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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23시 03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저자 기록 및 개인적 평가)

John C.H.Wu (오경웅 1899~1986).

비록 우리가 저자의 <선의 시대>라는 책을 읽지만 저자를 특정 종교나 진리에 제한해서 이해하면 엄청난 오해일 수 있음을 저자에 대한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철저한 카톨릭 사람인 동시에 철저한 동양인>으로 불리는 그는 중국, 미국, 프랑스에 거쳐 7개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한 세계적인 석학이기도 하지만,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학문 세계와 더불어 그의 영적 연구 또한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의 학문 세계는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 헌장 구성 등에 참여하거나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 근무하는 등의 업적을 낳았다.

 

한편, 개신교 신자였지만 개신교에서 특별한 내적 끌림을 받지 못했던 그는 1937년 테레서 성녀의 전기를 읽고 그에 감화되어 카톨릭 신자로 개종한다 (흥미로운 건 그의 양력 생일이 테레서 성녀와 같다는 점이다. 본인 스스로도 이 점을 특별한 끌림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법과 카톨릭 사상을 기초로 하는 서구 사상에 노자, 장자 및 불교까지를 넘나드는 동양사상 역시도 깊이 연구한 것에 있다. 그 결과 1949 <동서의 피안>이라는 동서양을 비교 분석한 저서를 세상에 소개하고 있다. 이 책 <선의 황금시대> 1967년 작품으로서, 저자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선불교가 주제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노자와 장자 그리고 간간히 기독교적 사상까지도 베어있는 저자만의 독특함이 베어있는 작품이다.

 

역자 류 시화

저자로서는 소개가 필요 없는 인물이다. 다만 이 책은 저자가 아닌 역자이기 때문에, 번역가로서의 그의 역량은 다음 두 가지 차원에서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선의 황금시대>라는 비교적 영성이 깊은 책을 번역가 스스로 잘 이해하고 소화한 후 번역했을까? 둘째, 그의 번역 실력은 신뢰해도 좋을까?

 

우선 첫번째 의문에 대한 답은 그 자신, 시인이자 명상가로서 1988년 이후 지금까지 인도의 여러 명상센터에 머물며 동양 사상에 빠져 있으며 영성, 그 중에서 동양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나의 경우, 에크하르트 톨레의 <나우>라는 과는 좀 다른 시각에서 진리를 다루고 있는 그의 번역서를 읽었는데, 번역가가 내용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둘째, 그의 번역 실력은 <나우>뿐만이 아니라 <인생수업> 역시 읽었는데, 매끄럽다. 이 때는 번역 수업을 하면서 원문 대조의 기회까지 있었는데 몇몇 유명 소설가들의 번역이 정말 어처구니없는 경우에 비해 류시화씨의 번역은 신뢰할만하다.

 

그럼 저자에 이어, 번역가까지 검증하였으니 이젠 책으로 넘어가보자

 

 

2: 마음에 무찔러 드는 글귀들 (인용문)

 

1. 선의 심지

1-1 선과 도

?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20).

?  스즈끼 다이세츠의 말을 빌리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형태의 선은 일찍이 인도에서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는 선을 깨달음의 교리를 중국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결론내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아주 창조적인 해석이라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21).

?  스즈끼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렇게 해서 현실에 바탕을 둔 중국인의 상상력은 선을 창조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다시 자기네들의 종교적 요구에 알맞도록 최대한 발전시켜 나갔다 (21).

?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 (심재)이나 마음을 잊음 (좌망) 또는 아침처럼 맑음 (조철)에 해당된다. 만일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22).

n  마음을 맑게 함 (심재)

u  예로부터 도를 깨친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을 닦은 후에 남한테로 눈을 돌렸다네. 자기자신이 철저히 도를 깨치지도 못하고서 어찌 남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나아가 자네는 무엇 때문에 세상이 갈수록 덕을 잃고 지능만 발달하는지 알겠나?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 것일세. 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립에서 생긴다네. 그리고 지능이야말로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경쟁의 무기이지. 따라서 둘 다 사악한 흉기일 뿐이며,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못 되지 (23).

u  그러면 마음을 맑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했다. 자네의 기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26).

n  마음을 잊음 (좌망)

u  저는 좌망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놀라 그게 어떤 경지냐고 물었다.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감에서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28).

n  아침처럼 맑음 (조철)

u  “…가르치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잊었소. 계속 가르치면서 지켜보았더니 일주일 후엔 감각과 물질의 세계에서 벗어나더군요. 그러고 나서 9일을 더 가르치면서 지켜보니 생의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났소.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서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야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 같은 경지에 든 사람은 바깥의 대상이 아무리 천만변화를 하더라도 항상 폭넓게 포용하고 반갑게 맞아들이고 또 모든 일에 차별이 없소. 이것이 바로 혼란과 고통 속의 평화라는 것이오. 그것은 바로 완전한 평화가 되려면 혼란과 고통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29~30).

1-2 선의 현대적 가치

?  선이 본격적으로 불지펴지기는 육조 혜능의 손 안에서였다. 그 이후 남악 회양, 청원 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그리고 황벽 희운 등의 천재들이 차례로 그 불꽃을 이어받아 더욱 활활 피워 올리다가 드디어는 다섯 갈래의 불길 (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및 법안종)로 갈라져 새롭고 풍성하게 타올랐다 (36~37).

?  따라서 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37~38).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  도에 들어가는 길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42~43).

n  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43).

n  행위에 의한 입문엔 다음 네 가지 길이 있는데 다른 모든 길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43~46).

u  미움을 넘어서는 길

l  내가 받는 현재의 고통은 비록 이생에서의 내 죄가 없다해도 지나간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의 업보이고 그 업보가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니 그건 신이나 다른 어떤 인간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다. 그들한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

u  삶에 적응하는 길

l  우리는 먼저 일체 중생이 다 업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본래 라는 게 없음을 알아야 한다.

l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u  집착을 버리는 길

l  세상 사람들은 평생동안 어리석음에 빠져 있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에서 집착이 생긴다.

l  그러나 현명한 자는 재물의 부귀 변천에 몸을 맡기면서도 한편으론 탐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현상계의 텅 빔을 항상 의식한다.

u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l  불법의 본질은 더없이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모든 형상 속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말한다. 이 순수한 지성은 밝고 순결하며 물들지 않고 모든 집착을 떠나 있으며 라든가 이라든가 하는 구별이 없다.

?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도 자체에 어려울 게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면/ 는 밝은 대낮처럼 뚜렷하다/ 거죽에서 일어나는 일에 좇아가지 말고/ 안으로는 허무 속에 머물지 말라/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하면/ 모든 티끌 사라져 환히 빛나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 애쓸수록 / 본래의 평화로움이 더더욱 깨지리니 / 이렇게 어느 한쪽에 매달려 있으면 / 어떻게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 너는 나로 인하여 존재하고 /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한다 / 둘 다를 알고자 하는가 / 원래는 깊고 깊은 한 뿌리이다 (51~52).

