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좋은

함께

여러분들이

  • 좌경숙
  • 조회 수 5787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9년 3월 1일 23시 56분 등록

북 리뷰 #3

<선의 황금시대>  오경웅지음.  류시화 옮김.  경서원.  1996 
    원제는 “ The golden Age of Zen”  1967  저자 John C.H. Wu


*** 저자에 관하여

  吳經熊은 1899년 3월 28일 중국 영파 시에서 태어났다.  영파의 사투리는 “상해에서 영파 사람하고 정담을 하느니 소주 사람하고 말다툼을 하지 ”라는 말이 유명할 만큼 재즈 음악처럼 시끄럽게 들리고 그 억양이 잘 지워지지 않는다. “영파의 거리는 더럽다. 영파의 강물은 언제나 황토빛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바로 그러한 기분 속에서 건강하고 활기를 주는 것이 있다. 그 하늘 자체가 어디서 보아도 싱싱하고 명랑하다. 나는 까다롭게 조촐한 것보다는 건강하게 지저분한 것이 좋더라. 남이야 좋아하든 말든 이것이 영파인의 기백이요, 나는 그 기백의 화신이다.”  오경웅은 역사상 가장 쓰라린 시대이던 1949년 봄에 마지막으로 고향을 둘러본 후 고향을 떠나서 소년시절의 아쉬운 추억과 그리움으로 이렇게 영파를 회상한다.

*유년기
  그의 아버지 吳家昌은 1847년 영파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겨우 3년간의 구식 교육을 받았고  미곡상의 도제로 출발하여 40대에 은행가가 되었으며 50대에 은행 총경리를 지냈다. 후에는 사장이 되어 후한 인심으로 이웃사람들의 칭송을 많이 받았고 1909년에 별세했다. 결혼생활 20년이 지나도록 후사가 없자 가난한 집에서 소실을 취해, 형(1889)과 누나(1894)와 오경웅을 낳았다. 오경웅이 작은 어머니라고 불렀던 이 생모는 그의 나이 4살에 30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남긴 말은 “내가 빚 갚으러 댁에 왔던가 봐요. 삼남매를 낳아 드렸으니 책임을 벗고 인제 나는 갑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였다.

오경웅은 그를 기른 큰어머니를 눈물로 회상한다. 그는 4살부터 15살, 큰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 침대에서 잤다. “ 그는 나를 무척 사랑하였고 나를 위하였고 노비와 같이 섬겼고 ,날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나의 옷을 지었고, 나를 위한 별찬을 장만하였고, 내게 혹독한 벌을 주었거나 듣기 싫은 소리로 꾸짖은 적이 없었다. 반면에 나는 여러번 그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고 발길로 차고 물건을 내 던졌다. 한번인지 두 번인지 모르나 ‘당신이 나를 낳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요? 아니,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예요.’ 이렇게 말할 만큼  무도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오직 흑흑 느껴 울면서 ‘네 작은 엄마보다 내가 먼저 죽었던들 이런 꼴을 안 당했을 것을....’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이 골수에 사무치도록 찔려서 나는 엉엉 울기 시작하여, 그가 그 말을 철회하고 죽지 않고 살기를 약속할 때까지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물론 둘이는 얼른 화해하여 이전보다 더 친밀하게 되었다.”

큰어머니는 오경웅의 공부를 보며 외국양행의 지배인을 꿈꾸고 주변에 자랑했다. 그의 욕망은 아주 낮았으나 그의 사랑은 순수했다. “우리 덕생이(오경웅의 아명)는 성질은 불 같아도 그 마음씨야 황금 같지요...”하며 친정 일가에게 자랑하였다.

오경웅이 15살 때 열병에 걸렸다. 큰어머니는 20일 동안 그를 간호하고 기진하였다. 과도한 초조와 수고로 혈관이 터져서 10일후에 숨졌다. 큰어머니 사후 몇 달 동안을 그는 거의 정신을 잃고 지냈다. 정신이상의 경계선에서 방황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거울에 비치는 자기모습을 보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총알처럼 떠올랐다. ‘아무리 늦어도 몇 십년 뒤에는 나도 죽을 것이고 그때에는 우리 어머니와 다시 만나게 되겠지... ’ 그러한 생각이 그를 그 큰 슬픔에서 벗어나 어미 없는 세월을 버티게 해 주었다.

*학업
 6살때에 유학자인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7살에 <24孝傳>이라는 책으로 한자를 익혔다. 시를 읊는 형님 옆에서 <시경>의 정서를 익혔다. 소박한 관념, 풍부한 감성 ,몇 줄안에 연애와 우정의 철학 전체가 살아있는 중국 예술의 이상 정신이 그 속에 녹아있다.

9살-12살까지 한향 소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 시절에도 공자의 논어가 윤리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공자의 성심, 호학, 낙지에서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논어의  “吾十有五而志于學” 페이지위에 “吾十有二而志于學”이라고 써 넣었다.
당시 성행하던 구식 교육법은 한 자씩 한 구씩 한 절씩 모조리 기억하여 외우게 하는 것이었다. 글 뜻이 겨우 반쯤 소화되어 가지고 이를테면 수시로 그 고전을 소 모양으로 반추하였다. 그리하여 고대 성현들의 철학이 조금씩 소화되고 흡수되어 우리 사상을 구성하는 생명있는 조직체로 화하였다.
공자의 말이 비범한 것은 평범해서 일반이 알아듣기 쉽기 때문이다. 유교가 크게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범속하지 않고 평범하게 되느냐는  것이다.

12-14살까지 중학교에서 초보 자연과학과 유학서적을 공부 하였다. 특히 맹자를 읽었다.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주는 벼슬이 있고 인간이 주는 벼슬이 있다. 인애, 정의, 충성, 신의와 즐거운 마음으로 선을 수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함이 하늘이 주는 고귀한 지위요, 귀족, 대신, 고관은 인간이 주는 지위이다.”(맹자, 告子 上)라는 말이 특히  감명 깊었다. 
천작은 내적인 본질이므로 빈부귀천을 따질 것이 아니다. 인작은 외면의 부수물로서 그 영화는 인간이 줄 수도 있고 뺐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내재의 귀함을 닦고 외면의 귀함에는 언제나 무관심하다.

 맹자는 섭리의 작용에 대한 웅장한 통찰력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어떤 이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길 때는 언제나 먼저 그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고 그 사람의 신경과 뼈에 피로를 주고 그 사람의 사지와 전신에 주림을 주고 그 사람을 극도로 궁핍하게 하고 그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혼란케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늘은 그 사람에게 착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그의 인내력을 강화하여, 그가 아직도 능력이 없는 바를 그에게 알린다.”(맹자, 고자, 하)
맹자는,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비애와 시련 가운데서 생명이 솟는 반면에 안일한 쾌락에서 사멸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고난철학이 중국인의 인생관에 깊은 감화를 끼쳐 지난번 대전 중 중국의 모든 벽보중 가장 인기를 끈 벽보가 “승전해도 교만하지 말고, 패전해도 상심 말라 ”라는 표어였다.
이런 맹자의 가르침은 오경웅의 내적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군자의 본질은 인의예지가 그의 정신에 뿌리박혀 그 서로 조화된 부드러운 모습이 그의 용모에 나타나 그의 등에 가득하다. 또 사지에 까지 번지어 그 사지가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아는 것 같이 보인다.”(맹자 진심 상)
그는 또, “공자와 맹자와 석가와 노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들을 ‘인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교사들’ 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 시절 이미 서방의 영향이 학교 안에 들어왔다. 낡은 고전과 나란히 지리, 식물학, 동물학의 초보와 약간의 천문학까지도 가르쳤다.
학과는 신학과 구학의 비빔밥이었다. 신 학과는 새로운 실험법을 가르치고 구 학과는 재래의 암송법으로 가르쳤다.
어느 학교에서나 영어가 제 2어학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영어가 좋았다. 나중에는 중국의 고전과 문학의 영역본을 읽으면서 영어의 취미를 늘여갔다.

그후  1918년에는 예수회 신부에게 불어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그때에도 유명한 중국의 문장과 시가의 불역을 교재로 썼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에도 모국어를 잊지 않았다. 사고는 영어로 하고 감탄은 중국어로 한다.

15살 때에 고향의 효실 중학을 다니며 대수 기하 화학 물리학에 치중하여 공과진학을 준비했다. 그는 전 학과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고 특히 물리학은 언제나 반에서 1등이었다.
2년 후 상해에 있는 호강대학에 입학하여 과학연구를 계속했다. 수소실험을 하다가 사고를 당하고 큰 피해는 없었지만 과학자는 상상력과 논리적 추리 외에도 인내력과 자제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평생의 직업을 궁리하고 있을 때 급우인 서 지마(徐 志?)가 우연히 찾아와 법률을 배우러 전진의 북양대학으로 갈 결심을 알려서  그도 함께 지원했다.

*혼인
 1916년 4월12일, 그는 부모끼리 6살 때 이미 약속해둔 아내와 결혼하였다. 혼례 때까지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책을 읽어 배운 것이 아니고 가정의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 여성다운 언행과 가사의 처리 등등을 자기 어머니한테 배운 결과 아내는 무엇보다도 범상치 아니한 상식이 가득했다. 그후 1918년 장남 조림(토마스)이 출생했고 이후 모두 13남매를 낳아 길렀다.
여기서 일화하나, 장남 토마스를 본 친구가 토마스가 형 인줄 알았다고 했다.
오경웅의 해석, 자신이 실제적으로 무능해서 아이들이 다 자활해야 하니 일이 고되서 일찍 늙는다고, 그는 세상사에 무관심한 신비가이기 때문에 세월의 격류를 슬쩍 스친데 불과하다고 했다.

