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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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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19시 48분 등록
Ⅰ. 저자에 대하여


  덕산이 <금강경 해설집>을 법당 앞에 쌓아 놓고 불을 지르며 이렇게 말했었지.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아 봤댔자 태허의 허공에다 털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고.


  나의 인생(오경웅)도 이러한것 같다. 많은 업적과 여러 활동들을 한덕에 남들이 보기에 우러러 볼만한 위치와 명예를 남부럽지 않게 누렸다. 나자신 그덕에 인간이기에 우쭐대는 마음도 없진 않았지만 이제 막상 하느님 나라에 돌아가는 나의 삶을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헛되어 보인다. 과연 내가 평생을 해온 나의 가치, 사상, 업적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를 했던 것인지? 혹시 나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위해서만 하였던 일은 아니었는지? 법학자, 외교관, 철학교수 등의 존재의 역할이 덕산이 언급했던 바다에 단지 물 한방울 떨어뜨린 아주 보잘것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평생을 나의 직업의 토대위에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그리고 서양과 동양사상의 메커니즘의 뿌리를 찾는데 헌신을 하였다. 결코 쉽지많은 않았던 일이지만 보람이 있었던 이런 나의 전생애를 이끌어준 천주 하느님에게 부끄럽지만 이제 마지막 축복의 염원을 청하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만드신 이세계에 아주 작은 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그 역할이었지만 나 오경웅이가 그것을 위해 노력 하였음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나 오경웅은 1899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동양사상의 정수인 모국에서 태어난 탓으로 어릴때부터 나의 주변환경은 유고와 도교 등이 혼재된 사상으로 가득하였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공자의 유교사상과 노자, 장자의 道 등이 혼합된 여러 사상들로 나의 정신적인 토양분은 쌓여갔다. 이런 덕분에 나의 관심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 정신세계, 삶의 패턴과 생활양식, 깨달음 등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법철학을 공부하게된 첫 번째의 이유도 나와 타인간의 이해관계를 풀어주는 일차적인 대상인 사람에 대한 학문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서구 유학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의 문화사상의 토대인 그리스도교를 접하게 되었고 정신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현재의 삶보다는 내세의 구원을 약속하는 하느님이라는 신의 존재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에 대해서. 그 추종자들 가운데 한사람이 나의 정신적 동반자인 토마스 머튼이다. 나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고 학문적으로도 인정을 받을수 있었던 젊은 나이(26살)에 쾌락과 명성을 버리고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절대 고독속으로 침잠을 하다니. 내가 결혼후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게된 이유중의 하나가 성인 성녀들의 삶에 매료되어서 였지만 이처럼 모든 것을 버릴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현재의 나의 지위, 업적 등 모든 것을 버리고 그처럼 오롯이 하느님을 따를수 있을런지. 이것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숙제였다. 하지만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나의 평신도로써의 삶에 충실하며 그분의 신앙을 나의 모국인 중국에 전해주는 것이 나의 소명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일환으로 동양과 서양 사상의 결합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였고 그 작업들을 진행 하였다.


  동양사상 특히 선(禪)의 사상의 초점은 나에게로 집중이 되어있고 수련을 통한 직관을 통한 돈오(頓悟)적인 참나의 깨달음에 목적이 있다. 이에반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온전히 그를 믿고 의지하는데 중심이 서있다. 어쩔수 없이 나의 모든 사고의 뿌리는 동양 그중에서도 중국에 있었기에 이런 관념자체가 처음에는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았었다. 나자신이 중심이 되는 선사상과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그리스교의 사상은 과연 어떤 상관성이 있는 것인지.

  이런 의문들은 가톨릭 교부들과 영성 체험가들 -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에크하르트, 십자가의 성요한 등- 의 삶과 이야기들을 통해 실마리가 풀려갔다. 십자가의 성요한의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는 구절과 노자의 도덕경에서의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라는 역설적인 내용들이 일맥상통한 면들이 있었기에 말이다. 이처럼 깨달음이라는 종착역에 관점을 모아보면 모든 존재는 하나이며 서로가 통하는 면들이 있음을 알수있다.

  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선(禪)의 진면목을 그려 보자는데 있었지만 작업을 하면서 나는 과연 선사상의 대가들이 언급했던 그런 깨달음을 얻고 있는지 자문을 해보곤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자신도 참나인 나를 가까이 두고 바깥에서 또다른 깨달음의 대상인 다른 이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 옮긴이의 말

  p8~9

  가. 그 숙제는 네 자신이 직접 풀어야 한다

  나. 세상 만 가지 사물이 한덩어리가 되어 우주라는 섬세한 천을 짜나가듯 만 가지 사물이 한덩어리가 되어 우주라는 섬세한 천을 짜나가듯 어떤 힘인가가 내 눈과 마음과 손을 움직이게 하고, 예기치 않게 주위의 도움들을 불러 모아서는 한 장 한 장 넘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나로선 더없는 즐거움이었다.

  다. 선이 무엇이냐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이 선이 아니냐를 말하라 한다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농담’을 모르는 것,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실제로 우주는 지금 이 순간도 우리에게 뜻깊은 농담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라.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 지은이의 말

  p12

  가.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은 선의 골수를 정확히 끄집어 내고 있다.

