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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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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3일 12시 00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리처드 니스벳. 이 분은 사회 심리학자다. 사회는 개개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유기적 역동이며 그 안에는 다양한 경우의 조합으로 인한 창조와 질서를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규칙과 약속 안에 스스로를 규정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것을 사회학자나 문화인류학자의 관점이란 보편적 초점보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파악했다는 것에 난 이 저자의 다양성에 대한 수용과 그 깊이를 담아내는 역량을 느낀다.

 리처드 니스벳은 예일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역임했고, 현재는 미시간 대학교 심리학과의 시어도어 뉴컴 석좌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2년 사회 심리학자로는 최초로 미국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몸담고 있던 기관과 학교의 성격만 보더라도 얼마나 다양하면서도 강도 높은  실험과 연구 시도를 통해 이 책이 저술되었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니스벳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논리와 수치화된 신뢰성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주관성과 다양한 상황적 변이에 대한 이해까지 아울러 품을 줄 아는 사람이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어느 하나에 소홀함 없이 치밀하고 세심하게 그 본질을 뚫어보고 그에 따른 시도와 연구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어느 하나의 관점에 치우침 없이 드러내되 그 기능과 역할을 탈 맥락적 접근을 이용함으로 더 깊이 있는 균형적 이해로 우리에게 거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전체를 보면 부분을 놓칠 수도 있다. 반면에 부분을 보면 전체를 놓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양 극단의 속성의 장단점을 명확히 보되 그 안에 어떤 조화와 상생을 이뤄낼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 균형잡힌 시각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리처드 니스벳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근본적인 차이를 ‘문화’와 ‘인지 과정’과 ‘언어’라는 측면으로 밝히 드러냄으로 그 기능에 따른 다른 반응의 차이였음을 알게 한다.

 리처드 니스벳은 직관적이면서도 사회적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가 직접 생각하여 제시한 가설과 상상은 그의 수많은 실제적 연구와 실험을 통하여 그가 고안했던 가설적 예상 결과들에 그대로 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가설을 통한 연구 자체도 중요한 것이지만 가설을 떠올리고 의문을 던져보는 지적 호기심과 그 분야에 대한 깊은 이해 및 컨텐츠의 풍부함을 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리처드 니스벳이 보여주는 그의 상상과 호기심은 곧 우리가 동양과 서양의 차이와 조화의 이해라는 단계를 넘어 또 다른 상반된 속성의 가치를 돌아보고 그 안에 상생과 이해를 낳을 수 있는 지름길을 제시해 준 발판이 되었다는 것에 깊은 의의를 느낀다.


내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생각의 지도

서론

(13) 중국 사람들은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부분만을 떼어내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서양 사람들은 훨씬 더 단순하고 기계적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큰 그림보다는 부분적인 사물 그 자체, 혹은 사람 자체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15) 이에 더하여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훈련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추론 방법과 실제 행동이 바뀔 수 있음을 이 연구들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일종의 문화의 힘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16) 그들은 서양인들이 물리적 사물, 동물, 사람을 모두 포함한 사물의 행동을 설명할 때 아주 분명한 규칙들에 의거한다고 한결같이 가정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서양인들은 범주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범주를 알게 되면 어떤 사물이 속하는 특정 범주를 지배하는 규칙을 사용하여 그 사물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반하여 동양인들은 사물들을 전체 맥락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세상은 매우 복잡한 곳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관련 요인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문제 해결에서 형식논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17) 심리학자인 나에게 인간의 사고가 문화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주장들은 그 시사하는 면에서 가히 혁명적이었다.


(17) 동양과 서양의 사회 구조에서의 차이, 그리고 동양인들과 서양인들의 자기 개념에서의 차이는 그들이 사고 과정과 사고 내용에서 보이는 차이와 일치한다. 즉, 동양 사회의 집합주의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특성은 세상을 보다 넓게 종합적으로 보는 시각, 어떤 사건이든지 수없이 많은 요인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같은 논리로, 서양 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인 특성은 개별 사물을 전체 맥락에서 떼어내어 분석하는 그들의 접근, 사물들을 다스리는 공통의 규칙을 발견할 수 있고 따라서 사물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그들의 신념과 통한다.


(18)  세상을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생각의 도구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왜 동양인들은 명백하게 모순되어 보이는 두 주장들을 동시에 받아들일까?


(18) 동양과 서양의 사고에 조재하는 이렇듯 큰 차이의 기원은 무엇일까? 생물학적 요인일까. 그것도 아니면 언어의 차이일까? 경제적 구조의 차이일까 아니면 사회 구조의 차이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교육의 차이일까? 이러한 차이들은 수백 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


1 동양의 도와 서양의 삼단논법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했던 고대 그리스

(27)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유독 강했다.


