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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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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21시 08분 등록

(1) 저자에 대해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살고 있다. 요즘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서 향을 피우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문학 작품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게 하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들을 고민하고 추구해온 사람들의 이론을 살려내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사유와 가치 있는 삶의 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문학과 철학의 풍부한 재료를 맛깔스럽게 풀어내며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깊고 풍부한 철학의 맛과 문학이 향기를 절묘하게 버무려낸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그에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을 선사한 <알도와 떠도는 사원>등 그의 책에서는 언제나 현대인의 삶과 밀접하게 맞닿은 인문학을 만날 수 있다. <다니>에서는지식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며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설득의 논리학>에서는 논리학을 말과 글을 단련해 설득력을 키우는 도구로 새롭게 변신하여 소개하였다.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에서는 독특하고 다양한 맛을 내는 지식의 조리장으로, <영화관 옆 철학카페><데칼로그><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영화를 철학과 신학으로 해석하는 감독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김용규 저자는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으나 철학과 신학에 대하 가급적 대중에게 쉽게 풀이하고 설명해주고자 하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우선 그의 서술 방식자체가 담화체로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깊이도 있고 방대하기 까지 하다.

 

철학과 신학이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서양문명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신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하여 그것을 시작으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

1. 네이버 인물사전

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sm=tab_txc&where=people_profile&ie=utf8&query=%EA%B9%80%EC%9A%A9%EA%B7%9C&os=505701

2.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도서의 저자소개

3. <설득의 논리학> 도서의 저자소개

4. 네이버 책소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소개

 

동영상

1. YES24 채널예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소개

http://www.yes24.com/24/ChYes/VideoDetail?videoNo=765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지은이의 말

p9 심층적 이해 없이는 해결책도 없습니다!

à 우리는 피상적인 형상에 더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세대가 내려 갈수록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다. 좀더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부 신이란 무엇인가

p36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몸을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고 그것에 열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신에게 인간의 육체를 부여한 것은 신들을 폄하했다기 보다 인간의 육체를 그만큼 신성시했다고 보아야 하지요.

 

p43 “회화는 정신의 노동이다. 이성을 사용하지 않고 손재주와 눈가늠에 기대어 그리는 화가는, 앞에 놓인 모든 물체를 고스란히 재현하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울과 같다.”

à 정신의 세계가 심오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미도 그 정신의 세계를 반영할 것이다.

 

p56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2부 신은 존재다.

p75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있는 자. 이 명칭, 있는 자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자체를 갖고 있다.”

 

1장 존재란 무엇인가

p85 “네가 신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 뭐 그리 놀라운 일인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

 

p97 “인간정신은 그가 적당한 개념을 설정할 수 없는 실체 앞에서는 망설여지는 법이다.”

 

p147 haya에 들어 있는 생성, 존재, 작용의 통일성이 우리들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들의 사유가 가시적 사물들에 의해 그 방향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의 방향이 심리적으로 정해지면 이 종합은 잘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격은 끊임없이 생성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한,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à 끊임없이 생성되면서 자신과 동일한 존재. 인격은 생성, 존재, 작용에 적절한 예인 것 같다.

 

p152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논리학은 이처럼 철저하게 탈시간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변화도 전혀 다를 수가 없어요.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시작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체계화한 논리학의 전통이자 한계이며, 그것을 통해 사유해 온 서양문명이 탈시간화된 이유이고, 우리가 히브리적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이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시간화된 새로운 논리학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à 논리학에서 시간의 개념을 적용해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런 개념은 참 신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p165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최고 본질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

à 유지하고 뛰어넘고 감싸안고 관통한다. 관통하고 포괄한다에 적합한 표현이다.

 

p187 최고 존재자의 현존을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려는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증명을 위한 모든 노고와 작업은 헛된 것이다. 인간이 순전한 이념들로부터 통찰을 더 늘리고자 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상인이 그의 재산을 늘리기 위해 자기의 현금 잔고에 동그라미를 몇 개 더 그려 넣어도 재산이 불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à 존재자에 대한 현존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증명을 하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p188 누구든지 신이라는 명칭으로 여기서 말하는 것, 즉 그 명칭으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인식될 수 없는 것이 의미된다고 할지라도, 그렇다고 그 명칭으로 의미되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귀결이 따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지성에 불과하다.