* 법학 공부
 1917년 봄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북양대학이 북경대학교의 법률학계에 합병된다고 하여 그는 아내 가까이에 있기를 원해서 상해에 있는 미국 감리교 선교회의 동오 법과학원에 등록했다. 존 우라는 이름으로.
당시 중국 대학생들 사이에 서양식 이름이 유행했는데 그의 중국이름이 징 융으로 발음되기에 빨리 말하면 쭁 처럼 들렸다. 그래서 JOHN,WU 로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에 개교한 지 얼마 안되는 이 학교에는 실지로 주중미국법원의 판사들과 상해의 유명한 법률가들이 강의를 했다. 오경웅은 여기서 6학기를 연달아 최우등생이 되었고  후에는 이 학교의 교장이 되기도 했다.
그는 이때, 1917년 겨울, 감리교회 세례를 받았다.

1920년 여름 동오 법과학원을 졸업하고 가을에 낭킹호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가을에 앤 아버의 미시간 법과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다. 이때 <미시간 법학 평론>3월호에 게재한 ‘중국 고대 법전 및 중국의 법과 철학에 관한 기타 자료 ’란 논문과 편지를 대법관 올리버 웬델 홈즈에게 보냄으로서, 이 80세의 노 대가와 약관 22세 청년의 교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앙과 기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4년 동안 80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오경웅은 두 사람은 서로 어린아이같이 우주의 신비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회상한다. 대법관 홈즈는 1935년 3월 6일 94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1921년 11월 카네기 국제 평화장학회의 파견 장학생이 되어 파리에서 비교법을 공부했다.
이어 독일의 신 칸트학파 법 철학자 루돌프 슈타믈러 밑에서 연구했다.
1923년 가을 다시 유럽에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 법과대학의 파운드밑에 연구생으로 공부했고 그해 12월 20일 처음으로 홈즈를 직대면을 했으며 크리스마스 휴가를 함께 보냈다.
나중에 선의 황금시대에 이때의 만남을 선 체험으로 묘사하고 있다.

1924년 5월에 중국으로 돌아왔고 가족을 상해로 데리고 와서 동오 법과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27년 1월1일 강소성 정부가 신설한 상해입시법원의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 법원은 피고가 조약 체결권, 즉 치외 법권을 향유하는 국가의 시민인 사건을 제외하고 상해 공공 조계 내의 일체 분규에 대한 재판권을 가졌다. 즉 쌍방이 중국인인 사건과 원고가 외국인이요 피고가 중국인인 사건을 재판하는 곳이었다. 그는 외국인의 재판관(Praetor Peregrini)이 된 것이다.
이때의 뛰어난 업무 수행으로 ‘솔로몬이 동헌에 좌정하다’, ‘오청천’ 별명을 얻으며 인기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곧이어 부장판사가 되었고 법원장이 되었다. 
1929년 12월 노스 웨스턴 대에서 로젠탈 기금 강사가 되어 한학기를 강의하고 1930년 1월 하버드로 가서 법학사상 연구로 한학기를 보냈다.

이때를 회상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집에 있으면 집 때문에 병이 되고  집을 떠나 있으면 집 생각에 병이 든다.”

1930년 가을 상해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변호사 개업 한달 동안의 수입이 판사와 교수시대의 봉급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많았다.
너무 과한 돈은 만악의 근원이 되었다. 이렇게 멋진 돈벌이를 그는 계속하였고  차차 사건 의뢰인들의 파티에 초대받아 화관(花?)을 다녔다. 그리고 답례로 다시 같은 장소에서 파티를 베풀었다.  스스로 깨닫기도 전에 버젓한 오입장이가 되었다. 그 2년 반 동안 실지로 밤마다 나다녔다. 그 당시 그는 나라의 혼란 상태를 불평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을 전혀 도와줄 수 없는 교육받지 못한 아내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래서 두 번이나 이혼을 제안했는데 아내가 이혼에 동의하자 양심의 가책 때문에 후회가 되었고 아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1933년 변호사를 그만 두고 입법원에 들어가서 중국의 헌법을 기초하기 시작했다. 이때 맘에 드는 기녀를 첩으로 들이기로 하고 아내에게 의논했더니 ‘40이나 되거든 하나 정하시지’라고 하여 정말 40에 납첩을 하기로 악수하여 약속을 정하기도 했다.

이후 아이들에게 조언하기를 “네 아내는 네가 골라라. 고를 때 주의하여라.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어떤 사람하고 결혼하든지 당초에 천사가 되기를 바라지 말아라. 세월이 가는 동안 천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1937년 12월 18일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그가 가톨릭이 된 이래 가족이 뒤따라서 입교하였다. 이후 그와 아내는 그리스도의 성심 안에서 안정을 발견하였고  공통된 사랑으로 묶였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진전하면서 상호간의 사랑도 진전한다.
1933년 1월1일 손 과(孫科)박사와 함께 입법원에 들어갔다. 중국의 헌법을 기초하면서 그 초안을 발표하고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1935년 월간 <천하>를 조직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는 중국문화를 서방에 소개하기위해 만든 일반 문화와 문학의 영문판 정기 간행물이었다. 천하라는 제호는 하늘아래 있는 모든 것은 모든 백성들과 공유한다는 의미이다.(실제 영어로 발간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손과 박사와 천하의 동인들과의 교우는 그의 지적 흥미를 상당히 넓혀 주었고 호학의 정신도 증진시켰다.1935년 8월부터 그가 세례를 받던 1937년 겨울까지의 정신적 여정이 이 잡지속에 다 녹아 들어났다.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 사변이 일어나서 중일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8월 13일에는 상해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당시 남경에 있었는데 가족이 있던 상해와는 정상적인 교통이 두절되어 그는 모험을 강행하여 상해로 들어왔다. 그는 실상 상해 안에 갇혀있으면서도 중국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던 <천하> 의 동인들과도 다시 만났다.
1937년 11월 어느날 동창생 원가황이 찾아와 남경이 몰락하고 상해가 고립된 상황에서 일본 군벌에 대항하는 글을 쓰고 방송을 하는 당시 항일분자를 모조리 숙청하라는 소문이 있으니 자기 집으로 피신해 있다가 홍콩으로 탈출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때 그 원씨 가족은 이미 가톨릭이었고 그 집에서 리지외의 데레사의<한 영혼의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가톨릭이 되기로 하였고 진단대학에 있던 제르맹 신부에게 12월18일 세례를 받았다.
다음해 1월 <천하>의 동인들이 홍콩으로 가 버리는 동시에 그도 프랑스 증기선으로 상해를 빠져 나왔고 2월에는 가족이 홍콩으로 가서 구룡에서 동거하게 되었다.
1939년 10월 18일 견진을 받았다. 1940년 딸 난현이의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체험을 통하여 차례로 온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1942년 1월 7일 홍콩호텔에 본부를 둔 일본군당국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았다.
5월 2일 홍콩을 탈출하여 우여곡절 끝에 온가족이 계림에 닿았다. 피난살이 하게 된 집은 나무가 창을 뚫고 뻗어나가 폭풍이 오면 집전체가 흔들렸고  비가 새서 하룻밤에도 4번씩이나 잠자리를 옮겨야 했지만 마음만은 즐겁게 그 가난을 누렸다.
1942년 11월 1일부터 1944년 10월 31일까지 시편과 신약성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1944년 10월부터 가족이 모두 중경으로 이동했다. 북배에 있는 중산문화교육원에서 살았다.
1945년 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UN 회의에 참석했다. 8월 15일 입법원에서  UN헌장에 관한 보고를 했다.
1946년 여름 <시편>번역본이 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1947년2월  바티칸 소속 교황청에 중국공사로 파견되어 신임장을 비오 12세에게 봉정하다.
 이 기간동안 아내와 12남매와 며느리와 대자 1명과 비오 12세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은  아름다운 기록물로 남아있다.
1949년 2월 19일 공산군과 투쟁 속에서 당시 행정원장이던  손과 박사로부터 긴급히 귀국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그리고 새 내각에서 사법원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받는다.
 그는 세가지 조건을 확답 받고 입각을 결정했다.
  제1조건 어느 상관이라도 저의 일에는 절대 불간섭일 것.
  제2조건 사법관들의 봉급을 청렴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특급 대우해 줄 것.
  제3조건 재감자들의 교육을 지원해 줄 것
 그러나 새 조각을 발표할 사이도 없이 그 내각은 무너져버렸다.
이때의 방문에서 영파를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신약의 원고도 니콜라스 마에스트리니 신부에게 출간을 부탁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1949년 교황포검시종을 임명 받았다.
그러나 연회가 너무 잦고 다른 직무가 하도 많아서 독서할  시간이 없는 외교관 직을 사임하고 하와이 대학으로 정식 초대장을 받고 떠났다.
1949-1951 하와이 대학에서 중국철학 및 문학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1959년 11월 30일 아내 테레사 선종하다.
   임종장면은 선의 황금시대 355-356쪽에 있다.
1967년 타이완으로 귀국했다.
1967년 6월 홍콩 출신의 Maria Agnes와 재혼했다.
1978년 한국을 방문했다.
1986년 2월 6일 타이페이 양명산 자택에서 선종하다.

우리 말로 번역 출판된 책은 다음과 같다.
<내심낙원><동서의 피안><정의의 원천><선의 향연><당시사계>

한국의 김홍섭 판사, 일본의 다나까 고따로와 함께 동양의 3대 법사상가로 불리워진다.


 이상 1952년 발간된 오경웅의 자전적 신앙고백록인 <동서의 피안>에서 발췌해서 그의 전반부 인생을 정리해 보았다. 그는  중국에서는 명망이 높고 영향력이 매우 컸던 법률가이지만 1937년 가톨릭에 입문하면서 그의 후속 저서들과 그의  삶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와 열정이 가득 찬 신앙인의 면모와 삶의 태도가 매우 두드러진다.

