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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7일 09시 50분 등록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2012.


1. 저자에 대하여


■ 빅터 프랭클 Viktor Emile Fankl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 YES! YES!

……

 

•출생・사망

 

1905. 3. 26. 오스트리아 빈 / 1997. 9. 2.

 

•발 자 취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1930년)와 철학박사 학위 받음

빈 의과대학 신경정신과 교수 및 빈 대학 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미국 하버드 대학, 댈러스 대학, 피츠버그 대학 교수 역임

오스트리아 심리의학협회의 회장 역임, 오스트리아 과학학슬원 명예회원

로고테라피 학파 창시자

제2차 세계대선 당시 3년 동안(1942~1945) 다카우와 아우슈비츠에서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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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서

 

1924 국제심리분석학회 잡지에 글을 발표한 이후 27권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원제:『Man’s Search for Meaning』),

『Psychotherapy and Existentialism』『The Unconscious of God』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The Unheard Cry for Meaning』

『The Doctor and the Soul』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라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회상록 ) 등


■ 그의 생에서 ‘강제수용소’는 어떤 의미였을까


 ‘죽음의 수용소에서’라고 번역된 책을 읽으며 이의 저자에 대해서 의사라는 이에게 가지게 되는 일반적이고 고정적인 이미지를 생각했다. 일견 건조해 보이고, 합리적이며, 다른 것에 관심두지 않는 모범생의 이미지. 폭발적이고 격정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냉철한 이성주의자. 투철한 직업관을 가진 성실한 의사.

 하지만 그 자신이 90세에 써내려간 회고록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와 안나 S. 레드샌드가 쓴 『빅터 프랑클』을 보면서 ‘의사 빅터 프랑클’이 아니라 한 사람의 빅터 프랑클을 만났다. 그러니까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원제가 ‘삶의 의미를 찾아서’인 만큼 빅터 프랑클의 인생을 좀더 생생하게 담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빅터 프랑클은 고작 3년 수용소에서 살았을 뿐이다(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길! 그 기간이 결코 짧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통이 짧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92년의 생애에서 3년이란 기간은 지극히 한 부분이란 것이다. 물론 그의 생에 전반에 걸쳐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며 로고테라피 이론을 창시하게 된 것은 수용소 체험이 절대적이며 그의 삶을 지배하는 부분이지만, 거기서는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빅터 프랑클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었을지언정, 인간 빅터 프랑클을 얘기하기에는 많이도 부족하다.

 그래서 92년의 생애에서 아우슈비츠에서의 3년은 매우 작게 느껴졌고, 수용소의 삶 또한 그가 선택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니까 그 수용소는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장소가 아니라 빅터 프랑클이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을 정립시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일종의 정신병원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것은 무리이고 과장임을 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강조되는 ‘의미찾기’에 대한 그의 주장은 수용소의 삶과 경험이 그에게 의미를 준 게 아니라 그의 의미찾기의 일환으로 수용소의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그가 수용소를 선택한 것은 맞는 말이다. 많은 이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이전부터 그는 미국 이민 비자를 신청했고 1941년 수락 통보를 받았다. 많은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시점에서 나이 많은 유대인이 먼저 끌려갔으므로 그는 자신의 부모 역시 끌려 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줄 사람 역시 자신뿐이라는 것을, 로스차일드 병원의 신경과장이라는 직책이 그의 부모를 보호하고 돌봐줄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는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의 고민 끝에 성당에서 기도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날, 그의 식탁 위에는 대리석 조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의 아버지에 의하면 그것은 유대인 교회에서 나온 조각으로 히브리 문자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의 하느님 야훼가 준 땅에서 오래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빅터 프랑클은 남았다. 그리고 다음 해, 수용소로 끌려갔다.


■ 프로이트와 마주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의 부모로부터의 양육경험이 개인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을 가진다. 이 프로이트의 사고로 접근한다면 프랑클은 부모로부터 어떠한 양육을 받았기에 그의 성격을 형성하게 되었을까.

 1905년 오스트리아 빈,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랍비 집안이었고 부모 모두 유대교 교리를 엄격히 지켰다. 아버지는 의사를 꿈꾸었으나 돈 때문에 중퇴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어머니가 감성적이고 선하고 자애로운 성격을 가졌다면 아버지는 스파르타적인 인생관과 그 반대의 성격을 지닌 원칙주의자였다. 훗날 그가 심리테스트를 받은 결과 극단적인 합리주의에서 예민한 감정주의에 이르는 폭넓은 기진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났는데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세 살 때부터 의사가 되기를 소원했던 프랑클은 철학과 심리학 서적을 읽고 프로이트를 만나면서 정신과 의사로 진로를 정하게 된다. 그리고 학창 시절, 당대 명성이 자자했던 프로이트에게 서신과 논문을 보냈다. 프로이트는 즉각 답장을 해 주었고 그의 논문을 정신분석학회지에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17세에 쓴 그의 논문, 「긍정과 부정에 대한 연구」가  19세이던 1924년 전문적인 국제 학술잡지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의대생 시절 우연히 그는 프로이트를 만나게 된다. 그때 프로이트는 프랑클의 집 주소를 그대로 외쳤다 한다. 그들의 서신 왕래를 기억하는것이다. 다만, 이때는 프랑클이 아들러의 지도를 받을 때였다. 프랑클은 정신분석에 대해 차츰 비판적이 되었고 정신분석의 몇 가지 부분들-무의식에 존재하는 성적, 공격적 충동이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에 의문을 품고 다르게 접근하는 아들러 정신분석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 아들러에게서 배우다  


 체르닌가세 6번지에서 태어난 프랑클의 집 맞은편에 개인심리학(사회심리학)자의 창시자인 아들러가 살았었다 한다. 그와 아들러의 운명은 이렇게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들러의 이론을 주창하는 이들은 아들러 학파로 불리며 그들의 이론-사회적으로 우월해지려는 욕구가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힘-을 발전시켰다. 1925년 아들러 학파의 정식 회원이 되어 논문을 발표하거나 기조연설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곧 이 이론에 대한 의문점으로 일부분을 비판하였기에 이들 개인심리학협회로부터 쫓겨났다. 그리고 그 후 아들러는 다시는 빅터와 얘기하려 하지 않았고 빅터의 노력에도 모른 체 했다. 그러나 빅터는 늘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그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얘기한다. 무엇보다 제일 큰 영향은 프로이트였으며 그리고 아들러였다.