 

3. 부처의 눈 (혜능)

?  사람이야 남과 북이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 오랑캐의 몸과 스님의 몸이야 다르겠지만 우리가 지닌 불성이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55).

?  본래 맑고 깨끗하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래 나고 죽음이  없거늘, 내 어찌 예상했으리오! 본래 다 갖추어 있거늘, 내 어찌 눈치나 챘으리오! 세상 만법이 다 거기서 나오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61).

?  뜻있는 곳에 씨가 내리어/ 인연 닿는 곳에서 열매를 맺네 / 뜻 없이는 씨도 없으니 / 성품이 없으면 생도 없어라 (61).

?  움직이는 건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63~64).

?  혜능에 의하면 불성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정신과 물질 등을 초월해 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 본질적으로 불성이 둘이 아님의 뜻이다 (64~65).

?  두 선사의 차이점이라 한다면 신수가 점오 (단계적으로 점차 깨닫는 것을)을 가르친 데 반해, 혜능은 돈오 (단번에 깨닫는 것)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66).

?  신수가 강조한 계, , 는 원래 <법구경>에 나오는 아래의 유명한 귀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악한 짓을 하지 말며/ 선한 일을 하여 /스스로 마음을 맑게 하는 것 / 이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 (66).

?  신수에게는 불교의 모든 정신이 다 여기에 들어 있다. 왜냐하면 계란 곧 악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혜란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정이란 자기 마음을 맑게 하라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뜻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신수가 말한 점오의 세 단계이다 (66).

?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이른바 계, , 혜라고 하는 것들은 단지 참본서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 , 혜는 정신 생활의 세 단계라기 보다는 참본성이라는 지혜의 샘에서 흘러넘치는 샘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깨달음에 달려 있다. 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66~67).

?  혜능의 직계 제자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는 자는 불과 다섯 정도 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67~75).

n  첫째는 남악 회양 (677~744) 이다.

n  회양에 버금가는 인물로 청원 행사 (?~740)가 있다.

n  혜능의 또다른 비범한 제자는 영가 현각 (665~713)이다.

n  남양 혜충 (677~775) 역시 어느 기록에나 혜능의 다섯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u  나는 대 당나라의 황제요! 국사가 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어이된 일이오? 혜충이 되물었다. 황제께선 텅 빈 허공을 보십니까? 그렇고. 그러면 허공이 황제께 눈짓이나 보내던가요? 이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71).

u  선의 통찰력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치는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베는 것과 같다 (72).

n  다섯 제자 중 마지막 사람은 하택 신회 (670~758)이다.

u  순간적인 깨달음 (돈오)을 강조하는 남쪽의 선종이 점진적인 깨달음 (점오)을 주장하는 북쪽의 선종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이 사람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과 용기 덕분이었다 (72).

u  오직 신회만이 좋은 일 궂은 일을 떠나 버렸구나. 그만이 명예, 불명예 아랑곳 않고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구나. 나머지 모두 그렇지 못하니 산속에 그토록 오래 처박혀 있으면서 대체 무슨 도를 닦았느냐? 지금 너희들이 슬피 우는 건 누구를 걱정해서 그러는거냐?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해 걱정들 하는 거냐? 걱정들을 마라. 나는 내가 갈 곳을 잘 알고 있다. 만약 스스로 갈 곳을 모른다면 미리 너희들에게 알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너희들이 슬퍼하는 까닭은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안다면 슬퍼할 리 없다.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 감도 없는 것이다 (74~75).

u  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 (75).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사구게: 혜능의 가르침)

4-1. 교외별전 (경전 밖에서 따로 전하여)

?  이것은 이라든가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든 뜻이다 (78).

?  직접 물을 마셔 보고야 찬지 더운지를 알 듯 진리의 깨달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78).

?  머리의 지성 하나만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일반 기술 지식과는 달리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79).

4-2. 불립문자 (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  이 귀절 전체의 의미는 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81).

?  <불립문자>란 결국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문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완전히 부적당하는 뜻은 아니다 (82).

?  참본성은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대문이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으로, 말해야 할 때는 말로 언제고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한 순간도 참본성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경지가 바로 견성이다 (82).

4-3.  직지인심 (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가리켜)

?  마음이야말로 선의 열쇠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가 없다. 선의 궁극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82).

?  참본성이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쓰라. 곧 성불할 것이다 (82).

?  이처럼 마음의 힘은 무한히 크다. 자아 실현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참 나로 돌아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다. 마음이 없다면 선도 악도 없으며, 집착도 초월도 없고, 깨달음과 어리석음도, 열반도 번뇌도 없다 (83).

?  그렇다고해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84).

?  혜능이 말하는 무념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 없이 쓰는 걸 뜻한다. 무념을 아무 생각도 안 한다거나 모든 사상을 끊어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절대 안 된다. 그렇게되면 또다시 라는 말의 덫에 덜커덕 걸리고 만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말과 문자에만 집착하는 마음은 세상 만 가지 일을 순식간에 수갑과 밧줄로 둔갑시킨다 (84~85).

?  인생 최대의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이다 (86).

?  바깥 세상에 집착하면 바다에 파도가 일 듯 생과 사의 현상이 일어난다. 바깥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87).

?  혜능은 다른 도가 사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선행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악을 초월해야 한다는 이러한 사상은 노자의 잠언에 비추어 보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87).

?  높은 덕은 스스로 덕답지 않기 때문에 덕이 되는 것이요/ 낮은 덕은 스스로 덕다우려 하기 때문에 덕이 아니다 (87).

?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선행까지도 포함하여 일체 만물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무집착에 집착할 것인가, 또는 무집착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날 것인가에 있다 (87).

?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혜능의 대답은 불교 문헌 전부를 통틀어 최고봉임을 자랑하는 <단경>의 다음 아름다운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n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깍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넗혀라.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라든가 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없는 그대의 참마음을 바로 보리라 (87~88).

4-4. 견성성불 (본성을 꿰뚫고 부처를 이룬다)

?  혜능에게 있어 견성은 곧 성불이다. 실제로 그는 우리의 본성이 바로 부처요, 이 본성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라고 말했다 (88).

?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와 모든 경전이 본래 이 참본성 속에 갖추어져 있다 (88).

?  세 가지 보물에 관한 그의 사상은 무척 흥미롭다. 전통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신도는 부처님 ()과 그의 가르침 (), 그리고 그 조직체 ()라는 삼보에 귀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혜능은 깨달음과 올바름, 그리고 깨끗함에 귀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혁명적 해석이었다 (89).

?  혜능에게 있어서는 인도의 철학자 샹카라 (788-820)와 마찬가지로 절대란 그 앞에서  모든 언어가 잔뜩 주눅이 드는 초월의 세계다 (89).

?  신비가가 자신을 표현코자 할 때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마치 목마르고 눈 먼 사자들이 사막에서 샘물을 찾아 미친 듯이 사방을 헤매는 것과 흡사하다 (90).

