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jieumjf
  • 조회 수 4156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14년 2월 16일 21시 2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빅토르 에밀 프랑클 (Viktor Emil Frankl, 1905~1997)

- 유대인 심리학자

- 오스트리아 출생, 둘째 아들로 태어남

- 정신과 의사

- 1930년 비엔나 대학교 졸업(의학박사)

- 1941년 12월 마탈드 틸리 그로서와 결혼

- 1944년 9월 수용소에 갇혀 아우슈비츠에서

3년간 수용소 생활

- 엘리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50년간 결혼생활

- 정신요법 제3학파로 불리은 로고테라피 창시

- 저서 :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

심리의 발견 등 22권 저술

- 긍정의 아이콘, 삶을 직선으로 가는 직진보행자

- 삶을 기록하는 작가

- 열정적인 강연가

- 사랑이 가득한 의사

- 평생 학습하는 학생

- 왜(Why)를 어떻게(How)로 바꾸는 트랜스 포머

- 빅터 프랭클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사람의 산증인이자 본보기

할수 있는 사람이다. 20세기의 가장 암울하고 힘든 시기

를 보내고 있으면서 가장 참혹하고 힘든 장소에서 실제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며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쓰고자 했던 “영혼과 의사”의 원고를 틈틈이 쓰고

다른 수용소 동료들의 죽음과 그들을 바라보면서 죽음의

의미와 삶의 의미에 대해 살아있는 자기 자신만의 관점

에서 돌아보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정리해서 같은 힘든 시기를 겪은 동료와 그들을 지켜보던 20세기 사람들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많은 공감과 힘을 불어 넣어주고 있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부모와 가족 그리고 결혼한 지 9개월밖에 되지 않은 사랑하는 아내마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는 가운데 세상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절망과 슬픔 속에서 그는 굳건히 살아남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로고테라피라는 정신 요법을 창시하여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다

한 장교의 왼쪽과 오른쪽의 선택에서 오른쪽으로 가게되어 처음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게 된 빅터 프랭클은 그 후 3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을 객관화하고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에 삶에 대해서 불평을 멈추고 자신에게 주어진 노역에 대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수용소에 끌려온 이후에 처한 환경에 불평을 하면서 풀려날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처한 노역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늘 불만족하며 사는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오직 쓰고자 했던 원고에 대해서 생각하며 처한 수용소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의학박사였다는 사실도 숨기고 오직 그는 수용소에 갇힌 한 유대인 남자로서 충실히 살았다. 자신이 몸에 털 한 오라기도 남기지 않고 먹을것과 입을 것의 절대적인 부족을 느끼며 육체의 한계를 느꼈지만 불평보다는 왜 내가 여기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처참한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에 노력했다. 오직 빅터 프랭클이 아닌 119번, 104번으로 불리면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번호가 아닌 자신에게 집중한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처한 현실에 부딪히거나 수용소 생활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을 하거나 굴복하여 지칠때 그는 자신의 삶에 긍정의 에너지를 자가 발전하는 에너지 발전기같은 삶을 살았다. 3년간의 수용소 생활 중에 병에 걸려 생사의 삶을 넘다들면서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 긍정의 아이콘이라 할수 있다

수용소생활에서 주어지는 고통이나 일상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 인생이, 삶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숙제를 열심히 해내는 학생처럼 삶을 그렇게 열심히 사는 우등생이었고 모범생이었다

인생를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정확히 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에게 처한 환경을 어떻게 (How)살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고유의 삶을 살고 있었다, 현실은 발에 붙이고 잣신의 눈은 오직 현재의 경험이 어떻게 의미가 있고 사용될 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삶이 던지는 돌직구의 일상생활을 부드럽게 받아치는 타자와 같이 그 돌직구에서 “왜”라는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로 바꾸는 인생의 트랜스포머였다.

