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나리
  • 조회 수 4399
  • 댓글 수 2
  • 추천 수 0
2009년 3월 1일 16시 54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禪의 황금시대 / 저자 오경웅 / 옮긴이 류시화



저자의 이력은 그의 지식과 경험, 후대에 남긴 업적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세대를 아우르고 있었다.  오경웅吳經熊(John C.H.Wu 1899~1986) 박사는 20세기를 통 털어 동서양의 사상과 철학을 완전하게 이해한 사람들 중 하나로 꼽힌다.  아니, 단순한 ‘이해’를 넘어 동서양의 사상을 ‘통섭’統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오경웅 박사가 동서양의 근본 법철학사상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석학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출신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미국, 프랑스 등 당시 선진 학문의 가장 구심점이 되는 곳에서 활동했으며, 각 나라 다양한 분야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편견 없는 학문적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문화, 학문, 지역 간의 상대적 이질감을 극복하고 나아가 동서양의 철학과 사상을 폭넓게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독실한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였는데, 대표적 저서중 하나인 「동서의 피안」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비교 분석 종합, 동서를 초월한 피안(彼岸)의 세계가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임을 제시한바 있다.  중국 내에서 가톨릭 신앙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고 신약성서 시편 등의 중국어 번역을 맡기도 했다.  또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 근무한 외교관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으니 그의 이력을 하나하나 자세히 나열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수고로운 일이 될 것이다.


사실 일반인들에게 오경웅이란 인물은 법 철학가보다는 가톨릭 종교 지도자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가톨릭 인물이나 서적을 뒤져보면 그의 이름과 그가 쓴 책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동서의 피안>, <내심낙원> 등은 여전히 가톨릭 서적의 스테디셀러로써, 가톨릭 신도들의 영성을 밝히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데, 특히 가톨릭 서적의 고전으로 사랑받는 <동서의 피안>은 1949년 8월 하와이대학 교수로 채용돼 2년간 재직하는 동안 저술된 것이다.  그 안에는 30년 동안의 그가 쌓았던 정신적인 생활이 녹아있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 대승과 선사상에 관한 비판,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에 관한 견해 등 동서의 사상들을 두루두루 섭렵했다.  그리하여 그 안에 차이점과 공통점을 발견하고 비교하여,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불후의 가치관이 있음을 설파했다.

다종교 다문화간의 대화가 강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 같은 견해는 미래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새롭게 주시되고 있다.


특히 오 박사가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학하는 가운데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법사상가인 올리버 W.홈즈와 14년 동안이나 교류하게 된 것은 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사상적 우정을 통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영향력 있는 자신만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선의 황금시대>를 올곧은 길로 이끌어 주었다고 언급한 오 박사의 정신적 동료들은 중국, 일본, 미국 등 세계 각지의 지성인이자 성직자였다.  책 중간 중간 그들의 이름과 서신들, 인용문구가 사용된 것은 그들이 오 박사에게 끼친 영향이 실로 지대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토머스 머튼, 스즈끼 다이세츠, 올리버 홈즈 등 책에서 직접적으로 거론된 인물 외에도 오 박사를 지지하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은 두 말 할 나위 없다.  이들의 지속적인 지지와 격려, 후원이 없었다면 그가 과연 세계적인 지성인이자 사상가,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차가운 지성만이 아닌 따뜻한 가슴을 지닌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全人적인 면모를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적과 학문, 인종의 벽을 넘어 인간의 가장 심오한 근본을 찾고자 애썼던 한 사람, 오경웅 박사는 진정한 르네상스인의 기질을 십분 발휘하면서 단순한 학자를 뛰어넘어 인간 존재의 위대성과 신성을 꿰뚫는 ‘참사람’의 삶을 살았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제 2차 과정에서 읽었던 <생각의 탄생>의 또 한명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진정한 全人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오경웅 박사에게 남은 이들이 해야 할 도리는 무엇일까.

