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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10시 20분 등록

저는 경서원에서 펴낸 류시화 역 <禪의 황금시대>를 읽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1. ‘저자에 대하여’ - 저자에 대한 기록과 개인적 평가 (1 페이지)

약력

 오경웅(吳經熊 우징숑) 박사는 1899년 3월 28일 중국 닝보 지방에서 태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법철학을 공부한 중국인 법리학자로 서구 사회에서는 ‘존 우 John C, H. Wu’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중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 공사로 근무했으며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등 가톨릭 신앙인으로 살았다. 한때 임어당과 함께 월간 <톈허 天下> 편집동인이었던 문학인 출신이다. 그는 1952년 출간한 <동서의 피안 東西의 彼岸, Beyond East and West>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비교 분석하고 종합해 동서를 초월한 피안의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밖의 저서로는 <선의 향연>, <정의의 원천>, <내심낙원>, <당시사계> 등이 있다.

사상

 <동서의 피안>의 추천사를 쓴 F. J. 쉬이드 (Sheed)는 오경웅을 가리켜 ‘그는 철저한 가톨릭 사람이고 철저한 동양인인 동시에 철저하게 그 자신이었다’고 소개한다. 오경웅은 <동서의 피안>에서 서양이 그리스도적일지는 모르나 그리스도교가 서양적인 것은 아니라고 설파하고 있다.

회고록을 통해 본 그의 삶

 가톨릭 중국인으로서 선과 동양학문에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그가 너무도 궁금해 다른 저서를 찾아보았다. 2003년 가톨릭출판사에서 개정해 내놓은 <동서의 피안>을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이 책에서도 그의 흡인력 강한 문체와 박식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영어로 사고하고, 프랑스어로 노래하며, 독일어로 농담할 수 있다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아명은 덕성(德生) 이었다. 이는 사업가였던 아버지가 1898년 대흉년에 공정한 가격에 쌀을 팔아 많은 사람들을 아사에서 구해준 그 해 잉태되고 다음 해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는 큰어머니와의 사이에 20년간 자식이 없자 들인 둘째 부인에게서 난 세 번째 아이였는데, 위로 아홉 살 많은 형과 다섯 살 차이 나는 누이를 두었다. 작은어머니(생모)는 그가 4살 때 불과 서른의 나이로 사망했고, 이후 그는 할머니 같은 큰어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열병에 걸린 그를 간호하다 쇠약해져 사망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은 형님이 공정하게 재산분배를 해 주어 대학교육을 받고 해외체류, 연구생활이 가능했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장학금과 미국유학 등의 혜택을 받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웃라이어>의 골자와 같이 좋은 환경이 이런 걸출한 인물을 탄생시켰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의 아내 테레사와는 1916년 불과 17세의 나이에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미 여섯 살 때부터 양가 부모에 의해 약혼한 사이였지만, 혼례 때에나 처음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스무 살 미만에 부모가 되어 14남매를 낳고 다복하게 살았다. <선의 황금시대> 마지막 부분에 임종시의 감동적인 장면에 등장하기도 하는 그의 아내는 훗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좋을 수밖에 없잖아요”라고 말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된다.

 John(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사연도 특이하다. 청년시절 서양식 이름을 짓는 것이 유행할 때 웹스터 대사전 인명부를 뒤져 자신의 중국식 이름 ‘징숑’을 빠르게 발음할 때 들리는 ‘쫑’과 비슷한 이름을 우연히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톈진(天津)의 베이양(北洋) 대학 법학부를 거쳐 상하이(上海) 동우(東吳) 법과학원에 옮겨갈 때 그는 ‘존 우’라는 이름으로 등록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때부터 오늘까지 나는 존 우로 알려졌으니 죽을 때까지 존 우로 있겠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후 그는 미국 미시건주립대 앤 아버(Ann Arbor) 법과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그곳에서 카네기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 대학에 건너가 연구를 하게 된다. <선의 황금시대>에도 종종 등장하는 홈즈 대법관과 편지를 통해 법률과 종교에 대해 토론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다시 이름으로 돌아와서, 그와 기독교와의 첫 만남은 1917년 감리교 전통 동우 대학에 다닐 때 감리교 세례를 받은 때였는데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이름이 ‘사도 요한’의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1937년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는 자신의 생일(3월28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성인이 카피스트라노의 요한(St. John of Capistrano) 성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는데 그 성인이 자신과 같은 법률가였다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는다. 또한 그가 번역한 중국어 성경에서 요한복음 번역이 걸작이라 평가받았다는 점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름 덕분으로 그 영광을 돌리고 있다. 또한 자신을 낮춘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을 모두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싶다는 욕심까지 부리고 있다.

 1927년 1월1일 상하이 임시 법원의 판사로 임명되어 공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중국 법률을 자신의 법률 사상대로 주무르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고 회고한다. 너무 열심히 달린 나머지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쯤, 1929년 하버드 법대와 노스웨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아 그는 다시 미국에 머물게 된다. 그 사이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상하이로 돌아가 1930년 가을부터는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돈을 많이 벌게 되자 방탕한 생활에 빠지고 운명과 점술에 빠져있기도 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아내가 글을 읽지 못해(너무 똑똑한 며느리는 싫다고 한 그의 어머니 때문에 글자를 깨치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아 이혼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철회했다. 마흔이 되기 직전, 1937년 12월 18일 가톨릭교회로 부름을 받아 7년 간의 타락의 악몽이 끝났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격인  <동서의 피안>에서 그가 설명한 아래 몇 가지 주제를 그의 필체를 거의 그대로 살려 정리해 보았다.

영혼의 친구, 홈즈 대법관과의 비교

 ‘그는 범신론자였고 나는 일신론자였다. 그의 궁극은 우주였고 나의 궁극은 신이었다. 그의 철학은 도교의 정신에 더 가까웠고 그 반면에 나의 철학은 내가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이었다. 사고방식에 있어서 내가 그보다 더 서양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그는 나보다 더 동양적으로 보인다.’

유교, 도교, 불교 평가

 '유교는 본질적으로 윤리에 관계된 학문으로 도덕생활을 다루는 반면 도교는 관상생활에 관심을 갖는다. 선대 동양인들은 은연중에 불교 신자로 살아왔다. 사회관계에 있어서 동양인은 도교의 기세철학과 균형을 이루면서 유교의 법에 따라 행동해 왔으나, 그들의 내적 생활은 불교를 따라온 것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된 이래 동양의 예지가 모두 그에게 덕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 3대 종교가 서로 별개임에도 동양인의 심리가 몸에 밴 융합적 습관으로 하나로 용해시켰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선의 황금시대>를 저술하게 된 동기

 '30대 나이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선종이라는 불교의 특수한 파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도교로부터 흡수한 신비적 경향은 선의 종장들의 연구를 통해 크게 보강되었다. 동양인의 사상 세계에 핀 꽃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한 떨기라고 묘사되어온 선불교에는 극히 매력적인 요소가 있다.'

동양과 서양에 대한 예상

 '여러 방면에서 들리는 전쟁의 경보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세기가 인류의 일대 교향악을 탄생시키는 데 공헌할 것이며 결국에 가서는 이 부글부글 끓는 가마솥 속에서 아름다운 것이 나오게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가 그 수확을 누리지는 못할지 모르나 적어도 그 파종만은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동양에서 나고 자란 그는 역동적인 시기에 살았다. 또래보다 어리숙한 아이였지만 언어감각과 두뇌가 비상해 미국와 유럽을 오가며 공부하고 활동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서양식 세계에 살고 있는 동양인으로서, 그의 글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는다. 그의 박식과, 그에 따른 노력과, 사람을 잡아끄는 글솜씨와 깊은 신앙심까지 모두 본받고 싶다.