수용소의 생활이 자신의 일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아는 사람처럼 그는 인생의 의미나 꿈을 향해 자신에게 감추어진 나침반의 바늘이 자성을 어느 위치에서나 북극을 향하는 것처럼 생의 의미와 가치에 늘 방향이 맞추어져 있어 수용소에서나 수용소후의 삶에서도 늘 생의 가치를 향한 나침반 같은 사람이었다

삶이 선사하는 많은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그리고 단순한 삶에서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서 그 가운데 아름다움을 하나씩 찾아내어 그것을 표현해 내고 기술할 줄 아는 미술가적인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였다. 처참한 삶을 상징하는 잿빛 회색에서도 명암차이를 구분할 정도로 그 색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할 정도로 의미를 찾는 예술가였다

그리고 수용소의 삶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에 대한 평가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개인의 감정을 최재한 자제하면서 기술하는 작가의 입장, 눈으로 수용소 생활을 바라보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책을 쓰기 위해 틈틈이 기록하려는 열정을 보이는 작가의 모습, 성실한 작가이었으며 삶의 경험을 온전히 성실히 기록한 작가였다

수용소안에서도 자신의 경험과 관심을 가지고 많은 관중앞에서 강연하는 먼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중에는 그의 상상과 기대로 많은 나라를 오고 가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강의와 로고테라피의 심리치료를 가지고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열정적인 강연가의 삶을 살았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p10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나를 포함한 요즘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성공이나 행복을 갖기를 원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심지어는 가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직장에서 모든 것을 바치고 그것을 얻은 후에는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행복은 오지 않고 원래부터 자신의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때 개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말은 많이 들어왔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목표로 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모두 쏟아붓고 있다. 파랑새를 찾으러 다니고 결국에는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행복이나 성공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 말고 살자. 그것이 목적이 될수는 없고 어떤 일을 하였을 때 따라오는 자연적인 부산물인 것으로 생각하며 살자. 우리의 삶의 의미, 신이 네게 주신 삶의 기한동안 주신 것을 잘 활용하고 삶의 미세한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고유한 소리를 찾아가게 되면 어느새 성공과 행복은 우리를 감싸고 있을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된다

p11 인간 존재의 그 모든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해 “예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모든 시련과 고통속에서 “YES"라고 말수 있을까? 좋은것, 기쁘고 행복한 것, 아름다운 것, 유쾌하고 즐거운 것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가득차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신은 우리 삶속에 허락한 것을 전부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것으로만 채워주시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너무 좋은것만 아름다운것만 풍성한 것만 가득하면 그것이 감사하고 좋은 것인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비극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섞어 놓지 않았을까 한다. 소풍시절에 보물 찾기처럼 모든 종이조각이 보물이 아닌 것처럼 찾고 노력하면서 하나씩 찾아가도록 우리 삶속에는 슬픔과 역경,시련등이 있어 그 좋은 것들이 빛나게 되고

우리가 우리의 삶속에서 비극을 환영하지는 못하지만 받아들이고 극복하겠다는 마음가짐인 예스라는 대답이 있어야 우리의 행동과 노력이 멋지게 보이리라

p12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다.

 퍼즐 맞추기, 요즘 한창 많은 사람들이 하는 명화나 멋진 풍경등을 500piece나 1000 Piece로 조각내어 놓은 것을 맞추어 본적이 있는가? 그것의 한조각 한조각을 볼때에는 이것이 어느 부분인지 전혀 알수가 없다 그러나 맞추려는 전체 그림을 보면 어느 쪽에 있다고는 대충 짐작이 간다. 우리의 전체 인생에서 매일 맞이하는 하루, 하루가 우리 인생의 전체 그림에서 어느 쪽을 차지하는지 아니면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이 얼마나 중요한 그림퍼즐을 완성하는 중요부분인지 우리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시련이 던져주는 단서를 잘 붙잡고 극복해서 우리 인생의 부분 그림, 전체그림을 맞추어 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전체 그림을 완성해 나갈수 있다

p19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는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수는 없다

