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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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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일 23시 44분 등록


<<5기 연구원 2차 레이스 3회차 북 리뷰 제출물입니다.>>


'선의 황금시대'  -  오경웅 지음/ 류시화 옮김 / 경서원



저자에 대하여

 

막막했다. 저자는 중국인, 저술년도는 1967년, 내용은 6,7세기의 당나라 시대에 선을 본격적으로 점화 시킨 선사들의 이야기, 물론 인터넷 검색해서 책과 저자 이름을 치면 몇 가지 소개의 글들이 나왔지만 시대가 달라서인지 현실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관련 정보를 찾을 요량으로 내가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선 관련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7년 만에 다시 펴 본 현각 스님의 ‘萬行: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이하 ‘만행’)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만행’에서 현각 스님은 1950, 60년대의 동양 불교의 미국 전파와 토마스 머튼 수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만행 2권 166,167p 주요 내용 재편집) :

 

1950년대는 철학자, 문인 등 미국 지성인들이 본격적으로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전부터 작은 파문을 던지며 미국 지식인 사회에 물결을 만들었던 불교가 비로서 파도처럼 폭발하는 시기라고나 할까. 머튼 수사는 그 파도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분이다. 벌써 그때부터 동양의 선사들은 물론 달라이 라마와도 편지 교류를 했다. 머튼 수사는 미국에 불교가 뿌리 내리는 데, 특히 카톨릭, 기독교 신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토마스 머튼은 미국 지성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자서전(‘칠층산’을 말한다)은 지금까지 필독서로 불릴 정도로 스테디 셀러다. 머튼 수사는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수도사가 되었으며 겟세마니 수도원에서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다 중년에 접어든 1950년대 초반 장자를 비롯한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많은 불교 경전을 읽으면서 수도원 안에서 혼자 참선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참선에 심취한 머튼 수사는 나중에 불교와 참선에 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당시 그는 카톨릭 교단에서 아주 존경 받는 수도사이자 미국 지식인들 중 영향력 있는 인사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동양 사상과 불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현각 스님이 계를 받기 전에 예일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비교종교학 석사학위를 받았음을 감안할 때 위의 평가는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선의 황금시대’에는 저자인 오경웅 박사가 학문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교류했던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특히, 그 중에서 선학에 대한 동질감 측면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스즈끼 다이세츠와 현각 스님이 언급한 토마스 머튼이다. 먼저,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이란 타이틀로 선의 본질과 오경웅 박사에 대한 토마스 머튼 수사의 장문의 글이 맨 끝에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토마스 머튼과 오경웅 박사는 선과 관련하여 지식을 나누고 교류하던 아주 친밀한 사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오경웅 박사가 스즈끼 다이세츠와의 만남 때 자신이 토마스 머튼과 친한 사이임을 언급했다는 점을 볼 때 토마스 머튼은 오경웅 박사 뿐만 아니라 스즈끼 다이세츠와도 이미 교류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오경웅 박사와 스즈끼 다이세츠는 함께 제 3,4차 동서양 철학자 대회에 참여해서 발표한 사람들이니 동서양 불교 교류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경웅 박사와 스즈끼 다이세츠, 그리고 토마스 머튼은 서로 교류하거나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1950, 60년대 선 사상의 연구와 다양한 저술을 통한 동양 사상의 서양 전파에 지대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오경웅 박사 뿐만 아니라 스즈끼 다이세츠,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도 함께 조사해야만 이러한 시대 흐름과 오경웅 박사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저자에 대하여’는 오경웅 박사와 함께 스즈끼 다이세츠,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도 함께 구성하기로 했다.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좋을까 하다가 서로 영향을 끼친 방향의 이해를 위해서 출생연도 순으로 정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래서 먼저 스즈끼 다이세츠(1870년 출생), 다음으로 오경웅 박사(1899년 출생), 마지막으로 토마스 머튼(1915년 출생)에 대해서 소개하고, 세 분 모두 살아있고 또 이 책의 원고가 마무리 되었던 1966년 초 시점에서의 이들간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는 메이지와 쇼우와 시대에 걸친 세계적인 불교 사상가로서 1870년 일본 가나자와에서 출생하였다. 22세에 도쿄로 상경하여 도쿄 전문학교를 거쳐 도쿄 대학 철학과 선과에 진학하였다. 그 사이에 가마꾸라 엔까꾸 절의 샤꾸쇼우엔 밑에서 선을 수행하였고, 그의 나이 26세에 ‘다이세츠’라는 호를 받았는데 이 기간의 수행 생활이 그의 선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1897년 미국으로 건너가 철학자인 Paul Carus 문하에서 11년간 일하면서 ‘노자도덕경’과 ‘대승신기론’을 영역하고, ‘대승불교 개론’을 영문으로 출판하였다. 1909년에 일본으로 귀국한 그는 학습원과 도쿄 대학 및 다이꼬꾸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나이 63세이던 1933년에 다이꼬꾸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동방불교도협회를 창립하였으며 The Estern Buddhist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불교와 선 사상을 세계에 전파하였다. 1949년부터 1959년까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80세에서 90세 사이) 하와이 대학을 시작으로, 컬럼비아 대학, 캠브리지, 하버드 등의 여러 대학에서 왕성한 강의 활동을 벌였으며, 1949년, 1959년, 1964년 모두 하와이에서 열렸던 제 2,3,4차 세계 동서양 철학자 대회에 주요 연사로 참석하였다. 1966년 7월 12일 96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그의 저서 ‘Zen Study’의 서문에는 영국 불교협회 회장이었던 크리스마스 험프리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그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불교학자였으며, 특히 선불교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불교를 주제로 하는 그의 영어 저술은 12권 이상을 헤아리며, 아직도 서방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그의 일본어 저술은 무려 18권에 이른다. 스즈끼의 저술은 권위가 있다. 그는 범어(Sanskrit), 팔리어(Paii), 한문 등으로 된 불교 원전을 두루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이 구사하는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로 서구의 최신 사상도 빠짐없이 섭렵했다. 동시에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그는 비록 승려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사사했던 이들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풍부하고 직접적인 그의 영적 지식은 일본 내의 많은 승려들로부터 크게 존경 받았다.”

 

오경웅(吳經熊) 박사는 1899년 3월 28일 중국 절강성 영파시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상해에 있는 미국 감리교 선교회의 동오법과학원에 입학했으며, 그해 겨울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20년 동오법과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법과대학원에 입학하여 법철학을 공부했다. 1924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서 판사, 변호사, 입법원에서 공사를 보았다. 종교적으로는 1937년 12월 18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41년 중일전쟁 이후 그는 1947년 로마주재 중국대사로 임명될 때까지 중경정부를 도와 일했다. 1949년 사법원장으로 입각하기 직전 내각의 붕괴로 다시 중국을 떠나 1964년까지 하와이 대학과 시튼홀 대학에서 중국철학과 문학,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동양철학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저작 외에, 여러 저술과 연구와 강의에 몰두한 후, 1964년 중국 신인대학교 법과대학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유명한 홈즈대법관의 정신적인 제자인 동시에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 헌장 구성 등에 참여했던 법학자였으며,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 근무한 외교관이자, 중국 내 천주교 신앙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고 신약성서 시편 등의 중국어 번역을 맡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했다.『정의의 원천』『동서의 피안』등 종교와 동양사상 그리고 자연법에 관한 심오한 책들을 써냈고 1986년 세상을 떠났다.