■ LOGOS


 “존재와 인생이 나에게는

  하나의 꿈이 되었네“


 열 다섯 살 무렵 쓴 그의 시의 한 구절이다. 그에게 의미란 중요한 것이었다. 네 살 땐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치자 잠들기 직전 놀라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삶의 허무함이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서부터 ‘삶의 의미’와 관련한 질문에 매료되었던 그는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 로고테라피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의 일부분에 동의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 의미있는 삶을 찾고자 하는 욕구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그이기에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도록 도움으로써 정서적 고통을 치료하는 그의 이론, ‘로고테라피’를 발전시켜 가고 있었다. 그리고 24세 무렵에는 이미 로고테라피를 위한 세 가지 주요한 방법까지 생각할 정도로 그의 이론은 이르게 정립되고 있었다. 이러한 자기 생각을 실제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며 빅터는 청소년 상담센터를 세워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성직자들이 봉사하도록 했다. 당시 청소년 자살율은 매우 높았으나 센터 설립 2년째 빈에서 학생 자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뒷날 회상하듯 우연히 광장공포증을 가진 게슈타포와의 대화 도중 자신의 로고테라피 이론 중 역설적 의도를 사용하였던 것이 유효하여 그의 수용소로의 강제 징집이 1년간 유예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그는 자신의 로고테라피 이론을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이는 수감자뿐만 아니라 카포, 당원들에게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수용소에서 견딜 수 있었던 삶의 의미는, 그가 잃어버린 「의료 성직자」를 다시 쓰려는 의지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실제 마흔 살 생일에 그의 동료가 준 몽당연필과 두 어 장의 작은 친위대 서식 용지에다 원고를 다시 써 내려 갔다. 청소년 시절엔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을 꾸었는데 사라진 노트를 열병에 걸린 사람마냥 찾아다니는 주인공에 관한 내용이었다는데 마치 수용소에서 잃어버린 원고로 상심하다 다시 작은 종이 조각에 그것을 쓰고 있는 빅터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신과 의사가 된 후에는 빈 정신병원의 여성 자살미수자 병동을 책임졌으며, 1942년 체코의 테레친 수용소에 수감될 때까지 의사로서의 책무를 다하며 수많은 환자들이 나치의 안락사 계획에 희생되는 것을 막고 그 자신의 이론으로 수용소에서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불러 일으키도록 도왔던 그, 그는 진정 학자였으며 또한 확고한 신념을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 그의 이름은 119104입니다


 빅터는 서른 다섯 살에 로스차일드 병원의 간호사인 틸리 그로서를 만났고 결혼을 원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결혼을 허가하는 관공서는 따로 설치되어 있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 임신이 확인되면 강제수용소로 호송되었던 것이다. 전쟁 중 빈에서 결혼을 허가받은 마지막 사람이 되는 그나마의 행운은 있었지만, 틸리는 태중에 있던 아이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저서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는 그 아이에게 헌정한 책이었다.

 이렇게 수용소 아닌 곳에서도 그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하던 유대인 빅터의 가족은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 갔다. 그러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서, 어머니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뒤 가스실에서, 형은 아우슈비츠 부속 수용소로 이송된 뒤 광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아내 틸리는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스물 다섯이었고 그와 결혼한지 일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그는 수용소에서 석방되고 난 몇 개월이 지난 1945년 가을에서야 그의 아내 틸리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을 다시 만나리라,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아내가 살아남았으리라는 희망이 무너져 버린 경험으로 많은 이들이 자살을 하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실제 수용소에서 빅터는 의사도 아니었고 그저 유대인으로서 119104였다. 노예노동을 하며 그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죽음에의 공포 속에서 생활하면서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생각이라고 깨달았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살아 남으며 시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면 그 시련을 견디어 냄을 알았다. 그는 수용소에서도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 되면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원고를 쓰는 작업이 또한 그의 생명을 부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당신의 삶은 긍정이었습니까?


 프랑클의 책 제목 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라고 말하라”가 있다. 그는 그의 삶에서 늘 긍정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의 천성이기도 했다. 그의 삶에서 항상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그는 가족 모두가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을 알게 된 그 때에도, 그 시련 속에서도 그에게 주어진 의미를 찾으려 했다. 스스로도 밝혔듯이 그는 천성 자체가 삶을 즐기는 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누군가가 좋은 행동을 하면 잊지 않지만, 나쁜 행동을 하면 담아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이 상하거나 괴로운 일을 대부분 잘 이겨낸다고. 사소한 괴로움에는 화를 냈지만 큰 문제들에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85세 어느 날인가 눈이 멀었음을 알았을 때에도 불평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엘리, 나 장님이 됐어.”

 그는 92세까지 살았고, 90세에 그의 회고록을 썼다. 그렇다면 그는 실명을 한 채로 글을 썼다는 것이 된다. 그 때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좋아하는 암벽 등반이었을 뿐이다. 27개의 명예박사 학위보다 알프스 암벽 두 곳을 최초로 오른 뒤 ‘프랑클의 비탈길’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을 더 좋아한 그였다. 67세에 첫 비행을 했고 이듬해 솔로 비행을 감행한 그였다. 삶의 많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렇듯 열정적이었다. 단지 공부와 책만 아는 조용하고 학자적인 기질만이 넘쳐나는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또한, 빅터 스스로도 유머러스하다고 하며 강연에서나 대화에서나 언제든 유머와 재치를 활용한다고 한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넥타이에도 관심이 많고 안경테 전문업체가 시리즈를 출시하기 전 초안을 보여줄 정도로 안경테 디자인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작곡도 좀 할줄 안단다. 그가 작곡한 비가는 공식 오케스트라 연주로 공연되기도 했고 탱고 음악은 텔레비전에서도 사용되었다고 하고, 드라마도 좀 썼고 연기도 한 적 있고....이렇게 그는 다방면에 관심과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문득, 이러한 관심들이 그가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들, 수용소에서 가족을 잃었던 그 기억들로 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적으로 그의 천성이 그러할 수도 있지만, 깊은 고통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분야에 눈을 돌리며 관심을 흩뜨리는 이들의 모습이 생각나서다.

  수용소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아픈 기억들을 조금씩 치료해줄 새로운 여성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그의 삶은 또한 긍정이었다. 수용소에서 홀로 살아남아 그 경험에 관한 책을 쓰던 1946년 2월, 그는 빈 폴리클리닉 병원에 신경과 과장으로 취임했다. 수용소의 경험과 가족을 잃은 슬픔은 그에게도 우울증을 주었고 또한 그 자신의 성급한 기질로 언성을 높이는 일이 더러 있었다 한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그에게 부탁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의 아내가 된 엘레오노레 슈빈트를 만났다. 그녀의 나이 20세였고 그 병원의 간호사였다. 그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했고 빅터에게 그녀는 수용소의 경험, 인생의 목표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틸리의 공식적인 사망진단서가 없어 그들은 결혼하지 못하다가 1947년 7월 16일 공식적인 사망 통보를 받고 7월 18일 간단히 결혼식을 올렸다. 빅터는 유대인이었고 엘리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아무도 이 결혼을 주재할 수 없었다 한다. 어찌 보면 수용소에서 나오고, 그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고, 엘리를 만나고 결혼하기까지의 기간이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고 그것에 무뎌지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정신의학과 교수이며 학자이니, 그 나름의 치료 방법을 찾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가 슬픔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엘리라는 의미가 주어진 것은 아닐까. 시련에서 사랑으로 그를 살아나게 한 의미인지도, 그 무수한 고통을 경험하고 슬픔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그의 로고테라피를 전파시켜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였을지도. 전쟁을 겪은 그들에게 보다 큰 의미이자 희망이 될 아기가 탄생했다. 빅터의 나이 마흔 두 살이었다. 그가 92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하기까지, 그는 엘리의 도움과 사랑 속에서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로고테라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독려하며 그의 삶을 마쳤다. 손가락 하나 까딱으로 이뤄지는 선별 심사에서 어쩌면 가스실로 끌려 갈 뻔한 그 상황에서 스스로 움직여 가스실을 벗어난 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의지를, 책임감을 가지려던 그이다. 그러니, 그의 삶 곳곳에서 yes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참고 자료