그는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배경지식을 몸으로 익힌 사람이고 30대부터 이미 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연구를 많이 했다. 그가 선의 황금시대를 쓰게 된 배경에는 물론 대만의 중국 문화원의 교수로서 강의해 온 내용이기도 하지만 서방세계에 선을 바르게 알리고자 한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그가 하와이 대에 머무는 동안 집필했던 <동서의 피안>에는 이 책<선의 황금시대>의 배경이 되는 많은 자료들이 씌여있다.
 당대 지식인들의 잡지 <천하>를 통해서 발표한 글들도 있고 그의 주변에 있던 많은 외국인 신부님들과 학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정리하기도 한 글들이 많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세상사에 어둡고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노인이라고 말하지만 공부와 독서에 대한 열의를 한평생 간직하고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많은 글을 남긴, 동서양을 아우르는  박식한 아주 귀한 학자이다.  친구를 사귀는데 정성을 다했고, 13명의 아이들을 잘 돌보았고 동양인의 깊은 마음으로 서양인 친구들을 감동시켰다.

오경웅에 대한 평가는 세상에서의 성공보다는 신앙인으로서 또 영성가로서 존경을 받고 또 한 시대에 영향력이 컸던 사람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지만  여기서는 <선의 황금시대>에 관한 얘기만 남긴다.

저자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세세한 연보를 기록해 놓은 것은 격변기의 조국에서 동서양의 문명의 진수를 경험한 지식인이  어떠한 태도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자기의 삶을 증명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테마로 글을 쓸 때 요긴하게 사용하기위해서다.

글을 익히고 활용하는 데에 천부적 재능을 가진듯한 그를 좀 더 일찍 알아서 생전에 그를 만나서  알고 지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가 된다.

그의 책이 어린시절 부터 아버지의 서가에, 그리고 나의 서가에 항상 꽂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손이 닿고 마음으로 연결되는 인연이 없었을까?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까?


 
***마음을 무찔러드는 글귀

옮긴이의 말
9.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의 숨결로 읽는 것이다. 한 문장에 적어도 열흘은 명상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지은이의 말
11.여기에 펼쳐진 <선의 불꽃을 이어온 사람들> 이야기는 주로 중국 당나라 시대(618-906)에 살았던 위대한 선사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선 불교는  비록 6세기경 보리달마가 중국에 처음 건너옴과 더불어 시작되긴 했으나 , 그 심지에 본격적인 불이 당겨지지는 7세기경  혜능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 선의  불꽃은 마조, 석두, 남전, 백장, 황벽 그리고 조주 등의 생명력 넘치는 정열에 힘입어 더욱 뜨겁게 더욱 다채롭게 피어올랐다. 그러다 9세기에 접어들면서 여러 파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세대가 지나면서 불길이 점점 사그라들기는 했으나, 그래도 각 선종의 창시자들은 여전히 그 꺼질 줄 모르는 불씨를 속안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마지막의 에필로그는 주로 당대 이후의 문헌 중에서 내 나름대로 가려뽑아 엮은 글이다.

12.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은 선의 골수를 정확히 끄집어 내고 있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그 글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 세상을 떠난 스즈끼 다이세츠와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맨 끝머리에 덧붙임으로 달았다.
이 책은 중국 문화대학원의 설립자인 장 기윤 박사의 격려가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부탁으로 나는 그 대학에서 선에 관한 특별 강의를 맡았었고 그러면서 실로 많은 즐거움과 가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1. 선의 심지

20. 한자의 禪 이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어의 Dhyana(禪 那) 의 음역이긴 하지만 ,그 뜻은 서로 크게 다르다. 인도의 디야나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선은 존재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 본성 자각을 뜻한다.
선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늘 제자들한테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서는 그러한 일이 절대 불가능함을 일깨워왔다.

21. 스즈끼 다이세츠는 선은 깨달음의 교리를 중국적으로 해석한 것이며 아주 창조적인 해석이라고 하였다.
노장의 근본정신을 선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리고 꽃피운 것은 순전히 <대승불교>의 추진력이었다.

22. 노자의 도덕경 제 1장과 2장은 바로 선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 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심재)’ 이나 ‘마음을 잊음(좌망)’ 또는‘ 아침처럼 맑음(조철)’에 해당된다.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련의 발전에는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선이 상당한 공헌을 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26.자네는 기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는 이 텅 빈 상태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30.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공기처럼 맑아져야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선의 현대적 가치

33.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 보다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36“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람한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37.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38.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 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2. 처음 불을 밝힌 사람들

선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육조 혜능에 의해 불이 지펴졌다.
달마는 남인도의 바라문 계급 출신으로 527년 중국에 들어와 536년에 죽었다고 전한다.

41.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온종일 침묵을 지키며 벽만 바라보고 앉아 참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면벽 바라문 이라 했다.

42.달마가 썼다고 알려진 유일한 작품은 도와 진리에 두 가지 길에 대한 글이다.
도에 들어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를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43.‘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 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편 ‘행위에 의한 입문’엔 다음 4가지 길이 있는데 다른 모든 길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1)미움을 넘어 서는 길
  내가 받는 현재의 고통은 비록 이생에서의 죄가 없다하더라도 지나간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의 업보이고 그 업보가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고통스러운 일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친다.
2)삶에 적응하는 길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일이다.
3)집착을 버리는 길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
4)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46. 모든 존재자체와 생명체들의 본질이 ‘공’임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가지의 덕-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는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바로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이다.
47. 이 글은 종교문학의 관점에서 보면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선의 작품은 아니다.
이 글속엔 후대 선의 이야기들 속에 구구절절 흘러넘치는 숨 막히는 전환, 눈부신 섬광, 귀를 찢는 고함, 경악할 돌발사, 신비한 수수께끼, 머리로는 이해할 길 없는 저쪽 세계의 비약, 나아가 감질나는 유우머와 기이한 행동, 형언키 어려운 심장의 고동, 그리고 저 빼놓을 수 없는 우주적인 농담 등이 전혀 없다.
 
달마와 후대 선사들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면 그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혜가;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달마; 어디  너의 마음이라는 것을 내놓아 봐라. 그러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겠다.

48. 본래의 참마음은 항상 평화롭다. 거기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또 본래의 참 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이며 결코 생각의 대상일 수 없다. 만일 그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거나 파악하려 들면 그것은 이미 주체가 아니라 엉뚱한 물건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따라서 이 대상은 참마음일 수 없다.
또 마음을 내놓아보라고 요구함으로써 그는 잘 못 대상화된 마음이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자 스스로 발견 할 수 있게끔 도와 주었다. 즉, 스승은 이와 같은 뜻밖의 질문을 통하여 제자의 직관이 온전히 살아나 자신의 참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536년 달마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네 명의 제자를 불러 각자 깨달은 바를 말해보도록 명했다. 도부-총지-도육-혜가

49. 끝으로 혜가가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말해 보일 차례였다. 그런데 혜가는 입을 열지 않고 스승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야말로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
이렇게 해서 혜가는 선종의 제2조가 된 것이다.
 
51.달마- 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

3. 부처의 눈

 혜능( 638-713)은 광동의 영남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노씨였다.
그의 제자들이 <법보단경>이란 제목 아래 다독거려 놓은 가르침과 대화는 중국 불교 책자 가운데서 가장 걸작품으로 꼽힌다.
단경은 책상머리에서 짜낸 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온 ‘참사람(진인)’ 의 작품이다.

54. 젊은 시절 혜능은 땔나무를 해다 팔아 어머니와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으며, 따라서 읽고 쓰는 걸 배울 기회라곤 전혀 없었다.
하루는 장작을 날라주고는 가게 문을 나서다가 어떤 사람이 불경 외는 소리를 들었다. 한 귀절 듣는 순간 그는 대번에 그 뜻을 깨쳤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물어 그것이 금강경임을 알았으며 멀리 북쪽 황매산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는 5조 홍인에 관한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노모에게 하직하고 한 달이 넘는 긴 여행 끝에 황매산에 이르렀다.

56. 저 역시 스승의 뜻을 짐작했습니다. 실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스승과 저 사이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제껏 스승 앞에 얼씬 거리지 않은 것입니다.

61.고요한 밤의 정적 속에 얼굴을 마주하자 스승은 창문을 가리고 <금강경>을 설하기 시작했다.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는 구절에 이르러 혜능은 홀연히 크게 깨달아 세상 만 가지 물건이 일체 참 본성을 잃지 않았음을 알았다.
무아한 경지에서 그는 외쳤다.
“본래 맑고 깨끗하거늘 ,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래 나고 죽음이 없거늘, 내 어찌 예상했으리오! 본래 다 갖추었거늘, 내 어찌 눈치나 챘으리오! 세상 만법이 다 거기서 나오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혜능이 진실로 본 마음을 깨쳤음을 알고 스승은 말했다.
“ 본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제 본마음을 알고 제 본 성품을 보면 이것이 곧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이니라”

62. 이 모든 것이 661년, 혜능의 나이 겨우 스물 세살, 아직 속세의 신분일 때 일어난 일이었다.

67. 혜능의 직계 제자들
    남악 회양(677-744)
    청원 행사(?-740)
    영가 현각(700-790)
    남양 혜충(677-775)
    하택 신회(670-758)

74. 713년 가을  육조 혜능은 자기가 다음 달엔 인간 세상을 떠나리라고 알렸다.

75. “아마도 너희들이 슬퍼하는 까닭은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안다면 슬퍼할 리 없다.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 감도 없는 것이다.”
“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 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1) 교외별전
78. 법이라든가 도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80.말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적 핵심을 꿰뚫는 각자의 자세로 다가간다.

