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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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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1시 01분 등록

A. 저자에 대하여

지구상의 여러 문명권은 꽤 오랜시간동안 독자적인 문화와 사고체계, 철학을 지닌 채 발전되어왔다.
인류 역사를 되돌려보면 각각의 문명은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만의 독특한 정신체계를 구축했으며 행여 타문명권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변화는 서서히 진행되어 자연스럽게 기존의 사상과 동화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막 20세기를 시작하려고 하던 1800년대 후반부터 인류 문명권들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서로 만나고 충돌하기 시작한다.
정치와 경제의 힘의 논리가 개입된 문명권의 충돌과 새로운 사상의 유입은 그 당시를 살던 많은 지식인들에게 정신적인 혼란을 야기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중국의 오경웅이다. 1899년 중국 영파시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4살때 생모를 여의고 9살때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가정교사와 큰어머니의 지도아래 논어와 시경 등을 공부했다.

1917년 상해(上海)에 있는 미국감리교 선교회의 동오법과학원(東吳法科學院)에 입학했는데
그때 그는 법과학원 원장인 찰스 W. 링컨에 스 의한 강화와 야네스 얼(Yarnes Orr)의 「그리스도교의 신관(神觀)과 세계」를 읽고 강명을 받아 1917년 겨울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20년 동오법 과학원을 졸업 하자 곧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 법과대학 대학원과정에 적을 두었는데 이곳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흥미와 신앙을 첨차 잃고, 마침내는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당시 오경웅의 신앙관에 대해 서강대 철학과 박갑성 교수는 '오경웅 박사의 회심과 사상'이라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근본적 교훈이 인애와 지기 희생의 정신이라 보았고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기완성의 덕이 탁월한 탓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개인의 영혼안에 있는 내적 광명에 집중하였으며 자유인으로서의 신앙을 탐색하였다.그는 성경을 읽되 마음에 맞는 내용만 취하고 싫은 것은 물리쳤다. 당시 ‘그리스도가 불타요, 불타가 그리스도이다’ 라는 그의 발언은 이러한 당시의 신앙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1924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이후 기간동안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데 1937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글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그해 12월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리고 1941년 중일전쟁 이후 그는 47년 로마주재 중국대사로 임명될 때까지 바쁜 나날을 보내고 1949년 다시 중국을 떠나 1964년 까지 하와이 대학과 시튼홀 대학에서 동양철학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저술활동과 연구활동에 몰두한다.

그의 바이오그래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그는 동서양의 철학을 완전하게 이해한 20세기의 손에 꼽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오경웅(John C.H.Wu)에 대해 조사를 하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카톨릭계 자료 뿐 아니라 불교계 자료 모두에 그의 이름이 자주 언급된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동서양 사상계의 큰 획을 그은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는 사람임을 곧 알게 될 수 있었다.

요새 비즈니스 환경에서 ‘컨버젼스(Convergence)'가 대세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상품과 서비스가 디지털로 융합되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디지털로 상호 연결되고 있다.
이와 같이 21세기가 빌게이츠, 스티브 잡스와 같이 몇몇 IT기업의 아이콘들이 주도한 ’디지털 컨버젼스의 시대‘로의 이행이었다면 백년전인 20세기는 각 문명과 철학, 사상간의 융합이 이루어진 ‘문명 컨버젼스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에 아이콘 역할을 한 사람들 중 하나가 오경웅 박사일 것이다.

그는 인생 전반에 걸쳐 유교, 도교 등의 전적으로 자신의 민족적 전통과 문화적 유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인도문명권에서 출발한 불교, 그리고 서구문명의 근간인 카톨릭의 지식 컨버전스를 추구한 사람으로 보여지기에 충분하다.

