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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0일 11시 13분 등록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박지원 지음, 고미숙・길진숙・김풍기 엮고 옮김, 북드라망, 2014.


1. 저자에 대하여


■ 박 지 원 朴趾源 ■

 

 

•출생・사망

 

 

1737.2.5. 인시 한양 출생 / 1805.10.20. 별세

 

 

•발 자 취

……

인순고식(因恂故息) 구차미봉(苟且彌縫)

-만년에 쓴 병풍의 글귀-

 

천하 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

……

 

 

1752(16세). 이보천 딸과 결혼.

1754(18세). 처삼촌 귀양 후 사망. 정신적인 방황

1759(23세). 어머니 사망, 장녀 출생

1760(24세). 조부 사망

1765(29세). 유언호 등과 금강산 일대 유람. <총석정관일출> 씀

1766(30세). 장남 출생

1767(31세). 부친 사망

1768(32세). 백탐 근처로 이사

1770(34세). 감시 시험에 장원급제하였으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음

1771(35세). 벗들과 어울려 송도, 평양, 묘향산, 속리산 등 유람. 황해도 금천 연암골에 정착           하기로 하고 호를 ‘연암’이라 지음.

1772(36세). 가족을 처가로 보내고 전의감동에 살면서 벗들과 교유함

 1777(41세). 장인 사망.

 1778(42세).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사. 형수 사망

1780(44세). 홍국영 실각 후 서울로 귀환. 삼종형 박명원의 사절단 일행으로 북경 동행.           기행문집인 《열하일기》저술. 차남 출생.

1783(47세). 그의 가장 친한 벗 홍대용 사망.

1786(50세). 유언호의 천거와 왕의 특명으로 선공감 감역 임명.

1787(51세). 부인 전주 이씨 사망. 큰 형 사망.

1788(52세). 장녀와 맏며느리 사망. 1788년부터 열하일기와 연암에 대한 비방이 일어나 위     기에 처함(오랑캐의 연호를 사용한 원고이다/연암이 오랑캐의 옷을 입고 백성을 다스린다)

1789(53세). 평시서 주부로 승진

1790(54세). 여러 벼슬자리를 여러 이유로 거부하고 연암골 가까운 곳에 관직을 수행함

1791(55세).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을 역임.

1793(57세). 문체반정의 주동자로 연암과 열하일기가 지목됨

1797.(61세). 면천군수를 지냄.

1799(63세). 왕명을 받아 농서《과농소초》를 집필.

1800(66세). 양양부사를 지냄.

1805(69세)

 

 

박지원.jpg

 

朴趾源의 초상

<박지원의 손자 박주수의 그림

 

•저    서

 

연암집(燕巖集)》《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마장전(馬駔傳)》《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양반전(兩班傳)》《김신선전》《광문자전》《우상전》《봉산학자전》

《민옹전(閔翁傳)》《역학대도전(학문을 팔아먹은 큰 도둑놈전)》

 

 


■ 박지원,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뜯어보다


연암은 어떤 글자가 가리키는 대상의 생생한 움직임과 미묘한 내적 본질을 꿰뚫어볼 때 비로소 그 글자를 아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열하일기 속의 사물에 대한 묘사는 24시간 카메라가 돌아가듯 생생하며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 전하고자 하는 바 역시 명확하고 명쾌하다. 그의 글쓰기가 완결되는데 있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의 몸에 체득된 사상이 당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에게 내재한 가치체계를 통해, 그는 사물을 보고 사물에 대해 인식하며 사물과 연관된 또 다른 관계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시각, 그의 프레임들은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그의 삶 속에 스며들어 그의 사고를 정립시킨 그의 세상을 찾아본다.


1) 눈(目) - 세상을 보다


 박지원은 1737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8세기 조선 후기, 연암은 영・정조 시대를 살아 내었다. ‘살아 내다’라고 말하는 것은, 수많은 역사서에서 기록하듯이 그 시기가 혼란과 변화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혼란의 흐름 속에서 연암이 보던 세상은 어떤 것일까. 연암의 집안은 당대 명문 양반인 반남(潘南) 박씨 가문이었으며 청빈과 청렴결백을 생활화하였고 연암 또한 이러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와 함께 재산 축적에 관심이 없는 할아버지와 별다른 벼슬을 하지 못한 아버지였기에 집안 형편은 좋지 못하였다. 연암은 5세부터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서는 장인으로부터 맹자를 배웠고 외삼촌 이양천에게 사마천의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부터 이들에게서 배운 사상과 학문은 연암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태를 미워하였으며, 이용후생(利用厚生)학, 경세제국(經世濟國)학, 명물도수(名物度數)학 등의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점, 그리하여 잘못된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학문이 몹시 거칠고 조잡한 점을 병통으로 여기며 자신의 사상을 수립해 나가고 있었다.


2) 귀(耳) - 세상을 듣다


 연암은 훤칠한 풍채를 가지고 있고 목소리 또한 우렁찼다고 한다. 연암의 우렁찬 목소리에 귀신붙은 여자의 병이 나았다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고 나아가 연암의 사상의학적으로 태양인의 기질이라는 분석까지 내놓고 있다. 이렇게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고매하였던 연암은 명예와 이익이 몸을 더럽힐까봐 극도로 경계하고 삼갔으며 한양 근교의 산사를 찾아다니며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고 담헌 홍대용, 석치 정철조, 강산 이서구와 교류하였다.

 언뜻 우람한 풍채와 호탕한 기개, 사람들과의 사귐을 좋아하는 연암에게 있어 세상은 무엇하나 거칠 것 없어 보인다. 열하일기 속, 무수한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유쾌한 기개와 더불어 익살과 해학의 인자를 가지고 있고 천지사방을 유람하는 이에게서는 끊임없는 에너지가 흘러 나온다. 그런 사람은 이미 오래 전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전진만을 할 듯하다.

 그런데, 연암이 보는 것에서 나아가 ‘듣는’ 삶으로서의 여정이 이미 어린 날부터 시작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연암의 저서 《민옹전》에 “지난 계유・갑술년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에 일고여덟 살이었다. 병에 오랫동안 시달리어 음악, 서화 혹은 칼, 거문고, 골동 등 모든 잡물을 제법 좋아했을 뿐더러 더욱이 지나는 손님을 모아놓고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옛이야기로써 마음을 여러 모로 위안시켰으나, 그 깊숙이 스며든 울적한 증세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이 무렵의 연암은  사나흘씩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거식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였고 스스로 기록하였듯이 밤새워 가며 머슴부터 기인까지, 여러 부류의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이처럼 연암은 울적한 병증을 이기고자 연암은 거리로 나갔고 익살과 해학을 통해 자신의 병을 치유하고자 노력했으니 그가 이처럼 거리에서 만난 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들었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연암의 소설의 소재가 되어 있다. 이때 쓴 글이 《마장전》《예덕선생전》《민옹전》《양반전》《김신선전》《광문자전》《우상전》《역학대도전(학문을 팔아먹은 큰 도둑놈전)》《봉산학자전》의 9가지 전이다.

 연암은 젊을 때부터 벗들과 모여 글 짓고 술 마시며 질탕하게 노는 일이 쾌 있어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연암이 번화함을 좋아하며 몸 단속하기를 싫어한다고 평하였으나 연암은 타고난 성품이 물욕이 없어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히 앉아 이치를 궁구하고 관찰하기를 좋아하였다.또한, 연암은 노론으로서 소론인 이광려와의 친분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당파가 심한 그 시기, 이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할지언정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라 적확한 비판과 자신과의 공감, 사람됨을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열린 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코(鼻) - 세상을 욕망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의 자기 아버지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에 의하면 점쟁이에게 박지원의 사주로 길흉을 물은 적이 있는데, 연암의 ‘사주는 마갈궁(磨蝎宮)으로 반고와 사마천과 같은 문장을 타고났지만 까닭없이 비방을 당한다’라고 했다 한다. 과연 그 점쟁이가 영험하였는지 연암은 그의 ‘문장’으로 세상으로부터 온갖 비난과 질시를 받게 된다.

 가장 크게 나타난 사건은 한 국가의 왕으로부터 이른바 ‘찍혔다’라고 할 수 있는 문체반정 사건이다. 정조가 이덕무가 지은 <왜적 방비에 대해 논함>이란 글을 보고 연암의 문체를 본떴다라고 할 정도로 연암의 문장은 나름의 특성과 개성을 가지고 당대의 문장가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당시의 지배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데 있어 글쓰기가 하나의 역할을 한다면 그의 대표적인 선두에 연암이 있고 대표적인 글로 열하일기가 지목되었다. 이미 10년 전에 성행한 열하일기가 문제의 근원지로 최종 낙찰되면서 이에 대한 사대부들의 평가는 엇갈리게 된다. 그것은 오히려 이렇게 왕으로부터의 지목이 글에 대한 은근한 비호일지도 모른다며 당시에 그러했던 것처럼 문책에 따른 반성글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다. 이에 연암은 당시의 문인들이 일신을 위해 고문주의로 회귀하여 글을 지은 것과는 달리,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았다. 

 연암은 과거 시험에 일등으로 뽑히기도 하고 그의 문장에 대한 칭송으로 시험을 주관하는 자는 연암을 과거시험에 합격시키고자 하였으나, 연암은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거나 붓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시험장을 나오고는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연암을 어리석다며 비웃기도 하였지만 이는 연암이 과거 보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연암이 생애를 통해 전혀 관직에서의 생활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벗 유언호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천거한 덕분으로 선공감 감역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쉰 살이었다. 또한 선공감 감역은 연암의 이용후생과 직접 관계되는 직책으로 연암은 이후에도 안의 현감에 임명되는 듯 몇 번의 벼슬을 맡게 된다. 연암은 엄정한 판결로 송사를 처리하여 백성들 간에 분쟁을 일삼던 풍조를 바로잡고, 아전들의 상습적인 관곡 횡령을 근절했다. 관아에까지 침범하던 도적을 퇴치하고 흉년에 굶주린 고을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녹봉을 털기도 하는 등 온 힘을 다했다. 특히 청나라의 수레와 벽돌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던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 관공서 전각을 세울 때나 창고를 세울 때 중국의 벽돌 제도를 써서 벽돌을 손수 굽고 쌓고 하기도 하였다. 즉, 쉰 살의 나이에 수락한 그의 벼슬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념을 실제로 적용하는 기회였다. 실제로 그는 욕심으로 가득하여 큰 자리에 연연한다거나 이치에 맞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고 진정 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에 힘쓰는 벼슬아치였다.


4) 이(口) - 세상에 내뱉다


 연암의 약력을 정리하다 보니, 유독 가족이나 벗들의 사망이 많았다. 연암이 69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날까지, 조부와 부모, 형님과 형수님, 아내와 자식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가 사랑하는 벗들까지 연암에 앞서 세상을 떠났고 연암은 이를 지켜보며 통곡해 했다. 연암은 아버지가 병환이 위중할 때 칼로 왼손 중지를 베어 약에 자신의 피를 타서 올렸을 정도였다. 이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벗들을 보내며 통곡할 때마다 연암은 묘비명을 짓거나 시를 지으며 마음을 달래었다.

 많은 소설들을 쓰며 기존의 부조리한 사회질서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풍자하였고, 만민이 평등하여 직업에 귀천이 없음을 보여주었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상업과 공업이 활성화되어야 함을 피력하기도 하는 등, 연암은 거침없이 그의 사상과 가치를 글로써 풀어 내었다. 당시 선비인 체하면서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자를 풍자하기 위해서 지은 특히 <역학대도전>은 실제 모델인 자가 죽자 박지원은 스스로 남을 비판하여 명성을 얻은 자가 있지만 자신이 그런 명성을 얻을 필요가 없다하며 그 글을 불태워버렸다 한다.

 팔촌형인 금성도위 박명원이 중국 사행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연암을 개인 수행원으로 참여케 하여 연암은 대망하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얻게 된다. 6개월 여의 여정 동안 열하를 여행하면서 열하일기를 기록하였고, 돌아와서, 다시 연암 골짜기에 들어가 《열하일기》 25편을 지었다. 또한 연암은 정조의 명으로 《과농소초》의 농서를 지었으며 여기에는 청나라의 발달한 기구, 수리의 방식과 기재 등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처럼 연암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끊임없이 내어 놓으며 글쓰기를 주저하거나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벼슬에 대한 큰 뜻은 없으나 세상의 변화에 대한 큰 뜻을 가진 이로써 변화와 개혁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글로써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5) 얼굴 - 세상과 소통하다


  ‘연암’은 스스로가 부여한 호칭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닉네임이다. 흔히, 닉네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목표, 자신을 대변하거나 좋아하는 것을 사용하게 된다. ‘연암’이라 자호한 것은 연암골에 정착하여 살고자 하면서이다.

 박지원은 벼슬에 큰 뜻이 없었고, 부를 위해 정진하지도 않았다. 늘, 길도 언덕도 아닌 사이의 그 경계점에 머물러 있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인 것처럼 세상을 살던 연암에게 있어 유일한 세상과의 호흡, 소통처는 ‘연암골’이 아닌가 한다. 연암은 이 곳을 터전으로 하여 유언호,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제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더 심화해 나갔다. 이들 중 몇은 서얼이었으나 이들은 당파나 신분의 차이에 개의치 않고 서로 진정한 우정을 추구했다. 문학에 대한 논의뿐만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연암의 경우 이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기도 했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자 하는 '북학'(北學)을 지향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연암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이라는 문하생을 두어 그의 뜻을 나누고 함께 했다. 이들이 연암과 그들 벗들의 뜻들을 계속 이어갈 터였다. 나아가 이들 또한 문장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이는 연암의 덕이 클 터이다. 연암이 세상과의 유대를 거부한 채 살아가는 듯이 보였으나 그의 벗들과 제자들을 통해 경계 저 멀리에 머물지 않고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고미숙/박지원 원저,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김지용,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한양대학교 출판원, 1994.

•박종채 저/고미숙 역, 나의 아버지 박지원, 돌베게, 1998.

•박지원 저/김혈조 역,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학고재, 1997.

2. 내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上

개정신판 머리말

→ 머리말을 먼저 읽지 말았어야 했을까. 박지원의 글은 학창 시절 양반전이나 호질 등과 같은 그의 소설을 통해 접했고, 그때에도 그의 작품과 그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입식으로 들었다. 일기로서의 박지원의 문장과 사유는 어떠할까라는 상상을 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다가 머리말에서 이미 읽어야 하는 방향을 알게 되고 말았다. 편역자들의 글들을 읽어 버려 이 글대로의 박지원의 글을 찾을까, 아니면 도대체 이런 부분에서 어떻게 그들이 말한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지?라며 반작용이 생길까.


p9~10 『열하일기』에는 이런 식의 유머가 도처에 흘러넘친다. 그리고 그의 유머에는 경계가 없다. 예측불허의 돌발적 상황에선 말할 것도 없고, 중후한 어조로 벽돌, 수레, 온돌 등을 통해 ‘이용후생’을 설파할 때, 화려한 은유의 퍼레이드로 애상적 분위기를 고조시킬 때, 연암이 가는 곳에는 항상 유머가 수반된다. 동서고금의 여행기 가운데 이토록 유머가 범람하는 텍스트는 결코 없으리라. 그 유명한 『돈키호테』도 연암의 유머 앞에선 무릎을 꿇을 정도니.

    그리고 이미 앞에서도 음미했듯이, 그의 유머에는 언제나 기존의 사유를 뒤흔드는 전복적 상상력이 내장되어 있다. 즉 한참을 배꼽잡고 웃다 보면, 어느새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배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곤 한다. 그런 점에서 당대 보수적인 문장가들을 가장 많이 자극한 것도, 그리하여 가장 많이 삭제당한 것도 이런 대목이라는 점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말하자면 『열하일기』에 있어 유머는 단순한 웃음을 넘어 낡은 습속과 익숙한 사유를 비트는 고도의 글쓰기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우정을 나누는 최고의 기술이기도 했다.

p12 여행 막바지, 연암은 자신이 던진 화두에 대해 하나의 답을 찾아낸다. 고북구 장성을 지나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강행군을 할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견마잡이 창대가 발을 다쳐 뒷수레에 실려오고 연암이 홀로 말을 타고 물을 건너는데, 그야말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이었다. 폭우로 범람한 강을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건너면서 연암은 ‘이제야 비로소 도를 깨쳤노라고’ 소리친다. 그가 말하는 도는 명심이다. 冥心. 말 그대로 ‘어두운 마음’이다. 도가 어두운 마음이라니, 웬 선문답? 도를 깨치면 눈이 밝아져 사방천지가 훤히 드러나야지 다시 깜깜해지다니 말이 되는가? 하지만 이게 바로 연암식 패러독스다. 그가 말하는 명심이란 ‘이목耳目의 누累’, 곧 분별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분별을 내려놓는 그 순간, 목전에 펼쳐지는 깊은 적막과 평정, 연암은 그것을 ‘눈과 귀’가 사라지는 ‘어둠’으로 표현한 것이다.

p13 연암의 문장은 매끄럽다. 막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펄펄 살아 있어, 잡았는가 싶으면 순식간에 손아귀를 벗어난다.


일러두기

p19 1. 『열하일기』판본은 크게 필사본과 활자본 두 종류가 있다. 필사본에는 연암 박지원의 수택본手澤本으로 불리는 충남대본을 비롯하여 규장각본, 전남대본, 대만본 등이 있다. 활자본에는 육당 최남선이 편집하여 간행한 광문회본, 박영철이 편집하여 간행한 박영철본이 있다. 초고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은 박지원의 시선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해, 활자본은 표현이나 문체 면에서 양반의 체면을 손상시키거나 당시의 시대적 조류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 필사본과 활자본의 차이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후 꾸준히 글을 쓰고 퇴고하는 과정에서부터 그와 같은 차이가 나타났을 것으로 본다. 이 편역본에서는 영인본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박영철본’을 대본으로 하였다.

