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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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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22시 23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오경웅(John C.H. Wu) 박사는 탁월한 법률가이며 외교관이고, 가톨릭을 믿는 중국인 학자이다. 1899년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 미국, 프랑스의 7개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하고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 헌장 구성에 참여했다. 주요저서로는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정의의 원천> <사랑의 학문> <내심 낙원> <선의 황금시대> 등이 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지혜를 간직한 채 가톨릭에 귀정한 중국의 석학"으로 표현되는 그는 중국의 요한으로도 불리웠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영어이름이 John (요한) 이어서도 그럴수 있겠고,  성경에서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마태,마가,누가 등 다른 제자들과 같은 일을 겪었지만 요한복음은 개념적인 기록이 강한 책인데 (예를 들면 예수님은 빛이다, 소금이다, 말씀이다, 우리의 친구다.. 등 개념적으로 해석을 많이 했다) 아마도 이 영향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와이 대학에서 중국 철학 및 문학 교수로 재직중, 스즈끼 다이세츠 밑에서 개인적으로 선불교를 배우던 제자를 통해 스즈끼를 만났다. 스즈끼의 '선의 숨결로 살다 (living by Zen)’이라는 책에서 마조, 임제, 조주, 운문 등 위대한 선사들에 대한 섬세한 통찰에 매료됐다. 이 책에도 그가 선사들에게 감탄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서양에서 공부하고 살았을지라도 나는 그가 동양인, 특히 중국인이라는 것에서 그의 몸에는 유교, 불교, 도교를 이해하는 피가 흐르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서양의 다양한 나라에서 배우고 살면서 동서양을 초월한 정신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이후 강연에서 ‘"만일 동양이 그리스도 안에 서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동양은 서양을 만나 그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 또한 서양이 그리스도 안에 동양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서양은 동양을 만나 그를 사랑 할 수 없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는 동서양이 그리스도안에서 결합할 때 새로운 사람을 낳는 진정한 결합이 되리라는 뜻으로,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동서양을 초월한 정신과 수많은 연구가 만나 내린 가장 결정적인 결론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몸으로는 동양을 이해하고 가슴으로는 서양을 받아들인 사람, 머리로는 동서양을 초월한 세계를 자기 언어로  정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책에서 단순한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지식이나 단순한 연구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속 알맹이를 알알이 드러내면서 선과 불교 이야기를 펼쳐 나가며 주석 없이 선을 소개했다. 선에 정통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즉석에서 인정할 것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누군가 맑은 통찰력과 싱싱한 언어로 다시금 이 책을 번역하려고 나선다면 지금이라도 기꺼이 그와 함께 토론을 하며 밤샘을 하고 싶은 심정이다. (p8)


선이 무엇이냐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이 선이 아니냐를 말하라 한다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농담을 모르는 것,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실제로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뜻깊은 농담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우리는 이 책 속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도처에 우리가 여태껏 눈감고 지나쳐 버린 보물들이 무진장 숨겨져 있음을, 생의 은밀한 불씨들이 찾아내 주시기를 기다리며 가슴 두근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p9-10)

 

여기에 펼쳐진 <()의 불꽃을 이어온 사람들> 이야기는 주로 중국 당나라 시대(618-906)에 살았던 위대한 선사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선 불교는 비록 6세기경 보리달마가 중국에 건너옴과 더불어 시작되긴 했으나, 그 심지에 본격적인 불이 당겨지기는 7세기경 혜능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 선의 불꽃은 마조, 석두,남전,백장, 황벽 그리고 조주 등의 생명력 넘치는 정열에 힘입어 더욱 뜨겁게, 더욱 다채롭게 피어올랐다.  (p11)

 

선은 한 송이 꽃과 미소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의 Dhyana(禪那)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禪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p20)

 

내 생각으로는, 선종은 그 바탕이 되는 추진력을 대승불교의 폭넓은 힘에서 얻어낸 것 같다. 그렇지 않고 만일 노자나 장자와 같은 원시 도가사상에만 의존하였던들 그렇게 활기차고 다이나믹한 정신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는지 모르지만, 노장의 근본 정신을 선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리고 꽃피운 것은 순전히 <대승불교>의 추친력이었다. 토마스 머튼이 예리한 통찰력으로 잘 지적한 것처럼 진정으로 장자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한 이들은 당나라 때의 선사들이었다’ (p21)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뚤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이나 마음을 잊음도는 아침처럼 맑음에 해당된다. (p22)

 