B. 내 마음의 글귀

선이 무엇이냐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이 선이 아니냐를 말하라 한다면 삶과 죽음의 ‘우주적인 농담’을 모르는 것, 그것은 절대 선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실제로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뜻깊은 농담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9)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한 문장에 적어도 열흘은 명상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10)


선 불교는 비록 6세기경 보리달마가 중국에 건너옴과 더불어 시작되긴 했으나, 그 심지에 본격적인 불이 당겨지기는 7세기경 혜능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 선의 불꽃은 마조, 석두,남전,백장, 황벽 그리고 조주 등의 생명력 넘치는 정열에 힘입어 더욱 뜨겁게, 더욱 다채롭게 피어올랐다.  (11)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禪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20)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뚤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이나 ‘마음을 잊음’ 도는 ‘아침처럼 맑음’에 해당된다. (22)


무엇 때문에 세상이 갈수록 덕을 잃고 지능만 발달하는지 알겠나?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여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 것일세. 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립에서 생긴다네. 그리고 지능이야말로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경쟁의 무기이지. 따라서 둘 다 사악한 흉기일 뿐이며, 절대로 받을만한 게 못되지.(23)


여기서 안회는 크게 깨쳤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제가 마음을 맑게 하는 수련을 해 왔지만 문제는 바로 나 자신에 있더군요. 비로소 마음을 맑게 했을 때 저는 ‘나’라는 작은 존재가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텅 빈 상태라는 말이지죠?” (26)


불안정한 마음은 인류와 더불어 늘 있어 왔다. 철학자는 절대자를 모색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은 불멸의 존재를 동경하고, 시간에 지배당하고 살기 때문에 영원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애써왔으며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을 갈망해 왔다. 그러나 이 절대는 무한하기 때문에 그저 막연하고 딱히 무어라 한정지을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같은 ‘어떤 것’일 뿐이다. 무한한 것을 어디에 한정시켜 버리면 이미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2)

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언어와 소리와 색깔 가지고는 도저히 실제에 못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동양의 정신은 언어와 소리와 색깔을 넘어선 곳에서 그 고향을 찾는다. 동양의 정신은 단지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고, 침묵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소리를 사용하며, 형태없는 무한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색깔을 사용한다. 즉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33)

선이 본격적으로 불지펴지는 육조 혜능의 손 안에서 였다. 그 이후 남악 회양, 청원 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그리고 황벽 희운등의 천재들이 차례로 그 불꽃을 이어받아 더욱 활활 피어 올리다가 드디어는 다섯 갈래의 불길로 갈라져 새롭고 풍성하게 타올랐다. (37)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 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38)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바로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이다.(46)


혜능은 중국이 낳은 위대한 천재 중의 하나이며 노자,장자,공자,맹자 등에 견주어도 하나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단경>은 책상 머리에서 짜낸 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나온 ‘참사람’의 작품이다 (53)

모든 것은 깨달음에 달려 있다. 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가 있고 다함없는 지혜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67) 

선의 통찰력을 그 자체로서 대단한 가치가 있지만 선에 갓 눈을 뜬 초심자가 그것을 함부로 써먹는다는 건 마치 세 살 먹은 아이가 면도칼로 장난을 치면서 닥치는대로 자르다가 결국 제 손가락까지 베는 것과 같다. (72)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75)

직접 물을 마셔 보고야 찬지 더운지를 알 듯 진리의 깨달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이다.(78)


머리의 지성 하나만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일반 기술 지식과는 달리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다윗이 구약의 시편에서 ‘주께서 얼마나 좋은지 혀로 맛보고 눈으로 본다’고 노래했을 때 그는 자신의 선 체험을 이야기한 것이리라. (79)

내가 지금 공을 말한다고 해서 이 공에 집착하지 말라. 무엇보다도 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고요히 앉아 마음을 비우면서 거기에 매달린다면 그대들은 결국 죽음과 어둠뿐인 허공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81)


마음이란 쉽게 파악할수 없는 물건이다. 우리의 마음은 마음에 대해 말을 해야 할 때마다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이야말로 선의 열쇠다.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가 없다. 선의 궁극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 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 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참본성이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쓰라. 곧 성불할 것이다” (83)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 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84)

 

