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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1시 46분 등록

저자에 대하여

 

나는 그를 이해하는데 있어 3가지 질문을 품고 그를 만나고자 하였다.

첫째> 오경웅의 성장과 배움

둘째> 오경웅의 가치관과 철학

셋째> 오경웅의 삶과 태도

 

오경웅은 어렸을 때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학은 중국학을 말하는데 한문과 한시등 중국고전의 말씀과 역사를 배우는 학문으로 어렸을 때부터 중국문화권에서 성장한 토대가 동양학을 이해하는데 큰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한학은 정서적으로 아래 예와 닮아 있다고 한다.

<장자>는 소극적 은일(隱逸)과 반사회적 지향을 존중하였다. 특히 '()'보다 '()'의 가치를 우선시하여, 무용의 용을 주장하였다. 〈변무〉편에는 "오리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주면 걱정하게 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끊어버리면 슬퍼한다. 따라서 본성이 길면 잘라서는 안 되고, 본성이 짧다면 이어서도 안 된다."라고 하여,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본성대로 삶을 살아갈 뿐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타고난 본성 그것을 아는 삶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오경웅의 태도에 배어져 있었으리라.

 

그는 상해의 호강대학에서 자연과학을 공부하였다. 그가 자연에 대한 호기심 또는 이치를 깨닫고 싶었다면, 자연과학과는 그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과학은 대자연의 오묘하고도 신비스러운 현상을 연구하여 자연 속에 숨겨진 질서와 비밀을 찾아내고, 이것을 이용하여 미래의 세계를 설계하는 학문이다.

그러던 그가 자연과학이 아닌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자연과학이 자연의 이치를 다루는 것이라면, 법은 인간 삶의 이치를 다루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사람에 대한 관심이 그를 법철학으로 이끌고 간 것 같다.

그리고 상하이 동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이때부터 자연법에 대한 옹호자였고, 일체법의 기초로 자연법을 보았다고 하니,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타고난 본능 또는 천성에 따른 삶과 이것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하는 자연과학 등의 영향이 고스란히 그의 삶의 태도를 이루고 있다.

 

그의 법정신의 예문을 살펴보면

만사에 스며드는 실재의 기본적 중심과 핵심이 법에도 스며드니 법도 우리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 통과할 관문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 관점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서 법의 궁극적 근거가 일체 사물의 궁극적 근거와 동일하고 또 법의 의의가 우주(최초내원/최종거처)에 기인하는데 까지 이른다.”라고 하였다.

그는 관심은 일찍이 지성에서 시작하여 인간본연의 도덕성으로 향하였다.

 

이런 내적인 깊은 관심과 태도는 그를 카톨릭으로 이끌게 되었다.

여기에서 저자가 왜 카톨릭을 선택하였을까? 그 연결고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약간의 단서를 찾아내보고자 조사를 하였는데, 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단서는 바로 자연법에 있다.

 

자연법이란? 일반적으로 실정법을 초월하여 영구불변적으로 존재하는 법이라고 정의되나 그 개념과 인식가능성에 대하여 신학, 철학, 법학등에서 이론적으로 분분한 논의가 되고 있다.

자연법의 개념은 너무나도 다양해서 그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개념만 정의하겠다.

인위적이 아닌 자연적 성질에 바탕을 둔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법률 및 규범

자연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자연법이 모든 실정법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을 자연법론이라 하는데 오경웅박사도 이를 잇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자연법의 문제를 크게 중요시하지 않거나 외면해 왔다. 거기에서는 자연법에 대한 성서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이 아담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절대 타락하였기 때문에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계시신학에 근거하여 자연법과 자연신학을 거부하여 왔는데,

그가 감리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사상의 경향을 느껴볼 수 있다.

 

감리교와 달리 카톨릭 신학에서 자연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성서적 증명 : 복음서는 자연법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로마서1 8-32절과 2 14-15절에는 마음에 쓰여진 법을 말하고 있다. 일찍부터 교부들은 자연법이란 마음에 내재하는 것, 타고나는 것, 삽입된 것, 마음에 쓰여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둘째 이성에의 증명 : 자연법은 인간의 이성을 자연적 최후목적으로 삼고, “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을 자명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존재의 질서를 보존하라”, “너의 의무를 다하라” , “너의 존재 목적에 도달하라등의 태초의 명령에 따르라고 한다.

 

오경웅의 삶과 철학적 태도의 가치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자연법론의 옹호자로서 그리고 자연법을 따르는 카톨릭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의 몸에 배인 동양적 정서의 토대가 바로 자연이고, 그 자연 특히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그것에 대한 갈망이 왜 그가 禪에 빠져들어가게 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동양에서 태어나 미, , 7개 대학서 법철학을 연구하면서 서양문화를 경험하였다.

특히 미국의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와의 14년간의 교류를 통해서 그는 무엇을 얻었을까?

올리버 웬들 홈스는 뉴딜시대에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법관 속에 있으면서 자주 진보적인 소수 의견을 진술하여 미국의 법 및 법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또 자유주의 자로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에 노력하고, 프래그머티즘 입장에서 구래의 자연법 사상을 타파하여 리얼리즘에의 길을 열었다고 평가되는데, 이쯤에서 프래그머티즘의 입장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구래의 자연법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고 오경웅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가늠해 본다.