여기서 안회는 크게 깨쳤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제가 마음을 맑게 하는 수련을 해 왔지만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 있더군요. 비로소 마음을 맑게 했을 때 저는 라는 작은 존재가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텅 빈 상태라는 말이지죠?” (p 26)

 

그렇다고 og서 선사들이 불교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그들이 노장 사상에 경도된 나머지 불교 사상 중에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노장 사상적인 요소들만 골라 발전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p30)

 

나는 도가 사상과 선이 어째서 서양의 젊은이들에게 저토록 강하게 파고들어갈 수 있었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그 어떤 것을 도가의 역설과 선의 수수께끼에서 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들의 정신은 이미 기존 종교의 딱딱한 관념과 교리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여태까지 전통 신학은 저들에게 마치 기하학과 같은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즉 정신적인 여러 측면들 중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데 비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은 거의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을 선과 도가 사상을 다르고 잇다. 이들은 전달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을 일깨우는방법을  갖고 있다. 그 방법에 의해 마음의 지평이 열리고 숨쉴 공간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p 32,33)

 

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느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언어와 소리와 색깔 가지고는 도저히 실제에 못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양의 정신은 언어와 소리와 색깔을 넘어선 곳에서 그 고향을 찾는다. 동양의 정신은 단지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고, 침묵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소리를 사용하며, 형태없는 무한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색깔을 사용한다. 즉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p33)

 

선은 동양 정신의 전형적인 꽃이다.  (p 34)

실제로 선의 정신은 서양 사상가들의 선두 주자들에게 상당히 깊이 침투해 들어갔으며, 머지않아 거꾸로 동양에 영향을 미칠 날이 올 것이다. 인간 존재는 본래 하나이며 동서양을 초월해 왔다.  동서양을 초월해 있는 곳에서만이 동서양의 활기찬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감히 예언하건대 이러한 활기찬 종합은 서양에서 먼저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종합이 이루어지면 전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다.(p 35)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선의 진면목을 그려 보자는데 있다. 단 여기서는 당대의 대선사들만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독창적인 통찰력과 풍부한 개성의 힘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기 때문이다 (p36)

 

선이 본격적으로 불지펴지는 육조 혜능의 손 안에서 였다. 그 이후 남악 회양, 청원 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그리고 황벽 희운등의 천재들이 차례로 그 불꽃을 이어받아 더욱 활활 피어 올리다가 드디어는 다섯 갈래의 불길로 갈라져 새롭고 풍성하게 타올랐다. (p37)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 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p37-38)

 

달마와 그 후대 선사들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p 47) 달마에 관해서 가장 확실히 말할수 있는 건 인도의 자극을 받아 중국에서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은 후대의 선사들이 달마의 인간성과 사상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p50)

 

혜능은 중국이 낳은 위대한 천재 중의 하나이며 노자,장자,공자,맹자 등에 견주어도 하나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단경>은 책상 머리에서 짜낸 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온 참사람의 작품이다 (p 53)

 

선의 통찰력을 그 자체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치는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베는 것과 같다. (p 72)

 

순간적인 깨달음(돈오)을 강조하는 남쪽의 선종이 점진적인 깨달음(점수)을 주장하는 북쪽의 선종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신회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용기 덕분이었다. (p 72)

 

교의별전은 법이나 도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해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의 마음속에 그대로 들이부어 넣을 순 없다. (p78)

 

머리의 지성 하나만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일반 기술 지식과는 달리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다윗이 구약의 시편에서 주께서 얼마나 좋은지 혀로 맛보고 눈으로 본다고 노래했을 때 그는 자신의 선 체험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p 79)

 

송나라 때의 유학자 육상산이 학문에 있어서 만일 그 근본을 안다면 모든 경전은 다만 마음 속 진리에 대한 갖가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분명 그는 선의 영향을 받았던 게 틀림없다  (p80)

 

만 가지 법이 다 사람 마음 속에 있다 (p81)

마음이란 쉽게 파아할수 없는 물건이다. 우리의 마음은 마음에 대해 말을 해야 할 때마다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이야말로 선의 열쇠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가 없다. 선의 궁극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 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 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참본성이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쓰라. 곧 성불할 것이다” (p 83)

 

마음의 힘은 무한히 크다. 자아 실현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참 나로 돌아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다. (p 83)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 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p 84)


혜능이 말하는 무념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없이 쓰는 걸 뜻한다. 무념을 아무 생각도 안한다거나 모든 사상을 끊어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절대 안된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무無라는 말의 덫에 덜커덕 걸리고 만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말과 문자에만 집착하는 마음은 세상 만 가지 일을 순식간에 수갑과 밧줄로 둔갑시킨다. (p85)

 

혜능에게는 좌선의 목적도 역시 마음의 자유를 구하는데 있었다. (p86)

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p86)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선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뱀이 되고 자비와 연민을 품으면 보살이 된다.” (p 92)

 

혜능에 의해 불교 교리는 더욱 뜻이 깊어지고 널리 알려졌다.