 

 

3. ‘내가 저자라면’ -

 책의 전반적 구성은 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달마로부터 혜능, 그의 제자들인 5대 선사를 집중 소개하고 선의 정수를 짤막하게 담아낸 에필로그로 향하는 것으로, 탄탄하다고 여긴다. 처음 나와있는 선의 계승도를 보고 목차를 보면 별 연관 없는 제자들의 나열인 것 같으나, 이후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그 순서가 그냥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구성 상 보완점을 찾기 위해 대안을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히 이보다 좋은 구성을 찾아내기 힘들었다. 나의 지력이 저자를 아직 능가하지 못하는 탓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더 좋은 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에 이 책을 접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읽을 때는 그리 많은 줄 몰랐는데,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귀를 정리하고 보니 A4용지로 서른 장이 넘었다. 양으로 따진다면 무척 감명 깊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특히 책의 뒤쪽으로 갈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는 비슷한 점들이 겹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매 선사들의 개성 넘치는 특색을 무척 잘 살린 그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다. 소개하는 선사들에 대한 요약이 매우 간명하면서도 인상 깊어 독자의 머릿속에 일종의 이미지가 각인된 뒤 사례와 설명이 술술 풀려 나가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처음에는 번역자(류시화 시인) 덕분에 문장 읽는 맛이 있는가 고민했지만, 번역자가 다른 <동서의 피안>에서도 그의 문장과 흡인력이 살아있어 (이미 고인이 된) 오경웅 선생의 천부적인 능력을 새삼 질투하게 됐다.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얻게 해 준 그에게 그 표시로 ‘뺨을 후려치고도 싶은’ 심정이었으나 ‘유교식으로 점잖게 행동해야만 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종교성이 짙은 우리 국민은 어렸을 때부터 종교적 다양성에 노출되어 있다. 급속한 서구화로 특히 그리스도교적 전통에도 익숙한데, 그의 저술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반 위에 ‘선도 이러하다’는 것으로 들려온다. 그와 같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나에게도 성경과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 등의 익숙한 내용이 있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거꾸로, 선의 진수를 맛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내용을 더 이해하게 되는 느낌도 받았다. 궁극에 진리는 서로 통하는 것일까? 학부 때 서양문학을 배우면서 구전문학의 내용이 동서양이 어쩜 이리도 비슷할까(장화홍련전과 신데렐라 등) 하며 인류의 공통성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독서에서 얻은 감탄도 그 때와 유사하다. 21세기를 이끌어갈 중심 줄기 중 하나로 ‘영성’이 꼽힌다. 가톨릭에서도 최근 명상과 관상 등의 새로운 영성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이런 바람에도 선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이전에는 깊이 알지 못했다.

 이 책이 준 유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추천의 글을 써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수사신부님의 재발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간 머튼 신부의 대표작 <칠층산 Seven Storey Mountain>에 대한 추천을 많이 받았는데, 기회가 닿지 못해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볼 기회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접한 그는 문학을 전공한 엘리트였고, 젊은 날의 방황을 딛고 수도원(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 켄터키 주 겟세마니 수도원)에 들어간 뒤 말년에 동양 사상에도 깊이 이해하고 장자의 도, 선에 대한 책도 내게 된다. 특히 그의 저술에 대한 격정과 작가로서의 자아에 대한 고뇌는 글쓰기를 지망하는 사람에게 많은 감명을 주는 부분이 있다. 열다섯 살 적부터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그는 일본의 선종불교학자인 스즈끼 박사, 오경웅 선생과 교류하고, 틱낫한 스님을 자신이 있는 수도원에서 만났으며 마침내 꿈에 그리던 아시아 순방길에 나서지만 이 여행길에서 그는 달라이 라마를 만난 뒤 선종했다. 이후 동양사상에 관심이 커진 겟세마니 수도원에 우리나라의 숭산 큰스님이 초청받아 선에 대한 강의를 했다는 사실을 현각 스님의 책에서 알게 되니, 고구마 줄기처럼 하나를 당기면 쭉 딸려 나오는 새로운 발견에 이렇게 연결되는 독서의 참 맛을 알게도 되었다.

 작가인 오경웅 선생을 보면서도 그 박식과 글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능력에 감탄했고, 닮고 싶은 저술가로 나의 역할 모델 군(群)에 추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익했다. 그가 궁금해 <동서의 피안>을 찾아 읽으면서 ‘너는 왜 하필 서양 종교를 믿니?’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때 가졌던 약간의 혼란도 말끔히 정리할 수 있었다.

 낯설었던 것을 조금씩 알아가며 새롭게 보게 되는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새삼 ‘선문답’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대표 사찰인 조계사에 미친 선의 영향도 알게 됐다. 하버드 출신 스님으로 유명한 현각 스님, 벽안의 그를 이끈 숭산 큰스님이 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는 것도, 우리나라에 불과 얼마 전 선학과(동국대학교)가 개설되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동네에 있는 ‘선불교’ 간판에 ‘아! 저기 선이 또 있네’ 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글자를 처음 깨치는 어린아이의 모습, 그것이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일 주일 만에 일어난 일 치고는 놀랍기 그지없다. 아니, 깨달음은 순간에 온다고 했으니, 일 주일의 시간은 짧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옮긴이의 말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9페이지)


1. 선(禪)의 심지

내 생각으로는, 선종은 그 바탕이 되는 추진력을 대승불교의 폭넓은 힘에서 얻어낸 것 같다. 그렇지 않고 만일 노자나 장자와 같은 원시 도가사상에만 의존하였던들 그렇게 활기차고 다이나믹한 정신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21페이지)

만일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중략) 따라서 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장자의 ‘마음을 함께 함’(심재), ‘마음을 잊음’(좌망) 그리고 ‘아침처럼 맑음’(조철)을 이해하는 게 지름길일 수도 있다. (22페이지)

“무릇 ‘도’란 복잡한 것이어서는 안 되네. 복잡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혼란이 일며, 혼란스러우면 걱정과 불안만 늘어나지. 이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잔뜩 억눌려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도 구제하기 힘들 뿐더러 남까지야 말해 무엇하겠나. (중략) 나아가 자네는 무엇 때문에 세상이 갈수록 덕을 잃고 지능만 발달하는지 알겠나?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 것일세. (중략) 남의 마음과 가슴에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않는 한 억지로 포악한 사람에게 인의(仁義)를 주입시키려 한다면 결국 본래는 선한 뜻이었지만 남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네. (24페이지)

“에이, 안 되네! 자네는 수단과 방법이 너무 많아. 그리고 마음은 전혀 안정이 안 되어 있구 말야.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것으론 충분치 않네. 다른 사람을 바로잡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 (25페이지)

“우선 마음을 맑게 하게.” (25페이지)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道)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26페이지)

“자네가 진정코 귀와 눈을 마음 속으로 돌리고 나아가 마음 속에 꽉 들어찬 편견과 선입견을 죄다 쓸어낸다면 그때는 귀신조차도 감동되어 자네의 마음에 기댈 걸세.” (27페이지)

여태까지의 전통 신학은 저들에게 마치 기하학과 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즉 정신적인 여러 측면들 중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데 비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은 거의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을 선과 도가 사상은 다루고 있다. (32페이지)

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33페이지)

이제까지 서양문명은 계속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속에서 뜻있는 서양인들은 자기네들 문명의 결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으며, 동시에 동양이 보다 깊은 저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34페이지)

실제로 선의 정신은 서양 사상가들의 선두 주자들에게 상당히 깊이 침투해 들어갔으며, 머지않아 거꾸로 동양에 영향을 미칠 날이 올 것이다. (중략) 동서양을 초월해 있는 곳에서만이 동서양의 활기찬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감히 예언하건대 이러한 활기찬 종합은 서양에서 먼저 이루어질지 모른다. (35페이지)

하지만 순수하고 본질적인 체험을 되살리려는 것과 관련해서 서양의 선은 즉흥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처럼 되어 버려 도덕적 방임 상태에 떨어지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선이 얼마나 엄격한 수행과 혹독한 전통적 관습을 바탕에 깔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36페이지)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선의 진면목을 그려 보자는 데 있다. 단 여기서는 당대(唐代)의 대선사들만을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독창적인 통찰력과 풍부한 개성의 힘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기 때문이다. (36페이지)

사실상 이 다섯 갈래의 불꽃은 그 기원이나 목적에 있어서 하나다. (중략) 모두가 혜능이라는 커다란 불씨에서 생겨난 것이고, 동시에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그 심지를 박고 있다. (37페이지)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37~38페이지)