 사람은 저마다의 목적이 있다. 이말은 하나도 의미 없는 인생이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단지 배역이 다를 뿐이지 각자의 인생은 맡겨진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왜 이렇냐고 따질 사람도 없고 그것에 대답을 해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목적에 충실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P19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수 있다“

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는걸까? 물론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잘 모르지만 신은 우리에게 생각할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이 무엇이고 역할이 무엇인지. 그래야 거기에 맞는 배역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 매순간마다 ”왜“라는 의문사를 가지고 살면서 ”어떻게“살것인가 하는 의문사에 대한 해답을 찾으면서 ”How"라는 감탄사로 인생을 마무리 해야 한다

p33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 수용소 생활을 직장 생활에 비유하고 싶다. 물론 직장 생활이 수용소 생활처럼 자유 의사를 박탈하고 억압하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위하여 갇힌 수용소라고도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는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때의 자신에게 맡겨질 부서와 하여야 할 일들, 수용소일과에 적응했을 무렵은 직장에 적응하고 자신의 일에 지식과 노하우가 쌓여 처리할 수 있을 무렵 그리고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고 익숙해진 모습,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는 우리가 직장에서 은퇴나 또는 퇴사를 했을 때의 심경과 도 비슷하다고 할수 있다

p50 "겁내지 말게! 선별을 두려워하지도 말게! 의사 M(친위대의 주치의)은 의사에게는 약하다네!“

“그렇지만 단 한 가지만은 자네들에게 당부하겠네”

그는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일할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직장인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회사에 올해 남기 위해서 자신의 일할 능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직장인들의 고된 모습이 수용소에서 가스실에 보내지기 않기 위해서 매일 면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p52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의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p64~65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전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되어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 군대의 훈련소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하는 말과 비슷. 매일의 훈련이 끝나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하루를 지우고 그 다음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하루를 무사히 보내는 심정이며 사고가 없이 얼차려가 없이 하루를 보내는 생활과 일부 비슷하다

p65~66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켤코 잊을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 순간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직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 우리는 현실에 얽매여 살면서 꿈을 꾸는 능력을 상실하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심지어는 꿈을 꾸는 방법을 잊어버리려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가 꿈을 꾸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것은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고 산소호흡기를 쓰고 있는 식물인간과 다름이 없다

p75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 운동을 하거나 무언가를 읽을 수 없는 척박한 수용소 생활, 오직 하루 하루 자기 목숨과 신체의 안전만을 위해서 생각하는 생활에서도 오직 가능한 것은 영적인 생활, 마음과 영혼으로써 오직 묵상과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고양시키는 영적인 생활만이 신체적인 고통을 줄일수 있다고 생각하고 영적인 생활로 인해 육체적인 생활도 연장시킬수 있으리라

p77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리 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리 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이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육체적으로 심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사람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있다는 것이다 그것만큼 사람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없다.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 아내를 생각하는 빅터 프랭클의 행복. 사람은 한문글자 그대로 서로를 기대어 살아야 하는 진정한 행복이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렇게 상대를 그리워 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기쁨중의 하나일 것이다

p79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누군가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가장 할 수 있는 돈 안드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마음속에 사람을 담아 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이 내린 축복중 하나일 것이다

p80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마음 속, 내적으로 깊은 곳에서 자신에 대한 영혼이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겉보다는 내적 자아가 올바르게 서 있어야 자연과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 오직 마음과 영혼이 눈을 뜰수 없으면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을 볼 수 없고 보더라도 감추인 것을 찾아낼 수 없다

p82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p86 외부 사람들 중에는 강제수용소의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 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전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 상황이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은 웃을 능력이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라도 그 웃음이 있어야 힘든 상황도 잠시라도 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초상이 난 집안도 고인과의 옛 추억을 잠시라도 떠올리면 슬픔에서 벗어나고 웃을 수가 있는 것이다

p88 "밑바닥에서 퍼주세요“

유머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기 위한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를 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 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극한 상황에서도 “밑바닥에서 퍼주세요”라는 유머를 던질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아무리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기분과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유머기술이 필요한 세대이다

