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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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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3시 12분 등록

 

1. 저자를 만나다.

저자 오경웅은 1899년 중국 닝보에서 태어나 미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법철학을 공부했고, 미국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법학 등을 가르치면서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로도 근무했다. 법학자이며 외교관이자 철학교수로서 오경웅, C.H.우는 20세기에 동 서양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종교와 동서양의 철학사항을 두루 넘나들며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으며 <정의의 원천>,<동서의 피안> 등 심오한 책들을 써냈다.

 

오경웅은 관계를 중요시하고 진정한 스승과 벗을 둔 사람인 듯 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그 안에 그의 삶이 드러나는 듯 하니 이것은 그가 책을 집필하는데 있어서 글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쓰여진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쓰여진 책은 읽는 사람에게 책의 내용 뿐 아니라 글쓴이의 진정성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오경웅은 지은이의 말과 책의 특별한 구성- 덧붙임,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을 통해 <선의 황금시대>에 직접적으로 두 명의 작가를 투입시킨다. 바로 토마스 머튼 신부와 스즈끼 다이세츠 박사인데, 스즈키 박사는 선에 대한 20세기 최고의 권위자라 할만한 사람으로 1960년대 선불교를 서양에 처음 전한 사람이다. 신비주의를 강조하고 의도적으로 불교라는 말과 불교적 색채를 삭감하여 미국 대중의 구미에 맞게 선불교를 전하여 불교 확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오경웅의 마음에도 선불교를 강하게 심어주었는데. 오경웅은 스즈끼의 삶과 <선의 숨결로 살다>라는 책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고 선불교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이 연구로 이어져 <선의 황금시대>라는 책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스즈끼 박사는 이 책의 시작을 함께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해도 과장이 아닐 듯 하다.

 

토마스 머튼 신부는 19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68년 태국 방콕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칠 때까지 수사, 영성작가, 사회정의 수호자로 살았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가톨릭과 선불교, 도가와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했고, 선을 깊이 이해한 사람으로써 스즈끼 다이세츠와는 친구이자 영적동역자의 관계이기도 했다. 1948 <칠층산>을 시작으로 70여권의 책을 출간하여 20세기 가톨릭 영성작가로 자리 잡았으며 많은 이들의 영적 멘토로 남아있다.

 

2. 禪의 황금시대를 여행하다. (내가 저자라면…)

옮긴이 류시화는 처음 대하는 제품의 사용법을 알려주듯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을 당부하듯 알려주고 있다. ‘선의 숨결로 한 문장에 적어도 열흘은 명상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대선사들을 만나고 그들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질 때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고, 그들의 훌륭한 제자들처럼 홀연히 깨닫는 체험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나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쫓기듯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바빴다.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다 소화하지도 못한 체, 더구나 쉽지 않은 오묘한 이것을 다룬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조심스럽다. 조주가 말한 것처럼 안다고 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일 뿐이라는 말이 지금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지, 이 글을 내 보였을 때 스승에게 몽둥이질이나 고함을 피할 수 있을지 두려운 마음뿐이다. 다만, 아는 체 하고 꾸미려는 마음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책을 통해 내가 느끼고 배운 것을 열심으로 ‘진심을 담아 적어보려 한다.

 

깨달음의 법칙

책을 읽은 초반에 마음이 답답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이상한 말 한마디에 깊은 깨침을 얻는 제자들이 어이없어 보이면서도 나는 왜 이리 아둔하여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제발 누군가가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했다. 선사들의 말의 의미를 조금은 설명을 했다 하나 저자의 설명도 나에겐 한없이 부족했다.

책은 을 이어온 선사들의 깨달음의 순간이 들어있는 일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이름들만 바뀌었지 비슷한 내용의 중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책의 중간 즈음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 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자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 가르쳐 준 백 개의 해답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

 아마 인내하지 못하고 책을 읽던 중간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설명을 제대로 해달란 말이오!’ 라고 스승 앞에 대들었다면 나는 아마 후려침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위해 이 책은 같은 이치를 담은 말들을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렇게도 이야기하고 한 듯하다. 선의 그것은 책의 글이나 스승의 말로써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달아 아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스승의 역할은 제자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거나 단지 지팡이나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킬 뿐, 가르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갈증을 풀기 위해 남이 물을 대신 마셔줄 수 없듯이 선의 그것을 깨닫는 것 또한 스스로 체험함으로써만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끔 숱한 유망한 천재들이 채 꽃피기도 전에 벌써 시들어 버리는 걸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내 생각에 성질상 그들 스스로 체험해 얻어야 할 사실들을 스승이 지나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산은 이와 같이 물론 말로 표현해 가르친 점에서도 위대했으나, 말하지 않고 남겨두어 가르친 점에서 더욱 위대했다.