2. 처음 불밝힌 사람들-달마와 제자들

달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나 전설들이 정말로 어느 만큼 역사적 진실성을 지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달마에 얽힌 몇 가지 전설들이 이미 당나라 때부터 선의 스승들에 의해 실제 사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39페이지)

“진정한 공덕이란 밝고 맑은 지혜를 깨쳐 아는 것인데 이러한 지혜는 본래 말로 담을 수 없고 침묵 속에 있는 것이기에 세상의 속셈으론 구하지 못한다.” (40페이지)

달마가 썼다고 알려진 유일한 작품은 도(道)와 진리에 이르는 두가지 길에 대한 글이다. (42페이지)

‘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중략)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와 마음을 맑게 하면 그대는 애초에 ‘나’라는 것도 ‘남’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것과 하찮은 것이 한 물건임을 깨닫는다. (중략) ’행위에 의한 입문’엔 다음 네 가지 길이 있는데 다른 모든 길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43페이지)

일체의 고락은 외적인 인연의 산물이며, 영광되거나 욕되거나 화를 당하거나 복을 받거나 간에 모두가 전생에 행한 결과이다. 따라서 업의 저울질이 다 끝나면 자신이 받은 재산이나 명예 그리고 다른 좋은 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한때 그런 걸 얻었다고 신나해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44페이지)

현명한 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리를 이해하며 지성을 갖고 세속의 길에 물들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즐기며 세속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그들은 재물의 부귀 변천에 몸을 맡기면서도 한편으론 탐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현상계의 텅 빔을 항상 의식한다. (중략)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여러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45페이지)

모든 존재 자체와 생명체들의 본질이 ‘공’(空)임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다. (중략)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 ?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禪)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 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 (46페이지)

이 글은 종교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선(禪)의 작품은 아니다. 이 글 속엔 후대 선의 이야기들 속에 구구절절 흘러 넘치는 숨막히는 전환, 눈부신 섬광, 귀를 찢는 고함, 경악할 돌발사, 신비한 수수께끼, 머리로는 이해할 길 없는 저쪽 세계로의 비약, 나아가 감질나는 유우머와 기이한 행동, 형언키 어려운 심장의 고동, 그리고 저 빼놓을 수 없는 우주적인 농담 등이 전혀 없다. (47페이지)

본래의 참마음은 항상 평화롭다. 거기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48페이지)

혜가는 입을 열지 않고 스승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야말로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 이렇게 해서 혜가는 선종의 제2조가 된 것이다. (49페이지)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하면
모든 티끌 사라져 환히 빛나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 애쓸수록
본래의 평화로움이 더더욱 깨지리니. (52페이지)


3. 부처의 눈-혜능

혜능(慧能, 638-713)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는 중국이 낳은 위대한 천재 중의 하나이며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에 견주어도 하나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53페이지)

<단경>은 책상 머리에서 짜낸 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온 ‘참사람’(眞人)의 작품이다. (53페이지)

부처를 알아보려면 자기가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가 된 사람만이 자신 뿐 아니라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깃든 불성을 발견할 수 있다. (54페이지)

홍인은 어수룩하지만 때묻지 않은 이 시골뜨기 방문객의 솔직성에 반했다. (55페이지)

이 남방의 ‘오랑캐’가 큰 그릇임을 꿰뚫어본 홍인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좌우에 늘어선 다른 제자들의 질투를 살까 염려해 그만 두었다. (55페이지)

“무릇 세상 사람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가장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데도 너희들은 종일토록 공덕 쌓는 일에만 열중하고 생과 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중략) 얼른 돌아가 시를 짓되 머뭇거리지 말라. 생각으로 헤아리기 시작하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56페이지)

“네 시에 따라 수행하면 나쁜 길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최상의 지혜를 얻기 어렵다.” (58페이지)

“낮은 사람에게도 최상의 지혜가 있고 높은 사람에게도 얼빠진 지혜가 있는 법이오. 남을 업신여기는 것만큼 큰 죄가 없다는 걸 아시오.” (59페이지)

혜능은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세상 만 가지 물건이 일체 참본성을 잃지 않았음을 알았다. 무아의 경지에서 그는 외쳤다.
“본래 맑고 깨끗하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래 나고 죽음이 없거늘, 내 어찌 예상했으리오! 본래 다 갖추어 있거늘, 내 어찌 눈치나 챘으리오! 세상 만법이 다 거기서 나오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61페이지)

그는 혜능이 철저히 깨달았음을 알았으나 동시에 그의 제자들이 자신이 손수 택한 이 후계자를 못마땅히 여기리라는 것도 알았다. (62페이지)

“부족할 때는 스승이 제자를 건네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뒤엔 제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62페이지)

혜능은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너무 겸손했고, ‘아니다’라고 하기엔 또 너무 정직했다. (64페이지)

혜능은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그 편지에 혜안(惠安)과 신수(神秀), 이 대선사들이 혜능을 오조 홍인으로부터 의발을 전해 받은 진정한 계승자라고 인정한 사실이 적혀 있다는 점이다. (65페이지)

다만 두 선사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신수가 점오(漸悟) ?단계적으로 점차 깨닫는 것을 가르친 데 반해 혜능은 돈오(頓悟) ?단번에 깨닫는 것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66페이지)

다만 신수의 가르침은 ‘대승인’(大乘人)을 상대로 한 것인데 비해 혜능의 것은 ‘최상승인’(最上乘人)을 위한 것이다.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66페이지)

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가 있고 다함없는 지혜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 (67페이지)

이 일화는 선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준다. 선의 통찰력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치는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베는 것과 같다. (72페이지)

하택 신회, (중략) 혜능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고 떠받는 점에선 그의 위치가 단연 첫째다. 순간적인 깨달음(돈오)을 강조하는 남쪽의 선종이 점진적인 깨달음(점수)을 주장하는 북쪽의 선종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사람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용기 덕분이었다. (72페이지

“내가 본다는 것은 내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이오, 안 본다는 것은 남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은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73페이지)

오직 신회만 동요되지도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중략) “오직 신회만이 좋은 일 궂은 일을 떠나 버렸구나.” (74페이지)

“아마도 너희들이 슬퍼하는 까닭은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안다면 슬퍼할 리 없다.” (75페이지)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혜능의 가르침

1) 교외별전(敎外別傳)

이것은 ‘법’이라든가 도(道)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중략) 오직 자기 안을 들여다봄으로써만 정말 무엇이 ‘참 나’인지 알 수 있다. (78페이지)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다윗이 구약의 시편에서 “주께서 얼마나 좋은지 혈 맛보고 눈으로 본다”고 노래했을 때 그는 자신의 선 체험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79페이지)

2) 불립문자(不立文字)

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81페이지)

“만 가지 법이 다 사람 마음 속에 있다.” (81페이지)

“만일 정말로 말이나 문자를 버렸다면 ‘불립문자’란 말도 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말이기 때문이다.” (81페이지)

“참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82페이지)


3) 직지인심(直指人心)

마음이야말로 선의 열쇠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心)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가 없다. 선의 궁극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82페이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참본성은 마음의 본바탕 내지는 속알맹이요, 마음은 참본성의 작용이다. (중략) ‘참 나’로 돌아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다. (83페이지)

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84페이지)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객관적으로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리면 그 순간 이미 본질을 잃고 만다. 따라서 마음은 철학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다. 대상화된 마음은 기껏해야 참마음의 그림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84페이지)

‘무념’(無念)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없이 쓰는 걸 뜻한다. 무념을 아무 생각도 안한다거나 모든 사상을 끊어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절대 안된다. (84~85페이지)

우리 마음이 기존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에 붙박히지 않는 한 순간순간 올바른 생각을 할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이 맑고 깨끗하며 물들지 않은 마음은 “왕래가 자유롭고 조금도 걸림이나 막힘이 없다.” (86페이지)

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이다. (86페이지)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선행까지도 포함하여 일체 만물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무집착에 집착할 것인가, 또는 무집착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날 것인가에 있다. (중략)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대의 참마음을 바로 보리라.” (87~88페이지)

4) 견성성불(見性成佛)

만물은 다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의 눈길을 안으로 돌려 자신이 참본성에 성실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만큼 큰 즐거움도 없다. 맹자와 마찬가지로 혜능도 우리의  본성이 진실과 하나라고 생각했다. (중략) “하나가 참되니 모두가 참되다.” (88페이지)

‘세 가지 보물’(三寶)에 관한 그의 사상은 무척 흥미롭다. (중략) 혜능은 깨달음(覺)과 올바름(正), 그리고 깨끗함(淨)에 귀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혁명적 해석이었다. (89페이지)

절대란 그 앞에서 모든 언어가 잔뜩 주눅이 드는 초월의 세계다. (89페이지)

혜능의 철학은 초월을 강조한 점에서는 노자, 장자와 비슷하고 인간을 중시한 점에서는 공자, 맹자와 비슷하다.

