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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28일 22시 32분 등록

선의 황금시대

-         오경웅 지음/ 류시화 옮김 / 경서원

 

▣ 저자에 대하여

 

중국 출신의 오경웅(John C.H.Wu, 1899~1986) 박사는 20세기를 통틀어 동서양을 완전하게 이해한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한때 린위탕(林語當)과 함께 월간 텐허(天下)의 편집동인이었던 문학인이었다. 철저한 가톨릭 사람인 동시에 철저한 동양인으로 불리는 그는 중국 미국 프랑스의 7개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법철학 계에 이름을 남기고 있음은 물론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 헌장 구성 등에 참여한 거물이면서 한편 중국 내 천주교 신앙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고 신약성서 시편 등의 중국어 번역을 맡기도 했다. 또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 근무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서구사회에서는 John C.H. Wu로 알려져 있으며 동양적 자연법사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면서 자신의 가톨릭 신앙과 연결시키는 현대 중국이 낳은 대법철학자이다.

 

1949년 저술된 그의 저서<동서의 피안>그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 대승과 선사상에 관한 비판,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에 관한 견해 등 동서를 비교하여 그 차이 안에서 종합 요소를 발견하고 동서를 초월한 사상을 제시했다.

동서양을 초월한 사상을 피력할 수 있었던 지적 배경을 살펴보아야만 그에 대한 이해가 더욱 쉽겠다.

오경웅 박사는 1899 3 28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상하이 호강대학에 진학, 처음에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과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곧 진로를 법학으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과학이 자연의 이치를 다루는 것이라면 법학은 곧 인간 삶의 이치를 다루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에서 그는 상하이 동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법을 자연법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는데 전문가들은 젊었을 적에는 자연법의 옹호자였고 만년에는 자연법을 일체법의 기초로 보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찍이 지성적 추구에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도덕상 직무로 바뀌었던 그의 법철학은 결국 그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인물로 안내하는 매개체가 됐다.

그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학하는 가운데 미국 대법관이면서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법사상가인 올리버 W.홈즈 신부와 14년 동안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적 우정을 통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또 베를린에서는 슈탐러(Rudolf Stammler)의 지도를 받으며 이들 두 사람의 법사상을 종합하려 노력했다.

 

1967년에 쓰여진 <선의 황금시대> 저술에 홈즈 신부의 영향이 크게 미쳤음은 물론이다. 그가 선불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시작한 것은 1948년부터 1951년 까지 하오이 대학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초빙교수로 재직할 당시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그 전까지는 육조 혜능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는 그는, 선불교를 배우고 있던 제자를 통해 스즈키 박사를 소개 받는다. 스즈키 박사에게서 단순히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대로 사는 사람이 이라는, 감동적인 인상을 받은 데다가, 그 즈음 출간된 스즈키 박사의 <선의 숨결로 살다>을 읽고 나서 그는 혜능의 통찰이 끼친 영향을 새삼 깨달았으며 마조, 건주, 임제, 운문 등 역대 조사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통찰에 흠뻑 빠져든다. 이후로 그는 선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는 것뿐만 아니라 깊이 연구하기에 이른다. ()에 대한 20세기 최대의 권위자라 할 수 있는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 토마스 머튼 신부와 두텁게 교유하면서 종교와 동양사상을 두루 넘나들었다. 이 책에서도 선에 대한 이야기에 맹자, 공자, 장자, 노자 반야경, 금강경 뿐만 아니라 성경을 넘나드는 해석을 하고 있다.

 

<선의 황금시대(원제 The Golden Age of Zen)>1967년에 쓰여졌으며 당나라 시대의 대선사들을 소개한 책이다. 그는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의 선 연구 결과를 선에 대한 통찰력으로 연구하여 재해석하였으며 당대 이후의 선을 연구 하기도 했다. 아무튼 스즈키 박사가 큰 것으로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스즈키박사에게 서문을 부탁했으며 원고의 에필로그 부분도 검토 부탁했다.  스승인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가 그의 방문에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느낄 정도였다 하니 그의 심오한 학식을 높이 평가 했음을 알 수 있다.

 

토마스 머튼 신부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했다.‘오경웅 선생이야말로 이러한 짐을 떠맡기에 아주 제격인 인물이다. 탁월한 법률가이며 외교관이고 가톨릭을 믿는 중국인이면서 학자인 그는 정신적인 자유와 심오한 유머를 간직한 사람으로 절대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이나 단순한 연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속 알맹이를 알알이 드러내면서 선과 불교 이야기를 펼쳐 나갈 능력을 충분이 갖고 있다.’ 또한,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는 그는 선에 대한 해석이 순수한 종교 체험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 주고 있다고 인정했다. 에필로그 마지막 부분의 아내 테레사의 임종에서 볼 수 있듯이 그도 스즈키 선생만큼이나 선을 행하며 살았음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단순히 학자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인간 존재의 위대성과 신성을 꿰뚫고자 노력한 참사람이 틀림없다.

 

오경웅 박사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을 역임했던 서돈각 박사 등 한국의 지성인들과도 친분을 맺었고 영남대학교를 비롯 보스턴대, 세인트 존스대 등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손문 전기 출간 등 교육 문화사업을 비롯 다방면에서 종사하다 1986 86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의 저서로는 <정의의 원칙>, <동서의 피안> <중국의 휴머니즘과 기독교 영성> <철학 및 정치 철학론>,<선의 향연>, <내심낙원>등 심오한 책들이 있다.

 

옮긴이 류시화

시인. 1577년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1980 ~ 19 82년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 1983~1990년 작품활동 중단. 구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이 기간 동안 명상서적번역 작업을 시작. <성자가 된 청소부>,<장자, 도를 말하다>, <새들이 회의>등 명상과 인간 이식 진화에 대한 주요 서적 40여권 번역. <선이 황금시대> 1986년 번역 출간되었다. 1989년 두 차례 걸쳐 인도 여행. 라즈니쉬 명상센터 생활. 1988~1991년 가타 명상센터 생활함. 서울 대학로에 작업실이 있으며, 미국과 인도와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고 있다.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아무튼 나는 그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본문 어디 인가에도 나오듯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한 걸음 한 걸은 심혈을 기울여 앞으로 나아갔는데 문득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 마고 있어서 나를 탄식하게 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의 얕은 식견 내지는 더없이 부족한 삶의 통찰, 게다가 언어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크나큰 절대의 거시기가 단어 하나하나를 옮길 때마다, 행간을 바꿀 때마다 나를 가슴 뜨끔하게 했다.[8]

 

더 큰 즐거움은 이 책 구절구절에 넘쳐 흐르는 신비한 수수께끼, 숨막히는 전환, 경악할 돌발사, 선악을 뛰어 넘는 통찰, 그리고 감히 이름 붙이건대 우주적인 농담등이다. 선이 무엇이냐 말할 수 없지만 선이 아니냐를 말하라 하다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농담을 모르는 것,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9]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이 숨결로 읽는 것이다. 한 문장에 적어도 열흘은 명상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9]

 

이 책 속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도처에 우리가 여태껏 눈감고 지나쳐 버린 보물들이 무진장 숨겨져 있음을, 생이 은밀한 불씨들이 찾아내 주기를 기다리며 가슴 두근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불씨가 우리 속안에서 인생의 알짜배기 체험들을 통해 점점 뜨겁게 타오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운문 선사가 말 한대로 <하루하루가 다 최고의 날>을 살 수 있을 것이다.[10]

 

지은이의 말

선 불교는 비록 6세기경 보리달마가 중국에 건너옴과 더불어 시작되긴 했으나, 그 심지에 본격적인 불이 당겨지기는 7세기경 혜능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 선의 불꽃은 마조, 석두, 남전, 백장, 황벽 그리고 조주 등의 영향력 넘치는 열정에 힘입어 더욱 뜨겁게, 더욱 다채롭게 피어 올랐다.[11]