  나. 결국 본바탕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이며, 신성(神性)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1. 선(禪)의 심지

   선(禪)과 도(道)

  p20~22

  가. 마하가섭을 인도선의 시조라 부른다. 그의 뒤로 27대 조사까지 이어져 내려오다가 보리달마가 28대로 인도선의 마지막 조사가 된다.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 이래서 달마 대사는 선의 역사에 있어서 인도와 중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나. 한자의 '禪'이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어의 ‘Dhyana'의 음역이긴 하지만, 그 뜻은 크게 다르다.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禪’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다. 선종은 그 바탕이 되는 추진력을 대승불교의 폭넓은 힘에서 얻어낸 것 같다.

  라. 노장의 근본 정신을 선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리고 꽃피운 것은 순전히 <대승불교>의 추진력. 토마스 머튼이 지적한 것처럼 진정으로 ‘장자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한 이들은 당나라 때의 선사들이었다.’

  마. 선사들의 근본 통찰이 노장 사상과 거의 일치. 노자의 <도덕경>제1장과 2장은 바로 선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바. 선과 장자와의 관계(스쯔끼 박사)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이나 ’마음을 잊음‘ 또는 ’아침처럼 맑음‘에 해당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점이다.

  p22~30

  사. 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장자의 ‘마음을 맑게 함’(심재), ‘마음을 잊음’(좌망) 그리고 ‘아침처럼 맑음’(조철)을 이해하는 게 지름길일 수도 있다.

   ① 마음을 맑게함

      <장자>의 <인간세>편에 묘사된 공자와 그의 사랑하는 제자 안회 사이에 오간 상상적인 대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도’란 복잡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예로부터 도를 깨친 사람은 우선 자기자신을 닦은 후에 남한테로 눈을 돌림. 자기자신이 철저히 도를 깨치지도 못하고서 어찌 남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수 있겠는가?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것. 자신의 얕은 마음을 길잡이로 삼으려 하면 안됨. 마음을 맑게 한다는 것은 자네의 기(氣)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道)는 이 텅 빈 상태 속에서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자네의 노래를 들어 줄 귀가 있을 때에만 노래를 부르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입을 다물게.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주위 상황이 자네에게 말하게끔 만들 때에만 말을 하게. 텅 비어 있음의 효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나. 방안이 비어 있어야 빛이 들어올 수 있슴. 자네가 진정코 귀와 눈을 마음 속으로 돌리고 나아가 마음 속에 꽉 들어찬편견과 선입견을 죄다 쓸어낸다면 그때는 귀신조차도 감동되어 자네의 마음에 기댈 걸세.

    ② 마음을 잊음(坐忘)

       ‘좌망’이라는 원어를 레그(Legge) 같은 학자는 ‘앉아서 실체를 잊음’이라 번역했고, 자일즈(Giles)나 임어당 같은 이들은 ‘앉아서 자기자신을 잊음’이라고 번역 했으며, 평유란은 ‘일체를 잊음’이라 했다. 스즈끼는 ‘마음을 잊음’으로 번역. 나는 그것을 이렇게 본다. ‘잊는 상태로의 침잠.’ 여기서의 잊는다는 것은 자기자신과 일체의 존재를 잊는 걸 뜻함.

    ③ 아침처럼 맑음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야만 절대의 모습을 볼수가 있슴.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것.

  아. 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

  자. 선(禪)에선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선(禪)의 현대적 가치

  p31~38

  가. 도가 사상과 선이 어째서 서양의 젊은이들에게 저토록 강하게 파고들어갈 수 있었나

      -->저들의 정신은 이미 기존 종교의 딱딱한 관념과 교리에 염증

      -->여태까지의 전통 신학은 저들에게 마치 기하학과 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즉 정신적인 여러 측면들 중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데 비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은 거의 완전히 무시. 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을 선과 도가 사상은 다루고 있슴

  나. 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점

  다. 동양인들은 선의 주된 원천인 장자 철학이 곤경에 처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필요하다는 앨런 와츠의 예리한 지적을 꼭 기억해야 한다. 와츠는 우주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떼이아르 드 샤르뎅의 통찰력과 장자의 통찰력 사이에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보았다.

  라.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선의 진면목을 그려 보자는 데 있다.

  마. 혜능이라는 커다란 불씨에서 생겨난 것이고, 동시에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에 그 심지를 박고 있다.

  바.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사상 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 달마와 제자들

  p40~46

  가. '진정한 공덕이란 밝고 맑은 지혜를 깨쳐 아는 것‘

  나. 가톨릭 사제들의 영적 교리에도 이와 비슷한 정신 생활의 결정적 단계가 있다. 즉 자연적인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상태로, 혹은 능동적인 명상의 상태에서 수동적인 관조의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그것

  다. 달마가 썼다고 알려진 유일한 작품은 도(道)와 진리에 이르는 두가지 길에 대한 글

      :그안에 구체적으로 표현된 기본 사상만은 훗날 선종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됨

  라. 도(道)에 들어가는 길

      ① ‘지성에 의한 길’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함

      ② ‘행위에 의한 길’(네가지)

        ㄱ. 미움을 넘어서는 길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

        ㄴ. 삶에 적응하는 길

        ㄷ. 집착을 버리는 길: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바로 이집착을 놓은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

        ㄹ.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김

  P47~50

  가. 달마와 제자 혜가 사이의 문답(부정적 방법)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 달마-‘어디 너의 마음이라는 걸 내놓아 봐라. 그러면 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겠다.’ 이에 혜가는 마음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 할 수가 없다고 고백. 이에 달마는 ‘자, 이제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전등(傳燈)의 시작이었으며 달마대사는 중국 선종의 초대 조사가됨.