그리고 작은 고통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작은 고민이나 고통이 확산효과처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차단 막이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야 한다

p91 그런 상황에서 사이렌소리가 가져다 주는 안도감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한 라운드가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마지막 순간에 넉 아웃될 위기를 모면한 권투선수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p95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안에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p97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법칙은 될 수 있는대로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다.

p107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원했다.

 가끔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의 결정에 우리 자신을 맡겨 둘 때도 있다.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때 운명이라고 핑계를 대기도 하지만 극한 상황에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삶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것이 이치이다

p120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p120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 사람은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고 있지만 마지막 결정의 몫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러나 사람은 먼저 그 결과를 예상하고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사람이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선택은 하고 싶지만 그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그것을 남에게 전가하거나 또는 핑계를 대고 싶기 때문이다 그 마음속에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p121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 자신의 고통이나 고생, 시련이 가치없는 것이 되는 것처럼 허무한 일은 없을 것이다. 신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조건을 주었다. 다만 그 환경이 다를 뿐이지 그 선택의 몫은 동일하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에서 자신의 판단과 촉으로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않은 것만큼 이기적인 것은 없다. 환경을 탓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이 시련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p122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문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 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p127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p129 미래의 목표를 찾을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 목표 없는 삶은 방향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배와 같다. 그것은 바다위에 떠 있는 부표와 같다. 실제로 퇴직한 사람이나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바로 얼마 전의 영광을 곱씹으면서 앞으로 미래를 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과거의 영광만을 회고하면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삶을 낭비한다. 어는 90세의 노인이 60세에 정년퇴직하여 어학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이룬 것을 보면 과거의 회상은 무덤에서나 할 일이다

p130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도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p131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들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p133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 -그 자신의 미래-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감정을 추수린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 말은 우리가 그것을 정확히 무엇때문인지를 알고 있고 해결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감정에 취해서 너무 편협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공정하게 나와 감정간에 공정하게 심판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치우쳐 감정에게 져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선수와 같다. 우리는 고통이나 시련이 닥칠때 특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해야 한다

p134 수용소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이런 징후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우리 친구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밖에 도움에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p136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대항하던 그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 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꿈 속의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 석방되기만을 기다리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앓고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의해 사망을 하게 된다. 이것은 정신이 우리 육체를 지배하는 상황과 같다고 할수 있다

성경에도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는 것과도 일치하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p137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정신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들은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기 위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목표-를 애기해 주어야 한다.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 자기 인생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만큼 절망적인 표현은 없다. 사람은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데 더 이상 희망할 것도 없고 소망할 것도 없는 환경에 의해서 본인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된다. 모든 것을 이룬 CEO가 어떤 목표를 잃었거나 더 이상 올라갈 것이 없을때 아니면 인생의 밑바닥에서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자포자기 상태의 사람이나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는 늘 인생에서 무언가를 늘 바라고 기대하는 삶으로 살아갈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p138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

p139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를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동일한 상황이라도 개인이 각각 받아들이는 심리적, 영적, 육체적인 것이 다르기 때문에 고통을 받아들이는 상황이 틀리고 거기에 반응도 다 제각각이다. 이것은 동일하게 400M 트랙을 다리더라도 개인의 체력이 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그 달린 시간은 전부 다르고 처음부터 뛰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상황만을 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오류를 쉽게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p139 오래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p140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 현대처럼 사람이 울지 않은 시대는 없는 것 같다. 웃을 일도 적어지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는 울일이 없어서 자신을 달래지 못한다. 울음이란 우리의 나쁜감정, 해묵은 감정,썩은 감정을 눈물을 통해서 밖으로 빼내는 배수구 역할을 하는데 우리는 그 배수구를 막고 있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튼튼한 배수구를 막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 배수구가 얼마나 충실하게 작동하는지 가끔씩은 시험배출을 해볼 필요가 있으리라

P141 두 사람에게는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p142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된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수 있다.