 

대개가 선의 체험들과 일화들을 내용으로 한 이들 작은 불꽃들은 선 불교가 비록 오래 전에 그 절정을 넘어서긴 했으나 그 알짜배기 정신만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음을 보여줄 것이다.[12]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은 선의 골수를 정확히 끄집어 내고 있다. 이 세상 만가지 삼루의 본바탕으로 곧바로 내려가 결국 본 바탕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이며, 신성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기에 앞서 그 글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12]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선은 좀처럼 간단하지 않다. 대단히 신비하고 난해하다. 어찌 보면 선은 정신 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상천외한 것들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불교신자들한테도 선은 여전히 당혹스럽게 다기와 이들이 익숙해 있던 사고 패턴이나 경건시해 온 상징물들을 여지 없이 부숴버린다. 그러니 불교식 사고관이 먼 사람들한테는 더욱 충격적일 것이다. 때로 선은 아주 노골적으로 비종교적이다. 이만큼 선은 형식주의와 신화를 대놓고 짓밟아 버리며, 성숙한 영적 진화를 방해한다고 전통적인 신앙심을 깔아 뭉갠다.[368]

 

기독교인인 오선생이 선을 다루는 강점 중의 하나도 그에겐 그러한 곁다리들은 떼어 내고 선을 이야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369]

 

독자 자신이 선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그는 선에 관한 고전 자료들로 꼭 들어찬 이 책에서 얼떨떨해질지도 모른다. 진기한 일화들, 낯선 해프닝, 비밀스런 선언들, 비논리적인 유우머의 홍수,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순, 불일치, 횡설수설, 터무니없는 행동들 ? 이모든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논리적인 서구식 의식 구조를 지닌 사람들한테는 선명히 들어나지 않는 어떤 신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370]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370]

 

선에는 비록 교리적인 요소들이 녹아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표현이 불가능한 선 체험의 곁다리들이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선이 담고 있는 불교의 형이상학을 간파하지 않고서는 동양의 선을 이해할 수 없다.[371]

 

근본적으로 불교는 부처 자신의 깨달음을 믿고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 깨달음의 체험 속에 모두가 직접 참여하고 개개인의 존재가 온몸으로 체험하길 바란다. 따라서 그 속에 담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전혀 모르고서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전혀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인간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 줄 뿐이다.[371]

 

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바로 삶 자체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산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가는 란 도대체 누구인가? 그렇게 존재하고 살아가는 를 바로 보거나 잘못 보거나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엇이 존재의 근본적인 진실이며, 진실이 아닌가?[372]

 

선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원자처럼 핵심을 이루는 사실이라 해도 존재의 근본적인 진실은 논리처럼 핵심을 이루는 사실이라 해도 존재의 근본적인 진실은 논리적으로 해명하거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372]

 

선은 진실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과 진실에 반대되는 것의 증명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진실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372]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본질이란 무엇인가? 선에는 확실히 일상적인 평범한 감각 체험들과 깨달음의 체험 사이에 일종의 변증법이 있다. 선은 유일하게 진실인 본질에 도달한다는 명목으로 감각이나 물질을 거부하지 않는다.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373]

 

선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의 명상은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고’, ‘정신 차리고자한다. 다시 말해 언어의 형태에 의해 왜곡되고 속임을 당하는 그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는 일종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한다. 무엇을 속는단 말인가? 어떤 것이 실제로 거기에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속임수다[374]

 

선은 일종의 확실성을 목표로 한다.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 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 불교의 목적은 이러한 통찰력이 생길 때까지 의식을 맑게 하는 데 있다. 실제로 이러한 통찰의 종교적 체험은 다양하게 꽃피어났고, 서로 다른 불교 전통들의 생명이 되었다.[374]

 

모든 종교의 신비가들이 같은 것을 체험하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불행히도 상반되는 여러 교리나 해석 내지는 신조들에서 해방되려고 한결같이 뜻을 같이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결국 모든 종교는 꼭대기에서 다 만나며 각종 신학과 철학은 단순히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어느 수단이나 다 일리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380]

 

기독교인과 불교도가 똑 같은 정도로 선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할까? 그렇다. 만일 이때의 선이 언어의 형식과 편견에서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의 직접적이고 순수한 체험을 의미한다면 대답은 긍정적이다.[381]

 

기독교에선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나 우수성으로나 항상 앞장선다. 반면에 선에 있어서는 체험이 항상 선행한다. 이는 시대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적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선은 어떤 계시적 관념도 부숴버리며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또한 존재의 잇는 그대로의 본질을 꿰뚫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383]

 

선은 불교가 그렇듯이 구원과 깨달음을 향한 노력에 있어서 조차도 인간을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독립이라면 무엇으로부터의 독립인가? 자기 존재의 본질과 정신의 속 알맹이를 바로 보고 그 속 알맹이를 완전히 꽃피워내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외적 여건과 권위부터의 독립이다.[383]

 

그리스도의 신비를 신비적으로나 혹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종교적으로 교회와 함께 체험함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체함은 항상 어떤 방법으로든지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체험해야 하며 적어도 교회의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체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학적인 현태로 바꾸어져야 한다.[384]

 

선은 전달 가능성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그리고 선의 가르침이나 수행 속에 담겨 있는 상당한 양의 독설과 폭력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기존의 설명과 안이한 해석들을 죄다 슬어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384]

 

선에서 전달되는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주의 말씀일지라 해도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받는 사람이 아직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며, 전혀 모르고 있었던 어떤 것에 대한 뉴스도 아니다. 선이 전달하는 것은 당사자가 이미 갖고는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말씀을 전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실현이며, 계시가 아니라 자각이고,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직관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나중에 볼 것이다.[385]

 

선의 진정한 목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인식, 속안의 지혜와 직관을 일깨우는 일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혜의 원천인 순수 의식은 그것이 대상화되는 순간 순수하거나 직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따라서 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의미에선 반언어적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히 뒤엎는 것이다.[386]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의 생각이나 사물들의 의미를 앞질러 단정짓게 만들며, 사물들을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공식에 맞추어 들게끔 만든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문장들의 그림자로만 생각한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재빨리 언어를 사물 자체와 바꿔 치며, 우리의 안이한 선입견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본다. 선은 이러한 편견을 몽땅 부수고 무일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환상적 모습들을 쓸어내기 위해, 그리하여 대상을 직접 보게하기 위해 언어를 뒤집어 사용한다.[387]

 

선의 직관은 거죽에서 체험하고 되새기고 알고 말하고 고집부리는 얕은 나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의식을 일깨우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각은 그 자리서 당장 일어나야지 다른 어떤 관념을 끌어와 곰곰이 되새기고 추리로 이끌어 나가선 안 된다. 그리고 선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전적인 긍정이다.[387]

 

선은 언제나 삶의 중심 사실을 꿰뚫고자 한다. 선사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과 행동 자체가 곧 선의 불꽃이다. 선의 알짜배기 정신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후려갈기는 행위가 얼마나 실제적인가 하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부정도 없고 긍정도 없으며, 평범한 사실, 순수한 체험, 우리 존재와 사고의 원천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387]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도 이러한 의미에서다. 선은 단순히 우리를 일깨우고 깨쳐 알게 한다.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388]

 

선사와 제가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쉽게 만나게 되는 측면은 제가의 좌절, 즉 혼자만의 의지와 지성으로는 도저히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없는 데서 생기는 무능력함이다.[389]

 

머리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보기 시작하라는 충고다. 어쩌면 저기 머리로 짜낼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모른다. 단지 깨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390]

 

선은 인간 실존의 어떤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용어로 합리화되거나 또 그렇게 상상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그 실체가 체험되어져야 한다.[393]

 

1. ()의 심지

()과 도()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한다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20]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 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 조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心齎]’이나 마음을 잊음[坐忘]’또는 아침처럼 맑음[朝澈]’에 해당된다.[22]

 

무엇 때문에 세상이 갈수록 덕을 잃고 지능만 발달하는지 알겠나?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 것일세. 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립에서 생긴다네. 그리고 지능이야말로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경쟁의 무기이지. 따라서 들 다 사악한 흉기일 뿐이며,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못 되지.[23]

 

마음을 맑게 함[心齎]

그러면 마음을 말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했다.