 

프래그머티즘은 흔히 실용주의라 불리는 데, 유럽대륙의 전통적 철학에 도전하면서 생긴 철학적 운동이다. 진화론자 다윈(Ch. Darwin)의 “종의 진화”에 대한 개념을 사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에 적용시킨 철학 내지는 경험에 의한 검증을 중요시하는 경험론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듀이는 행동주의 심리학과 지식에 대한 진보주의 이론을 통해 자신의 경험주의적 이론체제를 확립하였다. 그의 관점은 유기체의 진화이론, 인간의 도덕적 발전가능성에 대한 신념, 그리고 이상적 사회환경에 대한 생각을 포함하고 있다.

 

구래의 자연법은 구래의 신앙체제 및 관습을 의미하는데, 유럽의 교황과 귀족의 권력을 유지하고, 군주의 절대론 등을 지탱하는 법의 기준으로 활용되어 왔다.

프래그머티즘은 억압과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자유와 진보를 가져온 운동으로 미국의 대법관 올리버 웬들 홈스는 프래그머티즘법학을 창시하고 유지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프래그머티즘 법학은 실용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데 이때 실용주의는 현실주의와 구분된다.

실용주의는 관념이나 사상을 현실과의 행위와 파악해서 판단하는 입장으로 예컨데 신이라는 관념도 믿음으로써 현실속에서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관념의 의미인 것으로 보는데, 유용한 관념이라면 그것은 진리라는 관점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유용한 관점은 바로바로 수용할 수 있는 개방적 태도가 전제되어 있는데

웬들 홈스는 이런 자유주의적 개방성을 오경웅과 나눴을 것이며, 동양에 대한 철학 또한 현실속에서 유용하다면 받아들이는 개방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를 토대로 나온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정의의 원천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연법을 내세우고 있으며,

동서의 피안이라는 책을 통해 동서양의 통합적 가치를 모색해 보기도 하였다.

그는 동양에서 태어나 서양의 카톨릭적 삶을 살아가고 있으나, 이 자연법이란 테두리에서 그를 느껴보면, 그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겐 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 최초의 그 마음을 인식하고, 글이나 관념을 늘 벗어나 최초의 마음을 깨닫고 경험을 토대로 행하는 삶등은 오경웅의 자연법이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적합하였을 것이다. 그가 선에서 매력을 느꼈다는 것은 선 그 자체가 내면을 찾아가는 정신적 태도였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그가 동서양을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 같다.

 

자연법의 창시자가 하느님이시다. 이는 카톨릭 정통 교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오경웅

 

내가 저자라면

 

선의 황금시대는 정의의 원천동서의 피안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닌 어떻게이다.

 

이 책은 오경웅의 자연법적 삶의 태도로 봤을 때 동서양의 공통주제인 내면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걸 깨닫고 그리 행할 수 있을 때 좋은 사회가 될 수 있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동서양을 소통시킬 수 있는 현 시대의 자연법이라는 가치를 살피고, 이에 대한 하나의 방안으로 선을 끄집어 낸다.

왜냐하면 선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존재했었고, 그 것엔 동서양이 따로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히 다른 문화배경을 가진 양쪽 학생들의 반응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통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점은 크게 자연법의 가치인 인간 그 자체의 본성을 따르다!라는 기준을 가지고, 선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단초가 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과정으로 책을 접하면 좋을 것 같다.

자연법과 선의 공통분모는 바로 자기자신 즉 타고난 내면 그것을 다스리는 영혼이다.

오경웅은 이 타고난 영혼을 정확히 보고,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으로서 책을 제시한다.

그것이 선이 인류에게 어떻게 기여할 수 있으며, 동서구분이 필요치 않으며, 그에 따른 삶을 살아왔던 오경웅 자신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오경웅은 그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토머스 머틴과의 관점을 공유한다.

토마스 머틴은 장자의 도라는 저서에서 장자의 사상과 정신을 진정으로 계승한 사람은 당나라의 선사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선의 황금시대에서 장자가 가르치는 내용으로서의 도와 선이 같은 뜻을 담고 있다. 그 뜻은 만물에는 어떤 본성이 내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같음을 의미한다.

달마가 중국에 불교를 전래한 것은 6세기라고 하나 불교가 중국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된 것은 혜능이라는 걸출한 선승을 통해서다. “선의 황금시대는 육조 혜능 이후 마조, 석두, 남전, 백장, 황벽, 조주 등으로 이어지는 선의 흐름을 그야말로 그들의 내면으로부터 이끌어낸 얘기들로 해설하고 있다.


일자무식의 혜능이 자신이 살던 마을의 한 시장에서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 홀연히 깨치는 장면을 묘사한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혜능은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달마의 적통을 이어받는 육조가 된다.

그리고 그가 남쪽으로 급히 피신을 하던 그 순간 불교는 중국의 정신을 휘어잡을 긴 여행을 시작한다. 혜능으로부터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그 긴 정신의 궤적을 그려나가다 보면, 그 깨달음에 대한 이치가 깨달았다 하며 멈춰서는 안되는 것이고, 말이 아니라 의미에서 깨달음의 단서를 찾아내는 선인들의 선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경험해 보게 된다.

 

이 책의 후렴부에 토마스 머틴과 스즈키 다이에츠의 글을 소개하는데 기독교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 사이에서의 소통을 이뤄낼 수 있는 인물로 오경웅을 추천하고 있다.