à 명칭은 명칭으로 존재할 뿐 그 실제적 의미를 우리는 알 수 없다.

 

p212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이런 구절이 있어요.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일(즉 개념에 대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일(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à 개념을 감성화하고 직관을 오성화하는 것은 상호 이율배반적인 것 같으면서 필요하다.

 

p217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라는 말을 통해 칸트는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두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 학문에서는 중세에 비해 경험의 중요성이 현저하게 강조되어 진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지요. 현대논리학의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진리는 타당할 뿐 아니라 건전해야 한다는 것이데, 타당하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건전하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à 이성을 감성의 테두리에 가둔 것인지. 감성을 이성의 테두리에 가둔 것인지 모르겠다.

 

P219 내 영혼아, 네가 찾고 있는 것을 찾았느냐?

너는 하나님을 찾았고 그분이 모든 것 중에 최고의 어떤 것이며

그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네가 발견했다면, 네가 발견한 것을 감각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주 하나님, 내 영혼이 당신을 발견했다면, 왜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까?

왜 이렇습니까, 주님.

왜 이렇습니까?

à느낌,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p228 하나의 패러다임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경험은 서로 엉켜있어서 패러다임이 다르면 경험도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à 패러다임에 따라 사람의 사고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패러다임과 경험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p230 ‘신의 현존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결국 당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가졌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이라면-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듯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날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들이 될 겁니다.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내가 명확히 아는데 그가 존재하지 않음 수 있는가!’”라는,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적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이미 증명의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à 패러다임에 따라 우리의 의문은 질문이 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 있다.

 

p232 종교적 경험을 관해 우리가 간직해야 할 교훈은 그것의 신비적 형태일상적 형태로 이어질 수 있으며, 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아주 인상적이고 기억되는 사건들을 통해 신비적 형태의 종교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험이 삶 전체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는 의미의 중심점이자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쿤의 용어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à 신비적 경험이 의미의 중심이 되고 삶의 전환점이 되어 종교적 경험으로 나타나면서 그런 경험의 변화를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생겨난다. 비단 종교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p233 바울은 자신의 신비의 경험을 통해 인간과 세계와 역사를 보는 새로운 안목을 터득했고, 삶 전체가 바뀐 것이지요. 그에게는 메타노이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고, 이로써 신은 그를 통해 역사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신비적 경험을 한 이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살았다면 그 경험은 벌건 대낮에 공연히 벌인 어릿광대짓에 불과했겠지요.

à신비적 경험 이후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p233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속에서는 개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개별적 사전뿐 아니라, 세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신과의 만남신의 존재에 대한 실증적 경험이 되는 겁니다.

à 큰 사건만이 신과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세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경험이 신과의 만남이다.

 

p235 신이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도록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렇다고 진심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숨어 있다는 생각도 옳지 않다. 그는 그를 찾는 이들에게 그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명확히 나타나길 원하시는 반면, 진심으로 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감추시길 원하기 때문이다. 그를 찾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있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를 알 수 없는 표시를 주었다. <오직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충분한 빛이 있고, 이와 반대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어둠이 있다.>

à 두드리는 자에게만 문을 열듯이 보기를 원하는 자에게만 온전히 드러낸다. 신이든 누구든 우리가 하기 나름이 아닐까 싶다.

 

3부 신은 창조주다.

p270 세상에게 물어보라, 하늘의 아름다움, 별들의 빛남과 질서,

낮의 태양과 달, 밤에 내리는 서리를 가진 세상에게!

땅에게 물어보라, 나무들과 식물들을 풍요롭게 하는,

온갖 동물이 서식하여, 인간을 위해 가꾸어지고, 마련된 땅에게!