 

오경웅 박사는 20세기를 통틀어 동서양을 완전하게 이해한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그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학하는 가운데 미국 대법관이면서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법사상가인 올리버 W.홈즈와 14년 동안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사상적 우정을 통해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또 베를린에서는 슈탐러(Rudolf Stammler)의 지도를 받으며 이들 두 사람의 법사상을 종합하려 노력했다. 오 박사는 결혼 후 감리교 신자였다가 이후 가족들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는데 그 계기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전기를 읽고 나서였다고 한다. 개신교에서 어떤 내적인 깊은 이끌림을 얻지 못했던 오경웅 박사에게 데레사 성녀의 일생은 매우 큰 자극제가 되었고 데레사 성녀가 삶을 통해 제시했던 신비사상과 금욕주의는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동서의 피안」은 1949년 8월 하와이대학 교수로 채용돼 2년간 재직하는 동안 저술된 것이다. 그 안에는 30년 동안의 그가 쌓았던 정신적인 생활이 녹아있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 대승과 선사상에 관한 비판,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에 관한 견해 등 동서를 비교하여 그 차이 안에서 종합 요소를 발견하고 동서를 초월한 피안을 제시하며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불후의 가치관이 있음을 설파했다. 다종교 다문화간의 대화가 강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 같은 견해는 미래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새롭게 주시 되고 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세기의 영성가라고 불리운다. 그는 1915년 1월 31일 프랑스 프라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었다. 19세 때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접하면서 가톨릭에 대한 관심을 키워 나가다가 1938년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는다. 시를 쓰고 사랑과 재즈에 열광하던 젊은 머튼은 문학적인 재능, 박사학위, 시인으로서의 무한한 가능성, 대학교수의 직위를 모두 버리고 1941년 12월 켄터키 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겟세마니 대수도원에 입회하여 일생을 침묵과 노동으로 사는 수도자로 변신을 하였고, 1949년 사제가 되었다. 머튼의 수도원장은 머튼이 글재주가 있음을 알고 자선전을 써 보라고 권했는데, 그래서 1948년에 출간된 자서전 ‘칠층산’을 통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세 살 때였다. 그 후 구가 쓴 책은 모두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1968년 12월 10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60여권의 책과 100여 편의 수필을 남겼다. 기도와 금욕주의,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주제 뿐만 아니라 인종문제, 폭력과 전쟁 등 사회 문제와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과 소명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1961년부터 가톨릭계 간행물에 군비 경쟁과 냉전에 관한 비판을 발표하기 시작했고,1968년 외국 여행을 하면서도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이런 측면과 그의 갑작스런 죽음(심장마비라고 알려져 있는데, 대만의 한 호텔의 욕조에서 나오다 선풍기 전기 감전으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이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    1940년대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스즈끼 다이세츠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불교 학자였다. 특히, 1950년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주요 대학(하와이, 컬럼비아. 예일, 캠브리지, 하버드)에서 강의를 함으로써 더욱 명성을 떨쳤다.

(2)    유추하건대 기독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공통적 이력, 불교 및 선에 대한 공동의 관심, 그리고 외교관(로마 교황청 주재 중국 공사) 출신의 중국의 대표적 카톨릭 평신도와 미국의 유명한 수도회 수사 등의 위치로 인해 1950 년대 오경웅 박사와 토마스 머튼은 서로의 책(오박사는 ‘동서의 피안’을 1951년 저술, 머튼은 ‘칠층산’을 1948년 저술)을 읽고 공감하면서 서신을 통해 학문적 교류를 나눔을 통해(머튼은 수도원 생활로 인해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므로)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3)    본 책을 집필하던 1960년 중반 오경웅 박사는 스즈끼로부터 선학 연구와 관련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스즈끼 다이세츠와의 관계를 설명한 본 저서의 글에서 잘 알 수 있다.

(4)    그리고 머튼 역시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 중에 참선을 하였으며, 그의 저서 “Zen and the Birds of appetite(1968)”에서 스즈키 다이세츠의 선(禪)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선에 대해 그의 논지를 펴 나가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그 밖에 “The Way of Chang Zu(1965)”, “Mystics and Zen Masters(1967)” 등의 저서를 통해 동양의 선 사상을 미국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세 분 모두 살아있고 본 책의 원고가 마무리 되던 1966년 초를 기준으로 볼 때, 오경웅 박사와 머튼 수사는 가톨릭과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이라는 공통적 기반 위에서 공히 스즈키 다이세츠의 불교와 선 사상에 영향을 받아 상호 학문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이 세 사람의 불교 및 선에 대한 연구의 결과가 널리 알려지면서(동시에 달라이 라마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서양에 동양 사상, 특히 선불교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지게 되었고, 이것이 최근 서양에서의 불교 열풍에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한 줄기 햇빛, 산을 둘러싸고 흐르는 안개, 죽어가던 이웃집 할머니의 얼굴, 과연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늘 궁금했다. 마치 존재 전체를 싸고 도는 무(無)의 미소처럼 그것들은 시시각각 내 발길을 멈추어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곤 했다. (7p)

 

아하, 바로 그거구나 하고 무릎을 칠 때도 많았지만 다음 순간엔 또 다시 캄캄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7p)

 

선이 무엇이냐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이 선이 아니냐를 말하라 한다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농담’을 모르는 것,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9p)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9p)

 

우리는 이 책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삶의 도처에 우리가 여태껏 눈감고 지나쳐 버린 보물들이 무진장 숨겨져 있음을, 생의 은밀한 불씨들이 찾아내 주기를 기다리며 가슴 두근거리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불씨가 우리 속안에서 인생의 알짜배기 체험들을 통해 점점 뜨겁게 타오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운문 선사가 말한 대로 <하루하루가 다 최고의 날>을 살 수 있을 것이다. (10p)

 

 

<1. 선의 심지>

 

“나는 궁극의 진리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비법을 갖고 있다. 이 비법은 모습 없는 모습의 신비한 문을 여는 열쇠이며, 문자나 말로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경전 말고 따로 전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나는 이 비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이렇게 해서 선은 한 송이 꽃과 미소 사이에서 태어났다. (19p)

 

선의 참맛은 어떤 역사적 사실에 좌우되는 게 아니다. (20p)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禪’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20p)

 

“중국의 선은 인도의 요가나 디야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다.” 물론 고의적인 반동이라기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디야나를 탈바꿈 시킨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과 디야나는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스즈끼 다이세츠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형태의 선은 일찍이 인도에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는 선을 깨달음의 교리를 중국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21p)

 

내 생각으로는 선종은 그 바탕이 되는 추진력을 대승불교의 폭 넓은 힘에서 얻어낸 것 같다. 노장의 근본 정신을 선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리고 꽃피운 것은 순전히 <대승불교>의 추진력이었다. 토마스 머튼이 지적한 것처럼 진정으로 “장자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한 이들은 당나라 때의 선사들”이었다. (21p)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 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이나 ‘마음을 잊음’ 또는 ‘아침처럼 맑음’에 해당된다.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반면에 선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22p)

 

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장자의 ‘마음을 맑게 함’(심재), ‘마음을 잊음’(좌망), 그리고 ‘아침처럼 맑음’(조철)을 이해하는 게 지름길이다. (22p)

 

병을 치료하든 나라를 다스리든 모두가 도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인데, 무릇 ‘도’란 복잡한 것이어서는 안 되네. 복잡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혼란이 일며, 혼란스러우면 걱정과 불안만 늘어나지. 이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잔뜩 억눌려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힘들 뿐더러 남까지야 말해 무엇하겠나. 예로부터 도를 깨친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을 닦은 후에 남한테로 눈을 돌렸다네. 자기 자신이 철저히 도를 깨치지도 못하고서 어찌 남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23p)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 것일세. 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립에서 생긴다네. 그리고 지능이야말로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경쟁의 무기이지. 따라서 둘 다 사악한 흉기일 뿐이며,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못 되지. (23p)

 

자네가 비록 두터운 덕을 갖추었고 참된 성실성을 지녔다 해도, 그리고 나아가 명성이나 명예를 위해 다투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남의 마음과 가슴에 자연스럽게 전달되지 않는 한 억지로 포악한 사람에게 인의를 주입시키려 한다면 결국 본래는 선한 뜻이었지만 남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네. 이것은 곧 자신의 선한 마음으로 남의 악함을 들추어내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짓이지. 이렇게 남한테 해를 입히는 사람은 역으로 반드시 남한테서 무사하기 어렵지. 내가 이렇게 긴 얘기를 하는 것도 다 자네가 남한테서 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런다네. (24p)

 