(28) 이처럼 그리스인들은 다른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정의하는 행복이란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30) 물론 과학 영역에 대한 체계적 접근이 그리스 문화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 문화만이 그러한 관찰을 통하여 어떤 ‘원리’를 발견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기본 원리를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그리스인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여가란 다름 아닌 지식을 추구하는 자유를 의미했다.


개인의 ‘관계’를 중시했던 고대 중국

(30) 그리스에서 개인의 자율서이 중요했다면, 중국에서는 조화로운 인간 관계가 중요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이 특정 상황에 구속되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존재였다면,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개인은 ‘특정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이었다. 


(31) 초기 유교 신봉자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타인과의 관계 맺음과 그 속에서 부여되는 역할들의 총체일 뿐, 결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결국 그들의 정체성은 역할에 따라 결정되므로 역할이 바뀌면 정체성도 당연히 바뀐다. 즉, 완전히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


(31) 중국인들은 또한 주변 환경을 자신에 맞추어 바꾸기보다는, 자신을 주변 환경에 맞추도록 수양하는 일을 중시했다


(31) 그리스인들에게 행복은 ‘자신의 자질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것’이지었지만, 중국인들에게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 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32) 중국인의 일상에서 개인의 권리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권리 중 자신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 사회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인간 관계를 해치는 위험한 요소로 간주했다.


(32) 중국의 철학이나 의학,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영역에서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한 비판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는 지적인 양보와 타협을 그리스인들보다 훨씬 빨리 이끌어냈다.


(34) 유교적 사로에 있어서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되지 않은, 즉 실용적이지 않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앎’이란 것은 없었다.


(35)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습관적으로 행한 작업 중 하나는 사물의 속성을 분석하고, 그 추상화된 속성에 의거하여 사물을 범주화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각 범주를 지배하는 규칙들에 근거하여 그 범주에속하는 사물들의 특징과, 그 사물들의 행위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36) 이와 같은 특징은 ‘사물 자체’를 분석과 주의의 대상으로 삼는 그리스의 철하 정신에 기인한다.

1) 사물의 속성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2) 그 속성에 근거하여 범주화하고, 3) 그 범주들을 사용해 어떤 규칙을 만들어, 4) 사물들의 움직임을 그 규칙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37) 그리스 철학자들은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직선적’사고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집착했다.


사물의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의 철학

(39) 듣는 사람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이 이야기는 동양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들에게 세상은 늘 변하며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다. 따라서 어떤 일의 경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반대 경우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지금은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 나중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0) 음양의 원리란 ‘서로 반대되면서 동시에 서로를 완전하게 만드는 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힘’의 관계이다.


(40) 무언가를 구부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펼쳐야 하고 무언가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강화시켜야 하며 무언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풍성하게 하여야 하고 무언가를 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주어야 한다.


(43) 유교, 도교, 불교 모두 ‘조화’, ‘부분보다는 전체’, ‘사물들의 상호 관련성’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다. 세 철학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합주의’는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종합주의라는 개념은 공명(resonance) 현상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악기의 한 줄을 건드리면 공명에 의해 다른 줄이 울게 되듯이 인간, 하늘, 땅은 서로에게 이런 공명을 일으킨다. 만일 땅에서 군주가 나쁜 일을 하면 우주의 상태 역시 나빠진다는 믿음이 바로 이러한 종합적 사고의 한 예이다.


(43) 중국인들의 기본적인 우주관은 우주가 상호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사물들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물질이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가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44) 그리스인들은 개인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보았고,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으로서의 논쟁을 중시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44) 중국인들은 인간을 ‘사회적이고 상호 의존적인’존재로 파악하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조화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 경향 때문에 중국인들은 어떤 대상을 전체 맥락에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꼈다.


중국과 그리스의 과학과 수학

(45) 그리스 논쟁의 전통에서 기인한 듯하다. 즉, 논쟁을 통해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 대해 자신이 남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46) 개별 사물과 그것의 속성에 집착한 탓에 그리스인들은 아주 기본적인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였다.


(46) 중국인들은 우주를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장으로 보았기 때문에, 인과 관계를 설명할 때에도 정 전체의 복잡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지 수많은 힘들이 상호 작용하는 장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48) 중국인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하게 범주화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단순한 범주와 규칙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이해하고 통제하기에는 우주는 너무나 복잡하고 역동적인 곳이었다.