•빅토르 E.프랑클 저, 박현용 옮김, 책에 쓰지 않은 이야기, 책세상, 2012.

•안나 S. 레드샌드, 황의방 옮김, 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찾다, 두레, 2008.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1984년 판에 부친 서문

p9~10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긴 하다.


추천의 글 Gordon W. Allport

p19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제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p26~27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을 판단할 때에는 나치대원이나 감시병들과 같은 정신의학적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으로 본다.

→ 우리나라의 이른바 ‘앞잡이’들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일본에 충성하면서 같은 민족을 괴롭히던 그들. 이용되고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위해 더욱 더 악랄한 행동을 일삼았던, 종내는 스스로 조선인임을 부정하던 슬픈 일제시대의 얼굴들. 또한, 유신시대의 프락치들.

   그리고, 어쩌면 직장생활에서의 우리들의 모습도 카포가 아닐까. 입사하여 사원일 때는 유대인이었지만, 진급을 위해서 또는 그 비슷한 이유들을 가지고 ‘준’상사가 되어 사원들을 억압하고 감시하는 카포가 되어 가는.

p27 수용소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 대해 그릇된 생각, 즉 감상이나 연민을 갖기 쉽다. 하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수감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목숨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 오랜 시간이 지나 많은 이들로부터, 많은 글들로부터 그 당시의 수용소 생활을 간접체험하면서 분명 연민이란 것이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아마도 내가 느끼는 것은 실제 체험했던 이들의 겪었을 그 생각과 느낌들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열심히 감정이입한다 할지라도 나는 그때의 그들이 아니고, 나는 늘 안전한 울타리에서 그들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니까.

p28~29 카포는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기준으로 선발한 사람이다. 수감자 중에서 가장 성질이 난폭한 사람에게 이 일이 돌아갔다. 운 좋게 가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나치대원들에 의해 행해지는 이런 카포 선발과는 별도로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시시때때로 자체 선발이 행해지고 있었다.

→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기준으로 선발하다. 카포. 어떤 역할을 함에 있어 합당한 능력을 갖춘 자를 선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니, 그러한 능력을 탁월히 포착하는 나치들도, 아, 탁월한 능력자라 해야 하나?

p30 이 주제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수감자로 갇혀 있으면서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이 과연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물론 그런 공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가치를 지닌 증언을 하기에는 문제의 핵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오로지 그 안에 있었던 사람만이 알고 있다. 그의 판단이 객관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의 평가가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일을 할 때에는 그 어떤 개인적인 편견도 버려야 하는데, 바로 이 점이 이런 종류의 책이 지니고 있는 어려움이다.

→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에도 확실히 내가 체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토로할 때 말이 많아지고 빨라진다는 것을 느낀다. 걸러지지 않은 날것의 말들이 마구 흘러 넘치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경험의 얘기를 전하는 이들에게 내 경험의 틀이 전이되어 얘기를 듣게 된다. 어떤 사물에 대한, 사건에 대한 판단에 관해 공정한 시각, 객관적 시각이란 것이 절대적인 측정치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너무 냉정해’라거나 ‘너무 비판적’이야, ‘내 편 좀 그냥 들어 줘’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 때라도 그것이 ‘객관적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어떤 시각이란 것이 늘 주관적인 바탕을 깔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식으로든 사고라는 것은 그에 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평가되고 수립되는 것이니까. 내 사고의 틀, 그에 대한 기본 인식, 그것이 무엇이냐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 ‘객관적’이란 단어에 대한 노력은 차치하고서라도.

p33 수많은 수감자들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적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의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석방되어 자유를 얻은 후이다.

→ 죽음에 대한 선고를 받았을 때 환자의 심리적 반응도 이와 비슷할 터. 거부, 분노, 수용 등의 태도들.

p34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기차는 망설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불쌍한 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구해내고 싶다는 듯이….

→ 당시를 경험하지 않은 나에게도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 커서 단어를 봄에 있어도 경직된다. 가스실, 대학살, 공포. 단어에서 느끼는 공포를 직접 체험한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나 또한 심장이 멈추는 듯하다.

p36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날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그레한 뺨과 통통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 모든 삶에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1%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것도 이른바 망상일까.

p39 그날 저녁에야 우리는 그 손가락의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는 죽음 행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채 몇 시간도 못 되어 집행되었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그 화장터의 문에는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화장터로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비누 한 조각씩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다음-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 끔찍한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은 너무나 많으니까.

→ 직장에서 상사들이 잘 하는 행동이 이른바 ‘손가락 까딱’이다. 손가락 하나로 무언가 일사천리로 자신의 뜻을 받들어 진행하기를 바라는. 그런 손가락을 보면 잘라버리고 싶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저 손가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을 때, 저 “까딱”에서 느껴졌을 공포. 저 손가락의 끝, 목욕탕의 끝은 독가스였다....