?  중종 황제가 특사로 보낸 설간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혜능은 참본성의 절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90).

n  밝음과 어둠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개의 다른 현상으로 비치지만 지혜있는 이는 그것들이 본래 둘이 아님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이 차별없는 본성이 바로 참본성이다. 참본성이라는 것은 바보라고 해서 적게 갖지도 않았고 현자라 해서 많이 갖지도 않았다. 그것은 번뇌 속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아니하며 깊은 삼매경 속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거죽으로 나타남은 이 같은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경지에 있으며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은 라 부른다 (90).

?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선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뱀이 되고 자비와 연민을 품으면 보살이 된다.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깥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며 동시에 악한 마음에 머물러 있다. 이래서는 영원히 진리를 깨치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한 순간이나마 좋은 일쪽으로 돌린다면 당장 반야 (지혜)가 일어나 이른바 자성화신불이 된다 (92).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마조)

?  소달구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하겠는가 소를 채찍질하겠는가? 마조는 그만 말이 막혔다. 회양이 계속해서 말했다. 앉아서 명상하면서 너는 참선을 하려는 거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를 흉내내려는 거냐? 만일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를 볼 수가 없다 (99).

?  도는 형체와 색깔을 초월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본단 말입니까? 네가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상삼매에 드는 일이다. 도는 부수거나 다시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스승 회향이 대답했다. 만일 도를 만든다거나 허문다거나, 모인다거나 흩어진다는 관점에서 다가가면 그 사람은 절대 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100).

?  현상이 모두 텅 비어 있으니 삶은 곧 삶이 아니다. 이 뜻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 속 성스러운 태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해 갈 것이니 이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100)?

?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신이 응당 받아야 할 상이지만, 먹고 마시는 걸 절재하면 당신은 복을 쌓게 됩니다 (111).

?  우주 만물과 벗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때 석두는 즉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로써 방은은 선의 경지를 약간 깨닫게 되었다. 후에 그는 마조를 찾아가 똑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마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한강의 물을 단숨에 마셔 버린다면 말해 주겠다. 이 말에 방은은 철저히 깨쳤다. 사실상 이 위대한 두 선사 즉 석두와 마조는 같은 의견이었다. 손으로 입을 가림으로써 석두는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표시했으며 마찬가지로 마조가 말하려는 의도도 한강물을 한 입에 마시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그 초월적인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115).

?  만물에는 앞서갈 때와 따라갈 때가 있고/ 천천히 숨쉴 때와 급히 숨쉴 때가 있으며/ 무성할 때와 시들 때가 있고 / 일어날 때와 누울 때가 있다 (118).

?  해 같은 모습의 부처님, 달 같은 모습의 부처님! 불교에선 해 같은 모습의 부처님은 대단히 오래 산다는 뜻이고 달 같은 모습의 부처님은 겨우 하루 낮 하룻밤 밖에 못 산다는 뜻이다. 따라서 아마도 마조가 말하려 했던 것은 사람이 참본성을 보고나면 장수하든 단명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리라 (119).

 

6. 선악을 넘어서 (백장과 황벽)

?  본래 인도에선 승려들이 농사짓는 것을 금지했다. 땅을 파고 갈면서 혹시나 벌레와 곤충을 다치거나 죽이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이런 제도는 인도처럼 풍부한 야자 같은 열매만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는 열대지방에선 적합할는지 모른다. 백장의 현실적인 분별력은 시주에만 완전히 의존하는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122~123).

?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그의 좌우명은 이제 모든 종파의 승려들 사이에 잘 알려진 금언이 되었다 (123).

?  백장의 이러한 건전한 개혁이 훗날 역사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지니리라곤 백장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814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약 30년 후 불교는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일대 재난을 맞이했다. 이 재난으로 인한 파괴는 그 이후 두 번 다시 원래대로 회복되지 못했다. 814년에서 847년까지 집권한 당무종의 불교 탄압 사건이 그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탄압의 주요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에 있었다 (123~124).

?  그러나 불교의 여러 종파 중 유독 선종만이 기적적으로 이 대 재난을 면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1247~125).

n  첫째, 선종은 불상이나 경전과 같은 종교의 외적 부속품에 의존하지 않고 수도 생활을 해나갔다. 따라서 그것들이 파괴된 다음에도 능히 독립하여 존속할 수 있었다.

n  둘째, 선종은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선종의 중요한 청규 중의 하나가 모든 승려는 매일 어떤 종류이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노동에 대한 그의 주장 속엔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 운명에 참여한다는 속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125).

?  저는 사실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 옛날 마하가섭 존자 시대 때 저는 이 산의 주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제자가 수행을 높이 쌓은 자도 여전히 인과 법칙의 지배를 받느냐고 묻길래 나는 그런 사람은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대답 한 번 잘못한 죄로 저는 여우가 되어 오백 년을 살아왔습니다. 청컨데 저로 하여금 여우의 탈을 벗도록 스승께서 올바른 대답을 해 주십시오. 백장이 말했다. 그대가 질문하면 내 대답해 드리리다. 노인은 옛날의 그 제자가 했던 질문을 반복하였다. 이에 백장이 대답했다.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 (125~126).

?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 도는 이 양자를 초월하며 동시에 둘 다를 포함한다 (127).

?  한번은 중 하나가 백장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백장이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서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얾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128~129).

?  황벽은 궁극의 실체를 마음 즉 일심으로 보았다. 이 마음이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창조하며 진정한 지혜의 원천이다. 이러한 살아있는 지혜의 샘을 속안에 지니고 있으나 우리의 마음이 바깥 대상에만 눈을 돌리고 우리의 정신이 이리저리 나누고 판단내리기에 바쁘다보니 결국 얕은 나라는 분별의식의 그물에 걸려 스스로 정신과 의식을 묶어 버린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속안의 지혜의 샘은 마셔 보지도 못하고 메말라 버린다 (130).

?  황백은 말한다. 만일 구도자가 이 큰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이 마음을 떠나 다른 얕은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현상과 수행에만 얽매이기 쉽다. 이것은 죄다 악법이지 지혜로운 도가 아니다. 아무리 천지사방 부처들에게 공양한다 해도 한 사람의 무심도인을 따르니만 못하다 (130).

?  황벽이 말하는 일심은 흔히들 말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고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하는 분별심을 떠나 있는 마음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선한 업을 쌓건 악한 업을 쌓건 똑같이 현상에 집착한 것이다. 사실상 참마음이란 바로 우리 속안에 있는 본래의 불성이다.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일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일이다 (130~131).

?  이 불성, 이 큰 마음은 텅빈 충만이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만물에 편재해 있다. 굳이 표현한다면 영광되고 신비한 평화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깨쳐 알아 그 진면목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131).

?  이렇게 영적으로 깨쳐 안 마음은 텅 빈 허공과 같아 시작도 끝도 없고, 생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고,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으며, 젊거나 늙지도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또한 크기도 형상도 없으며 색깔도 소리도 없다 (131).