자네의 기()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26]

 

마음을 잊음[坐忘]

잊은 상태로 침잠.”

여기서의 잊는다는 것도 그 범위가 매우 넓어 자기자신과 일체의 존재를 잊는 걸 뜻한다. 그러나 꼭 앉아 있을 때만 자신과 일체 존재를 잊는 게 아니라 어는 때 어느 경우에나 잊는 걸 뜻한다.[28]

 

저는 좌망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놀라 그게 어떤 경지냐고 물었다.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감에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무한과 하나가 되었다니 더 이상 어떤 편견도 없어졌겠군. 그토록 철저히 탈바꿈하였다니 더 이상 어디에 집착하지도 않겠군. 이렇게 해서 자네는 나를 앞질렀군. 내 이제 자네한테 배워야 하겠네.”

 

아침처럼 맑음[朝澈]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을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 같은 경지에든 사람은 바깥의 대상이 아무리 천만 변화를 하더라도 항상 폭넓게 포용하고 반갑게 맞아들이고 또 모든 일에 차별이 없소. 이것이 바로 혼란과 고통 속의 평화라는 것이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소? 그것은 바로 완전한 평화가 되려면 혼란과 고통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30]

 

장자의 참사람(眞人)’ 이나 자기 발견같은 사상은 모든 선사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임제의 가르침 속에 그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보다 강조한 것으로, 이 역시 선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라, 그러면 알 것이다.[30]

 

()의 현대적 가치

정신적인 여러 측면들 중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해 온 데 비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은거의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을 선과 도가 사상은 다르고 있다. 이들은 전달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을 일깨우는방법을 갖고 있다.[32]

 

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그 기본 성격은 말에는 끝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33]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선의 진면목을 그려 보자는 데 있다. , 여기서는 당대의 대선사들만을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 말로 독창적인 통찰력과 풍부한 개성이 힘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기 때문이다.[37]

 

선이 본격적으로 불지펴지기는 육조 혜능의 손안에서였다. 그 이후, 남악 회양, 청원 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그리고 황벽 희운 등의 천재들이 차례로 그 불꽃을 이어받아 더욱 활활 피워 오리다가 드디어는 다섯 갈래의 불길로 갈라져 새롭고 풍성하게 타올랐다. 사실상 이 다섯 갈래의 불꽃은 그 기원이나 목적에 있어서 하나다. 비록 각자의 색깔과 강도를 지니고는 있으나 모두가 혜능이라는 커다란 불씨에서 생겨난 것이고, 동시에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그 심지를 박고 있다.[37]

 

선의 심오한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 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38]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달마가 썼다고 알려진 유일한 작품은 도()와 진리에 이른 두 가지 길에 대한 글이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 공부를 통한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43]

 

행위에 의한 입문엔 다음 네 가지 길이 있는데 다른 모든 길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1.       미움을 넘어서는 길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이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이 지시에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은 더 나아가 타인의 미움을 초대 한으로 이용하여 구조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게 된다.[44]

2.       삶에 적응하는 길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 도취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음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의 큰 흐름과 은밀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수 없이 변하는 삶의 여러 형편과 상황들에 적응하는 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44]

3.       집착을 버리는 길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어려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경전에도 있듯이,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45]

4.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는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

달마대사의 행위에 의한 입문에 관한 주장은 이것이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지성과 행위가 결국 동일한 방법임을 암암리에 보여주기 위해, 지성과 불법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47]

 

본래의 참마음은 항상 평화롭다. 거기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또 본래의 참마음은 모두 생각의주체임 결코 생각의 대상일 수 없다.[48]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 자체에 어려울 게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면

는 밝은 대낮처럼 뚜렷하다.

 

거죽에서 일어나는 일에 좇아가지 말고

안으로는 허무 속에 머물지 말라.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하면

모든 티끌 사라져 환히 빛나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 애쓸수록

본래의 평화로움이 더더욱 깨치리니

이렇게 어느 한쪽에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너는 나로 인하여 존재하고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한다.

둘 다를 알고자 하는가?

원래는 깊고 깊은 한 뿌리이다.[52]

 

3. 부처의 눈 / 혜능(慧能, 638-713)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라는 구절에 이르자 혜능은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세상 만 가지 물건이 일체 참본성을 잃지 않았음을 알았다. 무아의 경지에서 그는 외쳤다. “본래 맑고 깨끗하고는,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래 나고 죽은 이 없거늘, 내 어찌 예상했으리오! 본래 다 갖추어 있거늘,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이니라.[61]

 

혜능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엔 너무 겸손했고, ‘아니다라고 하기엔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럽습니다.”라고 대답했다.[64]

 

좋은 뿌리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성은 영원한 것도 변하는 것도 아니어서 절대 끊어짐이 없다.” 혜능에 의하면 불성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정신적 물질 등을 초월 해 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問)-본질적으로 불성이 둘이 아님의 뜻이다.[64]

 

혜능 역시 신수의 가르침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만 두 선사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신수가 점오-단계적으로 점차 깨닫는 것을 가르친 데 반해 혜능은 돈오-단번에 깨닫는 것을 주장했다는 점이다.[66]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이른바 계, , 혜 라고 하는 것들은 단지 참본성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 , 혜는 정신 생활의 세 단계라기 보다 참본성이라는 지혜의 샘에서 흘러 넘치는 샘물이라고 할 수 있다.[67]

 

아직도 더 닦고 얻을 것이 있는가?”

회양이 대답했다.

닦고 얻음이 없지는 않사오나 때묻거나 더럽혀질 순 없습니다.” 이 대답 혜능은 더 없이 만족해 무릎을 쳤다. “때묻지도 더럽혀질 수도 없는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애써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대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회양은 15년이 넘도록 좌우에서 육조를 모셨다.[68]

 

혜능이 그를 시험했다.

무릇 종이 되었다면 3천 가지 예의와 8만 가지 행동거지를 갖추어야 하거늘 대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이리 오만불손한고?” 현각은 들은 척도 않고 딴전을 피웠다.

삶과 죽음이 찰나가 없고, 만물의 변화가 화살같이 빠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삶도 죽음도 없다는 큰 도를 깨쳐 무사하고 빠른 번뇌를 끊어 버리지 아니하는고?” 현각이 대답했다.

깨쳐 안 즉 삶과 죽음이 없고, 끊어버린 즉 만물 또한 영원과 무상이 없습니다.”

현각의 이렇듯 주관과 객관, 실제와 작용을 하나로 보는 통찰력에 혜능은 바로 이거다, 바로 이거야하며 무릎을 쳤다.[70]

 

선의 통찰력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것은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치는 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메는 것과 같다. [72]

 

713년 이른 가을 육조 혜능은 자기가 다음 달엔 인간 세상을 떠나리라고 알렸다.

