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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여러분들이

2012년 3월 12일 17시 25분 등록

 

☐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매기의 추억)

 

The violets were scenting

The woods, Maggie

Their perfume was soft

On the breeze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The chestnut bloomed green

Through the glades, Maggie

A robin sang loud

From a tree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A golden row of daffodils

Shone, Maggie

And danced with the leaves

On the lea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The birds in the trees

Sang a song, Maggie

Of happier days

Yet to be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I promised that

I'd come again, Maggie

And happy forever

We'd be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But the ocean proved

Wider than miles, Maggie

A distance

Our hearts could not foresee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Our dreams

They never came true, Maggie

Our fond hopes were

Never meant to be

When I first said

I loved only you, Maggie

And you said

You loved only me

 

동산에 가득한

제비꽃들의 향기가

산들바람에 실려 은은하게

풍겨오고 있었습니다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숲속의 빈터엔

밤꽃들이 가득하고

나무위에선 종달새가 소리높여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푸르렀던 초원위엔

황금빛 수선화들이

환한 빛으로 미풍에 맞춰

살랑살랑 춤추고 있었지요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나무위의 새들은

우리에게 주어질

행복한 날들을 축복해 주려는 듯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다시 돌아오는 날

그대와 함께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거라고

약속했었지요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하지만 저 넓은 바다로 인하여

우리가 헤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미처

예감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결국 우리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우리가 바라던 것들도

되어지지 못했답니다

그대만을 사랑한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던 날

그대 또한

나만을 사랑한다 하셨었지요

 

이 곡은 캐나다의 '조지 존슨(George Washington Johnson, 1839~1917)' 시인이 죽은 부인 '메기 클락(Maggie Clark, 1841. 7 -1865)'에 대한 추억을 그린 노래이다. '그대와 내가 사랑의 열매를 맺은 뒤 먼 훗날 백년해로(百年偕老)하면서 꿈같았던 옛날을 추억한다'는 행복한 상상(想像)을 묘사한 내용의 시였다. 이 곡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조지 존슨'는 토론토대를 졸업후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토론토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시인이었는데, 캐나다 온타리오 태생인 제자 '메기 클락'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자주 메기의 집근처 개울가에서 데이트를 즐겼고, 그는 그녀에 대한사랑을 주로 시로 썼다고 한다.

 

둘은 1864년 10월 결혼하였고, 미국의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로 이사를 간다. 하지만, 사랑하던 Maggie가 결혼한 지 1년도 못되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조지 존슨은 클리브랜드를 떠나, Maggie를 잃은 아픔을 벗어나기 위해서 Maggie와의 추억이 어려있는 토론토로 다시 돌아온다. 'Johnson'은 사랑하는 'Maggie'에 대한 추억과 애상을 시로 또 써냈다.

 

"추억이 어린 경치를 바라보려고 오늘 나는 이언덕에 올랐다. 메기. 개울과 낡은 물레방아 먼 옛날 우리 둘이 얘기를 나누던 그곳에 가장 먼저 핀 대지향 풍겨온 그곳에 푸르른 나무는 언덕에서 사라졌지만 개울의 흐름과 물레방아도 그대와 내가 젊었을 때 그대로구나."

 

그는 《단풍잎》이란 시집에 옛사랑에 대한 추억과 슬픔을 "매기의 추억"이라는 시로 담아 실었다.

 

'조지 존슨'의 시에 곡을 붙인 이는 영국 태생의 미국 작곡가 겸 지휘자였던 '제임스 버터필드(James Austin Butterfield, 1837~1891)'이다. 그는 영국 태생으로 영국에서 바이올리니스트와 가수로 활약하다 19세 때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카코에서 작곡가와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조지 존슨'은 친구인 '제임스 버터필드'에게 자신의 아름답고도 슬픈 詩에 알맞는 멜로디를 붙여 작곡해줄 것을 부탁한다.

 

'Maggie'가 죽은 다음 해인 1866년에 작곡되어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곡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곡이다.