그의 바람대로 진정한 휴머니스트이며, 종교와 문화의 굴레를 뛰어 넘은 사람들이 더 많이 성장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그가 말하는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바로 ‘참사람’일 것이다.  모든 시대, 모든 세상에 속해 있으며, 동시에 모든 시공간을 초월한 사람.  그의 바람이 과연 이루어 질 수 있을지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비록 선을 제대로 이해하는 현대인의 수가 얼마 안 될지라도, 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분위기에 빠져 보는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역설한 토머스 머튼 신부의 말대로 그저 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분위기에 흠뻑 빠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이미 우린 ‘참나’, ‘참사람’에 한 걸음 더 가까워 질 것이다.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구절



<옮긴이의 말>


(9)더 큰 즐거움은 이 책 구절구절에 넘쳐흐르는 신비한 수수께끼, 숨 막히는 전환, 경악할 돌발사, 선악을 뛰어넘는 통찰, 그리고 감히 이름 붙이건대 ‘우주적인 농담’등이다.  선이 무엇이냐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이 선이 아니냐를 말하라 한다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농담’을 모르는 것,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실제로 우주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뜻 깊은 농담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제 1장 禪의 심지


선善과 도道


(20)선은 한 송이 꽃과 미소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신은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답다고 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아름답다.  선의 참맛은 어떤 역사적 사실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중국에서의 선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22)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 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이나 ‘마음을 잊음’ 또는 아침처럼 맑음‘에 해당된다. -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23)“무릇 ‘도’란 복잡한 것이어서는 안 되네.  복잡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혼란이 일며, 혼란스러우면 걱정과 불안만 늘어나지. 이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잔뜩 억눌려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힘들뿐더러 남까지야 말해 무엇하겠나.”


또한 자네가 비록 두터운 덕을 갖추었고 참된 성실성을 지녔다 해도, 그리고 나아가 명성이나 명예를 위해 다투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남의 마음과 가슴에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않는 한 억지로 포악한 사람에게 인의를 주입시키려 한다면 결국 본래는 선한 뜻이었지만 남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네.

(25)“에이, 안 되네!  자네는 수단과 방법이 너무 많아.  그리고 마음은 전혀 안정이 안 되어 있고 말야.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을런지 몰라도 그것으론 충분치 않네.  다른 사람을 바로잡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  문제는 자네가 아직도 자신의 얕은 마음을 길잡이로 삼으려 한다는 데 있네.”


(26)“그러면 마음을 맑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네의 기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氣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氣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27)“텅 비어 있음의 효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나. 방안이 비어 있어야 빛이 들어올 수 있고 또 그래야 방안의 것들이 영롱하게 반짝일 것 아닌가.”


(30)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를 ‘앎’보다 강조한 것으로, 이 역시 선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라, 그러면 알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지만 선에선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禪의 현대적 가치


(33)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동양의 정신은 단지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고, 침묵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소리를 사용하며, 형태없는 무한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색깔을 사용한다.  즉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35)인간 존재는 본래 하나이며 동서양을 초월해 왔다.  동서얄을 초월해 있는 곳에서만 동서양의 활기찬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37)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제 2장 처음 불 밝힌 사람들


(44)고통스런 일들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친다.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45)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


불법의 본질은 더없이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밝고 순결하며 물들지 안고 모든 집착을 떠나 있으며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구별이 없다.  경전에도 있듯이 “불법에는 중생이 없나니 이는 중생의 허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오, 또한 불법에는 ‘나’중심의 에고가 없나니 이것은 ‘나’중심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48)본래의 참마음은 항상 평화롭다.  거기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또 본래의 참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이며 결코 생각의 대상일 수 없다. 


(50)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51)“청컨대 스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해탈의 경지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아무도 저를 묶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해달하려 하는가?”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도 자체에 어려울 게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면 도는 밝은 대낮처럼 뚜렷하다. 

거죽에서 일어나는 일에 쫓아가지 말고 안으로는 허무 속에 머물지 말라.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하면 모든 티끌 사려져 환히 빛나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 애쓸수록 본래의 평화로움이 더더욱 깨지리니.  이렇게 어느 한쪽에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너는 나로 인하여 존재하고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한다.  둘 다를 알고자 하는가 원래는 깊고 깊은 한 뿌리이다. 


제 3장 부처의 눈


(53)부처를 알아보려면 자기가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가 된 사람만이 자신 뿐 아니라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깃든 불성을 발견할 수 있다. 


(63)“움직이는 건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64)“좋은 뿌리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성은 영원한 것도 변화하는 것도 아니어서 절대 끊어짐이 없다. 


(70)왜 이리 돌아가려 하는고?“

“본래 스스로 움직임이 없거늘 어찌 서두름이 있겠습니까?”

