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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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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1일 10시 3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1 페이지 이상)

1) 저자에 대한 기록

출처: 네가 바로 그것이다 (조셉 캠벨 지음, 해바라기, 2004)/ 신화와 함께하는 삶(조셉 캠벨 지음, 한숲, 2004)

  *조셉 캠벨에 대하여

조셉 캠벨은 비교신화학 분야의 연구로 가장 잘 알려진 미국의 저자이며, 교사이다. 그는 1994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신화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미국 인디언 문화에 대한 책들을 즐겨 읽었고, 뉴욕에 있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찾아갔으며, 그곳에 수집된 토템 기둥들에 매료되었다. 캠벨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중세 문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와 뮌헨의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외국에서 그는 파블로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의 그림, 제임스 조이스와 토마스 만의 소설,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 연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만남들이 모든 신화들과 서사시들을 인간의 영혼 안에서 연결하는 캠벨의 이론으로 이끌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신화들과 서사시들은 사회적, 우주론적, 영적 실재들을 설명할 보편적 필요성을 나타내는 문화적 표현들이다.

그는 존 스타인벡과 생활학자 엣 리켓스를 만났던 캘리포니아 시기를 거쳐, 켄터베리 대학에서 가르쳤고, 그 후 1934년 사라 로렌스 대학 문학과에서 여러 해 동안 자리를 얻고 가르쳤다. 1940년대와 50년대에 그는 스와미 니킬라난다가 우파니샤드스리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또한 인도 예술과 신화, 철학 연구가인 독일학자 하인리히 치머의 연구들을 편집했다. 1944년 헨리 모톤 로빈손과 함께 <피네간의 경야를 여는 맞쇠>를 간행했다. 그의 첫 번째 저술,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년에 나왔고, 곧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책은 고전으로 환영받았다. ‘영웅 신화연구를 통해 캠벨은 영웅 여행의 단일한 양식이 존재하며, 모든 문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영웅 신화들은 이 본질적인 양식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다. 영웅 신화에 대한 그의 책에서 캠벨은 원형적인 영웅 여행의 기본 조건들, 단계들, 그리고 결과들을 요약해 보여주었다.

조셉 캠벨은 1987년 사망했는데, 이후 1988년 방영된 빌 모이어스와의 텔레비전 인터뷰 신화의 힘으로 캠벨의 독자는 수백만으로 늘어났다.

  * 조셉 캠벨 재단(JCF) - www. jcf.org

신화학과 비교종교 분야를 탐구함으로써 조셉 캠벨의 연구를 계속하는 비영리 단체이다. 이 재단은 세가지 주요 목적들에 의해 운영된다.

첫째, 이 재단은 캠벨의 선구자적 연구를 보존하고 보호하며, 영구적으로 지속시킨다. 이 일을 위해 그의 작품들을 목록화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하며, 그의 작품들에 기초한 새로운 출판물들을 개발하고, 그의 간행된 저작들의 판매와 보급에 힘쓰며, 그의 저작들의 저작권을 보호하고, 이 재단의 웹사이트에서 디지털 형태로 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의 저작을 널리 알린다.

둘째, 이 재단은 신화학과 비교종교 연구를 촉진시킨다. 이 목적을 위해 다양한 신화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지원하며, 일반 대중의 각성을 증대시키는 행사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며, 캠벨의 문서화된 작품들을(주로 조셉 캠벨과 마리자 김부타스 문서보관소와 도서관에) 기증하고, 재단의 웹사이트를 문화들 사이의 관련된 대화의 광장으로 이용한다.

셋째, 이 재단은 개인들이 일련의 프로그램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프로그램들로는 우리의 지구적 인터넷에 기초한 관련 프로그램, 지역적, 국제적 신화학 원탁회의 연결망, 그리고 조셉 캠벨과 관련된 정기적인 행사들과 활동들이 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Campbell

  *Great Depression

1929년 그는 유럽에서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콜롬비아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어와 중세문학에 대한 연구 계획을 거절당하자, 학위과정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후 5년 동안 캠벨은 하루 중 16시간의 시간을 4시간씩 네 단위로 구분하여 세 단위를 독서와 연구에, 한 단위를 휴식에 활용하는 생활을 철저하게 유지하며 고된 연구를 진행했다.