 ‘무념’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없이 쓰는 걸 뜻한다. 무념을 아무 생각도 안한다거나 모든 사상을 끊어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선 절대 안된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무無’ 라는 말의 덫에 덜커덕 걸리고 만다.. (85)


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버리는 일이다. (86)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깍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로서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대의 참마음을 바로 보리라.(88)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선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뱀이 되고 자비와 연민을 품으면 보살이 된다.” (92)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다.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누가 어둠을 물으면 밝음은 어둠의 원인이요, 어둠은 밝음의 원인이다 라고 대답하라.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이 오니 어둠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밝음은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이둘의 상호관계 속에서 비로서 중도의 의미가 밝혀진다.(95)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道)는 이미 도(道)가 아니다.(114)


육조 혜능과 마찬가지로 마조는 제자들의 의식을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형태를 갖춘 세계에서 절대 공의 세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 서로 대립적인 방법을 쓰는데 아주 능숙했다. 그는 제자에게 필요한 경우에 따라 긍정의 길, 혹은 부정의 길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118)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 도(道)는 이 양자를 초월하며 동시에 둘 다를 포함한다.(127)

이렇게 영적으로 깨쳐 안 마음은 마치 텅 빈 허공과 같아 시작도 끝도 없고, 생사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고, 시끄럽지도 조용하지도 않으며, 젊거나 늙지도 않고, 공간을 차지하지도 않으며,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또한 크기도 형상도 없으며 색깔도 소리도 없다.(131)


나의 인상으로는 위대한 선사들에게는 우리의 전 생애가 하나의 커다란 공안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참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공안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삶을 누리는 사람한테는 가장 평범한 일이 기적 중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 137)


문이란 그것이 열릴 수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안쪽에서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부는 열쇠가 없이도 혼자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스승이 문틈으로 열쇠를 건네주기는 했지만 사실상 문을 여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거라곤 없다. ( 146)


진정한 ‘나’는 항상 새로운 것이며 고불(古佛)이란 죽은 부처일 뿐이기 대문이다.(153)


장자와 마찬가지로 조주 역시 ‘우주적 민주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도’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155)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156)


조주에게 있어서는 마조나 남전과 마차가지로 ‘도’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편재해 있다.(158)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은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은 흔히들 녹음기나 앵무새로 전락하고 만다 ( 163)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174)

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게 없느니라.(174)

어두움이 가장 짙을 때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178)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초심자가 인연이 닿아 그 자리서 돈오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단번에 청산할 수 없는 태초 이래로 빚어온 타성의 찌꺼기가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아직도 그에게 작용하고 있는 전생의 업이나 인과응보로 인해 일어나는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과정이 바로 수행이다. 특별히 엄격한 방법을 따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으나 다만 수행해 나갈 일반적 방향만 잡으면 된다. 들은 바를 우선 이성에 의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합리적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섬세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원숙하고 밝아져 의혹이나 미망의 상태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194)

 

스승의 책망은 신랄하긴 했으나 아주 부드럽고 해학적이었다. 조용한 물 밑은 깊은 법이다 (201)


자, 이제 분명히 그대들에게 말하지만, 거룩한 일들에만 마음을 쓰려 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초능력이니 신비술이니 하는 것들에 빠져들지 말라. 이것들은 전부 잔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미 그 뿌리에 다 들어있기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머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갖출 수가 없다. ( 202)


부처를 넘어선 사람의 눈엔 부처와 중생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223)

장자는 생명을 분명한 원리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며, 어떤 사물처럼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적 관습이나 행동 앙식에 따라 실천될 수도 없는, 전체적이고 신비한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삶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이 말하기에도 너무 벅찬 ‘도’를 붙잡으려고 애썼다.(225)

즉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242)


우리는 본래의 자신과 갈라놓고 있는 그 심연도 건너지 못하면서 달에는 건너가서 무엇 하리오.(245)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데 있다. 속안 마음의 깨다름이란 인간 존재의 속알맹이까지 꿰뚤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 이것은 장자가 말하는 ‘심재’,’좌망’,’조철’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이 깨달음이 다소 우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 선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수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251)