 

☞ 제게 이 노래는 나에게 아버지의 추억입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아버지는 항상 주먹을 불끈! 쥐시고 이 노래를 부르셨어요.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아버지께서는 술을 좋아하셨는데 술이 좀 되시면 집에 오시다 말고 집 앞 상가에 있던, 지금은 없어진 ‘동키치킨’ 이란 곳에 통닭 한 마리에 맥주를 시켜놓고 온가족을 호출하셨습니다. 온 가족이라 해도 딸 둘에 아내, 이렇게 단촐했던 우리 가족은 동키치킨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통닭 한 마리 뚝딱하고는 집에 오곤 했는데, 가끔씩 집까지 이어지는 조촐한 술자리에선 항상 엄마가 차리신 술상 앞에서 행복한 미소를 지으시며 이 노래를 부르셨어요. 잊고 있던 아버지의 그 모습을 그리고 이 노래를 이번 지적 레이스를 통해 기억해 낸 것입니다!

교보문고에서 예전 레슨에 사용했던 한국 가곡집과 세계 가곡집을 들춰보다 이 ‘매기의 추억’을 찾아내고는 얼마나 반갑던지... 이번 지적 레이스는 제게 참 많은 것을 찾고, 기억하고, 느끼게 해 주세요. 사부님, 감사합니다!

 

 

☐ 그네 - 김말봉 작시/ 금수현 작곡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김 말봉 선생님과 작곡가 금 수현씨가 장모와 사위의 관계 입니다. 김 말봉 선생님은 장편소설 "찔레꽃"을 쓰신 분인데 196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금 수현씨는 지휘자로 지금도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금난새]씨의 아버님이 되십니다. 작곡가 사위를 총애한 김말봉은 어느 날 자작 시(詩)를 전하고, 장모의 사랑에 감격한 금수현은 심혈을 기울여 곡을 붙였는데,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그네」입니다.

 

※ 김말봉(金末峰)

1901∼1962. 현대 여류소설가. 본명은 말봉(末鳳)이다.

부산출생.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를 3년 수료한 뒤 서울에 와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를 졸업하였다. 그 뒤 황해도 재령(載寧)의 명신학교(明信學校)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고등학교 과정을 거쳐 경도(京都)에 있는 도시샤 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취직, 전상범(全尙範)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까지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기자로서 쓴 탐방기나 수필이 주위의 호평을 받자, 1932년 보옥(步玉)이라는 이름으로《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망명녀 亡命女〉라는 단편소설로 응모,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하였다.

 

전상범과 사별한 뒤, 이종하(李鍾河)와 재혼, 부산에 살면서 광복 때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하였다. 광복 후 서울로 올라와 작품활동을 다시 시작하여 〈카인의 시장〉과 〈화려한 지옥〉 등을 발표하는 한편, 사회운동 즉 공창폐지운동(公娼廢止運動)과 박애원(博愛院)경영 등의 일을 하였다. 하와이 시찰여행을 하고 온 뒤, 6·25남침 때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문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 예술가대회에 참석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전개하여, 〈태양의 권속〉·〈파도에 부치는 노래〉·〈새를 보라〉·〈바람의 향연〉·〈푸른 날개〉·〈옥합을 열고〉·〈찬란한 독배(毒盃)〉·〈생명〉·〈길〉·〈사슴〉·〈장미의 고향〉 등을 잇달아 발표하였다.처음부터 흥미 중심의 통속소설, 즉 애욕의 갈등 속에서도 건전하고 정의가 이기는 모랄을 지니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쓴다는 신조를 가진 소설가였다.

 

※금수현(金守賢·1919~1992)

국민가곡 「그네」의 작곡자 낙초(洛初) 금수현. 그는 김해군 대저면에서 정미업과 땅콩 재배업을 한 토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그를 낳자 산고로 사망하고, 사흘이 넘도록 그도 울음이 없어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기사회생했다고 전한다.

 

그는 보통학교 때부터 음악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선생들이 개별지도를 해줄 정도였다. 그는 부산 제2상업학교(부산상고)와, 수많은 원로 음악인을 배출한 일본 동양음악학교(동경음악대학)를 나왔다. 그와 함께 초기 부산음악의 황무지를 개간한 선구자의 한 사람인 김학성과 고태국이 1년 후배이다. 1941년에 귀국해 부산극장에서 독창회를 가진 그는 이듬해 동래고녀(동래여고)의 음악교사가 된다.

그는 자신이 각색 작곡 연출한 음악극을 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공연하게 해, 학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 많은 인기를 모았다. 그는 1943년 동래교회 피아노 담당 전혜금과 결혼한다. 장모가 당시 부산에서 문명을 떨치고 있던 소설가 김말봉(金末峰)이었다.