   그런데, 프랑클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우슈비츠 역에서 있었던 첫 분류심사에서 프랑클은 오른쪽으로의 까딱을 받지 못했다 한다. 나치 친위대 장교이자 강제수용소 내과 의사였던,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까지 했던 멩겔레 박사는 왼쪽으로 프랑클을 보냈다. 그러나 프랑클은 자신과 같은 곳에 지인들이 없고 두어 명의 젊은 동료들이 오른쪽으로 분류된 것을 보고서는 멩겔레 박사 몰래 오른쪽 제일 끝으으로 갔다 한다. 자신도 어떤 생각과 용기로 그러했는지 모를 일이라고 말이다.

p41~42 보세요. 이건 과학서적의 원고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내가 운명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말도요. 그렇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원고를 지켜야 하거든요. 제가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것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 네, 네. 이해하구 말구요. 10년 동안 연구한 박사논문이 연구실 화재로 날아가 버리자-컴퓨터도 없던 시절이라는데-정신이상이 되었다는 어느 분의 얘기가 떠오른다. 나 또한 논문파일을 날려 먹거나 원고를 날려 먹었을 때, 공황상태로 진정할 수 없었던 적이 많다. 정신을 차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짜증과 한숨과 분노가 일었는지 모른다...아무런 해가 되지 않음에도 그것이 수용할 수 없을 일인가? 스스로 권위와 힘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무지막지한 태도들...

p45 그런데 이런 냉담한 궁금증이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하는데,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우리는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결말은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을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p48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서 잠깐 동안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과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 죽음이라는 상황을 매일 겪고 보면서 그것이 가장 익숙한 것이니 말이다. 생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그 공포의 대상에 저절로 다가가는.

p50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자네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겼다고 해보자. 나치대원이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당장 그 사람을 따로 분류하고, 그 다음날 틀림없이 가스실로 보낼 거야. 자네들은 ‘회교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불쌍하고, 비실비실거리고, 병들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고된 육체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회교도’라고 한다네. 조만간에, 아니 대개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회교도들은 가스실로 보내지지.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 이상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여기 있는 자네들, 이곳에 온 지 스물네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야.

→ 의욕을 잃어버린 경우, 세상 모든 것이 귀찮을 때 늘 나타나는 내 모습이다. 기본 의식을 가벼이 여기고 내 몸 상태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 늘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에 대한 부러움과 존경은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그러한 모습을 실천하는 것은 왜 이다지도 뭔가. 지금 생에서도 이러한데 수용소에서의 삶에서의 내 모습을 상상하니, 치가 떨린다.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주의하련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 내 자신을 사랑하며 기꺼이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주, 뼈저리게 한다.

p51 "이 세상에는 사람이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레싱

→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비정상적인 반응이 정상이다...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이면 더욱더 비정상적인 반응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리라는 것. 레싱은 어떤 일을 앞에 두고도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성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라고...

p57 인간이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사람들은 곧 자기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 고통과 그리움, 그리고 혐오감. 그 뒤에 찾아오는 무감각. 아마도 고통의 절정의 감정이 아닐까 한다.

p58~59 구타를 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주는 모멸감이었다. 한번은 얼어붙은 철로 위로 길고 무거운 도리를 옮겨야 할 때가 있었다. 만약 한 사람이 미끄러지면 그 자신은 물론 함께 도리를 옮기던 모든 사람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내 오랜 친구 중에 엉덩이가 선천적으로 기형인 장애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별 과정에서 그와 같은 장애인은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 경우에 따라서는 얻어맞지 않는 것이 더 큰 아픔을 줄 수도 있다고까지 프랭클은 이야기한다.

p60~61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 나의 과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작자가, 나의 지난 삶을 멋대로 평가하는 것을 꾹 참고 듣고 있노라면 분노가 치솟는다고 프랑클은 적고 있다. 물론이다. 나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이가 시시콜콜 떠드는 이야기도 참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전혀 모르는 이가 나에게 퍼붓는 얼토당토 않는 모멸이란 더 말할 것도 없다.

p64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지게 된다. 즉 내 자신의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 무감각의 하루 하루를 버텨낸다. 무감각은 자기 방어의 수단이지만 모든 일에 무감각하며 버텨낼 수 없으니 무감각 속에서 느끼는 하루하루의 감정들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p65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와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 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 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했다.

p68 시시때때로 의식을 파고드는 먹는 것과 좋아하는 요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앞에서 얘기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될 그날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되는 것이 가지는 의미가 가슴을 울린다.

p70 어느 날 아침에는 평소 꽤 용감하고 의연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구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을 보았다. 신발이 그가 신기에는 너무 작아 할 수 없이 맨발로 눈 위를 걸어 작업장까지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료가 슬퍼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신나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빵 조각을 꺼내서 그것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 이런 장면을 떠올리게 되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연민이 든다. 그저 지난날의 얘기에 대해 연민을 느낄 정도인데 이를 체험한 이의 가슴은, 심장은...

p71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완전히 메마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다카우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될 때에도 나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 감정 역시 보다 많은 욕구를 가질 때에 느끼는 것 아닐까. 의미를 느끼고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p72~73 수용소에는 대체로 ‘문화적 동면’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치와 종교였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대개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런 소문들이 어디선가 시작되어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전쟁 상황에 관한 소문은 대개 모순된 것들이었다. 이런 소문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면서 결국 수감자들의 마음을 신경과민 상태로 만들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이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보다 더 분통터지는 사람들은 도저히 못 말리는  낙관주의자들이었다.

→ 하나의 소식들에 일희일비 했을 그 시대. 그러나 정치에 관해서라면 지금도 다르지 않다. 불행히도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하게 된다. 무감각해지는 때도 있으나...대체로 기대없는 실망들.

p75~76 수용소에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은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강한 정신력에 대한 찬사...

p77~78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 수용소에서 힘들게 지내면서 결혼한지 1년도 안된 아내를 떠올리며 이러한 생각을 떠올린다. 천사는 무한한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절실히 공감하면서 그는 이 날의 경험으로부터 수용소에서의 삶의 의미를 채워 나간다.

p80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의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내면세계에 몰입되면 당연한 듯 과거 속으로의 여행으로 회귀한다. 인간의 정신영역은 신비하고 오묘하다...

p81~82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때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호송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로 석양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산 정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것이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다.

→ 그것이 삶에 대한 의지 아닐까.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작은 창살 사이로 보이는 햇살에 반응하는 얼굴. 생에 대한 의지, 자유에 대한 갈망.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본능. 생에 대한 욕구.

p85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p86~87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저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으랴 생각하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상황을 이끌어간 귀도! 마침내 모두 살아 남는구나 싶었는데. 아들 조슈아의 늘 즐거운 표정들. 귀도의 유머가 살아 남아 나머지 인생을 살아갈 아들 조슈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런지 감사하면서 영화를 봤다. 그 순간에도, 그 상황에서는 결국 저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

p88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고통의 크기는 상대적이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태도는 다르다. 다만, 그것이 상대적이든 아니든...고통은 한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는 것이라는 것.

p92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p93 수용소에서도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었다. 잘 알다시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 이런 시간들조차 없었다면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까 한다. 공동생활이란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떠난 곳에서조차 때론 적응하기 버거운데, 의도치 않고 죽음을 맞닥뜨린 상황에서의 공동체 생활이란 오죽하랴. 그 속에서의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한다.

p106~107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 삶이란 것이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결정론적이라면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가 감소되는 것인가.

p107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 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 결정이란 어떤 상황에서든 두려운 것이다. 하다 못해 음식점에서 어떤 음식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것도 말이다. 오죽하면 이런 결정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을 위해 ‘짬짜면’이라는 메뉴와 그릇까지 개발되었으니 ‘결정’에 대한 인간의 압박의 수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때론 그것이 나의 결정이 아니라 모든 상황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즉 내가 선택이나 결정을 내리는데 있어 나의 의지가 아니라 이미 그렇게 결정을 짓도록 이끄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라는...

p115~116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 아무래도 자의식이 강한 사람,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우받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누군가로부터 하찮게 취급받는 일에 엄청난 충격을 느낄 것이다. 스스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 그것이 패배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지금 현재의 모습을 수용할 수 없는 것,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아니며, 아닐 것이라는 생각.

p119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단 말인가?