여기서 그가 사용한 방법은 ‘부정적 방법’의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선종의 두드러진 특징됨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었다.’라고 한 것은 본래의 참마음은 이미 평화 중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진정시키려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 또 마음을 내놓아 보라고 요구함으로써 그는 잘못 대상화된 마음이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자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끔 도와 주었다. 즉 스승의 이와같은 뜻밖의 질문을 통하여 제자의 직관이 온전히 살아나 자신의 참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나.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지 못한다.


3. 부처의 눈 / 혜능

  P53~73

  가. 그의 제자들이 <법보단경>이란 제목 아래 다독거려 놓은 가르침과 대화는 중국의 불교 책자 가운데서 가장 걸작품으로 꼽힘. <단경>은 진리에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 터져나온 ‘참사람’의 작품

  나. 홍인대사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곧바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야만 한다.

  다. ‘부족할 때는 스승이 제자를 건네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뒤엔 제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 강의시간 두 중이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걸 놓고 열띤 논쟁. 바람이 움직이는 것인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인지.

      -->‘움직이는 건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마. 신수가 점오(漸悟)-단계적으로 점차 깨닫는 것을 가르친 데 반해 혜능은 돈오(頓悟)-단번에 깨닫는 것을 주장

  바.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잃지 않는 일

  사. 선의 통찰력은 그 자체로써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건 마이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지는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베는 것과 같다.

  아. 내가 본다는 것은 내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이요, 안 본다는 것은 남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은 보지 않는다는 뜻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 혜능의 가르침

  P78~79

  1. 교외별전(敎外別傳)

  가.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해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의 마음 속에 그대로 들이부어넣을 순 없다.

  나. 그대가 스스로를 들여다 본다면 비밀은 그대 마음 속에 있을 것이오.

  P84

  3. 직지인심(直指人心)

  가. 혜능이 말하는 ‘무념(無念)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뜻.

  나.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

  4. 견성성불(見性成佛)

  P91~95

  가. ‘삼신설(三身說)’. 그는 우리의 본성이 부처의 삼신, 즉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임을 가르친다. 우리 자신의 몸 속에 바로 부처의 몸이 들어있다. 첫째, 우리의 참본성이 본래 맑고 깨끗하다는 뜻에서, 그리고 모든 존재가 그 원천을 참본성 안에 두고 있다는 뜻에서 그것은 청정한 법신불이다. 둘째, 참본성에서 나오는 반야(지혜)의 빛에 의해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과 욕망이 깨끗이 쓸려 사라질 때 우리의 참본성은 마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태양처럼 찬란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이른바 원만한 보신불이다. 그러나 마음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그의 믿음은 ‘자성화신불론(自性化身佛論)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선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나. 노자의 <도덕경> 제2장은 도가의 변증법을 가장 잘 표현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은 추한 것이 있기 때문~

  다. 혜능에게 있어서 중도는 절대적인 지론


5.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 / 마조

  P97~118

  가. 마조 도일은 선종의 역사상 혜능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

  나. 마조의 스승이었던 회양과 마조의 문답에서 회양의 말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하겠는가 소를 채찍질하겠는가?’

      -->만일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법을 구할 때는 마당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네가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도를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상삼매에 드는일

  다. ‘현상이 모두 텅 비어(空) 있으니 삶은 곧 삶이 아니다. 이뜻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 속 성스러운 태(胎)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해 갈 것이니 이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성스러운 태’는  그 당시 유행하던 도가술(道家術)에서 따온것. 도가술에서의 성스러운 태는 육제적인 의미로 장생불사자의 태를 말한다. 이것이 마조의 손에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라는 뜻으로 변했으며, 이는 훗날 임제의 ‘차별없는 참사람’(無位眞人)의 모델이 되었다. 다름으로는 일상생활의 긍정을 강조한 점이다. 이것은 노장사상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마조 이후의 선사들의 사상에서도 중요한 원칙이 되고 있다.

  라. 한 스승 밑에서 나왔다 해서 천편일률적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스타일과 깊이를 지녔던것

  마.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

  바. 마주와 대주 혜해의 문답속에서 마주의 말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사. 노자

      만물에는 앞서갈 때와 따라갈 때가 있고

      천천히 숨쉴 때와 급히 숨쉴 때가 있으며

      무성할 때와 시들 때가 있고

      일어날 때와 누울 때가 있다.


6. 선악을 넘어서 / 백장과 황벽

  P 121~125

  가. 1282년 <백장청규(百丈淸規)> 책이 출간되자 비로소 선종의 제도가 체계가 잡혀짐. 이 책은 도덕률의 강조에 있어서나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성 분도(St.Benedict)의 규범과 비교할 만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계를 받는 의식과 누구든지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의무를 적어 놓은점

  나. 백장이 확립한 사원 제도의 가장 독특한 점은 ‘경작의 의무’에 관한 규정. 이 의무는 모든 승려에게, 즉 주지에게도 해당된다. 백장 이전의 승려들은 전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완전히 걸식으로만 생계를 유지. 백장의 이러한 현실적인 분별력은 시주에만 완전히 의존한다는 생각에 반기를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그의 좌우명은 이제 모든 종파의 승려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금언이 되었다. 그리고 백장의 이러한 건전한 개혁이 훗날 역사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리라곤 백장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을것.

