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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2시 00분 등록
 1. 저자에 대하여


오경웅(吳經熊). 문필이 뛰어난 법학자로서 서구 사회에서는 John C.H.Wu 로 알려져 있다.

'철저한 카톨릭 사람인 동시에 철저한 동양인'으로 불리는 그는 법철학을 연구한 세계적인 석학으로, 독실한 카톨릭 평신자로, 20세기를 통틀어 동서양을 완전하게 이해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1899년 3월 28일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상하이 호강대학에 진학, 처음에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과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곧 진로를 법학으로 바꾸고 상하이 동호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과 인연을 맺는다.


"만사에 스며드는 실재의 기본적 중심과 핵심이 법에도 스며드니 법도 우리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 통과할 관문의 하나에 불과하다. 또, 자연과 정신의 일치는 밀접하여 무엇이든지 사물 실재의 극치에 닿으면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중심을 진동시킨다. 인간은 무상 최고치에 이르러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우리 관점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서 법의 궁극적 근거가 일체 사물의 궁극적 근거와 동일하고 또 법의 의의가 우주 '최초 내원'과 '최종 거처'에 기인한다는데 까지 이른다."

위는 그의 법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예문이다. 그는 법학을 인간 삶을 다루는 학문으로 보았고, 법을 자연법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자연법의 옹호자이자 자연법을 일체의 기초로 보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지성적 추구에서 시작됐지만 나중에는 도덕상 직무로 바뀌었던 그의 법철학은 결국 그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인물로 안내하는 매개체가 됐다. 그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법철학을 공부하고 연구했으며, 그후 미국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법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감리교 신자였는데 개신교에서 어떤 내적인 깊은 이끌림을 얻지 못하다가 아빌라 데레사 성녀 전기를 읽고난 후, 데레사 성녀가 삶을 통해 제시했던 신비사상과 금욕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 근무했으며,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헌장 구성 등에 참여하는 한편, 중국에 천주교 신앙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고, 신약성서 시편 등의 중국어 번역을 맡기도 했다. 법학자이자, 외교관이며 철학교수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하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가 선불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를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육조 혜능의 <법보단경>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는 그는, 하와이대학교 중국철학과 문학전공 초빙교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선불교를 배우고 있던 제자를 통해 스즈키 박사를 소개 받는다. 스즈키 박사에게서 단순히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감동적인 인상을 받고, 그 즈음 출판된 스즈키 박사의 <선생활>을 읽고 나서 그는 마조, 조주, 임제, 운문 등 역대 조사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통찰에 흠뻑 빠져든다. 이후로 그는 선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는 것뿐만 아니라 깊이 연구하기에 이른다.


선에 대한 20세기 최고의 권위자라 할 만한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 영성연구로 수많은 저작을 남긴 토마스 머튼 신부와 두텁게 교류하면서 종교와 동양사상을 넘나들며, <동서의 피안>을 비롯하여<선의 황금시대> <정의의 원천> <내심낙원> <당시사계> <중국의 휴머니즘과 기독교 영성> <법철학 및 정치철학>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그의 자서전적 고백론이자 회고담이라 할 수 있는 <동서의 피안>은 하와이대학 교수로 2년간 재직하는 동안 저술한 책으로 그 안에는 30년 동안 그가 쌓았던 정신생활이 녹아있다. 그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 사상, 대승과 선사상에 관한 비판,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에 관한 견해 등 동서를 초월한 피안을 제시하며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불후의 가치만이 있음을 설파한다. 또 미국에서 교수와 외교관으로 오래도록 활동하면서 중국의 선을 서양에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선의 황금시대>를 저술하였는데 중국 고전에 밝은 중국학자가 자기네 선을 서양에 소개한 가장 체계적이면서 충실한 안내서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그는 한 때 유명한 문화비평가인 린위탕과 월간 <텐샤>의 편집동인이었던 문학인이었고, 손문 전기 출판 등 교육문화 사업을 비롯 다방면에서 종사하다가 1986년 86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그는 단순히 학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유교, 불교, 도교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준, 정신적 자유를 지닌 '참다운 지성인'이었으며 스스로 인간 존재의 위대성과 신성을 꿰뚫고자 노력한 '참사람'이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선의 심지

선에 대한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선으로 다시 말해 선의 숨결로 읽는 일이다. (P9)


나는 궁극의 진리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비법을 갖고 있다. 이 비법은 모습 없는 모습의 신비한 문을 여는 열쇠이며, 문자나 말로 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경전 말고 따로 전할 수밖에 없다.