 

돌발, 비약, 괴팍 그리고 웃음

저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지도해 주십시오.”

아침은 먹었는가?”

, 스승님.”

그럼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 푸하하하하하,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이 황당하고 허무하기까지 한 대화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개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승의 이 말에 제자는 홀연히 깨쳤다.’ 바로 이어 나오는 이 문장에 나는 또 한번 박장대소 하였다가 순간 심각해졌다. 유우머로 끝나는 거라면 다시 봐도 웃긴 장면이지만, 단순 유우머로 끝나는 내용은 아니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대화 장면을 보고 정신 못 차리고 웃고 있는 사이, 조주와 제자는 청중인 나를 남겨두고 순간적으로 4차원으로 비약하여 깨달음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스승이 제자를 짓밟아 버리고, 제자가 스승의 빰을 후려치고,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거나 자리를 떠나 버리는 둥 이어지는 돌발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거기서 제자들은 깨우침을 받고 스승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뒤죽박죽 선의 세계는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빠져들게 무언가가 있었다.

선사들의 새롭고 충격적인 표현, 심지어 몽둥이질과 고함은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만들려는 스승들의 노력이었다. 어차피 깨달음이란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식이나 말로 설명 되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언어들로 그것을 설명할라치면 오해나 착각을 일으켜 도리어 깨달음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 스승들은 괴팍한 창조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기존의 틀과 방식을 과감히 깨트리며 우리에게 당혹스러움과 함께 짜릿한 재미를 주는 동시에, 그 안에 내포된 우주적인 본질로 인해 알지 못할 두근거림을 함께 주기도 한다. 

 선사들과 제자들의 에피소드가 갖는 이러한 특성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철학서적을 읽는 것인지, 추리소설책을 읽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속에 폭 빠져들게 만들었고, 선사들이 우주적 농담을 던질 때면 나는 꺄르르 웃으며 책장을 넘기곤 했다.

 

흐르는 샘물처럼

이 책의 이야기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의 역사를 인물을 중심으로 풀어냈고 그 각각의 인물이 새로운 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 세대의 제자가 다음 세대의 스승이 되어 을 이어 나가기 때문에 나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끊김없이 통일된 이야기를 완성하였다.

앞 부분에서는 의 시작과 개념을 혜능의 이야기로 채웠다. 그런 다음 혜능으로부터 시작된 의 가르침과 깨달음의 과정을 이어지는 제자들을 통해 말하고 있는데, 목차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1장부터 4장까지가 선의 시작과 혜능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고 5장부터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 (마조), 6장 선악을 넘어서(백장과 황벽), 7장 뜰 앞의 잣나무(조주), 8장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석두와 제자들) 9장 감추어진 불씨(위산) 10장 집으로 돌아가라 (동산) 11장 차별없는 참사람 (임제) 12장 날마다 좋은 날 (운문) 13장 지금 여기 (법안) 으로 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 중심으로 장들이 나뉘어져 있지만, 5장부터 13장까지의 목차 제목이 하나로 연결되어 의 깨달음을 그리고 있는 듯 하다.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로 자신을 비우고, 선악을 넘어 치우침이 없게 하여 가 뜰 앞의 잣나무에 있음을 깨닫는다. 깨달음은 얻은 사람은 다시 그 깨우침을 전해야 하는데 석두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르침의 방법을 배우고 사람들 안에 감추어진 불씨를 찾아준다. 그리고 스스로는 마음의 집으로 돌아가 내면 생활을 시작하여 차별 없는 참사람이 되면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이 되니, 지금 여기가 내가 있음이 최고의 기적임을 알게될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각각 따로 또 전체가 같이 의 깨달음을 이야기 하고 있어 책 전체가 흐르는 샘물처럼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을 잇는 다리