→ 연암이 살던 당시의 언어를 읽어 내기 쉽진 않았을 테지만, 그 날것의 문장을 보고 싶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의 손을 탔을 박지원의 저서가 타인에 의해 수정되었으리란 것은 안타깝다. 오타나 문맥의 이유가 아니라 권력자에 의해, 지배적인 관습에 반한다는 이유로 무심히 뭉개져버려야 했을 글들과 박지원의 사고들. 나아가 18세기에도 안타깝고 황당스러운 일들이 지금, 이 시대, 여기에서도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안타까움을 뛰어넘어 절망스럽다.


연암 박지원 약전

p30 젊은 날의 특이한 사건이라면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 연암처럼 ‘양기충만’한 인물이, 그것도 한참 팔팔할 나이에 웬 우울증이냐고? 그게 참 모를 일이다. 좌우지간 어느 날 우울증이 그의 청춘을 덮쳤고, 그때부터 그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꿀꿀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병을 치유하기 위해 연암은 거리로 나섰다. 거기서 분뇨 장수, 이야기꾼, 도사, 건달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그들의 기이한 인생 역정에 귀를 기울였고, 그러면서 그들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방경각외전』이다. 그는 당시 선비들의 무능과 부패에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오죽하면 『양반전』같은 과격한 작품을 썼겠는가. 그런 썩어 빠진 양반들에 비하면, 비록 신분이 미천하고 험궂은 일에 종사하긴 하지만, ‘거리의 친구’들은 훨씬 기상이 맑고 드높았다. 그때 이후 연암은 뜻만 맞으면 이 세상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질병이 가져다 준 멋진 선물!

→ 흔히 우울증이라면 집 안에 갇혀 어둠 속에서 지내려니 생각하게 되는데, 저자 말처럼 양기충만한 이의 우울증이어서 바깥 세상에서의 양기로서 치료가 될 수 있었나 보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울분들을 글로써 펼치니 그에게는 얘기할 통로가 있었던 셈이다.

p32 삼십대 중반 즈음, 연암은 식구들을 처가로 보낸 뒤 전의감등에 혼자 기거하면서 이 모임을 이끌었다. 연암과 그의 친구들은 매일 밤 모여 한곳에선 풍류를, 다른 한편에선 명상을, 또 한쪽에선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모임을 이끌었다. 북벌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북학의 기치를 내건 것도, 고문의 매너리즘을 벗어나 ‘지금, 여기’의 살아 숨쉬는 글쓰기를 실험한 것도 다 이 향연의 선물이었다. 벗이 있었기에 진정 행복했고, 벗이 있었기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때, 그들을 사로잡은 윤리적 강령은 오직 하나, “벗이란 또 다른 ‘나’다.”

→ 같은 것을 바라보며 길을 벗이 있다는 것.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p33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1780년, 울울한 심정에 어디론가 떠나기를 염원하던 차, 삼종형 박명원이 건륭 황제의 만수절 축하 사절로 중국으로 가게 되면서 연암을 동반하기로 한 것이다. 그의 생에 가장 큰 행운이자 18세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인 ‘중국 여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장장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의 기록이 바로 그를 불후의 문장가로 만들어 준 『열하일기』다. 책을 내자, 천고에 드문 문장이라며 열광하는 ‘폐인’들도 많았지만, 책을 불태워 버려야 한다며 난리를 떠는 ‘안티팬’들도 적지 않았다. 급기야 1792년, 정조는 문체반정을 주도하면서 문제를 어지럽힌 장본인으로 『열하일기』를 지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는 그저 중원천지에서 마주친 ‘말과 사물’들의 웅성거림을 세상에 전달한 전령사였을 뿐인 것을.

→ 이미 우리나라의 거리에서 풍경을 잡아내었던 연암이었기에 이 여행에서의 연암의 기록도 있을 수 있었을 터.

P33 1805년, 중풍이 찾아오자, 연암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약을 물리친 다음, 친구들을 불러 조촐한 술상을 차려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언은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것뿐. 그때 그의 나이 69세였다.


도강록

P37 도강록 서문의 의미(편역자) : 후삼경자라는 표현은 실로 교묘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핵심은 ‘후後’라는 표현이다. ‘숭정 이후’라는 의미를 연상시킴으로써 북벌론자들의 예봉을 피하면서, 다른 한편, ‘숭정’을 과감히 생략해 버림으로써 청 문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충분히 담아 내고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열하일기』의 첫 페이지를 연호 표기에 대한 변으로 시작함으로써 당시의 이념적 대치 상황을 한눈에 압축해서 보여 준다는 것, 과연 연암답지 않은가!

→ 유쾌. 허를 찌르는 반전. 재미있는 언어유희. 내 할말을 어떤 식으로든 내뱉는 것. 그것이 작가의 글쓰기.

P43 연암협은 ‘제비바위’라는 뜻으로, 개성에서 30여리 떨어진 두메산골이다. 연암이 젊은 시절 팔도를 유람하던 중 친구 백동수의 안내로 발견하게 된 곳이다. 고려 때까지는 목은 이색과 익재 이제현 등 명문장가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당시에는 화전민만 약초를 캐고 숯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연암은 이곳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기로 마음먹었고, 그때부터 ‘연암’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렇지만, 연암이 이곳에 본격적으로 터를 잡게 된 것은 40대에 접어들면서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홍국영은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는데, 마침내 그 그물망이 연암에게까지 조여들게 되었다. 그러자 벗들의 권유로 연암협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다. 연암서당은 그곳에 있던 서재를 이른다.

→ 숨어 들다...글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기질의 그가, 몸을 움츠리고 있었어야 할 상황과 장소. 때문에 그 곳은 그 얼마나 많은 사유가 이루어졌을 장소인가.

P44~45 바람에 노래와 축(중국 악기의 하나로 열세 줄의 현악기)을 연주하여 그날의 감상을 토로했을 뿐인데도 이 글을 지은 사람은 ‘그 사람이 먼 곳에 살았기 때문에 제시간에 오지 못했다’고 했다. 교묘하기도 하여라, 먼 곳에 산다는 말이여. 그 사람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일 테고, 그 약속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큰 약속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약속에 임하여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는단 말인가.

P47~49 "자네, 길道을 아는가“. 수역 홍명복에게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시온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먼저 언덕에 오른다(『시경』 「대아」 ‘황의’시의 구절. 주가가 언덕의 의미를 도의 지극한 경지로 해석)는 말씀을 이르시는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란 말이지.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무슨 뜻인지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한 법이지(『서경』「대우모」).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의 한 획을 변증하면서 선 하나를 가지고 가르쳤다네. 그런데도 그 미세한 부분을 다 변증하지 못해 ‘빛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경계’라고 말했어. 이건 바로, 부처가 말한 ‘닿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는다’는 그 경지일세.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 그‘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옛날 정자산 같은 사람이라야 될걸.”

→ 이것과 저것. 그것. 길이라는 것이 저 멀리에 있다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가까운 곳에서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는 것. 다만, 그렇게 가까이에 있기에 찾기 어렵고 쉽사리 무시되는 것.

   물과 언덕 사이의 길은

P62 나는 우리 서울의 도봉산과 삼각산이 금강산보다 낫다고 생각해 왔다. 무엇 때문인가. 금강산은 그 골짜기가 이른 바 1만 2천 봉이나 된다. 기이하면서도 험준하고 웅장하면서도 깊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모습이 마치 짐승이 끄는 듯 날짐승들이 날아오르는 듯 신선은 솟구쳐 오르고 부처는 가부좌를 튼 듯하다. 어둑하면서도 빽빽하며  아득하면서도 아스라한 것이 귀신의 굴로 들어가는 듯하다. 나는 예전에 신원발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본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깊고 푸른 가을, 하늘에 석양이 비낄 무렵이었다. 하지만 하늘에 닿을 듯한 빼어난 빛과 몸에서 솟아나는 윤기나는 자태가 없었다. 하여, 금강산을 위하여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금강산을 가보지 않은 나로선 금강산 일반이천 봉우리에 대한 예찬이 각인되어 금강산의 자태가 없다는 말에 놀란다. 하긴, 어디든 내 눈과 마음 속에 들 일이다. 미의 가치는 역시 개인에게 다르다.

P67 우리나라에서 중국 물건의 값이 날로 오르는 것은 실로 이 무리들 때문이다. 그런데도 온 나라가 도무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책 없이 역관만 나무란다. 역관들도 이들 장사꾼에게 권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다.

→ 빼어난 문장과 더불어 연암은 여행 곳곳의 생활과 풍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문제점을 예리하게 짚어 낸다.

P69 그 모양새가 어디로 보나 시골 티라곤 조금도 없다. 예전에 나의 벗 홍대용에게 중국 문물의 거대한 규모와 세밀한 수법에 대해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중국의 동쪽 끝 촌구석도 이 정돈데 도회지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하니 기가 팍 죽는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등줄기가 후끈거린다. 순간 나는 통렬히 반성한다.

    “이것도 남을 시기하는 마음이지. 난 본래 천성이 담박해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는데…. 이제 다른 나라에 한 발을 들여놓았을 뿐, 아직 이 나라의 만분의 일도 못 보았는데 벌써 이런 그릇된 마음이 일다니. 대체 왜? 아마도 내 견문이 좁은 탓일 게다. 만일 부처님의 밝은 눈으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두루 살핀다면 무엇이든 다 평등해 보일 테지. 모든 게 평등하면 시기와 부러움이란 절로 없어질 테고.‘

→ 어쩌면 여행은 차이의 기록일지 모른다. 내게 익숙한 것들과 다른 것에 대해 느끼는 것. 그리고 당연 그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 모든 것들은, 차이들은, 내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각성시켜 주는 메시지 아닐까.

P71~72 예단을 나눠 줄 때면 전례를 따르는 법이다. 그런데 봉황성의 간사한 되놈들은 반드시 명목을 붙여 숫자를 덧보탠다. 이에 대한 처리가 잘 되고 못 되는 건 전적으로 상판사의 마두에게 달려 있다. 만일 그가 풋내기라든지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자들과 다투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달라는 대로 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에는 벌써 전례가 된다. 그러니 반드시 다투어야만 한다. 사신들은 이러한 사리를 모르고 그저 책문에 들어가기에만 급급해서 늘상 역관을 재촉한다. 그러면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하게 되어, 그 폐단의 유래가 오래되었다.

→ 앞서도 역관만을 나무란다는 지적을 했다. 이역만리,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낯선 언어와 낯선 언어의 만남. 역관들의 고생이 처절히 느껴진다.

P73~74 일단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이제 고국의 소식은 끊어지고 만다. 서글프게 동쪽 하늘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들어갔다.

→ 잠시 다녀오는 것임에도 내 나라를 떠나는 것은 애달픈 느낌이 드는 것일까.

P83 중국인들에는 이른바 ‘외기’와 ‘강의’가 두 가지가 있다. 처음 공부를 할 때 음과 뜻을 함께 배우는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르다.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그저 사서의 문장을 입으로 외기만 한다. 외는 것이 능숙해지면 그 다음에 스승에게 뜻을 배우는데 이를 ‘강의’라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강의를 듣지 못한다 해도 입으로 왼 문장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그러고 보면,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도 중국말이 가장 쉽다는 건 나름 일리 있는 말이다.

P85 천천히 걸어서 문을 나섰다. 부유함이 비록 연경이라 한들 이보다 더할까 싶었다. 중국이 이처럼 번화하다는 건 참으로 뜻밖이다. 좌우로 늘어선 점방들은 휘황찬란하다. 아로새긴 창문, 비단으로 잘 꾸민 문, 그림을 그려 넣은 기둥, 붉게 칠한 난간, 푸른 빛 주련柱聯, 황금빛 현판 등. 그 안에 펼쳐 놓은 것은 모두 중국에서 나오는 진기한 물건들이다. 국경 지방 시골 오지에도 이처럼 정밀하고 우아한 감식안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P90~91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붕에는 진흙을 두툼하게 펴놓기 때문에 위가 무거워진다. 담벽은 벽돌로 쌓지 않기 때문에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어서 아래는 텅 비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커서 지나치게 휘어지고, 휘어지기 때문에 빈 공간이 저절로 많아진다. 그러나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진흙이 무겁게 내리누리니 기둥이 휘어지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진흙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기와 비늘의 층이 뒤로 물러나면서 틈새가 생긴다. 결국 바람이 들어오고 비가 샌다. 참새가 구멍을 뚫고 쥐가 숨어 살게 되며, 뱀이 똬리를 틀고 고양이가 헤집고 다니는 근심을 어쩌지 못하게 된다.

→ 흙벽이 따스하고 여름엔 시원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연암의 글을 읽어서야 아, 그렇구나 한다.

p93~94 당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동원해서 이 총알만한 작은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황망히 군사를 돌이켰다는 건 의심스러운 일인데도 김부식은 옛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는다는 점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중국 역사서에서 한 차례 뽑아 베껴서 그것을 사실로 만들었다. 게다가 유공권의 소설을 인용하여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까지 입증했다. 그러나 『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어느 곳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 중국 측이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때문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들을 단 한마디도 감히 쓰지 못하는 바람에 그게 신빙성이 있든 없든 기록에는 모두 빠져 버렸다.

→ 나의 지식은, 지식이라기보다 기억이다. 학창시절 수업 시간에 배웠던 그대로. 조금 만아 있는 파편을 끼워맞춰 김부식은 사대사상에 젖어 있던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삼국사기 곳곳에 그러한 의식이 묻어난다고 한 것 같다.

p94~95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안다. 기자가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는다. 그러니 만일 봉황성이 바로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옛 땅이며, 숙신・예・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한다. 또 오라・영고탑・후춘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걸 모른다. 아! 후세 사람들이 땅의 경계를 자세히 밝히지 않고 제멋대로 한사군을 죄다 압록강 안쪽에 몰아 넣어 견강부회하면서 구차하게 배치해 놓았다. 그러고 나서, 그 안에서 패수浿水를 찾으니, 어떤 사람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옛 땅은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사적에 따라 패수 위치는 앞으로 당기거나 뒤로 물러나게 하는 까닭이다.

p96 한나라 때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꼭 지금의 평양을 기준으로 삼아서 어지러이 패수의 원래 자리를 찾는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요동 동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기 때문에 그 거리를 계산한 릿수理數가 서로 맞지 않는다. 사실과 어긋나게 된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에 넣어서 처리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이렇게 패수의 위치가 정해져야만 우리 영토의 범위가 밝혀지고 그게 밝혀져야 고금의 사실이 딱 맞게 될 것이다.

→ 문제상황에 대한 인식, 그에 대한 정확한 통찰, 바람직한 대안 제시. 이것이 연암이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철학이 잘 묻어난다. 으레 우리의 여행 감상기란, 좋다, 아니다, 그냥 그랬다와 같은 감탄사로 이어지는데 연암의 글은 논리적으로 연결된다. 사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로 보인다.

p98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을 통일했지만, 그의 강토와 무력이 강대한 고구려에 전혀 미치지 못하였다.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며 부질없이 중국의 역사 기록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패수니 평양이니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사실과는 너무도 어긋난 상태니, 이런 상황에서 이 성이 안시성인지 봉황성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이어 고려가 건국되어 고구려의 계승으로 고려라 하였다지만, 영토부분만은 아쉬은 정도를 넘어선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영남권의 작은 나라에서 더 큰 영토에 만족하여, 고구려의 넓은 땅을 등한시 한 것은 심지어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의의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지만,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백제가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면.....유난히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이겠지.

p101~102 우리나라는 성을 쌓을 때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데, 이건 좋은 계책이 아니야. 일반적으로 벽돌이란 틀로 찍어 내기만 하면 똑같은 모양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깎고 다듬는 공력을 과외로 허비하지 않을 거야. 가마 하나만 불을 때면 만 개의 벽돌을 한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는 노고도 없을 걸세. 모든 벽돌이 고르고 반듯하여 힘은 적게 들고도 결과는 배나 많이 얻게 되지.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운 것으로 벽돌만 한 게 없다네.

     반면에 돌은 어떤가. 산에서 쪼개 낼 때부터 여러 명의 석수가 들어야 하지 않는가. 수레로 운반할 때에도 여러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운반해 놓은 뒤에도 여러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지. 다듬어 내는 데에는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하지 않나. 쌓을 때도 돌 하나를 자리잡아 놓는 일에 여러 명의 인부가 소용되네. 벼랑을 깎아 내고 돌을 박으니, 이야말로 흙의 살에 돌옷을 입혀 놓은 꼴일세. 겉으로 보기에는 폼나고 정돈된 것 같지만 속은 정말 제멋대로지. 돌이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못하니 작은 돌로 큰 돌의 궁둥이와 발등을 받친다네. 언덕과 성 사이에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서 채우기 때문에 장마 한 번 지나가면 속이 텅 비고 배가 불러지고 말지. 그런 상황에서 돌이 한 개라도 빠지면 그 나머지는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질 거야. 뻔한 일 아닌가. 또 석회가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붙지 않는 성질이 있단 말이야. 내가 예전에 박제가와 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어떤 사람이 ‘벽돌에 단단하다 한들 돌만 하겠어요?’ 하자 박제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에 돌 하나를 비교하는 것이겠소?’ 하는 거야.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대개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는단 말이지. 석회를 많이 쓰면 쓸수록 더 터져 버린다네. 돌에서 떨어져 일어나기 때문에 돌은 항상 저 혼자 남게 되어 겨우 흙에 붙어 있을 뿐이야. 허나 벽돌을 석회로 이어 놓아 보면 부레풀로 나무를 딱 붙인 듯, 붕사로 쇠를 붙인 듯, 수많은 벽돌들이 하나로 응결되어 아교로 붙여 놓은 듯 성을 만드는 거야.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만은 못하겠지만,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벽돌만 개의 단단함에는 못 당하지. 그렇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편이 더 이롭고 편리한 지 쉽게 구별할 수 있지 않은가?‘

p114 송진의 불길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세다. 소나무는 한 번 베면 새움이 나지 않는 나무이므로, 한 번 옹기장이를 만나면 사방의 산이 모두 민둥산이 된다. 백 년 동안 기른 것을 하루아침에 다 없애 버리고는 이내 다시 새처럼 흩어져서 소나무를 찾아서 가 버린다. 기와 굽는 방법 한 가지가 잘못된 탓에 나라의 좋은 재목이 날로 줄어들고, 질그릇 가게 역시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다.