이제 나는 이 비법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석가모니- (P19)


마하가섭을 인도선의 시조라 부른다. 그의 뒤로 27대 조사까지 이어져 내려오다가 보리달마가 28대로 인도선의 마지막 조사가 된다.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의 초대 조사가 되었다. 이래서 달마 대사는 선의 역사에 있어 인도와 중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한자의 ‘禪’이라는 말은 원래 산스크리트 어의 ‘Dhyana(禪那)’의 음역이긴 하지만, 그 뜻은 서로 크게 다르다. 인도의 ‘Dhyana’가 일정한 형태를 갖춘 집중적인 명상을 뜻하는 것인데 반해,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禪'은 존재 전채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선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늘 제자들한테 명상이나 사색을 통해서는 그러한 일이 절대 불가능함을 일깨워 왔다. (P20)


“깨달음의 교리를 중국적으로 해석한 것”

“이렇게 해서 현실에 바탕을 둔 중국인의 상상력은 선을 창조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자기네들의 종교적 요구에 알맞도록 최대한 발전시켜 나갔다.” -스즈끼 다이세츠-

“장자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한 이들은 당나라 때의 선사들이었다. -토마스 머튼- (P21)


선사들의 근본 통찰이 노장 사상과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心齋]이나 ‘마음을 잊음’[坐亡]또는 ‘아침처럼 맑음’[朝徹]에 해당된다.” -노자의 <도덕경>-

이는 곧 장자의 근본 사상이 바로 선의 핵심이라는 말이 된다. 단지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은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련의 발전에는 한국과 일본의 선이 상당한 공헌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P22)


마음을 맑게 함 (心齎)

“자네의 기(氣)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귈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道)는 이 텅 빈 상태 속에서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공자- (P26)


마음을 잊음(坐忘)

‘잊는 상태로의 침잠’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감에서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안회- (P28)


아침처럼 맑음(朝徹)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야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에서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같은 경지에 든 사람은 바깥의 대상이 천만변화를 하더라도 항상 폭넓게 포용하고 반갑게 맞아들이고 또 모든 일에 차별이 없소. 이것이 바로 ‘혼란과 고통 속의 평화’라는 것이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가 있겠소? 그것은 바로 완전한 평화가 되려면 혼란과 고통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여우(女偶)도사-

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夫有眞人而後有眞知〕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를 ‘앎’보다 강조한 것으로, 이 역시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P30)


인간 존재는 본래 하나이며 동서양을 초월해 왔다. 동서양을 초월해 있는 곳에서만이 동서양의 활기찬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P35)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선의 진면목을 그려 보자는 데 있다. 단 여기서는 당대(唐代)의 선사들만을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독창적인 통찰력과 풍부한 개성의 힘으로 선의 심지에 불을 당겼기 때문이다. (P36)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렬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상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닮았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다. (P38)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달마가 썼다고 알려진 유일한 작품은 도(道)와 진리에 이르는 두가지 길에 대한 글이다.

‘도에 들어가는 길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지성에 의한 길’이란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 교리의 이해, 즉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행위에 의한 입문’에는

1) 미움을 넘어서는 길

‘내가 받은 현재의 고통은 비록 이생에서의 내 죄가 없다 해도 지나간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의 업보이고 그 업보가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의 지시에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은 더 나아가 타인의 미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구고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게 된다. 이 길이 바로 <미움을 넘어서는 길>이다. (P43)   


2) 삶에 적응하는 길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도취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음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도’의 큰 흐름과 은밀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수없이 변하는 삶의 여러 형편과 상황들에 적응하는 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다. (P44)


3) 집착을 버리는 길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 따라서 더 이상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축복을 아는 것이 참으로 ‘도’의 길에 접어드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집착을 버리는 길’이다. (P45)


4)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지혜로운 자는 자선 행위, 즉 자비를 위해 언제나 자기의 신체와 생명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한 것처럼 여긴다. 이것이 바로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이다. (P46)


달마대사의 ‘행위에 의한 입문’에 관한 주장은 그것이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 뿐 아니라 지성과 행위가 결국 동일한 방법임을 암암리에 보여주기 위해, 지성과 불법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이러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의 결합은 아마도 은연중에 달마의 정신에 끼친 중국 사상의 영향으로 돌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 (P47)


달마와 후대 선사들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P47)