스승의 입에서 그 같은 슬픈 얘기가 나오자 다들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오직 신회만 동요되지도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조사가 말했다.”오직 신회만이 좋은 일 궂은 일을 떠나 버렸구나. 그만이 명예 불명예 아랑곳 않고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구나. 나마지 모두 그렇지 못하니 산속에 그토록 오래 처박혀 있으면서 대체 무슨 도를 닦았느냐! 지금 너희들이 슬피 우는 거 누구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냐?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해 걱정들 하는 거냐? 걱정들을 마라. 나는 내가 갈 곳을 알고 있다. 만약 스스로 갈 곳을 모른다면 미리 너희들에게 알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너희들이 슬퍼하는 까닭은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안다면 슬퍼할 리 없다.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 감도 없는 것이다.” 떠나기 전 조사가 다시 말했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내가 떠난 후 세상 인정에 따르지 마라. 슬피 울고 눈물 흘리거나 상복을 입고 남의 조문을 받거나 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며, 또한 바른 법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74]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혜능의 가르침)

 1.교외별전(敎外別傳)

()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전 말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니 이를 교외별전이라 한다.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본래면목이 바로 후대의 임제선사가 말하는 참사람’(眞人) 이다 ? 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외적 교리들 또한 우리들 참모습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78]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해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의 마음속에 그대로 들이부어 넣을 순 없다. 고작해야 임산부의 해산을 옆에서 도와 주는 산파 역할 밖에 할 수 없다.[78]

 

머리의 지성 하나만은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일반 기술 지식과는 달리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도어야 한다.[79]

 

그는 절대 학자나 박식한 해설가의 태도로 경전에 접근하지 않는다. 말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적 핵심을 꽤 뚫는 각자(覺者)의 자세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그의 손 안에서 경전들은 새 생명을 얻고 영혼의 해탈이라는 궁극의 목적지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탈바꿈한다.[80]

2.불립문자(不立文字)

전체의 의미는 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내가 지금 공을 말한다고 새서 이 공에 집착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면서 거기에 매달린다면 그대들은 결국 죽음과 어둠 뿐이 허공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81]

만가지 법이 다 사람 마음 속에 있다.”[81]

참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으로, 말해야 할 때는 말로 언제고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한 순가도 참 본성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경지가 바로 견성(見性)이다.[82]

3.직지인심(直指人心)

선의 궁극적인 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 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참본성은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써라. 곧 성불할 것이다.’[82]

 

마음의 힘은 무한히 크다. 자아 실현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참 나로 돌아가는 것도 마음의 통해서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다. 마음이 없다면 선도 악도 없으며, 집착도 초월도 없고, 깨달음과 어리석음도, 열반과 번뇌도 없다. 혜능은 맑음 마음, 선한 마음, 공평한 마음, 바른 마음, 지혜의 마음, 평온한 마음을 말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흐린 마음, 악한 마음 삐뚤어진 마음, 번뇌에 빠진 마음, 망령된 마음 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는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때는 소용돌이 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곳에 고여 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금강경의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는 구절을 듣고 깨달았던 것이다. [83]

 

혜능이 말하는 무념(無念)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 없이 쓰는걸 뜻한다.[84]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깎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도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소로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라든가 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대의 참 마음을 보리라.”[87]

4.견성성불(見性成佛)

혜성에게 있어서 불성은 곧 깨달음으로 그가 말하는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를 염두에 두면 혜능이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이 부처야말로 참 부처다.”라고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89]

 

혜능은 참본성의 절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밞음과 어둠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개의 다른 현상으로 비치지만 지혜 있는 이는 이를 그것들이 본래 둘이 아님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이 차별성 없는 본성이 바로 참본성이다. 참본성이라는 것은 바로라고 해서 적게 갖지도 않았고 현자라 해서 많이 갖지도 않았다. 그것은 번뇌 속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아니하며 깊은 삼매경 속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거죽으로 나타남은 이 같은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경지에 있으며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라 부른다.[90]

 

혜능의 철학은 초월을 강조한 점에서는 노자, 장자와 비슷하고 인간을 중시한 점에서는 공자, 맹자와 비슷하다.[91]

 

마음이 바르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면 참선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들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솔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 데 시줏돈이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92]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中道)의 의미가 밝혀지리라.[94]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마조 도일, 709-788)

소달구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하겠는가 소를 채찍질하겠는가?” 마조는 그만 말이 막혔다. 회양이 계속하여 말했다.

앉아서 명상하면서 너는 참선을 하려는 거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 흉내를 내려는 거냐? 만일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하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를 볼 수가 없다.”[99]

 

마음 밭에 여러 씨앗이 있으니

비를 맞으면 모두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모습이 없나니

어찌 이룸과 부서짐이 있으랴.

이 순간 마조는 확실히 깨쳐 마음이 모든 현상계에서 초연해 질 수 있었다.[100]

 

현상()이 모두 텅 비어() 있으니 삶은 독 삶이 아니다. 이 뜻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 속 성스러운 태()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 해 갈 것이니 이 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100]

 

마조의 위대성은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놀라운 기술과 번뜩이는 기지에 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스승께선 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십니까?”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지.”

제자가 계속 물었다

울음이 그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부처인 이 마음이 실제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말해 주겠네.”

그런 두 가지 경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겐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겠네.”

마지막으로 제가가 물었다.

스승님께서 뜻밖에 이미 깨달은 사람을 대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건 아주 간단하지. 그 사람에겐 단지 큰 도를 실현하라고 가르치겠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마조가 아주 훌륭한 가르침의 비결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때로는 부정법을 쓰는가 하면 상황이 바뀌면 다시 긍정법을 쓴다. 얼핏 보기엔 이 두 가지 방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제자의 공부와 지혜와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사용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또한 제자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 한다면 그 모순은 당장에 사라진다. 물론 이 두 방법이 이미 깨친 사람한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마조가 할 수 있는 말은 깨달은 현재 상태를 지속해 나가라는 것 뿐이다.[102]

 

마조가 가르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다양한 벙법을 통해 마조고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 했으며 그들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자기 경지를 열었다 한다.[104]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선 그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바다.[107]

 

그렇게 묻고 있는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 말을 듣고 난 대주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직관을 통해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108]

 

그래도 무업은 아직 깨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서쪽에서 오신 달마 조사께서 비밀리에 전해준 법은 무엇입니까?”

자네는 아직 쓸데없는 것들에 집착해 마음이 바쁘군. 물러가있다가 뒷날에 오게.”

무업이 일어나 물러가려 하는 순간 마조는 그의 등에 대고 고함을 쳤다.

어이!”

무업이 고개를 돌리자 마조가 재차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이 질문에 무업은 문득 크게 깨달았다.[109]

 

모든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 그 무엇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대답으로도 불가능하다. 노자는 말마따나 말로 표현 될 수 있는 ’()는 이미 도가 아니다.”[114]

 

약산이 대답했다.

제가 감히 뭐라고 산에 살면서 스승 노릇을 하겠습니까?”

마조가 말을 받았다.