  2) 불립문자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 ,참 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3) 직지인심
마음이야말로 선의 열쇠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가 없다. 선의 궁극 목표는 참 본성을 보고 부처 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 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된다.
“참 본성이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쓰라. 곧 성불할 것이다.”

83.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 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 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84. 우리의 생각 대상으로의 마음은 참마음이 아니다. 참마음은 생각하는 것이지 생각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상화된 마음은 기껏해야 참마음의 그림자나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는 것은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는 것(직지인심)이 아니라 고작해야 그 가리키는 것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혜능이 말하는 무념은 단순히 어떤 기존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86.이 맑고 깨끗하며 물들지 않은 마음은 “왕래가 자유롭고 조금도 걸림이나 막힘이 없다”

87. “바깥 세상에 집착하면 바다에 파도가 일듯 생과 사의 현상이 일어난다. 바깥 세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생과 사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4) 견성성불
88. 혜능에게 있어서 견성은 성불이다. “우리의 본성이 바로 부처요, 이 본성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

89. 혜능에게 있어서 불성은 곧 깨달음으로 , 그가 말하는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혜능은 깨달음(각)과 올바름(정), 그리고 깨끗함(정)에 귀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91. 혜능은 우리의 본성이 부처의 삼신, 즉 법신, 보신, 화신임을 가르친다.

94. 대립되는 짝들은 모두 상대 세계의 영역에 속한다. 노자는 이러한 상대적 세계의 관념들을 초월한 사람을 성인이라고 했다. 혜능 역시 이와 비슷하게 제자들에게 베푼 마지막 가르침에서 36가지나 되는 대립되는 짝들-36對를 나열하고 있다.
만약 그대가 이 36대를 잘 알아서 적절히 쓸 줄만 안다면 모든 경전의 진리를 꿰뚫어 상대적인 양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이고 참본성이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97. 마조 도일(709-788)은 선종 역사상 혜능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너의 문하에서 천하를 주름잡는 힘찬 말 한 마리가 나오리라고 했다.

98. 마조는 사천의 도읍지인 한주 출신으로 어렸을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 그 지방의 절을 드나들다 열 두 살 되던 때에 승려가 되었다.

99.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를 볼 수가 없다.
무상삼매의 경지
“네가 갖고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상삼매에 드는 일이다.”

100. 이 순간 마조는 확실히 깨쳐 마음이 모든 현상계에서 초연해질 수 있었다.

101. 도가술에서의 성스러운 태는 육체적인 의미로 장생불사자의 태를 말한다. 이것이 마조의 손에서 ‘영원한 생명의 씨앗’이라는 뜻으로 변했으며, 이는 훗날 임제의 ‘차별없는 참사람’의 모델이 되었다.
마조의 수제자인 남전 보원이 “평상심이 곧 도다.”라고 말한 것은 분명 스승의 목소리에 대한 메아리이다.
마조의 위대성은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놀라운 기술과 번뜩이는 기지에 있다.

102. 그는 때로는 부정법을 쓰는가 하면 상황이 바뀌면 다시 긍정법을 쓴다. 얼핏 보기엔 이 두 가지 방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제자의 공부와 지혜의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사용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또한 제자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 한다면 그 모순은 당장에 사라진다.

103. “매실이 다 익었군!”
‘대매’는 큰 매실이란 뜻
104. 마조가 가르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해 마조는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했다.
그가 특별히 아낀 세 사람의 제자가 있었다. 즉 앞서 말한 남전 보원과 서당 지장, 그리고 백장 회해가 그들이다.

105. 승단 조직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는 백장처럼 강인한 기질과 관리 능력을 지닌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비록 ‘백장이 세워 놓은 규율’은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누차 수정되어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이나, 방랑의 무리였던 승려들은 진정한 승단 사회로 조직화한 백장의 불후의 공적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107. 그들의 대화 속엔 분명 논리적 추리로써 밝혀낼 성질의 것이 아닌, 직관에 의해서만 간파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다.
비록 상황과 행동은 변했지만 그 주체는 변함이 없다. 마조의 의도는 제자 스스로 ‘참나’를 발견하게끔 하는 데 있었다. 백장이 “어제는 몹시 아팠는데 오늘은 아프지 않다.”라고 했을 때 마조는 제자가 이미 ‘참나’를 발견한 것에 흡족해 했다.
이와같이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선 그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바다.

108.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110. 기록에 따르면 마조는 몸집이 장대하고 정열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황소와 같고 눈매는 호랑이 같았으며 또 혀는 얼마나 길었던지 코 끝까지 닿았다 한다.

112. 마조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용기와 대담한 정신을 불어 넣었다.

114. “우주 만물과 벗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15. 그 초월적인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약산은 처음 율종에 속하여 경전에 능하고 계율 지키는 데 철저했다. 그러나 차츰 그는 이것이 정신 생활의 궁극적 목표가 아님을 깨닫고 계율을 떠나 참된 자유와 순수성을 되찾고자 애를 썼다.

117. “그대가 터득한 바는 이제 마음의 가장 깊은 속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몸뚱아리로 배어 나왔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산으로 가서 자리잡기 바란다.”
“제가 감히 뭐라고 산에 살면서 스승노릇을 하겠습니까?”
“누구라도 머무름 없이 항상 여행만 할 수 없고, 또 여행하지 않고 항상 머물기만 할 수 없다. 그대는 응당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해서 이르는 곳마다 나룻배나 뗏목이 되어 사람들을 건네 주어야한다.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순 없다.” 

118. 사실 마조, 석두, 약산 등은 노자의 다음 표현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만물에는 앞서갈 때와 따라갈 때가 있고
   천천히 숨 쉴 때와 급히 숨 쉴 때가 있으며
   무성할 때와 시들 때가 잇고
   일어날 때와 누울 때가 있다.

119. 그러나 그는 딱 부러지는 분명한 말을 하지 않고 듣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 위해 늘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썼다.

120. 이 소리를 듣고 마조는 반은 장난, 반은 감상적으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지었다.
   권하거니 그대의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
어쨋거나 그는 그후 강서지방으로 돌아와 거기서 오십 년을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 선악을 넘어서

121. 우리는 <백장청규>에 관해 잠깐 언급한 바 있다.
백장회해(720-834)가 쓴 이 책의 원본은 비록 전하진 않지만, 현재 한역 대장경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원나라 때의 백장 덕휘의 작품으로 백장 회해의 원본을 본따 만든 것임이 분명하다. 1282년 이 책이 출간되자 비로소 선종의 제도가 체계가 잡혀졌다.

122. 백장 이전의 승려들은 전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완전히 걸식으로만 생계를 유지했다.

123. 그는 모든 승려들로 하여금 하루의 얼마동안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아 자신의 노동력으로 살아가게 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백장은 거두어들인 수확량에 대해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세금을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백장은 94세를 살았다. 제자들은 그가 너무 늙었음을 염려해 농사일을 그만하도록 권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는 수 없이 연장을 감추어 버렸다. 백장은 없어진 연장을 찾아 사방을 뒤지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단식을 하기 시작했다. 도리없이 제자들은 연장을 도로 내주었다.

124. 814년에서 그가 세상을 떠나고 약 30년후 불교는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일대 재난을 맞이했다. 814년에서 847년까지 집권한 당무종의 불교 탄압 사건이 그것이다. 이 무시무시한 탄압의 주요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에 있었다.
845년에 무종이 내린 다음 칙령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것의 사정을 잘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경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굶게 되고 한 여자가 길쌈을 안하면 다른 사람     이 헐벗는다. 현재 나라 안에는 비구와 비구니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모두 남이 갈     아 놓은 곡식을 먹고 남이 짠 베로 옷을 해 입는다.
   이 불교 탄압으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4천 6백 군데가 넘는 절과 4만여 곳이 넘는 불     당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26만 5백여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강제 환속 당하고, 15만 5     천여 명의 절 머슴들이 정부에 귀속당했다.
125. 노동에 대한 그의 주장 속엔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 그는 초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127.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28. “너는 누구냐?”
  네가 바로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서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은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130. 황벽은 궁극의 실체를 마음 즉 ‘일심’으로 보았다. 이 마음이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창조하며 진정한 지혜의 원천이다. 이러한 살아있는 지혜의 샘을 속안에 지니고 있으나 우리의 마음이 바깥 대상에만 눈을 돌리고 우리의 정신이 이리저리 나누고 판단내리기에 바쁘다 보니 결국 ‘얕은 나’라는 분별의식의 그에 걸려 스스로 정신과 의식을 묶어 버린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속안의 지혜의 샘은 마셔 보지도 못하고 메말라 버린다.
“만일 구도자가 이 ‘큰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이 마음을 떠나 다른 얕은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현상과 수행에만 얽매이기 쉽다.
황벽의 일심은 곧 무심을 말한다. 우리가 ‘큰 마음’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무심을 통해서다.

131. 모습도 없고 색깔도 없고 선이라든가 악이라든가 하는 분별심을 떠나 있는 마음이다.
“이 불성, 이 ‘큰 마음’은 텅빈 충만이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만물에 편재해 있다. 굳이 표현한다면 영광되고 신비한 평화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도’를 깨친 사람은 선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그것을 추구하려들지 않는다. 그는 선을 마음 속 지혜의 샘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샘물로 본다.

132. 그는 참본성이 ‘본래 가득 차 있어 부족함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직 ‘큰 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취해야 할 게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 부처이다.

133. 그의 독자성을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황벽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장자의 사상과 아주 닮았다. 황벽은 일심이라는 표현을 썼고 장자는 도라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절대를 표현한 것이었다.
황벽의 선풍은 잔인하다고까진 할 수 없어도 어찌나 맹렬하였던지 스승 백장도 그를 호랑이에 비교할 정도였다.