그가 사용한 부정적 방법은 ‘부정적 방법’의 대표적인 예이며 이후 선종의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달마대사는 후대의 선사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존재를 부정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혜가가 한사코 찾아내어 진정시키려 한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라 그것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본래의 참마음은 평화롭다. 거기엔 불안이 있을 수 없다. 본래의 참마음은 이미 평화 중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을 진정시키려 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또 마음을 내놓아 보라고 요구함으로써 그는 잘못 대상화된 마음이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자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즉 스승의 이와 같은 뜻밖의 질문을 통하여 제자의 직관이 온전히 살아나 자신의 참마음을 보게 된 것이다. (P48)


3. 부처의 눈

혜능(慧能, 638-713)은 중국이 낳은 위대한 천재 중의 하나이며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에 견주어도 하나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그의 제자들이 <법보단경>이란 제모 아래 다독거려 놓은 가르침과 대화는 중국의 불교 책자 가운데서 가장 걸작품으로 꼽힌다.

<단경>은 책상머리에서 짜낸 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에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온 ‘참사람’의 작품이다. (P53)


“모름지기 최사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곧바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야만 한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며 항상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세상 그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홍인- (P58)


“본래 맑고 깨끗하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래 나고 죽음이 없거늘, 내 어찌 예상했으리오! 본래 다 갖추어 있거늘, 내 어찌 눈치나 챘으리오! 세상 만법이 다 거기서 나오거늘, 내 어찌 알았으리오!”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제 본 마음 알고 제 본 성품 보면 이것이 곧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니라.” -홍인- (P61)


“움직이는 건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다만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뿐이다.”

“좋은 뿌리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성은 영원한 것도 변화하는 것도 아니어서 절대 끊어짐이 없다.” (P64)


혜능에 의하면 불성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정신과 물질 등을 초월해 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門)-본질적으로 불성이 둘이 아님”의 뜻이다. (P65)


신수의 가르침은 ‘대승인(大乘人)’을 상대로 한 것인데 비해 혜능의 것은 ‘최상승인(最上乘人)’을 위한 것이었다.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이른바 계?정?혜라고 하는 것들은 단지 참본성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정?혜는 정신생활의 세 단계라기보다는 참본성이라는 지혜의 샘에서 흘러넘치는 샘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깨달음에 달려 있다. 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가 있고 다함없는 지혜의 원천을 누리게 된다. (P67)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 (P75)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교외별전(敎外別傳)

이것은 ‘법’이라든가 도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경전 말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니 이를 일컬어 교외별전이라 한다. 진리의 깨달음이란 순전히 개인적 체험이다. 그림자와 메아리에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직 자기 안을 들여다봄으로써만 정말 무엇이 ‘참나’인지 알 수 있다. (P78)


머리와 지성 하나만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는 일반 기술 지식과는 달리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P79)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립문자란 결국 말이나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말이나 문자가 진리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완전히 부적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참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으로, 말해야 할 때는 말로 언제고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한 순간도 참본성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경지가 바로 견성(見性)이다. (P82)


직지인심(直指人心)

마음은 하나다. 단지 마음은 정지해 있는 물건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흐르는 강물처럼 어느 때는 맑고, 어느 때는 흙탕물이고, 어느 때는 잔잔하고, 어느 때는 소용돌이친다. 이처럼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 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P84)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깍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는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임 없는 그대의 참마음을 보리라.” (P88)


견성성불(見性成佛)

밝음과 어둠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개의 다른 현상으로 비치지만 지혜있는 이는 그것들이 본래 둘이 아님은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이 차별없는 본성이 참본성이다. 참본성이라는 것은 바보라고 해서 적게 갖지도 않았고 현자라 해서 많이 갖지도 않았다. 그것은 번뇌 속에서도 혼란에 빠지지 아니하며 깊은 삼매경 속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지도 않으며 가지도 않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것의 본질과 거죽으로 나타남은 이같은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경지에 있으며 영원불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도‘라 부른다. (P90)


혜능의 철학은 초월을 강조한 점에서는 노자, 장자와 비슷하고 인간을 중시한 점에서는 공자, 맹자와 비슷하다. 혜능은 모든 경전이 인간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참본성의 지혜 위에 세워졌다고 강조한다. (P91)


5. 물 긷고 땔 나무를 줍는 일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은 선종의 역사상 혜능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혜능 이후로는 의발의 전승이 일체 없어지고 조사라는 명칭도 사라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P97)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서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를 볼 수 없다.” “네가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상 삼매에 드는 일이다.” -남악 회양- (P99)


마조의 위대성은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놀라운 기술과 번뜩이는 기지에 있다. (P101)


제자의 공부와 지혜의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사용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또한 제자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모순은 당장에 사라지지 않는다. (P102)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바로 부처다.” -마조 도일- (P103)


마조가 가르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한 스승 밑에서 나왔다 해서 천편일률적이 아니고 제각기 다른 스타일과 깊이를 지녔던 것이다. (P104)


마조의 의도는 제자 스스로 ‘참나’를 발견하게끔 하는 데 있었다.