아니다. 누구라도 머무름 없이 항상 여행만 할 수 없고, 또 여행하지 않고 항상 머물기만 할 수가 없다. 그대는 응당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해서 이르는 곳마다 나룻배나 뗏목이 되어 사람들을 건네 주어야 한다.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순 없다.”[117]

 

마조는 제자들의 의식을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형태를 갖춘 세계에서 절대 공의 세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 서로 대립적인 방법을 쓰는데 아주 능숙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경우에 따라 긍정의 길, 혹은 부정의 길을 적절히 사용하였다.[118]

 

6. 선악을 넘어서 (백장 회해,720-834/ 황벽 희훈, ?-850)

무엇보다도 백장이 확립한 사원제도의 가장 독특한 점은 경작에 의무에 관한 규정이다.[122]

 

선종은 불상이나 경전과 같은 종교의 외적 부속품에 의존하지 않고 수도 생활을 해 나갔다. 따라서 그것들이 파괴된 다음에도 능히 독립하여 존속 할 수 있었다. 둘째, 선종은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선종의 중요한 청규 중의 하나가 모든 승려는 매일 어떤 종이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25]

 

노동에 대한 그이 주장 속겐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 깊은 뜻이 감겨 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 그는 추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이에 의하면 초월이라는 한쪽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 절대의 실체를 둘로 나누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의 실체는 형이상과 형이하를 다 포함 한다고 믿었다.[125]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127]

 

한번은 중 하나가 백장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백장이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 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게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129]

 

황벽은 궁극의 실제를 마음 즉 일심’(一心)으로 보았다. 이 마음이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창조하며 진정한 지혜의 원천이다.[130]

 

만일 구도자가 이 큰 마음’(心體)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이 마음을 떠나 다른 얕은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현상과 수행에만 얽매이기 수비다. 이것은 죄다 악법이지 지혜로운 도가 아니다. 아무리 천지사방 부처들에게 공양한다 해도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을 따느니만 못하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큰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스스로 그것들을 중요히 여겨선 안 된다. 그것들은 진정한 지혜의 샘물이 솟아나오는 물구멍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황벽의 일신(一心)은 곧 무심(無心)을 말한다. 우리가 큰 마음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은 마조 이 무심을 통해서다.[130]

 

일심은 모든 상대 관념들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 ?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스승의 언어와 행동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 그대의 직관 ? 깨달음을 일깨우기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131]

 

세상사 털어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밧줄 끝을 단단히 잡고

온 힘을 쏟아 덤벼라.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매화 향가가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137]

 

어떤 중이 백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어냐고 묻자 백장은 당장에 대답했다.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이러한 경지를 깨쳐 알려면 여러 가지 깊이의 단계를 거쳐야 하리라. 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가장 정확하게 과녁을 뚫는 방법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속속히 꿰뚫어보는 일이다.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 없다. 말이야 쉽지만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137]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스승은 오히려 그 문제들을 옆으로 제쳐 놓고, 제자가 스스로 높은 경지에 올라가 그 함정을 굽어볼 수 있도록 곧 바로를 가리켜 보인다. 스스로 높이 올라가 이 함정을 굽어 보면 그것이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가의 질문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마치 악몽을 꾸다가 갑자기 깨어나는 것과 같다.[140]

 

7. 뜰 앞의 잣나무 (조주 종심, 778-897)

조주가 스승에게 도()가 무어냐고 묻자 남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이다.”

조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주조는 홀연히 깨쳤다.[142]

 

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그 안에 있는 만가지 물건과도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144]

 

선이란 일상 의식과 관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선은 의식을 초월하지만 무의식 또한 초월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148]

 

어째서 왕공이 방문했을 때는 일어나시지도 않더니 오늘은 그의 부하가 왔는데도 황급히 일어나 영접하셨으니, 무슨 예절이 그렇습니까?”

그건 네가 이해를 잘 못한 것이야. 일급 방문객이 오면 앉은 채 영접하고, 보통 사람이오면 일어나 맞이하며, 더욱 하찮은 손님이오면 문 앞까지 나가 맞아들이는 것이다.”

두 말할 필요도 무엇이 여기서 그는 사회적 신분에 따른 예절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여하에 따른 영접의 여러 방법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151]

 

제가가 진정한 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선사들의 한결 같은 목표이다. 주조의 가르침의 목표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그가 사용한 방법들은 아주 독창적이고 익살맞다.

 

한번은 초심자 한 사람이 주조에게 물었다.

저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지도해 주십시오.”

아침은 먹었는가?”

, 스승님.”

그럼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스승의 이 말에 제자가 홀연히 깨쳤다. 장자와 마찬가지로 조주 역시 우주적 민주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155]

 

혜능의 진정한 계승자인 조주는 참본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참본성이란 또는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일찍이 유명한 설법에서 이렇게 밝혔다.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 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늙은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157]

 

조주에게 있어서도 마조나 남전과 마찬가지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편재해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이 수수깨끼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158]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만 버리면

() 자체에 어려울 게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면

는 밝은 대낮처럼 뚜렷하다.

조주는 어는 법회 석상에서 이 시에 나타난 에 대한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 했다.

그대들이 단 한 마디라도 에 대해 말을 꺼낸다면 그 순간 이미 차별하고 선택하는 분별심을 낸 것이다. 나로서도 에 대해 별로 분명하지 않다. 나는 다만 그대들이 이 를 마음속 깊이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만을 알기 원한다.

그때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께서 이미 에 대해 분명하지 않으시면서 저희더러 무엇을 품어 순수히 간직하라는 겁니까?" 조주는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대들의 의문을 실제 체험을 통해 풀도록 하라!”이에 모두들 절을 하고 해산하였다. [159]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노자 도덕경> [160]

 

조주는 과녁 한가운데를 맞추는 것보다 살짝 비껴 맞추는 비상한 제주를 갖고 있었다.[160]

주조에게 있어서 하나()와 여럿()은 서로 한 덩어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럿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여럿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 하나()로 돌아가며 그 하나와 떨어질 수 없다.[161]

 

조주는 똑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똑 같은 대답을 한적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름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소박한 성실성 때문에 질 문자의 상황에 맞도록 그때그때 다를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한 대답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그렇지 않고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 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힌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163]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석두의 제자들)

1. 천황 도오(748-807)

그럼 너는 언제 거기서 왔느냐?”

저는 거기서 오지 않았는데요.”

나는 벌써부터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어째서 증거도 없이 사람을 속이십니까?”

너의 몸이 여기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다 치고 후세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도대체 누굴 보고 후세 사람이라 하는 건가?”

석두의 이 말에 도오는 홀연히 깨쳤다.[172]

 

2. 용담 숭신(?-838)

도오가 대답했다.

나는 네가 이곳에 온 이래로 마음에 관한 가르침을 한번도 멈춘 적이 없는데!”

용담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언제 마음에 관한 걸 가르쳐 주셨단 말씀입니까?”

네가 차를 끓여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오면 먹었으며, 인사를 하면 답례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도처에서 가르쳐 주었는데도 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용담은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해 생각했다. 이때 스승 도오가 마지막 열쇠를 내밀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비소로 용담은 마음 문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어찌하면 이 깨달음의 경지를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까? 오도가 대답했다.

너는 참본성이 맡겨 자유롭게 거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平常心)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174]

3.덕산 선감(780-865)

밥이 깊었는데 그만 물러가 쉬게.” 덕산은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밖이 너무 캄캄합니다.”

용담이 불을 켜서 건네 주었다. 덕산이 막 받는 순간 용담은 갑자기 불을 훅 꺼버렸다. 순간 덕산은 깨달았다.[177]

4. 암두 절환(828-887)과 설봉 의존(822-908)

설봉은 암두처럼 재가 번뜩이진 않았지만 지극히 성실, 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더불어 아무 사심 없는 미덕으로 인해 선종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즐겨 다름 사람으로 하여금 마지막 한마디을 말하게 하고 또 남이 한 마지막 한 마디에 대해 진심으로 긍정하고 즐거워했다. 이것은 바로 다른 선사들에게선 극히 찾아보기 힘든 그이 위대한 점이다. 암두가 날카롭고 재기 번뜩이는 정신의 소유자였다면 설봉은 위대한 영혼을 소요했다고나 할까?[183]

 

9. 감추어진 불씨(위산 영우, 771-853)

어떤 중이 위산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무심(無心)이 바로 도이네.”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자네가 할 일을 이해를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을 이해 하는 일이네.”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바로 자네지!”