 

광복이 되자 동래고녀 교장 김하덕이 경남여고로 옮기면서 약관 27세의 그를 교감으로 전격 발탁한다. 그런데 선생 18명의 절반이 성이 김씨라『김선생!』하고 누가 부르면 모두가 고개를 돌리는 판이었다. 그때까지 김수현으로 불렸던 금수현은 자기의 성을 한글로 금씨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는 당장 교직원 회의에서 자기의 성을 금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학생들 앞에서도 그렇게 선언했다. 그러나 김씨에 익숙해진 선생들이나 학생들은 실수하기가 예사였다. 금수현은 자신의 성을 김으로 부르면 선생이건 학생이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어느 날 교무실에 불려온 여학생들도 저희들끼리 『저기 김수현 선생님 가신다!』라고 재잘거리다 여지없이 들킨 것이다.

 

금수현은 광복 이후 우리말 가사로 된 노래의 필요를 느끼고 많은 실용가곡과 오페레타 등을 작곡하고 「노래하자 운동」을 창도한다. 그는 도립극장 지배인 경남여중 교장 통영고등학교 교장 등을 거쳐 1956년 문교부 편수관이 되면서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다. 열렬한 한글전용 지지자로 한글 이름의 선구 역할을 한 그는 음악용어 한글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 음... 금수현님이 성을 바꾸지 않았다면, 금난새씨는 김난새씨였겠구나... 라고 생각하며 혼자 막 낄낄 댔습니다. 재밌죠, 여러분??

 

 

 

☐ 고향생각 - 현제명 작시/현제명 작곡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떨기만 반짝거려

마음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이해

 

※ 현제명: 1902 경북 대구~ 1960. 4 서울. / 작곡가·성악가

 

기독교도로서 사업을 하던 부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에서 서양음악을 익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다니면서 서양선교사에게서 피아노·바이올린을 배웠다. 전주 신흥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다가 숭실전문학교에서 알게 된 레인보우레코드회사 사장인 R. 하버의 추천으로 무디 성경학교에 입학해 성서와 음악을 배웠다. 1928년 시카고에 있는 건(Gunn) 음악학교에서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미국 유학시절에 〈고향생각〉·〈산들바람〉 등의 가곡과 찬송가를 작곡했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영어교수로 있으면서 음악부에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만들고 공회당에서 최초의 공연을 가지는 등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30년대에는 빅타레코드사와 컬럼비아레코드사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 음반을 취입했다. 1932년 2월 조선음악가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33년 홍난파와 함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1937년 미국 건 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가 유학가기 이전부터 박사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그가 쓴 박사 학위 논문이 어느 글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944년에는 일제의 어용음악가 조직인 조선음악가협회와 경성후생악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친일행위를 했다. 1945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모체인 경성음악전문학교를 설립했다. 8·15해방 후 한민당 당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고, 1950년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을 총지휘했으며, 1954년 고려교향악단을 조직했다. 1955년 마닐라 음악회의에 참석, 1958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국제음악회의에 참석했다. 1955년 예술원상 등을 받았고,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왕자호동〉, 가곡 〈오라〉·〈니나〉·〈나물캐는 처녀〉, 국민가요 〈희망의 나라로〉·〈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 보리밭 - 박화목 작시/ 윤용하 작곡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가곡 보리밭의 작시자 박화목은 황해도 긴내 마을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자랐다. 가곡 "보리밭"의 그 보리밭은 박화목이 어릴 때 살던 고향마을의 보리밭이다. 그는 그 당시 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녔는데 바깥에 나갔다가 고향마을에 가까이 오면 산등성이 길을 넘어 눈앞에 드넓게 펼쳐지는 보리밭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보리밭 위로 아득히 높이 하늘가 어디서 종다리가 지저귀는 소리를 늘 들었다. 박화목은 그때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 새를 찾으려 애썼다.

 

박화목은 어머니 손을 잡고 이 보리밭을 다니던 그때의 정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곡 "보리밭"은 6.25 전란당시 피란시절의 불우한 작곡가 윤용하가 정서가 담뿍담긴 서정가곡을 만들자고 해서 박화목에게 작시를 부탁해왔다. 그때 그에게 떠오른 것이 고향마을의 보리밭이었다. 그래서 그 짤막한 서정시 한편을 "옛생각"이라는 제목으로 썼다. 그런데 윤용하가 작곡한 오선지에는 "보리밭"이라고 고쳐 써넣었는데 박화목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보리밭은 어린시절의 정서적 체험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정작 의도는 잊혀져가는 향토정서를 회복해보자는 것이었으며 우리 한민족의 애수를 그리움으로 승화시켜 보려한 것이라고 박화목은 말한다. 작곡자 윤용하는 불우하게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가 떠난 후 이 노래는 우리들 사이에 남아 살아 숨쉬고 있다.