‘참나의 발견’이야말로 마조가 가르치는 목표였으며, 사실상 그것은 선 그 자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바다. (P107)


"그렇게 묻고 있는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마조가 제자로 하여금 자신의 참본성을 깨쳐 알 수 있도록 제자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보인 예이다. (P108)


육조 혜능과 마찬가지로 마조는 제자들의 의식을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형태를 갖춘 세계에서 절대 공의 세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 서로 대립적인 방법을 쓰는 데 아주 능숙했다. 그는 제자에게 필요한 경우에 따라 긍정의 길, 혹은 부정의 길을 적절히 사용하였다. (P118)


6. 선악을 넘어서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 백장 회해- (P123)


노동에 대한 그의 주장 속엔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 그는 초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그에 의하면 초월이라는 한쪽 면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 절대의 실체를 둘로 나누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의 실체는 형이상과 형이하를 다 포함한다고 믿었다. (P125)


성인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없이 문제의 양쪽면을 다 고려하고서 <도>에 비추어 양자를 본다. 이것을 양행(兩行), 즉 두 길을 한꺼번에 따름이라 한다. -장자- (P127)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서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P129)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큰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스스로 그것들을 중요히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진정한 지혜의 샘물이 솟아나오는 물구멍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벽의 일심(一心)은 곧 무심(無心)을 말한다. 우리가 ‘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무심을 통해서다. (P130)


사실상 ‘참마음’이란 바로 우리 속안에 있는 불성이다. 무엇보다 꼭 필요한 일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일이다. (P131)


선의 역사에 있어서 황벽의 중요성은 그의 분명하고도 참신한 사상 이외에도, 그의 강한 개성과 철저한 방법이 제자인 임제와 임제의 종풍에 실로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데에 있다. (P133)


어떠한 경우라도 정신을 가다듬어 이 ‘무’자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날이 가고 달이 거듭한 어느날 홀연히 온 마음이 한덩어리가 되면 갑자기 마음의 꽃이 활짝 피어나고 부처와 조사들이 처음으로 깨친 바를 비로소 뼈속 깊이 이해할 것이다. 이 깨달음은 더없이 단단하여 그대는 세상 그 어떤 노승들의 입에 발린 말에도 속지 않을 것이며 활짝 열린 그대의 입에서 위대한 진리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P136)


우리가 진심으로 참되게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공안을 풀어야 한다. 그리고 참된 삶을 누리는 사람한테는 가장 평범한 일이 기적 중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가장 정확하게 과녁을 뚫는 방법은 골수에 사무치도록 속속들이 꿰뚫어보는 일이다.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 없다. (P137)


7. 뜰 앞의 잣나무

“평상심이 곧 도다.” -남전 보원- (P142)


남전은 선의 핵심 중의 하나인 ‘평상심이 곧 도’라는 말로 서두를 장식한다. 이어 ‘도’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초월해 있으며, 따라서 의도적인 생각을 갖고 찾는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고, 논리적인 해석으로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것도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남전은 어떻게 해야 ‘도’를 알 수 있는가는 말하지 않고, 다만 도를 깨쳐 안 다음의 결과에 대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을 뛰어넘어 일체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내 생각에 이것은 ‘도’의 ‘초월성’을 암시한 말이다. 민일 ‘도’가 평상시의 마음 그것이라면 이 평상심은 대단히 특별한 것임에 틀림없다. (P143)


선의 전문 용어의 하나인 “유(有)를 깨닫는다.”는 말과 만나게 된다. 이것을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궁극의 실체 혹은 순수 존재를 깨쳐 안다.”는 뜻이니, 다름아닌 ‘도’를 일컫는 말이다. ‘도’를 깨침으로써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전체가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그 안에 있는 만 가지 물건과도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P144)


스승의 행동은 마음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선사들이 수많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토마스 머튼이 지적한대로 ‘존재론적’ 또는 ‘우주적’ 겸손이며 노장이 주장한 무위(無爲)의 도, 자연의 성(性)이다. (P147)


‘고담한천’이란 다름아닌 ‘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물맛이 쓰다는 것은 도를 닦으려면 일체의 세상사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엄격한 자기 수련과 자기부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른다.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제자를 진정한 ‘나’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선사들의 한결 같은 목표이다. (P153)