?  간단히 말해 일심은 상대 관념들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 ? 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스승의 언어와 행동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 그대의 직관 ?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쯤 될 때 그대와 스승 사이에는 말을 떠나 침묵으로 오가는 이해가 생겨난다. 이것이 이른바 이심전심이다 (131).

?  그는 상황이 오면 선을 베풀지만 그럴 기회가 아니면 본래대로 조용히 있을 것이다. 선행을 베품에 있어서도 그는 절대 으시대거나 보답을 원치 않는다. 그는 참본성이 본래 가득 차 있어 부족함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131~132).

?  육바라밀이나 기타 수많은 선행을 쌓아 성불코자 하는 것은 단계적으로 영적 진화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존재해 온 마음 속 참 부처는 절대로 단계적인 부처가 아니다. 오직 큰 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취해야 할 게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 부처이다. 왜냐하면 부처나 중생이나 큰 마음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132).

?  세상사 털어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밧줄 끝을 단단히 잡고 / 온 힘을 쏟아 버려라/ 뼈속 깊이 스며드는 / 추위를 겪지 않고서 / 어찌 매화 향기가 /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 (137).

?  나의 인상으로는 위대한 선사들에게는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의 커다란 공안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참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공안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삶을 누리는 사람한테는 가장 평범한 일이 기적 중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중이 백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어냐고 묻자 백장은 당장에 대답했다.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137).

?  욕심의 샘이 깊으면 천상의 샘이 말라간다 (138).

 

7. 뜰 앞의 잣나무 (조주)

?  한 번은 조주가 스승에게 도가 무엇이냐고 묻자 남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심이 곧 이다. 조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142).

?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걸 뜻한다 (144).

?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156).

?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게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157)

?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을 말하면 사악한 법까지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까지도 사악해진다 (164).

?  어느 장례행렬에서: 제자 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조주도 장례행렬에 끼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가는군! (167).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천황도오/용담숭신/덕산선감/암두전활과 설봉의존)

?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174).

?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용담은 마음 문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어찌하면 이 깨달음의 경지를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까? 도오가 대답했다. 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 (174).

?  엉킨 머리카락 속의 진주를 누가 차지하겠습니까? 이 말은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진주와 같이 현상계에 숨겨진 최고의 지혜를 가리킨 말이다. 용담이 대답했다.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지 (174~175).

 

9. 감추어진 불씨 (위산 영우)

?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의 마음이요, 자신의 부처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얘기다. 마치 검댕이를 갖고 마음밭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내가 그것을 도라 여기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90~191).

?  위앙종의 또 다른 공헌으로는 한편으론 돈오의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 점수의 필요성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걸 들 수 있다 (193).

?  한번은 어떤 중이 위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돈오 (즉 깨달은 뒤에도) 한 뒤에도 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까?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위산의 대답은 돈오와 점수의 조화에 관한 법문이 되었으며, 이후 불교 철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 원칙으로 통용되었다 (193~194).

n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 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초심자가 인연이 닿아 그 자리서 돈오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단번에 청산할 수 없는 태초 이래로 빚어온 타성의 찌거기가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전생이 업이나 인과응보로 인해 일어나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특별히 엄격한 방법을 따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으나 다만 수행해 나갈 일반적 방향만 잡으면 된다. 들은 바를 우선 이성에 의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합리적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섬세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원숙하고 밝아져 의혹이나 미망의 상태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n  오묘한 가르침이 제아무리 많고 다양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은 물리치고 어떤 것은 펴는 활용방법을 직관적으로 터득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대는 비로소 진정 슬기로운 생활인으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건데 만 가지 행위의 여러 문과 길에는 단 하나의 법도 버릴 게 없으며, 실제의 궁극적 이치는 한 점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리고 만일, 잔말은 다 집어치우고 단칼에 돌입할 수 있다면 성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의 구별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대의 전 존재는 그 본래 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이치와 구체적 사물이 둘이 아닌 경지, 바로 있는 그대로의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  어떠한 철학이든 그 근본 이념은 비교적 간단하고 분명하나, 다만 이를 전달해 주는 말이 악마다. 만일 우리가 말이 악마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동서의 어떤 책을 읽더라도 언어와 관념의 그물에 붙잡힘없이 독서를 즐길 수 있으리라 (197).

?  다음에 인용하는 다소 긴 그(위산)의 가르침은 가히 위앙종의 사상을 간단히 축소시켜 놓은 것이라 할 만하다 (201~202).

n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보라. 지난간 억겁의 세월 동안 그대들은 빛을 등지고 어둠만을 따라다녔다. 그러니 망상과 어리석음의 뿌리가 너무 깊어 하룻밤 사이에 뿌리뽑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때문에 그 잘못된 사념들을 날려 보내기 위해 임시로 방편에 의지하는 것이다.

n  내가 만일 선의 정수만을 이야기 한다면 단 한 사람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오백, 칠백이 대중이 어디 있겠느냐. 반면에 내가 이것저것 들추어 말한다면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와 한마디라도 빠드릴세라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n  , 이제 분명히 그대들에게 말하지만, 거룩한 일들에만 마음을 쓰려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초능력이니 신비술이니 하는 것에 빠져들지 말라. 이것들은 전부 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미 그 뿌리에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머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갖출 수가 없다.

 

10. 집으로 돌아가라 (동산 양개)

?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그는 바로 나이지만 /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 이것을 깨달아야 /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207).

?  여기서 말하는 본래의 얼굴이란 한자의 여여와 같은 말로서 산스크리티어의 진여 즉 부타타다타와도 같은 뜻이다. 아울러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히 있는 그대로인 것으로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영원한 도, 구약 성서의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힌두교의 (브라마)에 해당한다 (207~208).

?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나, 가 아니다. 이것은 신은 나보다 더 진정한 이지만 나는 신이 아닌 것과 같다. 나와 그와의 관계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작은 나큰 나의 관계, 그리고 <도덕경>에서 말하는 참사람영원한 도의 관계와 같다 (208).

?  부처라는 것은 모두 이름과 문자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대는 참된 가르침에 몸바치지 않는가? 이에 초가 물었다. 참된 가르침은 어떤 것입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209).

?  동산이나 조동종의 사상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른바 다섯 단계의 왕과 신하- 오위군신이라는 원리와 마주치게 된다. 이 교리는 결코 조동종의 중심 사상이 아니고, 다만 아직 아랫 단계에 있는 제자들을 이끌어 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213~218).

n  첫 번째 단계: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정중편)

?  이 단계에서는 제자들은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하는 본체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현상에만 눈이 팔려 있다.