  출처: http://www.youtube.com/watch?v=EKtZrJOyW9k

  * The Job (KUED-TV): David Kudler on Joseph Campbell and Following Your Bliss

- 조셉 캠벨 전집 실무 편집자 데이비드 커들러 인터뷰 영상

 
2) 개인적 평가

조셉 캠벨과 신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 지적 race를 통하여 처음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에 알고 있던 분같이 따뜻하고 진실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심리학과 종교, 현상학이라는 부분이 어떻게 신화와 연결될 수 있는지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감탄과 신비로움이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방대한 양의 신화와 관련한 조사들을 통해서 이런 통찰들을 얻어 낼 수 있다니......

다만 책을 읽으면서 든 나의 느낌(주관적)은 조셉 캠벨의 이야기들이 실제적이고 생생하기보다는 이야기와 이론에 기반한 다소 밋밋하고 관찰자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실제하지 않는 신화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매진한 분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 부분이 조금은 아쉬운 것 같다. 너무나 따뜻하고 진솔하며 유연한 마음으로 수용적일 수 있는 분이지만 그것이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딪히면서 생긴 경험에 의한 성장이기보다는 책과 방대한 자료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익히고 내면화한 것이라는 느낌. 새삼 이 것이 왜 나 자신에게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지에 대해서 의문이 올라온다. 사람들과 부딪히는 경험에 의한 것이 자료나 이론, 순수한 내면적 성찰을 통해서 이루어 낸 것보다 더 신뢰롭다는 가치판단의 기준(편견일 수 있는)이 나에게 있는 것 같다. 뭔가 생생한 경험을 통한 이야기를 나는 더욱 신뢰하고 바라는 것 같다. 진 시노다 볼린의 우리속에 있는 여신들을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성들의 경험적 글쓰기가 여성인 나에게는 더 편안한 걸까? 문든 조셉 캠벨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나갔을지 궁금해진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신화와 현대 세계

p54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파우스트의 특징은, 기계가 정해준 과녁이 아닌 자신이 정한 과녁을 찾아내는 데 있지요.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크는 결국 자기 아버지의 가면을 벗기고야 말지요? 그는 자기 아버지의 가면과 함께 아버지가 맡았던 기계의 역할을 벗겨버립니다. 그의 아버지의 가면은 제복에 지나지 않았찌요. 그건 힘입니다. 국가가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요.

 

p74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신화의 측면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야 합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이미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초월의 신비로부터 끊임없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p83 우리는 3만 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의 몸과 그 기관이 똑같고 에너지도 똑같은 몸을 지니고 있어요. 이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동굴에서 인간의 삶을 살건 우리는 똑같은 삶의 단계를 거칩니다. 즉 아기 시절을 거치고 성적으로 성숙한 청년이 되고, 어린 시절의 의존적인 시기에서 독립적인 한 남성 또는 여성으로 변모하는 시기를 거치고, 결혼하고, 그러다 몸이 기울고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고는 죽는 단계를 거친다는 겁니다. 가령 독수리와 뱀이 싸우는, 우리 주위에 아주 흔한 이미지를 하나 예로 들어봅시다. 뱀이라고 하는 것은 땅에 붙박여 사는 동물입니다. 독수리는 영적인 비상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이 두 동물의 싸움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체험하는 갈등과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지요, 이 양자가 하나가 되면 놀랍게도 용의 이미지가 됩니다. 용이라면 날개 달린 큰 뱀이 아니던가요? 이 세계에 이 이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폴리네시아 신화를 읽건, 이로쿼이즈 인디언 신화를 읽건, 이집트 신화를 읽건 그 이미지는 동일해요. 어떤 신화에든 여기에 관련된 똑같은 문제가 등장합니다.