마음이 바르다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면 참선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속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 데 시줏돈도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p 92-93)

 

현상이 모드 텅 비어 있으니 삶은 곧 삶이 아니다. 이것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 속 성스러운 태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해 갈 것이니 이 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이것은 마조의 손에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라는 뜻으로 변했으며, 이는 훗날 임제의 차별없는 참사람의 모델이 되었다 (p 101)

 

마조는 일상생활의 긍정을 강조했다. 마조의 수제자인 남전 보원이 평상심이 곧 도다라고 말한 것은 분명 스승의 목소리에 대한 메아리이다 (p 101)

 

마조의 가르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마조는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했으며 그들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자기 경지를 열었다 한다. 한 스승 밑에서 나왔다 해서 천편일률적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스타일과 깊이를 지녔던 것이다. (p 104)

육조 혜능과 마찬가지로 마조는 제자들의 의식을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형태를 갖춘 세계에서 절대 공의 세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 서로 대립적인 방법을 쓰는데 아주 능숙했다. 그는 제자에게 필요한 경우에 따라 긍정의 길, 혹은 부정의 길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p 118)

제자를 진정한 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선사들의 한결 같은 목표이다. 조주의 가르침의 목표도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그가 사용한 방법들은 아주 독창적이고 익살맞다 (p153)

 

백장의 대답들은 도무지 횡성수설이지 질문에 대한 지각있는 답변으론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스승이 그 말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점이다. 미치광이라야 미치광이의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실상 그들 중 누구도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대화 속엔 분명 논리적 추리로써 밝혀낼 성질의 것이 아닌, 직관에 의해서만 간파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다. (p 107)

이와 같이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선 그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바다 (p 107)

 

너는 어째서 네 집에 있는 보배를 두고 다른 데서 찾아 방황하는가?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p 108)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서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  (p 120)

 

선종의 중요한 청규중 하나가 모든 승려는 매일 어떤 종류이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청규를 세운 이가 바로 백장 회해였는데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밭일을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린 사람이다.

노동에 대한 백장의 주장 속엔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 운명에 참여한다는 속깊은 뜻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는 그는 초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p 125)

 

황벽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장자의 사상과 아주 닮았다. 황벽은 일심이라는 표현을 썼고, 장자는 도라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절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두 사람 다 심오한 사상가이며 동시에 위대한 신비가였기 때문에 절대에 대한 그들의 통찰이 서로 다르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사실 루이스브뢰크, 십자가의 성 요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같은 서양의 신비주의자들의 통찰도 선가나 도가의 통찰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p 133)

 

나의 인상으로는 위대한 선사들에게는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의 커다란 공안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참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공안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삶을 누리는 사람한테는 가장 평범한 일이 기적 중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 p 137)

 

가장 정확하게 과녁을 뚫는 방법은 골수에 사무치도록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일이다.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수도 없다. 말이야 쉽지만 실천하기람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항사 모순속에 살아갈 뿐 아니라 저마다 고집장이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 안할 수 없다.

욕심의 샘이 깊으면 천상의 샘도 말라간다. (p 138-139)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른다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p153)

 

선의 세계란 실로 얼마나 뒤죽박죽인가! (p 145)

문이란 그것이 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안쪽에서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부는 열쇠가 없이도 혼자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스승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사실상 문을 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거라곤 없다. 스승의 행동은 마음이ㅡ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 p 146-147)

 

장자와 마찬가지로 조주 역시 우주적 민주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p155)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p 156)

 

혜능의 진정한 계승자인 조주는 참본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참본성이란 또는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듣기 실어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부처라는 말이다

조주에게 있어서는 마조나 남전과 마차가지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편재해 있다.(p158)

 

조주는 똑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똑같은 대답을 한 적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소박한 성실성 때문에 질문자의 상황에 맞도록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한 대답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그렇지 않고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은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은 흔히들 녹음기나 앵무새로 전락하고 만다 ( p 163)