→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분명 사람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의식을 결정하고, 무언가에 대한 인식조차도 살아온 삶에서 획득되고 확장되어 간다고 본다.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경험해 보지 못하고 접해보지 못한 것을 결정짓는다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p120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자유가 분명 있다. 그 자유를 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으로 보인다.

p120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 아주 당당히 일제시대였다면 당연히 나는 독립투사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독립군을 도우는 생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신시대에서는 당연히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열렬히 싸웠을 것이라고, 나는 그러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점점 흐르면서 이러한 자신감은 “그렇게 되고 말 거야”라는 의지의 표현일 뿐, 실제 그런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넌 정말 그럴 수 있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장담할 수 없다가 진실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좀더 현실에 타협적이 되어가는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무심해 지는 것도 같다. 요즘의 이런 나이고 보면 어떤 상황이 주어졌을 때 나의 행동이 어떻게 나올 런지는....그러나 분명한 건, 나는 의지를 가지고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것이다.

p121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 그 얼마나 고통을 느끼며 힘들어 했는데, 그것이 아주 의미없고 가치없는 일이었다라고 한다면....

p122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그렇기에 삶의 의미를 찾고 목적을 찾아가는 것, 방황이 되더라도 끊임없이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이다. 늦었더라도 열심히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지금 이것 또한 그 노력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p122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 확실히 창조에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또한 고통도 따른다. 창조와 고통없이 인간의 글쓰기는 완성될 수 없다.

p122~123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 대화를 하다 보면 기독교인들에게 늘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네 십자가를 내려 놓아라”“네 어깨의 짐은 다 내게로 주고 너는 나만 믿으라”고 했다고. 그랬더니 삶이 편하다라고 했던가. 아무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그 운명론적 삶을 은근히 매료되면서도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그러한 삶에 대해서는 또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었을까.

p126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의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내적 소유’를 이룰 수 있으며 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

→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요!

p127~128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이나 완성을 의미하고,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이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이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 내 삶이 일시적이지 않기를, 내 행동이 일시적이지 않기를 나는 늘 바라고 바란다.

p129~130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 내가 괴롭거나 슬프거나 무기력해질 때는 언제나 미래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다. 과거는 늘 나를 더 성장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듯했고 그래서 어쩜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내 무의식 속에 자리한 과거의 기억들을 떨쳐 내야 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했었다. 어쩌면 이 말처럼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하는 퇴행의 작용이었던가도 싶다. 과거는 늘 안전하다. 분명 그것을 떠올릴 때 힘들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살아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안전하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미래는…늘 알 수 없기에, 안전하지도 않다. 고통받는데 두려움을 느끼기에 퇴행적으로 과거에 집착한 것일까. 미래를 볼 수 없었기에?

p133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수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 이러한 경험은 개인사를 쓰면서 겪었다. 개인사를 쓰는 동안에는 그것이 현재 일어나는 일인 양 분리가 되지 않고 감정으로 남아 계속 괴롭혔다. 그러나 개인사를 모두 작성하고 그것이 묻혀져 있던 시간이 지나, 다시 그것을 보았을 때, 그때의 내 시선은 감정과 분리되어 있었다. 종이 위에 쓰여진 그 글자는 조금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읽혀지며, 일견 무덤덤해지기까지도 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사람들은 글쓰기에 매료되는 것이 아닐까.

p133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과거가 내 미래를 발목잡고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미래가 과거를 놓고 있질 못하였구나... 미래가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미래가 독립적일 수 있음에 보다 믿음을 주지 못하고 보다 노력이 덜하였구나...

p135~136 인간의 정신상태-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 균에 대항하던 그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되었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꿈 속의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 결국 그렇게 무기력하게, 미래가 없이 생활하게 되면 육체적으로도 쇠락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 정신력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경험하였던 것은 아주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 나약한 정신력과 그와 더불어 한없이 약해진 면역력. 그렇게 되풀이 되는 신체와 정신력의 끊임없는 쇠락...

p137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로고테라피 이론의 핵심이 바로 이 말이다.

p137 슬프도다!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상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 그런 감정의 나락을 겪는 이의 아픔을 이해해 주소서.

p138~139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에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작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니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각각 그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아마도 그것은 보다 의지가 강한 이들이 바라보는 삶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삶은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그저 모호하고 애매하다.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아닐런지.

p145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니체

→ 시련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복된 시련, 자주 닥치는 시련이란....무조건적으로 강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없다. 거기에 어떤 의지와 의미가 부여되지 않고서는.

p154~155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 離人症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 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되고, 집으로 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 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지금 실현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 한껏 움켜쥘 수 있는 무언가를 들고서 웃다가 그것이 사라져 버렸을 때 느끼는 그 기분. 일장춘몽! 덧없는 환상에서 빠져 나오기가 얼마나 행복하면서도 두려운지.

p157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 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 심리학자들은 감정을 억누르는 이들의 한번의 감정 폭발을 더 위험하게 받아들인다. 폭력이나 억압 속에 반항하거나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출한 아동보다 참고 속으로 견뎌낸 아이들이 오히려 그 개인에게 정신적인 위험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폭력이 내재화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p167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로고테라피는 이렇게 의미에 중점을 둔 정신치료법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vicious-circle formation과 송환기재feedback mechanism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과거의 경험에 초점을 맞춘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지 표현아닐까, 이미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p167~168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빈 제3정신의학파’로 불리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보고 있다. 내가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불리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 그는 이 이론을 지독한 경험 속에서 세웠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아가며 또한 그렇지 못한 이들의 삶을 바라보며 이를 찾아갔기에 느껴지는 의미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역시, 프로이트의 어린 시절의 경험 속에서 각인된 것이 발현되었다고 한다. 그 또한 경험의 부산물이다.

   권력의지(will to power , 權力意志 , Machtstreben)는 아들러 A. Adler에 의해 기초가 정립된 개념이다. 또한 이것은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이다. 인간의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원천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말하고 있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개인이 우월성과 지배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결국은 유능성을 추구하는 노력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프랭클 역시 니체의 말들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한 작가에게서 영감을 얻은 두 학자가 서로 다른 의미로의 이론을 정립하고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p170~171 실존성 좌절 역시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그동안 이것을 심인성 노이로제psychogenic neurosis라고 했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누제닉 노이로제noogenic neurosis라고 부른다. 누제닉 노이로제는 병의 원인을 심리적인 것에 두지 않고 인간 실존의 정신론적 차원에 두고 있다. 이것이 인간 고유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다른 로고테라피 용어라고 할 수 있다.