 

P115 종교라는 것은 제2의 자궁 같은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도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우리를 평생 처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 종교를 갖고 있다고 확신에 차서 이야기할 만하게 종교적 의례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대목을 읽으면서 떠오른 젊고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인지 전혀 알지 못해서 많이 안타까웠는데 그렇게 본인을 생각하게 만드는 가장 중심에 하나님과 죄악이라는 관념이 있었다. 온 집안이 기독교에 헌신하고 있고 외삼촌은 목사님이기까지 했지만 이 친구에게 하나님은 자와 저울을 들고 자신의 행동하나하나를 그 잣대로 재고 잘 못한 것에 대해서 벌을 내리는 무섭고 엄한 존재이기만 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느날 갑자기 연락두절이 되어 더욱 내 마음속에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친구이다.

 

p116 “예수가 승천했다는 말을 은유적 코노테이션(내포된 의미)의 문맥에서 읽는다면, 예수가 사실은 내면화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가 들어간 곳은 외계가 아니고 내부의 세계인 겁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비롯되는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의식 속으로, 우리 안에 있는 천국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미지는 외향적입니다만 그 본뜻은 내향적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내면을 향함으로써 그의 승천을 좇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알파요 오메가인 우리의 바탕자리로의 되돌아옴, 육신의 껍질을 버리고 육신 자체의 역동적인 바탕자리로 되돌아옴을 뜻하는 은유인 것입니다.

-> 성경을 전혀 모르기에 이런 해석에 대해서 너무 신선하고 납득이 간다는 느낌이고 오히려 훨씬 더 기독교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접근하게 만드는 것 같다.

 

p117 세익스피어는,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어서, 신화적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그것을 우리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는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노발리스가 말했듯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p119 재림 혹은 환생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암시하는지요? 그것은 우리가, 우리는 이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관념에는 우리의 존재 및 우리의 깨달음과 의식의 잠재력에 다른 차원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것이다, 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지요. 우리의 삶은, 지금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으면서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넓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1의 깊이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합니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한 느낌으로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p120 창조적인 글을 써본 사람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복종하노라면 써야할 것이 스스로 말을 하면서 제 자신을 이루어나간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뮤즈(예술의 여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p132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금생을 사는 인드라일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에 빠질지, 속세에 남아 있을지는 우리가 선택해야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과 아내와 가족을 사랑하면서 사는 일은 모두 다 금생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p133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 죽음에만 고통이 없을 뿐이에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아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테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 선악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서 상대적인 것입니다. 어느 한쪽에 선한 것은 그 반대쪽에는 악한 것이지요. 인생이라는 게 참혹한 것임을 알면 물러서지 않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낼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이 참혹함이 바로 신비, 무섭고도 놀라운 신비의 바탕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다”, 이것은 석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세속성(상실하고, 상실하고, 상실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원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은 삶은 삶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삶을 긍정하고, 이대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의도가 이러한 것이었으니까요.

-> 1차 전형(?)에서 내 인생에 중요한 책으로 꼽았던 스캇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인생이 고통이고 고통이 의미라고 한 석가의 말씀도 같이 나온다. 고통없이 인생을 살고자 했기에 힘들었던 부분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나자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 같다.

 

p135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가장 은밀한 행위에 무리를 지어 참가하지요. 은밀한 행위가 무엇일까요? 삶에 필요한 행위, 즉 다른 생명을 죽여서 먹는 행위지요. 우리는 이런 짓을 무리지어 합니다. 그게 삶인 것이죠. 영웅이 이러한 여느 사람과 다른 점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절망이나 복수로서가 아닌, 자연의 방법으로 용감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삶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

p141 신화와 의례는 마음을 몸에다가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삶을 자연에 조화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 어린 시절에는 이 세상의 질서와 복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시기에는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서 살지요. 그러나 성숙하면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가 책임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면 신경증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이 지나면, 이윽고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가 옵니다.