→ 여행기의 기록...사물에 대한 관심. 세밀한 묘사,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비교와 대조..

p117 뜻을 얻은 곳에는 두 번 가지 않는 법, 만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네!

→ 이 문장이야 노름판에서 쓰인 문장이긴 하다만!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의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리.

p128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처럼 땅을 판다. 그 위에 돌덮개를 덮어서 바닥과 평평하게 한다. 그 안에 조성된 구멍에서 바람이 일어나 불길을 불목으로 몰아넣으므로 연기가 조금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또 굴뚝을 내는 방법을 보면, 큰 항아리처럼 땅을 파고 벽돌을 탑처럼 쌓아 올려 지붕 높이에 맞춘다. 연기가 그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서로 잡아당기고 빨아들인다. 정말 절묘한 방식이다. 보통 굴뚝에 틈이 생기면 한 줄기 바람에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법이다. 우리 조선의 온돌은 항상 불이 밖으로 빠져나와서 방이 고루 따뜻하지가 않다. 그 잘못은 모두 굴뚝에 있는 것이다. 조선의 굴뚝은 싸리로 엮은 농에 종이를 바르거나 혹은 나무 판자로 통을 만들어 쓴다. 처음 세운 굴뚝의 흙축대에 틈이 생기거나, 발랐던 종이가 떨어지거나, 또는 나무통이 벌어지면, 연기가 새는 것은 막을 길이 없다. 또 바람이라도 한 번 크게 불면 연통은 소용이 없게 된다.

→ 따뜻한 아랫목. 우리의 구들장이 최고인 줄 알았다. 물론 내가 아는 것은 세월이 흐른 만큼 변한 것일 수 있겠지만. 이렇게 적확한 내용들을 접하면서 박지원이 오늘날에 산다면 어느 부처에서 일하는 것이 최고로 좋은 일일까를 생각해본다.

p129~130 이곳 구들이 우리나라보다 못하다는 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중국의 구들 놓는 방법을 그대로 본떠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깐다고 하면 그걸 누가 막겠나? 우리나라 온돌에는 여섯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아무도 이걸 말하는 사람이 없단 말이야. 내 한번 얘기해 볼 테니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나.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들지. 그 돌의 크기나 두께가 애초에 가지런하지 않으니 조약돌로 네 귀퉁이를 괴어서 뒤뚱거리지 않게 할 수밖에 없지. 그렇지만 불에 달궈지면 돌이 깨지고, 발랐던 흙이 마르면 늘상 부스러지네. 그게 첫 번째 문제점이야. 구들돌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움푹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니, 불을 때도 골고루 따뜻하지 못한 게 두 번째 문제점이야. 불고래가 높은 데다 널찍해서 불길이 서로 맞물리지 못하는 게 세 번째 문제점이지. 또, 벽이 부실하고 얇아서 툭하면 틈이 생기지 않나? 그 틈으로 바람이 새고 불이 밖으로 내쳐서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게 네 번째 문제점이야.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불길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땔감 끝에서만 불이 타오르는 게 다섯 번째 문제점이네. 또 방을 말리려면 땔감 백단은 때야 하는 데다 그 때문에 열흘 안에는 입주를 못하니, 그것이 여섯 번째 문제점일세.

     그에 반해, 중국 온돌의 구조를 보게나. 자네와 함께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떠드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만들어져서 그 위에 누워 잘 수도 있을 걸세. 어떤가?

p131 우리나라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한다. 갑군이 ‘도이’라고 한 것은 ‘도이島夷’의 와전이고, ‘노음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 즉 조선말 ’놈‘의 와전이요, ’이요伊吾‘란 웃어른에게 여쭙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람이 알아들도록 ’되놈이요‘하고 말했던 것이다. 갑군은 여러 해 동안 사신 일행을 모시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배웠는데, ’되놈‘이란 말이 귀에 익었던 모양이다.

p133 빈손으로 강물에 들어가면 몸이 가벼워져 떠내려가기 쉽거든요. 반드시 무거운 물건으로 어깨를 눌러야 됩니다.

→ 상황과 환경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우리는 늘 다른 상황에서도 한가지만을 고수하려 한다.

p135 일어나 앉아서 이를 부딪치고 머리를 퉁기면서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제법 상쾌해지는 느낌이다.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 오랫동안 마음이 뒤숭숭하다. 결국은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몸을 뒤척거린다. 이런저런 생각에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도가적 양생법 : 이를 부딪치고 머리를 퉁기는 것은 도가적 양생법의 일종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로 여기에 기초하여 자신의 몸을 관리하였다. 『동의보감』「신형」편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1.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치아를 맞부딪치고 침으로 입안을 헹군 뒤 한입 가득 삼킨다. 2. 손바닥을 열이 나게 비빈 후 두 눈을 열네 번 문지른다. 3. 이마를 열네 번 문지른다. 4. 중지로 콧마루 양쪽을 이삼십 번 세게 문지른다. 5. 손으로 귀바퀴를 여러 번 문지른다.

→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마음가짐의 실제 행위적 표현이 아닌 관념적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도가적 양생법의 순서를 보니, 낼 새벽 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해 볼 만하다.

p138~139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재빨리 말을 채찍질했다. 수십 걸음도 못 가서 모롱이를 막 벗어나자 검은 공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나는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번 통곡할 만한 곳이로구나!”

    “하늘과 땅 사이의 툭 트인 경계를 보고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지, 그렇구 말구! 아니지, 아니고 말고. 천고의 영웅은 울기를 잘했고, 천하의 미인은 눈물이 많았다네. 하지만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옷깃에 떨굴 정도였기에, 그들의 울음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쇠나 돌에서 나오는 듯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네. 사람들은 다만 칠정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 뿐, 칠정 모두가 울음을 자아낸다는 것은 모르지. 기쁨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 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다 보니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짝지은 것일 뿐이야. 이 때문에 상을 당했을 때 처음엔 억지로 ‘아이고’ 따위의 소리를 울부짖지. 그러면서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소리는 억눌러 버리니 그것이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꽉 뭉쳐 있게 되는 것일세.”

→ 영웅은 울기를 잘 하였다~! 그동안 사내 대장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라 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 감정을 속이고 속여 왔던가. 울음이 금기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크게 통곡하고 싶은 일들이 많기도 하다. 감정에 진실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고 감정이 부당하게 활용되는 일들이 없기를.

p140~141 "이제 이 울음터가 저토록 넓으니, 의당 선생과 함께 한번 통곡을 해야 되겠습니다그려. 그런데 통곡하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디에 해당할까요?“

    “그건 갓난아기에게 물어봐야 될 것이네. 그 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지. 그 애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으로는 눈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그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같은 기쁨이 늙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이치가 전혀 없이 즐겁게 웃기만 해야 마땅한 것 아니겠나. 그런데 도리어 분노하고 한스러워하는 감정이 가슴속에 가득하여 끝없이 울부짖기만 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지. 삶이란 성인이든 우매한 백성이든 누구나 죽게 마련이고, 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온갖 근심 걱정을 두루 겪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먼저 스스로 울음을 터뜨려서 자기 자신을 모줌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갓난아기의 본래 정이란 그런 것이 아니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곳으로 나와서 손도  펴 보고 발도 펴 보니 마음이 참으로 시원했겠지. 어찌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한번 펼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의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이.

    이제 요동벌판을 앞두고 있네. 여기서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는 사방에 한 점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하고, 예나 지금이나 비와 구름만이 아득할 뿐이야. 이 또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호곡장好哭場 : 이 대목은 따로 독립되어 있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호곡장론’이라고 이름한다. 그만큼 빼어난 문장과 사유가 돋보이는 명문에 속한다. 1,200리에 걸쳐 아득히 펼쳐져 있는 요동벌판. 열흘을 가도 산이라곤 보이질 않는 광활한 평원을 가로지르면서, 연암은 마치 태초의 시공간에 들어선 듯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크게 한번 울어볼 만하다는 건 바로 그런 존재론적 울림의 표현이다. 동시에 그것은 문명론적 충격이기도 했다. 요동의 드넓은 스케일과 마주하는 순간, 연암은 자신이 얼마나 좁고 답답한 변방에 갇혀 있었던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갓난아기의 울음에 대한 변도 같은 맥락에 있다. 연암이 보기에, 갓난아기가 우는 건 슬퍼서도 아니고, 두려워서도 아니다. 바로, 열 달 동안 엄마 뱃속에 있다가 넓은 세상으로 나와 사지를 마음껏 펴게 되자 그 감동과 환희를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존재와 삶에 대한 무한긍정으로서의 울음인 것. 이 대목은 당시에도 문장가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었고, 훗날 1809년 추사 김정희는 여기에 대한 시를 한 수 남긴 바 있다.]

p149 - 요동 옛 성에 올라(구요동기)

    지금도 토벽이 옛날과 같이 둘러 있고 벽돌 흔적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당시 삼사가 탄핵한 글로 미루어 웅정필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아아, 슬프다. 마지막 운명에 처한 명나라는 인재를 등용하고 버리는 것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를 밝히지 못했다. 웅정필과 원숭환의 죽음을 보면 명나라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어뜨렸다 하겠다. 어찌 후세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성경잡지

p163 그림에는 농담濃淡의 구별이 있으며, 또 원근遠近의 차이가 있다. 이제 이 탑의 모양을 바라보니 더욱 분명하게 알겠다.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 반드시 그림 그리는 법을 터득했으리라는 것을. 대개 성의 멀고 가까움을 탑의 길고 짧음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까닭이다.

p175 - 예속재에서 만난 친구들(속재필담)

    귀에는 이유의 많은 서적을 간직하고 있지만 눈으로는 목불식정입니다. 하늘엔 글 모르는 신선이 없지만 인간 세상엔 말만 잘하는 앵무새가 있거든요.

→ 요즘에도 말만 잘하는 앵무새도 있고, 말도 못하는 앵무새도 있고...수첩을 봐야 하는 앵무새도 있고.

p179~180 - 전사가

    옛날 공자께서도 ‘구이의 땅에 살고 싶다’고 하셨고, 또 ‘군자가 그곳에 산다면 무슨 비루함이 있겠느냐’고 하셨지요. 선생께서는 멀리 변방에서 오셨지만 풍채와 기세가 훤칠하고, 또 공자와 맹자가 남긴 글에도 두루 통하며, 예법은 주공의 도에 이르렀으니 어엿한 군자이십니다. 다만 한스러운 바는 우리들이 먼 땅, 다른 하늘 밑에 살고 있어서 서로 마음에 품은 바를 다 풀지 못한 채 만나자마자 곧 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p186~187 - 전사가

    이거 하나는 반드시 알아 두셔야 합니다. 대개 골동품은 흙에 묻혔던 것들은 청색靑色이 나고, 물속에 잠겼던 것들은 녹색綠色이 나는 법입니다. 그리고 무덤 속에 있던 그릇들은 흔히 수은빛을 내지요. 그 이유가 시체 기운이 스며들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수은으로 염을 했기 때문에, 제왕의 능묘에서 나오는 그릇은 이따금씩 수은빛이 나기도 했습니다. 오래된 것일수록 깊이 스며드는 법이라 갓 구운 것인지, 오래된 것인지, 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리기 쉬웠지요. 골동품은 살이 두껍고 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본체에서 나는 빛이 그야말로 천연의 윤기가 흐릅니다. 수은빛 역시 그릇 전체에 고루 퍼지는 게 아니라 반쪽 혹은 귀퉁이만, 혹은 아랫부분만, 때로 얼룩덜룩 번진 것도 있습니다. 청록색 얼룩 역시 마찬가지여서 전체가 아니라 반만 짙게 들거나 옅게 들기도 하고, 맑기도, 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흐리다고 더러울 정도는 아니어서 머리카락 같은 무늬가 투명하게 비치고, 맑다고 메마른 건 아니어서 투명하기가 마치 물이 오른 듯합니다.

    가끔 주반이 깊게 스며든 것이 있는데, 그 중에도 갈색이 가장 귀한 것이랍니다. 흙 속에 오래 들어 있으면 청색, 녹색, 비취색, 붉은 색의 점들이 알록달록 하여, 그 모습이 버섯 무늬 같기도 하고 구름 속 햇무리 같기도 하고, 혹은 함박눈의 눈꽃송이 같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렇게 되려면 흙 속에 천 년쯤 묻혀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법이라, 이걸 최고의 상품으로 치는 것입니다.

→ 흙 속에 묻혔던 골동품의 빛깔에 대해 처음 알았다. 시체와 함께 했던 골동품의 빛깔에 대해서도..많이 보지 못한 까닭이다. 사물이든 무엇이든 쉽게 지나치기 때문이다. 예사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물들 하나하나에 깊이 관심 두어 볼 일이다.

p195 - 가상루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상루필담)

    이귀몽 : 우리들이야 초야에 묻힌 몸이라 누가 주공이고 소공인지, 또 누가 꿈을 통해 입신했는지, 또는 점을 쳐서 등용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요. 

    [누가 꿈을 통해 입신했는지 : 상나라 무정(고종) 때 현명한 신하로 이름 높았던 부열(傅說)은 원래 죄수였으나 무정에게 발견되어 중용되었다. 『사기』「은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정이 즉위하여 다시나라를 일으키려고 생각했지만 보좌해 줄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어느날 꿈속에서 성인을 보았는데 이름이 열(說)이라고 했다. 꿈에서 본 인상을 가지고 군신, 백관들을 두루 관찰해 보았지만 모두 아니었다. 그래서 비슷한 얼굴을 그려서 민가에서 찾게 했더니 부험(傅險) 가운데서 열을 찾아냈다. 이때 열은 죄를 짓고 부험에서 축을 쌓는 노역을 하고 있었다. 무정에게 보였더니 무정이 바로 그 사람이라 했다. 대화를 해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자 은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그래서 부험의 성을 따 이름을 부열이라 하였다.

    점을 쳐서 등용되었는지 : 여상(呂尙의 고사를 일컫는다. 여상은 동해 바닷가에서 살던 사람이다. 훗날 문왕이 될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려고 점을 쳤는데, “잡을 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 곰도 아니다. 잡을 것은 패왕의 보필이다”라는 점괘를 얻었다. 서백이 사냥을 하던 중 위수 북쪽에서 여상을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의 선군 태공이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한 성인이 주(周)로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를 얻어 크게 흥성할 것이다’라 하셨는데 당신이야말로 그 성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태공망(문왕의 아버지인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는 뜻)’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모셨다. 문왕은 여상의 보좌를 받아 덕을 쌓고 훌륭한 인물들을 찾아 나서니 백성들이 기뻐하고 제후들이 그를 따랐으며 명망이 천하에 널리 퍼졌다.

→ 꿈 속의 일들을 어떤 예지로 읽는 것일까. 꿈에 대한 기대가 크다. 꿈에서 본 대로 점에서 나온 대로 사람을 구한 것도 놀라울 일이고 그와 더불어 모두 잘 되었다는 것도.

p200 아닙니다. 그 이름은 강철罡鐵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강철이 지나간 곳엔 가을도 봄이 된다’는 말이 있지요. 이는 가뭄이 심하게 들어 흉년이 됨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일을 도모하다 잘 되지 않으면 ‘강철의 가을’이라고 합니다.

p201~202 - 가상루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상루필담)

    이귀몽 : 우리들은 학문이 미미하니 벼슬살이 할 가망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피땀 흘리며 공장이 노릇으로 일생을 보낼만한 기술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살 한 톨 얻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는 농민으로 한 평생을 보내자면, 좁은 고장을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 채 마치 여름 벌레가 겨울엔 나오지 못하듯 이 세상을 마쳐야 합니다. 이는 하루 빨리 죽느니만 못한 셈이지요. 가게를 내고 물건을 사고팔아서 생계를 잇는 것을 두고 남들은 비록 하류로 치지만,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나를 위해 극락세상을 열고, 땅이 쾌활림을 점지해 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주공朱公의 편주扁舟를 띄우고, 단목의 수레를 잇닿아서 유유히 사방을 다녀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아무리 넓은 대도시라도 마음이 가는 곳이 곧 집이요, 드높은 처마와 화려한 방 안에 몸과 마음이 한가롭고, 모진 추위나 가혹한 더위에도 방편을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버이께 위안을 주고 처자들도 원망치 아니하여, 나아가든 물러서든 언제나 여유롭고, 영광이든 치욕이든 개의치 않으니, 저 농사일과 벼슬살이 두 가지에 비하여 그 괴롭고 즐거움이 어떻겠습니까.

    또 우리들은 모두 벗을 사귀는 일에 지극한 정성을 다한답니다. 옛글에도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 될 이가 있다 하였고, 또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하면 굳은 쇠라도 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한평생에 벗이 없다면 아무런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저 입고 먹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 사귀는 재미를 모른답니다. 세상에는 생김새가 밉살스럽고 말씨가 썰렁한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옷가지며 밥사발에만 눈을 줄 뿐 벗을 사귀는 즐거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알지 못합니다.

→ 나이가 들어가면서 벗에 대한 욕구가 강해지는 듯하다. 다만 그 벗에 책도 포함시키고자 한다. 친구와는 다른 벗. 마음을 나누는 친구와 더불어 취미나 사상에 대해 같이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벗. 우리는 친구라는 단어를 같은 나이로 한정하여 쓴다. 유교로 인해 나이에 민감한 탓이다. 한두 살 차이의 나이에서도, 같은 나이에서도 태어난 달을 따져 위계를 세우려 든다. 그러나 벗이란 나이를 뛰어넘어 생각들을 나누는 것임을...

p202~203 - 가상루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상루필담)

    이귀몽 : 우리나라에서 벼슬아치들은 장사치나 공장이들과는 혼인을 금합니다. 사환의 기풍을 맑게 하기 위해서죠. 또한 도를 높이고 이利를 낮게 보는데, 이는 근본을 숭상하고 말단을 누르기 위함이지요. 하여, 우리들은 대대로 장사꾼 집안인 까닭에 사대부 가문과는 혼인할 수 없답니다. 돈이나 쌀을 바치면 겨우 생원 정도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또한 향공을 거쳐 거인에 오르지는 못합니다.