위산은 이어서 아래와 같이 가르쳤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요, 자신에서부터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도 한참 빛나간 얘기다. 마치 검댕이를 작고 마음 밭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내가 그것을 도라 여기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191]

 

돈오한 뒤에도(즉 깨달은 뒤에도) 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 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고정이 바로 수행이다. [193]

 

오묘한 가르침이 제아무리 많고 다양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물리치고 어떤 것은 펴는 활용방법을 직관적으로 터득해야 한다.[194]

 

숱한 유명한 천재들이 채 꽃피기 전에 벌써 시들어버리는걸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생각의 성질상 그들 스스로 체험해 얻어야 할 사실들을 스스로 지나치게 참여해 주기 때문이 아니까 싶다.[200]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마 이 뿌리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멀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잦출 수가 있었다.[202]

 

10. 집으로 돌아가라. (동산 양개, 807-869 / 조산 본적,840-901)

어린 동산은 정신적인 이해력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했으나, 적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주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공부하던 중들 대부분이 신성한 경전엔 절대 착오가 없다고 당연히 믿었다. 하지만 어린 동산은 다름 사람이나 어떤 책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걸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204]

 

이 소리 들리나?”

아니오. 안 들리는데요.”

너는 내 설법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어찌 물건의 설법 듣기를 바라는가?”

 동산이 다시 물었다. “물건이 설법한다는 얘기는 어느 경전에 나옵니까?”

“<아미타경>에서 물과 새와 나무, 모두가 불법을 외운다는 구절을 읽지도 못했는가?”

여기에 이르러 동산은 문뜩 깨쳤다. 그리하여 그는 그 감격을 이런 시로 표현 했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물가사의한 무정물의 설법이여.

귀로 들으려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눈으로 들어야 참으로 안다.[205]

 

동산은 물었다.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 세상 사람들이 저더러 당신 스승이 진면목이 무엇이지?’하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까요?” 운암은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대답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라니, 도대체 무얼 말하는가 하고 동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운암이 당부했다.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데 있어 각별히 조심하고 신중하길 바라네.”

이렇게 작별한 뒤 남은 여행을 계속하면서도 동산은 끊임없이 스승이 말한 바로 이것이라는 비밀에 찬 말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다 얼마 후 냇물을 건너다 문득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서 바로 이것의 참뜻을 철저히 깨달았다. 그는 그 감격을 다시 시로써 표현했다.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나를 만나리.

그게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207]

 

이 시에서처럼 우리는 자주적이며 사실적이고 높은 정신을 가진 동산이 이미 새롭게 어떤 경지에 들어갔음을 보게 된다. 그는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았으며, ‘절대의 하나”(一者)에 도달했기 때문에 군중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통찰력을 지녔고 본래 얼굴, 즉 진여(眞如)를 꿰뚫어 알았다 해서 환상과 공상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초연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 결과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에 두발을 굳건히 디딜 수 있었다.[208]

 

스승보다 월등해야만 제자는 비로소 스승이 전해주는 등불을 물려받을 수 있다. 이것은 선종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처럼 되었다.[211]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데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가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 가르쳐 준 백 개의 해답보다 휠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213]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누구든지 현상을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다 보면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큰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 속에 숨은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의 첫걸음이다.[214]

 

본체로 돌아감 ? 그대 거짓의 세계에 환명을 느꼈으며 동시에 거짓 세계를 꿰뚫고 진실하고 불변하는 본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단계가 바로 깨달음의 단계다.[215]

 

본체로부터 돌아옴- 중생을 위해 일하고 가르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본체로 돌아온 사람은 비록 현상계에 몸 담고 있지만 이세상 사람과 다르다.[215]

 

본체와 현상이 함께 오다- 깨달은 사람이라 해서 자신의 본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는 본체에만 매달리지 않고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황천에 달하는 무극(無極)의 무한한 경지를 열망한다.[217]

 

현상과 본체는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지상에서 낙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218]

 

돌아갈 빚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울림은 마음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니 이러한 돌아감이 바로 내면 생활의 시작이다.[221]

 

구도자는 지신에다가 를 맞추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에다가 자신을 맞추는, 다시 말해 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철저히 수동적인 길에 들어선 것이다.[222]

 

우리가 정말로 참나를 인식할 수 없다면 태초 이래 아무도 그 참나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참나는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할 무엇이다.[225]

 

우리 가출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28]

 

11. 차별 없는 참사랑 (임제 의현,?-866)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보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의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이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239]

 

그는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절대의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상파괴는 반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친정한 종교 정신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임제 철학의 초점은 무위진인(無位眞人)-차별 없는 참사람에 있다.

이때의 는 삶의 거죽에서 일어나는 여러 우연들에 지배를 받는 일시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도의 물결과 하나가 되는 존재하는 영원한 참나인 것이다.[239]

 

자기가 본래 자유인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시적인 거죽의 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스스로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무위지인-차별 없는 참사람은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는 마른 똥 막대기와 같은 생태로 격하되고 만다.[240]

 

그들 자신은 자기들이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상태로 주거 앉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242]

 

평상심이 곧 도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도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동에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평상시의 일들, 이를테면 옷 입고 밥 먹고 똥누고 오줌 누며 피곤하면 잠자는 그런 일들 속에 불도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말을 듣고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근심하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귀인(貴人)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고 그러나 억지로 있는 그대로 인 채하고 억지로 독창적 이려 한다면 진짜 독창성은 사라지고 본래면목을 잃고 만다.[246]

 

참으로 실재하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을까? 무차별 진리,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만일 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면 서 속된 것은 지독히 싫어한다면 그대는 절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번뇌는 바로 사념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는다면 번뇌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으리오?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251]

 

소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 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251]

 

그 자신은 비록 기교를 대단히 경멸했지만 정작 그는 누구보다도 기지에 찬 선사였다. 아마도 그는 기지의 화신이었던 성 싶고, 또한 밝은 눈을 지닌 창의력 풍부한 스승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는 깨달은 선사로서 기지의 방편을 자유자재로 쓰긴 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에 끌려 다니지 않았다.[252]

 

위대한 선사는 언제나 공안을 갖고 우리를 궁지로 마구 몰아넣는 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엄청난 고민 속에서 문득 내면의 눈(心眼)을 뜰 수 있고 그리고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리석음과 미망들이, 일단 깨닫고 나면 곧 사리질 악몽임을 알 수 있다.[254]

 

자신을 속이지 마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지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255]

 

12. 날마다 좋은 날 (운문 문언, ?-949)

운문은 방이나 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마법사가 주문을 외듯 거친 악담을 주로 썼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설가였으며, 선사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달변가였다.[258]

 

너희들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현명한 말 한 마디를 덧보탤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너희들 머리에 똥물을 끼얹는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스승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해도 결국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아마도 그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259]

 

남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또한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는 정신생활의 비밀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마다 속안에 빛을 지니고 있는데 보려고 하면 그것은 금방 암흑으로 변한다.”[260]

 

운문산 높고 험해

흰구름도 산 아래에 머문다.

물살이 빨라 물고기들도

제자리 찾지 못하다.

문안에 들어서자 마자 내 이미

그대 마음 속 훤히 꿰뚫어보니

옛 수레에 낀 묵은 먼지

다시 떨어 무엇 하랴.[261]

 

마조와 마찬가지로 운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참본성인 이것 하나를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목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참본성에 이르는 길은 참본성 밖에 없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265]

 

그대들이 진실로 참나를 보았다면 불 속을 지나면서도 불에 따지 않을 것이고, 하루 종일 떠들더라도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진실로 한 톨의 쌀, 한 오라기의 실을 건드리지 않고도 매일 같은 옷 입고 밥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다.[267]

 

어젠가 그는 조산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제일 가까워 질 수 있을까요?”

조산이 대답했다.

비밀리에 그와 친하려 들거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와 만나려는 생각은 버려야지.”

운문이 또 물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그와 가까워질 수 있지요?”

그래야 진실로 그와 친하게 되지.”

조산의 대답에 운문은 감탄사를 말했다.