스승의 책망은 신랄하긴 했으나 아주 부드럽고 해학적이었다. 조용한 물 밑은 깊은 법이다 (p 201)

 

, 이제 분명히 그대들에게 말하지만, 거룩한 일들에만 마음을 쓰려 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초능력이니 신비술이니 하는 것들에 빠져들지 말라. 이것들은 전부 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미 그 뿌리에 다 들어있기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머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갖출 수가 없다. ( p 202)

 

이번에 헤어지면 아마 다시 만나기 힘들 걸세

만나지 않기가 더 어려울 텐데요” (p206)

 

우리의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다 (p 246)

가장 귀중한 보물인 차별 없는 참사람은 바로 그대 안에 있고,그대 자신이 바로 그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미 잃고 만다. 그리고 한가지, 이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그대는 자기 속안에서 조차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찾는 자 바로 그 자이지 어찌어찌해서 찾아질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참나는 항상 주체이지 결코 객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p 247)

 

사실상 선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알알이 녹아든 유,,도 세가지의 종합이다”.

여하튼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데 있다. 속안 마음의 깨다름이란 인간 존재의 속알맹이까지 꿰뚤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 이것은 장자가 말하는 심재’,’좌망’,’조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이 깨달음이 다소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 선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p 251)

 

구도자들이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자신의 본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그대들이 행여 수백 권의 경전에 능통한다해도 그것만 갖고는 아무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는 일개 수행자만 못할 것이다 (p 255)

 

운문의 경우 아주 인상적인 것은 초월적인 영역으로 솟구쳐 오를 때에는 독수리처럼 빙빙 돌며 오르지 않고 로케트처럼 곧장 하늘로 치솟지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때는 도리어 바람의 방향에 따라 그리고 인생이라는 물결, 조류,흐름,소용돌이, 이리저리 흔들림 등에 따르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영원한 도가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p 275)

운문은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참본성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p 276)

사실상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최고의 날이라고 한말이다. (p 277)

 

법안은 맷돌로 콩을 갈 듯 모든 지식을 자신의 마음의 맷돌에 갈아 잘게 소화했던 것 같다 (p 287)

누구든지 크든 작든 다소 편파적인 기호를 갖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p298)

 

장자가 이른바 나를 잃었다라고 한 것은 참나거죽의 나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 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p311)

 

홀로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 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p327)

 

우리의 전 생애는 한 편의 로맨스이다. , 우리의 참나를 발견해 가는 로맨스다. 도덕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악을 피하고, 모든 선을 행하며, 너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것조차 참나를 발견하기 위한 예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는 이 삶의 최고의 로맨스를 한 편의 아름다운 글 속에 다독거려 놓았다.

 

인이니 의니 하는 도덕은 옛날의 거룩한 왕이 오가다가 하룻밤 머물고 가는 여인숙에 불과하고, 절대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너무 오래 머물면 여관비만 많이 나간다. 옛날의 완성자는 인이라는 길을 걸어, 의라는 여인숙에서 하룻밤 머물고, 허라는 초월의 경지를 소요하며, 소박함이란 밭으로 소풍을 하고, 마침내 남에게서 빌려오지 않은 자신의 뜰에 선다.

초월의 경지에서 노니는 것은 곧 완전한 자유요, 단순함은 완전히 건강과 활력을 준다. 그대가 서있는 뜻은 남에게 빌린 게 아니므로 좇겨날 염려도 없다.옛 사람은 이것을 진실을 추구하는 로맨스라 하였다. (p 331)

 

마음에 안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p 331)

 

때때로 그녀는 소옥을 부르지만

그것은 시킬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사랑하는 낭군이

그 목소리를 듣게 하려고. (p335)

 

선사들은 참본성을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불러왓다. 이것’, ‘저것’, ‘그 사람’, ‘본래면목’,’차별없는 참사람’, ‘홀로 걷는 의 사람’, ‘자기등등으로 불렀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집안의 도둑이라고까지 불렀다.(p 348)

 

하느님 섬기는 일에 심취된 사람들은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에도 황홀경에 빠진다 (p 352)

 

깨달은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이미 철저히 죽어 있기 때문에 그에겐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살아있기 때문에 그에겐 그보다 더 좋은 일이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그가 불가피한 운명의 일격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운명의 장난도 더 이상 그를 해칠 수 없다는 뜻이다. (p 353)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선이 신을 인간의 위치로 부당하게 끌어내리려 한다는 잘못된 추측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선은 기독교와 같은 방법으로 신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p370-371) 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p372)