    연암 : 한 번 생원이 되면 선비로 행세하는 건 허용됩니까?

    이귀몽 : 그렇습니다. 제생諸生에는 늠생(국가 급료를 지급해주는 생원)・감생・공생 등 허다한 명목이 있지요. 이들은 모두 생원 중에서 선발되기 때문에 일단 생원이 되기만 하면 구족九族을 빛나게 하지만, 대신 사방의 이웃들이 해를 입습니다. 왜냐면 관권을 틀어쥐고 향리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게 생원들의 전문기술이거든요. 이른바 사류(士類)에도 세 등급이 있습니다. 상등은 벼슬아치가 되어 관록을 먹는 것이요, 중등은 학관을 열어서 생도를 모집하는 것이요, 하등은 염치를 무릅쓰고 남에게 빌붙는 축들입니다. 속담에 ‘남에게 빌붙어 사니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당장 살 길이 막막하니 도리가 없지요.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를 쏘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 주저주저하다가 마침내 볼썽사나운 꼴을 드러내고야 맙니다. 한때 고담준론만 하던 선비가 천하의 애물단지가 되고 마는 거지요. 속담에 ‘남에게 구하는 것이 내 스스로 구함만 같지 못하다’고 했듯이, 장사를 하면 적어도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일신수필

p232~233 -일신수필 서

   입과 귀에만 의지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학문에 대해 이야기할 바가 못 된다. 평생토록 뜻을 다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이 아니던가. 사람들은 “성인聖人이 태산에 올라 내려다보니 천하가 작게 보였다”고 말하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보았다”고 하면 허황하다고 배척할 것이며, “태서泰西(서양)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 밖을 돌았다”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버럭 화를 낼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이 천지 사이의 큰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 공자가 240년간의 역사를 간추려서 『춘추』春秋라 하였으나, 이 240년 동안 일어난 군사·외교 등의 사적은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과 같은 잠깐 사이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달리는 말 위에서 휙휙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기록하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먹을 한 점 찍는 사이는 눈 한 번 깜박이고 숨 한 번 쉬는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눈 한 번 깜박하고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벌써 작은 옛날小古, 작은 오늘小今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하나의 옛날이나 오늘은 또한 크게 눈 한 번 깜박하고大瞬 크게 숨 한 번 쉬는大息 사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찰나에 불과한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공을 세우겠다고 욕심을 부리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 평생토록 뜻을 다해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학문인데, 학문에 뜻을 두면서도 조급해 한다. 천천히 호흡하여 가기를.

p233~234 -일신수필 서

    태서인들은 공자와 부처의 관점도 오히려 지상을 떠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면서, 지구는 제쳐 두고 하늘로 별을 붙잡으러 가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자기의 관점이 공자와 석가모니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서양인들이 먼 타국에 와서 말을 배우며,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남의 글을 익혀서 불후의 업적을 내려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대체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은 지나가 버린다. 저들은 우리 유가에서 이단을 물리치는 학설을 보고는 실마리만 주워 모아 억지로 불교를 배척하는 흉내만 낸다. 불씨의 천당・지옥설을 따르는 학설도 남의 말 찌꺼기나 주워 모았을 뿐이다.

p240~241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마땅히 이를 수용하여 본받아야 한다. 더구나 삼대 이후의 성스럽고 현명한 제왕들과 한・당・송・명 등 여러 왕조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한 원칙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하셨으나, 그렇다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 데 분개하여 중화의 훌륭한 문물제도까지 물리치셨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p246~247 무릇 수레는 하늘에서 나와 지상에서 운행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수레는 육지를 다니는 배요, 움직이는 집인 셈이다. 나라에 크게 쓰일 물건으론 이 수레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주례』에서 임금이 부유한지를 물었을 때, 수레의 대수로 대답했던 것이다. 수레에는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는 수레뿐만 아니라, 전투용 수레, 공사용 수레, 소방용 물수레, 대포 수레 등 수천 수백 가지의 종류가 있다. 그러나 지금 경황이 없어 일일이 다 적지는 못했다. 다만 사람 타는 수레, 짐 싣는 수레가 백성들의 생활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힘써야 할 제도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p247~248 지금까지 천 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수레를 보았지만, 앞 수레와 뒤 수레는 언제나 같은 바퀴 자국만을 따라간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똑같아지는 것을 ‘일철一轍’이라 하고, 뒷사람이 앞사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전철前轍’이라 한다. 성 문턱에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 홈통을 이루니, 이른바 ‘성문지궤城門之軌’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수레가 없지는 않으나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않고 바퀴 자국이 한 궤도를 그리지 못하니, 수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우리나라는 마을이 험준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았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되면 길이야 저절로 닦일 터,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만 걱정한단 말인가. 『중용』에 나오는 바,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란 말은, 수레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가지 못하는 데가 없다는 뜻이다.

→ 일철과 전철, 많은 나의 멘토들에게 적용하고 싶은 바이다.

p250 사방이 수 천리나 되는 나라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한마디로 말해, 나라 안에 수레가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수레가 다니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역시 양반들 잘못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양반네들은 평소 글을 읽을 때 『주례』는 성인께서 지으신 글이라며, “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거인車人”이니 “주인輈人”이니 하고 떠들어 댄다. 그러나 끝내 그것을 만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운행하는 기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무조건’ 글만 읽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니. 이런 공부가 학문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일의 현장에서도 늘 듣게 되는 말이다. 현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론적인 틀. 그러다가 안되면 또다른 이론을 내세워 상황을 설명하려 애쓴다. 나 역시 현장의 목소리를 잘 듣고 파악해야 하건만, 통계와 이론만으로 일을 정리하고 있는지는 아닌지 반성해본다. 살아가는 목소리에 조금 더 귀기울여야 할 일이다.

p258 [관우가 재물신이 된 이유 : 관우는 유비를 도와서 촉나라를 세운 무장이다. 그는 수많은 전추에서 늘 승리했으므로, 초기에는 전쟁의 신으로 숭배되었다. 그런 관우가 재물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인데,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이르면 그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다. 중세에는 상인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기 때문에 도적들에게 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초기에는 이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관우를 모셨지만, 그 덕분에 장사를 무사히 마쳐 이득을 보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재물신으로 변환된 것이다. 물론 관우가 조조의 포로로 있다가 다시 유비에게 돌아갈 때 조조가 선물한 막대한 재물을 깔끔하게 문서로 정리해 남겨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런 이미지가 그를 재물과 연관시켰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그를 재물신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은 역시 상인 집단이었다. 지금까지도 관우는 악귀를 물리쳐 주는 전쟁의 신이자 집안의 화평과 부귀를 기원하는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p260 아무리 궁벽한 오지에다 허물어져 가는 집일지라도 날마다 쓰는 밥주발이나 접시 등속에는 모두 울긋불긋 그림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는 결코 사치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그릇을 굽는 도공의 솜씨가 본래 그러하기 때문에, 아무리 거칠고 조잡한 것을 쓰려 해도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곳에선 자기가 깨어져도 버리지 않고 모두 겉에 쇠못을 쳐서 새 그릇을 만든다. 다만 알 수 없는 일은, 못으로 그릇 안을 꿰뚫지 않았는데도 딱 맞물려 풀로 붙인 듯 감쪽같다는 것이다. 높이가 두 자나 되는 여러 빛깔의 술잔과 오지병, 꽃을 꽂은 병과 두루미병 같은 것은 어딜 가나 흔히 있다.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 분원에서 구운 자기들은 저자에 들어올 수조차 없을 것이다. 아, 그릇 굽는 법 하나가 좋지 못하여 온 나라의 모든 일과 물건이 다 그와 비슷해져 마침내 한 나라의 풍속을 이뤘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실로 통탄할 일이다. 지금도 단 하나, 잘못된 관행으로 인해 보다 많은 것들이 어그러지는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도 그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일도 모두 어려워진 지금에,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p296 빈부를 막론하고 평민의 부녀는 관을 쓰지 않고 다만 명부만이 관을 씁니다. 제각기 남편의 직위에 따라서 비녀에도 품이 있는데, 이는 모자를 쓰는 법과 같답니다. 두 마리 봉황이 그려진 비녀, 곧 쌍봉잠이 제일 귀하되, 봉잠에도 나는 봉, 서 있는 봉, 앉아 있는 봉, 웅크린 봉 등의 구별이 있고, 비취잠에도 모두 품직의 차이가 있지요.

→ 생필품이 아닌 노리개 하나에도 이토록 계급의 차이를 둔다는 것을 세심하다고 해야 할까...지나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오늘날에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현상이니 새삼스레 놀라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사는 늘 이렇게 차별을 두는데 매료되어 있을까.

p312 - 산해관에 올라 고금의 역사를 생각한다(산해관기)

    아아, 몽염이 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으려 하였지만 진나라를 망칠 오랑캐는 오히려 집안에서 자라났고, 서중산이 이 관을 쌓아 오랑캐를 막고자 하였으나 명의 장수 오삼계는 이 관문을 열어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구나. 천하가 무사태평한 지금, 이곳을 지나는 장사치들과 나그네들에게 공연히 비웃음만 사게 되었으니, 실로 뭐라 할 말이 없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下


관내정사

p16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씨를 익힐 때, 옛날 사람의 진짜 글씨를 접할 기회가 없어 금석에 새겨 놓은 글씨만 본뜬다. 금석문을 통해서는 그저 기본 틀만을 막연히 추측할 뿐, 붓과 먹 사이에 녹아든 오묘한 정신을 찾아내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설령 글자 모양이나 글씨의 기운을 엇비슷하게 흉내낸다 해도, 글씨의 기본 바탕이 뻣뻣하기 때문에 도무지 붓놀림에 운치라고는 없다. 그리하여 먹이 짙은 곳은 돼지마냥 펑퍼짐하고, 먹이 흐린 곳은 말라빠진 등나무 줄기처럼 퍼석퍼석하다. 쇠나 돌에 새긴 글씨체에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 이렇듯 세심한 관찰. 이것은 관심에서 오는 것이겠지.

p35 내가 계함더러 “난 오늘부터 역사의 기록은 더 이상 믿지 않을 작정이네” 하니, 정진사가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서면서 “무슨 말씀이오?”한다.

    “항우가 아무리 노하여 고함친다고 한들 어찌 우레 소리만 하겠소. 그런데도 『사기』에 적천후赤泉候의 병사들과 말이 항우의 꾸짖음에 모두 놀라 몇 리를 물러났다 하니, 이게 다 거짓 아니고 무엇이겠소. 또 항우가 아무리 눈을 부릅뜬다 하기로 번갯불만은 못할 터, 한나라 장수 여마동이 항우의 부릅뜬 눈을 보고는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도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p36 백이 숙제 묘당을 둘러보며(이제묘기)

    산은 인자를 닮아 고요하고 山如仁者靜

    바람은 성인을 닮아 맑구나. 風似聖人淸

    빼어난 산수의 고죽국에 산수 佳山佳水孤竹國

    난형난제의 옛 성인들이시다. 難兄難弟古聖 

p40 난하를 건너며(난하범주기)

    교청새와 뜸부기 수십 마리가 모래밭에 늘어 앉아 날갯죽지를 다듬는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이 경치를 돌아보고 즐거워하며 감탄한다. “산수가 그림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산수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네그려. 산수가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산수에서 나온 것이지. ‘닮았다’ ‘같다’ ‘비슷하다’ 따위의 말은 결국 비유를 통해 서로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표현일 뿐이라네. 그리고 비슷하다 뿐이지 실제로 같은 것은 아니라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장강에서 나는 요주(조개의 일종)를 두고 여지(남방에서 나는 과실)와 같다 하고, 서호를 서시와 같다 하였지. 그러자 어떤 어리석은 작자가 조개인 담채는 용안수의 열매와 같고, 전당 호수는 조비연 같다고 대꾸했지 뭔가.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 은유라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님을 같게 만드는 표현이다. 사실 같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말할 때 유사한 것을 찾으려 애쓴다. 무엇이라도 닮은 점을 찾아 친구 삼고 같은 파를 만들려 애쓴다. 억지의 논리. 일견 비유가 그렇게도 보일 수 있는 것이로구나.

p44~46 만약 무왕께서 싸움에 졌다면

       천 년의 역사 내내 주왕의 역적이 되었으리.

       강태공은 백이를 살려 보내고도

       어찌하여 춘추의 의리 그대로라면

       어찌 오랑캐놈 역적이라 하지 않는가.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의 왕자들이었다. 아버지는 동생인 숙제에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지만, 숙제는 형인 백이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백이는 아버지의 명을 쫓아야 한다며 도망가 숨어 버렸다. 그러자 숙제 또한 백이를 좇아 숨어 버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았다. 그후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문왕이 늙은이를 잘 돌본다는 말을 듣고 주나라로 갔다. 당시 주나라는 문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킨 상황이었다. 백이와 숙제는 무왕이 탄 말의 고삐를 붙잡고 이렇게 충고했다.“부왕이 돌아가신 후 아직 장례도 끝나기 전에 무기를 손에 잡으니 효라고 할 수 있으리요.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려 하니 인이라 할 수 있으리까?” 옆에 있던 신하들이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 했으나 강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이라”며 풀어 주었다. 무왕은 마침내 은나라를 평정하여 멸망시켰고,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 연명하다 굶어 죽었다.

    이 사건은 동아시아 유학사의 큰 딜레마였다. 백이・숙제를 추아하자니 무왕의 거사를 비난해야 하고, 무왕의 정당성을 인정하자니 백이・숙제의 행위를 깎아내려야 했던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소년들의 시도 그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무왕의 거사는 분명 효와 인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만약 무왕이 폭군 주왕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무왕이 오히려 역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즉, 정당하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니라, 이겼기 때문에 정당성을 얻었을 뿐이라는 것. 또 무왕의 거사가 정당하다면 그 진군을 만류한 백이와 숙제는 왕의 뜻을 거스른 역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뒤집어 봄으로써 춘추의 의리가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비꼬고 있는 것이다.]

→ 백이 숙제가 고사리로 연명하다 죽었다고만 알고 있었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청렴하게 살던 이들이라고만 기억되었는데 이번 열하일기를 통해서 백이 숙제의 정확한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두 개의 시안...

p50 주유는 원망하며 탄식했도다. ‘하늘이 이미 나를 낳아놓고 제갈량은 왜 또 내었는가!

→ 나 또한 제갈량을 보면서 그러한 탄식을 내뱉는다. 아, 어찌하여 나는 제갈량에 미치치 못하는가.

p56~57 고려보에 도달해보니 모두 지붕을 이엉으로 엮은 초가집들이라 무척이나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묻지 않고도 이곳이 고려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자호란 발발 이듬해인 정축년(1637년)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이 마을을 이룬 것이다. 중국 동쪽 편 천여 리에 논은 없는데, 이곳에서만은 논이 있다. 떡과 엿 등이 조선과 흡사했다. 이전에는 사신 일행이 당도했을 때 하인배들이 술이나 음식을 사 먹으면 값을 받지 않는 일도 더러 있었으며, 아낙네들도 내외를 하지 않았고, 고국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짓는 이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점차 잇속을 챙기려는 하인배들이 생겨나 술과 음식을 먹고도 값을 치르지 않으며, 그릇이며 의복까지 토색(돈이나 물건 등을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고국의 옛정을 생각하여 까다롭게 굴지 않으면 틈을 노려 도둑질을 일삼곤 하였다. 이런 탓에 고려보 주민들은 차츰 고국 사람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여, 급기야는 사신 일행을 만나면 술과 음식을 감추어 두고 잘 팔려고 하지 않았고, 사정사정해야만 겨우 팔되 바가지를 씌우거나 선불을 요구했다. 그럴수록 하인들은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사기를 침으로써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마침내 서로 원수를 대하듯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면 일제히 소리 높여, “이놈들아, 네놈들 할애비가 오셨거늘 어찌 나와서 절을 하지 않느냐”고 욕하면, 고려보 사람들 역시 우리들을 향해 맞받아친다. 이런 지경에 우리 사신 일행은 이곳 고려보 풍속이 도리어 틀려먹었다고 욕을 해대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 사람들 사는 세상은 어디나 똑같다. 그들이 살아가는 터전의 생활이며 도구들은 달라졌을 지언정, 그들이 살아가는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다가올 앞으로도. 인간의 심정이 그러한 까닭일까.

p59 후의는 고맙습니다만, 그건 좀 곤란합니다. 나로 말하면 외국 사람인 데다 한번 가면 다시 올 기약이 없습니다. 하여, 오늘 맺은 인연이 훗날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될 뿐이니 이는 또 다른 업보가 될 것입니다.

→ 훗날 고통스러운 그리움이 되는, 또 다른 업보가 되는 과거의 인연들, 인연들....

p65  - 범의 꾸중(호질)

    ‘의(醫)’란 것은 ‘의(疑)’와도 같으니, 의심스런 바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을 해대는 통에 해마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무(巫)’란 ‘무(誣)에 불과해. 귀신을 속이고 백성들을 기만하여 해마다 앗아가는 목숨이 수만은 된다. 사람들의 분노가 그놈들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다. 그것이 변하여 금잠으로 금빛이 아는데 그 똥을 받아 음식에 두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니,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 사람들의 분노가 뼛속까지 스며 독이 들어 있다. 인간들이 내밀은 똥덩어리, 그 질기고 질긴 똥에 대한 시,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는 시가 생각난다. 그 질기고 질긴 똥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노라는..

p65~66 - 범의 꾸중(호질)

    음양이란 하나의 기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을 둘이라 하니 그 고기가 잡스러울 것이다. 오행은 각기 제 나름의 특성이 있어서 애시당초 서로 낳는 관계가 아니거늘, 이제 구태여 오행을 자식과 어머니로 구분하고 심지어는 짠맛 신맛 등 다섯 가지 맛을 할당해 두었으니 그 맛이 순정하지 않을 것이다. 여섯 가지 기운은 스스로 움직이지 외부의 힘에 의해 펼쳐지거나 이끌리지 않는 법인데, 이제 망령되이 재성이니 보상이니 하면서 사사로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게 하였다. 그것을 먹는다면, 질기고 딱딱하여 체하거나 구역질이 나지 않겠느냐.