 살아야 하는 이유, 신이 주신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힘들더라도 고된 노동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감사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힘든 고난도 그 이유가 있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행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얼마’보다는 “왜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더 중요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핵발전소가 된다. 각자의 마음속에는 사람속에 에너지를 무한히 만들어내는 핵발전소를 가지고 있고 거기로부터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 핵발전소 동작버튼을 누르는 누구가를 마음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지치지 않고 모든 것을 지속할 수 있다

p145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p147 나는 내 동료(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가 가끔 한숨을 쉬던)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불쌍한 신의 피조물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친구나 아내,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나님 - 각가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를 알기를 바란다고

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한사람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 만큼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의 개수가 다를 뿐이지 신은 우리에게 주신만큼 기대하고 계시다. 한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맡기시고 맡기신 만큼 충분히 살기를 바라고 계신다. 맡기신 그대로 찾아가는 신의기대에 부응하며 살자

p152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집단에 들어가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p159 환멸을 경험하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그가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가지 가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161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神)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 신이외에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신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사람과 환경을 너무 많이 두려워한다. 주어진 고통에 굴복하고 환경에 복종하며 자연을 두려워할 뿐이다 신을 두려워하기에는 우리는 환경과 자연을 먼저 두려워한다

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환경과 고난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서 싸워야 한다

신은 그것을 극복하라고 주신 것이고 그것을 극복한 다음 신게 다가오길 바란다 그러나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을 만나는 사람이 적은 이유이다

p167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과 송환기재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물론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게 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드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는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p173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p174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져 있다.

p175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기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의 으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정신건강에 대해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유동성이다

 살면서 우리는 긴장의 끈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산다. 그러나 내부에 정신의 긴장의 끈을 풀어 놓고 살게 되면 그 인생은 내부적으로 어는 것을 당겨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편할지는 모르지만 스스로가 나태해지고 인생이 재미없어지리라 생각된다. 삶속에서 항상 자신을 어는 것에 대해 늘 긴장의 끈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필요하다. 현악기의 현은 연주하지 않을때는 완전히 풀어 놓은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유지하고 연주전 튜닝을 하면서 현을 팽팽하게 고정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삶속에서도 우리는 연주하기전 과 연주할때의 현악의 현처럼 우리 마음과 정신의 긴장의 끈을 유지하여여 가장 좋은 음색을 낼수 있는 악기가 될 수 있다

p177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현상으로 인간이 진정한 의미이 인간이 된 후에 겪어야 했던 두 가지 손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의 일면을 잃게 되었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그런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낙원에서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안전함은 이제 영원히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근래에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동안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본능도 없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전통도 없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p178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여가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 얻게 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에 있다.

p178 일요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한 주일을 보내고 내면의 공허감이 밀려올 때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사람이 겪는 일종의 우울증이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적 공허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연금 생활자나 나이든 노인들이 느끼는 위기감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일상 생활에서 많은 직장인들은 일요병이나 월요병 또는 많은 우울증에 시달린다. 특히 나이가 40대를 넘으면 그런 증상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공허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은 누구는 술에, 누구는 골프에, 누구는 몸을 만드는 것에, 누군가는 값이 나가는 자동차에, 또는 도박에, 술에 중독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공허의 배경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왜 그런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바쁜이유와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지못하면 결국 수용소에 갇힌자들처럼 환경을

탓하며 죽을 수밖에 없다

p181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의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가즌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2 “인생을 두 번재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하려고 하는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인생을 두 번을 살면 우리는 어떤 결정과 선택을 할까? 아마도 첫 번째 인생과 비슷한 결정을 내리면서 살지는 않을까? 첫 번째의 인생을 다 기억한다면 실수를 하지 않고 좋은 결정을 내리겠지만 첫 번째 생의 기억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거의 비슷한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 삶을 살게 될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릴때