“움직임이 없음을 누가 아는고?”

“스승께서 스스로 분별하려는 생각을 내시는군요.”

“그대는 참으로 태어남이 없음의 뜻을 꿰뚫었도다.”

“태어남이 없음에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는 사실은 누가 분별하는고?”

“분별 그 자체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75)“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


제 4장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1. 교외별전


(78)도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79)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다윗이 구약의 시편에서 “주께서 얼마나 좋은지 혀로 맛보고 눈으로 본다”고 노래했을 때 그는 자신의 선 체험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2. 불립문자


(81)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내가 지금 공空을 말한다고 해서 이 공에 집착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면서 거기에 매달린다면 그대들은 결국 죽음과 어둠 분인 허공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82)불립문자란 결국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문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완전히 부적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3. 직지인심


(83)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 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이다. 


참마음은 ‘생각하는’ 것이지 ‘생각되어지는’게 아니다.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객관적으로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리면 그 순간 이미 본질을 잃고 만다.  따라서 마음은 철학이나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없다.  대상화된 마음은 기껏해야 참마음의 그림자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혜능이 말하는 ‘무념’을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무념을 아무 생각도 안한다거나 모든 사상을 끊어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절대 안된다.  진리는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 말과 문자에만 집착하는 마음은 세상 만 가지 일을 순식간에 수갑과 밧줄로 둔갑시킨다.


(86)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이다.


4. 견성성불


(89)절대란 그 앞에서 모든 언어가 잔뜩 주눅이 드는 초월의 세계다.


(94)누가 그대에서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108)“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서도 바닥나지 않는다.”


(118)만물에는 앞서갈 때와 따라갈 때가 있고 천천히 숨쉴 때와 급히 숨쉴 때가 있으며, 무성할 때와 시들 때가 있고 일어날 때와 누울 때가 있다.


6. 선악을 넘어서


(126)수행을 높이 쌓은 자는 마땅히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127)옳은 것을 따른다 하여 그른 것을 아주 없애며 질서를 따른다 하여 혼란을 죄다 물리칠 수 있을까? 


(131)영적으로 깨쳐 안 마음은 마치 텅 빈 허공과 같아 시작도 끝도 없고, 생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고,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으며, 젊거나 늙지도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또한 크기도 형상도 없으며 색깔도 소리도 없다.


일심은 모든 상대 관념들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스승의 언어와 행동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 그대의 직관- 깨달음을 “일깨우기‘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133)황벽은 일심이라는 표현을 썼고 장자는 도라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절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심오한 사상가이며 동시에 위대한 신비가였기 때문에 절대에 대한 그들의 통찰이 서로 다르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135)“만일 자네가 이런 글을 통해 불교의 이치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네.  종이와 먹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려고 덤비면 우리 선중의 정신을 망쳐놓고 말 뿐이야!”


(137)어떤 중이 백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어냐고 묻자 백장은 당장에 대답했다.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가장 정확하게 과녁을 뚫는 방법은 골수에 사무치도록 속속들이 꿰뚫어 보는 일이다.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도 없다. 


(139)스스로 높이 올라가 이 함정을 굽어 보면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자의 질문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마치 악몽을 꾸다가 갑자기 깨어나는 것과 같다.


7. 뜰 앞의 잣나무


(144)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그 안에 있는 만 가지 물건과도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146)깨달음이란 결국 ‘바른 말’을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바른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침묵이나 이 경우처럼 열쇠를 건네주는 행동일 수 있다.  문이란 그것이 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안쪽에서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156)홈즈 대법관은 머리의 기능이 창자의 활동보다 더 큰 우주적 가치를 지녔는가에 대해 종종 회의를 표시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장자나 선사들은 창자의 활동이 두뇌의 기능보다 결코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대뇌 운동, 즉 사고가 갖지 못하는 우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157)도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편재해 있다. 


(160)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161)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 하나로 돌아가며 그 하나와 떨어질 수 없다. 


제 8장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2. 용담 숭신


(174)“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


제 9장 감추어진 불씨


(189)“생각 없는 생각으로 항상 절대를 생각하고 거룩한 불씨의 무궁한 힘을 늘 되짚어 보라.  생각이 다하면 그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나니 그것에선 본질과 형상이 영구불변하며 현상과 본체가 나누어 지지 않고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참부처의 세계이다.”  여기서 현상계의 상대성과 본질개의 절대성이 일치한다는 위산의 견해는 바로 노자의 “절대계와 상대계의 신비한 일치” 또는 안팎이 하나라는 사상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190)“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의 마음이요, 자신의 부처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얘기다.”