  -->당무종의 불교탄압 사건중 유독 선종만이 기적적으로 이 대재난을 면하여 계속 발전.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진관승 박사는 그의 저서 <중국 불교사>에서 아주 예리하게 지적. 첫째 선종은 불상이나 경전과 같은 종교의 외적 부속품에 의존하지 않고 수도 생활을 해나갔다. 따라서 그것들이 파괴된 다음에도 능히 독립하여 존속할 수 있었다. 둘째 선종은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선종의 중요한 청약중의 하나가 모든 승려는 매일 어떤 종류이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에 대한 그의 주장 속엔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p 127~133

  가.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

  나. 성인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없이 문제의 양쪽면을 다 고려하고서 <도>에 비추어 양자를 본다.

  p128

  가. 한번은 중 하나가 백장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백장이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서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메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나. 그는 자기 자신이 곧 행복 그 자체요 참사람(眞人)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바깥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그 쪽으로만 안달하며 찾아 헤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다. 참마음이란 바로 우리 속안에 있는 본래의 불상.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일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일.

  라. 일심은 모든 상대 관념들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스승의 언어와 행동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 그대의 직관-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쯤 될 때 그대와 스승 사이에는 말을 떠나 침묵으로 오가는 이해가 생겨난다. 이것이 이른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마. 황벽은 점수 대신 돈오를 강력히 주장

  바. 황벽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장자의 사상과 아주 닮았다. 황벽은 일심(一心)이라는 표현을 썼고 장자는 도(道)라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절대를 표현한것. 사실 루이스브뢰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의 통찰도 선가나 도가의 통찰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p137

  어떤 중이 백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어냐고 묻자 백장은 당장에 대답했다.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p138~140

  가. 한번은 아주 진지한 구도자가 노자를 찾아왔다. 노자는 그를 보자마자 물었다.

      ‘그대가 데리고 온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이 말에 구도자는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아무도 없자 당황했다.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겠는가?’

      노자가 이렇게까지 묻자 그는 당황하다 못해 일대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러자 노자는 그에게 무엇이 자신을 괴롭히느냐고 물었다.

      -->만일 그대의 장애물이 내부에 있다면 하나 하나 깨뜨리기는 불가능한 일. 그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작용을 멈추게 하는 것 뿐.


7. 뜰 앞의 잣나무 / 조주

  p143

  가. 선의 핵심중의 하나인 ‘평상심이 곧 도’

  나.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걸 뜻함

  p154~155

  가. 차를 마시는 행위는 모두가 똑같지만, 차를 마시는 제각기의 경우에 있어서는 누가 차를 마시느냐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된다.

  나. 초심자 한 사람이 조주에게 물었다.

      ‘저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지도해 주십시요.’

      ‘아침은 먹었는가?’

      ‘예, 스승님.’

      ‘그럼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스승의 말에 제자는 홀연히 깨쳤다.

      장자와 마찬가지로 조주 역시 ‘우주적 민주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도’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p 157

  혜능의 진정한 계승자인 조주는 참본성을 특히 강조했다.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게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p158

  한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조주가 말한 것은 ‘도’가 잣나무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도’는 만물에 골고루 편재해 있다. 그러나 우연히 잣나무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잣나무를 입에 올렸을 뿐이다. 그가 하나의 물건을 입에 올린 건 사실이지만 조주는 그 물건을 통해 만물에 편재해 있는 ‘도’를 겨냥했던 것이다. 조주는 그 중에서 단순한 물건을 일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중의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깨우쳐 주려고 한 말이었다.

  p160

  노자의 <도덕경>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p161

  '도는 사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사물을 떠나서는 도가 없다.‘(남전)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 석두의 제자들

  2. 용담 숭신

  p174

  용담과 스승 도오의 문답

  ‘아니, 언제 마음에 관한 걸 가르쳐 주셨단 말입니까?’

  ‘네가 차를 끓여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 오면 먹었으며, 인사를 하면 답례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도처에서 가르쳐 주었는데도 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용담은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때 스승 도오가 마지막 열쇠를 내밀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용담은 마음 문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는 다시 이렇게 물렀다.

  ‘어찌하면 이 깨달음의 경지를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까?’

  도오가 대답했다.

  ‘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정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게 없느니라.’

  3. 덕산 선감

  p178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아 봤댔자 태허의 허공에다 털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 일화는 아주 극적일 뿐 아니라 깊은 암시를 준다. 자연히 노자의 ‘어두움이 가장 짙을 때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p185

  4. 암두 전활과 설봉 의존

  가. 스승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진리다.

  나. 설봉은 ‘자신의 광채를 부드럽게 하라.’는 도가의 교훈을 아주 명심한 듯하다.


9. 감추어진 불씨 / 위산

  p189~192

  가. 위산 영우, 그는 백장의 제자로 위앙종(?仰宗)의 창시자

  나. 우리들 안에 있는 영적 불씨를 강조한 것은 위앙종의 공헌

  p197

  홈스 대법관이 저자에게 해준 말

  ‘어떠한 철학이든 그 근본 이념은 비교적 간단하고 분명하나, 다만 이를 전달해 주는 말이 악마다.’.