첫 번째의 삶에서 내린 똑같은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더 의미있게 살아야 하리라

p183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의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가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 수록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서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표현시킬 수 있게 된다.

p184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언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첫 번째를 완수하고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분명하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노력은 다양한 형태와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3가지의 행동에도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과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결단력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지만 그것을 하기 위한 액션이 없다는 것이고 그러한 고민 과정을 반복하면서 삶을 낭비하게 된다

변경연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그 가운데 많은 것을 경험하고 고민하면서 글을 쓰게 됨에 따라 우리의 삶을 아름다워 질 수 있다

p185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한느 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p187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리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 중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데에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수 없는 시련일 경우-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189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것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누구나 시련은 피해가길 원하고 있으며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련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그 무언가가 있다 위기속에 기회가 숨어 있는 것처럼 우리 의시련 속에는 우리가 알수 없는 많은 축복의 단서가 있다. 시련을 처음 접하게 되면 그것이 힘들고 어렵게 보이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변곡점이 되리라 믿는다

p198 인간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변의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의 뒷장에다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은 다음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잇는 그 풍부한 내용들, 그 동안 출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춘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p211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것이 아나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 사람은 상황에 자신을 맡길 수도 있고 상황을 만들어 갈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황이 자연현상처럼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몸을 맡기는데 익숙한 존재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고 실행해서 그 결과를 만들어가고 그 결과에 순응하면서 오늘보다 내일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p215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p219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나 간단하게 말해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낙관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1)고통 과 2)죄와 그리고 3) 죽음을 말한다

p220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독일어로 쓰인 내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화에서도 삶에 으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최선‘이란 라틴어로 ’옵티넘‘(optimum)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optimism)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때 인간의 잠재력이 1)고통을 인간적이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이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에 대해,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것은 나머지 두가지 것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p221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수 있다.

 행복이란 것에도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존재하려면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하듯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이유를 찾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는, 누구과 살든 항상 거기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의 우리의 삶을 가꾸어 나가는 과정이다

p230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둘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수 있다는 얘기다.

p231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로 들어가는 세 번째 길이다.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p232 "저는 제 삶이 의미와 목표가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의 날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신조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 목을 부러뜨렸지만 내 목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에서 처음으로 심리학 과목을 듣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장애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내 능력을 더욱 향상시켜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련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 도달한 인간적인 성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p233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편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p236 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세 번째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238 나이든 사람들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부러워 해야 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리고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이런 유용성은 그 사람이 사회에 이로운 존재가 아닌가 하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초점을 맞추어 정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람이 이루어낸 성과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을 숭배하는 것이 요즘 사회의 특징이다.

실제로 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가치는 무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과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차이를 애매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3. ‘내가 저자라면’ 자신이 이 책의 저자가 되어 이 책의 목차와 전체적 뼈대를 논하고,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그리고 보완점을 평설할 것 (나중에 자신의 책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니, 특정 주제를 어떻게 구성하고 꾸며 갔는지 주의해서 볼 것 - 반드시 a4 2페이지 이상)

빅터 프랭클이란 작가와 또한 로고테라피 란 심리치료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 접하게 된 작가와 책 내용으로서는 많은 감동과 생각할 점을 갖게 되고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던져주고 매일 접하는 평범한 일상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고민과 답을 전해주는 책이라고 할수 있다