... 우리가 삶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들어갈 때는 입는 것도 달라지고 이름도 달라집니다. 교수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나는 내가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삶에 대한 나의 사고방식도 바꿨습니다. 말하자면 삶에 관한 관념 자체를 바꾼겁니다. 그러니까 공부하고 활동하는 삶을, 이 신비를 즐기고 감사하고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꾼 것이지요.

-> 나는 이 세상을 내 것처럼 사는 시절에 있을까? 세상을 남에게 양보하는 때에 있을까? 아직은 내 것처럼 살고 싶은 것 같다.

 

p146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입니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냅니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하지요.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지요.

 

p147 부시맨의 삶 및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들소의 관계로 보아 이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는 서로 숭배하는 관계,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 죽임이라는 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닌 의례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먹기 전에 기도를 하여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을 자진해서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 매일 세끼의 밥을 먹는 행동에도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와 의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정말 쇼킹한 통찰이 아닐 수 없었다. 종교를 가진 분들이 밥을 먹기 전에 하는 기도의 의미를 조금 더 큰 의미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p175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 구체라고 하는 정의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 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입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안 에서 우리와 마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 서기입니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 예전의 내가 그랬다. 항상 내가 앉아 있는 의자가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 안에서 나를 마주보고 있는 중심을 바라보았었다. 그래서 불안하고 허탈하고... 이제는 내 중심은 내가 앉아 있는 의자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흔들릴때도 많긴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내 옆의 누군가도 그가 앉아 있는 의자에 중심을 놓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 것을 돕고 싶다.

 

4) 희생과 천복

p202 동아리가 우우 모여 이 불쌍한 한 쌍을 끌어내서는, 바로 그날 밤에 구워먹는답니다. 이 의례는 신을 죽이는 원초적인 행위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신을 죽이면, 바로 이 신, 바로 이 구세주에게서 먹을 것이 나오는 것이지요. 미사의 성찬식에서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구세주의 피요, 살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내면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살과 피는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되어 역사하는 것이지요.삶의 모습 자체는 반드시 삶의 행위를 통해서 까달아야 한다는 거지요.

 

P204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부처……. 이것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그룹이 있는데, 이게 대체 뭡니까? 절에 가보면 두 문지기 중 하나는 입을 벌리고 있고, 하나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이것은 두 대극, 즉 공포와 욕망을 상징합니다. 에덴 동산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이 두 문지기가 우리를 위협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삶을 두려워하면 동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자아라고 하는 것이 더 크고 영원한 전체성의 한 기능임을 깨닫는다면, 작은 것이 아닌 큰 것을 섬긴다면, 이런 문지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무사 통과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공포와 욕망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데서 생긴 공포와 욕망 때문에 낙원에서 쫒겨난 겁니다.

... 다시 낙원으로 들어가려면 우리는 공표와 욕망이라는 이 한 쌍의 대극을 극복해야 합니다.

... 초월해야한다는 뜻이지요. 이것은 모든 깨달음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경험입니다. 육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다시 나야 하는 겁니다.

... 예술의 기능은 창조작업을 통해 이 광원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잘 짜여진 예술 작품을 볼 때마다 우리는, , 하고 감탄하고는 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까닭은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질서를 드러내고, 종교가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때문이겠지요.

-> 삶에 대한 공포와 욕망,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삶의 선이어야 한다는 생각... 몇 번의 깨어짐을 통해서 내 자신이 극복해나가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긴 하지만 어려운 부분인 것 같다. 전보다는 융통성이 생겼다는 점,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아직 진행중이다.

 

P211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 우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이것은 우리가 관계속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최근의 여러 연구들을 뒷받침해주는 메시지인 것 같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결국 원래 하나였던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구나... 마음이 따뜻해져 오는 것 같다.

 

P213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봐야 현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 …… 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를 명상한다는 것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을 명상하는 것입니다.