문제는 자네가 아직도 자신의 얕은 마음을 길잡이로 삼으려 한다는 데 있네. (25p)

 

우선 마음을 맑게 하게. 그러나 방법을 안다 해도 결코 그걸 실천하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해선 안 되네.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진실되기 어렵고, 결국 지극히 밝은 하늘의 비난을 면키 어려울 걸세. (25p)

 

“마음을 말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네의 기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말게 하는 것일세.” (26p)

 

“제가 마음을 맑게 하는 수련을 해왔지만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 있더군요. 비로서 마음을 맑게 했을 때 저는 ‘나’라는 작은 존재가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텅 빈 상태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걸세. 그것 말고 다른 게 아니야.” (26p)

 

우선 자네의 노래를 들어 줄 귀가 있을 때에만 노래를 부르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입을 다물게.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주위 상황이 자네에게 말하게끔 만들 때에만 말을 하게. 그렇게 하면 목표에 어긋나지 않을 것일세. (27p)

 

텅 비어 있음의 효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나. 방안이 비어 있어야 빛이 들어올 수 있고 또 그래야 방안의 것들이 영롱하게 반짝일 것 아닌가. 그래야 주위 모두에게도 따뜻한 빛을 줄 수가 있지. 그럴 때라야 가만히 앉아서도 천리마처럼 달릴 수 있는 것일세. (27p)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감에서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28p)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야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 같은 경지에 든 사람은 바깥의 대상이 아무리 천만변화를 하더라도 항상 폭 넓게 포용하고 반갑게 맞아들이고 또 모든 일에 차별이 없소. 이것이 바로 ‘혼란과 고통 속의 평화’라는 것이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소? 그것은 바로 완전한 평화가 되려면 혼란과 고통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30p)

 

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를 ‘앎’보다 강조한 것으로, 이 역시 선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라, 그러면 알 것이다. (30p)

 

“우리의 심장은 숨 쉴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32p)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그 ‘어떤 것’을 도가의 역설과 선의 수수께끼에서 찾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전통 신학은 저들에게 마치 기하학과 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즉 정신적인 여러 측면들 중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데 비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은 거의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을 선과 도가 사상은 다루고 있다. 이들은 전달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을 ‘일깨우는’ 방법을 갖고 있다. 그 방법에 의해 마음의 지평이 열리고 숨쉴 공간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32,33p)

 

동양 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33p)

 

‘희랍 예술은 언어의 뜻을 전하는 면에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완성된 것이다. 희랍 예술은 항상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으로 표현하려고 애쓴다. 이는 정말로 중국 서정시의 효과와 판이하게 다르다. 한시는 어떤 인상을 심어주려는 데 목적이 있으며, 그것마저도 최종적인 표현을 쓰는 게 아니라 무궁무진한 상상과 감정의 겨우 한 끄트머리만을 내보일 뿐이다.’ (33p)

 

반대로 서양 문명은 다분히 희랍 정신의 산물이다. 그런 속에서 뜻 있는 서양인들은 자기네들 문명의 결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으며, 동시에 동양이 보다 깊은 저력을 갖추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34p)

 

순수하고 본질적인 체험을 되살리려는 것과 관련해서 서양의 선은 즉흥적이고 실험적인 정신처럼 되어 버려 도덕적 방임 상태에 떨어지고 마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중국과 한국과 일본의 선이 얼마나 엄격한 수행과 혹독한 전통적 관습을 바탕에 깔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있다. (36p)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람한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36p)

 

장자의 철학은 모든 면을 절대 신성과 관련 지어 생각하던 사회 구조의 산물이다. (36p)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고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 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37,38p)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 달마와 제자들>

 

“그러한 것들은 죄다 자질구레한 속세의 인과응보에 불과할 뿐 진정한 공덕이 아니다. 마치 물건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여서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공덕이란 밝고 맑은 지혜를 깨쳐 아는 것인데 이러한 지혜는 본래 말로 담을 수 없고 침묵 속에 있는 것이기에 세상의 속셈으로 구하지 못한다.” (40p)

 

“불교의 성스러운 교리 가운데 첫째 가는 게 무엇인가?” “전혀 성스러울 게 없다.” (40p)

 

“이미 내 재주를 다했는데도 스승은 너무 높이 우뚝 서 있으니 따르려 해도 방법이 없구나”. (41p)

 

도에 들어가는 길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한편 ‘행위에 의한 길’에는 다음 네 가지 길이 있는데 ‘미움을 넘어서는 길’, ‘삶에 적응하는 길’, ‘집착을 버리는 길’,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이다. (42,43p)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 고통스런 일들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친다.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꿰뚷어 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의 지시에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은 더 나아가 타인의 미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구도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게 된다. 이 길이 바로 ‘미움을 넘어서는 길’이다. (44p)

 

일체의 고락은 외적인 인연의 산물이며, 모두가 전생에 행한 결과이다. 그러니 한 때 그런 걸 얻었다고 신나해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44p)

 

현명한 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리를 이해하며 지성을 갖고 세속의 길에 물들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즐기며 세속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45p)

 

육신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평화로부터 단절된다.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여러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경전에도 있듯이,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 따라서 더 이상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축복을 아는 것이 참으로 ‘도’의 길에 접어드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집착을 버리는 길’이다. (45p)

 

지혜로운 자는 자선 행위, 즉 자비를 위해 언제나 자기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 ? 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 ? 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바로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이다. (46p)

 

달마와 그 후대 선사들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47p)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어디 너의 마음이라는 걸 내놓아 봐라. 그러면 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혜가는 마음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할 수가 없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달마가 말했다.

“자, 이제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이것이 바로 전등의 시작이었으며, 달마대사는 중국 선종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 여기 그가 사용한 방법은 ‘부정적 방법’의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선종의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47,48p)

 

본래의 참마음은 항상 평화롭다. 또 본래의 참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이며 결코 생각의 대상일 수 없다. 달마가 혜가에게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었다.”라고 한 것은 본래의 참마음은 이미 평화 중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진정시키려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48p)

 

끝으로 혜가가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말해 보일 차례였다. 그런데 혜가는 입을 열지 않고 스승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야말로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 이렇게 해서 혜가는 선종의 제 2조가 된 것이다. (49p)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지 못한다. (50p)

 

어느날 마흔이 넘은 신도 하나가 찾아와 자신의 죄를 깨끗이 해달라는 이상한 요구를 했다. 혜가는 그에게 깨끗이 할 죄를 내놓아 보라고 말했다. 한참 생각하더니 신도는 이렇게 대답했다. “열심히 죄를 찾아 보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혜가는 말했다. “자, 이제 내 너의 죄를 씻어 주었다.” 이 말을 듣고 그 신도는 깊이 깨친 바가 있었다. 그 뒤 그는 승려가 되어 승찬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이가 곧 선종의 제 3조이다. (51p)

 

 

<3. 부처의 눈 ? 혜능>

 

바람은 어디로나 제멋대로 불 듯 천재는 가끔 전혀 예기치 않는 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혜능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53p)

 

부처를 알아 보려면 자기가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가 된 사람만이 자신 뿐 아니라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깃든 불성을 발견할 수 있다. (54p)

 

“사람이야 남과 북이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 오랑캐의 몸과 스님의 몸이야 다르겠지만 우리가 지닌 불성이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55p)

 

모름지기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곧바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야만 한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며 항상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세상 그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그것을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58p)

 

“도를 닦는다는 사람이 신참내기라고 너무 업신여기는 게 아니오. 낮은 사람에게도 최상의 지혜가 있고 높은 사람에게도 얼빠진 지혜가 있는 법이오. 남을 업신여기는 것만큼 큰 죄가 없다는 걸 아시오.” (59p)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제 본 마음 알고 제 본 성품 보면 이것이 곧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이니라.” (61p)

 

“부족할 때는 스승이 제자를 건네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뒤에는 제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62p)

 

“움직이는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63p)

 

혜능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기엔 너무 겸손했고, ‘아니다’라고 하기엔 또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동양의 정중한 대화법에선 이것은 긍정을 뜻한다. (64p)