 

이 책은 오경웅이라는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눈을 통해 동양의 선을 바로 볼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따라서 서양인의 편협과 표면에 머물러 있는 관념을 오경웅이라는 동서양의 경험적 눈을 통해 쉽게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서양의 실증주의적 가치관에서 선이라는 것이 아리송한 헛짓거리로 들려질지 모르나, 선은 그 자체가 모호함을 갖고 있고, 언어나 문자로 해석되기 어려운 것으로 서양인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서양인의 사고와 동양의 선 중간에서 해설을 하고 있는 오경웅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의 표지는 서양인의 눈에 맞춰져 있다.

서양의 원서에선 선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관점에서 달마도사의 신비로움을 담아내려 하였을 것이고, 그 점이 통하기도 할 것이다. 경서원의 사장님 말씀을 들어보면 오경웅의 딸이 원서의 달마그림을 그대로 사용하여 매우 만족스럽고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라 했는데

한국사회에선 라는 것이나, 달마도사의 그림이 사이비 또는 미신 또는 복제품등에 너무 많이 잘 못 사용 되어져 있어 문제시 될 수 있다.

 

물론 책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가치 있음은 분명 확인되었으나, 선의 텍스트로서 경서원의 선의 황금시대는 저자의 노력만큼 한국에 맞는 표지와 종이질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한문화에서 출판한 선의 황금시대는 이 부분에서 경서원의 번역본보다 친근하다.

그러나 한문화의 출판본은 이미지는 친근하고 좋으나, 옮긴이가 류시화씨보다 동양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이를 옮기는 데 있어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저자에게 약간 아쉬웠던 부분은 105p에서의 해설부분이다. 그 내용을 적어보면,

한번은 스승과 제자가 함께 산보를 하는데 마침 들오리 한떼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마조가 저게 무어냐?”라고 묻자 백장은 들오리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디로들 갔지?”

이미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조는 당장에 제자의 코를 잡고 힘껏 비틀었다.

백장은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마조는 여전히 코를 비틀면서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이래도 날아가 버렸다고 하겠나?”

이 말에 백장은 문득 깨친 바가 있었다. 절로 돌아오자 백장은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집생각이 나서 우는 거냐, 아니면 누구한테 야단이라도 맞은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저 아니라고만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우는 거냐고 따져 묻자 이렇게 말했다.

스승께서 내 코를 어찌나 심하게 비틀었는지 아직도 아파 죽겠다.”

어쩌다가 그랬나?”

스승께 직접 물어봐!”

백장의 말에 그들은 마조에게 가서 물었더니 마조는 되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잘 알 터이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 봐!”

그래서 그들은 백장에게 되돌아와 말했다.

스승께서 되레 자네가 잘 안다면서 자네에게 물어보라고 하시는데?”

이 말을 듣자 백장은 한바탕 웃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한편으로는 우습고 한편으로는 기가 차서 물었다.

아까는 울더니 지금은 또 왜 웃나?”

그때는 울었고 지금은 웃는다.”

백장의 친구들은 얼떨떨해 졌다.

 

이 부분에 대한 오경웅의 해석은 이렇다.

도무지 횡설수설이지 질문에 대한 지각 있는 답변으론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스승이 그 말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점이다.

미치광이라야 미치광이의 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상 그들 중 누구도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대화 속엔 분명 논리적 추리로써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닌, 직관에 의해서만 간파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해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데~ 마조의 의도는 제자 스스로참나를 발견하게끔 하는 데 있었다.라고 해석하였는데,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에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라고 보았었다. 그 해석이 뚜렷함이 없이 모호하게 참나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다시 해석되어지길 바란다.

 

나는 이 부분을 이렇게 생각한다.

저게 무어냐?” 묻자 들오리입니다라고 답했을 때 스승은 다시 물어보았다.

어디로들 갔지?” “이미 날아가 버렸습니다.”하자 코를 비틀어 버린 것은

들오리라는 것을 모르고 물어봤겠느냐와 이미 날아가 버렸습니다라며 현상만 얘기하는 제자에게 항상 깨어있으라!”라고 하며 본질을 보라는 의미로 코를 꼬집은 것이고, 그 제자가 잘 모르고 스승에게 물어보라 하여 스승의 탓으로 돌릴 때 얻은 답변이 다시 그 제자가 스스로 알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듣고 제자가 웃으며 이젠 아프지 않다고 한 것은 스승이 그냥 장난으로 물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화두를 던진 것이구나! 즉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신 거구나! 항상 주변에서 선을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알았기에 기뻤고 그래서 그 때는 울었고, 지금은 웃는다라고 답하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서양인의 눈에 맞춰진 책이지만, 이 시대를 사는 동양인에게 더욱 중요한 책일 것이다. 한국에 살지만 합리적인 서양적 사고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이 책은 선에 대한 쉬운 입문서로서 서양인의 눈높이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가 책을 출간한 목적이 단순한 선의 소개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속에서 깨달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저자는 간절히 원하고 있다.

선은 바로 우리 몸 속 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을 깨닫기에 좋은 방법이 선이고

그 선을 깨달으려 하는 행위가 이 시대를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고 자연법이 인류가 인간답게 사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저자의 의도와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선각자들은 얼른 무지에서 깨어나 스스로 속안의 참본성을 보라고 다그친다. 거죽의 욕심과 두려움 때문에 억겁의 세월 동안 본래 얼굴을 가리고 살아온 우리에게 어서 가면을 벗고 진짜 삶을 살라고 소리친다.[8]

 

그라하여 그 불씨가 우리 속안에서 인생의 알짜배기 체험들을 통해 점점 뜨겁게 타오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운문 선사가 말한대로 하루하루가 최고의 날을 살 수 있을 것이다.[10]

 

결국 본 바탕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이며, 시성을 나누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12]

중국의 선은 인도의 요가나 디야나에서 나온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에 대한 반동으로 생겼다.[20]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 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 조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心齎]’이나 ‘마음을 잊음[坐忘]’또는 ‘아침처럼 맑음[朝澈]’에 해당된다.[22]

 

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립에서 생긴다네. 그리고 지능이야말로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경쟁의 무기이지. 따라서 들 다 사악한 흉기일 뿐이며,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못 되지.[23]

 

마음을 맑게 함[心齎]

“그러면 마음을 말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했다.