정말 그렇다! 정말로 그래!”

운문이 조산의 영향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의 여부는 드가지 중요한 게 아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의 마지막 통찰이 비밀스런 것과 공개된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초월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세상 만가지 사물 속에서, 그리고 만가지 장소에서 절대자를 보았다.

우주의 질서 안에, 우주의 한 복판에, 누구나 눈에 보이는 산 깊숙한 곳에 신비한 보물이 하나 숨겨져 있다. 운문은 승조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절대자가 세상도처에 내재해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곧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그 신비한 보물을 법당 안으로 들고 들어와 이 절의 세 출입구를 등불 위에 얹어 놓는다. , 이 보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무도 대답이 없자 운문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은 마음을 사물의 변화에 따라 움직인다.”

한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 그는 다시 말했다.

구름이 일면 번개가 친다.”[270]

 

운문은 그 질문엔 대답하지 낳고 그 질문을 뜀틀로 삼아 시공을 훌쩍 뛰어넘어 신령한 나무의 과일을 영원한 도()’ 혹은 이것 하나에 견주어 대답한 것이다. 시간의 영역에서는 발전, 탄생, 성장, 성숙, 쇠퇴 등을 논할 수 있으나 절대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질문자의 마음을 현상의 차원에서 초 현상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운문의 독특한 방법이며, 아울러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 버리는좋은 예이다.[273]

 

 선종의 다섯 종파에서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신생활에서는 궁극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즉 비록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해도 평지로 내려오는 행위를 통해 더 높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피안(彼岸)에 이르렀다 해도 차안(此岸)으로 되돌아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275]

 

누구나 현실에 발을 딛고 꾸준히 자기가 맡은 바 임부를 다해야 한다. 환상이나 공허한 생각들에 몰두하느니 보다는 이러한 생활이 휠씬 현명한 것이다. 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중은 중이고, 속인은 속인이다.”[276]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한 말이다.[277]

 

13. 지금 여기 (법안 문익,885-958)

다른 문종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그들의 따르면 세상 만가지 사물이 우리에게 절대를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참사람으로 인도해 간다.[280]

 

불법이란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야.”

스승의 이 한 마디에 법안은 그 자리서 크게 깨쳤다.

뒷날 법안이 스승이 되고 난 뒤 그는 종종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체는 바로 그대들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것을 이름이나 모습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것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을까?”

법안 자신은 박식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단순한 지식을 경계하게 했다. 왜냐하면 실제는 바로 우리 앞에 있어서 그것은 직관을 통해 알아지는 것이지 사변이나 추리로 다가가야 오히려 눈만 흐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284]

 

일단 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만물을 보지 않고 근본 진리의 눈, 즉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세상만가지 물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눈을 법안(法眼)이라 하는데, 법안 자신은 이것을 도안(道眼)이라 불렀다.[286]

 

털모자 눌러쓰고 녹음 방초 마주하니

그 느낌 전과 다르구나.

바로 오늘 머리는 희어지는데

작년에 꽃들이 이보다 더 붉었다.

그 어여쁨도 아침이슬처럼 스러지고

그 고운 향기 저녁 바람에 날리는구나.

구태여 꽃잎이 시든 다음에야

삶의 덧없음을 알까 보냐.[289]

깊은 숲 속 새들은 피리처럼 지저귀고

수양버들 가지가지 금실처럼 춤추네

구름이 돌아오니 산골짝 더욱 고요해지고

살구꽃 향기는 바람에 묻어 오누나.

온종일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았으니

마음 맑아지고 만 가지 근심 사라진다.

어찌 말로 다 그려내랴.

그대 이 숲 속에 오거든 함께 느껴나 보세.[291]

 

선의 정신은 결과적으로 연수가 이룩해 놓은 그런 체계화나 절충주의 와는 근본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다. 실제로 연수는 전종과 정토종(淨土宗)을 결합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 어떤 현대 역사가의 말마따나 염불, 독경 및 참회 등이 참선과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선이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수행절차와 결합하면 선은 그 당장에 독자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 있다.[294]

 

에필로그

14. ()의 불꽃

조용한 옛 연못

개구리 한 마리 뛰어든다.

풍덩!

영겁의 침묵을 깨뜨리는 첫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다 아름답고 심금을 흔드는 체험이 있을까? 더구나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이다. 왜냐하면 하루하루가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사람의 하느님이다.[300]

`

나한테 반짝이는 구슬 하나 있었으나

오랫동안 먼지에 싸여 있었네.

오늘에야 먼지 닦아 빛을 발하니

온갖 산하를 두루 비치네.

이 시를 듣자 양기는 웃으며 달아났다. 수단은 이러한 스승의 반응이 맘에 걸려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자마자 그는 스승에게로 건너가 욱 스님의 시의 아기가 그렇게 우스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다.

어제 무당이 푸닥거리를 했는데 자네도 그럴 보았니?”

보았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자네는 그들만도 못하네.”

?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남이 웃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자네는 딴 사람이 웃는 걸 보고 겁을 내니 말일세.” 이 말에 수단은 확 깨쳤다. 그제서야 그는 엘리드 그라함이 말한 엄숙하지 않을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302]

 

선사들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려는 정신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얻은 경지가 아무리 높다 해도 그들은 항상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점에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아래로 내려오는 길뿐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그래서 한 중이 계성(繼成)선사에게 물었다.

향상일로란 어떤 겁니까?”

계성이 대답했다.

아래로 내려오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걸세.”[305]

 

최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전혀 없는 즐거움.[306]

 

라는 게 없을 때

오히려 를 실현할 수 있다.[307]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311]

 

철학자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낯익게 바라본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316]

 

홀로 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327]

 

참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다. 우리의 전 생애는 한 편의 로맨스다. 즉 우리의 참나를 발견해 가는 로맨스다.[330]

 

마음에 안든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331]

 

석두(石頭)가 처음으로 그이 스승 청원(淸原)을 찾아갔을 때 청원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석두는 육조 혜능이 가르치고 있는 조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청원이 다시 물었다.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제가 조계에 가기 전에도 잃는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청원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조계엔 무엇 하러 갔었더냐?”

이에 석두가 대답했다.

그나마 조계에 안 갔더라면, 잃은 적이 없는 그것을 어찌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스승이 그대에게 무엇을 떠먹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은 그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스승의 가르침은 최소한 제자가 깨닫는 데에 하나의 촉매 역할은 할 것이다.[334]

 

예기치 못했던 자발적인 선()의 체험도 우리들을  얕은 나의 껍질에서 해방시켜 케케묵은 관념과 잼 대들을 벗어 던지고 곧바로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생각 없이 그저 속안의 참나에 서 있는 그대로 선()이 흘러나왔을 때, 그것 바로 선()이다.[339]

 

겨울과 함께 시름겨운 한 해가 가고

봄이 오니 만물이 되살아난다.

산 꽃은 초록 연못 속에서 미소 짓고

상록수는 푸른 아지랑이 속에 춤춘다.

벌 나비 신이 나 이리저리 날아들고

새와 물고기 마냥 기뻐 노닌다.

아아, 끝없는 친구의 정이여!

이 밤이 지새도록 잠 못 이룬다.[347]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깨달음의 계기를 연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뿐더러 대단히 매력적이다.[350]

 

그 칠 때를 아는 것

내 자신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349]

 

봄에는 백 가지 꽃이 피고

가을엔 다리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엔 눈이 내린다.

이러쿵 저러쿵

헛 걱정을 안 하면

인생살이 그대로가

호시절이다.[354]

 

 


▣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중국 당나라 시대(618~906)에 독창적인 통찰력과 풍부한 개성의 힘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던 선사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선()의 불꽃을 이어온 위대한 선사들의 참나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달마대사의 도의 진리에 대한 일화를 시작으로 선의 불꽃을 지핀 육조 혜능부터 그의 제자들(회양, 마조,석두. 백장, 남전, 황벽 등)과 다섯 종파(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법안종)로 나뉘는 과정이 펼쳐진다.