 

“특별한 가르침은 따로 없었으나 참본성을 보는 일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소.” (64p)

 

혜능과 신수 두 선사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신수가 점오 ? 단계적으로 점차 깨닫는 것을 가르친 데 반해 혜능은 돈오 ? 단번에 깨닫는 것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66p)

 

모든 것은 깨달음에 달려 있다. 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가 있고 다함 없는 지혜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 (67p)

 

선의 통찰력은 그 자체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치는 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베는 것과 같다. (72p)

 

“내가 본다는 것은 내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이요, 안 본다는 것은 남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은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보기도 하고 안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너 또한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다고 했는데, 이 무슨 뜻인가? 아프지 않다고 하면 목석과 다름없는 인간이요, 아프다고 하면 속인이나 다를 바 없으니 성을 내고 원통해 하리라. 네가 앞서 말한 보는 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양쪽의 어느 한쪽에 집착한 것이고, 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다는 것은 나고 죽는 현상의 문제이니 너는 참본성도 바로 보지 못하고 어찌 감히 그런 말장난을 늘어 놓느냐?” (73p)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 (75p)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 혜능의 가르침>

 

달마대사가 전한 교리를 후대의 선사들은 다음 네 귀절의 시로 집약 시켰다. 이것을 보통 ‘사구게’ ? 네 귀절로 된 시라 불러도 좋다.

경전 밖에서 따로 전하며/ 말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똑바로 가리켜/ 본성을 꿰뚫고 부처를 이룬다. (77p)

 

교외별전은 ‘법’이라던가 도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경전 말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니 이를 일컬어 교외별전이라 한다. 직접 물을 마셔 보고야 찬지 더운지를 알 듯 진리의 깨달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78p)

 

그림자와 메아리에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기 안을 들여다 봄으로써만 정말 무엇이 ‘참 나’인지 알 수 있다. (78p)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해도 자신의  깨달음을 남의 마음 속에 그대로 들이부어넣을 순 없다. 고작 해야 임산부의 해산을 옆에서 도와 주는 산파 역할 밖에 할 수 없다. (78p)

 

학문에 있어서 만일 그 근본을 안다면 모든 경전은 다만 마음 속 진리에 대한 갖가지 해석에 지난지 않는다. (80p)

 

불립문자란 흔히들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음’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81p)

 

“참 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으로, 말해야 할 때는 말로 언제고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한 순간도 참본성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경지가 바로 견성이다.” (82p)

 

마음이야 말로 선의 열쇠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가 없다. 선의 궁극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 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82p)

 

참마음은 ‘생각하는’ 것이지 ‘생각되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84p)

 

혜능이 말하는 ‘무념’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 없이 쓰는 걸 뜻한다. (84p)

 

인생 최대의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이다. (86p)

 

혜능은 다른 도가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선행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87p)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깍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대의 참마음을 바로 보리라. (87,88p)

 

“우리의 본성이 바로 부처요, 이 본성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 (88p)

 

만물은 다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의 눈길을 안으로 돌려 자신이 참본성에 성실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만큼 큰 즐거움도 없다. (88p)

 

혜능에게 있어서 ‘불성’은 곧 ‘깨달음’으로, 그가 말하는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를 염두에 두면 혜능이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이 부처야말로 참 부처다.”라고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89p)

 

안으로는 심성을 조화롭게 하고/ 밖으로는 남을 존경하라/ 이것이 스스로 귀의하는 것이니 (89p)

 

혜능의 철학은 초월을 강조한 점에서는 노자, 장자와 비슷하고 인간을 중시한 점에서는 공자, 맹자와 비슷하다. 혜능은 모든 경전이 인간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참본성의 지혜 위에 세워졌다고 강조한다. (91p)

 

마음이 바르다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면 참선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들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속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 데 시줏돈도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펴지리라. (92,93p)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94p)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 마조>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을진데, 하물며 그렇게 홀로 좌선을 한다고 부처가 되겠는가?” (98p)

 

“소달구지의 예를 들어 보자.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하겠는가 소를 채찍질하겠는가?” (99p)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99p)

 

“마음의 지혜를 가꾸는 것은 마치 씨를 뿌림과 같고, 내가 너에게 법의 이치를 설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소나기와 같다. 다행히 너는 나의 가르침을 받기에 적당한 인연을 갖추었으니 곧 ‘도’를 보게 되리라.” (99p)

 

“평상심이 곧 도다.” (101p)

 

이와 같이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선 그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바다. (107p)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108p)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이지 그밖에 따로이 무엇이 있는게 아니야.” (109p)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신이 응당 받아야 할 상이지만, 먹고 마시는 걸 절제하면 당신은 복을 쌓게 됩니다.” (111p)

 

“누구라도 머무름 없이 항상 여행만 할 수 없고, 또 여행하지 않고 항상 머물기만 할 수도 없다. 그대는 응당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해서 이르는 곳마다 나룻배나 뗏목이 되어 사람들을 건네 주어야 한다.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순 없다.” (117p)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 (120p)

 

 

<6. 선악을 넘어서 ? 황벽>

 

그는 다른 모든 위대한 혁명가와 마찬가지로 굽힐 줄 모르는 용기와 확신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으며 그 자신 스승이 되어서도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그의 좌우명은 이제 모든 종파의 승려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금언이 되었다. (123p)

 

“첫째 선종은 불상이나 경전과 같은 종교의 외적 부속품에 의존하지 않고 수도 생활을 해 나갔다. 따라서 그것들이 파괴된 다음에도 능히 독립하여 존속할 수 있었다. 둘째 선종은 사회의 기생충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선종의 중요한 청규 중의 하나가 모든 승려는 매일 어떤 종류이든 생산적인 일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청규를 세운 이가 바로 백장 회해였는데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밭일을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부린 사람이다.” (124p)

 

노동에 대한 그의 주장 속엔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감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 운명에 참여한다는 속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 그는 초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125p)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 도는 이 양자를 초월하며 동시에 둘 다를 포함한다. 장자의 말에 이런 귀절이 있다: “성인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 없이 문제의 양쪽면을 다 고려하고서 <도>에 비추어 양자를 본다. 이것을 양행, 즉 두 길을 한꺼번에 따름이라 한다.”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서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129p)

 

‘이기적인 사람’은 절대로 ‘참나’를 얻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폐쇄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만 연연해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곧 행복 그 자체요 참사람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바깥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그 쪽으로만 안달하며 찾아 헤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사실상 그는 환상의 그림자만 쫓고 있는 것이다. (130p)

 

“이렇게 영적으로 깨쳐 안 마음은 마치 텅 빈 허공과 같아 시작도 끝도 없고, 생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고,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으며, 젊거나 늙지도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또한 크기도 형상도 없으며 색깔도 소리도 없다.” 간단히 말해 일심은 모든 상대 관념들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 ? 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131p)

 

‘도’를 깨친 사람은 선(善)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그것을 추구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선을 마음 속 지혜의 샘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샘물로 본다. 그는 상황이 오면 선을 베풀지만 그럴 기회가 아니면 본래대로 조용히 있을 것이다. 선행을 베풂에 있어서도 그는 절대 으시대거나 보답을 원치 않는다. 그는 참본성이 ‘본래 가득 차 있어 부족함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132p)

 

오직 ‘큰 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취해야 할 게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 부처이다. (132p)

 

세상사 털어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밧줄 끝을 단단히 잡고 온 힘을 쏟아 덤벼라.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매화 향가가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 (137p)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도 없다. 말이야 쉽지만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은 순전히 우리가 항상 모순 속에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저마다 고집장이이기 때문이다. (137p)

 

 

<7. 뜰 앞의 잣나무 ? 조주>

 

한 번은 조주가 스승에게 도가 무어냐고 묻자 남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 조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하겠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도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조주는 홀연히 깨쳤다. (142p)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결국 ‘바른 말’을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바른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침묵이나 이 경우처럼 열쇠를 건네주는 행동일 수도 있다. (146p)

 