인간 존재는 본래 하나이며 동서양을 초월해 왔다. 동서양을 초월해 있는 곳에서만이 동서양의 활기찬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저자는 선사들의 이야기를 하는 중간 중간 의 철학과 서양의 철학 사이의 일치점이나 비슷한 점을 찾아 함께 적고 있다. 임제의 참사람과 에머슨이 말한 본래의 나의 개념이 그렇고, 백운 수단 선사가 깨달은 바 있는 엘리드 그라함의 엄숙하지 않을 필요성이 그렇다. 이 밖에도 십자가의 성요한, 토마스 머튼, 레옹 블로아 등 책 곳곳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의 철학과 통하는 서양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이 특정 종교나 문화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동서양을 초월하는 것임을 말하고 싶은 저자의 의도가 드러나는 부분인데 함께하기에 얼핏 낯설어 보이는 동양과 서양 철학의 공통점을 찾아 체크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퓨전 음식을 먹는 듯한 맛있는 재미를 준다.

진리는 동서양의 나눔이 없다. 동양과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진리가 다르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차별없는 참사람우주의 절대 그것을 말하고 있는 을 통해 동서양의 종합을 이끌어 내자는 저자의 제안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실제 이 책에서는 동양적인 철학이 거의 99%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 자체가 동서양의 종합을 위한 시도라고 보기는 어렵고 단지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작업을 위한 전단계로 동서양의 철학을 나란히 함께 이야기하는 것의 어색함을 없애는 새로운 시도 정도로 보는게 맞을 듯 하다.

 

 

보완점

책을 읽다가 이 내용은 읽었던 것 같은데..” ,“똑같은 표현이 앞에도 나왔었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몇몇 주요 문장과 장면들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티나게 중복된 내용은 스즈키 박사와의 첫 만남에 대한 부분이었다. 거의 두 쪽에 걸친 내용이 그대로 복사되어 에필로그와 덧붙임에 똑같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상투수단을 거부하는 ’의 정신을 다루는 책으로써 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같은 깨달음을 이야기 하더라도 조금씩 변형과 창조를 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 부분 아까 읽은 내용인 것 같은데…’ 하는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책 가장 뒷 편에 들어가 있는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은 책의 앞부분에 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문 지은이의 말에서 저자는 이 책을 읽기에 앞서 그 글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면서도 굳이 책의 가장 뒷 부분에 이 글을 담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 책이 특정 종교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두루 읽혀지기를 바랬다면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토마스 머튼의 글은 더더욱 책 앞부분에 놓여지는 것이 좋을 뻔 했다. <선의 황금시대>라는 다분히 불교 서적으로 느껴지는 책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을 없애는데 훌륭한 역할을 해냈을 테니까 말이다.

 

 

3. 내 마음에 들어온 글귀

 

옮긴이의 말

P7. 무릎을 베고 누우면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었듯이 누군가가 인생이라는 이 거대한 수수께끼, 삶의 진실에 얽힌 큰 숙제를 술술 풀어 줄 수는 없을까?

P8. 그 숙제는 네 자신이 직접 풀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얼른 무지에서 깨어나 스스로 속안의 참본성을 보라고 다그친다.

P8. ‘한 걸음 한 걸음 심혈을 기울여 앞으로 나아갔는데 문득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나를 탄식하게 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P9. 더 큰 즐거움은 이 책 구절구절에 넘쳐 흐르는 신비한 수수께끼, 숨막히는 전환, 경악할 돌발사, 선악을 뛰어넘는 통찰, 그리고 감히 이름 붙이건대 우주적인 농담등이다.

P9. 한 문장에 적어도 열흘은 명상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지은이의 말

P11.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던 삶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

P12. 이 세상 만 가지 사물의 본바탕으로 곧바로 내려가 결국 본바탕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이며, 신성을 나누어 갖고 있다.

 

1.      선의 심지

P20. 사실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답다고 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아름답다.

P20. 꽃 따라 미소가 피어나고, 미소 따라 꽃이 피어나는

P20.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본성 자각을 뜻한다.