 

P217 종교집단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들은 이따금씩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미로를 만나고는 하지요. 이 미로는 앞길을 막는 존재인 동시에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화의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삶의 미로를 뚫고 지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P218 중세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은 인류의 마음이 연민의 가슴으로 열린 순간, 열정연민으로 변모한 순간입니다. 성배 전설에 나오는, 상처 입은 성배왕에 대한 사람들의 연민이 바로 이러한 변모를 드러냅니다.

... 즉 인자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이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연민쪽으로 여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로써 이 세상의 물질에 대한 인간의 추잡한 관심을, 고통을 나누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간만이 지닌 가치의 세계 쪽으로 쏠리게 하기 위함이다…….

 

P222 천복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성공을 거두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성공으로 사는 삶이 어떤 삶일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평생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못 해보고 사는 그 따분한 인생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학생들에게 늘, 너희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이런 소리를 합니다. 일단 이런 느낌이 생기면 이 느낌에 머무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을 방해하지 못합니다.

 

P223 중세의 필사본에, 여러 문맥에서 자주 나타나는 이미지가 바로 행운의 바퀴라고 하는 이미지입니다. 이 바퀴에는 굴대도 있고 바퀴살도 있고 테도 있어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바퀴의 테를 잡고 있으면 반드시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가 있어요. 하지만 굴대를 잡고 있으면 늘 같은 자리, 즉 중심에 있을 수 있답니다.

 

P224 자기 천복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든지 낯빛이 달라지든지 하지요. 삶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열립니다.

...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전적으로 관심을 쏟지 않던 일에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방향 전환의 계기를 기다리는 능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요.

 

P227 선생님은 천복을 좇는 그 순간 순간에, 혹시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생각은 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 "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5) 영웅의 모험

P230 이 심리적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에서 기본이 되는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마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이 되는 것을 찾아내고는 더욱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에서 살게 되는 것이지요.

 

P230 오토 랑크는 <영웅의 탄생 신화>라는 작은 책에서, 양수에서 수생동물 상태를 지나고, 공기를 호흡하는 포유동물 상태를 지나 홀로 서기까지는 엄청난 심리적, 육체적 변모 과정을 거치기에,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웅이라고 주장하지요.

-> 슈퍼바이저로 만났던 박숭숙 선생님의 미술치료사가 들려주는 미술의 힘이라는 책에서 만났던 오토 랑크를 다시 신화의 힘이라는 책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연인가? 뭔가 나를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 그 때에는 오토 랑크가 실패한 예술가라 지칭한 신경증적 유형에 나 자신을 대입해 넣으며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넣었던 것 같다. 인용하면 예술가의 쌍둥이 형제인 신경증적 유형은 창의적인 생산을 끊임없이 해낼 자아의 힘이 약하여 내면의 갈등과 혼란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사람들로서 자기만의 좁은 세상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며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 새롭게 창출된 자신의 세계를 언젠가는 깨어날 자기만의 착각이나 환상이 아닌, 근본 문제의 참된 극복이라 생각하고 싶은 창의적 인간들은 끊임없이 그를 세상에 공표하고, 스스로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의와 인정을 받고자 노력한다. 그러고 보면 정신병원에서 자신만을 위해 홀로 예술을 하는 환자들과 세상에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알리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예술가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 우리 미술치료사들이 환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역할과 기능이 잠재해 있다. 혼자만의 세상을 사람들과 나누는 것, 그리하여 앞에서 설명한 진실과 현실을 가능한 한 가깝게 좁혀보는 것 , 그것에 미술의 치유적인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P232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자면 변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변모라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거치는 굉장한 변화이지요.

 

P234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저렇게 생각해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P254 나이가 들고, 우리가 알던 사람,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사라지고, 세계 또한 사라져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때 비로소 마야의 신화가 가슴에 와닿지요.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신화가 필요하지요.