?  누구든지 현상을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면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큰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대상 속에 숨은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의 첫 걸음이다.

n  두 번째 단계: 본체로 돌아감 (편중편)

?  이 단계에서 우리는 현상에서 본체로 다가간다. 이른바 구심 운동이다.

n  세 번째 단계: 본체로부터 돌아옴 (정중래)

?  두 번째 단계에서 이미 깨달았으므로 이때부터 그는 본래의 자기 즉 참사람이며, 자유인이고, 주인이며, 왕이다.

?  이 본체인은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중생을 위해 일하고 가르칠 의무가 있다.

?  훌륭한 스승에겐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즉 제자들이 갖고 있는 숨은 힘을 일깨워 그들 스스로 자기가 누군지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n  네 번째 단계: 본체와 현상이 함께 함 (겸중지)

?  깨달은 사람이 현상계로 돌아오면 그 전단계 때보다 더욱 자유 자재함을 느끼며, 마침내 번뇌가 곧 열반임을 깨닫는다.

n  다서 번째 단계: 최고의 조화를 이룸 (겸중도)

?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본체와 현상이 서로 녹아들어 한덩어리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  앞 단계에서 그는 영웅적이었지만 이 단계에서는 지상에서 낙원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곧 임을 알게 되는 경지이다.

 

11. 차별없는 참사람 (임제 의현)

?  모든 계율이나 종교의식이나 경전들이란 병자를 고치려는 약처방처럼 단지 속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그 모든 방편들을 죄다 던져 버리고 직접 진리와 맞부딪혔다 (238).

?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게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238).

?  인간이 자신을 일시적인 한 개체로만 생각하는 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노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속안의 참사람을 깨닫고 나면 그는 비로소 눈을 뜨고 자유자재하게 된다 (239).

?  우리를 본래의 자신과 갈라 놓고 있는 그 심연도 건너지 못하면서 달에는 건너가서 무엇하리오! (245).

?  어떤 일에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귀인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246).

?  우리는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다. 그러나 억지로 있는 그대로이니 체하고 억지로 독창적이려 한다면 진짜 독창성은 사라지고 본래 면목을 잃고 만다 (246~247).

?  (임제)의 철학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도가 사상과 불교의 색채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50~251).

n  진정한 구도자는 부처도, 보살도, 나한도,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에서의 어떠한 영광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의연히 이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기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n  어떻게 해서 그는 이다지도 태연자약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세상 만 가지 사물을 구성하는 공의 원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n  과거, 현재, 미래는 다만 마음의 작용일 뿐이고 세상 만물도 다 알음알이에서 일어난 것 뿐이다.

n  번뇌는 바로 사념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는다면 번뇌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으리오?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12. 날마다 좋은 날 (운문 문언)

?  다른 것은 다 제쳐 놓고 오로지 영원한 도에만 관심이 있었던만큼 말이란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259).

?  다음의 설법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266~267).

n  만일 그대들이 여기서 더 나아가 언어와 문자를 따지면서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애쓰고, 머리로는 천차만별의 복잡한 분별을 지어내며 끝없는 논란을 일삼는다면 거기서 얻는 것은 수다떠는 일 뿐이다.

n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일이다.

?  선종의 다섯 종파에서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신 생활에서는 궁극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즉 비록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해도 평지로 내려오는 행위를 통해 더 높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피안에 이르렀다 해도 차안으로 되돌아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과거에 얻은 은폐된 내면생활의 습관들을 모두 털어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다.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파도를 타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 그 속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다 (275).

?  그는 또 자신이나 남의 생존 요구에 부응하는 일체의 생산활동은 실상과 조금도 위배되지 않는다 <법화경>의 말을 인용하면서 출가하든 안하든 자신의 참본성을 본다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확신시켰다. 물론 생활환경이 다름에 따라 각자의 의무도 달라지지만 누구나 현실에 발을 딛고 꾸준히 자기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한다. 환상이나 공허한 생각들에 몰두하느니 보다는 이러한 생활이 훨씬 현명한 것이다 (276).

?  이렇듯 운문은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참본성으로 돌아가는데에 있기 때문이다 (276).

?  일단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276).

?  하루는 제자가 운문에게 물었다. 무엇이 저의 참나입니까?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자아지. 이것은 질문한 제자의 마음상태를 묘사한 것이라기 보다는 운문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 속 풍경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사실상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이라고 한 말이다 (277).

 

13. 지금 여기 (법안 문익)

?  예를 들면 <화엄경>에 이런 귀절이 있다: 부처의 몸이 우주에 충만하여 / 온갖 중생에게 모습을 나타낸다/ 일일이 인연따라 소원과 요구에 답하나 / 언제나 진리의 자릴 떠나는 법이 없다 (281~282).

?  이러한 명상적 관조는 법안종에 흡수되어 그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즉 관심의 초점을 속안의 참나에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신비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282).

?  법안에게 있어서는 부처란 궁극적인 게 아니고 방편상 만들어진 하나의 명칭일 뿐이다 (286).

?  법안은 비록 놀랍도록 박식하고 전통적인 경전 가르침들에 정통하였지만 결코 학문이나 책에서 얻은 지식이 노예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맷돌로 콩을 갈 듯 모든 지식을 자신의 마음의 맷돌에 갈아 잘게 소화했던 것 같다. 또 옛 선인들의 말을 종종 인용하였으나 어떤 말이든 철저히 육화되어 그의 입술에서 흘러 나왔다. 그는 절대로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일이 없었으며,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참나를 발견하고 나아가 말과 관념을 초월한 영원불변의 도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287~287).

?  비극은 선이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수행절차와 결합하면 선은 그 당장에 독자적 성격을 잃어 버리고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 있다 (294).

 

14. 선의 불꽃

14-1. 시간과 영원 (300)

?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이다. 왜냐하면 하루하루가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느님이다 (300).

14-4. 놀림 당하는 재미 (301~302)

?   나한테 반짝이는 구술 하나 있었으나 / 오랫동안 먼지에 싸여 있었네 / 오늘에야 먼지 닦아 빛을 발하니 / 온갖 산하를 두루 비치네

14-7. 향상일로 (305~307)

?  향상일로란 어떤 겁니까? 계성이 대답했다. 아래로 내려오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걸세. 이 대화는 십자가의 성요한이 쓴 글을 생각나게 한다.

?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 나는 높이높이 올라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노자는 또 어떤가? 성인은 모으려 하지 않는다 / 남을 위해 살수록 그의 삶은 더욱 풍요롭다 /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라는 게 없을 때 / 오히려 를 실현할 수 있다.

?  결국 노자의 말마따나 자신이 모른다는 걸 아는 것이 최고의 앎이다.

14-8. 벙어리 (307)

?  깨달았으나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요? 거야 꿀먹은 벙어리와 같지. 깨닫지는 못했으면서 청산유수같이 말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거야 사람들 이름을 외우는 앵무새지.

14-11. 잃어버린 나 (311)

?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14-13. 하느님 역할을 하는 것과 하느님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 (312~313)

?  엘리드는 선의 정신은 하느님 역할을 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이란 숨겨져 있던 큰 나가 드러나면서 거죽의 작은 나가 사라지는 일이다.