혜능의 진정한 계승자인 조주는 참본성을 특히 강조했다. 그에게 있어 참본성이란 ‘도’ 또는 ‘진리’의 다른 이름이다.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갑자기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P157)


조주에게 있어서는 마조나 남전과 마찬가지로 ‘도’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만물속에 편재해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의 수수께끼같은 말을 이해할 수 있다. (P158)


조주에게 있어서 하나(一)와 여럿(多)은 서로가 한덩어리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럿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는 여럿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 하나(一)로 돌아가며 그 하나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면 조주는 하나(一)와 ‘도’를 동일시 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견해로는 도는 하나와 여럿을 초월하는 데 있다. ‘도’는 하나(一)와 여럿(多)을 초월할 뿐 아니라 ‘있음’과 ‘없음’ 또는 ‘현상’과 ‘본체’를 초월한다. (P161)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平常心)에 따르기만 하면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 -용담 숭신- (P174)


“어두움이 가장 짙을 때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 -노자- (P178)


“나는 그에게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空手去 空手歸] -설봉 의존-

여기서 그가 지적한대로 실제로 스승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진리다. (P185)


9. 감추어진 불씨

위산 영우(?山 靈祐, 771-853), 그는 백장의 제자로 위앙종의 창시자다. (P189)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아닌 자신의 마음이요, 자신의 부처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기도 한참 빗나간 얘기다. 마치 검뎅이를 갖고 마음밭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 -위산 영우- (P190)


위앙종이 선에 기여한 가장 큰 공헌은 앙산이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을 구분한 데 있다. (P191)


속안의 ‘참나’가 여러 선종의 주춧돌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안에 있는 영적 불씨를 강조한 것은 위앙종의 공헌이다. 우리는 이 속안의 불씨를 통해 ‘그(伊)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으며, ’그'가 곧 우리 자신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 신령스런 불씨 즉 신비한 깨달음을 ‘기’(機)라 한다면 우리의 ‘참나’는 본래적 존재 즉 ‘체’(體)이며, 깨달음 이후의 모든 행위와 언어는 참나의 작용 즉 ‘용’(用)이다.

위앙종의 또 다른 공헌으로는 한편으로 ‘돈오’의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 ‘점수’의 필요성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걸 들 수 있다. (P193)


실제의 궁극적 이치는 한 점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리고 만일, 잔말은 다 집어치우고 단칼에 돌입할 수 있다면 성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의 구별이 일시에 무너지고 그대의 전 존재는 그 본래 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그 자리가 바로 우주의 이치와 구체적 사물이 둘이 아닌 경지, 바로 ‘있는 그대로의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P194)


거룩한 일들에만 마음을 쓰려 하지 말고 마음을 참본성에 돌려 굳건히 두 발로 땅을 딛고 그대들 자신을 닦으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의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미 그 뿌리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P202)


10. 집으로 돌아가라.

“스님께선 자유인을 노예로 만들지 마십시오.” 여기서 동산은 자주 정신을 드러내 보였다. 사실 속안의 참나는 갈고 닦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P204)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나’와 ‘그’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그’는 ‘나’이나 ‘나’는 ‘그’가 아니다. 이것은 신은 나보다 더 진정한 ‘나’이지만 나는 신이 아닌 것과 같다. (P208)


“참된 가르침이라는 것은 무엇이오?”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버리는 것이오.”

이는 장자에 나오는 말로 동산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인 동시에 선과 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나타낸다. (P215)


사실 제자가 스승보다 월등해야만 제자는 비로소 스승이 전해주는 등불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선종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처럼 되었다. (P211)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자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 가르쳐준 백 개의 해답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 (P212)


훌륭한 스승들에겐 단 하나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즉 제자들이 갖고 있는 숨은 힘을 일깨워 그들 스스로 자기가 누군가를 깨닫게 하는 일이다. (P216)


1) 향(向)???스승은 자신의 행동이나 지혜를 통해 제자들에게 사랑과 예찬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제자들도 스스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이상에 대해 찬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19)


2) 봉(奉)???제자들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전심전력으로 참선해야 한다. 첫 단계의 열정은 이제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불로 변해야 한다. (P220)


3) 공(功)???이 단계는 첫 결실의 단계로, 여기선 안정과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안정은 노력의 결과요, 즐거움은 뜻밖에 얻은 혜택이다. (P222)


4) 공공(共功)???이제 우리는 더욱 원숙한 결실의 단계에 이르렀다. 앞의 단계에선 고목에 꽃이 피고 겹겹 구름 봉우리 너머에 집을 지었으나, 이번 단계에선 샘물이 삼계(三界)에 가득차 흐르는 정경을 보게 된다. (P223)


5) 공공(공공)???동산이 정신수양의 최종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것이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나한계침의 심정과 비슷한 것임을 보여준다.