문이란 그것이 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안쪽에서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화부는 열쇠가 없이도 혼자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스승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사실상 문을 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거라곤 없다. 스승의 행동은 마음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선사들이 수많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7p)

 

진정한 구도자는 먼저 모든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려야 한다. 그런 무자비한 행위를 통해서만 자유와 초연의 길을 걸을 수 있다. (148p)

 

‘고담한천’이란 다름아닌 ‘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물맛이 쓰다는 것은 도를 닦으려면 일체의 세상사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엄격한 자기 수련과 자기부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른다.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위의 대화는 조주의 낙관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정신과, 아울러 깊은 지혜와 경쾌한 해학의 샘을 드러내 준다. (153p)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156p)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157p)

 

“내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부처’라는 말이다.” (157p)

 

“그대들이 단 한 마디라도 ‘도’에 대해 말을 꺼낸다면 그 순간 이미 차별하고 선택하는 분별심을 낸 것이다. 나로서는 ‘도’에 대해 별로 분명하지 않다. 나는 다만 그대들이 이 ‘도’를 마음 속 깊이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만을 알기 원한다.” (159p)

 

“그대들의 의문을 실제 체험을 통해 풀도록 하라!” (157p)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160p)

 

“도는 사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사물을 떠나서는 도가 없다.” (161p)

 

한 제자가 변명조로 말했다.

“이렇게 빈 손으로 왔습니다.”

“그렇다면 거기 내려놓게!”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얼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까?”

“그럼 계속해서 들고 있게나!”

선의 경지에 들어가려면 빈 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 다시 말해 ‘빈 마음’이어야 한다. 빈 손으로 왔다면서 자신의 무지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벌써 마음이 에고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 준다. (166p)

 

“스님의 선풍은 무엇입니까?”

“안으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고 밖으로는 구할 게 아무 것도 없다.” (166p)

 

제자 한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데 조주도 장례 행렬에 끼어 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 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따라가는군.” (167p)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 석두의 제자들>

 

“그럼 너는 언제 거기서 왔느냐?” “저는 거기서 오지 않았는데요.” “나는 벌써부터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어째서 증거도 없이 사람을 속이십니까?” “너의 몸이 여기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다 치고 후세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도대체 누굴 보고 후세 사람이라 하는 건가?”

석두의 이 말에 도오는 홀연히 깨쳤다.[172]

 

“네가 차를 끓여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오면 먹었으며, 인사를 하면 답례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도처에서 가르쳐 주었는데도 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174p)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174p)

 

“너는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거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 (174p)

 

“스님을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행운입니다.” “그 말을 안했더라면 더 좋았을걸!”. (175p)

 

 “밥이 깊었는데 그만 물러가 쉬게.” 덕산은 인사를 드리고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밖이 너무 캄캄합니다.” 용담이 불을 켜서 건네 주었다. 덕산이 막 받는 순간 용담은 갑자기 불을 훅 꺼버렸다. 순간 덕산은 깨달았다. (177p)

 

 

<9. 감추어진 불씨 ? 위산>

 

어떤 중이 위산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무심(無心)이 바로 도이네.”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자네가 할 일은 이해를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을 이해 하는 일이네.”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바로 자네지!” (190p)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요, 자신에서부터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얘기다. 마치 검댕이를 작고 마음 밭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내가 그것을 도라 여기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대화에서 우리는 노자의 이른바 “도란 하루하루 떨구어 내는 데 있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90,191p)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 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193p)

 

오묘한 가르침이 제아무리 많고 다양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물리치고 어떤 것은 펴는 활용방법을 직관적으로 터득해야 한다.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대는 비로소 진정 슬기로운 생활인으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194p)

 

“어떠한 철학이든 그 근본 이념은 비교적 간단하고 분명하나, 다만 이를 전달해 주는 말이 악마다.” (197p)

 

나는 가끔 숱한 유명한 천재들이 채 꽃피기 전에 벌써 시들어버리는걸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성질상 그들 스스로 체험해 얻어야 할 사실들을 스스로 지나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0p)

 

선의 이치에 합당한 말을 해 놓고는 거기에 스스로 당황해 한다는 것은 아직 세속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증거이다. (201p)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보라. (201p)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미 그 뿌리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머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갖출 수가 없다. (203p)

 

 

<10. 집으로 돌아가라 ? 동산>

 

어린 동산은 정신적인 이해력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했으나, 적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주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공부하던 중들 대부분이 신성한 경전엔 절대 착오가 없다고 당연히 믿었다. 하지만 어린 동산은 다름 사람이나 어떤 책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걸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은 스승을 더욱 감동시켰으며 그래서 스승은 솔직히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의 스승감이 아니다!” (204p)

 

신기하고 신기하다! 불가사의한 무정물의 설법이여.

귀로 들으려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눈으로 들어야 참으로 안다. (205p)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나를 만나리.

그게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207p)

 

가을물 하도 맑아 그 바닥 있는 줄 모를래라. (208p)

 

이 시에서처럼 우리는 자주적이며 사실적이고 높은 정신을 가진 동산이 이미 새롭게 어떤 경지에 들어갔음을 보게 된다. 그는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았으며, ‘절대의 하나’에 도달했기 때문에 군중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통찰력을 지녔고 본래 얼굴, 즉 진여(眞如)를 꿰뚫어 알았다 해서 환상과 공상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초연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 결과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에 두발을 굳건히 디딜 수 있었다. (208,209p)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209p)

 

“나는 결코 운암 스님의 높은 덕망과 학식을 존중해서 제사를 지내는 게 아니다. 단지 그분이 나에게 진리를 설명해 주시지 않은 게 고마울 따름이다.” (210p)

 

“절반은 동의하고 절반은 동의하지 않네. 만약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이는 큰스님의 뜻을 고스란히 저버리는 것이 될걸세.” (211p)

 

스승보다 월등해야만 제자는 비로소 스승이 전해주는 등불을 물려받을 수 있다. 이것은 선종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처럼 되었다. (211p)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 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가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 가르쳐 준 백 개의 해답보다 휠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 (212p)

 

누구든지 현상을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다 보면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큰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 속에 숨은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의 첫걸음이다. (214p)

 

경험이 차츰 쌓이다 보면 친숙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친숙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14p)

 

그대는 거짓의 세계에 환멸을 느꼈으며 동시에 거짓 세계를 꿰뚫고 진실하고 불변하는 본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단계가 바로 깨달음의 경험이다. (215p)

 

dl 본체인은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중생을 위해 일하고 가르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본체로 돌아온 사람은 비록 현상계에 몸 담고 있지만 이세상 사람과 다르다. (215p)

 

본체에서 돌아온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에게 간단한 공식으로 그것을 설명해 주면 상당한 오해를 낳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16p)

 

훌륭한 스승에겐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즉 제자들이 갖고 있는 숨은 힘을 일깨워 그들 스스로 자기가 누군가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216p)

 

깨달은 사람이라 해서 자신의 본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는 현상과 본체로 이어지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그렇기 때문에그는 본체에만 매달리지 않고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황천에 달하는 무극의 무한한 경지를 열망한다. (217p)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 (218p)

 

돌아갈 집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울림은 마음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니, 이러한 돌아감이 바로 내면 생활의 시작이다. (221p)

 

완전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이상인지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자기 도취나 독선은 그 싹이 보일 때 재빨리 뿌리 뽑아야 한다. (224p)

 

우리가 정말로 ‘참나’를 인식할 수 없다면 태초 이래 아무도 그 ‘참나’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참나’ 는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할 무엇이다. (225p)

 

장자는 생명을 분명한 원리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며, 어떤 사물처럼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적 관습이나 행동방식에 따라 실천될 수도 없는, 전체적이고 신비한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삶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이 말하기에도 너무 벅찬 ‘도’를 붙잡으려고 애썼다. (225p)

 

선행은 안보이게 하고 행동은 은밀히 하라.