“자네의 기()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26]

 

우선 자네의 노래를 들어 줄 귀가 있을 때에만 노래를 부르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입을 다물게.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주위 상황이 자네에게 말하게끔 만들 때에만 말을 하게. 그렇게 하면 목표에 어긋나지 않을 것일세.[27]

 

자네가 진정코 귀와 눈을 마음 속으로 돌리고 나아가 마음 속에 꽉 들어찬 편겨과 선입견을 죄다 쓸어낸다면 그때는 귀신조차도 감동되어 자네의 마음에 기댈 걸세.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나. 세상 만물이 자네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탈바꿈 할걸세.[27]

 

마음을 잊음[坐忘]

“저는 좌망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놀라 그게 어떤 경지냐고 물었다.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감에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무한과 하나가 되었다니 더 이상 어떤 편견도 없어졌겠군. 그토록 철저히 탈바꿈하였다니 더 이상 어디에 집착하지도 않겠군. 이렇게 해서 자네는 나를 앞질렀군. 내 이제 자네한테 배워야 하겠네.

 

아침처럼 맑음[朝澈]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야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을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 같은 경지에든 사람은 바깥의 대상이 아무리 천만 변화를 하더라도 항상 폭넓게 포용하고 반갑게 맞아들이고 또 모든 일에 차별이 없소. 이것이 바로 ‘혼란과 고통 속의 평화’라는 것이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소? 그것은 바로 완전한 평화가 되려면 혼란과 고통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30]

 

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보다 강조한 것으로, 이 역시 선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라, 그러면 알 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지만 선에선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30]

 

불안정한 마음은 인류와 더불어 늘 있어 왔다. 철학자는 절대자를 모색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인간은 불멸의 존재를 동경하고, 시간에 지배당하고 살기 때문에 영원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애써왔으며,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을 갈망해 왔다.

그러나 이 절대는 무한하기 때문에 그저 막연하고 딱이 무어라 한정지을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어떤 것일 뿐이다. 무한한 것을 어디에 한정시켜 버리면 이미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32]

 

말에는 끝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33]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람한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36]

 

선이 본격적으로 불지펴지기는 육조 혜능의 손안에서였다. 그 이후, 남악 회양, 청원 행사, 마조 도일, 석두 희천, 백장 회해, 남전 보원, 조주 종심, 약산 유엄, 그리고 황벽 희운 등의 천재들이 차례로 그 불꽃을 이어받아 더욱 활활 피워 오다가 드디어는 다섯 갈래의 불길로 갈라져 새롭고 풍성하게 타올랐다. [36]

 

위앙종은 가능한 것과 실제적인 것, 관념적인 것과 체험적인 것- 신앙의 단계와 존재의 단계-그리고 문자와 정신 간의 차별을 강조한다. 위산은 뜻을 얻었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는 점에서 장자와 일맥 상통한다[36]

 

조동종은 자기를 잊어야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36]

임제종은 차별없는 참사람이야말로 모두의 참된 자아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36]

 

운문종은 곧장 절대의 경지로 솟아 올랐다가 다시 상대성의 영역인 일상 세계로 되돌아오는 길을 보여준다. [36]

 

법안종은 장자의 이른바 천지는 나와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으며, 세상 만물은 나와 하나다라는 근본 통찰에서 출발한다. [36]

 

선의 심오한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 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38]

 

2.처음 불 밝힌 사람들

도에 들어가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43]

‘행위에 의한 입문’엔 다음 네 가지 길이 있는데 다른 모든 길이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

1.미움을 넘어서는 길

고통스런 일들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친다.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이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이 지시에 따른다. 그리하여 마음은 더 나아가 타인의 미움을 초대 한으로 이용하여 구조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게 된다.[44]

 

2.삶에 적응하는 길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 도취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음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도’의 큰 흐름과 은밀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수 없이 변하는 삶의 여러 형편과 상황들에 적응하는 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44]

 

3.집착을 버리는 길

세상 사람들은 평생동안 어리석음에 빠져 있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 여기에서

집착이 생긴다.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어려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경전에도 있듯이,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45]

 

4.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불법의 본질은 더 없이 순수한 지성이다.

순수한 지성은 모든 형상 속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말한다. 이 순수한 지성은 밝고 순결하며 물들지 않고 모든 집착을 떠나 있으며 라든가 이라든가 하는 구별이 없다.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덕-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선이 무르녹는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긴다.[47]

 

달마가 그 후대 선사들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사용한 부정적 방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데 제자 혜가 다음과 같이 물었을 경우이다.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이에 달마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 너의 마음이라는 걸 내놓아 봐라. 그러면 내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겠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혜가는 마음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 할 수 가 없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달마가 말했다.