삼보론 못지 않게 그의 ‘삼신설’(三身說) 역시 대단히 혁명적이다. (중략) 모든 존재가 그 원천을 참본성 안에 두고 있다는 뜻에서 그것은 청정한 법신불(淸淨法身佛)이다. 참본성에서 나오는 반야(지혜)의 빛에 의해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과 욕망이 깨끗이 쓸려 사라질 때 우리의 참본성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나타난다. (중략) 그러나 마음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자성화신불론’(自性化身佛論)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91~92페이지)

일단 마음을 한 순간이나마 좋은 일 쪽으로 돌린다면 당장 반야(지혜)가 일어나 이른바 자성화신불(自性化身佛)이 된다. (92페이지)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93페이지)

노자는 이러한 상대적 세계의 관념들을 초월한 사람을 성인이라 했다. 혜능 역시 이와 비슷하게 제자들에게 베푼 마지막 가르침에서 36가지나 되는 대립되는 짝들 ?‘36대’(對)를 나열하고 있다. 즉 있음과 없음(有無), 현상과 텅빔(色空), 움직임과 정지(動靜), 맑음과 흐림(淸濁),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凡聖), 승려와 세속인(僧俗), 크고 작음(大小), 길고 짧음(長短), 올바름과 그릇됨, 어리석음과 지혜, 기쁨과 분노, 나아감과 물러남, 삶과 죽음, 화신과 보신 등의 상대적인 것들이 그것이다. (중략) 만약 그대가 이 36대를 잘 알아서 적절히 쓸 줄만 안다면 모든 경전의 진리를 꿰뚫어 살대적인 양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참본성이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중략)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中道)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94페이지)

이 둘의 상호관계 속에서 바로 중도의 의미가 밝혀진다. (95페이지)

“다시 말해 진리는 기존의 사고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다.” (95페이지)

혜능의 사상가로서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뿐만 아니라 혜능은 이원론을 교묘히 이용하여 수직적인 것을 드러내 보였으며 인간 정신을 절대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리는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었다. (95페이지)

 

5.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마조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선종의 역사상 혜능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97페이지)

“앉아서 명상하면서 너는 참선을 하려는 거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를 흉내내려는 거냐? 만일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중략)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道)를 볼 수가 없다.” (99페이지)

마조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心外無佛)는 육조 혜능의 기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100페이지)

다음으로는 일상생활의 긍정을 강조한 점이다. (101페이지)

내 마음 공부는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이로다. (101페이지)

마조의 위대성은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놀라운 기술과 번뜩이는 기지에 있다. (101페이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마조는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했으며 그들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자기 경지를 열었다 한다. 한 스승 밑에서 나왔다 해서 천편일률적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스타일과 깊이를 지녔던 것이다. (104페이지)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선 그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바다. (107페이지)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108페이지)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선의 문답에서 흔히 쓰이는 특수한 말로 이 질문은 불교의 근본 뜻이 무엇인가 하는 말과 같다.) (109페이지)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신이 응당 받아야 할 상이지만, 먹고 마시는 걸 절제하면 당신은 복을 쌓게 됩니다.” (111페이지)

손으로 입을 가림으로써 석두는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시했으며 마찬가지로 마조가 말하려는 의도도 한강물을 한 입에 마시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그 초월적인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석두와 마조가 다같이 노장철학에 정통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115페이지)

마조와 석두가 “천하를 둘로 쪼갰다.”고는 하나 실제 그들 사이엔 터럭만큼도 적대관계가 없었다. (115페이지)

육조 혜능과 마찬가지로 마조는 제자들의 의식을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형태를 갖춘 세계에서 절대 공의 세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 서로 대립적인 방법을 쓰는 데 아주 능숙했다. (118페이지)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120페이지)


6. 선악을 넘어서-백장과 황벽

머리나 옷에 장식품을 달지 말고 몸에 향수를 바르지 말 것.
금은 따위의 보물을 모으지 말 것.
때 아닌 때에 먹지 말 것.
(122페이지)

무엇보다도 백장이 확립한 사원 제도의 가장 독특한 점은 ‘경작의 의무’에 관한 규정이다. (중략) 백장 이전의 승려들은 전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완전히 걸식으로만 생계를 유지했다. (122페이지)

그는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하루의 얼마동안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아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시주는 부수적으로만 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장은 거두어들인 수확량에 대해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똑 같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실로 대단히 혁명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그는 당시 보수파 승려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123페이지)

백장은 없어진 연장을 찾아 사방을 뒤지다 끝내 찾지 못하자 단식을 하기 시작했다. (123페이지)

그러나 불교의 여러 종파 중 유독 선종만이 기적적으로 이 대재난을 면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중략) “천째 선종은 불상이나 경전과 같은 종교의 외적 부속품에 의존하지 않고 수도 생활을 해나갔다. (중략) 둘째 선종은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24페이지)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125 페이지)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27페이지)

자기 자신이 곧 행복 그 자체요 참사람(眞人)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바깥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그 쪽으로만 안달하며 찾아 헤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130페이지)

황벽은 궁극의 실체를 마음 즉 ‘일심(一心)’으로 보았다. (130페이지)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큰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스스로 그것들을 중요히 여겨선 안 된다. (130페이지)

“이 불성, 이 큰 마음은 텅빈 충만이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만물에 편재해 있다. 굳이 표현한다면 영광되고 신비한 평화라고밖엔 말할 수 없다.” (131페이지)

일심은 모든 상대 관념들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 ?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중략) 그쯤 될 때 그대와 스승 사이에는 말을 떠나 침묵으로 오가는 이해가 생겨난다. 이것이 이른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131페이지)

그는 선을 마음 속 지혜의 샘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샘물로 본다. (131페이지)

장자는 인의(仁義)를 반대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을 요구하였다. (중략) 유교가 그야말로 품행이 방정하고 덕있는 관리나 진정한 교양인을 만들어 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교는 고정된 외적 교범들로 그들을 묶어 놓고 구속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요구에 부딪쳤을 때 자유롭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다. (132~133페이지)

그의 독자성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황벽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장자의 사상과 아주 닮았다. 황벽은 일심(一心)이라는 표현을 썼고 장자는 도(道)라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절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심오한 사상가이며 동시에 위대한 신비가였기 때문에 절대에 대한 그들의 통찰이 서로 다르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the Cross)와 같은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의 통찰도 선가나 도가의 통찰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133페이지)

“종이와 먹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려고 덤비면 우리 선종의 정신을 망쳐놓고 말 뿐이야!” (135페이지)

선이란 생사를 건 싸움이며 따라서 절대로 안이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136페이지)

그대는 자나깨나 끊임없이 ‘무’(無)라는 말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걸어갈 때나 쉴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또는 옷입을 때나 밥먹을 때나 의자에 앉아서나 심지어 똥 오줌을 누면서조차도 항상 이 말을 머리 속에 박고 있어야 한다. (중략) 날이 가고 달이 거듭한 어느날 홀연히 온 마음이 한덩어리가 되면 갑자기 마음의 꽃이 활짝 피어나고 부처와 조사들이 처음으로 깨친 바를 비로소 뼈속 깊이 이해할 것이다. (중략) 이런 경지에 이르면 염라대왕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모든 성인들도 그대를 어쩌지 못한다. (136페이지)

뼈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매화 향기가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
(137페이지)

그리고 참된 삶을 누리는 사람한테는 가장 평범한 일이 기적 중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137페이지)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도 없다. 말이야 쉽지만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137페이지)

욕심의 샘이 깊으면 천상(天上)의 샘이 말라간다. (138페이지)