    [『주역』태괘에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천지가 사귐이 태(泰)이니, 군주가 보고서 천지의 도를 재성하며 천지의 마땅함을 보상하여 백성을 돕는다.” 주희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재성(財成)’은 지나친 것을 덜어내기 위한 행위로, ‘보상’은 모자란 것을 메우기 위한 행위로 보았다. 군주는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을 본받아서 법을 만듦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여, 그들의 삶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p67  범의 꾸중(호질)

    전에 내가 듣기로 ‘유(儒)’란 것은 ‘유(諛, 아첨)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갖 나쁜 이름을 끌어 모아 제멋대로 내게 갖다 붙이더니만, 지금은 서둘러 면전에서 아첨을 늘어놓으니 그 따위 말을 대체 누가 믿겠느냐. 천하의 이치는 하나일 따름이니, 범이 정말 악하다면 인간의 본성 또한 악할 것이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면 범의 본성 또한 착할 것이다. 네 놈들이 하는 말은 모두 오상(인, 의, 예, 지, 신의 오행. 또는 부의(父義), 모자(母慈), 형우(兄友), 제공(第恭), 자(子孝)의 오교(五敎)를 가리키기도 하며,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유유신의 오륜을 가리키기도 함)을 벗어나지 않고, 경계하고 권장하는 것은 늘 사강[예(禮), 의(義), 염(廉), 치(恥)]에 있다.

p68~69 - 범의 꾸중(호질)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 기르는 인의 견지에서 논하자면, 범과 메뚜기・누에・벌・개미와 사람이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르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또 선악을 척도로 함아 따져 보더라도, 벌과 개미의 집을 아무렇지도 않게 약탈하는 놈은 천하의 큰 도둑이 아닐 수 없고, 내키는 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아 훔쳐 가는 놈은 인의를 해치는 큰 도적이 아닐 수 없다. 

→ 세상이 인간 중심으로 있어 미물에 대한 논의에 늘 하대가 기본이다. 미물이라 칭하는 자체부터가 그러할 지 모른다. 인간의 법도, 인의예지는 이러한 것들을 아우를 터인데.

p71  범의 꾸중(호질) - 호질 후지

    “하늘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

    나는 언젠가 이 대목을 읽다가 강한 의혹이 들어, 감히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면, 오랑캐가 중화의 문물을 변개시키는 것은 엄청난 치욕이다. 그러니 저 백성들의 원통함이 어떠하겠는가. 또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 덕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그렇다면 귀신들은 대체 어떤 냄새를 찾아오시겠는가.”

    그런 탓에 사람이 처한 위치에 따라 본다면, 중화와 오랑캐는 명확히 다르지만, 하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든 주나라의 면류관이든 다 나름의 때를 따라 마련된 것일 뿐이다. 유독 청나라 사람의 홍모(紅帽)에 대해서만 꼭 의심을 던질 이유가 없다. 이에 그동안 하늘이 정한다는 이방과 사람들의 뜻이 우선이라는 견해가 유행하였고,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원리는 도리어 후퇴해서 기수(氣數)의 형세에 따르게 되었다. 현실 세계를 옛 성현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장 천지의 기수가 이렇구나 한다. 슬프다! 이것이 정말 기수의 문제란 말인가.

→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무엇인가에 따라 세상에 대한 해석은 달라진다. 가끔 어떤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사물을 보는데 방해된다.

p75 - 호질의 의미(편역자)

    [범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은 단지 북곽선생의 위선이나 허위의식을 꾸짖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문명의 훨씬 근원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 핵심을 간추리면, 인성과 물성은 하나라는 것. 즉, 인간과 동물 사이의 근본적 위계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물들을 착취함과 동시에 그 더럽고 비겁한 짓거리를 온갖 도덕적 명분을 동원하여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범은 인간문명의 온갖 잔혹하고 이기적인 속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호질」이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근대문명이야말로 동물의 무자비한 착취와 자연에 대한 약탈에 근거하고 있는 까닭이다.]

→ 허위의식을 꼬집으며 그에 대한 반성과 변화를 촉구하나, 먼저 비난을 접수하므로 연암의 글에 대한 반감이 그토록 빗발쳤을 것이다.

p91~92 애석하구나! 옛 역사에 이르기를, “문자가 생기기 전엔 연대와 도읍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자가 생긴 이후 21대 3천여 년 동안,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하였던가. 이른바 유정유일(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실행한다는 뜻)이란 심법으로 했으리라. 하여, 나는 천하를 다스림에는 요・순씨가 있음을 알고, 홍수를 다스림에는 하우씨가, 정전 제도를 마련함엔 주공씨가 학문의 선전엔 공자씨가, 재정과 세금을 고루 분배함엔 관중씨가 있음을 알 따름이다. 하지만, 알지 못하겠구나! 그밖에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심력을 기울였으며 그 총기를 펼쳤을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기초하고 빛내고 다듬었을 것인가. 어디 그 뿐이랴!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저 21대 3천여 년 동안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에 심력을 기울이고, 총기를 펼치고, 기초하고, 빛내고다음었을 것인가. 생간건대, 여러 성인이 그 두뇌와 심력과 총기를 다 기울여 기초하고 빛내고 다음은 것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길이길이 만세토록 모두 함께 그 복락을 누리고자 하였음일까.

    이러다 보니, 그 중에 누구라도 심술(心術)이나 사업이 서로 다르면 상대편을 바로 ‘우인(愚人)’이라 지목할 뿐 아니라, 가문과 나라를 말아먹을 자라고 신랄하게 헐뜯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의 음탕함과 영리함이 도리어 성인을 능가하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오히려 환영을 받았다. 이를테면, 겉으로는 그의 몸을 배격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그의 공훈을 본받고, 또 겉으로는 그를 욕하면서도 속으로 그 잇속을 챙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이 온갖 기이한 술법과 음흉한 기교가 날로 증식되기에 이르렀다.

→ 연암의 글들은 이어짐이라 어디서, 달랑 한 문장만을 떼어낼 수가 없다.

p95 성인이 일찍이 그 물음에 대답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씀하셨으나 이는 다만 말뿐이었지, 몸소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세의 임금들이 반드시 그 학문이 성인보다 나은 것이 아니로되 곧 이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역시 어찌 중화의 민족만 그러하리오. 이적(夷狄) 출신으로 중원의 임금이 된 자치고 일찍이 도를 계승하여 몸소 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의식(衣食)이 넉넉한 뒤에야 예절을 지킬 수 있다 하였은즉, 후세의 임금들 중에 그 나라를 튼튼히 하고 그 군사를 굳세게 하고자 한 자가 차라리 각박하다, 무정하다 등의 평가는 받을지언정, 그 자신을 위해서 사리를 탐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그 심술의 기미를 살핀다든지, 혹은 그 사업을 공사의 사이에서 분별하자면, 저들이 정일의 방법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 공리 효과의 측면에서 보자면, 비록 그 방법이 오랑캐에서 나왔다 할지라도, 그 여러 가지 미덕을 모아서 행함에 있어서는 역시 정일을 본받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이른바 재주와 역량이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다 함이 오늘날의 중국을 이룩한 것이며, 21대 3천여 년 동안의 모든 제도를 이에서 가히 상고할 수 있겠다.

p106 “이 세상에 진실로 한 사람의 지기만 만나도 아쉬움이 없으리라.” 아아, 사람들은 늘 스스로를 보고자 하나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즉 때로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자신을 돌아볼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른 존재와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워진다. 성인은 이 도를 운용하셨기에 세상을 버리고도 번민이 없었고,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공자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하였고, 노자도 역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로다’ 하였다. 이렇듯이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원치 않아서 자신의 옷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의 외모를 바꾸거나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곧 성인과 부처, 현자와 호걸 등이 세상을 하나의 노리개 정도로 간주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과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럴 때,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그 자취는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지기가 없었던 적은 없다.

→ 그럴까.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나의 자취는 드러나게 될까. 아직, 미천하여 나를 알아보는 이가 없기에 나는 늘 정진하여야 하는데, 이다지도 게으른 것인지.

p110 - 북경의 이모저모(황도기략) → 황도기략, 알성퇴술, 앙엽기를 제외하고 열하일기 전반이 열하에 머물 때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이후의 행적에 대해 집필하지 못하였기에 열하일기라 총칭하게 된 것. 이로써 열하일기는 사실 미완의 책이라 하고 있다. 즉, 안타깝게도 더 많은 연암의 글들이 기록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중국에서 돌아온 지 오래되어 당시를 회상하노라면 감감하기는 아침놀이 눈을 가리는 듯하고, 아득하기는 마치 새벽 꿈결의 넋 빠진 상태 같다. 그래서 남북의 방위가 바뀌기도 하고 이름과 실물이 바뀌기도 하였다.

p119 - 북경의 이모저모(황도기략)

    내친구 담헌 홍대용은 일찍이, 서양인들의 기술을 논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 선배들 가운데 김가재(김창업)와 이일암(이기자) 같은 이들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배들이 가히 미칠 바가 아니지. 하지만 천주당에 관한 기록에는 다소 유감스러운 바가 없지 않네. 그도 그럴 것이 범상한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바이고, 게다가 얼핏 보았을 테니 제대로 알아내기도 어려웠을 테지. 이후에 간 사람들의 경우엔 다들 천주당을 보긴 했으나 그저 괴이하게만 여겨 돌아보지도 않았다네. 이 두 분이 음률에 밝질 못하여 잘 분별을 못했던 게야. 나 또한 귀로 소리를 밝게 듣고, 눈으로 만든 솜씨를 살피긴 했어도 그걸 고스란히 글로 옮기기는 쉽지 않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구만.”

p125 - 북경의 이모저모(황도기략)

    아, 슬프도다. 이 금은 반드시 길가에 굴러다니다가 또 다시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우연히 그 금을 얻은 자는 가만히 하늘에 감사를 드렸으리라. 그렇지만 이 금이 남의 무덤에서 훔친 물건인지, 독약을 먹는 자들의 유물인지, 또 이 금 때문에 몇 천 몇 백 명이 독살되었는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돈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어인 까닭인가? 원컨대, 천하의 인사들은 돈이 있다 하여 꼭 기뻐할 일도 아니요, 없다고 하여 슬퍼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까닭없이 갑자기 돈이 굴러올 때는 천둥처럼 두려워하고 귀신처럼 무서워하며, 풀섶에서 뱀을 만난 듯 오싹하며 뒤로 물러서야 할 터이다.

→ 돈이라면 어디서 굴러왔다 한들, 늘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이다. 온갖 종류의 악행들이 돈을 맞이하기 위해 벌어지고 되풀이 된다. 생각해보면, 어디서 어떻게 굴러 왔는지 모를 돈들을 늘 아름답다, 깨끗하다 받들어 모시고 있다. 더러운 곳에 발을 디디게 되면 당장 닦아 내면서도 그곳에 있던 지폐는 서슴지 않고 주워들고 보는 것을 보면...

p136 - 공자묘를 다녀와서(알성퇴술)

    뜰에는 여러 관측하는 기계를 놓아 두었는데, 모두 구리로 만들었다. 이 기계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모양들도 모두 기이하여 사람의 눈과 정신을 얼떨떨하게 하였다. 대에 올라가면 성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을 텐데, 지키는 자가 막아서 올라가지 못하고 돌아섰다. 대체로 대 위에 진열한 기계들은 아마도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璇璣玉衡)과 같은 천문기구의 한 종류 같아 보였다. 뜰 한복판에 놓여 있는 물건들은 내 친구 정석치의 집에서 본 것들과 비슷했다. 정석치는 일찍이 대나무를 깎아 손으로 여러 가지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튿날 가보면, 기계들을 모두 부서뜨려 더 볼 수가 없었다. 언젠가 홍대용과 함께 그의 집을 찾아갔는데, 두 친구가 서로 황・적도와 남・북극의 이야기를 하다가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였다. 나한테는 그 이야기들이 아득하기만 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자느라고 듣지 못하였지만, 두 친구는 새벽까지 어두운 등잔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석치의 말 중에, “우리나라 강진현 북쪽 끝에 나온 지역은 북극 몇 도인데, 황하가 회수에 들어오는 어귀와 직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탐라의 귤이 바다를 건너 강진에만 오면 탱자가 된다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리라.


막북행정록

p142~143 - 막북행정록 서

    열하는 장성 밖의 요충지다. 강희제 때부터 여름이면 늘 황제가 이곳에 행차하여 더위를 피하곤 했다. 궁전들은 별반 화려한 장식없이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이 궁을 ‘피서산장’이란 부른다. 황제는 이곳에서 때로는 책을 읽고 때로는 숲과 시내 사이를 거닐며 유유자적 노닐었다. 겉으로는 태평하게 휴가를 즐긴 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험준한 요새인 이곳에서 몽고의 목을 틀어막고자 함이었다. 북쪽 변방 깊숙이 자리 잡아, 명목은 피서지만 사실은 황제 자신이 북쪽 오랑캐를 막고 있는 셈이다. 이는 마치 원나라 시절, 황제가 해마다 풀이 돋으면 수도를 떠났다가 풀이 시들면 남으로 돌아온 것과 같다. 대체로 황제가 북쪽 가까이 머무르면서 자주 사냥을 나서면 북방 오랑캐들이 함부로 내려와서 말을 방목하지 못한다. 그래서 황제의 행차시기를 늘 풀이 돋아나고 시드는 때로써 정하는 것이다. 피서라 이름하게 된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올봄에도 황제가 남방을 순행하고서 곧바로 이곳 열하로 왔다고 한다. 

→ 그러니까 한마디로 몽고의 힘이 강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오랑캐라 칭하는 이들이 강하니 원통하고 분하기 그지없었을 터, 그리하여 더욱 더 이들의 힘을 막기 위한 방안이 필요했을 터.

p144 - 막북행정록 서

    열하에 와서 산동 도사 학성과 함께 여정의 멀고 가까움을 논했는데, 그 역시 열하는 처음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대개 열하에서 북경이 700여 리입니다. 강희 황제가 해마다 여기에서 피서를 했는데, 석왕(황제의 아들)과 액부(공주의 남편, 즉 부마의 만주어), 그리고 각부 대신들이 닷새에 한 번씩 조회를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열하까지 오는 도중은 여울이 소용돌이 치고, 큰 물결이 사납게 일고, 고개와 언덕은 높고 험준하여 모두들 여기까지 오기를 꺼렸지요. 그래서 강희 황제가 일부러 역참을 줄여 400여 리로 만든 것이지, 실제론 700리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모든 신하들이 수시로 말을 달려와서 황제께 일을 아뢰다 보니 이 먼 데를 문지방 드나들 듯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말안장 위를 떠날 겨를이 없었지요. 이는 ‘편안할 때 오히려 위태로움을 잊지 말라’는 성군의 깊은 뜻이라고들 합니다.

p150 나 역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먼 길을 겨우 쫒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먼 길을 떠나자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요, 또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연경 유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예전에도 황제가 우리나라 사신단을 각별히 배려하여 곧바로 돌아가도록 한 특별 은전이 있었고 보면,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게 십중팔구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정사가 이렇게 충고했다.

    “자네가 만 리 길을 마다 않고 여기까지 온 건 천하를 널리 구경코자 함이거늘, 대체 뭘 망설이는가. 만일 돌아간 뒤에 친구들이 열하가 어떻던가 하고 물어오면 뭐라 답할 텐가. 게다가 열하는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인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놓칠 셈인가.”

→ 생각하고 바랬음에도 막상 망설여지는 때가 있다. 그때 누군가의 한마디는 참 중요하다. 그 한마디에 의미를 붙여 결정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편으론, 새삼스레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p153 인간사 중에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 생이별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다. 하나는 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그 순간의 이별은 굳이 외로움이라 할 것도 못 된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자애로운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아들, 신의 있는 남편과 올곧은 아내, 의로운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 피로 맺은 벗과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들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을 받들거나 또는 궤석에 기대어 명을 받을 때,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뒷일을 당부하는 것은 천하의 부자・부부・군신・붕우가 똑같이 겪는 바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자애로움과 효성, 올곧음과 믿음, 의로움과 충성, 피로 맺은 우정과 진실한 마음 등은 한결같다 할 것이다. 사람마다 한 가지로 겪는 바요, 사람마다 한결같이 솟아나는 정이라면 이것은 천하의 순리일 것이다. 그 순리를 행하는 것으로는 ‘삼 년 동안 아버지의 기법을 바꾸지 말라’라든지, ‘죽은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다’라고 말하는 데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으로는 부모의 상에 너무 슬퍼하다 목숨을 잃는 이, 아들을 잃고 눈이 먼 이, 질동이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는 이, 거문고 시위를 끊은 이, 숯을 머금고 벙어리가 된 이, 통곡을 하다 성을 무너뜨린 이, 나랏일을 위하여 몸을 송두리째 바친 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죽은 이에겐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그들에게 괴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p155 또 사람들이 흔히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즈음에 서로 위안하는 말이라고는 고작 ‘이치를 받들라’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건 곧 이치에 따르라는 말일 뿐이다. 만일 그 이치를 따른다면, 실로 천하에 괴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하여, 나는 말한다.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은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굳이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된다”라고.

    그러고 보면, 이별의 괴로움 중에 하나는 가고 하나는 남겨지는 때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때는 무엇보다 그 이별의 장소가 슬픔을 부추기는 법이니, 그것은 정자도 아니요, 누각도 아니요, 산도 아니요, 들판도 아니요, 오직 물을 만나야만 한다. 그렇다고 꼭 큰 것으로 강과 바다거나 작은 것으로 도랑과 개천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흘러가는 것이면 모두 물이 된다.

→ 죽음으로 인한 이별 앞에 장소로 인한 이별은 정말이지 굳이 괴로움이랄 것이 못 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공간으로 인한 이별에 괴로움이 느껴지는 것은 그저 이별이란 죽음과 같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p158 장복과 나는 어버이와 아들의 친함이나 임금과 신하의 의로움도 아니요, 남편과 아내의 지극한 정이나 절친한 벗의 사귐도 아니다. 그런데도 생이별의 괴로움이 이토록 지극한 걸 보면, 이별의 장소가 오직 강이나 바다, 또는 저 하수의 다리인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를테면, 이국이나 타향에서라면 이별에 알맞지 않은 곳이 없는 셈이다.