장자는 생명을 분명한 원리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며, 어떤 사물처럼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사회적 관습이나 행동방식에 따라 실천될 수도 없는, 전체적이고 신비한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삶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이 말하기에도 너무 벅찬 ‘도’를 붙잡으려고 애썼다. -<장자의 길> 서문에서- (P225)


11. 차별없는 사람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께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한다면 절대로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P238)


임제에겐 진리를 깨치는 일, 즉 참본성을 바로 보는 일만이 제일로 중요했을 뿐이다. 그는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절대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임제 철학의 촛점은 ‘무위진인(無位眞人)-차별없는 ’참사람’에 있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본래의 나‘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이때의 ’나‘는 삶의 거죽에서 일어나는 여러 우연들에 지배를 받는 일시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도의 물결과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영원한 ’참나‘인 것이다. (P239)


가장 귀중한 보물인 ‘차별없는 참사람’은 바로 그대 안에 있고, 그대 자신이 바로 그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미 잃고 만다. 그리고 한 가지, 이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기 때문에 그대는 자기 속안에서 조차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찾는 자 바로 그 자아이지 어찌어찌해서 찾아질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참나’는 항상 주체이지 결코 객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P247)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데 있다. 속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 이것은 장자가 말하는 심재(心齋), 좌망(坐忘), 조철(朝徹)에 해당되는 것이다. (P251)


12. 날마다 좋은 날

그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른 것은 다 제쳐 놓고 오로지 영원한 도에만 관심이 있었던 만큼 말이란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P259)


운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참본성인 ‘이것 하나’를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목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우리의 ‘참나’인 ‘이것 하나’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조금도 부족한 게 없다. (P265)


운문은 이른바 ‘일자관’(一字關), 즉 한 글자로 관문을 통과하는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운문은 질문을 통해 질문자의 정신 상태와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P267)


“우주의 질서 안에, 우주의 한 복판에, 누구나 눈에 보이는 산 깊숙한 곳에 신비한 보물이 숨겨져 있다.”〔中有一寶 추在形山〕 -승조- (P270)


선종의 다섯 종파에서 공통되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정신생활에서는 궁극의 완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상이다. (P275)


운문은 이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문제에 매달려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반대했다.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찾는데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P276)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의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한 말이다. (P277) 


13. 지금 여기

다른 종문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P280)


명상적 관조는 법안종에 흡수되어 그 두드러진 특색이 되었다. 즉 관심의 초점을 속안의 참나에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신비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P282)


“만일 그것이 경지라고 한다면 거기엔 궁극적인 진리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법안 문익-

법안은 경험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 철두철미 실재론자였다. 모든 상대적 속성을 초월한 근본 실재. 즉 ‘도’를 강조한 것을 보면 그가 형이상학적 실재론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P287)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참나를 발견하고 나아가 말과 관념을 초월한 영원불변의 도(常道)에 이르도록 하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나 제자들의 마음을 지금 여기로 돌리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P288)


근본적으로 법안은 신비주의자였다. 그의 신비주의는 자연적 신비주의나 우주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초우주적인 신비주의였다. (P291)


중국 철학 일반에 있어서 법안종의 의의는 불교의 각 종파 중에서 이 파가 유독 유교와 가깝다는 사실에 있다. (P296)


“큰 마음을 깨친 사람은 세상 어디를 가도 할 일이 없다.” (P297)


14. 선의 불꽃

장자가 이른바 ‘나를 잃었다.’(吾喪我)라고 한 것은 ‘참나’(眞我)가 ‘거죽의 나’(我)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삶이란 ‘참나’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P311)


모든 사람 각자가 스스로 직관을 통해 찾아야 한다. 따라서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은 ‘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떠먹여 주는 게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자고 있는 직관을 일깨우는 일 뿐이다. (P318)


우리 존재의 중심에 문이 하나 열린다. 우리는 그 문을 지나 무한한 심연으로 떨어져 내린다. 비록 그 심연이 무한하긴 하나 우리는 그 깊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이 평온하고 잔잔한 접근을 통해 온 영원이 우리 것이 된다. (P319)