→ 누제닉 노이로제를 좀더 설명하자면 그리스어로 ‘누스(noos)’는 마음이라는 뜻이며 누제닉 노이로제는 결국 불행의 원인이 마음에 있다는 의미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될 때,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타인으로부터 휘둘리게 된다. 이는 곧 자기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된다. 최근에서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염전노예’들을 생각해도 그렇다. 그들이 조금 더 삶에 대한 의지를 붙들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섬에 갇혀, 착취당하면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침내 생에 대한 의지를 가진 이의 적극적인 구원의 편지를 통해 이들의 삶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을 때, 이들 역시 수용소에서 나오게 된 이들처럼 타인에 대한 분노와 무력, 좌절감에 얼마나 헤메이게 될런지...

p173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그런 것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심하거나 간에 이런 현상이 병 때문에 생긴다거나 혹은 이것 때문에 결국은 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질환은 아니다. 후자의 견지에서 전자를 해석하다 보면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움큼의 신경안정제로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 실존적 좌절이란 자기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프랭클은 병으로 보지 않는다. 기존의 정신의학에 의하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병’이다. 이러한 접근에 의하면 모두 약물을 투여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은 이것은 약물을 투여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무가치에 대한 회의나 절망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의미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다시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이끌어 자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하고 인생의 목표와 책임을 가지게 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내부의 심리적 갈등에서 생기는 일반적 신경증과 구분되어야 하며 그렇기에 앞서 얘기한 noogenic neurosis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무의미, 무익함, 무목적, 공허함을 특징으로 하는 이러한 신경증을 가진 사람은 삶의 충만감과 설레임 대신에 프랭클이 현대에 만연되어 있다고 믿는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 속에서 살아간다. 실존적 공허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는 인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궁극적 의미의 전체적인 결여나 상실의 경험이다.

p176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그리고 다른 극에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 실존적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과정이라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그렇기에 우리는 삶에 있어서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p181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p182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로로테라피 행동강령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째, 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 갑자기 떠오르는 구절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알프레드 디 수자,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이와 더불어 내 생각과도 같은 글귀들...이것 역시 알프레드 디 수자의 글, ‘삶’이다.

  오랫동안 나는 진정한 삶이 곧 시작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언제나 온갖 장애물들과

  먼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과 바쳐야 할 시간들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그런 다음에야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마침내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런 장애물들이 바로 내 삶이었다는 것을. 

p183~184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 매슬로우의 욕구의 가장 최종 종착지가 바로 자아실현이다. 자아실현은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고 난 이후에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예외적인 현상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매슬로우에 따르면 본능적인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이들에게 자아존중이나, 자아실현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프랭클은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결과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자아실현은 자아를 초월해서 이뤄지기보다는 ‘자아’를 의식하고 마주해야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때 도덕적인 삶이란 진정 ‘자아가 강한 자’인가, ‘초자아가 강한 자인’가란 얘기를 한 기억이 난다. 분명 이론적으로 그것은 초자아가 강한 것인데, 몇 명은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자아가 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었다는 점....일종의 생존의 욕구가 강한 것으로 파악을 했던 탓이다. 현실적인 적응 능력이 강하다는 뜻에서.

p188 "오늘날 정신건강 철학은 인간은 반드시 행복해야 하며, 불행은 부적응의 징후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가치체계가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면서 피할 수 없는 불행의 짐이 더욱 가중되는 상황을 만들어온 것이다.“

    -조지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이디쓰 오이스코프 조웰슨의 로고테라피에 관한 논문

→ 마치 우울증을 정신질환으로 몰아가 문제가 있는 듯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 때문에 치료를 더디게 하는 것처럼.

p197 인간의 삶에서 의미를 빼앗아가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간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 의미를 앗아가는 것의 가장 대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이 아닐까. 생각해보니 모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 하나의 행동들이 의미붙이기의 과정이었다. 그럼으로써 무언가를 이해하고, 실행하고, 혹은 꺼려하고....그렇게 생각해보니 모든 작은 일들에서부터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단 생각이 든다. 마치 내 삶이 의미없어 보이던 그 때조차도,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붙이며 그런 생각들을 지속했던 것 같으니 말이다.

p202 로고테라피에서 활용되는 ‘역설의도paradoxical intention'라는 기법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다. 즉 마음 속의 두려움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일을 생기게 하고, 지나친 주의집중이 오히려 원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 역설적 의도는 일종의 행동주의적인 치료법으로 보인다. 행동주의 치료에서도 강박증이나 특정 행동에 대한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행한다. 조건반사의 개념과도 유사해 보이고, 인지행동치료의 방법과도 유사해 보인다. 인지행동치료의 경우 문제가 되는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변화시킴으로써 행동 변화를 유도한다. 역설적 의도는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직접 맞닥뜨리고 있다.

p203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이 역설의도라고 하는 로고테라피의 치료기법이 적용될 때마다 발휘된다. 로고테라피에서 역설의도기법이 먹혀 들어가는 것은 인간에게 이런 거리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고든 W.알포트가 쓴 <개인과 종교The Individual and Religion>라는 책에 나온 말과도 일치한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 거리두기. 어쩜 낯설게 하기. 가끔 내 자아가 분리되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연적으로 일어나 나를 놀라게 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물끄러미 바로보고 관찰하고 있는 또다른 나. 그로 인해 나는 상황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행동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p208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기불안은 역설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의도와 과잉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하지만 그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이것은 다음과 같은 알포트의 말에서도 입증이 된다. “욕구의 초점이 갈등으로부터 사심없는 목표로 옮겨지면 노이로제 증상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전체적인 삶이 보다 건강해질 수 있다.”).

p209 어떤 시대든 그 시대 나름의 집단적인 신경증이 있었고, 어느 시대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치료법이 있었다. 현대의 집단적 신경증이라고 할 수 있는 실존적 공허는 허무주의가 개별적이고도 개인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허무주의는 존재가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그렇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지배하는 관념이 있다. 전쟁을 전후로 해서 보다 확산된 실존적 허무, 실존적 위기의 시대에 어쩌면 의미를 부여하는 이론은 정말 적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p210~211 정신분석은 모든 문제를 성욕의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나는 이 비판이 타당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정신분석에는 이보다 훨씬 잘못되고 위험천만한 가정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범결정론이다. 범결정론은 어떤 조건이든지 그 조건에 대해 자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인간관을 의미한다.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러니 프로이트 이론이 심리성적(psychosexual) 이론이겠지만 말이다. 어릴 적의 각 단계에서의 리비도가 어떤 충족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일생의 성격이 좌우된다는 것, 범결정론 역시도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찔한 것이다.

p211 인간은 조건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 판단을 유보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란 것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느냐도 관건이겠고 말이다. 앞서도 얘기했든 결정과 판단은 살아온 모든 생의 경험과 환경적인 상황에서 체득된 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p215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물론. 하지만 내 의지를 관철하는데 있어 그가 살아온 인생, 환경, 그의 생각들을 무시못한다. 나는 인간의 어떤 부분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의지의 중요성도 생각하지만 그 의지를 가지게 될 때까지 그가 경험한 것이 토대가 된다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


p219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1)고통과 2)죄와 그리고 3)죽음을 말한다.