자 이제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48]

 

승찬이 지은 신심명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신심명은 존재에 관한 포괄적인 도가 사상의 이론을 불교적으로 해석해서 고쳐 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다음 귀절들은 눈길을 끈다.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 자체에 어려울 게 없다.

좋고 나쁨을 떠나면

‘도’는 밝은 대낮처럼 뚜렷하다.

 

거죽에서 일어나는 일에 좇아가지 말고

안으로는 허무 속에 머물지 말라.

마음이 한결같이 고요하면

모든 티끌 사라져 환히 빛나리

 

마음의 평화를 찾아 애쓸수록

본래의 평화로움이 더더욱 깨치리니

이렇게 어느 한쪽에 매달려 있으면

어떻게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

 

너는 나로 인하여 존재하고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한다.

둘 다를 알고자 하는가?

원래는 깊고 깊은 한 뿌리이다.[52]

 

3. 부처의 눈

부처를 알아보려면 먼저 부처가 되야 한다.[54]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묻지 않게 하리 ? 신수 [59]

 

보리 나무 원래 없고

거울 또한 틀이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가 일까.-혜능 [60]

 

“좋은 뿌리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성은 영원한 것도 변하는 것도 아니어서 절대 끊어짐이 없다.” 혜능에 의하면 불성은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정신적 물질 등을 초월 해 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不二法問)-본질적으로 불성이 둘이 아님”의 뜻이다.[64]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이른바 계, , 혜 라고 하는 것들은 단지 참본성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 , 혜는 정신 생활의 세 단계라기 보다 참본성이라는 지혜의 샘에서 흘러 넘치는 샘물이라고 할 수 있다.[67]

 

혜능이 그를 시험했다.

“무릇 종이 되었다면 3천 가지 예의와 8만 가지 행동거지를 갖추어야 하거늘 대체 어디서 굴러왔기에 이리 오만불손한고?” 현각은 들은 척도 않고 딴전을 피웠다.

“삶과 죽음이 찰나가 없고, 만물의 변화가 화살같이 빠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삶도 죽음도 없다는 큰 도를 깨쳐 무사하고 빠른 번뇌를 끊어 버리지 아니하는고?” 현각이 대답했다.

“깨쳐 안 즉 삶과 죽음이 없고, 끊어버린 즉 만물 또한 영원과 무상이 없습니다.

현각의 이렇듯 주관과 객관, 실제와 작용을 하나로 보는 통찰력에 혜능은 “바로 이거다, 바로 이거야” 하며 무릎을 쳤다.

이에 현각은 예를 갖추어 혜능에게 절을 하고 나서 곧 떠나려 했다.

그러자 혜능이 물었다.

왜 이리 서둘러 돌아가려 하는고?” 현각이 대답했다.

본래 스스로 움직임이 없거늘 어찌 서두름이 있겠습니까?”

혜능이 다시 물었다.

움직임이 없음을 누가 아는고?”

스승께서 스스로 분별하려는 생각을 내시는 군요.”

그대는 참으로 태어남이 없음의 뜻을 꽤뚫었고다

태어남이 없음에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는 사실은 누가 분별하는고?”

분별 그 자체엔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70]

 

713년 이른 가을 육조 혜능은 자기가 다음 달엔 인간 세상을 떠나리라고 알렸다.

스승의 입에서 그 같은 슬픈 얘기가 나오자 다들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오직 신회만 동요되지도 않았고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조사가 말했다.”오직 신회만이 좋은 일 궂은 일을 떠나 버렸구나. 그만이 명예 불명예 아랑곳 않고 슬픔과 기쁨에 흔들리지 않는구나. 나마지 모두 그렇지 못하니 산속에 그토록 오래 처박혀 있으면서 대체 무슨 도를 닦았느냐! 지금 너희들이 슬피 우는 거 누구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냐?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해 걱정들 하는 거냐? 걱정들을 마라. 나는 내가 갈 곳을 알고 있다. 만약 스스로 갈 곳을 모른다면 미리 너희들에게 알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너희들이 슬퍼하는 까닭은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안다면 슬퍼할 리 없다. 본래 나고 죽음도, 오고 감도 없는 것이다.” 떠나기 전 조사가 다시 말했다.

“너희들은 잘 있거라. 내가 떠난 후 세상 인정에 따르지 마라. 슬피 울고 눈물 흘리거나 상복을 입고 남의 조문을 받거나 하면 나의 제자가 아니며, 또한 바른 법도 아니다. 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75]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1.교외별전(敎外別傳)

()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전 말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니 이를 교외별전이라 한다.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본래면목이 바로 후대의 임제선사가 말하는 ‘참사람’(眞人) 이다 ? 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외적 교리들 또한 우리들 ‘참모습’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78]

 

2.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립문자란 흔히들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음이라고 해석한다.

전체의 의미는 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참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으로, 말해야 할 때는 말로 언제고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한 순가도 참 본성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경지가 바로 견성이다.[82]

 

3.직지인심(直指人心)

선의 궁극적인 목표는 참본성을 보고 부처 되는 것에 있지만 결국 참본성을 보는 건 마음이기 때문에 우선 마음을 가리키지 않으면 안 된다. “참본성은 본래 맑으니 다만 이 마음을 써라. 곧 성불할 것이다.[82]

 

혜능이 말하는 ‘무념(無念)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 없이 쓰는걸 뜻한다.[84]

 

4.견성성불(見性成佛)

혜성에게 있어서 ‘불성’은 곧 ‘깨달음’으로 그가 말하는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를 염두에 두면 혜능이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이 부처야말로 참 부처다.”라고 한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89]

 

밞음과 어둠은 범부의 눈에는 두 개의 다른 현상으로 비치지만 지혜 있는 이는 이를 그것들이 본래 둘이 아님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이 차별성 없는 본성이 바로 참본성이다. 그것의 본질과 거죽으로 나타남은 이 같은 ‘있는 그대로”의 절대적 경지에 있으며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도’라 부른다.[90]

 

마음이 바르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면 참선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들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솔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 데 시줏돈이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92]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서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94]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회양이 대답했다.