    아아, 슬프다. 예전 소현세자께서 심양에 계실 때 당신 신하들이 머물고 떠날 때나 사신들이 오가는 무렵에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임금이 욕되면 신하된 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도 이 마당에선 오히려 평범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차마 어찌 머물고 어찌 떠나갔으며, 차마 어찌 견디고 어찌 보냈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비통한 순간이었으리라.

→ 연암이 생각하며 비통해 하는 이 글을 읽는 나조차도 그 비통함이 느껴진다. 이것은, 연암의 글이 한 몫 하였을까?

p175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은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문화재에 낙서하는 것은, 안되는 일이옵니다....그 옛날의 모습을 생각하며 이 풍경이 아득하니 좋다. 별빛아래서 술에 먹을 갈고 쓰는 주서라니. 어느 때에, 무언가 전혀 어울리지도 않은 듯한데도 불시에 글을 쓰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그 어떤 도구가 없을 때라도 두리번 거리며 찾아내어 끄적거리고 싶은 욕구.

p178 무장이 입는 옷을 철릭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곧 군복이다. 명색이 군복인데 어찌 소매가 중의 장삼처럼 넓단 말인가. 지금 말한 이 여덟 가지 위태로움이 모두 넓은 소매와 긴 한삼 때문이거늘 오히려 이러한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여기다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다.

→ 옷 한 벌 한 벌에서도 연암의 세심한 관찰이 돋보인다. 사물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진정 이용후생의 정신 아니겠는가.

p180 수역이 주부한테 말했다.

    “옛 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말할 때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물가에 선 것’이라 했지요. 오늘밤 우리가 실로 그 같은 꼴이 되었구려.”

    “어째서 그렇단 말씀이오?‘

    “소경을 보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이 여기는 것이지, 결코 소경 자신이 위태로움을 느끼는 게 아니라오. 소경의 눈에는 위태로운 바가 보이지 않는데, 대체 뭐가 위태롭단 말이오?”

→ 한편으론 그렇다. 소경의 눈엔 위태로운 것이 보이지 않아, 그것을 느낄 수 없다. 다만 소경을 보고서 지나는 이들이 위태롭다, 위태롭다 내뱉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또한 아무 두려움이 없을지 모를 소경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외려 두려움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를 일.

p182~183 -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야출고북구기)

    내가 이번 여행을 더더욱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만리장성 밖으로 나와서 북쪽 변방에 이른 것이니, 이는 선배들도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하지만 깊은 밤에 소경처럼 걷고 꿈결처럼 지나다 보니 아쉽게도 산천의 형세와 관방(關防)의 웅혼하고 기이한 바를 제대로 다 보질 못했다.

    때마침 어슴푸레한 달빛이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관내의 양쪽 벼랑은 깎아지른 듯 백 길 높이로 우뚝 섰고, 길은 그 사이에 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담이 작고 겁이 많아 대낮에도 홀로 빈방에 들어가거나 밤에 침침한 등불을 만나면 언제나 머리털이 쭈뼛하고 심장이 쿵쿵 뛰곤 했다. 올해 내 나이 마흔네 살이지만 무서움을 타는 성정은 어릴 때와 같다. 지금 같은 밤에 홀로 만리장성 아래 서 있으니, 달은 떨어지고 강물은 울며 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은 허공을 날아다닌다. 마주치는 모든 경계마다 놀랍고 신기하며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홀연 두려운 마음이 없어지고 특이한 흥취가 왕성하게 일어나 공산의 초병이나 북평의 호석도 나를 놀라게 하지 못할 정도다. 이 점, 내 스스로 더더욱 다행스럽게 여기는 바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붓이 가늘고 먹이 말라 글자를 서까래만큼 크게 쓰지도 못하는 데다, 시를 지어 장성의 고사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조선으로 돌아가면 고을에서 다투어 몰려와 술을 주고받으며 열하에 대해 물을 것이다. 그러면 이 기록을 꺼내 놓고 머리를 맞대고 한 번 읽으면서 책상을 치며 이렇게 외쳐 보리라.

    “기이하구나! 참으로 기이하구나!”  

→ 기이하구나, 참으로 기이하구나! 연암이 그려내는 당시의 묘사가 참 세밀하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인 양 취한다.

p184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강물 소리는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내 집은 깊은 산 속에 있다. 문 앞에 큰 사내가 있는데, 매번 여름철 큰비가 한 번 지나고 나면 물이 급작스레 불어나 항상 수레와 기병, 대포와 북이 울리는 듯한 굉장한 소리를 듣게 되고 마침내 그것은 귀에 큰 재앙이 되어 버렸다.

    내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 가만히 이 소리들을 비교하며 들어본 적이 있다. 깊은 소나무 숲이 퉁소 소리를 내는 듯한 건 청아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산이 갈라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건 성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개구리 때가 다투어 우는 듯한 건 교만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만 개의 축이 번갈아 소리를 내는 듯한 건 분노한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마구 쳐대는 듯한 건 놀란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찻물이 보글보글 끓는 듯한 건 층취 있는 마음을 들은 탓이요, 거문고가 우조로 울리는 듯한 건 슬픈 마음으로 들은 탓이요, 한지를 바른 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건 의심하는 마음으로 들은 탓이다. 이는 모두 바른 마음으로 듣지 못하고 이미 가슴속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소리를 가지고 귀로 들은 것일 뿐이다.

→ 연암이 말처럼 우리들은 사고의 틀에 갇히는 경우가 무수하다. 어둠 속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실체도 없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인지과정 때문이다. 인식을 변화시키면 두려움이나 외로움, 괴로움이 쉬이 오지 않을 터인데도, 습관처럼 가지게 되는 동일한 인지와 그에 따른 반응들이 있게 된다...아마도 폭넓은 사고는 더 많이 배우고 익혀야 할 일이다.

p185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험을 직접 보며 벌벌 떠느라 그 눈이 근심을 불러온다. 그러니 어찌 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느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 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밝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 위험 천만한 순간에 깨달아지는 것. 깨침은 이렇게 두려움을 뚫고도 달려온다.

p185 -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옛날 우임금이 강을 건너는데 황룡이 배를 등에 짊어져서 몹시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판단이 먼저 마음속에 뚜렷해지자 용이든 지렁이든 눈앞의 크고 작은 것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다. 외물은 언제나 귀와 눈에 누가 되어 사람들이 보고 듣는 바른 길을 잃어버리도록 한다. 하물며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험난하고 위험하기가 강물보다 더 심하여 보고 듣는 것이 병통이 됨에 있어서랴. 이에, 내가 사는 산속으로 돌아가 문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금 곱씹어 볼 작정이다. 이로써 몸가짐에 재빠르고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바이다.

p188~189 열하까지 오는 나흘 밤낮 동안 한 번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하인들이 가다가 발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존다. 나 역시 졸음을 이길 수 없어, 눈시울은 구름장을 드리운 듯 무겁고 하품은 조수가 밀려오듯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눈을 빤히 뜨고 사물을 보긴 하나 금세 기이한 꿈에 잠겨 버리고, 옆사람에게 말에서 떨어질 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일깨워 주면서도 정작 내 몸은 안장에서 스르르 옆으로 기울어지곤 한다. 솔솔 잠이 쏟아져서 곤한 잠을 자게 되니 천상의 즐거움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 달콤하기 그지없다. 때로는 가늘게 이어지고, 머리는 맑아져서 오며한 경지가 비할 데 없다. 이야말로 취한 가운데 하늘과 땅이요, 꿈속의 산과 강이었다. 바야흐로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라기처럼 울려 퍼지고, 공중에선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깊고 그윽하기는 도교에서 묵상할 때 같고, 놀라서 깨어날 때는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와 다름이 없었다. 여든한 가지 장애(팔십일난, 불교에서 말하는 81가지의 미혹)가 순식간에 걷히고, 사백네 가지 병이 잠깐 사이에 지나간다. 이런 때엔 추녀가 높은 고대광실에서 한 자나 되는 큰상을 받고 아리따운 시녀 수백 명이 시중을 든다 해도,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돌방에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 몇 잔에 취한 채, 장주도 호접도 아닌 그 사이에서 노니는 재미와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 그냥 내뱉는 말들이 좋다. 특별하지 않아도 그 정경이 그려지며 미소짓게 된다.

p189 달콤한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길가에 서 있는 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맹세하였다.

    “내 장차 우리 연암 산중에 돌아가면, 일천 일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희이선생(송나라 때 진박이란 도인으로 한번 잠들면 천 일씩 잤다)보다 하루를 더 자고, 또 코 고는 소리를 우레처럼 내질러 천하의 영웅이 젓가락을 놓치게 하고, 미인이 기절초풍하게 할 것이다. 만약 이 약속을 어긴다면, 내 기필코 너와 같이 돌이 되고 말 테다.”

→ 이런 것을 문자메시지로 받았다면 나는 오늘날 이모티콘을 날릴 것이다. ㅋㅋㅋ 웃음과 함께.

p200~201 - 고북구 장성 밖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구외이문)

    보감(寶鑑)이란 무슨 의미일까. 햇빛이 뚫고 비치는 곳에는 오래 묵은 음기가 풀리듯이 살이 나뉘고 살갗을 가르는 것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책장을 펼치면 분명하고 명백하게 거울처럼 환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옛날 나익지가 『위생보감』을 짓고, 공신(명대의 어의)이 『고금의감』을 지었을 때 모두 이름에 ‘감’을 썼으나, 과장한다는 혐의는 받지 않았다.

    가만히 경험하고 그것을 말하건대, 사람에게는 오장(五葬)뿐이요, 병은 칠정(희노애락애오욕의 7가지 감정)에 그치는 것이다. 그 사이 타고난 품이 편벽되었는가 온전한가, 전염됨이 얕은가 깊은가, 증상의 변이가 통하는가 막히는가의 두 가지 증후가 있고, 맥의 움직임에는 부(맥진 표면에 대서 느끼는 것), 중(살짝 눌러 느끼는 것), 침(깊게 꾹 눌러 느끼는 것)의 삼부가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밭이랑처럼 갈라져 있어 넘을 수 없거니와 횃불처럼 밝아서 가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황이 체한 것을 내리는 줄 알면서도 속을 차갑게 하는 것인 줄은 알지 못하며, 부자(附子)가 보허하는 줄만 알고 독을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깊은 도를 깨친 사람은 병이 나기 전에 다스리고 이미 병 든 뒤에 약을 쓰지 않는 법이니, 병이 난 뒤에 다스림은 가장 하책임에도 다시금 용의에게 맡긴다면 어찌 병이 낫겠는가. 심지어 사사로운 이익을 품은 자는 애초에 병 없는 사람을 다스려 공적을 남기려 하고, 처음 의원에 종사한 자는 병자를 이용하여 공부하려 한다. 『주역』의 무망(无妄)의 병은 약을 쓰지 않으면 기쁨이 있으리라‘는 점괘나, 『논어』의 남쪽 사람들 말에 사람이 항심(恒心)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될 수 없다’는 경계는 이런 무리들 때문에 있는 듯하다. 옛날에 편작이 이르기를 ‘사람들의 병은 병자가 많은 것이고, 의원의 병은 치료법이 적은 것이다’ 했으나, 헌원씨와 기백 이후로 대대로 명의가 있어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저술의 번다함이 거의 한우충동할 만큼이나 치료법의 적음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술을 써서 병에 듣고 안 듣는 것이 있으니, 옛 사람들이 각기 학설을 끼친 탓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정미롭게 선택하지 못한 자는 설명이 상세하지 못하고, 하나에 집착하는 자는 옳은 일을 해치게 된다. 이는 병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마음은 고쳐주지 못하고, 마음을 고치고자 하면서 그의 뜻과 통하지 못한 까닭이다.

→ 의사의 세 부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병만 고치는 의사, 마음이 상처까지도 치료하는 의사...지난 날 나의 병을 토론으로만 삼던 이들에게 굳이 짜증을 내진 않겠다. 그로 인해 더욱 더 정진하여 더 좋은 치료로 보답했다면..


태학유관록

p212 우리나라 양반들은 나면서부터 존귀한 체하는 태도가 심해, 중국 사람을 보면 만주족이건 한족이건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되놈’이라 부르며 깔본다. 거만한 체 하는 것이 몸에 굳어져, 그것이 아예 태생적 습속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 저들이 어떤 인물인지, 어느 정도의 관직에 있는지는 숫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을 터놓고 대할 리야 더더욱 없는 법이다.

→ 정말이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러한 특성은 너무나 싫다. 허나, 나 역시 내 몸 곳곳에 그러한 피가 흐리고 있다는 점을 의심할 순 없다. 그리하여 늘, 조심하고 조심할 일이다.

p216 우리나라 선배 학자들은 태어나서 병들고 늙어 죽을 때까지 바다 저편의 한 모퉁이를 떠나지 못한 채, 반딧불이 사라지고 버섯이 마르는 것처럼 잦아드는 처지랍니다. 그러니 비록 하잘것없는 시문이라도 큰 나라의 책에 수록된다는 건 실로 영광스런 일이지요.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물에 빠진 모수나 좌중을 놀라게 한 진공처럼 이름이 잘못 기록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선배 유학자 중에 이이라는 어른이 있는데, 호는 율곡입니다. 또 이정구라는 상공이 있는데, 호는 월사(月沙)입니다. 그런데 『시종』에는 이정구의 호가 ‘율곡’이라 잘못 기록되어 있답니다. 또 월산대군(조선 9대왕 성종이 형은 공자인데, 이름이 ‘정’이라 그런지 여자로 잘못 알려져 있구요. 그런가 하면, 허봉의 누이동생 허난설헌은 여관(女冠), 즉 여도사라 기록되어 있더군요. 우리나라엔 본디 ‘도관’이니 ‘여관’이니 하는 것이 없답니다. 또 그의 호를 경번당이라 가록했으니, 이는 더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허난설헌이 김성립이란 자에게 시집갔는데, 김성립의 얼굴이 아주 못생겼더랬죠. 그래서 벗들이 그를 놀리느라 그의 처 허씨가 당나라의 미남 시인이었던 두번천을 사모한다는 말을 지어낸 것입니다. 규중의 아녀자가 시를 읊는 것도 그다지 칭찬할 만한 일이 아닌데, 거기다 두 번천을 연모한다는 말까지 사방에 퍼졌으니 어찌 기가 막하지 않겠습니까.“

→ 그저 허난설헌에 대한 기록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알지 못한 이런 에피소드를 접하니 또 한번 울적해진다. 시대를 뛰어넘어 아파할 일이다. 그녀의 재기와 그녀의 스물일곱 인생에 헌화한다.

p218 아아, 슬프구나. 이 좋은 달밤에 함께 구경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 우리 일행만이 잠들었을까. 도독부의 장군도 잠들었으리라. 쓸쓸함을 달래며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이 베게에 머리를 묻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p228 『유계외전』에 보면, 효자가 간을 베어 그 어버이의 병을 낫게 한 일이 있습니다. 또 명말의 유명한 효자인 조희건은 가슴을 가르고 염통을 꺼내려다가 잘못해서 창자를 한 자 남짓 베어 내어 이것을 삶아 그 어머니의 부스럼을 고쳤으나, 나중에는 그 상처가 아물어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본다면, 손가락을 잘랐다거나 똥을 맛보았던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며, 혹은 눈 속에서 죽순을 캐었다거나 얼음 구멍에서 잉어를 잡았다거나 하는 것들은 어리석은 일인 셈이죠.

p230 "모양도 흉하고 걷기에도 불편한데, 대체 왜 전족을 합니까?“

     “만주 여자들과 똑같이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그럴 겁니다.” “죽어도 고치지 않는답니다.”

→ 필요에 관계없이 명품백을 사는 이들. 노스페이스가 고가 행진을 하다가 다시 구스다운이 이어졌고, 또 다시 어떤 무언가로 대체될까. 이것이 강남파들이 다른 이들과 똑같아 보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며, 또 비강남파는 그들과 같아 지려 하기 때문이라는 현실을 보면서 참 서글프다.

p246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저들을 겁주기 위해 부러 대담한 척한 것일 뿐이다. 솔직히 이건 겁쟁이가 호기를 부린 것이지 용기있는 행동은 아니다. 내가 찬술을 따라 오라고 했을 때 여러 오랑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단숨에 주욱 들이켜는 걸 보고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기선 제압에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고선 엽전 여덟 푼을 꺼내어 술값을 치르고는 여유 있게 몸을 일으키려는데, 아뿔사! 오랑캐들이 모두 의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자리에 앉기를 청하는 게 아닌가. 그 중 한 놈이 제 자리를 비우고는 나를 붙들어 앉힌다. 딴엔 호의를 베푼 것이다. 순간 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 큰 덩치의 연암의 모습을 떠올려 보며 정말 웃음이 나온다.

p251 "글월은 말을 다 전달할 수 없고, 그림은 뜻을 다 표현할 수 없다“

p270 -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황교문답) : 천하의 형세

     사람들의 글을 보면 비록 그것이 심상한 두어 줄 편지라 해도 반드시 역대 황제들의 공덕을 늘어놓는 한편, 당세의 은택에 감격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이는 모두 한인들의 글이다. 스스로 명나라의 유민으로서 늘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서, 혹시나 의심받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 때문에 입만 열면 칭송을 하고 붓만 들면 아첨을 해대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데 한인들의 마음 또한 괴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271 -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황교문답) : 활불의 보경

    『법화』니, 『능엄』이니 하는 모든 불경의 게(偈)들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그 책에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곧 화를 입는다고 반복해서 말하지요. 중생들이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혀 착한 길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그 거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울은 글자가 없는 경전이요, 경전은 또 구리로 만들지 않은 거울인 셈이지요. 내가 비록 열흘 동안 담백한 음식을 먹고, 열흘 내내 목욕을 했다고 해도, 혹시 간 한 귀퉁이나 폐 한구멍에 터럭만한 흠이라도 있다면 어찌 세 가지 빛깔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p277 -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황교문답) : 천자만년수

    라마란 서번 말로 덕이나 지혜라는 의미로, 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도 몽고에선 중이 되면 모두 라마 복장을 차려입습니다.

p280~281 -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황교문답) : 윤회와 환생

    저녁에 윤가전을 찾아가 물었다.