(192)나에게 마음 하나 있어-단번에 ‘그’를 알아 보네-누구든 이 이치를 모르면-중이라 부르지 마오


(194)만 가지의 행위의 여러 문과 길에는 단 하나의 법도 버릴 게 없으며, 실제의 궁극적 이치는 한 점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다.  잔말은 다 집어치우고 단칼에 돌입할 수 있다면 성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의 구별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대의 전 존재는 그 본래 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이치와 구체적 사물이 둘이 아닌 경지, 바로 ‘있는 그대로의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197)“어떠한 철학이든 그 근본이념은 비교적 간단하고 분명하나, 다만 이를 전달해 주는 말이 악마다.”  만일 우리가 ‘말이 악마’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동서의 어떤 책을 읽더라도 언어와 관념의 그물에 붙잡힘 없이 독서를 즐길 수 있으리라.


(200)“스승이시어!  당신의 큰 은혜는 정말 부모보다 큽니다.  만일 그때 당신이 이 비밀을 설명해 주었다면 오늘의 이 놀라운 일을 어찌 체험할 수 있었겠습니까?”


(202)만일 내가 선의 정수만을 이야기한다면 단 한 사람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내가 이것저것 들추어 말한다면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와 한마디라도 빠뜨릴세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애에게 빈 주먹을 보이면서 그 속에 떡이 있다고 속이는 것과 같다.  거룩한 일에만 마음을 쓰려 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제 10장 집으로 돌아가라


(209)“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214)누구든지 현상을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면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큰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 속에 숨은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의 첫걸음이다.  경험이 차츰 쌓이다 보면 친숙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친숙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17)초월적 세계로 올라갔던 사람은 이 단계에서 반드시 현상과 본체가 하나가 된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낙원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  ‘범’凡이 곧 ‘성’聖임을 알게 되는 경지로서 동산은 이렇게 묘사한다.


(243)“도를 구함에 있어서는 목숨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 내가 불법의 골수를 세 번이나 물어 보았는데 스승께선 세 번 다 나를 후려쳤다.  어찌나 아팠던지 가시돋힌 나무로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런 몽둥이를 다시 맞고 싶은데 누가 나를 때려줄 사람이 있는가?”


(250)진정한 구도자는 부처도, 보살도, 나한도, 나아가 과저, 현재, 미래에서의 어떠한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의연히 이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기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251)선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알알이 녹아든 유, 불, 도, 세 가지의 종합이다.”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제 12장 날아다 좋은 날


(276)“도란 무엇입니까?” “자유롭고 걸림 없이 그대의 길을 가라.  특별한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대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라.”


제 13장 지금 여기


(180)“성인만이 만물이 자기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제 14장 선의 불꽃


(317)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요,

이름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것이 천지에 앞서 있기 때문이요.

굳이 이름 붙인다면 ‘만물의 어머니’라 하겠다.

본체에 있어서는 형태 없는 ‘공’이나

그 현상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본체와 현상은 이름은 다르나 본래 한 물건이다.

이것이 소위 ‘신비의 합일’이며

이 신비 속에 진리로 통하는 문이 있다. 


(319)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이요

또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으려 하는 병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만 찾고 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바로 이렇게 방향 설정을 잘못한 데에 있음은 두 말해서 무엇하랴.


(332)선사들의 가장 놀라운 기질은 그들의 독립 정신이다.  그들은 일편단심으로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에만 헌신하면서 그것에 못미치는 사람이나 물건에 머리 숙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341)티없이 맑은 어린애와 같은 마음의 순수한 샘에서 솟아나는 도덕성과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곧 아름다움이다. 


(353)깨달은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이미 철저히 죽어 있기 때문에 그에겐 더 이상 나쁜 일이 없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살아있기 때문에 그에겐 그보다 더 좋은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禪


(370)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372)선은 진실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과 진실에 반대되는 것의 증명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진실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선은 이미 원자를 깨버렸으며 논리를 허물어뜨리는 ‘깨달음’에 대한 독특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 있다.