 

일화를 들어 선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그 속의 심오한 통찰을 일깨우고자 한다. 선에 대한 문외한 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깊은 통찰의 해설도 붙여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도 언어의 그릇으로 담기지 않은 절대의 거시기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기 쉽지 않다. 홀연히 깨치는 일화에 대한 해설에서 저자의 희열이 느껴진다. 저자는 참으로 선을 체험한 사람이 분명하다. 보통사람인 나는 그들이 의식세계 앞에서 절벽을 느낀다. 그러나 선사들의 비논리적인 유머와 4차원의 의식 속에서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는 거시기는 분명 느껴진다.

 

이 책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다면 불교와 유교 등 중국 사상의 흐름을 미리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선의 기원이 짚어보고 선사상의 바탕에 불교뿐만 아니라 노장(老壯) 사상과 노자의 도덕경이 선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저자의 통찰이 책 전체에 흐르고 있다.

 

주된 내용은 당대 대선사들의 선의 진면목을 그리고자 했다.  이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며 또한 잘 드러나 있다. 선의 진면목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깨침인 듯하다. 삶이 중심을, 진리를 꿰뚫음이다. 선의 직관으로 거죽에서 체험하고 되새기고 알고 말하고 고집부리는 얕은 나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의식을 일깨우라고 한다. 선 자체의 목표는 참나의 발견있다. 육조 혜능은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이 부처야 말로 참 부처다며 참본성을 강조 했으며 마조 도일은 그렇게 묻고 있는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며 참나의 발견을 설파했다.  백장 회해도 부처는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너는 누구냐?”고 되묻고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으며 참 나를 발견하는 순간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게 해방된다며 참나를 찾으라 한다. 그렇게 되면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한다. 선사들 마다 참본성’, ‘참나’, ‘평상심등 다른 말을 사용하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사실 선에 대한 내용은 근접하기 힘든 분야이다. 그러나 한 문장에 열흘은 명상하고 선의 숨결로 읽으라는 역자의 말에 매력을 느꼈다. 역자 또한 선의 그것 하나거시기로 표현함으로서 그 통찰은 누구에게나 힘들구나 싶어 안도가 되기도 했다. 신비하고 매력적인 옮긴이의 말이 독자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음을 알았다.

저자 또한 기독교인이자 서양사람인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을 실어 선사상의 치우침에 대한 우려를 씻어 버리게 했다. 친절하게도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이 이 책의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해설 판임을 알려주며 먼저 읽어보기를 권유함은 꼭 필요한 배려였다.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을 먼저 읽었으며 실제로 본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에, 다시 편집을 한다면 목차 앞에 간략하게 선의 계보를 실어 선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토마스 머튼의 글<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부분도 지은이의 말 다음으로 넣어 구성함이 좋겠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장자, 노자, 불법을 아우르고 있으므로 간략한 중국 사상의 흐름과 연표를 부록으로 싣는 것도 좋겠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간혹 보이는 오탈자는 책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다시 수정하는 꼼꼼함이 필요하다.

계보의 선사들을 차례로 소개하는 각 장에서는 종파의 배경과 기본정신을 먼저 알려주어 흐름을 잡을 수 있도록 했으며 홀연히 깨치는 일화의 해설뿐만 아니라 장자 노자, 반야경, 금강경, 선대 시인의 사상까지 곁들여 선사상의 큰 물을 마신 느낌을 준다. 당대 이후 선의 체험을 역은 에필로그는 당대 선사들의 4차원의 세계에 놀란 마음을 가라 앉히기에 충분하다. 또한 선이 현실세계와 동 떨어 진 것이 아니라 삶의 도처에 숨겨져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참나을 찾고자 하는 선사들의 통찰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더 크게 와 닿았다. 지금 나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을 만나고자 힘쓰고 있기 때문이리라. 스승을 찾아가고 스승은 제자의 그릇을 알아보고 믿음으로 깨우쳐 주며 존경하는 모습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저자 또한 책 전반에 스승 토마스 버튼 신부와 스즈키 다이세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싣고 있음이 옛 선사와 다르지 않다.

뜬구름 잡는 듯한 스승의 말에 홀연히 깨달을 수 있는 준비 된 제자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비춰 보게 된다. 무엇보다 스승의 큰 가르침에 스스로 깨치지 못할까 싶어 책을 덮고 떨기도 했다.  

 

<조주는 똑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똑 같은 대답을 한적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름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소박한 성실성 때문에 질 문자의 상황에 맞도록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한 대답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그렇지 않고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 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힌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조주 종심은 제자의 가르침에 있어 과녁 한가운데를 맞추는 것보다 살짝 비껴 맞추는 비상한 제주를 가졌다고 한다. 나는 스승이 제시하는 미끄러운 길을 잘 걷지 못할까 두렵다.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스승께선 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십니까?”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지.”

제자가 계속 물었다

울음이 그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부처인 이 마음이 실제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말해 주겠네.”

그런 두 가지 경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겐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겠네.”

마지막으로 제가가 물었다.

스승님께서 뜻밖에 이미 깨달은 사람을 대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건 아주 간단하지. 그 사람에겐 단지 큰 도를 실현하라고 가르치겠네.”>

마조는 아주 훌륭한 가르침의 비결을 가진 스승이었다. 그는 때로는 부정법을 쓰는가 하면 상황이 바뀌면 다시 긍정법을 썼다. 제자의 공부와 지혜와 정도에 따라 알맞은 방법을 찾았으며 제자로 하여금 스스로 현재의 상태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했다. 마조가 가르치는 방법은 매우 다양했고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 했으며 그들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자기 경지를 열었다 한다. 나는 내가 모시고자 하는 스승도 마조 못지 않은 스승임을 안다. 그런 스승의 빛을 가리는 우매한 제자가 될까 봐 눈물 흘린다.


선을 이어받은 제자들은 모두 스승 못지 않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스승보다 월등해야만 제자는 비로소 스승이 전해주는 등불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감히 나 또한 그런 제자이기를 바래 보며 스승의 헛기침 하나에도 홀연히 깨치는 제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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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3:45:18 *.78.105.123
이번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머리가 어질어질한 책이었습니다.
처음 선사들의 대화를 보며 "어랏! 이건 뭐지?" 하고 잠깐 생각의 휴지기를 갖게 된 순간이,
사실은 바로 이 책에서 말한 '거시기'적인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곱씹고 되새길 수록 점점 더 많은 잡다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거죠.
부디 이번 과제를 통해, 책을 읽은 모든 사람이 한 걸음 道를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마지막까지 건승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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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13:50:43 *.78.105.123
아 그리고, '저자에 대하여' 쓰신 부분은 작가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보다는 거기에 덧붙여 개인적인 평과 감상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춘희님께서 쓰신 내용과 중복되는 곳도 있고 별반 다른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한정적인 시간과 자원으로 글을 쓰려다 보니 다들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어제 겨우 칼럼을 올리고, 오늘은 나머지 내용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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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1 22:40:40 *.168.110.44
선의 황금시대는 많은 생각을 해주게한 책이었습니다.
솔직히 전주의 과제보다 양이 적기에 쉽게 읽을 수 있을줄 알았는데 왠걸 읽을수록
생각을 하게되어 오히려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스타트로 내용을 올려주신 류춘희 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좋은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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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23:29:03 *.234.77.178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중국 역사나 노자/장자 사상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었다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선'이란 그런 지식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요^^


구성부분을 꼼꼼히 짚어주신 점이 아주 좋습니다^^
4번째 책도 화이팅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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