 

※ 박화목

1924. 2. 15 황해 황주~ 2005. 7. 9 서울. 아동문학가·시인.

널리 알려진 가곡〈보리밭〉의 작사가이다. 호는 은종(銀鍾). 평양신학교 예과를 거쳐 만주로 가서 하얼빈[哈爾濱] 영어학원,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해방직후 월남하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위원, 1947~50년 기독교방송 방송부장 등을 지냈다. 1946년〈죽순 竹筍〉 동인으로 활동했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겨울밤〉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후, 초기에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시를 주로 썼으나 1948년 이후 동화 창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시로는 〈잔상 殘像〉(시작, 1954. 4)·〈나의 영토〉(영문, 1956. 11)·〈고구마 식구〉(현대문학, 1964. 12)·〈나는 한 그루의 푸른 수목이 되고 싶다〉(시문학, 1966. 4) 등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시인과 산양〉(1958)·〈그대 내 마음의 창가에 서서〉(1960)·〈주의 곁에서〉(1961) 등과 동시집으로 〈초롱불〉(1957)·〈꽃잎파리가 된 나비〉(1972) 등이 있다. 1972년 한정동아동문학상, 1980년 대한민국 문학상을 받았다.

 

 

☐ 비목 - 한명비목(碑木) [한명희 시/ 장일남 곡]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1950년 6.25 당시 격전지였던 강원도 화천군 북한강 평화의 댐 일대에서 육군소위로 DMZ(비무장지대)에 근무하던 한명희(교수, 현 국립국악원장)는 어느 날 순찰도중 썩어가는 칼빈총 한 자루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총의 주인이 누구일지를 생각하며 전쟁당시의 상황을 그려본다.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에서 처럼 고향의 아내는? 아니 그리운 초동친구, 애틋한 연인, 인자하신 양친, 학력에, 사랑의 설계, 인생의 꿈은? ...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바람따라 구름따라 포연에 실려 무산되고 말았다. 일체가 뜬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유명한 가곡 "비목"의 시상(詩想)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명희는 비목을 처음 발표할 때에 그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다. 여하튼 그로부터 6월의 녹음은 더더욱 한명희에게 각인되어 갔다. 녹음이 있기에 자연은 아름답고 젊음이 있기에 인생이 아름답다지만 바로 그 녹음, 그 젊음이 실은 가없는 비탄의 바다요, 통곡의 물결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 그곳에서 실감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 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빠알간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의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한명희는 어느 잡초우거진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 한 흔적으로 보나 푸르칙칙한 이끼로 보나 세월의 녹이 싸이고 팻말인 듯 나뒹구는 썩은 나무 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소위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 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명희는 그 후 전역하게 되고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곡에서 나와 속절없이 도회적인 세속에 부평초처럼 표류하게 되었지만 그의 뇌리, 그의 정서의 텃밭에는 늘 그곳의 정감과 환영이 걷힐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시절, 그러니까 한명희가 당시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이다. 평소 방송일로 자주 만나던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가곡을 위한 가사 몇 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그의 머리 속을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 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 섰던 하얀 산목련이었다.

 

그는 이내 화약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 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 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한 여인으로 상정하고 당시의 정감들을 그의 본연의 감수성으로 꿰어봤다. 바로 지금의 “비목”의 시가 완성된 것이다.

 

그리고 장일남의 작곡으로 드디어 노래가 되어 온 국민의 마음을 울리게 된다.

비목(碑木)은 그 가사를 두고도 별의 별 이야기들이 있었다. 한때 비목이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다보니 패목(牌木)의 오기였을 것이라는 국어학자도 있었고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을 "초연하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궁노루는 사향노루를 뜻한다.

"당시 어느 날 사향노루 한 마리를 잡았는데 홀로 남은 암놈이 매일 밤을 울어댔다.

그 당시의 가슴 저미는 감회와 회한이란 필설로 대신할 수가 없었다" 고 한명희는 회고한다. 비목의 2절은 이 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있는 것이다.