“구도자들이여! 자신을 속이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자신의 본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그대들이 행여 수백 권의 경전에 능통한다해도 그것만 갖고는 아무 것에도 구애 받지 않는 순수하고 때묻지 않는 일개 수행자만 못할 것이다 (255)

만일 진정한 깨달음과 진리가 언어 속에 있다면 이미 숱한 경전이 나왔는데 그 속에 다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태여 교외별전이 무슨 필요 있겠는가?(266)


초월적인 영역으로 솟구쳐 오를 때에는 독수리처럼 빙빙 돌며 오르지 않고 로케트처럼 곧장 하늘로 치솟지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올 때는 도리어 바람의 방향에 따라 그리고 인생이라는 물결, 조류,흐름,소용돌이, 이리저리 흔들림 등에 따르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영원한 도’가 현상계에서 작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275)

운문은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참본성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276)

사실상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최고의 날”이라고 한말이다. (277)

한걸음 나아가면 도를 잃고, 한걸음 물러서면 간격이 생긴다.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면 한 덩이 돌마냥 무감각해지고 말 것이다.(305)

장자가 이른바 ‘나를 잃었다’ 라고 한 것은 ‘참나’가 ‘거죽의 나’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 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311)

슬픔은 단 한 가지뿐이니 곧 낙원을 잃었다는 것이요. 단 한 가지 희망과 바램이 있다면 그 낙원을 되찾는 일이다. 시인은 시인 자신의 방법으로 낙원을 찾고 있으며 탕자 또한 그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것을 찾고 있다. 그러나 비극은 그 낙원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낙원을 찾으면서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낙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320)


홀로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 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327)


비교 신비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의 전통과 정신에서 진정한 알짜배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동양의 철학과 종교에 조예가 깊은 토마스 베리 신부가 선을 가리켜 아시아 정신의 절정 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고서 한 말이다.(329)

우리의 전 생애는 ‘진실 아닌 것에서 떠나 진실로 가는’순례이다. 이보다 더 의미 있고 감동적인 로맨스도 없다. 선사들이 왕왕 연애 시에서 의미심장한 구절을 인용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331)


“마음에 안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331)


‘도’는 어디에나 있으나 아무데도 없듯이 선도 마찬가지다. 그 실제적인 면에 있어서 선은 그때그때 경우에 맞게 하고 안하고에 달려있다. 말 가운데 침묵이 있고 침묵 속에 말이 있으며 정속에 동이 있고 동 속에 정이 있다. 모든 것은 그 시기에 맞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그대의 행위가 시기에 맞으면 마치 행동을 하지 않은 것과 같고, 그대의 말이 때에 알맞으면 마치 행동을 하지 않은 것과 같고 그대의 말이 때에 알맞으면 마치 아무 말도 안한 것과 같다.(338)


우리가 만일 하느님을 단순히 최상의 기술자로서만이 아니라 최상의 예술가며 시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때, 자연은 완전히 새로운 얼굴로 우리 눈에 다가오고,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우리의 정신을 크나큰 기쁨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이 ‘낙원’에 사는 듯한 기분에 짖을 것이다.(352)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라면 죽는 것 또한 사는 것이리라.(365)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사실 선은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전통적이고 간단한 카테고리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선이 신을 인간의 위치로 부당하게 끌어내리려 한다는 잘못된 추측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선은 기독교와 같은 방법으로 신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370)

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 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372)

기독교는 늘 이러한 해석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원전에 대한 정확한 전달, 진정한 속뜻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릇된 해석을 몰아내고 처벌하는 일과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때로는 너무나 그런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복잡하고 세세한 점들까지 애써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기 환상에 빠진 주장도 나오곤 한다. 그 결과 기독교가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체험하는 것임을 너무나 자주 무시해 왔다.(376)