135. 그러나 황벽의 두 작품  <전심법요>와 <완능록>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배휴의 성실성 덕분이었다. <완능록>은 황벽 선사가 배휴를 비롯한 여러 제자들과 나눈 대화록으로 여기에선 특히 깨달음의 방법으로서 공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36. 선이란 생사를 건 싸움이며 따라서  절대로 안이하게 생각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137. 세상사 털어 버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밧줄 끝을 단단히 잡고
     온 힘을 쏟아 덤벼라.
     뼈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매화 향기가
     그대를 어지럽게 하리.
가장 정확하게 과녁을 뚫는 방법은 골수에 사무치도록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일이다.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도 없다.

138. 모르면 바보 취급을 당하고
     좀 알면 그 지식이 나를 번뇌케 합니다.
     좋은 일을 안 하면 남을 해치고
     좋은 일을 하면 내 자신이 해를 입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일에 소홀해지고
     의무를 다하자니 기진맥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140.      그대가 도를 지키려 하지 말고
          ‘도’가 그대를 지켜 주기를 바라게!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스승은 오히려 그 문제들은 옆으로 제쳐 놓고, 제자가 스스로 높은 경지에 올라가 그 함정을 굽어볼 수 있도록 곧바로 ‘도’를 가리켜 보인다.

7. 뜰 앞의 잣나무

141. 종심 선사(778-897)를 흔히들 선가에서는 조주고불 또는 그냥 ‘조주’라고 부른다.

142. 한번은 조주가 스승에게 도가 무어냐고 묻자 남전은 이렇게 대답했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
조주가 다시 물었다.
“어떤 방법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 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143. 하루는 조주가 남전에게 물었다.
“유를 깨달은 사람은 의당 어디로 가야 합니까?”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 한 마리 소가 되어야 한다.”
“어젯밤 삼경에 달이 창문으로 비치었도다.”
남전은 어떻게 해야 ‘도’를 알 수 있는가는 말하지 않고, 다만 도를 깨쳐 안 다음의 결과에 대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을 뛰어넘어 일체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144.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그 안에 있는 만 가지 물건과도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이 놀라운 깨달음이 조주의 정신 속에 알알이 피어나 그의 전 존재를 타고 흘러 넘쳤다.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걸 뜻한다. 따라서 이제 막 깨달은 사람이라 해도 그들의 행동은 관습에 젖은 늙은 선사들을 당황케 하기 십상이었다. 그들이 새로이 얻은 자유를 행사할 때 그 방자한 행동을 맨 먼저 겪어야 하는 피해자는 대개가 바로 그들의 스승이었다.

145. 한 번은 스승 남전이 조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은 인간의 무리를 떠나서 다른 무리(짐승 따위)들 틈에 끼여 같이 살고 어울리는 일이다.”(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짐승을 구제하는 편이 쉽다.”는 불교의 속담을 이해해야 한다.)
선의 세계란 실로 얼마나 뒤죽박죽인가!

146. 처음에 조주는 부엌의 화부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부엌문을 꼭꼭 닫고 부엌에 연기가 자욱하도록 불을 지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불이야, 불! 사람 살려!”
“그대들이 바른 말을 하기 전엔 이 문을 열지 않겠다!”
대중들은 놀라 말문이 막혔다. 이때 남전이 다가와 말없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 주었다. 이것이 바로 조주가 심중에 두고 있던 ‘바른 말’이었으며, 그래서 그는 곧 문을 열고 나왔다.
깨달음이란 결국 ‘바른 말’을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화부는 열쇠가 없어도 혼자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스승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사실상 문을 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거라곤 없다. 스승의 행동은 마음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선사들이 수많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48. 왜 남전은 아무 죄없는 고양이에게도 그다지도 잔인하고 무정한 행동을 했을까? 단칼에 고양이를 두 동강 냄으로써 도대체 그는 무엇을 가르치려 했는가? 또 조주가 신발을 머리에 얹고 걸어나간 것은 무슨 뜻일까?
진정한 구도자는 먼저 모든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려야 한다. 그런 무자비한 행위를 통해서만 자유와 초연의 길을 걸을 수 있다.

149. 아울러 그의 그 우스꽝스러운 거동은 흥분한 스승의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데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깨달은 사람일지라도 정서적인 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조주의 행동은 아마 이런 뜻이었으리라.
“스승님! 화를 푸시고 푹 쉬십시오.”
그는 산과 강을 즐겼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가 마음이 제일 편했다.

151. 영적인 능력 여하에 따른 영접의 여러 방법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53. ‘고담한천’이란 아닌 ‘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물맛이 쓰다는 것은 도를 닦으려면 일체의 세상사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엄격한 자기 수련과 자기부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른다.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위의 대화는 조주의 낙관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정신과, 아울러 깊은 지혜와 경쾌한 해학의 숨은 샘을 드러내준다.
제자를 진정한 ‘나’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선사들의 한결같은 목표이다. 조주의 가르침의 목표다 마찬가지이다. 동시에 그가 사용한 방법들은 아주 독창적이고 익살맞다.

154. “ 차나 한잔 들고 가게!”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라면 일상적인 행위 전부가 ‘도’의 표현이다.

155. “아침은 먹었는가?”
“예, 스승님.”
“그럼 가서 밥그릇이니 씻게!”
스승의 이 말에 제자는 홀연히 깨쳤다.
장자와 마찬가지로 조주 역시 “우주적 민주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도’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157. 혜능의 진정한 계승자인 조주는 참본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서 참본성이란 ‘도’ 또는 ‘진리‘ 의 다른 이름이다.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 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 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대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

158. “ 달마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 뜰 앞의 잣나무니라.”
잔말을 빼버리면 ‘도’가 뜰 앞의 잣나무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도’는 만물에 골고루 편재해 있다. 그러나 우연히 잣나무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잣나무를 입에 올렸을 뿐이다.

162.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무“
“세상 만 가지 사물은, 즉 위로는 부처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새끼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개에겐 불성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전생의 업 때문이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유”
“불성이 있다면 어째서 개로 태어났습니까?”
“잘난 체했기 때문이지.”
조주는 똑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똑같은 대답을 한 적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소박한 성실성 때문에 질문자의 상황에 맞도록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한 대답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 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은 흔히들 녹음기나 앵무새로 전락하고 만다.

164. 선의 정신은 천편일률적인 상투수단을 거부한다.
조주에게 있어서 놀랄만한 일은 나이가 아주 고령에 이르렀음에도 마음이 여전히 펄펄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90년동안 나는 마조의 선풍을 이은 선사들을 여든명 이상 만나보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창조적 정신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근간에 이르러 선의 불꽃은 점점 시들해지고 잡다한 분파만 생겨났다.”

165. 조주가 이 말을 했을 때 그의 나이 110세를 웃돌고 있었으니 이때 이미 선의 황금시대는 가고 있었고 그는 당대 최후의 정신적 거장이었다. 최후의 대선사였지만 또한 가장 중요
한 선사이기도 했다.

*조주의 몇 가지 일화들
조주는 자신의 종파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에 나오는 소위 오가, 즉 다섯 종파들은 한결같이 ‘조주고불’을  그들의 공통적 지혜의 원천으로 삼았다.
1.조주와 그의 초상화
2. 내려놓게
3. 조주의 선풍
4. 거지에겐 부족함이 없다.
5. 참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6.너는 누구냐
7.어느 장례행렬에서
8.당한 것을 웃음으로 때우다.
9. 대신 할 수 없는 일
  선의 근본 이치를 들려달라고 한 중이 조주를 졸랐다. 그러자 조주는 이런 변명으로 대신했다.
“난 지금 오줌이 급해. 생각해보게나,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내 자신이 직접 하는데...”
10. 공개된 비밀로서의 선
한 중이 물었다.“조주는 어떻습니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있지.”
그의 가르침에는 비밀이 없다. 평상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성문을 통해서건 그의 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성문이 늘 열려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때는 열리고 어떤 때는 닫힌다.-일종의 공개된 비밀이다.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1) 천황 도오(748-807)
171.천황사의 도오는 절강지방 사람으로 속성은 장이다. 일찍이 14살에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자, 하루 한 끼만 먹고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금식을 했다. 25에 항주에서 정식으로 계를 받았다.

172. 도오는 5년간 경산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마조 밑으로 가서 더 깊은 통찰력을 길렀다.그는 마지막으로 석두를 찾아가 문답을 했다.
“도대체 누굴보고 후세 사람이라 하는 건가? ”
석두의 이 말에 도오는 홀연히 깨쳤다. 그제서야 이전의 두 스승이 가르쳐 준 것들이 철저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2) 용담 숭신(?-838)
“이곳에 온 후 저는 아직까지 한 번도 스승님으로부터 마음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도오가 대답했다.
174. “나는 네가 이곳에 온 이래로 마음에 관한 가르침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데!”용담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니 ,언제 마음에 관한 걸 가르쳐 주셨단 말입니까?”
“네가 차를 끓여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오면 먹었으며, 인사를 하면 답례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도처에서 가르쳐 주었는데도 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진정한 깨침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용담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

3) 덕산 선감(780-865)
176. 용담을 통해 덕산은 깨닫게 되었다.
그는 걸핏하면 <금강경>을 들먹거렸으므로 그의 속성을 따 ‘주금강’이란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그는 떡파는 노파를 만났다.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선 과연 어떤 마음에 점을 찍어 점심을 들고자 하시는지요?” 덕산은 그만 말이 콱 막혔다.
“내 오래전부터 용담에 와보고 싶었던 차에 이제 와보니 연못 (담)도 안보이고 용도 안 보이는구나” 이때 용담선사가 나와 말을 받았다.
“아니다 그대는 제대로 용담에 온 것이다.”
어느날 밤 둘이 함께 있는데 용담이 덕산에게 말했다.
“밤이 깊었는데 그만 물러가 쉬게.”
덕산은 인사드리고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밖이 너무 캄캄합니다.”
용담이 촛불을 켜서 건네 주었다. 덕산이 막 받는 순간 용담은 갑자기 불을 훅 꺼버렸다. 순간 덕산은 깨달았다. 기뻐 큰절을 하자 용담이 물었다..