(이상 월간조선 1987. 6 에서 발췌 편집)

 

※ 한명희 : 1939년 충북중원출생, 충주고, 서울음대국악과, TBC프로듀서, 서울시립대 음대교수 역임 

출처 : 내마음의노래 (http://www.krsong.com/)

 

 

☐ 선구자 先驅者 - 윤해영 작시/ 조두남 자곡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작곡자가 만주에 있을 무렵인 1933년 목단강에서 작곡한 곡이다. 당시 만주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활약에 감동을 받아 작곡하였다. 이 곡에는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투쟁을 기리며 후세에 전하려고 하는 작품의 의도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시 첫머리의 ‘일송정’의 용정고개는 독립 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고 ‘해란강’ 역시 그 곳에 있는 강이다.

 

※ 조두남 (趙斗南 1912~1984) 아호는 석호. 작곡가. 피아노 교육자. 평남 평양 출생.

평양 숭실학교 수학. 미국인 신부 죠셉 캐논스(Joseph Cannons)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11세가 되던 1923년에 첫 작품인 가곡 <옛 이야기>를 작곡하였고 16세 때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그 뒤 만주로 가서 해방 이전까지 그 곳에서 청년기의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대표곡인 가곡 <선구자>는 1933년 만주에서 윤해영의 시에 곡을 붙여 작곡된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6ㆍ25가 일어나자 마산으로 피난 가서 그 곳에 정착하였다.

 

 

☐ 언덕에서 - 민형식 작시/ 김원호 작곡

 

저 산 넘어 물 건너

파랑 잎새 꽃잎은

눈물짓는 물망초

행여나 오시나

기다리는 언덕에

임도 꿈도 아득한

풀잎에 이슬방울

왼종일 기다리는

가여운 응시는

나를 나를 잊지마오

 

원제목은 물망초였다. 작사자 민형식은 시인이 아니고 음악가인데 작곡자 김원호와 절친한 친구사이로 황혼 무렵 언덕길을 산책하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민형식이 길가에 앉아 즉흥시를 읊조리자, 작곡가 김원호가 즉석에서 멜로디를 콧노래로 붙였다고 한다. 즉흥시에 즉흥곡이라 예술성은 부족할지 모르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서정성과 낭만성이 짧은 시간에 느껴질 수 있게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흥시라 2절이 없어 반복할 때는 2절 가사를 잊어버려 반복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사자 민형식에게 2절 가사를 부탁했으나 비시인의 즉흥시라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 김원호 金元浩 1936~ 작곡가.

경남 동래군 송정(현 부산시) 출생. 1954년 서울음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처녀작으로 <언덕에서>를 내놓으면서 주로 가곡 작곡에 몰두하였다. 1969년에 신세계레코드사에서 가곡독집 <진달래꽃>을 출반하고, 그 해 5월에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가곡집으로 <언덕에서> 등이 있다. 한국작곡가회 이사, 한국작곡가협회 이사를 지냈다.

 

 

☐ 자장가 - 김영일 작시/ 김대현 작곡

 

우리아기 착한아기

소록소록 잠들라

하늘나라 아기별도

엄마품에 잠든다.

 

두둥아기 잠자거라

예쁜아기자장

우리아기 금동아기

고요고요 잠잔다.

 

바둑이도 짖지마라

곱실아기 잠깰라

오색꿈을 담뿍안고

아침까지 자장.

 

자장가는 원래 촉에 김대현 작곡가가 해방의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하기 위해 작곡된 곡이었는데 6.25이후 멜로디만을 기억하고 있다가 우연히 김영일 아동 문학가에게 들려주었는데 김영일님이 멜로디에 반해 작사를 하고 "자장가"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 김대현 [金大賢, 1917~1985] 작곡가·교육가.

일본제국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만주로 가서 민족적인 서사시와 민족가극 등에서 소재를 취하여 창작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함흥 영생중학 등에서 교편을 잡다가 6·25 전쟁 때 월남하여 작곡활동을 계속하였다. 1951년 가극《콩쥐와 팥쥐》를 작곡하여 부산·대구 등지에서 공연하였고, 같은 해 오페라《사랑의 신곡(神曲)》을 작곡하였다. 이어 1955년 교향시곡《광복 10년》, 1961년 칸타타《글로리아》, 1963년《8월의 태양》, 1964년《새해여 솟아라》, 1969년《성웅 이순신》 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대작들을 남겼으며, 1974년에는 관현악 조곡《개선가》를 작곡하였다. 이밖에《고향의 노래》 등 40여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하여 영화음악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고, 성가곡도 남겼다. 가곡《자장가》《들국화》로 널리 알려졌다. 한국음악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서라벌예술대학·중앙대학에서 음악과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에 《김대현작곡집》이 있다.