어리석고 둔한 사람같이 보이도록. (226p)

 

“우리 가출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228p)

 

“나 때문에 법석 떨지 마라. 중들답게 침착하라. 누구건 간에 임종 때는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다.” (228p)

 

 

<11. 차별 없는 참사람 ? 임제>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의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이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238, 239p)

 

그는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절대의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상파괴는 반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친정한 종교 정신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239p)

 

자기가 본래 자유인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시적인 거죽의 ‘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스스로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무위진인 - 차별 없는 참사람’은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는 마른 똥 막대기와 같은 생태로 격하되고 만다. (240p)

 

자기 신뢰의 이유를 알아야만 모든 근본적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241p)

 

그들 자신은 자기들이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상태로 주저 앉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즉,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 (242p)

 

스승이 어떤 한 방법을 즐겨 사용하면 제자들은 덮어놓고 이를 흉내내어 결과적으로 그것을 제도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244p)

 

우리를 본래의 자신과 갈라 놓고 있는 그 심연도 건너지 못하면서 달에는 건너가서 무엇하리요! (245p)

 

도의 수행자들이여! 도는 어떤 인위적인 노력이나 행동에 있는 게 아니다. 다만 평상시의 일들, 이를테면 옷 입고 밥 먹고 똥누고 오줌 누며 피곤하면 잠자는 그런 일들 속에 불도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이 말을 듣고 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 것이다. (246p)

 

어떤 일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근심하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귀인(貴人)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246p)

 

오직 참으로 실재하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250p)

 

그대가 만일 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면서 속된 것은 지독히 싫어한다면 그대는 절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번뇌는 바로 사념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는다면 번뇌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으리오?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도’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251p)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속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 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 (251p)

 

위대한 선사는 언제나 공안을 갖고 우리를 궁지로 마구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엄청난 고민 속에서 문득 내면의 눈을 뜰 수 있고 그리고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리석음과 미망들이, 일단 깨닫고 나면 곧 사리질 악몽임을 알 수 있다. (254p)

 

자신을 속이지 마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지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255p)

 

 

<12. 날마다 좋은 날 ? 운문>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아마도 그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259p)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하찮은 상념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썼으며, 그 결과 남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또한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는 정신생활의 비밀을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260p)

 

“사람마다 속안에 빛을 지니고 있는데 보려고 하면 그것은 금방 암흑으로 변한다.” (260p)

 

마조와 마찬가지로 운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참본성인 ‘이것 하나’를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목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참본성에 이르는 길은 참본성 밖에 없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265ㅔ)

 

그대들이 진실로 ‘참나’를 보았다면 불 속을 지나면서도 불에 타지 않을 것이고, 하루 종일 떠들더라도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진실로 한 톨의 쌀, 한 오라기의 실을 건드리지 않고도 매일 같은 옷 입고 밥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266,267p)

 

시간의 영역에서는 발전, 탄생, 성장, 성숙, 쇠퇴 등을 논할 수 있으나 절대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질문자의 마음을 현상의 차원에서 초 현상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운문의 독특한 방법이며, 아울러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 버리는’ 좋은 예이다. (273p)

 

선종의 다섯 종파에서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신생활에서는 궁극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즉 비록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해도 평지로 내려오는 행위를 통해 더 높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피안에 이르렀다 해도 차안으로 되돌아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과거에 얻은 은폐된 내면 생활의 습관들을 모두 털어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다.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파도를 타고 물결 치는 대로 흘러 그 속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다. (275p)

 

“자유롭고 걸림 없이 그대의 길을 가라. 특별한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대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라.” (276p)

 

“무엇이 저의 ‘참나’입니까?”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자이지.” 사실상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한 말이다. (277p)

 

 

<13. 지금 여기 ? 법안>

 

다른 종문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그들의 따르면 세상 만가지 사물이 우리에게 절대를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참사람으로 인도해 간다. (280p)

 

‘푸르고 푸르게 빛나는 대나무숲은 그 모두가 바로 법신이요, 노랗게 만발한 들꽃들은 모두가 반야(지혜) 아닌 게 없노라.’ (281p)

 

명상적 관조는 법안종에 흡수되어 그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즉 관심의 초점을 속안의 참나에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신비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282p)

 

“실체는 바로 그대들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것을 이름이나 모습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것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을까?” (284p)

 

일단 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만물을 보지 않고 근본 진리의 눈, 즉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세상 만가지 물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눈을 ‘법안’이라 하는데, 법안 자신은 이것을 ‘도안’이라 불렀다. (286p)

 

털모자 눌러쓰고 녹음 방초 마주하니 그 느낌 전과 다르구나.

바로 오늘 머리는 희어지는데 작년에 꽃들이 이보다 더 붉었다.

그 어여쁨도 아침이슬처럼 스러지고 그 고운 향기 저녁 바람에 날리는구나.

구태여 꽃잎이 시든 다음에야 삶의 덧없음을 알까 보냐. (289p)

 

깊은 숲 속 새들은 피리처럼 지저귀고 수양버들 가지가지 금실처럼 춤추네.

구름이 돌아오니 산골짝 더욱 고요해지고 살구꽃 향기는 바람에 묻어 오누나.

온종일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았으니 마음 맑아지고 만 가지 근심 사라진다.

어찌 말로 다 그려내랴. 그대 이 숲 속에 오거든 함께 느껴나 보세. (291p)

 

선의 정신은 결과적으로 연수가 이룩해 놓은 그런 체계화나 절충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다. 실제로 연수는 전종과 정토종을 결합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즉, 어떤 현대 역사가의 말마따나 “염불, 독경 및 참회 등이 참선과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선이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수행절차와 결합하면 선은 그 당장에 독자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 있다. (294p)

 

 

<14. 선(禪)의 불꽃 ? 에필로그>

 

영원이라는 어머니 뱃속 안에서 시간의 첫 태동을 연상하는 것만큼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것도 없다. 가없는 공허, 절대의 고요와 침묵. (299p)

 

영겁의 침묵을 깨뜨리는 첫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다 아름답고 심금을 흔드는 체험이 있을까? 더구나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이다. 왜냐하면 하루하루가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사람의 하느님이다. (300p)

 

“제가 듣기로는 석가모니께서 설법을 시작하셨을 때는 황금빛 연꽃이 땅에서 솟아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스님께서 스승이 되는 마당에 무슨 상서로운 조짐이라도 있었습니까?”

“내 지금 막 문 밖의 눈을 쓸었네.” (301p)

 

 

“어제 무당이 푸닥거리를 했는데 자네도 그럴 보았니?” “보았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자네는 그들만도 못하네.” “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들은 남이 웃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자네는 딴 사람이 웃는 걸 보고 겁을 내니 말일세.” (302p)

 

“자네도 계피꽃 향내를 맡는가?” “그럼요.”

“그것 보게. 이래도 내가 자네에게 무얼 숨겼다고 하겠나?” (303p)

 

선사들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려는 정신을 갖고 있다. 그들이 얻은 경지가 아무리 높다 해도 그들은 항상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정신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점에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아래로 내려오는 길뿐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그래서 한 중이 계성 선사에게 물었다. “향상일로란 어떤 겁니까?” 계성이 대답했다. “아래로 내려오면 그것을 체험할 수 있을 걸세.” (305p)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나는 높이높이 올라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306p)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구하려면 아무 일에서도 즐거움을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성취하려면 아무 것도 성취하길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거든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306p)

 

최고의 즐거움은 즐거움이 전혀 없는 즐거움. (306p)

 

성인은 모으려 하지 않는다. 남을 위해 살면 살수록 그의 삶은 더욱 풍요롭다. 베풀면 베풀수록 더욱 풍성해진다. (307p)

 

‘나’라는 게 없을 때 오히려 ‘나’를 실현할 수 있다. (307p)

 

“깨달았으나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요?”

“거야 꿀 먹은 벙어리와 같지.”

“깨닫지는 못했으면서 청산유수 같이 말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거야 사람들 이름을 외는 앵무새지.” (307p)

 

“진리의 자리가 좌불안석이면 온 누리의 평화가 깨지는 법.” (309p)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 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311p)

 

엘리드는 선의 정신은 하느님 역할을 하기보다는 하느님이 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했다. (312p)

 

물고기는 물에서 나고 사람은 ‘도에서 난다.