?  이러한 경지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으나 토마스 머튼이 아름답게 번역한 <장자>의 다음 귀절에서 그러한 경지를 조금이나마 맛 볼 수 있다: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 연못의 깊은 그늘을 찾으면/ 그저 만족스럽다 / 에서 난 사람은 / 다툼과 근심을 모두 잊으면 / 그의 삶은 그저 편안하다 / 그래서 말하노니/ 물고기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 물 속에 잠기는 일 / 사람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 에 깊이 침잠하는 일

14-16. 선의 형이상학적 배경 (317~319)

?  선은 비록 그 대부분이 애매모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형이상학적 기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형이상학의 진수는 <도덕경> 첫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는 영원한 가 아니요 / 이름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그것이 천지에 앞서 있기 때문이요/ 굳이 이름붙인다면 만물의 어머니라 하겠다 / 본체에 있어서는 형태없는 이나/ 그 현상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본체와 현상은 이름은 다르나 본래 한 물건이다 / 이것이 소위 신비의 합일이며 / 이 신비 속에 진리로 통하는 문이 있다.

?  이 부분에 대한 선의 해석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n  첫째, 는 근본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무엇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말이든 다소간 곡예라고 할 수 있다. 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성질의 물건이 아니다. 모든 사람 각자가 스스로 직관을 통해 찾아야 한다. 따라서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은 를 사람들에게 떠먹여 주는 게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자고 있는 직관을 일깨우는 일 뿐이다.

n  둘째, 는 이름이라든가 이름이 없다든가 하는 걸 초월해 있다.

n  셋째, 는 본체와 현상 모두를 포함한다.

n  넷째, 는 신비 중의 신비이기 때문에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고 덤벼야 아주 무모한 짓일 뿐이다.

n  우리 존재의 중심에 문이 하나 열린다. 우리는 그 문을 지나 무한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린다. 비록 그 심연이 무한하기 하나 우리는 그 깊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이 평온하고 잔잔한 접근을 통해 온 영원이 우리 것이 된다.

14-17. 나귀 타기 (319~321)

?  불안 선사라고도 부르는 청원은 선 수행엔 두 가지 병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이요, 또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으려 하는 병이다

n  자기가 올라타고 있는 나귀를 찾는 어리석음은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n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원인이 바로 이렇게 방향 설정을 잘못한 데서 있음은 두 말해서 무엇하랴.

n  비극은 그 낙원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낙원을 찾으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낙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n  두 번째 병은 훨씬 치료하기가 까다로운 병이다. 물론 이번엔 더 이상 밖에서 찾지 않았다. 그대는 자신이 나귀를 타고 있음을 안다. 그대는 이미 밖에서 얻는 그 어떤 쾌락보다도 무한히 감미로운 속안의 평화를 맛보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또다시 몽땅 잃고 만다. 가장 큰 위험이다.

?  명상에서 영혼의 위치는 낙원에 있는 아담과 이브의 입장과 같다. 모든 것이 다 그대의 것이다. 단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조건 위에서만 그렇다. 즉 모든 것은 주어진 것이다.

?  그대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요구할 것도, 그대가 가질 수 있는 것도 없다. 마치 자신의 것이기나 한 듯 무엇을 가져가려 하면 그 순간 그대는 에덴 동산을 잃고 만다.

?  여기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진주는 그것을 탐내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고 말한 용담 숭신의 심오한 통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아예 나귀 탈 생각을 버려라. 그대 자신이 곧 나귀요, 온 세상이 또한 나귀다. 그러니 새삼 나귀를 탄다고 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그대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14-18. 숨겨진 것의 중요성

?  일체의 번뇌와 업장은 본래 없는 것이며, 일체의 인과도 꿈이요 환상이다. 사실상 피해야 할 과거, 현재, 미래도 없고 추구해야 할 열반의 세계도 없다.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모든 존재는 차별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모두 한 우주에 속한다 (324~325).

?  그대가 할 일은 오로지 마음을 자유자재하게 쓰는 일이다. 그 마음을 맑게 한답시고 일부러 애쓰지 말고 명상이나 작위로 마음을 붙들려 하지 말라. 욕망이나 분노를 일으키지도 말고, 근심이나 걱정을 품지도 말며, 있는 그대로 행하되 애써 선을 행하거나 악이라 하여 피하려 애쓰지 말라. 길을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간에 부처의 놀라운 능력을 매순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항상 즐거워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부처되는 길이다 (325).

 

14-20. 자기 발견의 로맨스

?  나에게 있어 성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되는 걸 뜻한다. 따라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참나를 되찾는 문제이다 (330).

?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인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331).

 

14-21. 홀로 걷는 길

?  뭇 성현들을 따라다니며 해탈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억겁의 세월을 바다 밑바닥에 처박혀 있겠다! 이것은 오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지혜다. 바깥의 어떤 힘에 의해서도 해탈은 얻어지지 않는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진리는 그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332).

?  선사들은 대장부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또한 깨달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런 시련과 견디기 어려운 고난, 죽음과 같은 고독, 질식할 듯한 의혹, 고뇌에 찬 유혹의 관문들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까지 전심전력을 기울여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잠시도 방심하지 않는다 (332~333).

 

14-22. 스승의 역할

?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스승이 그대에게 무엇을 떠먹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은 그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334).

 

14-26. 한산과 습득

?  이 시에서 주목되는 점은 은자들조차도 ? 한산과 습득은 가장 이름 높은 은자들이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마음의 길벗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철저히 인간적인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344).

?  한산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그가 습득보다 더 인간적임을 알게 된다. 그에겐 짙은 고독과 향수에 빠지는 순간이 이따금 찾아왔다. 그는 솔직히 고백한다: 혼자 앉아 있노라면 때로 / 슬픔과 불안이 엄습한다 (344~345).

 

14-29. 깨달음의 계기

?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 (352).

?  하느님 섬기는 일에 심취된 사람들은 / 물방아 돌아가는 소리에도 황홀경에 빠진다 (352).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날은 날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일러 줍니다 (353).

 

14-30. 날마다 좋은 날

?  오늘로 나 (교황 요한 23)는 벌써 여든 두 살이다. 이 해를 과연 넘길 수 있을까? 어느 날이고 다 태어나기 딱 좋은 알이고, 어느 날이고 다 죽기 딱 좋은 날이다. 죽기 전 날 친구들이 눈물 흘리는 걸 보고 그는 성모 마리아 찬가를 불러달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힘을 내! 지금은 눈물 흘릴 때가 아닐세. 지금은 기뻐하고 찬미할 순간이야! 그러면서 그는 옆에 서 있는 의사를 위로했다. 박사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행 가방은 벌써 꾸려 놓았습니다. 떠날 순간이 오면 머뭇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354~355).

?  임종 두 시간 전 아내는 의사 프란시스 자니 박사와 함께 옆에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아들 빈센트를 불러 이렇게 속삭였다. 의사 선생님이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몹시 피곤할 테니 의자를 갖다 드려라. (355).