    “법왕이 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과 윤회는 어떻게 다릅니까?”

    “남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은 환생이라고 합니다. 이 몸뚱아리란 바람과 비,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는 까닭에 머리털은 학처럼 희어지고 가죽은 닭처럼 쭈그러져 늙어 사그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흙이나 물, 바람, 비 등으로 화해 버리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밝게 빛나는 지혜와 금강의 보체(寶體)는 본디 젊지도 늙지도 않는 것입니다. 장작 하나가 다 타고 나면 다른 나무로 불이 옮겨 붙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비유컨대, 천 리를 가는 자가 집을 짊어지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라, 반드시 숙소를 옮겨 가면서 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천하에 다정한 사람이라 해도 주막집에 정이 들었다고 그대로 눌러앉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불이 장작에 인연하여 일어나면 잠시 동안은 불과 나무가 서로 뒤엉켜 뜨겁게 타오르지만, 불이 다른 나무로 옮겨 붙고 나면 이미 타버린 재를 연모하는 법은 없지요. 법왕이 다른 몸에 태어난다는 것도 이런 말일 겁니다.

    환생은 윤회와 다릅니다. 사실 이 윤회설이란 불가의 율법입니다. 저들이 말하는 윤회설은 당시 임금들이 제정한 규범으로, 오복과 오형의 조항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상을 주는 것과 사형에 처하는 바가 각기 공교로운 문장을 이루고 있어 마치 거울에 비추는 듯합니다. 공과 죄가 나타나기도 전에 우선 법조항부터 갖춘 셈이지요. 불교를 믿는 자들은 세간의 공과 죄가 정당하지 않고 상과 벌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발로 밟을 수 있고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겨, 깊고 어두워 가늠하기 어려운 것으로 옮겨,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권면하고 벌을 주려는 것이지요. 옛사람들이 말한, ‘임금의 권세를 은밀히 조종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유가에서 반드시 그들을 원수처럼 공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인이 도를 펼치고 교를 전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천지는 한없이 크고, 풍속 또한 제각기 다를 뿐 아니라, 기운도 각기 다르고 편벽된 바가 있습니다. 하여, 이치 또한 경우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물이 그릇의 모양에 따라 둥글기도 하고 모나기도 한 것과 같은 셈이죠. 따라서 고금 천하에 윤회 또한 없다 할 수 없고, 환생 또한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화식을 끊는 사람도 없지 않고, 장생불사하는 사람 또한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미혹에 빠진 것이요, 이런 이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미혹에 빠진 것입니다. 간혹 이 같은 이치가 있을 수도 있는데, 이 간혹 있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만 가지 이치를 다 꿰어 맞추려 하거나 천하를 온통 바꾸려 한다면, 그건 더욱 미혹에 빠진 것입니다.“

→ 나는 미혹에 빠졌는가. 윤회설이 규범의 하나라는 말이 약간 충격으로 와 닿는다. 불교의 교리로 생각하다 ‘규범’이란 어감에 놀란 탓이다. 환생과 윤회에 대한 논지들, 다시 찬찬히 알아볼 일이다.

p281 “선생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이단과 우리 도를 비고해보면, 비롯 삿됨과 올바름, 순수함과 잡스러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로움을 일으키고 어짊을 행하며 잔악함을 물리치고 살육을 없애려 하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통하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p282 "천지간에는 별난 세상, 별난 사람이 다 있어서 이 도는 무명(無名)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에 따르면, 맑고 참되고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 생이라면, 때에 맞추어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랍니다. 산다고 해서 특별히 즐거울 것도 없고, 죽는다고 해서 특별히 슬플 것도 없습니다.“

산다고 해서 특별히 즐거울 것도 없고, 죽는다고 해서 특별히 슬플 것도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p290~291 달의 몸체는 항상 둥근데 햇빛을 빙 둘러 받기 때문에 땅에서 보면 달이 찼다가 기울었다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밤 온 세상 사람들이 일제히 달을 본다면, 보는 장소에 따라 살이 살찌기도 하고 여위기도 하며, 짙기도 하고 옅기도 하지 않을까요. 별이 달보다 크고 해가 땅보다 큰데도, 보기엔 그렇지 않은 이유는 멀고 가까운 차이 때문이 아닐까요.

p299 실상 내가 연암협에 들어간 이유는 일찍부터 목축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다. 연암협은 첩첩산중에 자리잡고 있다. 양쪽이 다 개간하지 않은 골짜기인 데다가 온갖 풀이 무성하여 마소, 노새, 나귀 등 몇 백 마리를 치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했다. 나는 일찍이 말 기르는 법에 대하여 이렇게 논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탓이다.

p301 말 등에다 짐을 싣는 일은 천하에 틀려먹은 노릇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레가 잘 다니지 않다 보니, 관청에서고 민간에서고 짐이란 짐은 오직 말에만 의존하여 말의 능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엄청 실어 댄다. 그래서 힘쓸 만한 먹이를 준다는 것이, 여물죽만 무작정 먹이는데 급기야 말 정강이는 힘을 못 쓰게 되고 밥굽은 흐물흐물, 한 번만 흘레를 겪으면 뒤를 못 가누게 된다.

→ 우리나라엔 수레가 잘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계속 생각해야 했다. 수레가 다니지 않았나? 그 시기에 살지 않았던 나로서는 응당 당시를 경험한 연암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겠지만 내 머릿 속에선 자꾸 수레가 아른거린다. 그리고 중국의 다양한 수레들에 대한 내용을 보면서 조금씩 수긍을 해간다.

p314 - 천하의 형세를 논하다(심세편) 

    대개 중국 선비들은 그 기질이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학문이 해박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들의 논리는 경전과 역사서를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고담준론을 일삼는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씨가 아름답지 못한 데다 질문에 급급해서 대뜸 요즘 정세에 대해 말하거나 스스로 자기 의관을 자랑함으로써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옷차림을 부끄러워하는지 어떤지를 살핀다.

p320 - 곡정 왕민호와 나눈 말들(곡정필담)

    저 또한 평소 저만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혹시나 천하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까 두렵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인지 무언가 탯덩이처럼 가슴속에 쌓여 통 내려가질 않는답니다. 특히 겨울과 여름철이 되면 더욱 괴롭기가 그지없어요. 선생의 기이한 이론도 그런 답답한 심사에서 나온 듯한데, 아닌가요?

→ 어떤 견해를 피력할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또한 다른 식으로 정리해 볼까 하면 그에 대한 반감이 바로 나타나 그대로 묻혀 버리는 경우도 많다. 나의 이론은 내 나름 펼칠 일이다. 다만 그것을 받아주는 이가 없을 때, 이후에도 그 부분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 지가 관건이다. 

p322 - 곡정 왕민호와 나눈 말들(곡정필담)

    만약 달 속에 세계가 있다면 당연히 산하가 있을 것이고, 산하가 있다면 당연히 솟은 곳과 움푹한 곳이 있을 터이니, 멀리서 서로 바라본다면 응당 그와 같을 것입니다. 굳이 이 땅의 빛이 아니어도 그림자가 절로 생길 테지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보기엔 햇빛을 빌려서 그림자를 낸다기보다는 물건들마다 그 자체에 빛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사물이 크면 신이 지키는 법이고, 물건이 오래되면 정기가 어리는 법, 늙은 조개가 구슬을 토하여 그 빛이 어두운 밤을 밝혀 주는 것은 바로 신과 정기가 저절로 한곳에 모인 까닭입니다. 이 땅덩이야말로 오래된 거대한 진주 같은 것이니, 신과 정기가 저절로 빛을 발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요? 비유하자면 군자가 화순함이 마음속에 쌓이면 그 아름다움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저 허공에 가득한 별과 은하수를 살펴보더라도 다 본체에서 발하는 빛이 있습니다.

→ 물건들 자체에 발하는 빛이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들린다.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게 바라 볼 일이다.

p324~325 - 곡정 왕민호와 나눈 말들(곡정필담)

     나는 말했다.

     “하늘이 만든 것치고 모가 난 것은 없습니다. 모기 다리, 누에 궁둥이, 빗방울, 눈물, 침 등속이라 해도 둥글지 않은 건 없습니다. 저 산하와 대지, 일월성신도 모두 하늘이 만든 것이지만 그 중에 모난 별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제가 비록 서양 사람들의 저서를 본 적은 없지만 일찍이 지구가 둥근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대저 그 형태는 둥글지만 그 덕은 반듯하며, 그의 사공은 움직이지만 그 성정은 고요합니다. 만일 저 허공이 이 땅덩이를 편안히 놓아둔 상태에서 움직이거나 구르지 못하게 우두커니 공중에 매달려 있게만 한다면 이는 곧 썩은 물과 죽은 흙에 지나니 않으니, 즉시 썩어서 사라져 버렸을 겁니다. 어찌 저토록 오랫동안 한곳에 멈춘 채 수많은 사물을 지고 실을 수 있으며, 황하와 한수처럼 큰물들을 담고서도 쏟아지지 않도록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지구에서, 모든 구역이 서로 통하여 갖가지 종류의 사물이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발은 땅에 붙이고 서 있는 것은 어디건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인들이 땅덩어리가 둥글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구른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둥근 것은 반드시 굴러간다는 이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개인적으로는 저 땅덩어리가 한 번 구르면 하루가 되고, 달이 땅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한 달이 되며, 해가 땅 덩어리를 한 바퀴 돌면 한 해가 되고, 세성(목성)이 지구를 한바퀴 돌면 일기(12년)가 되며, 항성이 지구를 한바퀴 돌면 일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 고양이의 눈동자를 보고서도 역시 땅이 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고양이의 눈동자는 열두 시각의 변화를 가지니, 한번 변하는 순간에 땅덩어리는 벌써 7천 여리나 달리는 꼴입니다.”

→ 지구는 둥글다라는 논지를 참으로 단순하게 풀어간다. 어찌 생각해 보면 논리가 맞는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p327 - 곡정 왕민호와 나눈 말들(곡정필담)

   서학이 어찌 감히 불교를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불교는 정말 고원하고 오묘합니다. 다만 비유가 많아서 끝내 귀착지가 없으니, 깨닫고 보면 결국 남는 건 ‘환(幻)’이란 한 글자뿐이지요. 저 야소교는 본래 불교의 찌꺼기를 어정쩡하게 얻은 겁니다. 중국에 들어와 중국 글을 접한 뒤, 중국인들이 불교를 배격한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그걸 본받아 불교를 배척하기 시작한 거지요. 그런 다음, 중국의 경전에서 상제나 주재자 같은 말을 빌려 와서 우리 유학에 아부하였습니다. 그 본령이야 원래 명물과 도수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우리 유학의 제이의(第二義)에 떨어진 셈입니다.

→ 불교에 남은 말이 ‘환(幻)’이란 한 글자뿐이라는 데 격한 공감이 된다.

p329 - 곡정 왕민호와 나눈 말들(곡정필담)

    아,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의 문장법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은 말에서 출발하여 글자를 배우는 것으로 나아가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글자에서 시작하여 말을 배우는 데로 옮겨간다. 중국의 문장법이 왜 그런가 하니, 글자로 인하여 말을 배우면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따로 따로 노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천’자를 읽을 때 ‘한날천’이라고 한다면, 이는 글자 밖에 다시 한 겹 난해한 언문이 있게 되는 격이다. 어린애들은 애당초에 ‘한날’이 무슨 말인 줄도 모르는데, 더군다나 천을 어찌 안단 말인가.

→ 어린 애들이 말을 배운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연암의 말처럼 우리는 글자에서 말을 배워 나간다. 말을 가르치고 있는 줄 알았건만 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제야 알았다.

p331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상기)

    아, 사람들은 세상의 사물 중에 터럭만 한 작은 것이라도 하늘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하늘이 어찌 하나하나 이름을 지었겠는가. 형체로 말한다면 천(天)이요, 성정(性情)으로 말한다면 건(乾)이며, 주재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상제(上帝)요, 오묘한 작용으로 말하자면 신이니, 그 이름도 다양하고 일컫는 것도 제각각이다.

p331 -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상기)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이 초매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초매란 그 빛이 검고 그 모양은 흙비가 내리는 듯하여, 비유를 하자면 새벽이 되었지만 아직 동이 트지는 않은 때에 사람이나 사물이 분별되지 않은 상태와 같다. 나는 알지 못하겠다. 캄캄하고 흙비 자욱한 속에서 하늘이 과연 어떤 물건을 만들어 냈을까. 국수집에서 보리를 갈면 작거나 크거나 가늘거나 굵거나 할 것 없이 뒷섞여 바닥에 쏟아진다. 무릇 맷돌의 작용이란 도는 것일 뿐이니, 가루가 가늘거나 굵거나 무슨 의도가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뿔이 있는 놈에게는 윗니를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사물을 만들면서 빠뜨린 게 있는 듯 여기는 것이니, 잘못된 생각이다.  

→ 연암은 은유적이지만 또한 직설적이다. 이와 같이 잘못되었다, 틀렸다, 바로잡아야 한다는 표현이 많다. 이것은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개 많은 글들과 말에서 ‘~것 같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배가 고픈것 같아요, 추운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틀린 것 같아요 등등. 배가 고프면 고픈 것이고, 추우면 추운 것이다. 왜 우리는 ‘~다’라는 표현보다 “것 같다”란 표현을 즐기는 걸까.

p340 - 환타지아(환희기)

    세상의 몽환이 본래 이와 같으니, 거울 속에서 보여 준 염량세태와 다를 것이 없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오만 가지 일들, 즉 아침에 무성했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의 부자가 오늘은 가난해지고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따위의 일들이 마치 ‘꿈속의 꿈’이야기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거나 살거나, 있거나 없는 일들 중에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리오. 그러므로 나,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사내와 보살심을 지닌 형제들에게 말한다. 환영인 세상에서 몽환 같은 몸으로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인연이 얽어져서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무를 뿐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 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지금 가지고 있는 돈을 흩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할지어다.

→ 환영인 세상에서 몽환 같은 몸으로 잠시 머무를 뿐이니....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생각이 난다.

p341 눈이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한다면, 눈이 없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항상 요술을 부리는 이들에게 속는 것은 눈이 망령되기 때문인데, 이 경우 밝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탈이 된다고 할 수 있지요.

p343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요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향원(시골에서 군자인 척 행세하는 위선자)이면서 덕행이 있는 체하는 것일 겁니다.

→ 이러한 요술을 분간해 내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이지 않겠는가. 아, 그리하여 요술이라 하는가.


환연도중록

p347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묵어도 오히려 미련이 남는다는데, 하물며 나는 공자를 모시고 엿새나 묵었음에랴! 더욱이 내가 머물렀던 곳이 깔끔하고 우아하여 마음속에 오롯이 새겨졌음에랴! 내 일찍부터 과거를 폐하여 진사도 못 되어, 비록 국학에서 학문을 닦고자 해도 그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다 이제 갑자기 만 리나 떨어진 변방 바깥에서 엿새 동안 노닐다 보니 내가 원래부터 이렇게 지냈던 듯한 착각이 든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p362 중국에는 커다란 근심 두 가지가 있다. 황하의 범람과 오랑캐의 침입이 그것이다. 우 임금의 아버지 백곤은 오랑캐들이 날뛰고 업신여길 것을 충분히 예견하였다. 그래서 유주와 기주를 통하게 하고 항상과 대군을 뚫어서 구주의 물을 당겨 사막에 끌어 대고는 중국이 도리어 그 상류에 웅거하여 오랑캐를 제압하려 했다. 당시의 사악(사방의 산악)을 맡은 책임자 역시 그의 제안을 옳게 여기고 한번 시험해 보려 하였다. 요임금은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백곤의 변론이 몹시도 강력하여 반박을 하지 못했다. 우임금도 물을 역행시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긴 했지만, 백곤의 재우와 지혜가 워낙 뛰어나다 보니 감히 말리지를 못했다. 『서경』의 ‘하늘의 뜻을 어겨 백성을 못살게 하고, 명령을 어기며 화합을 깨뜨린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대개 백곤의 사람됨이 사납고 꼬장꼬장한 데다 자기 생각을 지나치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때문이다. 그는 오직 오랑캐의 침입만을 우환으로 삼을 뿐, 황화의 범람은 가볍게 여겨서 지형도 헤아리지 않고 공사 비용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어코 물길을 거꾸로 파서 흐르게 하였으니, 『맹자』에 나오는 ‘물이 거슬러 흐르는 것을 강수라 하는데 강수란 곧 홍수다’라는 말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 아, 여기에 이르러 4대강이 생각난다. 또한, 4대강 사업 도중의 무수한 문제제기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타당성 등의 용역 사업의 명칭을 낙동강 ‘물길 살리기’로 포장하여 진행한 것이 생각난다. 백곤의 성격이 물길을 살린답시고 강을 파헤친 그 주체와 닮아 있다.

p369 옛 성인은 물건을 주고받는 일에 있어서 매우 조심했다. 옳은 것이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주지 않고, 옳은 것이 아니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받지 않았다. 대저 지푸라기는 세상에 지극히 작고도 하찮은 물건이어서 만물로 치지도 않으며, 지푸라기 하나를 주고받는 일은 논의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지푸라기와 같은 하찮은 물건까지도 조심하라는 성인의 말에서 청렴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오미자 사건을 겪고 나니 비로소 지푸라기에 대한 성인의 말씀이 지나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아아, 성인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오미자 몇 알은 정말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물건인데, 그걸 빌미로 저 미련한 중은 나에게 이토록 무례한 행위를 했으니 상식에 어긋난 짓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서 주먹다짐에까지 이르렀고, 바야흐로 그들이 싸우게 되자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피차 간에 생사를 걸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비록 오미자 몇 알일지라도 재앙은 산더미처럼 커졌으니, 작고 하찮은 물건이라 해서 결코 얕볼 수 없다는 걸 알겠다.