바다에게 물어보라, 자기 안에서 태어난 모든 존재로 충만해진 바다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나서 보라, 저마다의 것이 자신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감관을 통해 너에게 대답하고 있지 않은가:

신이 우리를 만드셨다.” 드높이 숙고한 철인들이 이것을 물었고,

그들은 세계라는 예술품으로부터 신적인 예술가를 인식했다.

 

p303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언어를 머리에 떠올린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양식을 떠올리는 것이다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곧 어떤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삶의 양식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à 언어는 삶의 양식을 표현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알려면 삶의 양식을 알아야 할 것이다.

 

p303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은 하나의 사고 차원에서 다른 사고 차원으로 옮겨 가는 것이자, ‘하나의 삶의 형식에서 다른 삶의 형식으로 옮겨 가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삶의 양식, 곧 문법은 한 세계에 대한 단순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대한 삶의 통찰을 제공하지요. 이러한 통찰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형성해 줍니다.

à 사고차원의 변화가 언어놀이를 바꾸는 것이다. 이로 인해 통찰이 생겨나고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p305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도 이들은 전혀 다른 문법으로 서로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과학과 종교 사이에 바람직한 소통이 비로소 가능해지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이해의 진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à 다름을 탓하지 말고 서로 다른 문법을 가진 다른 언어놀이를 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p311 내 생각에는 과학과 종교 간에 이뤄져야 하는 대화와 소통의 조건이자 목표는 어떤 합의나 일치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 담론에 대한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렇지 않은 채 성급히 어떤 일치나 합의를 끌어낼 목적으로 하는 소통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이 되거나, 획일화를 위한 강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상대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일치나 합의에는-설사 그것이 옳은 자가 그른 자에게 베푸는 선의라는 겉옷을 입고 나타낼 때 조차-사실상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와 폭력이 들어 있게 마련입니다. 

à 성급한 합의나 일치보다는 진정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과학과 종교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p312 자연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접점은 존재한다. 자연과학과 종교는 실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지만, 양쪽 모두가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동일한 실재이다. 물론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자연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위해서는 양 진영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쓰이는 개념들의 의미를 명료화하고 번역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à 보는 시각은 다르지만 서술은 한 실재에 대하서 하는 것. 그러므로 각자에 대한 전문용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p313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조명하여, 단지 하나로 통합하거나 융합하는 게 아니라 나란히 겹쳐 놓음으로써 보다 진리에 가까운 입체적이고 생생한 지식이 제 스스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à 다름을 인정하고 억지로 합치기 보다는 보다 입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p333 ‘지금에는 시간적 연장, 곧 지속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분산되는 수많은 찰나들, 즉 지금, 지금, 지금, 지금이 무한히 계속될 뿐이지요.

à 우리 앞에는 영원히 지금만이 있을 뿐 과거도 미래도 없다.

 

p334 그러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 세 가지의 때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이 셋은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p336 자신의 시간론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단지 흘러가고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인식되던 인간의 삶과 역사에 비록 한정적으로나마의미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을 구원했지요. 인간의 삶과 역사는 헛된 것이 아니라고! 구원과 영원으로 나가는 통로라고!

à 물리적 시간이 아닌 심리적 시간을 통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p337 우리의 마음(영혼)이 물리적 시간을 살 때 사라진 과거 때문에 허무하고, 사라지고 말 현재 때문에 무의미하며,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미래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래서 존재물에 집착하게 되고 세속적이 되지요. 하지만 우리 마음(영혼)이 심리적 시간을 살 때 우리의 삶은 현전하는 과거, 현재, 미래로 인해 의미와 가치 그리고 희망으로 충만하고 풍요로워지지요, 그래서 존재물보다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고 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 마음이 심리적 시간, 존재의 시간, 신적인 시간을 살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것이 플라티노스의 일자에게로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라는 교훈의 의미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우리를 신에게 향하도록창조했다고 선언한 이유이자 내막입니다.

à 존재물보다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심리적인 시간을 살 때 우리는 평화로워 질 것이다.