 

※ 김영일 [金英一, 1914~1984] 아동문학가.

김영일은 다람쥐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겸 시인입니다. 황해도 신천에서 1914년 5월 17일에 태어나 일본대학 예술과를 졸업했다.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요 "반딧불"이 당선(1934)되고, "아이생활" 아동잡지에 동요 "방울새"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학생시절 동경에서 아동지 "고향집"(1937)을 발행.중학생시대(1951) 소년태양(1953) 건아시보의 주간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동시는 단시적 간결성, 감각적 참신성 및 집중조명에 의한 결귀의 묘가 특징이며, 동화에서는 허무주의를 저변에 깔고 있으나 대화에 의한 인물부각의 사실성으로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 분과회장을 지냈다. 그의 동요는 "방울새" "구두발자국" "자장가" "나팔불어요" 등 많은 동요가 있다. 작품으로는 동시집 "다람쥐"(1953)을 비롯하여 "은방울꽃"(1968)의 수십권의 동시집과 동화집이 있다.

 

 

☐ 노래의 날개 위에 - 하이네 작시/ 멘델스존 작곡

 

하인리히 하이네, 노래책(1820)

팩릭스 멘델스죤 바르톨디, 가곡 작곡(1834)

 

노래의 날개 위에

내 사랑 당신을 보내어요,

갠지스강 흐르는 평원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곳을 향해.

 

그곳 고요한 달빛 속

붉은 꽃들 피고있는 정원에서;

연꽃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다정한 누이들 오시는 거 기다리고 있어요.

 

제비꽃들 재잘재잘

저 하늘 높이 별빛 쳐다보며 속삭여요;

장미꽃들 저들끼리 몰래몰래

향기로운 옛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살금살금 다가와서 가만히 쳐다보는

저 믿음 깊고 영리한 꽃사슴들 보세요;

멀리서 강물 흐르는 소리 들려요

거룩한 강, 그 물결 출렁이는 소리가 들려요.

 

그곳 큰 야자수

그늘 아래 가서 같이 앉아요 그리고

사랑과 안식을 흠벅 마셔요.

그리고 아주 멋진 꿈을 꾸어요.

 

멘델스존은 부윤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상적인 교육을 받은 음악가로, 그의 음악은 그의 생활의 반영으로서 그냥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많은 기악곡들도 모두 그렇지만 내용을 직접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성악곡에서도 명랑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우리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노래의 날개 위에 그대를 태워 아름다운 광야의 간지스에 데리고 가리라”는 이 사랑스런 노래는 그의 24세(1833년)에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초청을 받고 간 다음 해에 작곡한 작품이다. 하이네의 시에 작곡한 이 노래는 3절로 되어 있다. 하프와 같은 반주가 퍼져나가는 가운데 극히 도취할만한 부드럽고 아름다운 가락은 분명히 낭만주의 음악을 대표할 만한 소품이라고 할 것이다. 극히 자연스런 화음 반주에 아름답고 인상적인 멜로디로 된 이 노래는 그의 스타일의 한 측면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 Home Sweet Home(즐거운 나의 집) - 페인 작시/ 비숍 작곡

 

M'id pleasures and palaces though we may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A charm from the skies seems to hallow us there,

Which, seek through the world, is ne'er met with elsewhere.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An exile from home splendor dazzles in vain;

Oh, give me my lowly thatch'd cottage again!

The birds singing gaily that came at my call;

Give me them with the peace of mind clearer than all.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o thee, I'll return, overburdened with care,

The heart's dearest solace will smile on me there.

No more from that cottage again will I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세계인의 애창곡 Home, sweet Home, 이곡은 1823년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헨리 비숍이 작곡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미국의 극작가이며 기자, 문인으로 활동했던 존 하워드 패인이 노랫말을 붙였는데 영국에서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더 유명해진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북부 연합군 1만2천명, 남부동맹군 5천명의 사상자를 낸 1862년 버지니아의 레파하녹크 리버 전투는 남북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유명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양쪽진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이 되면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서 양쪽의 군악대는 매일 밤 음악회를 열었는데, 어느 날 밤 이변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북군의 군악대는 아주 특별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어요. 그 멜로디는 바람결의 새털처럼 전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그리운 가족이나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군인들은 사무친 그리움에 텐트 밖으로 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요.