(49) 그러나 범주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어떤 범주에 존재하는 규칙을 무시함으로써 그 범주에 속하는 개체들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2장 동양의 더불어 사는 삶, 서양의 홀로 사는 삶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자기 개념

(54) 동양인들의 인간 관계를 지배하는 규칙은 보편적이라기보다는 특수하며, 각자가 마땅히 행해야 하는 역할에 근거하고 있다.


(54) 동양적 사고에서 바라본 개인은, 항상 어떤 구체적인 맥락 속에 있는 존재이다. 구체적인 어떤 사람과 구체적인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상황에서 인간을 분리시켜 그의 행위나 속성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동양의 사고 방식에서는 매우 낯선 일일 수 밖에 없다.


(55) 동양인들은 자신들이 속한 내집단에 대해서는 강한 애정을 보이지만, 외집단이나 그저 아는 사이인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리를 둔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자신과 내집단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하며, 내집단원이나 외집단원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보편주의적 행동원리를 따른다.


(57) 동양과 서양의 자기 개념의 차이는 자신을 얼마나 독특한 존재로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도 발견된다.


(58) 동양인에게는 자신이 ‘특별하다.’ ‘남들보다 탁월하다.’라고 믿게 하는 문화적 압력이 없다.


(59) 동양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남들과 마찰 없이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지


서양의 독립성과 동양의 상호의존성

(59 )동양의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남들과 마찰 없이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지만, 서양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도록 가르친다.


(61) 문화심리학의 용어로는 공동사회는 대개 ‘집합주의적’ 사회를 지칭하고, 이익사회는 ‘개인주의적’ 사회를 지칭한다.


(62) 서양의 아이들은 독립성에 대한 훈련이 워낙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때로 자신의 선택의 자유가 침해되면 심하게 반항한다.


(63) 인간 관계를 강조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감정에 민감해지게 마련이다. 미국의 어머니들은 자녀와 함께 놀이를 할 때 특정 사물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물의 속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반면에 일본의 어머니들은 사물의 ‘감정’에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르친다.


(63) 사물의 속성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훈련받은 아이들은 스스로 독립적인 행동을 하도록 교육받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미리 예측하도록 교육받는다.

 타인의 가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훈련의 효과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나타난다. 서양인에 비해 동양인들이 타인의 진짜 속마음과 감정을 잘 읽어낸다고 한다.


(64)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정도에 따라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한 관점도 달라진다.


(69)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인 규칙에 대한 집착’은 개인과 개인, 조직과 조직 사이의 계약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71) 동양인들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호의존적 단서들을 통해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인 사람이 되도록 유도되고 있고, 서양인들은 독립적 단서들을 통해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늘 점화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2) 보다 더 극적인 예로, 어떤 사회에서 지내느냐에 따라 자존감 점수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논쟁하는 서양, 타협하는 동양

(78) 동양에서는 분쟁을 해결할 때에도 논쟁을 잘 벌이지 않는다. 대게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제3의 중재자를 찾는데 그들은 ‘중요의 도’를 내세워 타협을 유도한다.

3장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

동양의 종합과 서양의 분석

(84)  서양인은 개별적 ‘사물’을 보고 있고 동양인은 연속적인 ‘물질’을 보고 있는 것이다.


(86) 특히 미국인들에게 회사는 고유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원자처럼 결합되어 있는 시스템이지만, 동양인에게는 사회적 관계로 맺어진 유기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 세계와 초자연 세계의 현상을 이해하는 과정에도 종합적 사고 방식을 적용했다. 그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자연계와 우주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87) 정치·경제·사회 사상에 대한 거시적인 이론 체계들 역시 주로 대륙에서 시작되었다.


세상을 지각하는 서로 다른 눈

(88) 동양인들은 주변 상황에 맞추어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태도나 행동에 서양인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89) 서양인들은 과거를 기억할 때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회상하지만, 동양인에게는 그런 경향이 약하게 발견된다.


(90) 서양 학생들은 주로 자신의 관점, 즉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관점에서 회상한 반면, 동양 학생들은 제 3자의 입장에서 기술하는 경향을 보였다.


(95) 동양인이 서양인에 비해 주위 환경에 더 예민하다면, 사건 간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통제하려는 서양과 세상에 적응하려는 동양

(97) ‘세상은 단순하고, 따라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일 자체에만 신경 쓰면 된다’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통제 가능한 곳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세상사는 예측할 수 없이 자주 바뀐다’라고 믿는 사람에게 세상은 통제하기 어려운 곳이다.


(98) 흥미롭게도 동양인들은 자신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자신을 통제해줄 사람이 주변에 있다고 믿을 때 더 행복감을 느꼈다.