“소달구지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하겠는가 소를 채찍질하겠는가?” 마조는 그만 말이 막혔다. 회양이 계속하여 말했다.

“앉아서 명상하면서 너는 참선을 하려는 거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 흉내를 내려는 거냐? 만일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하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를 볼 수가 없다.[99]

 

만일 도를 만든다는가 허문다는가, 모인다거나 흩어진다는 관점에서 다가가면 그 사람은 절대 도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이제 내 시를 들어보라.

마음 밭에 여러 씨앗이 있으니

비를 맞으면 모두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모습이 없나니

어찌 이룸과 부서짐이 있으랴.

이 순간 마조는 확실히 깨쳐 마음이 모든 현상계에서 초연해 질 수 있었다.[100]

 

어느 날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다.

“스승께선 왜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십니까?

“어린애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지.

제자가 계속 물었다

“울음이 그치면 그 다음엔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부처인 이 마음이 실제로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말해 주겠네.

“그런 두 가지 경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에겐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겠네.

마지막으로 제가가 물었다.

“스승님께서 뜻밖에 이미 깨달은 사람을 대하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건 아주 간단하지. 그 사람에겐 단지 큰 도를 실현하라고 가르치겠네.

이러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마조가 아주 훌륭한 가르침의 비결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때로는 부정법을 쓰는가 하면 상황이 바뀌면 다시 긍정법을 쓴다. 얼핏 보기엔 이 두 가지 방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제자의 공부와 지혜와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사용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또한 제자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 한다면 그 모순은 당장에 사라진다. 물론 이 두 방법이 이미 깨친 사람한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마조가 할 수 있는 말은 깨달은 현재 상태를 지속해 나가라는 것 뿐이다.[102]

 

마조는 제자들의 의식을 형이하학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로, 상대적인 것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형태를 갖춘 세계에서 절대 공의 세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 서로 대립적인 방법을 쓰는데 아주 능숙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경우에 따라 긍정의 길, 혹은 부정의 길을 적절히 사용하였다.[118]

 

6. 선악을 넘어서

노동에 대한 그이 주장 속겐 실로 정신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그 속엔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 깊은 뜻이 감겨 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 그는 추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이에 의하면 초월이라는 한쪽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 절대의 실체를 둘로 나누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의 실체는 형이상과 형이하를 다 포함 한다고 믿었다.[125]

 

한번은 중 하나가 백장에게 물었다.

“부처는 누구입니까?

백장이 되물었다.

“너는 누구냐?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 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게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129]

 

“만일 구도자가 이 ‘큰 마음’(心體)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이 마음을 떠나 다른 얕은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현상과 수행에만 얽매이기 수비다. 이것은 죄다 악법이지 지혜로운 도가 아니다. 아무리 천지사방 부처들에게 공양한다 해도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을 따느니만 못하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큰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스스로 그것들을 중요히 여겨선 안 된다. 그것들은 진정한 지혜의 샘물이 솟아나오는 물구멍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황벽의 일신(一心)은 곧 무심(無心)을 말한다. 우리가 ‘큰 마음’으로 돌아 갈 수 있는 것은 마조 이 무심을 통해서다.[130]

 

어떤 중이 백장에게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어냐고 묻자 백장은 당장에 대답했다.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이러한 경지를 깨쳐 알려면 여러 가지 깊이의 단계를 거쳐야 하리라. 이성이나 직관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만 가장 정확하게 과녁을 뚫는 방법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속속히 꿰뚫어보는 일이다.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 없다. 말이야 쉽지만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137

 

7. 뜰 앞의 잣나무

 

조주에게 있어서도 마조나 남전과 마찬가지로 ‘도’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편재해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이 수수깨끼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 조사께서 서쪽으로부터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조주가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니라

잔말을 빼버리면 조주가 말한 것은 가 뜰앞의 잣나무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는 만물에 골고루 편재해 있다. 그러나 우연히 잣나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조주는 그 중에서 단순한 물건을 일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중의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깨우쳐 주려고 한 말이었다.[158]

 

조주는 똑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똑 같은 대답을 한적은 매우 드물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다름 사람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소박한 성실성 때문에 질 문자의 상황에 맞도록 그때그때 다를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한 대답만이 마음에서 우러나온 대답이다. 그렇지 않고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 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힌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말라 비틀어진 무말랭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163]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용담과 스승 도오의 문답

‘아니, 언제 마음에 관한 걸 가르쳐 주셨단 말입니까?

‘네가 차를 끓여오면 마셨고, 밥을 차려 오면 먹었으며, 인사를 하면 답례로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도처에서 가르쳐 주었는데도 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용담은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했다. 이때 스승 도오가 마지막 열쇠를 내밀었다.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용담은 마음 문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는 다시 이렇게 물렀다.

‘어찌하면 이 깨달음의 경지를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까?

도오가 대답했다.