모르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좀 알면 그 지식이 나를 번뇌케 합니다.
좋은 일을 안 하면 남을 해치고
좋은 일을 하면 내 자신이 해를 입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일에 소홀해지고
의무를 다하자니 기진맥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138페이지)

그대는 부모 잃은 어린애처럼
죽을 지경으로 겁을 먹고 있네. (139페이지)

그는 하고 싶은 생각은 하고 하기 싫은 생각은 끊으려 하였다. (139페이지)

차라리 한꺼번에 내던져 버리게.
(중략)
만일 그대의 장애물이 안팎에 다 있다면
그대가 도(道)를 지키려 하지 말고
‘도’가 그대를 지켜 주기를 바라게! (139페이지)

 

 

7. 뜰 앞의 잣나무-조주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142페이지)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걸 뜻한다. (144페이지)

스승의 행동은 마음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선사들이 수많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7페이지)

이 모든 물음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선이란 일상 의식과 관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148페이지)

비록 남전의 행동은 충격적이었지만 본래 의도는 승려들의 고양이에 대한 집착에 충격을 가하려는 데 있었다. (148페이지)

마찬가지로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걸어나간 행동은 얼핏 아주 어정쩡한 짓으로 보이지만, 조주는 틀림없이 동료 구도자들에게 진리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가치가 뒤바뀌어 있으며 세속인들이 아귀다툼을 하며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애초에 존재치도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일깨워주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했음직하다. (148~149페이지)

장자나 선사들은 창자의 활동이 두뇌의 기능보다 결코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대뇌 운동, 즉 사고가 갖지 못하는 우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156페이지)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156페이지)

혜능의 진정한 계승자인 조주는 참본성을 특히 강조했다. (157페이지)

“세계가 있기 전에 참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중략)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자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157페이지)

사실 ‘도’는 만물에 골고루 편재해 있다. (중략) 만일 그때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았더라면 그는 당연히 ‘저 하늘의 독수리’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158페이지)

“그대들의 의문을 실제 체험을 통해 풀도록 하라!” (159페이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160페이지)

여럿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여럿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 하나(一)로 돌아가며 그 하나와 떨어질 수 없다. (160~161페이지)

‘도’는 하나(一)와 여럿(多)을 초월할 뿐 아니라 ‘있음’과 ‘없음’ 또는 ‘현상’과 ‘본체’를 초월한다. (161페이지)

조주는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똑 같은 대답을 한 적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소박한 성실성 때문에 질문자의 상황에 맞도록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한 대답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그렇지 않고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은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162~163페이지)

그들은 조주와의 대화에서 여러 심오한 문제를 놓고 유창하게 떠들곤 했는데, 그 중 태반은 자기 스승들의 말을 상투적으로 써먹는 데 불과했다. 그래서 조주는 그들을 ‘뜨내기 잡상인’이라고 불렀다. (163페이지)

선의 수행은 일체가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164페이지)

이때 이미 선의 황금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으니, 그는 당대(唐代) 최후의 정신적 거장이었다. (165페이지)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소위 ‘오가’(五家), 즉 다섯 종파들은 한결같이 ‘조주고불’을 그들의 공통적 지혜의 원천으로 삼았다. (165페이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 다시 말해 ‘빈 마음’이어야 한다. 빈 손으로 왔다면서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벌써 마음이 에고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 (166페이지)

“거지에겐 부족한 게 없네!” (166페이지)

“부처는 어떤 분입니까?”
“너는 누구냐?” (167페이지)

“난 지금 오줌이 급해. 생각해 보게나.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내 자신이 직접 하는데……” (168페이지)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석두의 제자들
1)천황 도오

2)용담 숭신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174페이지)

“그 말을 안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175페이지)

3)덕산 선감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아 봤댔자 태허의 허공에다 털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178페이지)

4)암두 전활

아마도 암두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 부정과 긍정을 다 초월해야 함을 보이려 한 것 같다. (182페이지)

설봉은 암두처럼 재기가 번뜩이진 않았지만 지극히 성실,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더불어 아무 사심없는 미덕으로 인해 선종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82페이지)

“남의 집 문으로 들어간 사람은 자기 집의 보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184페이지)

 

 

9. 감추어진 불씨-위산

이러한 속안의 ‘참나’가 여러 선종의 주춧돌이긴 하지만 우리들 안에 있는 영적 불씨를 강조한 것은 위앙종의 공헌이다. (192페이지)

위앙종의 또 다른 공헌으로는 한편으로 ‘돈오’의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 ‘점수’의 필요성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걸 들 수 있다. (193페이지)

그러나 일반적으로 초심자가 인연이 닿아 그 자리서 돈오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단번에 청산할 수 없는 태초 이래로 빚어온 타성의 찌꺼기가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전생의 업이나 인과응보로 인해 일어나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193페이지)

“어떠한 철학이든 그 근본 이념은 비교적 간단하고 분명하나 다만 이를 전달해 주는 말이 악마다.” 만일 우리가 ‘말이 악마’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동서의 어떤 책을 읽더라도 언어와 관념의 그물에 붙잡힘 없이 독서를 즐길 수 있으리라. (197페이지)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그래서 묻노니,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에 너는 어떤 상태로 있었는가?” (199페이지)

“그때 당신이 이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면 오늘의 이 놀라운 일을 어찌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200페이지)

선의 이치에 합당한 말을 해놓고는 거기에 스스로 당황해 한다는 것은 아직 세속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증거다. (201페이지)

조용한 물 밑은 깊은 법이다. (201페이지)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려다 보라. (201페이지)

내가 만일 선의 정수만을 이야기한다면 단 한 사람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중략) 반면에 내가 이것저것 들추어 말한다면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와 한마디라도 빠뜨릴세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중략) 자, 이제 분명히 그대들에게 말하지만, 거룩한 일들에만 마음을 쓰려 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중략)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202페이지)

 

10. 집으로 돌아가라-동산

비록 어린 도안은 정신적인 이해력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했으나, 적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주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4페이지)

“이번에 헤어지면 아마 다시 만나기 힘들 걸세.”
“만나지 않기가 더 어려울 텐데요.” (206페이지)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207페이지)

그는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았으며, ‘절대의 하나’(一者)에 도달했기 때문에 군중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208페이지)

초연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 결과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딜 수 있었다. (209페이지)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得意而亡言) (209페이지)

사실 제자가 스승보다 월등해야만 제자는 비로소 스승이 전해주는 등불을 물려받을 수 있다. 이것은 선종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처럼 되었다. (211페이지)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 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자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 가르쳐준 백 개의 해답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 (212페이지)

본체에서 돌아온 사람은 비록 현상계에 몸담고 있지만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르다. (215페이지)

그는 이치상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현상과 본체가 하나라는 사실을 이 단계에서 직접 체험한다. 그리고 그는 현상과 본체가 둘다 절대적 영역이 아니라 상대적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216~217페이지)

지상에서 낙원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 ‘범’(凡)이 곧 ‘성’(聖)임을 알게 되는 경지로서 동산은 이렇게 묘사한다. (218페이지)

돌아갈 집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21페이지)

완전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이상인지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224페이지)

선행은 안보이게 하고 행동은 은밀히 하라.
어리석고 둔한 사람같이 보이도록.
(226페이지)

여기서 우리는 동산이 얼마나 현실적이며 치밀한 스승이었나를 알 수 있다. 그의 핏줄 속엔 노자의 심오한 통찰력은 물론 그 실제적인 노련미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226페이지)

다른 말로 해 화신(化身)은 병들어도 법신(法身)은 영원히 건강하고 원만하며 불생불멸한다는 것이다. (227페이지)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228페이지)

“나 때문에 법석떨지 마라. 중들답게 침착하라.” (228페이지)

 


11. 차별없는 참사람-임제

철저하고도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고, 남달리 뜨거운 진리에의 정열을 지녔던 사람이다. (229페이지)

틀림없이 뒷날 숱한 중생들에게 유익한 그늘을 드리워 줄 큰나무가 될 줄 압니다. (231페이지)

이것은 정말 기상천외한 발언으로 젊은 사자의 첫 포효였다. (235페이지)