 

p342 소설이 진행되면서 부단히 반복되는 이러한 회상들을 통해 마르셀은 결국 잃었던 정체성을 회복하고 허무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구하게 되지요. “자신을 열등한 존재, 우발적이고 죽게 마련인 존재라고 느끼고 결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다시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희망이 생긴 것이고 결국 그의 삶이 구원받게 된 것이지요.

à 희망을 통한 구원. 우리들에게 필요한 구원일 것이다.

 

p344 인간은 역사의 객관일 뿐 아니라 역사의 주관이요, 주체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창조할 뿐 아니라 의식하고, 과거를 기억 속에 축적할 뿐 아니라 미래를 기대 속에서 기획하지요.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의식은 사실 과거와 미래를 현전하게 하는 상기의 힘에 의해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지요.

à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는 다르며 인간의 역사는 역사의식에 의해 발전된다.

 

p346 우리가-플로티노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을 따라-물리적 시간으로 자신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심리적 시간의 관점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관점으로 바꾸는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이지요.

 

p414 다윈은 자신의 아들 프랜시스가 지적한 것처럼 독자들이 교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이 아니라 점잖은 신사와 담소를 나누는 친구처럼느끼도록 부드럽고 감동적인 어투를 <종의 기원>에서 사용했지요.

à 아무리 그 내용이 좋아도 고객을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각주의 내용처럼 과학자들에게도 수사학이 필히 요구되며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스킬이다.

 

p418 상상력이 달라지면 관념이 변하고, 관념이 변하면 세계가 달라지는 법이지요.

à 우리 개개인의 상상력이 중요한 것 같다.

 

p424 자연 상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도 치열한 생존경쟁 관계가 존재하고 그 결과 적자생존이라는 비정한 현상이 생겨난다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존재하는 조건과 환경을 시정해 갈 수 있으며 또 부단히 그래야만 하는데, 어떤 것이 일단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나면 그것을 시정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지요.

à 이 의미는 p418자연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인간사회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지요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자연의 현상을 보고 인간의 현상에 반추해보는 선에서 끝나야지 그것을 제도화할 수는 없다. 너무나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우리는 사회를 잘 만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다.

 

p426 높은 도덕 기준은 한 개인이나 그 후손에게 부족 내의 다른 구성원에 비해 약간의 이득을 줄 수도 있고 전혀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이 늘어나고 도덕성의 기준이 진보할수록 부족 전체는 다른 부족에 비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높은 수준의 애국심, 충성심, 복종심, 용기, 동정심이 있어서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선택이다.

à 이것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닐까? 높은 수준의 애국심, 충성심, 복종심, 용기, 동정심이 있어서 항상 남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사회에 주는 영향력 때문에 그 사회가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p431 “인간은 비록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은 것은 아니지만 유기체 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껴도 괜찮다.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올라갔다는 사실은 먼 미래에 더 높은 운명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준다.”

à현재의 모습이 미래의 희망을 제시한다. 현재까지 온 것은 미래를 위한 약속이 됨을 기억하자.

 

p425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어떤 통치의 법칙, 곧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칙들에 의해 자발적으로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à 신이 직접적으로 만들기에는 너무나 정교하지 않은가?

 

p460 신학은 특정 교리를 영구불변하는 진리로 주장하는 체계라기보다는, 그것의 시대적 해석이 적절한지 또는 수용 가능한지를 늘 질문하면서 성서와 전통적 사상들을 통해 부단히 재고해 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à 비단 신학뿐 아니라 모든 것이 과정이 아닐까? 우리의 인생도 과정이고 우리의 시간도 과정이다.

 

p461 20세기의 저명한 역사한자 아놀드 토인비가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인간의 문명처럼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라고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요. 기독교 신학은 항상 성서에 근거해야 하지만, 그것은-마치 역사학이 그렇듯이-언제나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 속에서 재해석, 재정립되기 때문이에요. 창조론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리들과 마찬가지로 창조론 역시 성서 텍스트와 전통적 신학 그리고 당대 학문과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마땅하지요.

à 운동, 항해 그리고 과정이다.

 

p474 누군가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피조물)은 동등하다.

à 높은 산에서 보면 우리의 집들이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듯 신의 경지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희일비하며 아동거리며 살고 있다.