“아예 나귀탈 생각을 버려라. 그대 자신이 곧 나귀요, 온 세상이 또한 나귀다. 그러니 새삼 나귀를 탄다고 하는 어디 있겠는가...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그대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청원 행사-(P321)


“마음에 안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홈즈 대법관- (P331)


우리는 비록 스승이 그대에게 무엇을 떠먹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은 그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스승의 가르침은 최소한 제자가 깨닫는 데에 하나의 촉매 역할은 할 것이다. (P334)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생각 없이 그저 속안의 참나에서 그대로 선(善)이 흘러나왔을 때, 그것이 바로 선(禪)이다. (P339)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선은 좀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대단히 신비하고 난해하다. 어찌보면 선은 정신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상천외한 것들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불교 신자들한테도 선은 여전히 당혹스럽게 다가와 그들이 익숙해 있던 사고패턴이나 경건시해 온 상징물들을 여지없이 부숴버린다. (P369)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P370)


선은 기독교와 같은 방법으로 신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선은 하나의 단순한 교리로 붙박아 둘 수 있는게 아니다. 선에는 비록 교리적인 요소들이 녹아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표현이 불가능한 선 체험의 곁다리들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부처자신의 깨달음을 믿고 이해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는다. 그 대신 깨달음의 체험 속에 모두가 직접 참여하고 개개인의 존재가 온 몸으로 체험하길 바란다. 따라서 그 속에 담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모르고서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선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전개를 거부한다. 여기에 선의 독특한 맛이 있다. (P371)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P372)


선은 유일하게 진실인 본질에 도달한다는 명목으로 감각이나 물질을 거부하지 않는다.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아니면 그렇게 분별하고 나눠 놓는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깨쳐 아는 일이다. (P373)


선은 일종의 확실성을 목표로 한다.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 (P374)


기독교에선 객관적인 교리가 세대적으로나 우수성으로나 항상 앞선다. 반면에 선에 있어서는 체험이 항상 선행한다. 이는 시대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적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선은 어떤 계시의 관념도 부숴버리며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또한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꿰뚫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선은 간단히 종교로 분류하기가 어렵다. (P383)


선은 전달 가능성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친다. 그리고 선의 가르침이나 수행 속에 담겨 있는 상당한 양의 독설과 폭력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기존의 설명과 안이한 해석들을 죄다 쓸어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선 체험은 오로지 그 독자성의 바탕 위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P384)


선은 말씀을 전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실현이며, 계시가 아니라 자각(自覺)이고, 지금 여기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존재의 자리를 여실히 깨닫는 일이다. (P385)


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의에선 반(反)언어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히 뒤엎은 것이다. (P386)


선은 이러한 편견을 모두 부수고 우리 머리속에 자리잡고 있는 환상적 모습들을 쓸어내기 위해, 그리하여 대상을 ‘직접 보게’ 하기 위해 언어를 뒤집어 사용한다.

선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전적인 긍정이다.

선은 언제나 삶의 중심 사실을 꿰뚫고자 한다. 삶의 중심을 파악하기 위해 선은 일련의 부정적인 방법을 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순한 부정은 선의 정신이 아니다....선사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과 행동 자체가 곧 선의 불꽃이다. -스즈끼 다이세츠- (P387)


“선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선은 단순히 우리를 일깨우고 깨쳐 알게 한다.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선사의 행위와 몸짓은 가르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자명종’의 울림과 같은 것이다. 선사들과 제자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언어와 행위는 이러한 맥락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흔히 선사는 제자가 보기도 하고 못 보기도 하는 사실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P388)


선은 인간 실존의 어떤 환상적이고 신비적인 용어로 합리화되거나 또 그렇게 상상되어서는 안된다. 단순히 그 실체가 체험되어져야 한다. (P393)