이 멜로디는 강 건너 편에 있던 남부군 진영에도 울려 퍼졌습니다. 남부군 군악대도 덩달아서 이 음악을 연주하고 남부군도 다함께 합창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대방이 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으로 뛰어 나와서 서로를 얼싸안고 모자를 하늘로 높이 던져 올리며 환호했습니다.

 

이 장면을 취재했던 프랭크 막심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들 미쳤다'라고 말입니다. 노래 한곡 때문에 전쟁은 사라지고 오직 조국과 동포애만 남았던 것이지요. 이렇게 “즐거운 나의 집”의 멜로디는 서로의 적대감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1823년 미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인 페인(1771∼1852)의 가사에 맞추어 작곡된 것으로 그의 오페라 《Clari, The Maid of Milan》에서 불린 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 비숍(Henry Rowley Bisop, 1768-1855)은 영국 출신의 작곡자이다.

그는 1804년에 소품들을 발표했으며, 1806년에는 런던에서 발래곡을 상연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1810년에는 코벤트 가든 극장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임명되었고 1813년에는 로얄 필하모니 협회의 설립자겸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고 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고 수 많은 음악 활동을 하였다. 이 곡은 1823년에 페인(J.H.Payne)의 시로 작곡되어 있다. 작시자인 페인은 미국 사람인데 그는 불우의 방랑자였다. 1791년 보스톤에서 태어나서 20세 때에 배우가 되기 위해 영국에 건거 가서 활약하다가 한 오페라 대본을 썼다. 그는 50세가 넘어서야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60세에 별세하였다. 비숍은 이 노래를 작곡하여 오페라 <밀라노의 소녀>에 넣어 1823년에 초연하였다. 그러나 그의 원작은 1820년의 비숍의 민요집에 나와 있다. 곡은 소박하고 아름다움에 찬 멜로디로 가난하지만 내 집만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는 노래이다.

 

 

☐ Ich Liebe Dich(그대를 사랑해) - 헤루루세 작시/ 베토벤 작곡

 

Ich liebe dich, so wie du mich

am Abend und am Morgen. Noch war kein Tag

wo du und ich nicht teilten uns're Sorgen.

Auch waren sie fur dich und mich geteilt leicht zu ertragen.

Du troestest im Kummer mich,

ich weint' in deine Klagen in deine Klagen.

 

Drum Gottes Segen uber dir,

du meines Lebens Freude

Gott schutze dich, erhalt' dich mir,

schutz' und erhalt' uns beide.

 

Gott schutze dich, erhalt' dich mir,

schutz' und erhalt' uns beide.

Erhalt', erhalt' uns beide,

erhalt' uns beide.


난 널 사랑해, 네가 날 사랑하듯이

저녁에도 아침에도

너와 내가 우리의 근심거리들을 함께 나누지 않은 날은 없었지

그리고 그것들은 너와 내가 감당하기 좋게 항상 나누어졌지

너는 내가 걱정할 때에 나를 위로 해 주고

네가 슬플 때 나는 울었지.

 

하느님의 축복이 너의 위에 있기를,

너 나의 삶의 기쁨이여

하느님, 그를 보호하시고, 그가 늘 내게 있도록 하여 주소서.

우리 둘 모두를 보호해 주시고 늘 함께 하도록 하여 주소서.

 

하느님, 그를 보호하시고, 그가 늘 내게 있도록 하여 주소서.

우리 둘 모두를 보호해 주시고 늘 함께 하도록 하여 주소서.

우리 둘을 항상 함께, 함께 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 둘을 함께 하게 하여 주소서

 

이 가곡은 베토벤이 33세 때인 1803년 헤루루세라는 무명시인의 시에 작곡한 진실한 애정을 노래한 것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가락으로서 순정을 나타낸 작품으로, 이 가곡은 제 2차 전쟁 이후에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피셔 디스카우의 연주에 의한 레코드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 곡은 전주 없이 노래를 시작하는 느린 곡으로 아주 간소한 가락에 사랑의 행복함을 구가하는 그의 서정 가곡이라고 할 것이다.