178. 그날부로 덕산은 <금강경 해설집>을 죄다 법당 앞에 쌓아놓고 불을 지르며 말했다.
“ 잡다한 이론을 늘어 놓아봤댔자 태허의 허공에다 털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어두움이 가장 짙을때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 노자
촛불 ,그 순간 바깥의 불이 모두 꺼지자 속안의 불빛이 찬란히 그 광채를 발하였다.
덕산의 마음이 이미 충분히 익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햇던 것이다.

179. 덕산은 천성적으로 매우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깨닫기 전에는 미친듯이 경전을 공부하더니 남방에 선이 번성한다는 말을 듣고는 매우 분격하여 그 소굴을 덥쳐 도깨비들을 작살내 버리겠다고 별렸다. 그러다 선종으로 옮긴 다음엔 우상을 파괴하는데 열을 올렸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그 행복스런 밤에 ‘참나’를 발견하였던 그에게는 그 외의 것은 모두 다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덕산은 몽둥이를 쓰고 임제는 고함을 이용했다. 그래서 우리는 ‘덕산 방 임제할’ 이라고 한다.

4) 암두 전활(828-887)과 설봉 의존(822-908)
181. 덕산의 제자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 중 암두와 설봉 두사람이 가장 빼어났다.
암두의 정신은 칼날처럼 날카로왔다. 그는 절대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으며 심지어 스승인 덕산이나 동산에게도 그랬다.
설봉은 암두처럼 재기가 번뜩이진 않았지만 지극히 성실,겸손하고 인내심이 강했으며, 더불어 아무 사심없는 미덕으로 인해 선종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참을성이 많은 어미 닭처럼 그는 운문을 비롯해 법안의 할아버지라 할 수 잇는 현사 등 뛰어난 선승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리하여 암두가 별 후계자를 못 남긴 것에 비해 설봉으로부
터는 선종의 두 종파인 운문종과 법안종이 싹터 나올 수 있었다.

184.“이제부터 자네가 위대한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한다면 일체의 언행을 자신의 흉금에서 흘러나오게 하여 온 누리에 고루 퍼지게 하게.”

185. 이말을 듣고서 비로서 설봉은 철저히 깨쳤다. 암두에게 절을 하고나서 그는 황홀감에 젖어 이렇게 외쳤다.
“사형! 오늘 이 오산에서 나는 진정으로 도를 이루었소!”
후에 설봉은 1500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큰 절의 스승이 되엇다. 하루는 한 제자가 전에 덕산 스님 밑에 있을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그는 이롷게 대답햇다.
“나는 그에게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가 지적한대로 실제로 스승에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진리다. 그러면서도 그는 너무나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칼집에 칼을 꽂고 칼끝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설봉은 ‘자신의 광채를 부드럽게 하라(화광동진)’는 도가의 교훈을 아주 명심한 듯 하다.

9. 감추어진 불씨

189. 위산 영우(771-853), 그는 백장의 제자로 위앙종의 창시자다.
이 감추어진 불씨야말로 위앙종의 선풍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없는 생각으로 항상 절대를 생각하고 거룩한 불씨의 무궁한 힘을 늘 되짚어 보라. 생각이 다하면 그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나니 그곳에선 본질과 형상이 영구불변하며 현상과 본체가 나뉘어지지않고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참부처의 세계이다.

191. 위앙종이 선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앙산이 여래선과 조사선을 구분한 데 있다.

193. 위앙종의 또 다른 공헌으로는 한편으로 ‘돈오’의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 ‘점수’의 필요성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걸 들 수 있다.
초심자가 인연이 닿아 그 자리서 돈오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단번에 청산할 수 없는 태초 이래로 빚어온 타성의 찌꺼기가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전생의 업이나 인과응보로 인해 일어나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194. 오묘한 가르침이 제아무리 많고 다양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은 물리치고 어떤 것은 펴는 활용방법을 직관적으로 터득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잔말은 다 집어치우고 단칼에 돌입할 수 잇다면 성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의 구별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대의 전 존재는 그 본래 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이치와 구체적 사물이 둘이 아닌 경지, 바로 ‘있는 그대로의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196. 그러나 위산의 이러한 아버지다운 온화함은 겉보기일 뿐 속으로는 맹렬한 인습 타파주의자였다.

198. 위앙종은 그 나름대로 독특한 매력으로 사람을 끈다. 임제종이나 운문종처럼 절박하거나 날카롭지도 않으며, 법안종처럼 기지가 번뜩거리지도 않는다. 반면에 위앙종은 다른 파에 비해 매우 심오하다.

200. 위앙종은 단지 5대에 끝났을 뿐이다. 그러나 그 정신은 죽지 않고 그 심오한 깨달음은 모든 선 수행자들에게 큰 정신적 재산이 되었다.

201.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보라.

202.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10. 집으로 돌아가라

조동종은 동산 양개(807-869)와 그의 제자인 조산 본적(840-901) 두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204. 동산은 절강지방 사람으로 어려서 출가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정식으로 게를 받앗다. 그리고 나서 관례에 따라 일정한 기간동안 여러 선방과 절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많은 선사들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맨 처음 남전을 찾아갔다. “비록 젊긴 하지만 갈고 닦으면 큰 인물이 되겠군”
“ 스님께선 자유인을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기서 동산은 또 한번 자주정신을 드러내 보였다. 사실 속안의 참나는 갈고 닦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205.위암에게 다른 선생을 소개해 달라고 졸랐다. 위산은 동산에게 운암 담성(782-841)을 소개해 주었다.
“물건이 설법한다는 얘기는 어느 경전에 나옵니까?”
아미타경에서 물과 새와 나무, 모두가 불법을 외운다는 구절을 읽지도 못했는가?
여기에 이르러 동산은 문득 깨쳤다. 그리하여 그는 그 감격을 이런 시로 표현했다.
   신기하고 신기하다.‘
   물가사의한 무정물의 설법이여
   귀로 들으려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눈으로 들어야 참으로 안다.

206.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 세상 사람들이 저더러 ‘당신 스승의 진면목이 무엇이지?’하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까요?
운암은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대답했다.
“바로 이것이다.”
운암이 당부했다.
“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데 있어 각별히 조심하고 신중하길 바라네.”
이렇게 작별한 뒤 동산은 끈임없이 ‘바로 이것’이라는 비밀에 찬 말을 곱씹었다. 그러다 얼마후 냇물을 건너다 문득 수면에 비친 자기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서 ‘바로 이것’의 참 뜻을 철저히 깨달았다. 그는 그 감격을 다시 시로써 표현했다.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 얼굴과 하나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본래의 얼굴이란 한자의 여여와 같은 말로서 산스크리트어의 진여,즉 부타타다타와도 같은 뜻이다. 아울러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히 ‘있는 그대로인 것’어로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영원한 ‘도’, 구약성서의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힌두교의 '범Brahma' 에 해당된다.

208. 그는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았으며, 절대의 하나에 도달했기 때문에 군중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통찰력을 지녔고 영원한 본래 얼굴 ,즉 진여를 꿰뚫어 알았다 해서 환상과 공상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초연했으나 그 결과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에 두발을 굳건히 디딜 수 있었다.

212. 그러나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227. 동산은 제자들을 알뜰히 보살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죽을때까지 그는 사심없는 스승으로 자기를 지켰다.
동산은 죽을 때가 왔다고 느끼고 삭발 목욕하고 장삼을 걸친 뒤 종을 쳐서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를 지켜보던 대중들은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당한 어린애처럼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산은 도로 눈을 떠서 통곡하는 중들에게 나직히 말했다.

228.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 때문에 법석 떨지 마라. 중들답게 침착하라. 누구건 간에 임종 때는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도 동산은 자주적이고 사실적인 정신을 끝내 잃지 않았다.

11. 차별없는 참사람

229. 임제 의현(?-866), 그는 아주 철저하고도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고, 남달리 뜨거운 진리에의 정열을 지녔던 사람이다.
타고난 성격상의 특징으로 보아 그는 전형적인 북방인이었다.

231. “불법의 골수를 물어보도록 소인을 격려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전 황벽 스님과는 인연이 먼 것 같습니다. 황송스럽게도 스님께선 세 번이나 매질로써 저를 거듭 일깨워 주셨지만 불행히 저는 전생의 업장이 두터워 그 심오한 뜻을 알 길이 없으니, 이를 안타깝게 여길 따름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어서 여기를 떠나는 길인 것 같습니다.”

232. 임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대우는 임제를 보며 말했다.
“이런 병신같은 놈, 황벽이 너를 위해 그토록 간절히 불법의 골수를 일러 주었는데 뭣이 어째? 아무 잘못도 없는데 황벽이 너를 때렸다고? 에라 이 밥통아.”

233. “이놈, 어디를 그렇게 왔다갔다 하느냐. 불법의 골수는 커녕 개똥도 모를 거다.”
“다 스님의 노파심 때문이지요.”
“이런 미친 놈 보았나, 감히 범의 수염을 잡다니!”
임제가 가까이 오자 황벽은 괭이를 땅에다 세워놓고 말했다.
“이것은 혼자 섰네. 이 세상 누구도 이걸 움직일 수도 들어 올릴 수도 없네.”