P21. “이렇게 해서 현실에 바탕을 둔 중국인의 상상력은 선을 창조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다시 종교적 요구에 알맞도록 최대한 발전시켜 나갔다.”

P22.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이나 마음을 잊음또는 아침처럼 맑음에 해당된다.

P22. 장자는 순수 직관에 머물고 있는 데 반해 선을 그것을 가장 본질적인 수련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P23. 무릇 란 복잡한 것이어서는 안 되네. 복잡하면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우면 혼란이 일며, 혼란스러우면 걱정과 불안만 늘어나지. 이렇게 걱정과 불안으로 잔뜩 억눌려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도 구제하기 힘들뿐더러 남까지야 말해 무엇하겠나.

P23. 자기자신이 철저히 도를 깨치지도 못하고서 어찌 남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P24. 안으로 정직하겠다는 것은 하늘과 친구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 밖으로 겸손하게 행동하는 것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P25. 제 소신을 옛사람들의 말을 빌어 표현하겠다는 것은 옛 사람과 친구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P25. 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진실되기 어렵고, 결국 지극히 밝은 하늘의 비난을 면키 어려울 걸세.

P27. 우선 자네의 노래를 들어 줄 귀가 있을 때에만 노래를 부르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입을 다물게. 항상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있다가 주위 상황이 자네에게 말하게끔 만들 때에만 말을 하게. 그렇게 하면 목표에 어긋나지 않을 것일세.

P30.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P30.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

P31.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말했지만 선에선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P32. “우리의 심장은 숨 쉴 더 많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P32. 그러나 이 절대는 무한하기 때문에 그저 막연하고 딱이 무어라 한정지을 수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어떤 것일 뿐이다. 무한한 것을 어디에 한정시켜 버리면 이미 무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P32. 즉 정신적인 여러 측면들 중 전달 가능한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데 비해 전달 불가능한 측면은 거의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이다.

P33. 선과 도가 사람은 전달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그것을 일깨우는방법을 갖고 있다. 그 방법에 의해 마음의 지평이 열리고 숨쉴 공간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P33. 동양사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생각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이고 암시적으로 접근해 나간다는 점이다.

P33. ‘말에는 끝이 있으나 뜻에는 끝이 없다.’

P33. 동양의 정신은 단지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고, 침묵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소리를 사용하며, 형태 없는 무한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색깔을 사용한다. 즉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P33. 한시는 어떤 인상을 심어주려는 데에 목적이 있으며, 그것마저도 최종적인 표현을 쓰는게 아니라 무궁무진한 상상과 감정의 겨우 한 끄트머리만을 내보일 뿐이다.

P34. 역설적이긴 하지만 서양 과학 문명을 따라잡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동양의 지식인들보다는 서양인들한테 선이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실제로 선의 정신은 서양 사상가들의 선두 주자들에게 상당히 깊이 침투해 들어갔으며, 머지않아 거꾸로 동양에 영향을 미칠 날이 올 것이다.

P35. 인간 존재는 본래 하나이며 동서양을 초월해 왔다. 동서양을 초월해 있는 곳에서만이 동서양의 활기찬 종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P36. 아직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는 상태에 있는 사라한테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P36. 장자의 철학은 삶의 모든 면을 절대 신성과 관련지어 생각하던 사회 구조의 산물이다.

P37. 선은 심오한 도가의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피어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아버지라 한다면 도가 사살이야말로 이 비범한 아이의 어머니다.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보리달마에서 오조 홍인까지)

P40. 진정한 공덕이란 밝고 맑은 지혜를 깨쳐 아는 것인데 이러한 지혜는 본래 말로 담을 수 없고 침묵 속에 있는 것이기에 세상의 속셈으로 구하지 못한다. ? 달마

P41. ‘이란 정신을 한데 모아 바깥 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걸 뜻한다. ? 스즈끼 다이세츠

P42. 도에 들어가는 길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이다.

P43. ‘지성에 의한 길이란 세상 만 가지 사물이 모두 하나의 참된 본질, 참본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도에 들어가는 걸 말한다.

P43. ‘행위에 의한 입문의 네 가지 길

   1) 미움을 넘어서는 길

P44. 고통스런 일들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친다.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의 지시에 따른다.