(386)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의미에선 반 언어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히 뒤엎은 것이다.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들의 의미를 앞질러 단정짓게 만들며, 사물을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공식에 맞추려 들게끔 만든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문장들의 그림자로만 생각한다.  선은 “생각지 말라, 그냥 보라!” 이다.


(387)선의 직관은 거죽에서 체험하고 되새기고 알고 말하고 고집부리는 ‘얕은 나’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의식을 일깨우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각은 그 자리서 당장 일어나야지 다른 어떤 관념을 끌어와 곰곰이 되새기고 추리로 이끌어 나가선 안 된다.  선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전적인 긍정이다.


(390)머리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보기 시작하라는 충고다.  어쩌면 거기 머리로 짜낼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모른다.  단지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 내가 저자라면



“神의 황금시대? 어려운 책을 읽네.” 책상 위에 놓여 진 내 책을 흘깃 보고, 지나가던 어른이 하신 말씀이다.  神이 아니라 禪이요, 禪.  이라고 고쳐 말씀드리기도 애매해서 그냥 웃으며 네, 라고 대답해 버렸다.  그래, 신神이면 어떻고 선禪이면 어떠하리.  그 어르신에겐 신이건 선이건 그저 ‘어려운 책’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이 책을 접하기 전, 나 또한 이 어르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이든 선이든, 어렵기는 매 한가지, 관심 없기도 매 한가지였으니 말이다. 

책의 겉표지를 넘기기도 전, 제목에 떡하니 자리 잡은 禪이란 글자와 맞닥뜨렸을 때의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도대체 禪이 뭐야?  근원을 알 수 없는 해괴한 그림 한 점도 나를 점점 더 미궁 속에 빠져 들게 만들었다.


아마도 일반인들이 선을 처음 접했을 때의 첫 반응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동양사상이나 철학이 전공이거나 특별히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는 이상, 禪이라는 문자 하나에 담긴 엄청난 속뜻과 우주적인 가르침을 찰나로 돈오頓悟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그야말로 선(혹은 神일 수도 있겠다.)의 오묘한 섭리가 아닌가 싶다.  더군다나 이 책의 저자인 오경웅 박사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뛰어난 통찰과 이해의 폭으로, 禪이라는 생경한 사상을 후대의 우리들에게 쉽고 재미난 이야기로 전해 주고 있다.    

  

이 책은 1967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의 텍스트로 남아 있을 만큼 고전이 된 책이다.  미국에서만도 다양한 판본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여러 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동양철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선의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총망라된 역대 조사들의 일화와 선시禪詩들을 동·서양 철학과 종교를 넘나드는 저자의 풍부한 해설을 통해 만나면서 선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각 장은 선의 불꽃을 이어온 선사들의 일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처음 읽어선 행간의 오묘한 뜻을 단번에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불교의 성스러운 교리 가운데 첫째가는 게 무엇인가?”

“전혀 성스러울 게 없다.”

“그럼, 내 앞에 앉은 당신은 대체 누구요?”

“모른다.”


어떤 중이 백장에게 세상에서 가증 기적적인 일이 무어냐고 묻자 백장은 당장에 대답했다.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한 중이 물었다.  “부처는 어떤 분입니까?”  “그러는 너는 누구냐?”


제자 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조주도 장례 행렬에 끼어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가는군!”


 