→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를 말한다.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통해서 그 감정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비극이란 분명 낙관적인 요소를 발현시켜주는 요소일 수 있다. 비극이란 그 자체는 비극이지만, 비극을 통해 마주하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은 그저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p220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 이 말은 독일어로 쓰인 내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이란 라틴어로 ‘옵티넘optimum'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optimism'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이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1)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2)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3)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예’라고 말하기...프랭클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이 말을 하는지는 안다. 그러나, 단순 이 말만을 보고서 말한다. 안돼, 절대로!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yes라고 말하는 것은 무조건 no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비관과 무조건적인 낙관에서,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것이 일상 생활에서라면 말이다. 수용소의 삶과 같은 극단적인 경험 속에서가 아니라.

p223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원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의미는 없지만 수단은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 수단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도 있다.

→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상황에서라면 어쩌면 삶의 무의미성을 느끼면서도 그대로 살아가지는 것 같다. 다만 강제 수용소에서의 삶이나 전쟁을 겪는 상황에서라면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 의지를 찾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의미를 찾지 못하였지만 그런대로 살아나갔던 때가 있었다.

p223~224 한 개인이 처한 사회경제적 상황이 원인이 되는 실업 신경질환과 함께 정신의학이나 생화학적 조건이 되는 또 다른 유형의 우울증이 있다. 따라서 정신치료와 약물치료는 각각 별도로 실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삶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는 경우에는 그것 자체가 병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점,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어떤 신경질환의 표시나 징후라는 점을 간과하거나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병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병적인 증상을 불러 일으킬 수는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잠재적으로 병을 일으킬 수 있는 요인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집단적 신경 증후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증후군이 보여 주는 세 가지 단면, 즉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이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실존적 공허감, 즉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은 무수하게 많이 있다.

→ 현대사회에서 갈수록 저러한 특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울증, 공격성, 약물중독 말이다. 우리들 모두는 여전히 실존적 공허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하나 하나 개인이 아니라 집단 전체로?!

p226~227 집단 신경 증후군의 두 번째 요소인 공격성과 관련해서는 캐롤린 우드 셰리프가 주관했던 한 실험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한다. 그녀는 인위적인 방법을 써서 보이스카우트 그룹들이 서로 공격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런 다음 관찰해 보니 소년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공격성이 누그러진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공동의 목표란 자기들이 먹을 음식이 실려 있는 차를 진흙구덩이에서 꺼내는 일 같은 것을 말한다. 공동의 목표가 생기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도전을 받았고, 그래서 협동하게 되었다.

→ 우울증이 목표없는 삶에 대한 이유로 나타남을 보여 준다. 그러나, 달성해야 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협동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경쟁으로 인한 폭력과 공격성 또한 나타날 수 있지 않는가.

p228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 내 삶의 마지막에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 자신에 대해 만족할까. 마지막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가버리게 될까. 어느 순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삶, 늘 삶의 의미를 마주하며 찾는 노력들을 갖게 되기를.

p230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미는 일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 프랑클은 수용소에서 결혼한 지 1년도 안되어 헤어진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사랑하며 삶의 의미를 찾았다.

p231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희생양도 그 자신을 뛰어넘고, 그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인간은 개인적인 비극을 승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앞 장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에디트 바이스코프 요엘슨은 로고테라피에 대한 희망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로고테라피가 오늘날 미국 문화가 지니고 있는 건전하지 못한 성향을 근절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 미국에는 자신의 시련을 자랑스러워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만들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치유 불가능한 환자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불행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 오늘날에도....이렇듯 사회적으로 불건전한 이 상황을 근절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를...

p233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아, 자학이구나. 내가 왜 이런 시련 속에서 살고 있나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대단한 일인 양 참고 견디며 이른바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며 지낸 일이 많다. 시간이 흘러, 물론 견디어 낸 이유는 있었으나, 프랭클의 말처럼 그것은 자학이었다. 왜, 조금 더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을까.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학이라는 것을. 자학이 일종의 스스로에게 내리는 벌이라면,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도 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련이란, 그저 시련일 뿐이다. 불필요한 시련이란 겪어 봄 직한 일이 아니라 영혼을 좀먹는 것이다.

p233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오스트리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한 인터뷰 장면이 생각난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심장병 전문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 게토 폭동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정말 영웅적인 행동이셨습니다.” 기자가 외치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들어보세요. 총을 들고 쏘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에 나치대원이 당신을 가스실로 끌고 간다면, 혹은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서 그 자리에서 처형하려고 한다면 대항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면서 자기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밖에는요. 보세요. 제가 영웅적인 행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어떤 태도를 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웅주의다.).

→ 무엇을 시련이라고 보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태도에 달려 있다. 시련이라고 할만한 충분한 객관적인 상황이 존재함에 누가 보아도 ‘시련’이 있을 것이고, 지극히 주관적으로 ‘시련’으로 보이는 상황이 있을 것이다. 마치 징크스처럼.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 태도에 달린 것이다.

p236~237 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세 번째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p238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적어도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의미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절대적인 가치와 보조를 같이 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 인간이란 그의 유용성에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 본질로서 대우받아 마땅하다.

p242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 스피노자 <윤리학>의 마지막 문장

→ 위대한 것을 발견하는 것은 힘들고 더더욱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은 힘들기에 말만 일삼는 이들보다 언행일치의 삶을 보여주는 이들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내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만큼, 무언가를 실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어려움인지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스피노자는 한 그루 사과나무로 각인되어 있던 참에 다른 글귀를 보니 새삼 반가웁다. 다시 보니,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는 늘 그렇게 행하는데 있어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3. ‘내가 저자라면’


■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이 책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며 삶의 의미를 추구한 프랑클 박사의 체험 수기다. 이 시대의 체험수기가 수용소에서 느낀 감정이나 생활들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과 그에 대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프랑클 박사는 그가 창시한 정신분석방법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전개하고 있다.

 이 책의 한국 번역본의 제목이 수용소라는 곳에서의 경험을 부각시킨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그러나 저자가 지은 제목은 그의 로고테라피 이론과 연결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이다. 물론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어 여러 판이 나오면서 <인간의 의미 탐구>로 번역된 책도 있으나 모두 그의 이론을 부각시킨 ‘의미’를 제목으로 하고 있다.