234. 분명 스승은 위대한 법을 전하는 전등의 암시물로 괭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임제는 재빨리 스승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당장에 괭이를 낚아채 스승이 한 것과 똑같이 괭이를 땅에 똑바로 세우고 말했다.
“보십시오, 스승님. 괭이가 제 손안에 들어있지 않습니까?”

235. “사람들은 곳곳에서 화장당하고 있는데 나만 여기서 산채로 매장 당하는구나.”

237. 깨닫기 전의 임제는 매우 수줍음타고 신앙심이 돈독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는 솔선해서 우상 파괴의 선두에 나섰다.

238. 결국 나는 그 모든 방편들을 죄다 던져 버리고 직접 진리와 맞부딪쳤다.
그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일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해도 죽여라.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239. 임제에겐 진리를 깨치는 일, 즉 자신의 참본성을 바로 보는 일만이 제일로 중요했을 뿐이다.
그가 볼 때 인생의 문제는 오로지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절대의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임제 철학의 초점은 ‘무위진인-차별 없는 참사람’에 있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본래의 나’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240. 임제가 말한 ‘참사람’이란 개념과 에미슨이 말한 ‘본래의 나’ 사이엔 묘한 일치점이 있다. 임제와 마찬가지로 에머슨도 ‘자기신뢰’나 ‘자기확신’을 강조했고, 우리가 확신하고 신뢰해야 할 이 ‘나’는 절대 일시적인 ‘거죽의 나’가 아니라 ‘본래적인 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241. 자기 신뢰의 이유를 알아야만 모든 근본적 행동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지혜를 우리는 ‘직관’이라 부르고, 모든 후천적인 행동들을 ‘학습’이라 부른다. 머리로는 더 이상 분석이 불가능한 궁극의 그 힘 속에 모든 사물은 공통된 기원을 갖고 있다.

242. “직접 자식을 키워 봐야 부모의 은혜를 알게 된다.”

243. “처음에 내가 불법의 골수를 세 번이나 물어 보았는데 스승께선 세 번 다 나를 후려쳤다. 어찌나 아팠던지 가시돋힌 나무로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그런 몽둥이를 다시 맞고 싶은데 누가 나를 때려줄 사람이 있는가?”
임제는 ‘덕산방 임제할’이라는 말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후대 사람들에게 고함의 선사로 더 잘 알려졌다.
임제는 고함을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다.
“때로는 한 외침의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때로는 땅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와 같고, 때로는 풀을 헤치는 잣대와 같고, 때로는 고함이 고함 아닌 것으로도 쓰인다.”

244. ‘그 사람’을 깨달아라.

245. 틈이 날 때마다 임제는 ‘홀로 서있는 도의 사람’이자 동시에 ‘모든 부처의 어머니’인 이 신비한 ‘설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설법을 듣고 있는 자일 뿐 아니라 설법을 행하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사람’은 어디에나 걸림이 없이 모든 방향으로 자유자재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도 자유롭다. 그는 어떤 환경에도 영향받지 아니하며, 순식간에 모든 현상계를 넘나든다.

246. 어떤 일에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귀인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고, 도를 구하면 도를 잃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는다.”
가장 귀중한 보물인 ‘차별없는 참사람’은 바로 그대 안에 있고, 그대 자신이 바로 그다.

248. 그가 소박하게 대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우리의 주관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마저 깨달아야 한다.
“주체와 객체를 모두 버린다.”
자유롭게 현상계로 돌아와 산을 산으로, 강을 강으로 즐길 수가 있다.

249. 장자와 마찬가지로 임제도 “참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져 죽지 않는다” 고 말했다.

251. 선이란 “우리의 일상생활에 알알이 녹아든 유.불.도 세 가지의 종합이다.”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속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 이것은 장자가 말하는 ‘심재’, ‘좌망’, ‘조철’에 해당되는 것이다.

252. 아마도 그는 기지의 화신이었던 성 깊고, 또한 밝은 눈을 지닌 창의력 풍부한 스승이었던 것 같다.

253. 주체의 신비
표현의 신비
에고 없는 실체
현대의 육관욱은 <선과 선의 가르침>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세 가지 신비한 문이란 정신적인 실체, 그것의 대상, 그리고 그것의 표현인 언어와 문장을 말한다. 그리고 각 현문에는 초급, 중급, 말급의 중요한 세 단계가 있다. 따라서 부처의 지혜를 얻으려면 삼현의 아홉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 이 모든 단계를 통과한 임제는 자신의 성공을 분석하였는데 이것이 지금 그의 종문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삼현삼요  이다.

254. 임제의 근본 통찰이 ‘차별없는 참사람’을 깨닫는 일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2. 날마다 좋은 날

257. 선종 오가의 창시자들 가운데 위산, 동산, 법안은 온건한 쪽에 속하고 임제, 운문은 과격한 편에 속한다.
운문은 천하 모두를,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까지 모조리 그렇게 해치워 버린다.

258. 운문은 방이나 할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마법사가 주문을 외듯 거친 악담을 주로 썼다. 그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독설가였으며, 선사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달변가였다.
운문은 철저한 우상파괴주의자였다.

259.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260. 말에 대해 엄청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정신이 예민했던 만큼 그에겐 번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하찮은 상념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썼으며, 그 결과 남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알아차렸다.

261. 운문 문언(?-949)은 절강 지방 사람으로 속성은 장씨다.

265. 마조와 마찬가지로 운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참본성인 ‘이것 하나’를 깨닫는 일이다.
우리의 ‘참나’인 ‘이것 하나’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조금도 부족한 게 없다.

267. 운문은 이른바 ‘일자관’, 즉 한 글자로 관문을 통과하는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271. 여기서 우리는 저 유명한 ‘운문삼구’와 만나게 된다. 이 세 구절은 비록 운문의 제자 덕산 연밀에 의해 처음으로 일관성있게 정리되었지만, 그 본래의 사상은 이미 스승의 가르침 속에 암암리에 드러나 있었다.
1. 천지를 덮어 흠뻑 적신다.(함개건곤)
2.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 버린다.(절단중류)
3. 파도를 따라 함께 흐른다.(수파축랑)

275. 선종의 다섯 종파에서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신 생활에서는 궁극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비록 피안에 이르렀다 해도 차안으로 되돌아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과거에 얻은 은폐된 내면생활의 습관들을 모두 털어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될 수 있다. 모든 흐름을 끊어버린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파도를 타고 물결치는 대로 흘러 그 속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다.
 
276.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가라.”는 말로 대답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행한 모든 가르침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자유롭고 걸릴없이 그대의 길을 가라. 특별한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대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라.”

277.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는 자이지.”
사실상 그의 가l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이라고 한 말이다.

13. 지금 여기

279. 법안종은 법안 문익에 의해 시작되었다. 법안종은 선종의 다섯 종파 가운데 제일 나중에 생겨난 것으로 그리 오래 계속되진 못했지만 그 영향력은 먼 훗날까지 미쳤다. 먼저 이 종파가 중국불교 뿐 아니라 중국 문화 전반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80.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그들에 따르면 세상 만 가지 사물이 우리에게 절대를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참사람으로 인도해 간다.

281. “옛사람이 일찍이 설하기를, ‘푸르고 푸르게 빛나는 대나무숲은 그 모두가 바로 법신이요, 노랗게 만발한 들꽃들은 모두가 반야(지혜) 아닌 게 없노라.”

282. 이러한 명상적 관조는 법안종에 흡수되어 그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즉 관심의 초점을 속안의 참나에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신비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법안종은 부정을 통한 길과 무지의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283. 법안 문익은 절강지방 사람으로 속성은 노씨다. 처음엔 영파의 여항사에서 당대의 고승 희각 울사 밑에서 공부했다.
284. 법안 자신은 박식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단순한 지식을 경계하게 했다. 왜냐하면 실체는 바로 우리 앞에 있어서 그것은 직관을 통해 알아지는 것이지 사변이나 추리로 다가가야 오히려 눈만 흐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삼라만상 중에 홀로 법신만이 모습을 나타내도다.

287. 법안은 경험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철두철미 실재론자였다. 모든 상대적 속성을 초월한 근본 실재, 즉 ‘도’를 강조한 것을 보면 그가 형이상학적 실재론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맷돌로 콩을 갈듯 모든 지식을 자신의 마음의 맷돌에 갈아 잘게 소화했던 것 같다. 또 옛 선인들의 말을 종종 인용하였으니 어떤 말이든 철저히 육화되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또 한번은 다른 제자가 밤과 낮 열 두 시간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밟아 가게나.”

289. 장자의 말처럼 “온 천지가 단지 하나의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따라서 법안이 말하는 달 역시 가리키는 손가락인 것이다.

290. 사실 법안은 영적 안내자로서의 빼어난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각양각색의 환자들에게 적절한 처방을 내릴 줄 아는 노련한 의사로 비유되고 있었다. 그는 깨달음에 이르렀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실제적이었던 것이다.

291. 근본적으로 법안은 신비주의자였다. 그의 신비주의는 자연적 신비주의나 우주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초우주적인 신비주의였다.

292. 법안이 죽자(958) 이경은 그에게 ‘대법안 선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를 기리는 탑을 세워 ‘무성탑’이라 이름지었다.
법안의 직계 제자로는 천태 덕소(891-972)가 가장 뛰어났다.

293. 덕소는 또한 영명 연수(904-975)의 스승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연수는 중국이 낳은 가장 중요한 불교 저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가 쓴 100권에 달하는 <종경록>은 선의 원리를 밝히는 목적 하에 씌여진 불후의 명작이다.

294. 실제로 연수는 선종과 정토종을 결합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즉 어떤 현대 역사가의 말마따나 “염불, 독경 및 참회 등이 참선과 병행되어야 한다.”은 것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선이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수행절차와 결합하면 선은 그 당장에 독자적 성격을 잃어 버리고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 있다.