“저기 젊은 친구는 깊이 참선을 하고 있는데 너는 어쩌자고 여기서 고작 공상에나 빠져 있는가?” (235페이지)

깨닫기 전의 임제는 매우 수줍음타고 신앙심이 돈독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는 솔선해서 우상파괴의 선두에 나섰다. (237페이지)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239페이지)

인간이 자신을 일시적인 한 개체로만 생각하는 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노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속안의 참사람을 깨닫고 나면 그는 비로소 눈을 뜨고 자유자재하게 된다. (239페이지)

임제가 말한 ‘참사람’(眞人)이란 개념과 에머슨(Emerson)이 말한 ‘본래의 나’ 사이엔 묘한 일치점이 있다. (240페이지)

머리로는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의 그 힘 속에 모든 사물은 공통된 기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고요한 시간에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그러나 어떻게 해서 우리의 영혼 속에 떠오르는지 그 방법을 결코 알 수 없는 존재의식은 사물과 시간, 공간, 빛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며,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241페이지)

그들은 직관에 대해선 등을 돌린 채 무가치한 ‘학습’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즉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 (242페이지)

지금 당장에 내 설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깨달아라. 그는 모양을 그릴 수도 형상을 나타낼 수도 없고, 어디에 뿌릴 내리거나 바탕을 두지도 아니하며, 집착함이 없다. 그는 매우 활달하고 빈틈이 없어서 어떤 상황에도 막힘없이 잘 대처하고, 누구에게도 구속됨 없이 환경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붙잡으려 하면 멀어지고 찾으려 하면 사라진다. (244페이지)

그는 어디서나 맑고 깨끗하며 그의 광명으로 우주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세상 만 가지 사물이 하나임(萬法一如)을 본다. (245페이지)

어떤 일에 닥쳐도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 지정한 귀인(貴人)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248페이지)

우리의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다. 그러나 억지로 있는 그대로인 체하고 억지로 독창적이려 한다면 진짜 독창성은 사라지고 본래 면목을 잃고 만다. (246~247페이지)

그리고 한 가지, 이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그대는 자기 속안에서 조차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찾는 자 바로 그 자이지 어찌어찌해서 찾아질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247페이지)

첫째 단계의 사람은 자신의 주관적인 희망이나 공포, 또는 선입견 때문에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얕은 나’의 주관적 생각들이 걷혀야만 그는 최소한 객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인간을 걸어가는 나무로 보는 일이 없게 된다. (248페이지)

스스로 들여다 보라. 말로는 다할 수 없으니. (249페이지)

‘도’와 마찬가지로 ‘참나’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다. (249페이지)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도’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251페이지)

사실상 선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알알이 녹아든 유(儒), 불(佛), 도(道) 세 가지의 종합이다.” (251페이지)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중략) 그러나 장자에게는 이 깨달음이 다소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 선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251페이지)

위대한 선사는 언제나 공안을 갖고 우리를 궁지로 마구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엄청난 고민 속에서 문득 내면의 눈(心眼)을 뜰 수 있고 그리고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리석음과 미망들이, 일단 깨닫고 나면 곧 사라질 악몽임을 알 수가 있다. (254페이지)

구도자들이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자신의 본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255페이지)

 

12. 날마다 좋은 날-운문

임제는 정말이지 얼마나 지독한가! 하지만 그보다 더 지독한 사람이 바로 운문이다. (257페이지)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설가였으며, 선사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달변가였다. (258페이지)

운문은 도대체 아무도 존경하지 않은 것 같다. (258페이지)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아마도 그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는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259페이지)

만일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이면 내가 하는 꼴을 보고 무척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59페이지)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에겐 번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하찮은 상념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썼으며, 그 결과 남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또한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는 정신생활의 비밀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260페이지)

운문은 자신의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오직 높은 지성만을 요구했다. (260페이지)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일이다. (267페이지)

모든 위대한 선사들과 마찬가지로 운문 역시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초월해 있다. (267페이지)

다시 말해 운문은 그 질문을 통해 질문자의 정신 상태와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267페이지)

“올리기 전과 내린 뒤의 ‘참본성’을 밝히기 위해섭니다.” 이 말에 대해 운문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것은 운문에겐 아주 드문 경우였다. (269페이지)

참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 (269페이지)

초월적 측면에서는 절대는 우주보다 무한히 높고 따라서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우리가 엿보거나 접근할 수조차 없다. (272페이지)

이것이 바로 질문자의 마음을 현상의 차원에서 초현상의 차원으로 이끌어올리는 운문의 독특한 방법이며, 아울러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버리는’ 좋은 예이다. (273페이지)

운문의 경우 아주 인상적인 것은 초월적인 영역으로 솟구쳐오를 때에는 독수리처럼 빙빙 돌며 오르지 않고 로케트처럼 곧장 하늘로 치솟지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온 때는 도리어 바람의 방향에 따라 그리고 인생이라는 물결, 조류, 흐름, 소용돌이, 이리저리 흔들림 등에 따르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영원한 도’가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275페이지)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가라.”(去)는 말로 대답한 적이 있다. (중략)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자유롭고 걸림없이 그대의 길을 가라. 특별히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대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라.” (276페이지)

운문은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참본성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276~277페이지)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한 말이다. (277페이지)

 

 

13. 지금 여기-법안

법안종은 선종의 다섯 종파 가운데 제일 나중에 생겨난 것으로 그리 오래 계속되진 못했지만 그 영향력은 먼 훗날까지 미쳤다. (279페이지)

다른 종문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그들에 따르면 세상 만 가지 사물이 우리에게 절대를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참사람으로 인도해 간다. (280페이지)

이러한 명상적 관조는 법안종에 흡수되어 그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282페이지)

“이제는 제가 할 말도 동이 났습니다.”
“불법이란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야.”
스승의 이 한 마디에 법안은 그 자리서 크게 깨쳤다. (284페이지)

법안 자신은 박식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단순한 지식을 경계하게 했다. 왜냐하면 실체는 바로 우리 앞에 있어서 그것은 직관을 통해 알아지는 것이지 사변이나 추리로 다가가야 오히려 눈만 흐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84페이지)

일단 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만물을 보지 않고 근본 진리의 눈, 즉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세상 만가지 물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눈을 ‘법안’(法眼)이라 하는데, 법안 자신은 이것을 ‘도안’(道眼)이라 불렀다. (286페이지)

“첫째도 둘째도 내가 바라는 거는 그대가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287페이지)

법안은 비록 놀랍도록 박식하고 전통적인 경전 가르침들에 정통하였지만 결코 학문이나 책에서 얻은 지식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맷돌로 콩을 갈 듯 모든 지식을 자신의 마음의 맷돌에 갈아 잘게 소화했던 것 같다. (287페이지)

법안의 번개 같은 대답이었다. 그러자 제자의 마음은 갑자기 열리고 빛을 보게 되었다. 기쁨에 넘쳐 환호작약하며 그는 스승에게 감사의 절을 올렸다. (292페이지)

사람들이 부처, 부처라고들 떠들지만 부처가 어디 초상화나 조각상이겠는가? 스님, 스님하고 부르지만 장삼 가사만 걸쳤다고 다 중이겠는가? (295페이지)

나는 그저 자연현상에 의지해 자나깨나 선의 진리를 표현하고 또 그 속에서 노닌다. 언어란 얼마 안 가서 그 한계를 보이나, 자연의 조화는 무궁무진하다. (296페이지)

법안종의 의의는 불교의 각 종파 중에서 이 파가 유독 유교와 가깝다는 사실에 있다. 송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며 불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던 주희(朱熹)도 한 제자 앞에서 법안종에 대해서만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296페이지)

“천지보다 앞선 한 물건이 있나니, 그것은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능히 만물의 주인이며, 사계절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296페이지)

주자(朱子)는 옛 전통에 대한 감상적인 수호자가 아니고 진지하고 개방적인 진리의 탐구자였음이 분명하다. (297페이지)

 

14. 선의 불꽃-에필로그

1) 시간과 영원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느님이다. (300페이지)