→ 세상엔 가벼이 여긴 일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상황을 만드는 일이 적지 않다. 성인의 말대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함을 새겨본다.

p373 아! 대저 시세란 이렇게 믿지 못할 것이로구나. 권세가 있을 적에는 모두들 미친 듯 달려오더니, 눈 한 번 돌리는 사이에 시세가 바뀌고 대접은 싸늘해진다. 어디에도 기댈 데 없이 마치 진흙소가 바닷물에 풀어지듯, 얼음산이 햇빛에 녹아 버리듯, 천고의 모든 일이 이처럼 흘러가니 이 어찌 슬프지 않으리오.

→ 그러기에 정승 초상에는 안가도 정승집 개 초상에는 간다고 하지 않던가.

p376~377 중국에서 관우를 높이 받들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초기부터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기휘하여 패관기서에서조차도 모두 관모라 지칭한다. 그리하여 명・청 무렵에는 공문서나 장부에도 관성이니 관부자니 하고 높여 부르게 된다. 그 그릇됨과 천박함을 그대로 답습하여 천하의 사대부들까지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소위 학문이란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히 판별하고 상세히 묻고 널리 배우는 것을 더 말한 것이다. 옛날 우임금은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절을 했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허비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학문에 정진하는 데 있어서는 늘상 부족한 부분이 있는 듯이 했다. ‘나’라는 것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터럭 하나라도 그 욕망이 내게 붙어 있다면 성인은 그것을 원수나 도적처럼 보아 반드시 잘라 내고 남김없이 없애 버렸다.

→ 저 세상에 계신 관우님께선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어떤 연유로든 자신을 칭송하고 기리는데 만족한 웃음을 띄울까. 마치 불법 광고전단지에 등장한 것처럼 자신이 연류된 데 대해 분노할까. 욕망은 늘 재물로 이어진다는 것.

p390 - 옥갑에서 밤들이 주고받은 이야기(옥갑야화)

    변승업은 나이가 들자 자손들에게 이렇게 경계하였다.

    “나는 평생 지위가 높은 공경들을 많이 섬겨 보았다. 그러나 나라의 권력을 한손에 틀어쥐고서 자기 집안 살림이나 챙기는 위인치고 그 부귀영화가 삼대를 이어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지금 나라 안에서 재물을 늘리고자 하는 이들은 우리집 재물이 드나드는 것을 가지고 그 기준을 정하니 이 또한 권세에 다름아니다. 내, 이를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후손들에게 재앙이 닥치고 말 게야”

→ 우리나라 정치사 어느 곳곳에라도 이러한 인과응보가 반드시 실현되기를..그리고 그것이 먼 훗날이 아니라 되도록 가까운 시일내에 곧 이뤄지기를 바란다.

p392 - 옥갑야화 속 허생전

    대개 남에게 뭔가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포부를 과장하여 신용을 얻으려 하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얼굴빛은 점점 비굴해지고, 말은 중언부언을 면치 못하게 되지. 그런데 봐라! 저 손님은 옷과 신이 비록 남루하기 짝이 없지만, 말은 간결하고 눈빛은 오만하며 얼굴엔 부끄러운 빛이 조금도 없질 않더냐. 일체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가 시험하고자 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은 데다, 나 또한 그에게 시험해 보고 싶은 바가 생겼다. 주지 않겠다면 그만이려니와 어차피 만금을 줄 바에야 성명 따위를 물어서 뭐하겠느냐?

→ 최근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연달아 이루어진단다. 그들은 세상에 할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글쓰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누군가 책을 낸다고 하면 부러운 일. 그러나 정치인들의 책이 어떻게 쓰였고, 출간되는지를 아는 까닭에...그럼에도 당당한..그들.

p393 - 옥갑야화 속 허생전

    덕이 있으면 사람은 절로 모여드는 법일세. 덕이 없을까 걱정이지, 사람이 없는 게 무슨 걱정인가?

→ 당연한 말이겠다. 그러나, 덕이 없는 사람이 또한 많으니, 그것이 걱정 아니겠는가.

p395 - 옥갑야화 속 허생전

    재물 따위로 얼굴빛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그대들의 일일 뿐! 만금으로 어찌 도를 살찌울 수 있단 말인가.

→ 한편으로는 재물 따위로라도 얼굴빛이 아름다워 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세상이다. 불행히도 그것이 도라고 말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다.

p395~396 -옥갑야화 속 허생전

    조선의 배는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는 국내에 두루 다니지를 못하지. 그러다 보니 온갖 물화가 이 안에서 만들어져 이 안에서 소비되고 말지. 무릇 천금이란 작은 재물에 불과하네. 모든 물건을 사기에는 부족하지만 그것을 열로 쪼갠다면 백금 열 개가 되고, 그 정도면 열 가지 물건은 충분히 살 수 있지. 물건이 가벼우면 돌리기가 쉽기 때문에 설령 한 가지를 밑진다 해도 나머지 아홉 가지는 남는 법이야. 이건 통상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방법이자 소소한 장사치들이 흔히 쓰는 방식이네. 그런데 만금이면 모든 물건을 사재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수레에 실린 것이면 수레를 통째로 살 수 있고, 배의 경우엔 배 안의 물건을, 고을의 경우엔 고을의 물건을 전매할 수 있지. 마치 그물에 코가 있어서 전체를 완전히 엮어 버리듯 할 수 있는 것이라네. 또 물에서 나는 산물 만 가지 중에 한 종류만 몰래 유통을 정지시켜 버린다든지, 물에서 나는 물고기 중에 한 종류만 몰래 정지시킨다든지, 의약품 재료 만 가지 중에 하나만 슬그머니 멈추게 해보게나. 아마 모든 장사꾼들의 돈줄이 말라 버릴 거야. 그렇지만 이는 백성을 해치는 방식이지. 훗날 나라의 일을 맡은 자들이 만약 내 방식을 쓴다면 반드시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말 걸세.

→ 독과점의 폐해는 이렇듯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다. 연암이 정확하게 꿰뚫었듯이 이미 세상엔 이를 아는 이들이 너무도 많아 나를 병들게 하고 있다. 그 옛날 연암이 걱정했던 세상이 계속 쌓이고 있다.

p396 - 옥갑야화 속 허생전

    “요즘 사대부들은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갚고 싶어합니다. 그야말로 지조 있는 선비가 팔을 걷어붙이고 지략을 떨칠 시기인 셈이죠. 그런데 당신 같은 재주로 어찌하여 어둠 속에 숨어서 세상을 마치려는 겁니까?”

    “옛부터 어둠에 잠긴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 조성기는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재주를 지녔건만 평생 벼슬 하나 없이 포의로 늙어 주었고, 유형원은 군량을 조달하기에도 충분했지만 바다 한 귀퉁이에서 서성거리고 있네. 국정을 도모하는 이들도 그 정도야 알 수 있는 일이지.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아홉 나라 왕의 머리를 살 수 있을 만큼 은을 모으긴 했지만, 이 나라에선 소용이 없기 때문에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 온 것이라네.”

→ 명예와 실리. 세상을 살다보면 선택의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행동을 결정지어 줄 명확한 가치기준이 필요할 터.

 p398 - 옥갑야화 속 허생전

    사대부라는 것들이 대체 뭐하는 놈들이더냐? 이・맥의 땅에 태어나서 사대부로 자칭하니 어찌 미련한 게 아니더냐. 바지저고리는 순전히 하얗기만 하니 이는 상을 당한 사람의 복색이고, 머리털을 모아서 송곳처럼 찌르듯 맨 건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에 불과하다. 대체 뭐가 예법이라는 것이냐? 번오기는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하여 자기 머리가 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무령왕은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고 호복입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지금 너희들은 대명을 위해서 원수를 갚고자 하면서도 머리카락 하나를 아끼고 있다. 이제 장차 말 달리기, 칼 치기, 창 찌르기, 활 쏘기, 돌팔매 던지기 등을 해야 하는데도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으면서 스스로 예법이라고? 내가 처음으로 세 가지 말을 해주었는데, 너는 그 중 한 가지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놈이 나라에 신임받는 신하를 자처하다니, 신임 받는 신하가 실로 이 정도란 말이냐? 이런 머리를 베어 버려도 아깝지 않을 놈 같으니라구!

→ 허생전의 글들은 호탕하기 그지없다. 이런 호탕한 글들을 오늘날의 사대부들에게 그 호탕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싶다.


 

3. ‘내가 저자라면’


■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의 목차 및 전체적 뼈대


  이 책의 글 하나하나를 써나간 자는 연암 박지원이다. 그러나 18세기 연암의 문체를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책의 전체적인 뼈대를 정리한 것은 편역자이다. 물론 그에 앞서 연암의 글들을 모아 정리한 것은 연암의 자제들이다. 따라서 글,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연암에 대한 감상이겠지만 책이라는 틀에 대한 논의는 글들을 정리하고 뼈대를 세운 편역자들에 대한 당부이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上)

 

개정신판 머리말

사행단 구성

『열하일기』 여정도

연암 박지원 약전

 

도강록

도강록 서

 6월 24일 │ 6월 25일 │ 6월 26일

 6월 27일 │ 6월 28일│ 6월 29일

 7월 1일  │ 7월 2일 │  7월 3일

 7월 4일 │ 7월 5일 │ 7월 6일 

 7월 7일 │ 7월 8일 │ 7월 9일

요동 옛 성에 올라(구요동기)

요동의 백탑(요동백탑기)

관제묘 풍경 소묘(관제묘기)

광우사 이야기(광우사기)

 

성경잡지

7월 10일 │ 7월 11일

예속재에서 만난 친구들(속재필담)

가상루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상루필담)

7월 12일 │ 7월 13일 │ 7월 14일

성경의 사찰들(성경가람기)

요동의 산과 강(산천기략)

 

일신수필

일신수필 서

7월 15일 │ 7월 16일 │ 7월 17일

7월 18일│7월 19일  │ 7월 20일

7월 21일 │ 7월 22일 │ 7월 23일 

망부석이 된 맹강녀(강녀묘기)

장대에 오르내리기가 벼슬살이 같구나(장대기)

산해관에 올라 고금의 역사를 생각한다(산해관기)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하(下)

 

관내정사

7월 24일 │ 7월 25일 │ 7월 26일

백이 숙제 묘당을 둘러보며(이제묘기)

난하를 건너며(난하범주기)

사호석기

7월 27일 │ 7월 28일 │

범의 꾸중(호질)

7월 29일 │ 7월 30일 │ 8월 1일

8월 2일 │ 8월 3일 │ 8월 4일

북경의 이모저모(황도기략)

공자묘를 다녀와서(알성퇴술)

동악묘를 다녀와서(동악묘기)

 

막북행정록

막북행정록 서

8월 5일 │ 8월 6일 │ 8월 7일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야출고북구기)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8월 8일

만국진공기 

8월 9일

고북구 장성 밖에서 들은 기이한 이야기(구외이문)

 

태학유관록

8월 9일 │ 8월 10일 │ 8월 11일

찰십륜포 

황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황교문답)

8월 12일 │ 8월 13일 │ 8월 14일

천하의 형세를 논하다(심세편)

곡정 왕민호와 나눈 말들(곡정필담)

코끼리를 통해 본 우주의 비의(상기)

환타지아(환희기)

 

환연도중록

8월 15일 │ 8월 16일 │ 8월 17일

8월 18일 │ 8월 19일 │ 8월 20일

옥갑에서 밤들이 주고받은 이야기(옥갑야화)

  열하일기는 6개월의 여행의 기록이다. 시간의 흐름과 장소의 이동에 따라 글을 적고 있다. 가는 여정에 따라 제목을 붙여 총 7편으로 분리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어떤 기록에는 서장을 첨부하여 그에 대한 부언을 첨부하고 있다. 

 장소를 이동하는 여정 속에서 연암은 생활과 풍경에 대한 묘사와 감흥에서 나아가 그곳에서 만남 사람들과의 필담, 청나라 문물에 대한 묘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일기에 적은 것 이외에 따로 좀 더 자세한 글들을 정리하고 있으며 일기에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연암이 쓴 글들이 일기와 맞물려 읽고 싶은데 편역자들이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일기 속에 언급한 이야기들을 연결되도록 구성하여 흐름이 끊이지 않도록 연결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내가 연암이라 6개월 간의 여정을 일기로 쓴다면 어떤 방식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날 그날 겪은 일들에 대한 감상을 나열할까. 아니면 뚜렷한 목적을 가진 내용을 다룰까. 연암의 일기는 비교적 연암처럼 그 당시 생경한 경험을 여행기 속에 기록하되 보다 청의 문물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고 뒷받침하는 것이 주된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며 그에 대해 기록하는 것도 좋은 방식으로 보인다. 사실, 감흥이란 그 장소에서 그 때에서야 느낀 감정일 수 있으나 되돌아 보면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행기의 기록은 감상적이기보다는 조금 더 그 나라와 생활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이뤄지는 형태가 와 닿는다.


■ 감동적이었던 장절

  

 연암의 문체는 읽으면 읽을수록 빨려가는 듯하다. 그리하여 어느 한 구절만을 달랑 뽑아낼 수 없다. 그리하여 벽돌에 대한 묘사이든, 수레에 대한 의견이든, 그 논쟁적으로 접근하는 글귀에도 문장 전체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여행기로서 중국 문화와 습속에 대한 묘사 이외에도 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풍경과 그 속에서 느끼는 연암 자신의 마음들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여행기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감상적이 되기도 하여 호곡장에 대한 서술, 도와 경계 사이의 대화, 아홉 번 강을 건너며 보고 느끼는 감상이 기억에 남겨진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거니와 나 또한 어느 곳 어디에선가 깊은 깨달음으로 맞닥뜨릴 수 있는 감정이라 쉬이 감정이입이 되어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몇 구절을 뽑아서 실어본다면 막북행정록에서의 이별에 대한 묘사와 다음의 묘사가 생각난다. 아마도 이 부분은 글보다는 분위기가 자아내는 느낌 탓에 기억이 더 날 터였다. 밤에 홀로 성 밑에 앉아, 별빛 아래서 먹을 갈아 글을 쓰고 보자니, 먹을 갈 물이 없어 술통의 물을 부어 글을 쓰는 그 상황에 눈 앞에 그려지면서 웃음과 또한 애잔함이 묻어난다.


 세 겹의 관문을 나온 뒤,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새기려고 패도를 뽑았다.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행장을 넣은 여행용 전대나 자루) 속에서 꺼냈다. 꺼낸 물건들을 성 밑에 주욱 벌여 놓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에서 잠깐 술을 마실 때 몇 잔을 더 사서 안장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모두 쏟아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셔 크게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고 한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제때를 만난 가을철인 데다 이제 막 닭이 울려는 새벽녘이니, 이 모든 것이 어찌 우연이기만 하겠는가.

 - 막북행정록 -


 또한, 연암 스스로 도를 알았다고 서술한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편은 그 상황과 맞물려 글에서 자아내는 느낌과 글이 좋게 다가온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험을 직접 보며 벌벌 떠느라 그 눈이 근심을 불러온다. 그러니 어찌 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느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도를 알았다. 명심(冥心, 깊고 지극한 마음) 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지금 내 마부는 말에 밝혀서 뒷수레에 실려 있다. 그래서 결국 말의 재갈을 풀어 주고 강물에 떠서 안장 위에 무릎을 꼰 채 발을 옹송거리고 앉았다. 한번 떨어지면 강물이다. 그땐 물을 땅이라 생각하고, 물을 옷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몸이라 생각하고, 물을 내 마음이라 생각하리라. 그렇게 한 번 떨어질 각오를 하자 마침내 내 귀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릇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건만 아무 근심없이 자리에서 앉았다 누웠다 그야말로 자유자재한 경지였다.“

 - 하룻 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다(일야구도하기)-


■ 보완점


 열하일기를 읽는 순간부터 처음에 맞닥뜨린 건 이질감이었다. 현대적 언어에 익숙하다 할지라도 당연 18세기의 저서를 읽으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18세기의 그 느낌을 얻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나는 너무도 평탄하게 글을 읽고 있었다. 순간 지금 이 글이 연암의 문체가 맞는가, 얼마만큼 현대적인 문체로 번역되었는가, 이런 것이 생각나면서 읽어보지도 못하겠지만 연암이 쓴 문장 자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 책의 대상이 청소년들이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 필요해라는 어이없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다. 낯선 시간의 기록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교과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시대의 기록을 위한 사전 배경 설명이 있다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만화 속 캐릭터 같이 사행단 멤버들의 성격과 행동을 서두에서부터 명확하게 명시해 본문 속에서 그들의 관계와 특징을 찾아가는 묘미를 상쇄시키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굳이 친절한 안내로서 등장인물의 특징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이 부분은 삭제되어도 무방하다고 보지만) 하권에 연암의 일기가 끝난 뒤에 배치하였으면 한다.

 본문 중에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되게끔 삽화와 부연 설명을 통해 내용의 이해를 덧붙여 주고 있는 점은 글을 읽는 입장에서는 매우 편한 부분이다. 그러나 본문의 많은 삽화와 부연 설명이 있는 것에 비해 전체적인 부연 설명,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 부가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듯하다. 당시의 시대가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던 것만큼 당시 조선시대의 분위기와 더불어 국외, 서양의 상황은 어떠했는가라는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면 박지원의 일기와 글들에 대한 이해도 전체적인 견지에서 어울려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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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23:06:06 *.104.9.186

층별하시는 것도 글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참고가 되는데요.^^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동행분들의 자취를 봅니다.

안녕하세요.

함께하는 인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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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그림책] 병사와 소녀 - 조르디 시에라 이 파브라 file 한정화 2013.08.15 4135
742 정유정의 < 28 >, 소름끼치는 리얼리티 [3] 한 명석 2013.08.14 6475
741 현실과 허구, 환타지를 잘 버무려준 김려령의 "너를 봤어" 한 명석 2013.08.04 4183
740 구본형의 마지막 편지-그는 늘 나를 일으켜 세운다 한 명석 2013.07.28 4407
739 9기 레이스 - final - 강종희 생산적 동면을 위한 28일간... file [1] [1] 종종걸음 2013.03.04 4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