문고 인터넷에 올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감히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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