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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4일 09시 34분 등록
 

 

정유정,  28 , 은행나무, 2013

 

 

--묘사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지 궁금하다. 그 표현력은 어떻게 나오나?

연습이다. 표현을 잘하는 건 기술이다. 나는 시체에 대해서 쓰면 시체를 독자의 품에 안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냄새, 촉감, 무게감까지 모두 전달되어야 하는 거다. 습작기에는 방에서 바퀴벌레가 나오면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이야기를 A4 3장, 4장이 되도록 묘사했다.  그런 묘사 속에서 내면의 이야기도 함께 묻어나는 것 같다.(yes24, 정유정 인터뷰에서)

 

‘정유정’이라는 실력파가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5년간 간호사로 근무했으며,  마흔이 넘어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색적인데,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와  <내 심장을 쏴라>로 1억 몇천만원의 현상금을 챙긴 것이 눈에 딱 띄었다. 아! 이 작가는 글 쓰는 일만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랜 준비를 했겠구나 싶으면서 얄미우리만치 정확한 조준이 감탄스러웠다. 그러고도  세 번째 작품 <7년의 밤>이 빅히트를 칠 때까지도 그녀의 책을 읽지 않았다. 스티븐 킹의 책을 가지고 습작을 했다는 말로 미루어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였는데, 네 번째 작품 <28>이 난리가 났다.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며 순항중이라는 소설의 스토리도 내겐 너무 어둡고 무겁게 느껴져서 읽을 생각을 않다가, 위 구절에 접했다. 바퀴벌레 하나를 놓고 서너 장씩 묘사 훈련을 한 사람의 책이라면, 무조건 읽어줘야 할 것 같았다.


과연 책은 기대 이상이었다. 인구 29만의 도시 “화양”에 인수공통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주민이 죽어나가고, 군인들이 몰려다니며 개를 살처분하고, 끝내 도시를 봉쇄한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그녀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고, 6시간 동안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을 만들어 놓았다. 벌레 하나를 두고 서너 장의 묘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스케일과 디테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심과 조사를 했을지 상상이 간다. 과연 그녀는 첫 초고를 쓰고 너무 불만족스러워 심각한 슬럼프에 빠졌었다는데, 그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 중심으로 썼기 때문이었단다. 조사를 너무 많이 한 탓이라고 그녀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알래스카의 개썰매 시합에서 혼자 살겠다고 개들을 늑대에게로 몰아버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수의사 서재형, 투고에 의거해 기사를 썼다가 서재형과 일련의 사태에 얽히는 신문기자 김윤주, 언제 어디서고 통성명도 없이 수컷 1위를 차지할 분위기인 119 팀장 한기준, 그녀의 예쁜 아내 박은희와 아빠의 문워킹 춤을 보며 어푸어푸 웃어대는 돌잽이 딸 한유빈, 도무지 거절이라곤 할 줄 모르는 간호사 노수진(그래서 별명이 ‘네수진’이다), 날카로운 성정의 기독교신자로 가장의 폭력을 휘두르는 외과의사 박남철, 그에게서 받은 상처로 서서히 악마로 진화해 가는 아들 박동해......


이들 중에서 한기준과 김윤주를 빼고는 다 죽는다. 아니 이 책의 주인공은 이들 외에 또 있는데 바로 “개”이다. 사설레스토랑 동물원에서 늑대 행세를 할 정도로 날렵하고 매서운 링고, 수줍음이 많지만 서재형과 황홀한 소통이 가능한 스타, 어디에 던져 놓아도 애교 만으로도 살아 남을 것 같은 쿠키...... 이들도 모두 죽는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저마다 “치밀하고 압도적인 서사와 숨 쉴 틈 없이 달려가는 문장과 폭발하는 이야기 (책 뒷날개에서)” 속에서, 내게 소설의 위력과 존재감을 각성시키며 죽어 간다.


작가는 싸이코패스에게 관심이 많다고 하더니 과연 박동해의 심리묘사와 행보는 소름끼칠 만큼 리얼하다. 느슨한 장면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들이 엄마를 살해해 가며 반쯤 불태운 집에서, 아버지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불도 안 켜고 사냥총을 든 채 기다리던  아들과  맞닥뜨린 장면은  압권이다.