 

 

☐ Wiegenlied(슈베르트의 자장가)

 

Schlafe, schlafe, holder, süßer Knabe,

leise wiegt dich deiner Mutter Hand;

sanfte Ruhe, milde Labe bringt dir

schwebend dieses Wiegenband.

 

Schlafe, schlafe, in dem süßen Grabe,

noch beschützt dich deiner Mutter Arm,

alle Wünsche, alle Habe faßt sie

liebend, alle liebewarm.

 

Schlafe, schlafe in der Flaumen Schoße,

noch umtönt dich lauter Liebeston,

eine Lilie, eine Rose,

nach dem Schlafe wird sie dir zum Lohn.

 

<죽음과 소녀>와 더불어 이 노래는 신문기자로 활약한 서정시인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 1740-1818)의 시에 붙인 가곡 중에서 잘 알려진 곡이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이 가득히 담긴 이 자장가는 1816년 슈베르트가 19살 때의 작품이다. 3절로 된 이 유절형식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펼침 화음의 반주 위에 간결하면서 흐름이 자연스러운 선율이 아름답게 노래한다.

 

 

☐ Die Lorellei(로렐라이)

 

Ich weiß nicht, was soll es bedeuten

Daß ich so traurig bin;

Ein Marchen aus alten Zeiten

Das kommt mir nicht aus dem Sinn.

 

Die Luft ist kuehl und es dunkelt,

Und ruhig fließt der Rhein;

Der Gipfel des Berges funkelt

Im Abendsonnenschein.

 

Die schoenste Jungfrau sitzet

Dort oben wunderbar,

Ihr goldnes Geschmeide blitzet

Sie kammt ihr goldenes Haar.

 

Sie kammt es mit goldenem Kamme

Und singt ein Lied dabei;

Das hat eine wundersame

Gewaltige Melodei.

 

Den Schiffer im kleinen Schiffe

ergreift es mit wildem Weh,

Er schaut nicht die Felsenriffe,

Er schaut nur hinauf in die Hoh.

 

Ich glaube, die Wellen verschlingen

Am Ende Schiffer und Kahn;

Und das hat mit ihrem Singen

Die Loreley getan.

 

로렐라이

 

왜 그런지 그 까닭은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자꾸만 슬퍼지네.

옛날부터 전해오는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메아리쳐 사라지지 않네.

 

공기는 싸늘하고 해거름 드리웠는데

라인강은 고요히 흘러가고,

산꼭대기는 저녁 노을로

눈부시게 찬란히 빛나는데,

 

저 건너 언덕 위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앉아,

금빛 장신구를 반짝거리며,

황금빛 머리칼을 빗어 내리네.

 

황금의 빗으로 머리 빗으며

그녀는 노래를 부르네.

기이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선율의 노래를.

 

조그만 배에 탄 뱃사공은

걷잡을 수 없는 비탄에 사로잡혀

암초는 바라보지도 않고,

언덕 위만 쳐다보네.

 

마침내는 물결이 조그만 배와 함께

뱃사공을 삼켜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노래로써

로렐라이가 한 것이리라.

 

독일 장크트고아르스하우젠 근처 라인 강에 있는 메아리 치는 암벽으로 프랑크푸르트와 쾰른 사이의 철도 터널이 이곳을 통과한다. ‘요정의 바위’라는 뜻으로, 이 매혹적인 바위를 맨 처음 소재로 다룬 문학 작품은 작가 C.브렌타노(1778∼1842)의 설화시(說話詩)인데, 이곳에는 로렐라이라는 처녀가 신의없는 연인에게 절망하여 바다에 몸을 던진 후 아름다운 목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조난시키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바다 요정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얽혀 있다. 이 전설의 핵심내용에 대해 독일의 작가 클레멘스 브렌타노는 1800~02년에 쓴 자신의 소설 〈고드비 Godwi〉에서 지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전설은 수많은 문학작품과 노래들의 주제가 되었는데, 하인리히 하이네가 지은 시는 25명 이상의 작곡가들에 의해 곡이 붙여졌다.

 

이 시는 <귀향시편>에 실린 작품으로 질허에 의해 작곡되어 민요로 애창되어 오다가 나치가 하이네의 시를 모두 태웠을 때에도 작사자 미상이라는 단서로 묵인된 작품이다. 하이네의 시를 F.질허가 작곡한 가곡은 민요풍의 친근미에 넘치는 선율로 특히 유명하며, 한국에서도 애창되고 있다.

 

출처: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3&docid=10661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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