물에서 난 물고기는 연못의 깊은 그늘을 찾으면 그저 만족스럽다.

‘도’에서 난 사람은 다툼과 근심을 모두 잊으면 그의 삶은 그저 편하다.

그래서 말하노니,

물고기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물 속에 잠기는 일,

사람에게 필요한 건 오로지 ‘도’에 깊이 침잠하는 일. (313p)

 

“철학자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낯익게 바라본다.” (316p)

 

불안 선사라고 불리우는 청원은 선 수행엔 두 가지 병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나귀를 찾는 병이요, 또 하나는 나귀를 타고서 내리지 않으려 하는 병이다. (319p)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진주는 그것을 탐내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321p)

 

“아예 나귀 탈 생각을 버려라. 그대 자신이 곧 나위요, 온 세상이 또한 나귀다. 그러니 새삼 나귀를 탄다고 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그대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321p)

 

홀로 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327p)

 

나에게 있어서 성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되는걸 뜻한다. 따라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참나를 되찾는 문제이다. (330p)

 

참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다. 우리의 전 생애는 한 편의 로맨스다. 즉 우리의 참나를 발견해 가는 로맨스다. (330p)

 

우리의 전 생애는 ‘진실 아닌 것에서 떠나 진실로 가는’ 순례이다. (331p)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331p)

 

석두(石頭)가 처음으로 그이 스승 청원(淸原)을 찾아갔을 때 청원이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석두는 육조 혜능이 가르치고 있는 조계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청원이 다시 물었다.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제가 조계에 가기 전에도 잃는 적이 없는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청원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조계엔 무엇 하러 갔었더냐?” 이에 석두가 대답했다. “그나마 조계에 안 갔더라면, 잃은 적이 없는 그것을 어찌 깨달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스승이 그대에게 무엇을 떠먹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은 그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스승의 가르침은 최소한 제자가 깨닫는 데에 하나의 촉매 역할은 할 것이다. (334p)

 

물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가지 않으면 어찌 앉아서 구름 피어 오르는 걸 보리까. (334p)

 

예기치 못했던 자발적인 선(善)의 체험도 우리들을  ‘얕은 나’의 껍질에서 해방시켜 케케묵은 관념과 잼대들을 벗어 던지고 곧바로 피안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생각 없이 그저 속안의 참나에 서 있는 그대로 선(善)이 흘러나왔을 때, 그것 바로 선(禪)이다. (339p)

 

티없이 맑은 어린애와 같은 마음의 순수한 샘에서 솟아나는 도덕성과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곧 아름다움이다. (341p)

 

내 마음 가을 달과 같아서 푸른 연못 한결 맑고 깨끗해 보인다.

정말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니 무슨 말로 그것을 표현하리오. (346p)

 

그칠 때를 아는 것

내 자신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 (349p)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깨달음의 계기를 연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뿐더러 대단히 매력적이다. (350p)

 

봄에는 백 가지 꽃이 피고 가을엔 다리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엔 눈이 내린다.

이러쿵 저러쿵 헛 걱정을 안 하면

인생살이 그대로가 호시절이다. (354p)

 

인생은 가히 역설적이다. 자신의 생활에 근심걱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며, 근심걱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 남을 돌볼 수 있다. (354p)

 

교황 요한 23세는 죽기 전 날 친구들이 눈물 흘리는 걸 보고 그는 ‘성모 마리아 찬가’를 불러달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힘을 내! 지금은 눈물 흘릴 때가 아닐세. 지금은 기뻐하고 찬미할 순간이야!” 그러면서 그는 옆에 서있는 의사를 위로했다. “박사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행 가방은 벌써 꾸려 놓았습니다. 떠날 순간이 오면 머뭇거리고 싶지 않습니다.” (355p)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그는 이 책 어디서도 선이 자신한테 엄청난 마력을 발휘했다거나 심장을 뛰게 했다고 애써 가장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선의 통찰과 기독교 교리를 조화시키려는 복잡하고 쓸모 없는 작업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선을 취하여 그것을 아무 주석 없이 소개한다. 선에 정통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즉석에서 인정할 것이다. (368p)

 

문제는 기독교와 선을 나란히 놓고 그 둘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수학과 테니스를 나란히 놓고 서로 비교하려 애쓰는 것과 거의 똑 같은 일이리라. (368p)

 

기독교인인 오선생이 선을 다루는 강점 중의 하나도 그에겐 그러한 곁다리들은 떼어 내고 선을 이야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369p)

 

독자 자신이 선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갖고 있지 않는 한, 그는 선에 관찬 고전 자료들로 꼭 들어찬 이 책에 얼떨떨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논리적인 서구식 의식 구조를 지난 사람들한테는 선명히 드러나지 않는 어떤 신비한 목적 때문일 것이다. (370p)

 

그러한 사람은 선이 무엇인가를 바로 볼 가망성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미리부터,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임이 틀림없다고 단정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370p)

 

근본적으로 불교는 부처 자신의 깨달음을 믿고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 대신 그 깨달음의 체험 속에 모두가 직접 참여하고 개개인의 존재가 온 몸으로 체험하길 바란다. 따라서 그 속에 담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전혀 모르고서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속에 담긴 내용들은 전혀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단순히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해 줄 뿐이다. (371p)

 

선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 그렇다면 직접적인 체험이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바로 삶 자체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가 산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372p)

 

선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원자처럼 핵심을 이루는 사실이라 해도 존재의 근본적인 진실은 논리적으로 해명하거나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선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논리적인 답안처럼 되는 순간 이미 과녁에서 빗나가고 만다. 그 순간 적나라한 체험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그 대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앞장서기 때문이다. 선은 진실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과 진실에 반대되는 것의 증명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진실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372p)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아니면 그렇게 분별하고 나눠 놓는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깨쳐 아는 일이다. (373p)

 

개개인의 체험은 이렇듯 불교 철학의 바탕을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근본적으로 경험 내지는 체험주의다. 비록 나중에 와서 깨달음 체험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변증법적으로 발전되긴 했지만. (373p)

 

선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의 명상은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있고’, ‘정신 차리고자’ 한다. 다시 말해 언어의 형태에 의해 왜곡되고 속임을 당하는 그런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는 일종의 의식을 일깨우고자 한다. (374p)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 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 불교의 목적은 이러한 통찰력이 생길 때까지 의식을 맑게 하는 데에 있다. (374p)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공식화된 인생 철학인 ‘교리’에만 치중하고 불교의 생명 그 자체인 ‘체험’을 소흘히 하는 것은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일이다. (375p)

 

기독교는 늘 이러한 해석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원전에 대한 정확한 전달, 진정한 속뜻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릇된 해석을 몰아내고 처벌하는 일과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너무나 그런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복잡하고 세세한 점들까지 애써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기 환상에 빠진 주장도 나오곤 한다. (375p)

 

기독교 신자들은 대게들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라는 단지 바르고 피상적일 따름인 신앙에만 만족하려고 하며 거기서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의 하나됨을 통해 이룩하는 사랑과 소망의 삶 속으로 전적으로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376p)

 

기독교인과 불교도가 똑 같은 정도로 선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할까? 그렇다. 만일 이 때의 선이 언어의 형식과 편견에서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의 직접적이고 순수한 체험을 의미한다면 대답은 긍정적이다. (381p)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나 우수성으로나 항상 앞장선다. 반면에 선에 있어서는 체험이 항상 선행한다. (382p)

 

선은 구원과 깨달음을 향한 노력에 있어서 조차도 인간을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독립은 자기 존재의 본질과 정신의 속 알맹이를 바로 보고 그 속 알맹이를 온전히 꽃피워내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외적 여건과 권위로부터의 독립이다. (383p)

 

기독교의 체험은 항상 그리스도의 신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가 공동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약간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 즉,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종교적으로 교회와 함께 체험함’을 뜻한다. (383p)

 