  만일 우리가 ‘말이 악마’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동서의 어떤 책을 읽더라도 언어와 관념의 그물에 붙잡힘 없이 독서를 즐길수 있으리라.

  p199

  제자인 향엄의 질문에 위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그것을 가르쳐 주면 너는 분명히 후에 나를 욕할 것이다. 어쨌거나 무엇을 말하든 내 말은 어디까지나 내 말이지 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p200

  저자인 나는 가끔 숱한 유망한 천재들이 채 꽃피기도 전에 벌써 시들어 버리는 걸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내 생각에 성질상 그들 스스로 체험해 얻어야 할 사실들을 스승이 지나치게 설명해 주기때문이 아닌가 싶다.

  p201

  위산의 제자 앙산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보라. 거룩한 일들에만 마음을 쓰려 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초능력이니 신비술이니 하는 것에 빠져들지 말라. 이것들은 전부 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10. 집으로 돌아가라 / 동산

  p207~208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본래의 얼굴’이란 한자의 ‘여여(如如)와 같은 말로서 산스크리트어의 ’진여(眞如), 즉 부타타다타  Bhutatathata'와도 같은 뜻이다. 아울러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히 ‘있는 그대로인 것’로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영원한 도’, 구약 성서의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힌두교의 ‘범(梵) Brahma'에 해당된다.

  여기서 말하는 ‘나’와 ‘그’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그’는 ‘나’이나 ‘나’는 ‘그’가 아니다. 이것은 신은 나보다 더 진정한 ‘나’이지만 나는 신이 아닌 것과 같다.

  이 시는 불교 뿐 아니라 전세계 정신세계를 통털어 아주 귀한 보배 중의 하나다. 우리에게 높은 통찰력을 심어 주며 그의 산 체험을 전달해 준다.

  p212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자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 가르쳐준 백 개의 해답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

  p213~217

  동산이 설명한 ‘오위’는 다음과 같다.

  1.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 정중편(正中偏)

  2. 본체로 돌아감 ---------- 편중정(偏中正)

  3. 본체로부터 돌아옴 ------ 정중래(正中來)

  4. 본체와 현상이 함께 함 -- 겸중지(兼中至)

  5. 최고의 조화를 이룸 ----- 겸중도(兼中到)

  이 오위는 정신생활이나 깨달음의 다섯 단계를 나타내려 한 것이다. 이를 다시 나누어 설명해 보자.

  1. 첫번째 단계---이 단계에서는 제자들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하는 본체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현상에만 눈이 팔려 있다.

  2. 두번째 단계---이 단계에서 우리는 현상에서 본체로 다가간다. 이른바 구심(求心)운동이다. 이 단계가 바로 깨달음의 경험이다.

  3. 세번째 단계---두번째 단계에서 이미 깨달았으므로 이때부터 그는 본래의 자기 즉 참사람이며, 자유인이고, 주인이며, 왕이다. 이제는 확실히 ‘인위(人位)-존재의 단계’에 들어왔으므로 ‘본체인(本體人)즉 ’도인‘(道人)이라 불러도 좋다.

  4. 네번째 단계---깨달은 사람이 현상계로 돌아오면 그 전단계 때보다 더욱 자유 자재함을 느끼며, 마침내 번뇌가 곧 열반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치상으로는 알고 있던 현상과 본체가 하나라는 사실을 이 단계에서 직접 체험한다.

  5. 다섯째 단계---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본체와 현상이 서로 녹아들어 한덩어리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이 다섯째 단계는 ‘초우주에서 귀환하는’ 단계이다.

  p227

  '이 늙은 중이 볼 때에는 병이란 아무 곳에도 없네.‘

  이것은 ‘병들지 않는 사람’이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선문답이다.

  p228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11. 차별없는 참사람 / 임제

  p235

  ‘사람들은 곳곳에서 화장당하고 있는데 나만 여기서 산 채로 매장 당하는구나.’

  이것은 지금까지의 세속적인 ‘얕은 나’는 죽어 땅에 묻히고, 속안의 ‘참나’만이 살아났다는 뜻이다. 즉 이러한 죽음은 육체의 죽음보다 훨씬 앞서 일어날 수 있으며, 그리고 응당 일어나야 한다는, 그리고 또 그렇게 죽어야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불생불사의 ‘참나’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크나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p238~239

  ‘나는 모든 계율이나 종교의식이나 경전들이란 병자를 고치려는 약처방처럼 단지 속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 모든 방편들을 죄다 던져 버리고 직접 진리와 맞부딪쳤다.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이같은 끔찍하고 잔인한 얘기에 놀랄 필요는 없다. 임제에겐 진리를 깨치는 일, 즉 자신의 참본성을 바로 보는 일만이 제일로 중요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 일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이든, 누구이든 냉정하게 잘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의 우상파괴는 반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종교 정신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임제 철학의 초점은 ‘무위진인(無位眞人)-차별없는 참사람’에 있다.

  p240~244

  가. 그대들의 몸뚱이 속에 무어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차별없는 참사람’이 있다.

  나. 차별없는 참사람을 여전히 하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한 진정한 자기자신을 깨닫기란 요원한 일이다.

  다. 임제가 말한 ‘참사람(眞人)이란 개념과 애머슨(Emerson)이 말한 ’본래의 나‘사이엔 묘한 일치점이 있다.

  라. 에머슨의 ‘자기 신뢰’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지혜를 우리는 ‘직관’이라 부르고, 모든 후천적인 행동들을 ‘학습’이라 부른다. 머리로는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의 그 힘 속에 모든 사물은 공통된 기원을 갖고 있다. 그 방법을 결코 알 수 없는 존재의식은 사물과 시간, 공간, 빛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이며, 같은 근원에서 흘러나옴

  마. 그들은(제자) 직관에 대해선 등을 돌린 채 무가치한 ‘학습’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즉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찾아 헤매고 있었다.