“손 바짝 들고 올라가.”

“네, 아버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네, 아빠.”


자기역시 가방 가득히 화염병을 넣어갖고 왔으며, 미처 생각지 못한 그림 앞에서 짱구를 굴려가며 이죽거리는 동해.


“열을 셀 동안 결정해라. 내 손에 죽을 것인지, 스스로 죽을 것인지.”


총을 겨눈 채로 이미 만들어 놓은 올가미를 가리키며 “일곱, 여덟...”을 세어 가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러지 마요. 10초 가지고는 오줌 누고 털기도 바쁘다고요. 씨발.


아버지 드리려고, 십수 년 동안 꿈속에서 해왔던 그대로 해드리려고, 주머니에 작게 만들어 놓은 화염병을 집어던질 궁리가 끝나 느물거리는 동해. 그 와중에 스타를 죽인 원수를 갚으려 잠복하던 링고가 동해를 물고 늘어지자 순간적으로 “동해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잠시 아버지로 돌아가는 아버지. 그러나 끝내 그는 총을 쏠 기회를 쓰지 않았다. 총구를 겨냥만 할 뿐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링고의 장갑차 같은 어깨에 들이받혀 활강하듯 연못으로 날아가 쑤셔 박힌 동해의 목 안에서 터지는 비명 역시 “아빠”였으니..... 인간의 폭력과 상처, 뒤틀린 인연을  미묘하게 그려낸 명장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저주받은 영혼과 암울한 재난이 빚어내는 핏빛 허무만 자욱한 것은 아니다. 배경과 설정이 그랬기에 사람과 사람, 사람과 개, 개와 개 사이에 흐르는 전류는 더욱 애틋하고 짜릿하여, 서로 어깨를 빌려주고 사는 것의 아름다움이 눈물겹게 빛났다. 모든 것이 나자빠지는 상황이기에 살아야 한다는, 혹은 살려내야 한다는 절대명제가 부각되는 것을 보며, 비로소 작가가 이처럼 극적인 설정을 가져 온 이유를 알았다.


대단한 책이었다. 구성과 캐릭터, 문장이 버릴 곳이 하나도 없지만, 나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을 최고로 치고 싶다. 사방에서 모여 든 인물들을 재료로 하여 완벽한 손놀림으로 구성한 한 판의 퍼즐.   황당한 허구같이 보이는 과격한 설정 속에 숨어, 100% 리얼을 이야기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구제역 때 생매장되는 돼지떼의 비명을 들으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데, 동물과의 관계에 대해 잊지못할 문제제기를 받았다. 인수공통 전염병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가 비슷한 생체인데 말이다. 책을 읽고 저녁을 차리는데, 말복이라고 특별히 준비한 갈비살의 선홍색이 순간 섬찟했다.


글쓰기를 통해 최고의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글쓰기를 통한 삶의 혁명' 카페 --> http://cafe.naver.com/writingsu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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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6 11:23:01 *.124.106.136

정유정 작가의 소설은 워낙 좋아하는 터라 주제넘게 댓글 남겨 봅니다.

 

정작가의 소설은 다 읽었고 전작이었던 '7년의 밤'에서는 해외 유명작가 이상의 흡인력을 보여주었기에 신작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예약판매로 사서 읽었고 역시 좋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전작을 뛰어 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만...   혹시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7년의 밤'을 읽어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그 책은 정말 재밌고 잘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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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 14:19:56 *.209.223.59

어이쿠!  댓글을 이제야 보았네요.

대신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예!  아직 '7년의 밤'을 읽지 않았고, 반드시 읽어 보겠습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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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16:14:59 *.124.106.136

ㅎㅎㅎ 아직 안 읽으셨군요. 읽으셔야 합니다. 류승룡이 '7년의 밤' 에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책의 느낌을 영화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는지 의문입니다만, 어쨌든 좋은 컨텐츠의 새로운 재생은 언제나 환영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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