?  그 때 문득 아이들이 나를 불렀다. 어머님께서 아버님께 말씀하고 싶어하세요! 눈을 아내에게로 돌리자마자 아내는 몸을 약간 일으키며 내 손을 붙잡고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천상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이 말에 내 영혼은 드높이 날아올라 나는 슬픔조차도 잊었다 (356).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  실제로 우리는 선이 담고 있는 불교의 형이상학을 간파하지 않고서는 동양의 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의 형이상학 자체는 우리의 철학이나 신학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교리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불교 철학은 인간 개개인의 체험에 대한 해석이긴 하지만 신에 의해 계시되는 것도, 신성의 빛에 의해 밝히 드러나거나 영감을 받는 것도 아니다 (371).

?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전혀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 줄 뿐이다. 이 내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복잡한 체계로 발전해 일종의 기본 논리를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바로 삶 자체이다 (371~372).

?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372).

?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아니면 그렇게 분별하고 나눠 놓는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깨쳐 아는 일이다 (373).

?  개개인의 체험은 이렇듯 불교 철학의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경험 내지는 체험주의다 (373).

?  선은 일종의 확실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논리적인 확실성도 아니고, 더구나 맹목적인 신앙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종교적 확실성도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 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 불교의 목적은 이러한 통찰력이 생길 때까지 의식을 맑게 하는 데에 있다 (374).

?  선을 포함하는 대승불교의 전통에서는 인간 숙명에 대한 통찰이 주로 연민이나 자비로 표현된다 (374).

?  즉 보살들은 고통스러운 현상계로부터의 도피를 즐기는 대신에 현상계 안에 머물면서 그곳이 곧 열반임을 발견한다. 현상과 본체를 하나로 보는 형이상학적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탄생과 죽음의 굴레에 갇혀 고통받는 모든 중생드르을 부처와 동일시하는 자비로운 사랑이 큰 역할을 한다 (374).

?  그들()이 강조한 자율은 선사들이 사용한 방법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이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갖가지 권이있는 수련을 다하고 난 후에 궁극적으로 겸허하게 내적 자유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383).

 

3: 내가 저자라면 (주제 및 주제구성 / 감동적인 장절들 / 보완점 평설)

 

3-1. 주제 및 주제 구성

이 책의 주제는 당나라 시대 위대한 선사들의 삶을 통해 바라보는 이야기다. 즉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광활한 선의 세계에 빠져들어 현실의 버거움을 잠시 내려놓을 수만 있어도 이 책의 주제는 구성과 무관하게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는 사상서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주제를 전달하는 구성에서 그다지 막힘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문자로 내 앞에 다가오며 나를 좀 더 광활한 우주로 끌어가 또 다른 세계에 침잠하게 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몰입을 하다가도 어딘가에 걸리기도 하고, 집중을 하다가도 불현듯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단지 나 하나만은 아니었을거란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아무리 이 책이 이라는 오묘한 세계를 다루는 책이라 해도, 구성에서 한 두 가지 좀 더 세밀하게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선에 대해 아무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들까지도 좀 더 편안하게 선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 때문인 것 같다.

 

초보 독자들을 위해 한 두가지 구성에서 좀 더 세밀하게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가 생각하는 구성 상의 두 가지 아쉬움이었다.

 

첫째, 저자는 <지은이의 말>에서 불교가 중국에 소개된 것이 6세기 경 보리달마에 의해서이고 9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불길이 사그라들기 시작한다고 밝히고 있다. 왜 였을까? 역사적으로 새로운 종교가 한 민족 혹은 국가에 전파되고 뿌리내릴 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역사적 이유 혹은 배경이 있다.  비록 저자가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간략하게나마 앞부분에 당나라에서 선불교가 융성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더라면 일반 독자들도 그 시대적 배경과 자신을 비교하며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둘째, 목차만 놓고 이 책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저자가 위대한 선사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목차부터도 그야말로 선문답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는데, 책을 읽다 보면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오롯이 선의 세계에만 빠져들기 어렵다.

 

1)    저자 자신의 제한적 문제가 있다: 서구 법 철학과 카톨릭 사상의 배경을 갖고 있으며 동양의 노자, 장자 사상에도 조예가 깊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도 끊임없이 노자와 장자 이야기를 끌어내는데, 때로는 그 이야기들이 역으로 오롯이 선에 빠져들지 못하게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보완점 평설 부분에서 좀 더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2)    목차의 구성이 과연 어떤 흐름에 따른건지 명확하지 않아 14쪽의 도표를 뒤적이며 흐름을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오히려 더 혼란스러운 부분이 생겨났다. 가령, 6 7장의 경우는 마조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다, 8장에선 석두의 제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9장에선 다시 마조의 제자, 위산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식이다. 물론 선맥이란 것이 한 제자라 할지라도 마조에게도 영향을 받고 석두에게도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기에 명확하게 구분을 지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뿐만 아니라, 본문이 끝난 뒤, <어떤 만남>을 읽다보면 저자가 스즈끼 선생에게 쓴 편지에서, 8. 위앙종의 창시자 위산 영우, 9.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 의현, 10장 조동종의 창시자 동산 양개, 하는 식으로 8~12장까지는 후기 선의 5대 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물론, 각 장에서도 이 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목차에서부터 한 눈에 들어오는 명확성이다.

 

정리하자면, 독자들로 하여금 선사들의 삶을 통해 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고 싶다, 한 가지만 놓고 보면, 지금의 구성도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목차를 구성함에 있어 조금 더 명확하게 전개 방식을 드러내주었다면 초보 독자들까지도 좀 더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3-2. 감동적인 장/절들

구성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적인 부분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용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좁은 세계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발버둥치는지, 갈 길은 멀지만 그래서 더욱 세상 삶을 천천히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 생각하는 구성의 아쉬움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사실, 그 어떤 지식에도 메이지 말고 직관으로 체험하라는 것이 인 것을!) , 책 내용에만 집중한다면 이 책은 책 전체를 흐르는 을 느끼며 그야말로 장에서 장으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감동적인 몇 구절만 다시 되짚어본다면, 우선 3. 부처의 눈에 움직이는 건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 인간의 마음이란! 바람에 떨어지는 복사꽃보다 가벼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했는데, 우린 이 마음 가는대로 하루에도 얼마나 수없이 흔들리며 사는 건지

 

다음으로 4장에서 진리란 전적으로 개인적인 깨달음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아마 기독교 사상과 사상을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은데, 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면 전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깨달음에 도달해야 한다. 절망스럽다! 나는 처음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 그냥 그대로 천주교 신자로 있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절대자의 손에 매달려 구원 받음, 얼마나 달콤하던지. 그런데 불교 철학을 받아들이면 선사들도 하지 못한 그 과정을 내 힘으로 해야 하다니. 절대로 불가능한 일, 그 자체였다 (물론 기독교 사상도 나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오히려 불교 철학을 공부하며 더 배우게 되었다).