 

4부 신은 인격적이다.

p503 “운명이 우리를 인도하며 각자의 수명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되오, 또 모든 것이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물의 영속적 질서가 개체와 전체를 모두 지배한다오. 만사는 우리 생각처럼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고 견뎌야 하오. 무엇이 그대를 기쁘게 하고 무엇이 그대를 울게 할지가 이미 오래전에 정해졌으며, 개개인의 인생이 서로 아주 달라 보여도 결과는 마찬가지라오. 우리가 받은 것은 무엇이든 사라질 것이며 우리 자신도 사라진다는 것이오. 그런데 왜 우리가 분개하며 무엇 때문에 불평해야 하는 거요?”

à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참고 견뎌야 한다. 좋지 않는 상황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우리는 바꿀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p503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à 너무 운명에 순응하는 말이다.

 

P527 칼빈에게 중요한 일들은 평생 동안 정작 자신의 의지와는 별 관계가 없이 일어났다는 것이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그건 칼빈의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빈 자신도 그것을 인정했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칼빈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수치스럽거나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지요.

à 때로는 나에게도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어쩌면 신의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그 운명이라는 것이 신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라 생각했다. 어쩌면 칼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운명에 의한 결정 때문에 불만을 가지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 순간 최고의 해결책과 극복 방법을 모색하고 나름대로 풀어나갔기 때문이다.

 

P528 우리는 지금까지 세네카와 바울 그리고 칼빈을 통해 인간이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인간의 삶에 참여하고, 그 출생부터 죽음까지 끊임없이인도하는 신의 어떤 속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신의 그 속성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선으로 이끈다는 것도 살펴보았지요. 그들이 이라 했든 예정이라 했든 아니면 섭리리고 했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 신의 속성을 신의 세계 내재성또는 인격성이라 부릅니다.

à신이 우리 인간에 대해 관여하는 속성이 신의 인격성이다. 혹자는 운명이라 하고 기독교인은 신의 인격성이라고 한다.

 

P574 결론적으로, 신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우리 삶에 항상 참여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선을 이루는, 신의 섭리에 합당한 기도만 들어주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들어주지 않지요. 때때로 신은 인간의 기도 때문에 마름을 바꾸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마저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à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개인적인 기도를 많이 하지만, 신의 섭리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한계 같은 생각이 든다.

 

P575 기도가 이루어졌든 이뤄지지 않았던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섭리로 확인하는 일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à 운명처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기본적인 믿음인 것 같다.

 

P576 신으로부터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기도는 기도하는 자 자신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하다. 즉 그 자신이 자기의 결함을 고찰하고, 기도함으로써 얻기를 소망하는 것을 경건하게 바라도록 자기 마음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는 받기에 적합한 자가 된다.

à 기도는 자기 스스로를 위한 성찰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하다.

 

P586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그가 심미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의 생활은 더욱더 많은 것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것들 중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채워지지 않을 경우에 그는 죽는다. (이에 반해) 윤리적으로 사는 사람은 항상 타개책을 갖고 있다. 일체가 그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짓누르는 폭풍우가 어둡게 그를 감싸고 있어서 그의 이웃들마저 그를 볼 수 없을 때라도 그를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꽉 붙들 수 있는 한 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은 자기인 것이다.

à 종교적으로까지 살지는 못하더라도 심미적으로 사는 수준을 벗어나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 까 싶다.

 

5부 신은 유일자다

P652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라는 적절한 용어를 개발함으로써 실험과 관찰을 통해서는 드러나지만 우리의 언어와 사고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를 보통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하지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학문에서 전문용어기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마치 건축물의 벽돌처럼 용어는 사유의 기본 단위이기 때문에 용어의 개발이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요. 언제나 수요가 공급을 낳는 법입니다.

à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학문을 해야 한다. 전문용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유의 기본 단위가 용어가 되기 때문에 사유를 위해서 용어를 잘 알아야 하고 개발해야 할 것이다.