  바. 임제는 ‘고함의 철학’을 열었다.

      :임제는 고함(할)을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때로는 한 외침이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때로는 땅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와 같고, 때로는 풀을 헤치는 잣대와 같고, 때로는 고함이 고함 아닌 것으로도 쓰인다.’

  사. 사실 ‘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인을 알아보고, 또 그 주인과 하나가 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누가 주인인가? 자신의 ‘참나’ 그것 말고 또 누가 주인이겠는가?

  p245~246

  가. 토마스 머튼

  :우리를 본래의 자신과 갈라 놓고 있는 그 심연도 건너지 못하면서 달에는 건너가서 무엇    하리오!

  나. 사실 임제의 모든 가르침의 큰 뜻은 바로 이 심연을 건너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홀로 서있는 도의 사람’이야말로 ‘참나’가 틀림없기 때문

  p246~247

  가. ‘도의 수행자들이여! 도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동에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평상        시의 일들, 이를테면 옷입고 밥먹고 똥누고 오줌누며 피곤하면 잠자는 그런 일들 속        에 불도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말을 듣고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        이다.’

  나.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는다.’

      가장 귀중한 보물인 ‘차별없는 참사람’은 바로 그대 안에 있고, 그대 자신이 바로 그        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미 잃고 만다.

  p250~251

  가. 오직 참으로 실재하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눈앞에서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

  나. 선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알알이 녹아든 유, 불, 도 세 가지의 종합이다.’

  p254

  가. 우리는 임제의 근본 통찰이 ‘차별없는 참사람’을 깨닫는 일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자신의 참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12. 날마다 좋은 날 / 운문

  p260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에겐 번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하찮은 상념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썼으며, 그 결과 남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또한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는 정신생활의 비밀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p267~268

  운문은 이른바 ‘일자관(一字關), 즉 한 글자로 관문을 통과하는 대화법으로 유명

  예) 문:‘도(道)란 무엇입니까?

      답:‘거’(去)-가라

      -->자유롭고 걸림없이 그대의 길을 가라. 특별한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대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라는 내면말뜻(저자)

  p269~270

  가. 참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속안 깊은 곳에서만 참본성을 찾으려 한다면 역시 영원히 놓치고 만다.

  나 .운문과 조산의 문답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제일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조산이 대답했다.

      ‘비밀리에 그와 친하려 들거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와 만나려는 생각은 버려야지.’

      운문이 또 물었다.

      ‘그러구서 어떻게 그와 가까워질 수 있지요?’

      ‘그래야 진실로 그와 친하게 되지.’

  p274

  어떤 제자가 ‘나무가 시들어 잎이 떨어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임제 : ‘체로금풍(體露金風)-가을바람에 몸을 드러내다.’

  -->이 네 글자에는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순수한 법신 또는 ‘참나’가 그 본질 즉 그 영원성 속에 존재한다는 뜻

  p275

  선종의 다섯 종파에서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신생활에서는 궁극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p276~277

  가. 출가하든 안하든 자신의 참본성을 본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나.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      


13. 지금 여기 / 법안

  p279

  가. 법안종(法眼宗)은 법안 문익에 의해 시작

      :중국 불교 뿐 아니라 중국 문화 전반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슴

  나. 법안은 나한의 제자

  p280~282

  가. 다른 종문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나. 관심의 초점을 속안의 참나에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신비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것

  p284

  법안 자신은 박식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단순한 지식을 경계하게 했다. 왜냐하면 실체는 바로 우리 앞에 있어서 그것은 직관을 통해 알아지는 것이지 사변이나 추리로 다가가야 오히려 눈만 흐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p286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만물을 보지 않고 근본 진리의 눈, 즉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세상 만가지 물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눈을 ‘법안’(法眼)이라 하는데, 법안 자신은 이것을 ‘도안’(道眼)이라 불렀다.

  p287

  법안은 결코 학문이나 책에서 얻은 지식의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맷돌로 콩을 갈듯 모든 지식을 자신의 마음의 맷돌에 갈아 잘게 소화했던 것 같다.

  p288

  제자가 밤과 낮 열 두 시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고 묻자,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가게나!’

  p296

  중국 철학 일반에 있어서 법안종의 의의는 불교의 각 종파 중에서 이 파가 유독 유교와 가깝다는 사실에 있다.

  

14. 선(禪)의 불꽃 / 에필로그

  p299~300

  가. 가이없는 영원

      아침바람 건듯 불고 새벽달 은은하네.

      -->이 싯귀절은 우리를 창조의 새벽으로 데려다 준다.

  나. 일본 시인 바쇼

      :조용한 옛 연못

       개구리 한 마리 뛰어든다.

       풍덩!

  p305~306

  가. '도를 잃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간격이 생기지 않게 할 방법이 있을까요?‘

      법운이 대답했다.

      ‘한 걸음 나아가면서 동시에 한 걸음 물러서라.’

  나.‘향상일로(向上一路)란 어떤 겁니까?’

     계성이 대답했다.

     ‘아래로 내려오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걸세.’