이런 류의 대화를 계속 쫓아가자니 어떨 땐 답답함에 울화가 치밀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선사들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그 다양한 일화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禪을 문자로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어떤 확정된 개념이나 문자로 선을 표현하려 한다면 이미 그때부터 선은 선이 아닌 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저자는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던 선사들의 일화를, 아무런 단서 없이 던져줌으로써 그 오묘한 진리를 스스로 깨우치기를 바라고 있다.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바로 선의 이런 진리를 말해 준다.  이것은 감히 책의 전체 내용을 흐르는 개념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문자 안에 갇힌 정신은 선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선의 황금시대’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던 걸까?  ‘선의 황금시대’는 위대한 선사들이 많이 나왔던 당나라 시대를 말하며,  6세기에 보리달마가 중국에 도착하면서 중국 선종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기초를 견고하게 닦은 사람은 7세기 사람 육조 혜능이었다.  그 뒤를 이어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남전 보원, 백장 회해, 황벽 희운, 조주 종심 등의 거물들이 선종의 역사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9세기부터 선종은 여러 갈래로 나눠지기 시작했다.  후대에 이르면서 원래 선종의 생명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각 종파를 세운 선사들에게서는 여전히 초기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선의 황금시대를 살았던 선사들의 일화는 지금도 그 고혹적인 향기를 잃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본성을 꿰뚫는 직관과 통찰의 힘을 전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등장하는 많은 선사들이 있지만 토머스 머튼 신부와 홈즈 대법관, 스즈끼 다이세츠는 그들보다 오히려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것은 중국인이자 세계인이며, 동양사상가이자 서양사상가였던 오경웅 박사의 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양인으로써 동양사상의 정수인 禪 사상을 완벽히 이해했던 토머스 머튼 신부, 같은 동양인이지만 다른 문화를 가진 일본의 스즈끼 다이세츠의 선에 대한 통찰은, 비슷한 경계선상에서 선을 이해해야 하는 우리의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禪이란 깨달음에 대한 중국식 해석이다.  선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한 존재의 중심에 깊이 가닿을 수 있는 내적인 지각 능력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는 "장자"에 나오는 심재, 좌망, 조철에 해당한다.  이는 장자의 중심사상이 선의 핵심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의 사상은 순수한 통찰로 남게 된 반면, 선에서는 이 통찰이 "가장 중요한 수련"이 되었다는 점이다.

- 스즈키 다이세츠


禪의 명상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 있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 다시 말해서 언어로 규정되는 공식에 속지 않으며, 오히려 그 공식을 뛰어넘는 의식을 지니는 일이다.  선에서 소통되는 것은 메시지가 아니다.  "주님의 말씀"일 수도 있겠으나 단순히 "말씀"은 아니며,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다.  듣는 사람이 아 직 갖지 못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선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잠재해 있으나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각성이다.  선은 선교가 아닌 깨달음이며,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닌 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이므로, 그 목적은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알려주려던 "새 소식"이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존재를 깨닫게 하는 데에 있다.

- 토마스 머튼


 

혹시라도 선사들의 알 수 없는 언행, 엉뚱한 반전, 알쏭달쏭한 수수께끼 같은 문답에서 우리가 채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면, 위 두 사람의 선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통해 부족분을 채워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깨달은 사람은 자유롭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을 깨달아야 하고 어떻게 깨달을 것인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 둘 것이다.  당대의 선사들이 긴 시간, 몸소 뜨거운 체험으로 얻어 낸 깨달음을 아무런 수고 없이 쉽게 넘겨받는다면 그것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것이 뻔하다.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선은 단순히 우리를 일깨우고 깨쳐 알게 한다.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우리가 이 단순하고 자명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 책은 본인의 맡은 바 소임을 다 한 셈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육조 혜능에게서 시작된 선의 불꽃이 다시 불붙기 시작할 것이다.  1300여 년 전 시작된 작은 불씨가 오늘날 다시 활활 불타오를 것을 그들은 미리 예견했던 걸까.

선의 고고한 정기, 선의 곧은 정신은 여전히 아직도 살아 있다.  선의 황금시대는 당대 선사들의 시대가 아닌, 우리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깨친 바로 오늘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지 곰곰이 되새겨 본다.


-좋았던 점-

역시 동양사상을 말로써 설명하는 방법은, 언어의 굴레에 갇혀 제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는 경우를 빚어 낸다.   수학 공식이나 과학 원리같이 禪이라는 개념 또한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 <선의 황금시대> 또한 저자와 옮긴이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 전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이 올바로 흡수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는 사람 각자가,  선의 '거시기'를 가슴이며 머리로 일갈에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흥분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의 '거시기'를 군데군데서 발견할 수 있었던 이 책은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IP *.78.105.123

프로필 이미지
이승호
2009.03.01 22:45:59 *.168.110.44
역시 나리님의 글은 저자에 대하여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미가 솔솔 나는
휴머니티의 냄새가 납니다.

수고많으셨고요 편안한 밤 되십시오.
프로필 이미지
2009.03.01 23:32:58 *.234.77.178
나리님 리뷰가 아주 깔끔하고 보기 좋은데요^^
정리못하신다는 말씀은 겸손의 말씀이었던 듯.
그렇죠? 이 책은 워낙 주제가 어려워서 직관적으로 어떤 느낌만 받아도 좋았던 책인 것 같습니다.
이제 한권남았어요. 끝까지 화이팅임다~ ^^**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