선은 전달 가능성의 유혹은 단호히 물리친다. 그리고 선의 가르침이나 수행 속에 담겨 있는 상당한 양의 독설과 폭력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기존의 설명과 안이한 해석들을 죄다 쓸어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기독교의 체험은 그것이 이미 확립되어져 있는 신학이나 여러 상징들과 일치하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선 체험은 오로지 그 독자성의 바탕 위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384p)

 

선이 전달하는 것은 당사자가 이미 갖고는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말씀을 전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실현이며, 계시가 아니라 자각이고,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존재의 자리를 여실히 깨닫는 일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설교와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직관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볼 것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를 준비하기 위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상호보완적이며, 이런 까닭에 선은 기독교 신앙 내지는 기독교 신비와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다. (385p)

 

이 이야기는 역으로 혜능이 조사의 역할, 즉 가장 순수한 선을 가르칠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는 부처 자신의 깨달음을 제자들에게 전수할 자격을 부여 받았다. 그러나 만일 그가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이 깨달음을 이해 시킬 수 있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그는 필시 깨달음에 대한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파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선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와 가르침을 그들에게 들이붓는 셈이 된다. 선은 이런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다. (386p)

 

따라서 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의미에선 반 언어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히 뒤엎은 것이다. (386p)

 

선은 이러한 편견을 몽땅 부수고 우리 머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환상적 모습을 쓸어내기 위해, 그리하여 대상을 ‘직접 보게’ 하기 위해 언어를 뒤집어 사용한다. 선은 “생각지 말라. 그냥 보라!” 이다. (387p)

 

선은 단순히 우리를 일깨우고 깨쳐 알게 한다.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선사의 행위와 몸짓은 가르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자명종’의 울림과 같은 것이다. 즉, 자명종의 울림과 거기에 대한 잠자는 사람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388p)

 

깨달음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거기에 있는 것을 단순히 ‘보며’ 어떤 해석도 해설도 판단도 결론도 덧붙이지 않는 ‘순수한 일념’에 있다. 그것은 그저 ‘보는’ 것이다. (390p)

 

우리들 속 안에 있으면서 성신 안에서 성부를 사랑하는 성자를 가리켜 스즈끼는 선의 용어로 “그림자 없이 서로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스즈끼는 에크하르트의 저 유명한 말, 즉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하느님이 나를 바라본다.”라고 하는 말과 선에서 말하는 반야가 같은 표현이라고 자주 언급한다. (392p)

 

 

내가 저자라면

 

본 책은 저자가 밝힌 대로 그 저술 취지가 스즈키 다이세츠의 ‘Living by Zen’을 읽고 난 후 알게 된 선을 빛낸 초기의 주요 선사들의 보다 심오한 정신과 언행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 그러한 취지에 비추어 볼 때 현재도 초기 선사들에 대한 연구의 주요 도서로 인정되고 있고, 또한 ‘스즈끼 다이세츠가 말년을 이 원고를 읽는 즐거움으로 보냈음’을 감안하면 선의 심지를 당긴 초기 선사들의 확보 가능한 기록은 다 모아서 잘 집대성 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 광범위 함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선사들의 이야기가 도통 그 뜻이 이해되지 않았는데(물론 지금도 그렇다 - -;;) 아마도 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이 된다. 저자의 권유대로 토마스 머튼의 해설을 읽고 나니 조금 이해가 되었는데, 아마도 이 책의 작성에 영향을 주었던 스즈끼의 책들을 먼저 읽었다면 더욱 이해가 쉬웠을 것 같다. 나는 이 책과 더불어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과 현각 스님의 ‘만행’을 읽은 것이 선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얻는 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서 내가 영향을 받은 부분은 그 동안 피상적으로 알던 선에 대해서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다양한 선 관련 책들 및 선문답을 보면서 그것을 지식의 관점에서만 접근했지 가장 중요한 자각 및 ‘나의 발견’이라는 측면에서는 미진했던 것 같다. 특히, 토마스 머튼이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선을 바라보는 관점을 설명해 준 부분은 머릿속에 쏙 들어왔는데, 같은 신앙인으로서 선을 바라보는 눈을 다시금 뜨게 해 준 좋은 글이었다고 생각된다(참고로 나는 천주교인이다).
 

본 책의 장점은 당연히 선의 시조들의 다양한 정신과 일화, 선문답 이야기가 총 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쉬운 점은 현대적 관점에서의 우리의 이야기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이 시조들의 기록으로서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책에 쉽게 다가가기 힘든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현재 이 시점에서 내가 선에 대한 책을 쓰는 저자라면 어떻게 할까’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저자라면 다음과 같이 구성하고 싶다.

 

1 장 : 불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불교의 기원과 소승불교, 대승불교에 대한 이해 없이 선불교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이 깨달음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흐름의 차원에서 각 종파의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선의 독특한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부분은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에 아주 설명이 잘 나와 있다. 이 책의 요약 내용을 여기에 넣으면 충분할 것 같다. 특히, 세 종파를 ‘수박 관찰’의 입장에서 비교한 것은 탁월한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2 장 : 선에 대한 이해

토마스 머튼이 설파한 내용과 같이 선이 기본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핵심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처음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스즈끼 다이세츠의 ‘선 공부’라는 책이 여기에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3 장 : 관련 철학의 이해(장자/노자/공자/맹자)

‘선의 황금시대’를 읽다 보면 계속적으로 중국의 철학과 비교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선불교가 기존 사상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데 그렇다면 선불교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도 기존 사상의 핵심 내용에 대한 전달이 필요할 것 같다.

 

4 장 : 선사들의 이야기(고전)

‘선의 황금시대’의 축약. 다만 선사들의 일대기 중심 보다는 주요 담화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또한, 스즈끼 다이세츠의 ‘가르침과 배움의 현상학 ? 선문답’의 주요 내용을 각 담화와 연결하여 주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5 장 : 한국 선사들의 이야기

현각 스님의 ‘만행’ 에 보면 숭산 스님을 비롯, 숭산 스님의 스승이신 고봉 스님과 한국 선종의 대스님들이신 경허 스님, 만공 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분들을 포함한 한국의 유명한 선사들의 이야기도 실으면 좋을 것 같다.

 

6 장 : 깨달음 이야기(현대)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은 참선 수행자들의 질문과 이에 대한 숭산 스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스님의 가르침만으로 책을 만드는 것은 환자의 설명 없이 의사의 처방전 만을 소개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라는 스님의 의지 때문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몇 가지 고민에 대한 큰 스님들의 가르침을 정리해 넣으면 좋을 것 같다.

 

7 장 : 참선 수행 방법(실전)

마지막으로 실전이다. 이 부분에는 조현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포함된 ‘깨달음의 여행’ 편의 다양한 참선 방안과 같은 내용을 소개해 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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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9.03.02 00:51:25 *.111.241.42
성우님이 저자로 구성하신 내용 정말 좋은데요. 뒤로 갈수록 흥미있어요.^^ 꼭 써 보셔요. 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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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1:15:40 *.176.68.156
목차 잡았다고 책 쓸 수 있다면 저희가 이 힘든 레이스 안 해도 되겠지요ㅎ.

격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런데 책 쓸 정도는 아니어도 도서관에서 책 빌려다가 쌓아놓고 이것저것 보고 있으니 정말로 좀 정리가 되는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 저술의 씨앗이겠지요? 물론 열매를 맺으려면 물 뿌리고, 풀 뽑고, 비료 주고, 뜨거운 태양과 비바람을 견뎌내는 시간이 있어야 하겠지만요.

세상사 털어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밧줄 끝을 단단히 잡고 온 힘을 쏟아 덤벼라.
뼈 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매화 향기가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

다시 봐도 명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한 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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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9:04:07 *.255.182.40
구성 좋은데요. 일단 불교 철학을 이해하는데는 아주 도움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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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2009.03.03 11:01:32 *.52.96.21
저는 이 책을 서양인들에게 선에 쉽게 다가갈수 있도록 꾸민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장성우님의 말씀처럼 구성하면 더 현실적이면서 더 쉬운 입문서를 위한 입문서가 되겠네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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