선은 언제나 삶의 중심 사실을 꿰뚫고자 한다. 삶의 중심 사실은 결코 지성의 해부대 위로 올려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중심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선은 일련의 부정적인 방법을 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순한 부정은 선의 정신이 아니다. 선사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과 행동 자체가 곧 선의 불꽃이다. 선의 알짜배기 정신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후려갈기는 행위가 얼마나 실제적인가 하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엔 부정도 없고 긍정도 없으며, 평범한 사실, 순수한 체험, 우리 존재와 사고의 원천 바로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동적인 정신 활동 한가운데 자신이 바라는 고요와 공이 있다. 바깥에 있는 것들이나 기존의 것들에 휩쓸리지 말라. 선은 장갑을 끼지 말고 맨손을 붙잡아야 한다.(387)

머리가 미치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하는 것,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보기 시작하라는 충고다.  어쩌면 거기 머리로 짜낼 것은 아무것도 없는지 모른다.  단지 깨어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90)

 

C. 내가 저자라면

불교의 사상사적 흐름으로 살펴본다면, '선'은 대승운동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시불교 사상의 본질은 오(悟 : 깨달음)보다는 수(修 : 닦음)에 있었다. 돈오(頓悟 : 한번에 깨달음)가 대승의 정신이라면 점수(漸修 : 점차적으로 갈고 닦음)는 소승의 정신이라 볼 수 있다.
이 말을 곰곰히 뜯어보면 修에는 불성의 전제가 없으며, 悟에는 불성의 전제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見性成佛 이라는 유명한 문구처럼 '너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보기만 하면 너는 곧 부처가 된다'라는 메시지는 일반신도로서 깨달음만 있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선불교는 인도불교가 아니라 철저히 중국적 격의불교의 소산이며, 궁극적으로 노장사상의 변용이다라고 후쿠나가 마쯔지는 말한 적이 있다. 인도인이 산문적이라면 중국인은 운문적인 특징이 있을 뿐더러 '언어로서는 불성을 밝힐 수 없다'는 不立文子를 강조하였기에 선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옛 선인들의 문답을 살펴보면 현대의 우리들에게는 난해하기 짝이 없기 마련이다.
다 읽고 나서도, 'so..what?' 이라는 의문이 바로 뇌 속에서 튀어나오게 된다. 어느새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서인지 단순하고 명쾌한 결론이 안나오는 글은 어딘지 모르게 찜찜함을 남겨주어 계속 읽어야 되는지 책을 덮고 가만히 생각해봐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선의 황금시대>를 읽으면서 물론 주역도 상세히 달리긴 했지만 끊임없이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Help Me~'였다. 물론 '선불교'란 말로써 깨우치는 것은 아니고 누가 가르쳐줘서 깨우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야말로 어느 순간 '아하' 라는 돈오의 경지에 올라야 하건만 현대의 논리구조와 사상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길임에는 틀림없다.

확인을 해보니 저자 오경웅은 미국에서 교수와 외교관으로 오래도록 활약하면서 중국의 선을 서양에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선의 황금시대> (The Golden Age of Zen, 1967)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중국고전에 밝은 중국의 학자가 자기네 선을 서양에 소개한 가장 체계적이면서도 충실한 안내서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녀왔다.

그래서 만약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그리고 그 목표가 '선불교'에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그것을 소개하고자 하는 의도라면 현대적인 시각에서 내용을 재편성하고 특히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이 되어졌으면 한다. 더불어 가상의 큰 스토리 라인을 그리고 그 안에 개별적인 에피소드를 넣어 선사상을 설명한다면 보다 흥미롭게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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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4 09:24:12 *.78.105.123
저자에 대하여, 내가 저자라면!  잘 읽었습니다.
글에 포인트가 있어서 재미있게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특히 디지털 컨버젼스와 문명 컨버젼스로 정의내려 주신 부분이 기억에 남네요^^ 저도 이어령 씨의 디지로그를 아주 인상깊게 읽었던 터라 말씀하시는 요지를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한  주 끝까지 홧이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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