     이 대화는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글을 생각나게 한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나는 높이높이 올라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실로 역설의 대가였다.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구하려면

     아무 일에서도 즐거움을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성취하려면

     어느 것도 성취하길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거든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이 모든 역설은 노장 철학과 박자가 맞는다.

  p310

  스즈끼 다이세츠:‘선이란 유교, 도교, 불교를 종합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시킨것’

  p311

  가. 장자가 이른바 ‘나를 잃었다’라고 한 것은 ‘참나’가 ‘거죽의 나’를 벗어났다는 뜻.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 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나. 많은 선사들은 깨달음을 ‘집으로 돌아오는 일’로 표현

  p312

  가. 엘리드 그라함이 쓴 <가톨릭과 선(禪)>

      :엘리드는 선의 정신은 하느님 역할을 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는것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이란 숨겨져 있던 ’큰 나‘가 드러나면서 거죽의 ’작은 나‘가 사라지는 일’

      -->이러한 깨달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스스로 하느님 노릇하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이 자기 속에서 일하도록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있다.     

  p319~321

  불안 선사라고도 부르는 청원은 선 수행엔 두 가지 병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이요,

  또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으려 하는 병이다.‘


  자기가 올라타고 있는 나귀를 찾는 어리석음은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눈을 바깥으로만 돌리면 결코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며,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만 찾고 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바로 이렇게 방향 설정을 잘못한 데에 있음은 두 말해서 무엇하랴.

  마조가 말했듯이 ‘그대는 그대 집의 보물이다.’ 보물을 밖에서 찾아 헤매는 것은 결국 실망만 낳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찾는 보물은 바로 그대 마음 밑바닥에 있기 때문


  두 번째 병은 훨씬 치료하기가 까다로운 병이다. 그대는 자신이 나귀를 타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또다시 몽땅 잃고 만다. 가장 큰 위험이다. 이것이 바로 청원이 말한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으려 하는 병’이다. 이러한 고질적인 lqud은 모든 종교인에게 공통된 것이다.


  청원의 마지막 당부를 들어 보자.

  ‘아예 나귀탈 생각을 버려라. 그대 자신이 곧 나귀요, 온 세상이 또한 나귀다. 그러니 새삼 나귀를 탄다고 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그대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p330

  나에게 있어서 성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되는걸 뜻한다. 따라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참나를 되찾는 문제이다.(토마스 머튼)

  p334

  선사들이 가장 즐겨 쓰는 시는 왕유의 다음 두 구절

  물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가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보리라.

  p341

  '어디로 가야 부처를 만날 수 있지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게. 그러면 담요를 두르고 신발을 거꾸로 신은 사람이 자네를 맞이할 걸세. 그 사람을 잘 모시게. 다름 아닌 부처니까!’

  p347

  '도‘의 사람만이, 진정으로 초월해 있는 사람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 풍경을 즐기기에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욕심과 목적들로 가득차 있다.

  p348

  가. 선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절실히 깨닫는데 있다.

  나. 노자

      그 칠 때를 아는 것

      내 자신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

  p352

  우리가 만일 하느님을 단순히 최상의 기술자로서만이 아니라 최상의 예술가며 시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때 자연은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우리 눈에 다가오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우리의 정신을 크나큰 기쁨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낙원’에 사는 듯한 기분에 젖을 것이다. 수피의 시인 사디(Sadi)가 노래한 것처럼----


  하느님 섬기는 일에 심취된 사람들은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에도 황홀경에 빠진다.

  p354

  교황 요한 23세

  ‘어느 날이고 다 태어나기 딱 좋은 날이고, 어느 날이고 다 죽기 딱 좋은 날이다.’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禪) -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p370~373

  가.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나. 실제로 우리는 선이 담고 있는 불교의 형이상학을 간파하지 않고서는 동양의 선을 이해할 수 없다.

  다. 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 직접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바로 삶 자체를 말함.

  라.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마.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바. 기독교와 불교 간의 상호 이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현대인들이 불교의 알짜배기인 ‘체험’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선에서는 아주 하잘 것 없고 그릇된 길로 인도 한다고 따돌림당하는 ‘설명’ 그 자체에 초점을 두려고 하는데 있다.

  p382~383

  기독교에선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나 우수성으로나 항상 앞장선다. 반면에 선에 있어서는 체험이 항상 선행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적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선은 어떤 계시의 관념도 부숴버리며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또한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꿰뚫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 기독교는 은총과 신의 선물을 골자로 하는 종교, 그러니까 신에 완전히 귀의하는 종교다. 반면에 선은 간단히 종교로 분류하기가 어렵다.

  p384~385

  가. 기독교의 체험은 그것이 이미 확립되어져 있는 신학이나 여러 상징들과 일치하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선 체험은 오로지 그 독자성의 바탕위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 선이 전달하는 것은 당사자가 이미 갖고는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실현이며, 자각이고, 지금 여기 세상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존재의 자리를 여실히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설교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직관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나중에 볼 것이다. 그들은 상호보완적이며, 이런 까닭에 선은 기독교 신앙 내지는 기독교 신비와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다.(선을 그 순수한 상태에서 형이상학적인 직관으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p386~387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들의 의미를 앞질러 단정짓게 만들며, 사물들을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공식에 맞추려 들게끔 만든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머리속에 만들어놓은 문장들의 그림자로만 생각한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재빨리 언어를 사물 자체와 바꿔치며, 우리의 안이한 선입견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본다. 선은 그리하여 대상을 ‘직접 보게’ 하기위해 언어를 뒤집어 사용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말한 것처럼 선은 ‘생각지 말라. 그냥 보라!’이다.

  p388

  가. 선은 단순히 우리를 일깨우고 깨쳐 알게 한다.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선사의 행위와 몸짓은 가르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자명종’의 울림과 같은 것이다.