‘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정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게 없느니라.[174]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아 봤댔자 태허의 허공에다 털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 일화는 아주 극적일 뿐 아니라 깊은 암시를 준다. 자연히 노자의 ‘어두움이 가장 짙을 때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78]

 

9. 감추어진 불씨

 

어떤 중이 위산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무심(無心)이 바로 도이네.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자네가 할 일을 이해를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을 이해 하는 일이네.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바로 자네지!

위산은 이어서 아래와 같이 가르쳤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요, 자신에서부터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도 한참 빛나간 얘기다. 마치 검댕이를 작고 마음 밭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내가 그것을 도라 여기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191]

 

“돈오한 뒤에도(즉 깨달은 뒤에도) 영적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정말 깨달아서 그 근본을 얻었다면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런 경우에는 사실상 수행을 한다 안 한다는 극단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잡다한 세속적 생각이나 관념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고정이 바로 수행이다. [193]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마 이 뿌리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멀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잦출 수가 있었다.[202]

 

10. 집으로 돌아가라.

 

저는 이렇게 누,,,혀등을 가지고 있는데 어째서 반야 심경에선 없다고 하는 겁니까?

이 예기치 않는 질문에 스승은 저으기 놀랐으며, 아울러 이 소년의 사실적인 지적에 감동했다.[203]

 

어린 동산은 정신적인 이해력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했으나, 적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주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공부하던 중들 대부분이 신성한 경전엔 절대 착오가 없다고 당연히 믿었다. 하지만 어린 동산은 다름 사람이나 어떤 책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걸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204]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나를 만나리.

그게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207]

 

여기서 말한는본래의 얼굴이란 한자의 여여와 같은 말로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며 영원히있는 그대로인 것로서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영원한 도, 구약성성의 있는 그대로의 나 그리고 흰두교의 범에 해당한다. 이 시에서처럼 우리는 자주적이며 사실적이고 높은 정신을 가진 동산이 이미 새롭게 어떤 경지에 들어갔음을 보게 된다. 그는 고고하되 세속을 버리지 않았으며, ‘절대의 하나”(一者)에 도달했기 때문에 군중들 속에서도 혼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은 통찰력을 지녔고 본래 얼굴, 즉 진여(眞如)를 꿰뚫어 알았다 해서 환상과 공상 속에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 초연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 결과 현실로 되돌아와 대지에 두발을 굳건히 디딜 수 있었다.[208]

 

그러나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212]

나 때문에 법석 떨지 마라. 중들답게 침착하라. 누구건 간에 임종 때는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다.”
이처럼 죽을 때까지도 동산은 자주적이고 사실적인 정신을 끝내 잃지 않았다.

 

본체와 현상이 함께 오다- 깨달은 사람이라 해서 자신의 본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는 본체에만 매달리지 않고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황천에 달하는 무극(無極)의 무한한 경지를 열망한다.[217]

 

현상과 본체는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지상에서 낙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218]

 

돌아갈 빚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울림은 마음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니 이러한 돌아감이 바로 내면 생활의 시작이다.[221]

 

구도자는 지신에다가 ‘도’를 맞추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도’에다가 자신을 맞추는, 다시 말해 ‘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철저히 수동적인 길에 들어선 것이다.[222]

 

우리가 정말로 ‘참나’를 인식할 수 없다면 태초 이래 아무도 그 ‘참나’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참나’ 는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할 무엇이다.[225]

 

동산은 제자들을 알뜰히 보살폈던 위대한 스승이었다. 죽을때까지 그는 사심없는 스승으로 자기를 지켰다.[227]


동산은 죽을 때가 왔다고 느끼고 삭발 목욕하고 장삼을 걸친 뒤 종을 쳐서 대중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를 지켜보던 대중들은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당한 어린애처럼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산은 도로 눈을 떠서 통곡하는 중들에게 나직히 말했다.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28]

11. 차별 없는 참사랑 (임제 의현,?-866)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보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의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이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239]

 

자기가 본래 자유인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시적인 거죽의 ‘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스스로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무위지인-차별 없는 참사람’은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는 마른 똥 막대기와 같은 생태로 격하되고 만다.[240]

 

“평상심이 곧 도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근심하지 않은 사람이 진정한 귀인(貴人)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가 모두 독창적이고 그러나 억지로 있는 그대로 인 채하고 억지로 독창적 이려 한다면 진짜 독창성은 사라지고 본래면목을 잃고 만다.[246]

 

참으로 실재하는 단 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눈 앞에서 나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을까? 무차별 진리,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만일 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면 서 속된 것은 지독히 싫어한다면 그대는 절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번뇌는 바로 사념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는다면 번뇌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으리오?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도’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251]

 

소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 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251]

 

 

위대한 선사는 언제나 공안을 갖고 우리를 궁지로 마구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엄청난 고민 속에서 문득 내면의 눈(心眼)을 뜰 수 있고 그리고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리석음과 미망들이, 일단 깨닫고 나면 곧 사리질 악몽임을 알 수 있다.[254]

 

자신을 속이지 마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자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255]

 

12. 날마다 좋은 날

 “너희들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현명한 말 한 마디를 덧보탤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너희들 머리에 똥물을 끼얹는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스승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해도 결국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아마도 그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259]

 

 “사람마다 속안에 빛을 지니고 있는데 보려고 하면 그것은 금방 암흑으로 변한다.[260]

 

마조와 마찬가지로 운문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참본성인 ‘이것 하나’를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목적’일 뿐 아니라 ‘하나의 길’이다. 참본성에 이르는 길은 참본성 밖에 없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265]

 

그대들이 진실로 ‘참나’를 보았다면 불 속을 지나면서도 불에 따지 않을 것이고, 하루 종일 떠들더라도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진실로 한 톨의 쌀, 한 오라기의 실을 건드리지 않고도 매일 같은 옷 입고 밥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다.[267]

 

어젠가 그는 조산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 사람’과 제일 가까워 질 수 있을까요?