동양의 순환론과 서양의 직선론

(100) ‘변화’에 대한 동서양의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며, 이 차이는 다시 전체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느냐 아니면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이느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104) 동양인들은 진보보다는 ‘회귀’를 추구하고, 극단적인 것들 사이의 ‘중용’을 추구한다. 그리고 동양의 유토피아는 ‘과거’에 존재하며, 인간의 소망은 ‘현재 상태에서 과거의 완전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106) 어떤 의미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양인들은 작은 부분보다는 큰 그림을 보기 때문에 사물과 전체 맥락을 연결시켜 지각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전체 맥락에서 특정 부분을 떼어내어 독립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낯설어한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사물에 초점을 두고 주변 맥락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건과 사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덜 민감한 편이다.


제 4장 동양의 상황론과 서양의 본성론


(111) 미국 대학생들은 살인자의 개인적 속성에 중요성을 더 많이 부여한 반면, 중국 학생들은 상황적 변수를 더 중요시했다.


(116) 동양계 미국인들 역시 그들 안에 존재하는 ‘동양적인 자기 개념’을 자극시켜주면 동양적으로 행동하고, ‘서양적인 자기 개념’을 더 강하게 자극시켜주면 서양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123) 한국인들은 돈이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상황적인 정보에 더 민감했고, 미국인들은 상황과 상관없이 짐이 친절한 사람인지의 여부만 중시했다.


동양인의 인과 모델과 서양인의 인과모델

(124) 와타나베는 미국인의 이러한 역사 분석을 ‘후행적’이라고 규정했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결과->원인’의 순서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이러한 분석이 서양인의 목표 지향적 사고와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125)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에 비해 세상을 ‘덜 복잡한 곳’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적은 수의 요인들만으로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후견지명 효과에서의 동서양의 차이

(127) 그 어떤 일이 발생한다 해도, 수없이 많은 관련 요인들 중 일부를 사용하면 사후에 그 이을 설명하기가 매우 쉬울 것이고, 따라서 그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종합적 사고를 하는 사람(동양인)이 사후과잉 확신에 더 쉽게 빠질 것이라는 예측이다.


(130) 반면에 동양인들은 수없이 많은 인과적 요인들 모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 문제점이 있다.


제 5장 동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양과 명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서양

(135) 그리스인들은 공통의 속성을 지닌 것들을 같은 범주로 분류했지만, 철학자 도널드 먼로에 따르면 중국인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서로 ‘공명’을 통하여 영향을 주고받는 것들을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다.


사물을 먼저 배우는 서양 아이들과 관계를 먼저 배우는 동양 아이들

(145) 범주는 명사에 의해 표현된다. 

반대로 관계는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타동사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두 사물과 그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행위를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147) 대화를 통하여, 미국의 어린이들은 세상을 ‘사물’로 이루어진 곳으로 배우고 일본의 어린이들은 세상을 ‘관계’로 이루어진 곳으로 배운다.


문화적 차이는 순전히 언어의 차이에 기인하는가?

(150) 동양의 언어는 ‘맥락’에 주로 의존한다. 동양어의 단어는 대게 다중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서양의 언어는 맥락보다는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어는 ‘주어’에 매우 집착한다. 그러나 동양의 언어는 ‘주제’ 중심적이다.


(151) 서양에서 행위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동양 언어에서 구체적인 맥락과 인간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나’를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서양의 언어는 행위자 중심적이다.


(152) 언어 구조상의 차이는 사고 과정의 차이를 낳는다.


제 6장 논리를 중시하는 서양과 경험을 중시하는 동양


(159) 다른 중국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명제의 진실성과 도덕성을 구분 짓지 않았는데, 이는 논리학의 발전에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였다.


서양의 논리와 동양의 경험

(160) 동양에서 논리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주된 이유는 어떤 논리적 주장의 ‘내용’은 무시하고 ‘형식’만 고려하는 탈맥락주의를 완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168) 그러나 동양인들은 순전히 형식 논리상 모순된다는 이유로 결론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개념이란 단지 사물의 반영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두 개념을 동시에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176) 동양인들은 타협에 의한 해결책과 종합적인 주장을 선호하며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모순된 주장을 자연스럽게 모두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또한 스스로의 선택을 정당화해야 할 때에는, 명백한 원리에 의존하기보다는 절충점 혹은 중도적 입장을 추구한다.


동양 사람들은 왜 점 보는 것을 좋아할까?