 독립적이었을 각 장들은 서문을 쓴 고든 알포트에 의해 첨가되었다. 제1부는 프랑클의 대표적인 저서로 그의 수용소 체험을 토대로 한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2부는 그가 창시한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를 설명하는 내용, 3부는 비극 속에서의 낙관으로 로고테라피 세계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프랑클은 1부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그가 겪은 시간의 순서로 엮으면서 그 때의 체험들을 그가 주창하는 로고테라피의 이론을 정립하는 형태로 이끌며 기술하고 있다. 2부의 로고테라피 개념은 그 제목이 개념이듯이 그의 이론에서 제기하는 개념들을 설명해 나가고 있다.  각각 내용을 이어가는데 간략한 표제어를 두고 있다. 이 표제어만으로도 전체적인 내용이 이어질 정도로 매우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만큼 내용의 명확성을 더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1984년 판에 부친 서문

    옮긴이 서문

    추천의 글

 

제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집행유예 망상

     삶과 죽음의 갈림길

     무너진 환상 그리고 충격

     냉담한 궁금증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말라

     혐오감

     무감각

     주검과 수프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한 카포에게서 받았던 작은 혜택들

     수감자들이 가장 흔하게 꾸는 꿈

     먹는 것에 대한 원초적 욕구

     메마른 정서

     수용소 안에서의 정치와 종교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주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강제수용소 안에서의 예술

     강제수용소에서의 유머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상대적 행복을 느꼈던 환자 생활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나 혼자만의 공간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운명의 장난

     테헤란에서의 죽음

     운명을 가르는 결정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

     엇갈린 운명

     무감각의 원인

     인간의 정신적 자유

     시련의 의미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

     미래에 대한 기대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지를 불러 일으킨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살아야 할 이유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자살 방지를 위한 노력

     집단 정신치료의 경험

     수용소의 여러 가지 인간군상

     해방의 체험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비통과 환멸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실존적 좌절

     정신인성 신경질환

     정신의 역동성

     실존적 공허

     삶의 의미

     존재의 본질

     사랑의 의미

     시련의 의미

     임상에 따른 문제들

     로고드라마

     초의미

     삶의 일회성

     기법으로서의 로고테라피

     집단적 신경증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정신의학도의 신조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의학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

비극 속에서의 낙관

 

 

 ■ 감동적이었던 장절

  

 반복되어 읽어가면서 ‘삶의 의미’라는 단어는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고 화두이니 말이다. 그러나 내가 감동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의 생각인지 그의 경험인지가 대두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의 체험의 사례들에서 이어가는 그의 사고는 분명 감동적이고 존경스럽다. 끊임없이 삶에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의지를 찾으려는 일관된 그의 삶의 태도는 존경스럽다. 그리하여 운명에 대한 얘기, 수용소에서 타인의 삶들을 관찰하며 조심스럽게 그들에게서 자신의 이론들을 찾아내는 서술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사례와 이론을 적용함에 적절히 자리한 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말들도 그의 글들을 이해하고 감동을 더하는데 크게 자리한다. 또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은 ‘테헤란의 죽음’이란 부분이다. 이것이 그의 삶에서도 분명 적용되는 기분이다. 이러한 운명론적인 얘기를 보며 수용소에서 맞닥뜨린 그 많은 그의 운명들과 비교해 보며 다시 한번 인간의 운명과 의미에 대해 숙연하게 고뇌하게끔 한다.


■ 보완점


 그는 왜 이 책을 썼을까? 그가 경험한 수용소에서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니면 로고테라피 이론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신분석의 내용을 전개한다는 특징 외에 이 책은 작은 의미의 단락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니까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의 체계적인 분류로 내용을 전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의 연결이 지극히 부자연스럽거나 하지는 않다. 오히려 작은 표제어 속에서 그 내용과 의미를 명확히 한다는 장점을 가진다. 반면 이것이 단점으로도 작용한다. 큰 체계를 두고 관련 내용들을 하위의 항목으로 두고 내용들을 정리하는 전개방식이 아니므로 전체적인 틀로서의 체계나 의미를 찾아내는 데는 조금 더딜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무를 보느라 숲이 무엇인지를 찾는데 약간은 방해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그의 저술 방식으로 인한 특성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세 명의 여성 속기사들에게 그의 구술을 받아쓰게 하여 원고를 작성했다. 자료 없이 오직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을 9일 동안의 구술로 정리한 것이다. 그의 체험으로 인해 생생한 묘사와 그의 생각들을 전하고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글로써 다듬어진 글의 느낌보다는 말로써 다음은 느낌이 강하다. 물론 그가 겪은 경험의 고통을 이토록 차분히 비교적 절제된 톤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랍긴 하지만 그의 수용소의 이야기, 경험들이 이론적인 연결로 인해 부족한 듯이 보인다. 나는 저자의 수용소의 체험 속에서 느끼는 생각의 전개가 더 보고 싶으니 말이다.

 일단 로고테라피에 대한 설명이 서문을 쓴 고든에 의해 요구된 것이라고 하니 이는 처음부터 같이 연결되어 묶을 의도가 있던 내용들은 아니었다. 2부가 첨부되고 이어서 3부가 첨부되어 이들 각각의 독립적인 내용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졌을 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각각 1부와 2부가 서로 간의 신빙성을 보완하고 있다고 기술했고 1부는 자전적인 이야기이며 2부는 경험에서의 교훈을 요약한 것이라 서술하고 있다.

 제2부의 로고테라피의 개념의 표제어와 그의 체험의 표제어들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제 그 내용에서도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반복된 내용이 연이어 3장이 중복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저자의 수용소의 체험에 방점을 두었다면 수용소의 경험들이 조금 더 드러나는 것이 좋았을 듯하다. 그리고 로고테라피에 대한 개념과 이해에 방점이 있다면 그 개념에 대한 명쾌하고 체계적인 분류와 서술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저자는 로고테라피 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정리하여 3부로 첨가시켰는데 이론적인 결론을 갱신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라 하고 있다. 그것이 발표된 자료로서는 그 의미를 더하였겠으나 1부와 2부에 연이어 첨부되어서는 오히려 2부의 내용들을 더욱 깔끔하게 체계화하여 정리하는 것이 이론적인 명확성과 완결성을 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IP *.177.8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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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13:33:15 *.94.164.18

잘 읽었습니다.

때로는 같은 느낌으로, 때로는 다른 느낌으로의 표현이 신선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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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7 14:39:33 *.94.41.89

저자에 대한 정리를 너무 잘해주셔서 한 수 배우고 갑니다. 덕분에 제가 모르던 사실들도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YES! YES! YES!' 라는 말이 마음을 울리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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