  나.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거의 이해가 불가능한 많은 선의 일화들은 간단히 말해 자명종의 울림과 거기에 대한 잠자는 사람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p390

  머리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보기 시작하라는 충고다.

  p392

  스즈끼는 에크하르트의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하느님이 나를 바라본다.’라고 하는 말과 선에서 말하는 반야가 같은 표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p393

  선은 인간 실존의 어떤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용어로 합리화하거나 또 그렇게 상상되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그 실체가 체험되어져야 한다.



Ⅲ. '내가 저자라면'


  “당신은 ‘나’를 아시오? 무엇이오? 말해보세요. 모르지요? 자기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말입니다.”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한 숭산스님(1927~2004)이 1982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판하며 보냈던 편지가 처음 공개됐다. (매일경제 09년 2월 26일자 기사 인용)


  동양을 넘어 서구사회에서 ‘젠(ZEN)'의 열풍이 거세게 불고있다. 현대 문명을 이끌고 있는 그들에게 이처럼 동양을 넘어 선(禪)의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과연 그들은 무엇을 찾고자 함인가? 서양인들은 지식을 우선시하고 체계적인 이론과 시스템들을 중시한다. 이런 그들에게도 풀리지 않는 숙제중의 하나가 있었으니 천재적인 신학자 본훼퍼의 ’나는 무엇‘이라는 시에서 보여지듯 나란 화두의 명제가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위의 숭산스님의 사례처럼 동양에서 살고있는 우리 자신에게도 필요한 작업들일 것이다.   


  이런 나란 명제를 풀기위해 저자는 ‘선(禪)의 황금시대’를 통해 중국 당나라 시대(618~906)에 살았던 위대한 선사들을 중심으로 체험 및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면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선사들의 계보는 달마대사로부터 혜능, 마조를 거쳐 법안까지 이어진다. 저자가 선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참나를 찾는 깨달음이다. 스즈끼 박사의 언급대로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써, 이는 최근 ‘코칭’의 기본 맥락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를위해 저자는 선사들의 절대적인 거시기들의 예화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중 아래와 같은 달마대사와 제자 혜가 사이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어디 너의 마음이라는 걸 내놓아 봐라. 그러면 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겠다.’

  이에 혜가는 마음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하자 달마는,

  ‘자, 이제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라고 하였다.


  우리가 보기에도 조금은 허무맹랑하고 뜬구름 잡는식의 선문답인데 서양인들에게는 어떤 시각으로 보여지고 있기에 현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이에 저자는 기존 그들의 종교의 딱딱한 관념과 교리 및 기존의 전통 신학들이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한데 반해, 역설적이게도 선과 도가 사상은 이처럼 전달 불가능한 측면을 다루고 있슴에 ‘젠(ZEN)'이 회자가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벽안의 미국인으로 살면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궁금점을 느껴 결국 불교로 개종한 ’만행‘의 저자 현각 스님이 그 대표적 예일 것이다. 또한 저자의 이야기처럼 서양의 방식과는 다른 동양의 추상적이고 암시적인 접근방식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으로 물론 작용을 했으리라.

  또한 저자는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 예화를 통해 대상에 대한 마음의 집착의 경고성을 제시하고 모든 도는 만물 어디에도 존재함을 드러낸다. 이를통해 그는 내면적인 서양사상과 동양사상의 편가름 좁게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사상의 갭에 대한 시각차이보다는,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도오의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서양 사상의 논리와 이해를 따지는 풍토도 은유적으로 꼬집고 있다.


  저자는 끊임없이 현재의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하나의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중요한 ‘나’란 화두를 놓치고 있는건 아닌지? 이를위해 그는 자신의 참마음을 보기위한 강조점으로 직관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몰입과 통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재의 풍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책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한주를 보내면서 궁금점이 하나 생겼다.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임제가 얘기했는데 그렇다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듯이 나는 깨달음을 위해 오경웅을 죽여야 할것인가? 아니면 공자의 얘기대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주위 상황이 자네에게 말하게끔 만들 때에만 말을 하는’ 시점이 되어서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이에대한 답은 아래와 같은 우화 하나를 곱씹어보면 알수 있을것 같다.


  물고기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본능적으로 먹이를 찾아 다니기 시작

  했다.

  살아가면서 많은 곳을 돌아 다녔고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먹이를 부지런히 먹으면서 그

  는 주어진 삶을 영위해 나갔다.

  어느덧 물고기도 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렀는데 죽음을 앞두면서 그는 하나의 아쉬움을 자
  식들에게 토로 하였다.

  아쉽게도 살아오면서 한가지 보지못한 것이 있다고?

  ......

  

  그것은 ‘물’이었다.


  저자는 아마도 우리들에게 이처럼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는 것들을 고대 선사들의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 토마스 머튼처럼 간접적인 ‘자명종’의 울림과 같은 역할을 하길 원하는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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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23:38:22 *.234.77.178
한 주 동안 많은 생각을 하신 것 같네요.
그렇겠죠. 우리 모두 물을 보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이승호님도 편한 밤 되시고요.
어느새 테스트 마지막 한 주네요. 다음 책에서도 많은 배움얻으시고 화이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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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1 23:43:19 *.168.110.44
화이팅을 외쳐 주시는 박정현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3월 시작하는 주간이라 회의에다 출장에다 업무가 만만치 않은 가운데 펼쳐지는
마지막 레이스.
저도 함께 화이팅을 외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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