조산이 대답했다.

“비밀리에 그와 친하려 들거나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와 만나려는 생각은 버려야지.

운문이 또 물었다.

“그러고서 어떻게 그와 가까워질 수 있지요?

“그래야 진실로 그와 친하게 되지.

조산의 대답에 운문은 감탄사를 말했다.

“정말 그렇다! 정말로 그래!

 

누구나 현실에 발을 딛고 꾸준히 자기가 맡은 바 임부를 다해야 한다. 환상이나 공허한 생각들에 몰두하느니 보다는 이러한 생활이 휠씬 현명한 것이다. 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중은 중이고, 속인은 속인이다.[276]

 

그의 가장 행복한 표현 중 하나는 역시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한 말이다.[277]

 

13. 지금 여기 (법안 문익,885-958)

다른 문종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루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그들의 따르면 세상 만가지 사물이 우리에게 절대를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참사람으로 인도해 간다.[280]

 

“불법이란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야.

스승의 이 한 마디에 법안은 그 자리서 크게 깨쳤다.

뒷날 법안이 스승이 되고 난 뒤 그는 종종 대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체는 바로 그대들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것을 이름이나 모습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것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을까?

법안 자신은 박식했지만 제자들에게는 단순한 지식을 경계하게 했다. 왜냐하면 실제는 바로 우리 앞에 있어서 그것은 직관을 통해 알아지는 것이지 사변이나 추리로 다가가야 오히려 눈만 흐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284]

 

일단 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면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만물을 보지 않고 근본 진리의 눈, 즉 있는 그대로의 눈으로 세상만가지 물건을 보게 된다. 이러한 눈을 ‘법안(法眼)이라 하는데, 법안 자신은 이것을 ‘도안(道眼)이라 불렀다.[286]

 

 

에필로그

14. ()의 불꽃

조용한 옛 연못

개구리 한 마리 뛰어든다.

풍덩!

영겁의 침묵을 깨뜨리는 첫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다 아름답고 심금을 흔드는 체험이 있을까? 더구나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이다. 왜냐하면 하루하루가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사람의 하느님이다.[300]

`

‘나’라는 게 없을 때

오히려 ‘나’를 실현할 수 있다.[307]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 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311]

 

“철학자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낯익게 바라본다.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316]

 

홀로 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327]

 

예기치 못했던 자발적인 선()의 체험도 우리들을  ‘얕은 나’의 껍질에서 해방시켜 케케묵은 관념과 잼 대들을 벗어 던지고 곧바로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생각 없이 그저 속안의 참나에 서 있는 그대로 선()이 흘러나왔을 때, 그것 바로 선()이다.[339]

 

어떤 만남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오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기독교인인 오선생이 선을 다루는 강점 중의 하나도 그에겐 그러한 곁다리들은 떼어 내고 선을 이야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369]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370]

선은 진실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과 진실에 반대되는 것의 증명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진실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372]

 

선은 일종의 확실성을 목표로 한다. 자기 존재 전체로 직접 체험하는 데서 생기는 순수한 직관을 통한 확실성이다.[374]

 

기독교에선 객관적인 교리가 시대적으로나 우수성으로나 항상 앞장선다. 반면에 선에 있어서는 체험이 항상 선행한다. 이는 시대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것은 기독교가 초자연적 계시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선은 어떤 계시적 관념도 부숴버리며 성스러운 전통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관점을 갖고 있고 또한 존재의 잇는 그대로의 본질을 꿰뚫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383]

 

선에서 전달되는 것은 어떤 메시지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주의 말씀’일지라 해도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받는 사람이 아직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며, 전혀 모르고 있었던 어떤 것에 대한 ‘뉴스’도 아니다. 선이 전달하는 것은 당사자가 이미 갖고는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선은 말씀을 전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실현이며, 계시가 아니라 자각이고,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직관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나중에 볼 것이다.[385]

 

선의 진정한 목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인식, 속안의 지혜와 직관을 일깨우는 일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혜의 원천인 순수 의식은 그것이 대상화되는 순간 순수하거나 직접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따라서 선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어떤 의미에선 반언어적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히 뒤엎는 것이다.[386]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의 생각이나 사물들의 의미를 앞질러 단정짓게 만들며, 사물들을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공식에 맞추어 들게끔 만든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머릿속에 만들어 놓은 문장들의 그림자로만 생각한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재빨리 언어를 사물 자체와 바꿔 치며, 우리의 안이한 선입견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본다. 선은 이러한 편견을 몽땅 부수고 무일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환상적 모습들을 쓸어내기 위해, 그리하여 대상을 ‘직접 보게’ 하기 위해 언어를 뒤집어 사용한다.[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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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2 09:16:00 *.255.182.40
음..저하고는 또 다른 관점에서 책을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 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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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
2009.03.03 17:13:45 *.216.130.188
제 나름대로 추적해 들어가서 본 거라
제 의견일뿐입니다.

저 역시 지원자분들의 글을 보면서
제 관점을 되돌아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눈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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