비록 선을 실제로 이해하는 현대인의 수가 얼마 안될지라도, 이 신선하고 매력적인 분위기에 빠져보는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책은 선의 불꽃을 찬란히 이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불교 지혜의 알맹이를 곧바로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p 393)

 







[
내가 저자라면]


책의 전체적인 뼈대는 <()의 불꽃을 이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중국 당나라 시대의 위대한 선사들 - 혜능, 마조, 석두, 남전, 백장, 황벽, 조주 등- 이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던 이야기다. 선에 대하여는 처음 접해본 터라 개념이 없어 초반에는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 찾느라 바빴다. 흐름 자체는 각각 선사들의 이야기라 어려운 이야기 흐름은 아니었지만, 가끔 허무개그 같은 느낌을 받아 우주적인 농담(!)에는 많이 웃을 수는 없었던 점이 아쉽다.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저자는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듣겠지라는 태도였다. 나는 같이 웃자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마 초보자가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동양인이어서 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선사는 가르치는데 능했고, 어떤 선사는 경전을 해석하는데, 어떤 선사는 어느 부분의 깨우치는데, 어느 선사는 말하는데, 어느 선사는 시를 짓는데 능했다는 내용을 보면서 이 세상의 사람들- 과거에 있는 사람이든 현시대를 사는 사람이든- 모든 사람은 결국 다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깨달음 자체가 서로 다르다. 혹 같은 원리를 익히고 깨우친다해도 받아들이는 정도나 해석은 모두 다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난 때가 다르고 장소가 다르고 부모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다. 그들의 귀에 들렸던 말도 모두 다르고, 그들이 본 것도 생각한 것도 모두 다르다. 아무리 같은 가르침을 받아도 그들 마음속에는 각자 다른 해석기가 있는 것이니 이미 모두 다 다른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계관이나 참나에 이르는 방법은 역사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을 거쳐간 사람들 숫자 만큼 존재한다.

 

으로 공통 분모를 가진 사람들의 황금시대를 이룬 당나라 약 3-4백년간은 그 선사들의서로 다른 다양한 세계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시대이다. 어느 정도는 우연이고 어느 정도는 선사들의 지혜가 조화를 이루게 했다. 마치 수억 개의 피스(piece)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그림 맞추기에서, 그림의 한 부분에 속한 수 십 개의 조각들이 자기의 옆, , 아래에 접하는 조각들을 제대로 알아보고 제 빨리 제 자리를 찾아 제법 척척 그림을 이루었다고나 할까. 물론 전체 큰 그림으로 보면 이 부분은 몇 만 분에 일밖에 안 되는 작은 그림이지만 말이다.

각각의 서로 다른 피스 조각처럼 이 세상에 같은 것이 없지만 조화가 가능함을 생각했다.

 

서로 다른 세계관이 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하나의 황금시대를 이룬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또한 모든 독자가 다 다를 것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역시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것 일 텐데,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백장이 모든 승려는 매일 어떤 종류이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청규를 세우고 고령의 나이에도 밭일을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린 사람이었다는 부분이다.
아마도 내가 크리스찬이고 성경의 많은 부분을 쓴 바울(Paul)이 최초의 선교사로서 각지를 돌아다니면 전도할 때에도 천막 짓는 텐트 메이커로서 자비량 선교를 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인상 깊고, 나 또한 내 평생에 걸쳐 자비량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이 부분이 남는 게 아닌가 싶다. 또 대천덕 신부님이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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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1 22:50:40 *.168.110.44
박안나 님의 글에서 저도 공감이 가는 내용들을 볼수 있었습니다.
1.깨달음 자체가 서로 다르다.
2.백장이 얘기한 노동부분이 그것 입니다.

지금 밤이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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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1 23:41:50 *.234.77.178
정말요. 선문답 부분은 해설이 없으면 정말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수가 없죠.
그걸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저희가 도인일테니까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박안나님처럼 깨달음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즉, 진리는 하나여도 진리에 이르는 길은 정말 다양하구나 하는 생각이요.

이제 한주입니다. 화이팅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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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11:46:59 *.78.105.123
안나~라는 이름의 비밀을 알게 되었네요!! 기독교인으로서 禪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조금은 껄끄러울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런 종교적인 장벽이나 편견을 과감히 제껴버리고 있으니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안나님도 다음주에 얼굴 볼 수 있을까요? 이름만큼이나 포근하고 여성스런 분일거란 상상^^ 도전자들의 이름에 떠오르는 그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주일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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