책의 순서는 많이 영화화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의 처참한 생활과 그 속에서 자신의 삶과 동료들의 삶 그리고 거기에서 느끼는 슬픔과 고통, 그 가운데서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한 작가의 진솔한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는 단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2부에서는 그가 수용소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을 정리하고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들과 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심리요법인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에 대해서 잘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삶에서 보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의미들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고 있는 존재, 사랑, 시련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현대를 잘 묘사해주고 있는 단어 실존적 공허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자신이 존재의 가치와 또한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이 부재되어 있고 거기에 많은 현대인들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남들이 하는대로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대로 살아가고 있으며 거기에 맞추며 살아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3부에서는 우리가 삶을 살면서 비극에서도 낙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시련속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험한 세파와 세상의 풍조속에서 살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차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돼지와 같은 반복적인 삶을 살지 말고 성자가 되기 위한 노력 아니면 훌륭하게 살기 위하여 각자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독려하고 있다

1.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기술함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 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 /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집행유예 망상 / 삶과 죽음의 갈림길 / 무너진 환상, 그리고 충격 / 냉담한 궁금증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말라 / 혐오감 / 무감각/ 주검과 수프

죽음조다 더한 모멸감 /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한 카포에게서 받았던 작은 혜택들 / 수감자들이 가당 흔하게 꾸는 꿈

먹는 것에 대한 원초적 욕구 / 메마른 정서 / 수용소 안에서의 정치와 종교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주어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예술 / 강제수용소의 유머

사소한 것에서의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상대적 위험을 느낌을 환자 생활 / 생존을 위해 군중속으로

나 혼자 만의 공간,,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 운명의 장난 / 테헤란에서의 죽음

운명을 가르는 결정 /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 / 엇갈린 운명

무감각의 원인 / 인간의 정신적 자유 / 시련의 의미

끝을 알 수없는 일시적 삶 /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 살아야 할 이유

완수해야 할 시련이 얼마인고! / 자살 방지를 위한 노력 / 집단 정신치료의 경험

수용소의 여러 가지 인간 군상 / 해방이 체험 / 헤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 비통과 환멸

2.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 개념에 대해서 치우침, 실제적인 임상사례가 부족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 실존적 좌절 / 누제닉 노이로제

정신적 역동성 / 실존적 공허 / 삶의 의미 / 존재의 본질

사랑의 의미 / 시련의 의미 / 임상에 따른 문제들 / 로고드라마

초의미 / 삶의 일회성 / 기법으로서의 로고테라피 / 집단적 신경증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 정신의학도의 신조 /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3. 비극 속에서의 낙관 : 개념적인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는 모호

비극 속에서의 낙관 / 저자에 대하여 / 로고테라피의 관한 참고문헌

내가 저자라면 무엇을 보완할까?

수용소의 경험이나 생각 그리고 로고테라피의 개념 그리고 우리가 살아갈 방향에 대해서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경험이 담겨진 글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수 있고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죽음이 많다 못해 흔해빠진 수용소 안에서 저자는 자신의 감정을 자체하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 글을 표현하고 있는데 좀더 처참한 상황, 즉 심한 시련속에서 인간이 인간미를 잃고 자신을 버려가는 모습을 좀더 표현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류 역사상 가장 힘든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의 삶이 특히 이런 경험이나 물질 세대에서 자란 젊은 세대에게는 별다른 공감이 없을 수도 있다. 작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면 21세기를 살아가는 궁핍함이나 배고품이나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는 젊은 세대에게는 이책의 감동이 배고픔을 알고 어려움을 알고 고통이 무엇인지를 경험한 세대에게 준 감동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즉 경험이 없는 세대들은 작가와 동일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일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생활과 모습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성을 잃게 되었을 때의 인간의 모습과 행동을 자세히 표현하고 거기에 작가의 감정을 좀 더 쏟아놓으면 많은 감동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선 나의 10대 아이들에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의사가 쓴 책이라고 하면서 권해주면 우선 아우슈비츠가 무엇인가부터 물을 것 같다.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준 책이라고 하면 밀레니엄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전후 배경과 사진 그리고 많은 참고가 될만한 것이 같이 포함되어 있으면 책을 통한 감동이 전해질수 있다

