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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1일 16시 03분 등록
민중은 판결을 내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들게 하였다. 친구들은 소크라테스를 옥사로 찾아가 탈출을 권했다. 그들은 옥사의 관리들을 모두 매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거절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0세(기원전 399년)였다. 아마도 그는 지금이 죽을 때다, 다시는 이처럼 유익하게 죽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용기를 내게.” 그는 슬퍼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단지 내 육체를 매장하는 데 불과하다고만 생각하게.” (<철학이야기> 中, p27)

초연함.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정말 ‘쿨’하다. 아마 그가 삶의 마감을 앞둔 시점에서 오히려 걱정하고 아쉬워하는 친구들에게 ‘용기를 내게’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란 누구에거나 찾아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랬으리라 짐작해 본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초연함’의 연속이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었던 것, 처자식에게 무관심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미래’가 아닌 ‘현실’에 초점을 두고 살아간 사람이다. 쇼펜하우어처럼 현실생활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인내의 연속으로 살아가면서도 ‘언젠가는-그것이 아무리 늦을지라도- 인정받을 때가 올 것이다’라고 굳건히 믿었던 것과는 굉장히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의 초연함을 보며, 나를 돌아본다. 나는 쇼펜하우어처럼 ‘미래지향’을 꿈꾸며 살고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요즘 잘 지내니?’라고 물어보면, ‘네, 잘 지내요. ㅇㅇ만 있으면요! 괜찮아요, 잘 되겠죠!!’라는 대답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튀어나온다. ‘ㅇㅇ’라는 것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짧은 나의 생애동안 나는 항상 무언가 ‘2%’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아온 것 같다.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어떤 삶을 늘 꿈꾸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내 삶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된다. 하지만 과연 내가 완벽하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미래의 어느 시점과 상황, 그리고 환경’이 올 것인가?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말한다. 욕망하는 것을 얻으면, 그와 다른 어떤 것을 욕망하게 된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미래’만을 꿈꾸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삶의 모습을 잠시 내려두고, 소크라테스의 초연함을 배워 매 순간의 ‘현실’의 만족감을 높일 필요가 있다. 때로는 ‘지금과 크게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일은 사실 없을 지도 몰라. 지금의 내 삶에 만족하며 살자!’라는 생각을 가지며 말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앞에 두고 ‘지금이 죽을 때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윌 듀란트는 얘기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단지 ‘언제’ 죽음이 찾아 올지 모를 뿐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죽음의 형태는 워낙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고로 인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나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주변 이들에게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어느 쪽에나 ‘아쉬움’을 주기 마련이다. 죽는 이에겐 ‘삶’에 대한 아쉬움을, 남아 있는 이에게는 ‘더 잘 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따위를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왠지 소크라테스는 갑작스런 죽음-사고로 인한-을 맞이하였더라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다.

모든 일이 내가 예측한 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는 것들 혹은 지금의 내 행위들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너무나 뻔하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내가 한 달에 얼마의 생활비가 필요하고, 이 일을 했을 때 얼마의 돈을 벌 수 있으니, 향후의 내 생활은 마이너스일지 플러스가 될지에 대한 것이나, 죽음이 누군가에게 한번은 찾아오게 된다는 것 등 말이다. ‘지금 내가 힘들어 하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내 행위에 대한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이미 당연하게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과거의 행위’는 생각하지 않고 ‘지금 힘든 것’에만 집중을 한다. 왜냐하면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미래의 장밋빛’만을 생각하고, 그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이 판단에 대한 힘겨움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혹은 과거의- 행위와 그에 따른 결과와 나의 기대치에 대한 불일치에서 온다. 어쩌면 ‘그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나 자신을 스스로가 견디기 힘들기 때문인 것일지 모른다. 그런 나를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즉 인정하는 것이 지금 내게 필요하다.

내 고민을 나누기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앞둔 상황을 보면, 그의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은 본인이 아니다. 그를 둘러 싸고 있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더욱 걱정한다. 그가 그 상황에서 고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변에 그의 삶에서 생겨나는 고민들을 고민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아마 소크라테스가 살면서 –남들이 보기에 당연히-해야만 했던 고민들, 예를 들면 생계를 이어나가고, 그가 이룬 가족들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들을 그가 고민하지 않은 대신 주변의 이들이 –그가 했어야 하는-고민을 했을 것이다. 악처로 명성을 높인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가 그가 했어야 하는 고민들 중 가장 많은 부분을 가져갔을 것 같다.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져 살아가는 소크라테스의 옆에는 그가 고민하지 않는 대신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할 조력자가 필요 했을 것이고, 그 역할은 고스란히 크산티페에게 돌아갔을 테니 말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어쩌면 너무 대책 없어 보일 정도로- 모든 고민들을 놓아버리는 것도 문제이긴 하나, 자신에게 닥친 문제들을 너무 혼자만 끌어안고 사는 것도 문제다. 특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 역시, 작년 가을까지 내게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혼자서 끌어안고 끙끙대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 고민이 더 이상 헤쳐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르렀고, 흘러가는 상황들을 정신줄을 놓아 버린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숨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주변의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가족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아 버렸다. 그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 때부터 이전에 내가 했던 고민들을 동생들과 엄마에게로 옮겨 갔다. 내가 고민하는 시간들을 그들이 나눠 가지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 내지 못했던 해결책들이 내 앞에 던져졌다. 물론 그 해결책이란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기 보다는, 임시방편적인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단 내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과 내가 할 고민들을 누군가 가져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때가 시작이었다. 나는 내 고민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고 나면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내 고민을 이야기 할 수 있고,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그 사람이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고민을 들어주는 이들도 나름의 고민이 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힘겨워할 수 있는 상황에 내 고민까지 더해 주면 그들 역시 견디기 힘든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분산할 수 있어야 한다. 늘 힘든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론 즐거운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내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쉽지 않지만, 이렇게 조금씩 털어 놓다보면 소크라테스만큼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 주고 고민해 주는 이들로 인해 위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는 평생을 철학과 함께 하더니, 그의 죽음에서도 철학적인 문제들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나의 현실을 조금 더 직시할 수 있게 해준 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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