3. 내가 저자라면
 

이 책은 카톨릭 신자이자 중국인이면서 유교, 불교, 도교의 철학과 그리스도교 사상 등 많은 종교의 가르침을 섭렵한 저자가,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7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당나라 시대의 위대한 선사들의 말과 행동에 숨겨진 뜻을 저자의 객관적인 태도와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 놓았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의 문을 연 보리달마, 그의 제자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에 이르는 초기 선사들의 이야기와 6대 조사 육조 혜능을 위시하여 남악 회양, 청원 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그리고 황벽 희운과 같은 거장들의 사상과 행동을 살피고, 이어 위산 영우, 동산 양개, 임제 의현, 운문 문언, 법안 문익 등 그들의 '선종 오가'를 담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와 가섭존자의 이야기를 간략히 언급하고 저자가 선의 불꽃이라 명명한 현존하는 자료들에서 뽑은 선사들의 이야기와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 토마스 머튼 신부, 홈즈 대법관과의 우정, 사상적 교류를 통해 저자의 사고체계를 보여준다. 특히 책 뒷부분에 놓인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은 선지식의 경험이 부족한 나같은 초보자에게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고, 기독교인이자 서양인이 바라보는 동양의 선에 대해, 여타 다른 종교와 비교, 설명해줌으로써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객관적 시선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저자는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도가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난 모습이라 평하고 선이 불교보다는 도가사상을 더 많이 닮았음을 피력하며 당대 선사들의 일화가 담긴 곳곳에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심고, 공자와 맹자의 사상도 바탕에 있음을 전한다.


선은 이론이 아닌 체험을 통하여 얻는 과정이다. 논리적으로 따지고 분석하여 터득하는 학문이 아니며, 대부분의 종교들처럼 신을 섬기거나 믿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교리로 붙박아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체험을 통해 스스로 존재의 근본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을 목표로 하는 ‘참나의 발견’에 있다.


“본래 맑고 깨끗하거늘, 본래 다 갖추어 있거늘...” 혜능은 마음의 참모습을 알고 참된 자신을 찾아 ‘참본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그렇게 묻고 있는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이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마조는 불법을 구하러 온 제자 대주에게 이렇게 답함으로써 제자 스스로 ‘참나’를 발견하게끔 했으며,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조주는 그의 설법에서, 도와 진리의 다른 이름인 ‘참본성’을 강조했다. 또 임제는 기회있을 때마다 ‘본래의 나’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는데 이때의 ‘나’는 삶의 거죽에서 일어나는 여러 우연들에 지배를 받는 일시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도의 물결과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영원한 ‘참나’를 주장했다.


선은 자각, 즉 자신의, 우리의 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한가운데, 지금 있는 나의 존재, 우리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 이렇게 해서 ‘참나’를 발견하고, ‘참본성’의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워지면 일을 할 때도 행복하고, 놀 때도 행복하고, 사는 것도 행복하고, 죽는것도 행복할 것이다. 그야말로 임제의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다.


중국선의 시조로 여겨지는 달마에서 혜능, 마조, ...임제, 법안까지 위대한 선사들의 일화는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심오한, 기이하면서도 황당하기조차 한 이야기들로 넘쳐 나지만 이들이 전하는 선의 체험은, 내게 무언가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조금씩 읽어내려 갈수록 그들의 참뜻이 무엇인지, 선이라는 것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떠나 있지 않고, 우리 삶 속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어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고, 이를 통해 선의 계보를 이어간다. 그들은 선문선답하는 듯 보이지만 때로 예기치 않은 말과 기이한 행동으로, 독특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들의 깨우침을 도와주고, 제자들은 스승들의 이러한 말과 행동을 통해, 또는 스승의 무언의 내적자아를 통해 이심전심으로 깨달음에 도달한다. 긍정의 길 혹은 부정의 길을 적절히 활용해 제자들 저마다의 그릇 크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스타일과 깊이로 지도한 마조, 임제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방망이질을 한 황벽, 제자를 다룰 때 고함을 질러 일깨우는, 그러나 스승으로서의 기지가 풍부했던 임제, 현명하고 원숙한 강인한 태도로 제자를 완벽한 깨달음으로 이끈 위산, 하물며 스승에게 뺨을 치거나 스승을 밟는 제자의 방자한 행동까지도 받아주는 스승들까지, 이들 모두는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다양한 방법으로 제자들이 스스로 깨우침에 이르도록 돕는다. 스승은 제자들의 잠자고 있는 숨은 힘을 일깨워 제자들이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제자 스스로 ‘참나’와 ‘참본성’을 찾게끔 이끈다. 이러한 가르침을 깨달은 제자는 스승보다 월등함으로 스승이 전해주는 등불을 물려받는다.


책 본문의 ‘비록 스승이 그대에게 무엇을 떠먹여 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승은 그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로 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라는 문장과 연구원에 지원하며 내가 최고의 책이라 꼽았던 책 <최고의 교수>에 나오는 “중요한 건 내가 아는 바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재닛 노던 교수의 말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동양과 서양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스승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선의 황금시대>는 불교와 선에 문외한이던 내게 선에 대한 좋은 입문서가 되어 주었다. 스승의 가르침은 제자의 마음을 깨어나게 했고, 이는 내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내게 가슴으로 기억되는 가르침으로 남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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