295. 연수는 법안종의 3대에 속하며 그의 뒤로 2대가 더 계속되었다. 제 3,4대에는 아직도 법안의 정신이 혈관 속에 연연히 흐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기라성 같은 선사들이 많이 출현됐다.
항주지방의 홍수는 불붙은 장작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한다.
항주 유정(986-1049)

296. 나는 그저 자연현상에 의지해 자나깨나 선의 진리를 표현하고 또 그 속에서 노닌다. 언어란 얼마 안 가서 그 한계를 보이나, 자연의 조화는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자연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물창고라고들 하는 것이다.
불교 사상 중엔 우리 유교의 전통과 너무나 닮은 흐름이 하나 있다.
“천지보다 앞선 한 물건이 있나니, 그것은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능히 만물의 주인이며, 사계절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14 선의 불꽃
 
 299. 현존하는 자료들을 여기저기서 한 부분씩 가려 뽑은 것으로 앞장의 이야기들을 더욱 밝게 조명한 작은 불꽃들이다.

311. 장자가 이른바 ‘나를 잃었다’ 라고 한 것은 ‘참나’가 ‘거죽의 나’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332. 선사들의 가장 놀라운 기질은 그들의 독립 정신이다. 그들은  일편단심으로 한가지 꼭 필요한 것에만 헌신하면서 그것에 못 미치는 사람이나 물건에 머리 숙이기를 단호히 거부한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진리는 그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333. 그래도 스승은 여전히 수행해야할 꼭 필요한 역할이 있다.

334. 스승은 그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스승의 가르침은 최소한 제자가 깨닫는 데에 하나의 촉매 역할은 할 것이다.
*선사들이 즐겨 쓰는 싯귀
    물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가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보리라. 

357. 덧붙임

*어떤 만남
1949년부터 1951년까지 하와이 대학에서 중국및 철학 문학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친구를 통해서 선의 대가 스즈끼 다이세츠를  만났다.
그가 쓴 책<선의 숨결로 살다. Llving by zen>가 이무렵 출간되었다. 그 책에 실린 마조 임제 조주 운문 등 위대한 선사들에 대한 섬세한 통찰은 나를 완전히 매료 시켰다.
스즈끼 선생과의 두 번째 만남은 호노룰루에서 이루어졌다. 1959년 여름 하와이 대학에서 제3차 동서양 철학자 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1964년 여름 호노룰루에서 열린 제4차 동서양 철학자대회에서 다시 만났다.
1966년 5월1일 뉴욕을 출발하여 타이페이로 가는 도중에 일본에 들러  가마꾸라에 살고있는 스즈끼와 만나다.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367.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368. 단순히 선을 취하여 그것을 아무 주석없이 소개한다. 선에 정통한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즉석에서 인정할 것이다.

372.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373. 선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의 명상은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 주의를 기울이고, 깨어있고, 정신을 차리고자 한다.
374. 선은 일종의 확실성을 목표로 한다. 자기 존재로 직접 체험하는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

388. 선은 단순히 우리를 일깨우고 깨쳐 알게 한다.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선사의 행위와 몸짓은 가르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자명종의 울림과 같은 것이다.

 

*** 내가 만일 저자라면....

<선의 불꽃을 이어온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당나라 시대의 대선사들이 어떻게 그들의  개성과 통찰력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겨 활활 타오르게 했는지 선의 진면목을 살펴보고자 쓴 글이다. 중국의 선 사상사에 굵은 획을 그은 육조 혜능을 시작으로 남악 회양, 청원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황벽 희운 그리고 거기서 다섯 갈래의 불길로 갈라져 나간  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법안종의 이야기이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우선 달마의 진리에 이르는 두가지 길에 대한 글이 있다.
  1. 지성에 의한 길: 경전 공부룰 통한 교리의 이해이다.
  2. 행위에 의한 길: 미움을 넘어서는 길
                  삶에 적응 하는길
                  집착을 버리는 길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길
*신수와 혜능의 일대기
*혜능의 직계제자들: 남양 회악
                    청원 행사
                    남양 회충 
                    영가 현각 
                    하택 신회
* 혜능의 가르침 : 교외별전/불립문자/직지인심/견성성불

*물 긷고 땔감 줍는 일 ; 마조 도일/ 약산 유엄
*선악을 넘어서; 백장 회해/ 황벽 희엄
*뜰 앞의 잣나무; 조주 종심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천황 도오/ 용담 숭신/ 덕산 선감/ 암두 전활/ 설봉 의존
*감추어진 불씨; 위산 영우/ 앙산 혜적
*집으로 돌아가라; 동산 양개
*차별없는 참사람; 임제 의현
*날마다 좋은 날; 운문 문언
*지금 여기; 법안 문익/ 천태 덕소/ 영명 연수/ 항주 유정
<에필로그>
*선의 불꽃

**어떤 만남 /스즈끼 다이세츠
**토마스 머튼

 

감동적인 장 절

302. 그 사람들은 남이 웃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데, 자네는 딴 사람이 웃는 걸 보고 겁을 내니 말일세.
이 말에 수단은 확 깨쳤다.
그제서야 그는  엘리드 그라함이 말한 엄숙하지 않을 필요성을 느꼈다.

311. 장자가 이른바 ‘나를 잃었다’ 라고 한 것은 ‘참나’ 가 ‘거죽의 나’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보완점

우선 이 책은 저자와 역자에 대한 신뢰를 갖고 읽기 시작하니, 기존의 다른 선에 관한 책들과는 달리 잘 읽혔다. 우선 불교 책을 읽으려할 때 중국어로 음역된 용어들이 이미 낯선데, 그 한자들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으니 그 낯선 용어들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생각들을 읽어내지 못할 때가 너무 많았다. 이 책은 저자와 역자 모두 그런 어려움을 뛰어넘고 있다..

 먼저 읽은  토마스 머튼의 요약문은 훌륭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명상가로써 이미 선스승의 위치에서 후배 수도자들을 이끌고 있는 이 대가의 안내문은 요점정리를 이미 하고 책의 내용을 읽어 가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우선 선사들의 이야기는 논리와 체계를 들어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신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그 순간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모순되는 설명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때 그 깨달음의 순간, 그 사람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반복되거나 수정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대선사들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태산 준령 앞에 호미 대신 연필 한 자루 들고 서 있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단박에 깨쳐지지 않는 이 근기를.

차라리 작은 불꽃을 들춰내며 오순도순 인간적인 접근을 해가던 에필로그의  선의 불꽃이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는 이 작은 불씨 하나를 뒤적여 찾아줄 부지깽이 선사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그 시절 인연이 닿았을 때 눈을 밝게 떠서 홀연히 깨달아야지.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우선 구성면에서 조금 엉성한 느낌을 받았는데 법학자 출신의 글 답지 않게 장 절의 구분이 없고 생략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제일 먼저 중국 선종의 역사를 개관함에 있어서 북종선과 남종선에 대한 기록이 빠진 것이 아쉽고, 또 달마에서 혜능으로 이어지는 계보도도 조금은 하택 신회의 기록 쪽으로 편향 된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어나간 과정도 조금 언급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태생적으로 불교적 뿌리가 보편화되어 있는 동양인이고 또 석가모니의 6년 고행, 그 영웅적 노력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같이 생각해보기도 했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비록 문맹이었으나 108개의 염주로 하루에 20회씩 반야심경을 염송하는 큰어머니의 신심에서 인생의 허무와 무상을 너머 피안에 이르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종이라는 불교의 특수한 파에 깊은 감화를 받았고 동양인의 사상계에 핀 가장 아름다운 꽃들 가운데 한 떨기라고 선불교를 묘사했다.

오경웅은 1937년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영성에 깊이 심취하면서  카톨릭의 신비주의와 불교의 선 사상, 나아가 장자와 노자에 이르는 사상들을 접목해보려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을 것이다. 기회가 닿는 데로 계속 자료를 찾아 공부를 해보고 싶은 분야이다.

IP *.67.223.107

프로필 이미지
2009.03.02 09:11:04 *.255.182.40
준령앞에 호미대신 연필 한자루. ㅋㅋ 재미있는 표현이세요.
저도 구성면에서 어딘가 미흡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마 기대치가 높아서인 것 같아요^^
프로필 이미지
춘희
2009.03.02 09:40:44 *.111.241.42
저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되었어요.^^
프로필 이미지
해운
2009.03.03 11:15:17 *.142.204.118
수희향. 골세앙 바드레
나도 다른 이름으로 나와 놀고 싶어요.

우리 친정집이 해운대에 있어서 해운이라고 호를 지었거든요.
신라시대의 명문장가 고운 최치원 의 또 다른호가 해운이기도 해요.

그래서 겸손하게 ...아니 그런 대가의 이름을 취해도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때 ..얼마든지..그래도 됩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해운대에 가면 동백섬에 들러 최치원의 동상에 인사히고
최치원의 바위도 꼭 들러보지요.

그런데 이번에 저자 소개를 위하여
동서의 피안을 읽다가
너무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서가 영어로 씌여진 책이었고
옛날 번역이어서 문장이 장난 이니예요.
옛날 사람인 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많았지만

마치 바로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생생하고 드라마틱 했어요.

그래서 더 일찍 이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쉽더라고요.

오늘도 오라버니 부부에게 오경웅의 얘기를 해 주었어요.
눈물이 글썽 하더군요.

이 책을 처음 번역자에게 구해다 준 분이 김수환 신부님이셨답니다. 추기경이 되시기 전에....

다음에 만나면 재미있는 일화들 더많이 얘기해 줄게요.
듣고 싶어하면....

자, 막바지 언덕길
잘 내달아
즐겁게 고생한 시간들 회상 하십시다.

모두 화이팅!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