 

그러나 92쪽의 다음을 보면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선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과연 천국과 지옥이 꼭 사후에만 펼쳐지는 세계가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왜 내가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 그건 다름아닌 오늘, 내가 속한 지금 이 곳에서의 삶이 내 마음에 따라 지옥일 수도 있고 천국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현상과 본체의 구분 없음이 아닐까

 

계속해서 6장을 보면 그러한 사람 (깨달은 사람)은 마땅히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깨달은 자조차 그러함을 하물며 나와 같은 일반 중생이야. 물론 선한 업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은 집착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단 에서 이야기하는 인과의 법칙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 나와 너를 구분짓지 아니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는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을 가장 어려워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의 탓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인간 관계에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기가 너무도 어렵다. 내게 일어난 모든 괴로운 일들이 결국 내가 뿌린 씨앗이었음을 인정할 때, 숨쉬기가 훨씬 편한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걸 뜻한다.

7, 조주 선사의 말씀이다. 그렇겠지. 진리를 깨칠 수만 있다면 내가 지금 이 현상계가 마치 절대인양 착각하며 집착하는 이 환상에서 해방될 수 있을 터이고, 그렇다면 그 속박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텐데. 하지만 그 길이 정말 까마득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돈오 (즉 깨달은 뒤에도) 한 뒤에도 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까?

따라서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전생이 업이나 인과응보로 인해 일어나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9장 위산 영우편의 이야기다. 돈오를 이루고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면, 일반 중생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부분이겠다. 한 순간에 돈오를 이룰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과의 과중한 업에서 선순환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수행과 기도는 생활화하는 것이 얼마나 좋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물론 생활환경이 다름에 따라 각자의 의무도 달라지지만 누구나 현실에 발을 딛고 꾸준히 자기가 맡은 바 임무를 다해야 한다. 환상이나 공허한 생각들에 몰두하느니 보다는 이러한 생활이 훨씬 현명한 것이다 (276).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276).

사실상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이라고 한 말이다 (277).

 

12. 날마다 좋은 날에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나같이 평범한 중생에게는 얼마나 큰 위안이고 기쁨의 말씀인지! 그렇다. 도인이 될 수 없다면, 오늘 하루, 내가 속한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진정으로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고 살아도 행복하고 죽어도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찾으며 나를 비우는 연습을 계속하며 글세계를 기웃거리는 요즘 조금씩 행복이란 녀석이 선명하진 않지만 그 윤곽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14장에서 나오는 이 말은 정말 그런 것 같다. 어찌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결국 진리는 하나이고 종교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종교에 따라 진리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의 진리를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저 해석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라는 깨우침이 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해야 할까?

 

은자들조차도 ? 한산과 습득은 가장 이름 높은 은자들이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마음의 길벗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을 대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인간은 인간 관계에 상처받고 갈등에 휩싸이고는 한다. 하지만 은자조차도 진리를 깨닫기까지의 먼 여정에서조차 결코 혼자이기보다는 벗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이다.  하물며 우리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기에 우리 모두 지금 이 순간 <지옥의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거겠지. 하지만 스승이 계시고 벗이 있기에 , 우리 모두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나 역시 다음과 같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과 함께 책을 덮었다.

 

박사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행 가방은 벌써 꾸려 놓았습니다. 떠날 순간이 오면 머뭇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이 책을 덮은 이 순간, 현실에서 떠나 먼 우주를 여행하고 온 기분이다. 힘들지만 앞으로도 계속 추구하고 걸어야 할 그 길.  이런 책에 흠뻑 빠졌다 고개를 들어 현실을 바라보면 그 현실에도 미약하지만 미소를 지어줄 수 있음이 참으로 기쁘다.

 

3-3. 보완점 평설

, 이제는 다시 고개를 들어 지식적으로 이 아닌 에 대해 논할 시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두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첫째가 저자 자신의 제한성이고 둘째는 구성상의 모호함이었다. 둘째, 구성상의 모호함에 위에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서는 첫째, 저자 자신의 제한성에 대해서만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저자에 대해 조사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저자는 중국인이지만 서구에서 교육 받은 카톨릭 신자이며 동양의 노자, 장자 사상에도 조예가 깊은 사상적으로 균형 잡힌 지성인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저서 <동서의 피안>의 경우는 동양과 서양 사상에 대해 아주 균형 잡힌 시각으로 풀어냈다는 극찬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필요 이상으로 선불교가 노자와 장자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뿐일까?

 

저자가 책머리에서 밝히고있듯이 이 책은 선사들의 삶을 통해 을 소개하는 책인데 비해 전 장에 걸쳐서 선이 중국의 전통 사상인 노자나 장자와 다를 바 없음을 지나치게 자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중국인의 중화사상을 늘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한국인 독자인 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이 인도에서 넘어온 사상이 아니었어도 저자가 이렇게까지 노자와 장자를 들먹였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바로 이 부분이 나로 하여금 오롯이 에만 빠져들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차라리 그렇게 노자와 장자 사상과 연결짓고 싶었다면 오히려 더 드러내놓고 비교, 분석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이것이 저자의 제한성인지 독자인 나의 제한성인지는 오늘 당장 풀 수 있는 숙제는 아닌 것 같지만, 앞으로 동양사상의 책을 접할 때는 편견과 분석력 양쪽에서 더욱 나 자신을 가다듬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깨우침과는 절대 관련 없는 얄팍한 지식적 소관이라 에서는 말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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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09.03.01 23:17:27 *.168.110.44
글을 읽다보니 박정현님의 꼼꼼하면서도 철저하고 객관적인 시각에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늦은밤 잘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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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0:07:42 *.234.77.178
과찬이세요. ^^::
저도 늦은밤까지 동료들 응원해주신 이승호님께 박수보낼게요.
잘 주무시고, 다음 한 주 마지막 과제, 마무리 잘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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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2009.03.03 10:58:11 *.52.96.21
안녕하세요 수희향님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박정현이란 이름과 어떤 관계인가요?^^

전 책 내용으로만 봤을때 장자의 그것과 많이 닮은걸로 그냥 넘겼는데~
장자의 사상까진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여유도 없었고
아무튼 무엇이 장자와 선의 차이인지 강론을 듣고 싶어지네요.
모임때 설명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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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13:13:25 *.255.182.40
허걱! 제 어찌 선과 장자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저 이 책을 제 나름의 관점에서 분석해 본 것 뿐이지요.
아직 여름아닌데 땀이 삐질삐질~ ㅋㅋㅋ

글고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번 5기 지원자들 모임 참석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테스트 기간 외출 금지>를 정해놓고, 오래 전부터 마지막 과제 제출하는 월욜날
중요한 일을 하나 계획하고 있었거든요 ^^

끝으로, 박정현은 제 실명입니다.
그럼 정철님 4번째 책도 화이팅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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