 

P732 그 말은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상호내주적이고 상호침투적인 포용과 사랑을 베풀어 나란히 그리고 더불어실존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엄중한 선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만 하지요.

à 배타성보다는 상호 도움을 주는 역할이 필요하다.

 

P769 이 같은 주장들을 바탕으로 카톨릭교회는 1965년에 개최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알지 못할지라도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으며, 양심의 명령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은총의 힘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리고 선포했지요.

à 종교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성실한 마음으로 양심적으로 살면 언젠가는 복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P808 내 생각에 이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방법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취하되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하지요. 요컨대 작은 이야기들도 하되, 큰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큰 이야기가 동반하는 폭력성도 차단되고, 작은 이야기가 가진 맹목적성도 제거되지요. 칸트의 유명한 경구를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작은 이야기 없는 큰 이야기는 공허하며 큰 이야기 없는 작은 이야기는 맹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게 하자는 거지요.

à 흑백논리보다는 중도적인 입장에서 서로 보완하고 견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3) ‘내가 저자라면’ -

이 책은 애초부터 상반되는 히브리 종교와 그리스 철학의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탈시간화와 시간화의 논리와 같은 상반되고 대립되는 논리를 하나로 종합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크게 5부로 나누어있는데 1부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신이란 무엇인가, 2부에서는 존재와 존재물의 속성에 대한 신은 존재다, 3부에서는 창조물과 피조물의 의미에 대한 신은 창조주다, 4부에서는 시의 섭리와 인간의 자기 헌신에 대한 신은 인격적이다. 그리고 5부에서는 신의 유일성과 인간의 연대성에 대한 신은 유일자이다를 다루고 있다.

 

1부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으로부터 시작하는 신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의 관심을 끌고 흥미를 제공하는 반면 이후의 주제들은 무겁고 신에 대한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는 인내심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고 난해한 내용을 담화식으로 쉽게 풀어나가는 방식은 새롭고 신선한 방법이다.

 

서양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서양세계가 오랫동안 숭배해온 기독교의 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는 것 역시 새로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넓은 이해로 구성된 내용이 번역서가 아닌 공감을 더 잘 형성할 수 있는 한국저자라는 점에서도 놀랍다.

 

또한 각 단원이 끝날 때 마다 그 단원에서 다루고자 했던 핵심에 대해 한 번 더 정리를 해주고 다음 주제에 대한 호기심을 제공하는 진행방식은 독자에게 적절한 호흡을 제공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주제별로 진행하다 보니 시대순과 상관없이 이야기가 나와서 독자로 하여금 혼동을 유발한다.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시대 순으로 철학자, 신학자의 사상을 먼저 설명하고 다시 한번 주제별로 엮어서 설명한다면 좀더 잘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고, 내용을 조금 줄여서 좀더 핵심적인 것으로 구성한다면 독자의 부담이 줄어들 것 같다.

 

맺음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가치의 몰락, 의미의 상실, 물질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문명의 충돌 등-에 대한 해법에 대한 언급은 없고 독자들의 생각에 맡기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조금이나마 저자가 피력을 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신화의 힘>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내용이 방대하고 무겁지만,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이해에 있어 큰 무리는 없다.

 

IP *.170.11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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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3 21:11:06 *.109.25.139
윤영님! 지난 4주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지막 부분.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읽기가
정말 더 수월했을 것 같다는 말에 공감했어요. ^^
일요일 저녁 푹 쉬시구요!
새로운 한주 행복하게 시작하시길 빌겠습니다!
레이스 완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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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영
2011.03.14 22:09:51 *.206.173.247
감사합니다. 김경인님도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이제 자유를 만끽할 때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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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ves saint laurent
2011.05.31 16:54:26 *.111.182.3
Wear your high heels in a sitting position and around the gianmarco lorenzi shoes home first. After a period of gianmarco lorenzi pumps time they will become comfortable and you gianmarco lorenzi boots will probably forget you are even wearing them.If you are giuseppe zanotti shoes planning to wear heels outdoors or at a club on the weekend, wear giuseppe zanotti boots them around the house for a few hours first until they feel nat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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