2) 일조 풍월

3) 상서로운 일

4) 놀림 당하는 재미

“어느 면에서는 자네는 그들만도 못하네.” (중략) “그 사람들은 남이 웃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자네는 딴 사람이 웃는 걸 보고 겁을 내니 말일세.” (중략) 그제서야 그는 엘리드 그라함(Aelred Graham)이 말한 ‘엄숙하지 않을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302페이지)

5) 공공연한 비밀

6) 어려운 문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303페이지)

“그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상태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를 맙시다. 다만 그 사람이 나무에 올라가기 전의 상태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304페이지)

“도를 잃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간격이 생기지 않게 할 방법이 있을까요?” (중략) “한 걸음 나아가면서 동시에 한 걸음 물러서라.” (305페이지)

7) 향상일로

어떤 점에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아래로 내려오는 길 뿐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305페이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실로 역설의 대가였다.
(중략)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중략)
모든 것을 알려거든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306페이지)

결국 노자의 말마따나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아는 것이 최고의 앎’이다. (307페이지)

8) 벙어리

“깨닫지는 못했으면서 청산유수같이 말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거야 사람들 이름을 외는 앵무새지.” (307페이지)

9) 도수와 괴물의 대결

“그 괴물이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고자 갖은 꾀를 다 부렸으나 나는 그것에 대해 듣지 않고 보지 않는 것으로 대처했다. 그의 요술이 아무리 신출귀몰한 것일지라도 언젠가는 끝장이 나기 마련이지만, 내가 듣지 않고 보지 않는 것에는 한이 없다!” (308페이지)

10) 기이한 보살

“황제께서 오셨는데 어찌 일어나지 않소?”
“진리의 자리가 좌불안석하면 온 누리의 평화가 깨지는 법.” (309페이지)

도사의 모자, 유생의 신발에 승려의 옷을 걸치니
세 집을 합쳐 큰 집 하나를 지었네 (310페이지)

11) 잃어버린 나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 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중략)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311페이지)

12) 돌아오기 위한 떠남

동시에 많은 선사들은 깨달음을 ‘집으로 돌아오는 일’로 표현한다. (311페이지)

13) 하느님 역할을 하는 것과 하느님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엘리드는 선의 정신은 하느님 역할을 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일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이란 숨겨져 있던 ‘큰 나’가 드러나면서 거죽의 ‘작은 나’가 사라지는 일이다.” (312페이지)

그래서 말하노니,
물고기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물 속에 잠기는 일,
사람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도’에 깊이 침잠하는 일. (313페이지)

13) 스즈끼 다이세츠의 선풍

나는 스즈끼 박사의 대답이 너문 잘 맞아 떨어졌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유교식으로 점잖게 행동해야 했다. (315페이지)

15) 홈즈 식 선과의 만남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놀랍게도 그곳은 아무것도 꽂혀있지 않은 빈 책장이었다! (중략) ‘무’(無)와 ‘이’(夷, 보이지 않음)를 강조하는 <도덕경>을 공부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홈즈가 손가락질해 보였던 것을 철저히 이해하게 되었다. (316페이지)

16) 선의 형이상학적 배경

선은 비록 그 대부분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형이상학적 기초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317페이지)

‘도’는 근본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무엇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말이든 다소간 ‘곡예’라고 할 수 있다. ‘도’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성질의 물건이 아니다. 모든 사람 각자가 스스로 직관을 통해 찾아야 한다. (318페이지)

‘도’는 이름이라든가 이름이 없다든가 하는 걸 초월해 있다. (318페이지)

안과 밖, 속과 거죽의 하나됨이야말로 모든 신비 중의 신비다. (318페이지)

‘도’는 신비 중의 신비이기 때문에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덤벼야 아주 무모한 짓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도 곧 신비이며, 전체의 신비를 구성하는 일원들이다. 비록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고는 하나 그것을 몸 전체로 껴안을 수는 있다. 사실상 우리는 그 신비 속에서 살고 있고, 움직이고, 존재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318~319페이지)

비록 그 심연이 무한하긴 하나 우리는 그 깊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이 평온하고 잠잠한 접근을 통해 온 영원이 우리 것이 된다. (319페이지)

17) 나귀 타기

청원(淸遠)은 선 수행엔 두 가지 병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이요,
또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으려 하는 병이다. (319페이지)

‘하느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만 찾고 있다. (319페이지)

보물을 밖에서 찾아 헤매는 것은 결국 실망만 낳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찾는 보물은 바로 그대 마음 밑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은 가짜 대용품으로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의식 깊은 곳에선 스스로 자신을 속일 수가 없다. (320페이지)

“시인은 시인 자신의 방법으로 낙원을 찾고 있으며, 탕자 또한 그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것을 찾고 있다.” (320페이지)

우리는 낙원을 찾으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낙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320페이지)

두번째 병은 훨씬 치료하기가 까다로운 병이다. (중략) 그대는 이미 밖에서 얻는 그 어떤 쾌락보다도 무한히 감미로운 속안의 평화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또다시 몽땅 잃고 만다. 가장 큰 위험이다. (320페이지)

손을 뻗쳐 그것을 잡으려 해서도 안된다. 그것을 건드려서도, 붙잡으려 애를 써도 안된다. 또한 이것을 더 감미롭게 하려거나 애써 지키려 해서도 안된다. (321페이지)

“아예 나귀탈 생각을 버려라. 그대 자신이 곧 나귀요, 온 세상이 또한 나귀다. 그러니 새삼 나귀를 탄다고 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그대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321페이지)

18) 숨겨진 것의 중요성

“유교는 현실 세계의 규범이긴 하나 결국 궁극의 이치를 제시하진 못했다. ‘반야’의 지혜야말로 우리를 속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나룻배다.” (322페이지)

“그렇다면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보여지는 마음은 무엇이오?” (323페이지)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오묘한 덕목이 수없이 많으나 모두가 예외없이 마음을 그 공동 원천으로 삼고 있다. (중략) 이미 그대의 마음 속에 다 갖추어져 있다. (324페이지)

‘큰 도’는 완전히 비어있으며 아무런 장벽도 없고, 모든 사념이나 명상 너머에 있다. (중략) 그대가 할 일은 오로지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쓰는 일이다. 그 마음을 맑게 한답시고 일부러 애쓰지 말고, 명상이나 작위(作爲)로 마음을 붙들려 하지 말라. 욕망이나 분노를 일으키지도 말고, 근심이나 걱정을 품지도 말며, 있는 그대로 행하되 애써 선을 행하거나 악이라 하여 피하려 애쓰지 말라. (중략) 그때 그대는 항상 즐거워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이다. (325페이지)

첫번째 경지를 “덕이 크니 귀신조차 흠모하도다.”라고 하였으며, 두번째 경지를 “온몸이 영적으로 변해 그 깊이를 모른다”고 하였다. (327페이지)

홀로 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 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327페이지)

인간의 내면생활은 응당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328페이지)

19) 하느님은 누가 창조했나?

20) 자기 발견의 로맨스

나에게 있어서 성자(聖者)가 된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되는 걸 뜻한다. 따라서 신성(神性)과 구원의 문제는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참나를 되찾는 문제이다. (330페이지)

우리의 전 생에는 한 편의 로맨스이다. 즉 우리의 참나를 발견해 가는 로맨스다. (330페이지)

그러니까 우리의 전 생애는 ‘진실 아닌 것에서 떠나 진실로 가는’ 순례이다. 이보다 더 의미있고 감동적인 로맨스도 없다. (331페이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331페이지)

21) 홀로 걷는 길

선사들의 가장 놀라운 기질은 그들의 독립 정신이다. (332페이지)

바깥의 어떤 힘에 의해서도 해탈은 얻어지지 않는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진리는 그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332페이지)

선사들은 (중략) 깨달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런 시련과 견디기 어려운 고난, 죽음과 같은 고독, 질식할 듯한 의혹, 고뇌에 찬 유혹의 관문들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333페이지)

22) 스승의 역할

“그나마 조계에 안 갔더라면, 잃은 적이 없는 그것을 어찌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334페이지)

23) 선사들이 즐겨 쓰는 싯귀

참사람은 파악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중략) 비록 그가 이름이 없어 부르지는 못하지만 온 마음을 다 바쳐, 온 존재를 다해 그를 사랑할 수는 있다. (중략) 그대가 하는 말, 그대가 하는 모든 행동의 의미는 그에게 있다. (336페이지)