2부에서 전하는 레고테라피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처음 듣는 개념이고 심리학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 쉽게 이해가 가도록 쓰여진 본문인데 단지 내가 여기서 알게된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 환자에게 삶의 의지와 의미를 얻게하고 신이 각 개개인에게 준 축복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아록 있다

내가 저자라면 레고테라피의 적용을 통한 치료사례등을 많이 언급하여 사랑, 시련, 고통, 삶에 대해서 어떻게 환자들이 그 삶의 의미를 찾아 갔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떤 삶을 하고 있는지 즉 치료 결과에 대한 것이 언급되었으면 많은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일반인들이라면 ‘로고테라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을 예화로 풀어 나가고 그 개념에 대해서 이해시키가 쉽다고 생각된다

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은 로고 테라피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이 추가된 것인데 사람이 가장 피하고 싶은 3가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3가지는 고통, 죄, 죽음인데 실제로

여기에 해당되는 실제 사례가 처음에 이야기한 주제와 잘 연결되지 않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을 좀더 잘 풀어서 설명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된다.

IP *.243.174.103

프로필 이미지
2014.02.17 14:16:53 *.94.164.18

중간중간 보이는 참신한 표현들이 재미있넹ㅛ.

잘 읽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4.02.18 11:20:49 *.94.41.89

저자에 대한 해석이 생동감 넘치고 톡톡 튀네요 ^^ 우와! 하고 감탄하고 갑니다.

남은 2주도 좋은 음색의 연주를 기대해봅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북리뷰 안보이시는 분들 일단 파일첨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관리자 2009.03.09 82986
778 10기 2차 레이스-구본형의 마지막 수업(이은심) file [2] 왕참치 2014.02.24 4139
777 10기 레이스 -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강종희 file [2] 종종걸음 2014.02.23 4414
776 10기 레이스_3주차_구본형의마지막수업_정수일 file [4] 피울 2014.02.23 4486
775 10기 3주차레이스 <구본형의마지막수업> 김종호 북리뷰 file [2] 구름에달가듯이 2014.02.22 4201
774 10기 북리뷰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정은 file [4] 앨리스 2014.02.17 5331
773 10기 2차레이스 북리뷰-죽음의 수용소에서(이은심) file [2] 왕참치 2014.02.17 4256
772 [10기 2주차 북리뷰] 죽음의 수용소에서 file [3] 찰나 2014.02.17 4152
771 <10기 지적 레이스 북리뷰 2주차>죽음의 수용소에서-조현연 file [2] 에움길~ 2014.02.17 4879
770 <10기 레이스 2주차 북리뷰> 죽음의 수용소에서 - 이동희 file [5] 희동이 2014.02.17 5203
769 지적 Race 2주차_죽음의 수용소에서 file [2] 류동일 2014.02.17 4274
768 10기 레이스 2주차 - 죽음의 수용소에서 강종희 file [4] 종종걸음 2014.02.17 4273
767 [10기 2주차 지적 레이스] 죽음의 수용소 에서_박윤영 file [2] 녕이~ 2014.02.17 4443
» <10기 레이스 2주차 북리뷰>죽음의 수용소에서_한창훈 file [2] jieumjf 2014.02.16 4156
765 10기_2주차_죽음의수용소에서_정수일 file [8] 피울 2014.02.16 4214
764 연구원레이스2_죽음의 수용소에서_구해언 [6] 해언 2014.02.16 5040
763 10기연구원 2주차, 죽음의 수용소에서 - 김종호 file [6] 구름에달가듯이 2014.02.15 4544
762 연구원 레이스: 열하일기 file [1] 해언 2014.02.10 4158
761 10기 레이스-열하일기-이은심 file [2] 왕참치 2014.02.10 4278
760 10기 레이스 - 북리뷰: 열하일기 - 강종희 file [1] 종종걸음 2014.02.10 4125
759 10기 열하일기 북리뷰_김정은 file [4] 앨리스 2014.02.10 4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