 

P265 다스 베이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거지요.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강요되어 있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간성을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 우리의 이상을 움켜 안고, 루크 스카이워커처럼, 조직이 가해오는 비인간적인 압제에 저항함으로써요.

...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너의 느낌에 따라 너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

 

P270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지요.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를 운영하는 것처럼 사고를 해요. 하지만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일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 의식이 우리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기가 한풀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간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P273 우리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무엇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에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 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는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하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록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는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바로 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 있는데도,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꼼짝 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꼼짝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 자기가 지키고 있는 것이 어디에 소용이 될는지도 모르고 그저 지키기만 하는 거지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사람을 자린고비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서는 나오는 삶이 없어요. 주는 삶이 없어요. 그저 남에게 빌붙어 돌면서도 죽자고 자기 삶의 방식에만 매달립니다.

...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여자는 자기의 용을 죽인 것이지요.

 

P275 저는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신화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실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뿐인 것 같은데요.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재물, 우리는 구해줄 권력, 우리를 구해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그 실이라는 게 찾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실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가르쳐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은 거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일입니다.

...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은 암시입니다.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이 너머에는 암초가 있으니까 키를 똑바로 잡아라, 저 너머에는 해협이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을 만나는 일입니다.

 

P278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직면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받아들일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뿐 아니라 스핑크스의 저주도 풀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우리는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예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새삼 내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 부분이 나의 천복을 찾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걸림돌이 되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아암병동에서 아이들을 만나거나 자살위기의 청소년이나 성인들을 만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고 극복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느껴졌고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바로 그들을 통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꾸 의식위로 떠오르는 것을 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앞으로도 쭉 기억하고 있어야 될 대목인 것 같다.

 

P285 아이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겠지요. 맡겨서 홀로 서기에 충분한 힘이 있게 되었다는 스스로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P286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은 딱 하나뿐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지요.

...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그것을 기억해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떠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겁니다.

 

P291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 말고요.

 

P296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 물론 자비는 고통을 해소시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그래요……. 해소시킵니다.

 

P297 “고통에서 놓여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P299 이것은 우연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여부와 관련되는 문젭니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이걸 탓하거나 이걸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여기에서 생기하는 삶과 대결하는 겁니다. 어디에선가 전쟁이 터지면 젊은이들은 징집을 당하겠지요. 그러면 바로 이 우연지사와 함께 5~6년은 족히 썩어야 하겠지요. 이런 경우에 내가 충고해주고 싶은 것은, 징집당했다고 여기지 말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여기라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의지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운동 경기를 보면서 내가 조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정점에 이르러 있는 운동 선수는 내부에 정점을 하나 지니고 있어요. 그의 움직임은 바로 이 정점에서 생겨납니다.

...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질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6) 조화여신의 은혜

P322 예수는 영적으로 태어난 것이지 육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예요.

...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두 번째 탄생이에요.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P335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 변화하기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지에 대해서 항상 관심이 있었고 그 때 무엇을 통하여 변화에 대한 믿을 구석으로 삼는지도 나의 관심사였다. 그 믿을 구석으로는 상담이나 심리치료, 종교, 가족이나 친구 등의 지지집단 등이 있는데 유독 종교를 택하는 것이 실제로도 빈도가 높은 것 같고 그 효과 측면에서도 드라마틱한 경우를 주위에서 보고는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종교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의문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의례라는 측면이 그에 대한 해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종교에서 제공해주는 1주일에 한 번씩의 의례를 통해서 사람들은 굳이 자신이 마음먹고 어디에 가기를 선택하고 의지를 실어서 행동하지 않아도 그냥 생활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를 꾀할 실마리를 얻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7) 사랑과 결혼이야기

P345 진정한 결혼은, 상대에게서 동일성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P373 인도에는 어머니가 자식을, 특히 아들을 마음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하는 의례가 있어요. 한 집안의 영적인 삶을 조언하는 스승이 어머니에게 와서는,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걸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값진 보석 같은 게 되겠지요. 왜 이런 의례적인 행사가 있는가 하면 어머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떠나보내는 훈련을 기키기 위함이지요. 어머니는, 그 영적인 스승의 말에 따라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주다보면 결국 자기 아들도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8) 영원의 가면