(177) 심리학에서는 ‘바넘 효과’라고 부른다. 이 말은 ‘쉽게 속아 넘어가는 얼치기는 매순간 태어난다’라는 표현을 했던 어떤 서커스단 주인의 이름인 바넘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외향적이지만 내성적이다’라는 주장 속에 담겨진 모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양인들은 왜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일까?

(180) 대립적인 정서의 동시다발적 경험은 동양인들의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180) 미국인들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할수록, 부정적인 정서를 보고하는 비율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매우 흥미롭게도, 일본 참가자들은 이와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같은 얼굴에서 긍정적인 정서와 부정적인 정서 모두를 보았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 모순되는 두 정서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183) 동양과 서양은 우주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가정이 다르고, 어디에 주의의 초점을 두는지도 다르고, 변인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하는 능력과 복잡한 환경에 놓여 있는 사물을 구별하는 능력에서 다르고, 행동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다르고, 세상을 범주로 파악하는지 아니면 관계로 파악하는지의 여부에서도 다르고, 마지막으로 형식 논리의 규칙을 포함한 ‘규칙’을 사용하는 정도에서 다르다.


제 7장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의 차이, 그 기원은?


사회 구조가 주의와 형이상학적 신념에 미치는 영향

(192) ‘자신’을 사회적 의무와 인간 관계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하면, 당연히 이 우주는 독립적이고 불연속적인 원자들의 결합이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들의 유기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 때에도, 개별적인 개체들의 내부 속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개체가 속한 전체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전체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의 복잡성과 가변성을 인식하게 되고, 세상의 많은 변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들도 인정하게 된다.


제 8장 동양과 서양, 누가 옳은가?

(205) 중국의 판사는 법을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 따로 따로 적용되어야 하는 융통성 있는 것으로 본다. 각 개인의 상황에 맞게 적용될 수 없는 법은 인간적이지 못하며 결코 법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 법이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218) 동양인들의 ‘우주는 매우 복잡하다’라는 믿음은 분명 옳으며, 실제 생활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만큼은 ‘모든 것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라는 생각보다는 단순한 모델을 가정하는 것이 진리를 발견하는 데에 훨씬 용이하다.


 


내가 저자라면...


서양과 동양의 차이는 누구나 막연히 알고 있었지만 누구나 그 배경이 되는 지식과 문화적 ·인지적 차이에서 오는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지극히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인지‘ 이것은 동양적이고 이것은 서양적이다’라고 잘라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우리네 인간은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떤 사물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 구획화하고 범주화하여 묶는 작업을 한다. 작가는 가장 거대한 관점을 정해 그것을 구별하였고 그 차이와 상생을 제시한다.  그건 바로 ‘동양’과 ‘서양’이라는 관점이다. 

 이 책은 지극히 미국적이다. 무엇이든 검증 가능한 관찰과 여러 실험을 통한 구체적 데이터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학술적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이 이 책 곳곳에 드러나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이해를 소수의 관련 기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의 데이터가 아무리 미국인과 한국인 유럽인의 인종을 확보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실험 환경이라 할지라도 그 전체를 아우르는 그 대학교의 문화적 분위기와 상황적 이해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다양한 관점과 실험을 통해 두 문화의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사회적·자연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차이들을 잘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을 담아내는 컨텐츠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생의 해결책까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런 ‘지식’이 있으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좋을 것이라는 희망찬 가능성을 보여주지 다문화의 갈등과 동서양 모두에게 겪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는 새로운 해결책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초석을 다진 것은 분명하다. 변화의 모든 시작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 이해는 ‘나’를 이해하는 깊이이며 더불어 ‘너’를 이해하는 열림이다. 우린 열림과 깊이 이 두 가지를 모두 끌어안아야만 더 나은 자신을 갈망하고 자신을 균형있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좀 더 다문화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연구 기관이 자료수집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결국은 미국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이뤄진 연구과정을 동일한 과정으로 유럽과 중국에서도 어떻게 결과가 나올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봐야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지역과 공간과의 ‘결과의 일치’가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동안의 ‘과정상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오히려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이해에 더 가까운 접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글로벌의 사회를 살고 있다. 갈수록 세상이 소수의 힘 있는 가치와 권력에 의해 움직여지고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동·서양의 차이점을 이끌어 왔던 오랜 시간동안의 가치와 문화는 언젠가는 바뀌든지, 아니면 최소한 시대 상황에 맞게 변형될 것이다. 그럴때 우리 동 ·서양의 인류는 각자가 가진 장점과 기능성을 바탕으로 대처해가야 할지가 엄연히 다를 것이며 그에 대한 가장 최선적 과제와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까지 연구되었다면 이 책은 더 많은 시사점으로 계속 후속 연구가 이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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