24) 장자와 바른 눈

‘도’는 언어를 초월할 뿐 아니라 침묵까지도 초월한다고 말했다. (338페이지)

말 가운데 침묵이 있고 침묵 속에 말이 있으며, 정(靜) 속에 동(動)이 있고 동 속에 정이 있다. 모든 것은 그 시기에 맞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338페이지)

당나라 때의 위대한 선사들의 경우는 그 목소리가 아랫배 정도가 아니라 발 뒤꿈치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듯하다. (338페이지)

25) 선과 선

내 생각엔 돈오(頓悟)만이 아니라 예기치 못했던 자발적인 선(善)의 체험도 우리들을 ‘얕은 나’의 껍질에서 해방시켜 케케묵은 관념과 잼대들을 벗어던지고 곧바로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다. (339페이지)

티없이 맑은 어린애와 같은 마음의 순수한 샘에서 솟아나는 도덕성과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곧 아름다움이다. (중략) 그러한 마음 역시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일 수 있다. (341페이지)

26) 한산과 습득

둘의 마음 서로 같으니
어찌 세속의 정과 어울리랴!
우리 나이를 알고 싶은가?
황하강 맑아지는 걸 여러번 보았소. (344페이지)

진정으로 초월해 있는 사람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 풍경을 즐기기에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욕심과 목적들로 가득차 있다. (347페이지)

27) 그 사람은 누구인가?

선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절실히 깨닫는 데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진정한 자기가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진정한 자기가 ‘있고’ 하느님이 ‘있음’을 나는 안다. 양쪽이 모두 불가사의하니 누가 그들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349페이지)

하느님과 참나의 관계를 포도열매와 줄기의 관계로 설명한다. 살아있는 나무 전체는 여럿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그것은 이원적인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일원적인 것도 아니다. (349페이지)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다. (349페이지)

내 자신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 (349페이지)

28) 유교 경전에 대한 불교적 해석

29) 깨달음의 계기

그의 속안 정신이 무르익어 복숭아꽃을 보는 순간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아름다움의 근원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351페이지)

그대와 우주가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세상 만물과 그대가 전체에 있어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았을 때, 오직 그대는 그대의 꿈에서 깨어나 눈을 활짝 뜨고 모란꽃을 보게 될 것이다. (352페이지)

하느님 섬기는 일에 심취된 사람들은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에도 황홀경에 빠진다 (352페이지)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353페이지)

30) 날마다 좋은 날

깨달은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이미 철저히 죽어 있기 때문에 그에겐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살아있기 때문에 그에겐 그보다 더 좋은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중략) 어떠한 운명의 장난도 더 이상 그를 해칠 수 없다는 뜻이다. (353페이지)

이러쿵 저러쿵
헛 걱정을 안 하면
인생살이 그대로가
호시절이다. (354페이지)

인생은 가히 역설적이다. 자신의 생활에 근심걱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며, 근심걱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 남을 돌볼 수 있다. (354페이지)

“어느 날이고 어느 달이고 다 주님의 날이다. 따라서 똑같이 아름다운 날들이다.” (354페이지)

진정한 선(善)은 죽음의 순간일지라도 마음을 항상 아름답고 밝게 해준다. (중략) 아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이 밝고 생각이 깊었다. (355페이지)

나중에 그는, 의사 생활 30년에 수많은 임종을 지켜보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을 걱정해 주는 걸 보기는 처음이었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355페이지)

아내는 미소 가득한 얼굴로 우리 아이들을 하나씩 축복하며 하늘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355페이지)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요한복음) (356페이지)

“천상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이 말에 내 영혼은 드높이 날아올라 나는 슬픔조차도 잊었다. (356페이지)

 

15. 어떤 만남-덧붙임

마조, 임제, 조주, 운문 등 위대한 선사들에 대한 섬세한 통찰은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357페이지)

스즈끼는 진정 선사가 그러하듯 그자리서 막힘없이 대답했다.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오!”
(중략)
하지만 그는 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논리와 추리를 뛰어넘는, 삶과 죽음을 훌쩍 뛰어넘는 차원으로 이끌어 올렸던 것이다. (359페이지)

적어도 5년 이상 걸려야 제대로 중국선에 대한 이야기를 꾸밀 수 있을 것 같군요. 당나라 때의 선사들 것만 해도 300쪽이 넘습니다. (361페이지)

 


16.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탁월한 법률가이며 외교관이고, 가톨릭을 믿는 중국인이면서 학자인 그 (367페이지)

또한 선의 통찰과 기독교 교리를 조화시키려는 복잡하고 쓸모 없는 작업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중략) 문제는 기독교와 선을 나란히 놓고 그 둘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368페이지)

기독교인인 오선생이 선을 다루는 강점 중의 하나도 그에겐 그러한 곁다리들은 떼어 내고 선을 이야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369페이지)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370페이지)

근본적으로 불교는 부처 자신의 깨달음을 믿고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 깨달음의 체험 속에 모두가 직접 참여하고 개개인의 존재가 온 몸으로 체험하길 바란다. (중략)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전혀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 줄 뿐이다. (371페이지)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산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가는 ‘나’란 도대체 누구인가?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가는 ‘나’를 바로 보거나 잘못보거나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무엇이 존재의 근본적인 진실이며, 진실이 아닌가? (372페이지)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372페이지)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373페이지)

그보다는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 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 (374페이지)

기독교에선 신의 계시를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중략) 계시는 지금껏 우리에게 말이나 해석으로 전달되어 오고 있으며, 그 해석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늘 이러한 해석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원전에 대한 정확한 전달, 진정한 속뜻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릇된 해석을 몰아내고 처벌하는 일과 관련을 맺고 있다. (375페이지)

기독교가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체험하는 것임을 너무나 자주 무시해 왔다. (376페이지)

기독교 신자들은 대개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라는 단지 바르고 피상적일 따름인 신앙에만 만족하려고 하며 거기서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의 하나됨을 통해 이룩되는 사랑과 소망의 삶 속으로 전적으로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376페이지)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해 이 세계와 인간존재 속에 나타나 있는 신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라는 명목 속에서 안심하고 엉덩이를 비비고 앉으려는 체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안심, 자신이 세계와 창조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으며 자기의 행위가 내생에서 충분히 보상되리라는 자가당착에서 오는 안심이다. (377페이지)

기독교인과 불교도가 똑같은 정도로 선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할까? (381페이지)

기독교는 은총과 신의 선물을 골자로 하는 종교, 그러니까 신에게 완전히 귀의하는 종교다. (383페이지)

여하튼 선은 불교가 그렇듯이 구원과 깨달음을 향한 노력에 있어서 조차도 인간을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독립이라면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자기 존재의 본질과 정신의 속알맹이를 바로 보고 그 속알맹이를 온전히 꽃피워내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외적 여건과 권위로부터의 독립이다.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선이 실제로 엄청나게 권위적인 정신 문화 속에서 꽃피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갖가지 권위있는 수련을 다하고 난 후에 궁극적으로 겸허하게 내적 자유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383페이지)

반면에 기독교에서도 체험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해야만 하겠다. (383페이지)

그리스도의 신비를 신비적으로나 혹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종교적으로 교회와 함께 체험함’을 뜻한다. (383페이지)

선은 전달 가능성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384페이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말한 것처럼 선은 “생각지 말라. 그냥 보라!”이다. (387페이지)

선사와 제자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쉽게 만나게 되는 측면은 제자의 좌절, 즉 혼자만의 의지와 지성으로는 도저히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없는 데서 생가는 무능력감이다. (388페이지)

코린토전서 2장에서 성 바오로는 지혜를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언어의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 즉 이성적 사변적인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역설과 체험을 포함하고 있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지혜이다. (391페이지)

스즈끼는 에크하르트의 저 유명한 말, 즉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하느님이 나를 바라본다.”라고 하는 말과 선에서 말하는 반야가 같은 표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39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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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14:56:38 *.149.106.27
인물에 대한 정보 검색능력이 훌륭하세요.
오경웅 저자에 대한 더 많은 정보와 또 토마스머튼 신부의 정보를 얻게되어 반갑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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