P397 어떤 사고 체계를 지닌 사람에게든 사고 체계 자체가 무한한 삶의 의미일 수는 없어요. 어떤 사고 체계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정리가 된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장난꾸러기 신이 끼여들면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자체가 바뀌면서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P412 적어도 목적이 있는 인생은 완전한 인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 서로 다른 목적인 복잡하게 얽힌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체현하고 있는 어떤 존재에는 잠재력이 있는데,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잠재력을 사는 것이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지요.

... 우리의 안에는, 우리가 중심에 이르렀을 때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우리가 바른 궤도에 들어섰는지, 혹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를 아는 어떤 것이 있어요. 만일에 돈을 벌기 위해 그 궤도를 이탈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잃는 겁니다. 중심에 머물기 위해 돈 버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 사람은 천복을 얻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니다, 여행 그 자체이다…….

 

P413 이게 바로 에덴입니다. 이 세상 도처에 왕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때까지 이 세상을 살던 방식을 버립니다. 이 버리는 순간, 이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은 미래의 어떤 순간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변화가 오는 순간, 세계를 보는 방법이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경험하면 이 세상은 물질의 세상이 아닌, 빛의 세상이 될 겁니다.

  

3. ‘내가 저자라면

 

신화와 현대 세계 - 왜 지금 신화인가?

내면으로의 여행 - 시작단계

태초의 이야기꾼들 - 도입단계

희생과 천복 - 찾아가기 단계

영웅의 모험 - 극복하기 단계

조화여신의 은혜 - 함께하기 위한 준비

사랑과 결혼 이야기 - 함께하기 단계

영원의 가면 - 마지막 단계

 

개인적으로 현재의 흐름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신화가 지금-여기의 우리에게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희생과 천복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속 바닥까지 들여다보고 나서야 비로소 희생이라는 것, 자신의 천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은 시련과 부딪쳐가면서 기꺼이 자신을 성장시켜 영웅이 될 수 있는 준비가 되게 되고 이렇게 영웅이 된 사람은 다시 사랑과 결혼이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자기를 놓았다가 다시 찾는 경험을 한 후에는 자신의 영적 잠재력을 성장시키는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책을 읽고 나서 다시 목차를 볼 때에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아쉬운 것 같다. 목차의 역할은 책을 읽기 전에 전체적인 흐름을 먼저 파악하고 필요할 경우 자신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부터 접근할 수도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그 역할에는 충실하지 못한 것 같다. 대담형식의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이기에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가정하고 책을 집어 들었기에 목차에 대해 별 기대없이 첫페이지부터 꼼꼼히 읽기 시작하긴 했지만 좀 더 친절하게 목차를 정리해주면(부제를 달아준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더 접근하기 쉽지 않을까 싶다. 위에 부제로 달아놓은 것처럼 개인이 체험하게 되는 단계별로 힌트를 줄 수 있는 멘트로 이루어지면 어떨까 싶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나의 관심과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내면으로의 여행, 희생과 천복, 영웅의 모험에 대한 내용이었다. 결국 우리 각자가 영웅이며 인생은 그것을 찾아나가는 여정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신화와 심리학적, 종교적 이야기들을 풀어내어 설득력 있게 전개해 나가는 점이 매력적이었고 탁월하다고 느껴졌다.

반면에 사랑과 결혼 이야기 부분은 별로 흥미롭지가 않고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던 것 같다. 그게 내가 아직 사랑과 결혼에 대한 경험과 통찰이 충분치 않아서 인지 캠벨의 이야기 전개나 근거가 보완해야할 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읽는 독자의 처한 상황과 성장의 정도에 따라 같은 내용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으니 독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targeting이 책을 쓰는데 있어서 중요하겠다는 점을 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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