P44. 타인의 미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구도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게 된다.

  2) 삶에 적응하는 길

P44.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3)      집착을 버리는 길

P45. 현명한 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리를 이해하며 지성을 갖고 세속의 길에 물들지 않는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즐기며 세속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그들은 재물의 부귀 변천에 몸을 맡기면서도 한편으론 탐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현상계의 텅 빔을 항상 의식한다.

4)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P45. 불법의 본질은 더없이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모든 형상 속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말한다.

P46.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몸가짐을 철저히 하며, 동시에 남에게 도움을 준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이치를 장엄하게 드러낸다.

 

P47. 숨막히는 전환, 눈부신 섬과, 귀를 찢는 고함, 경악할 돌발사, 신비한 수수께끼, 머리로는 이해할 길 없는 저쪽 세계로의 비약, 나아가 감질나는 유우머와 기이한 행동, 형언키 어려운 심장의 고동, 그리고 저 빼놓을 수 없는 우주적인 농담

P48. 혜가가 한사코 찾아 내어 진정시키려 한 마음은 본래의 마음이 아니라 그것의 희마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본래의 참마음은 항상 평화롭다.

P48. 본래의 참마음은 모든 생각의 주체이며 결코 생각의 대상일 수 없다.

P49. 끝으로 혜가가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말해 보일 차례였다. 그런데 혜가는 입을 열지 않고 스승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히더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야말로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

P50.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지 못한다. ? 노자 <도덕경>

P52. 너는 나로 인하여 존재하고

     나는 너로 인하여 존재한다.

     둘 다를 알고자 하는가

     원래는 깊고 깊은 한 뿌리이다.

-         승찬 <신심명>

 

3.       부처의 눈 (육조 혜능과 그의 제자들)

P53. <단경>은 책상 머리에서 짜낸 학자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감격한 나머지 폐부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온 참사람의 작품이다.

P54. 부처를 알아보려면 자기가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가 된 사람만이 자신 뿐 아니라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깃든 불성을 발견할 수 있다.

P55. 사람이야 남과 북이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 오랑캐의몸과 스님의 몸이야 다르겠지만 우리가 지닌 불성이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 혜능

P58. 모름지기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곧바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뚤어야만 한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며 항상 모든 생각을 초월하여 세상 그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그것을 스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 홍인대사

P59. 낮은 사람에게도 최상의 지혜가 있고 높은 사람에게도 얼빠진 지혜가 있는 법이오. 남을 업신여기는 것만큼 큰 죄가 없다는 걸 아시오 ? 혜능

P61.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 제 본 마음 알고 제 본 성품 보면 이것이 대장부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요, 바로 부처이니라 ? 홍인

P62. 부족할 때는 스승이 제자를 건네 주어야 하지만 깨달은 뒤엔 제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혜능

P64. 좋은 뿌리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성은 영원한 것도 변화하는 것도 아니어서 절대 끊어짐이 없다. ? 혜능

P65. 법과 수련은 육체와 정신이 하나이듯 그 바탕에선 하나다.

P66. 두 선사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신수가 점오-단계적으로 점차 깨닫는 것을 가르치는 데 반해 혜능은 돈오-단번에 깨닫는 것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P66. 신수가 말한 점오의 세단계 ? (), (), ()

             악한 짓을 하지 말며

             선한 일을 하여

             스스로 마음을 맑게 하는 것

             이것이 곧 부처의 가르침

- <법구경>

P66. 혜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참본성을 읽지 않는 일이다. 이른바 계..혜라고 하는 것들은 단지 참본성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P67.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가 있고 다함없는 지혜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

P73. 네가 앞서 말한 보는 게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양쪽의 어느 한쪽에 집착한 것이고,아프기도 하고 안 아프기도 하다는 것은 나고 죽는 현상의 문제이니 너는 참본성도 바로 보지 못하고 어찌 감히 그런 말장난을 늘어 놓느냐?

P75. 다만 스스로 본심을 알아 자기의 참본성을 보면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고, 머무름도 떠남도 없음을 알리라.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혜능의 근본 사상)

P77. 혜능의 정신과 직관은 마치 기운차게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와도 같아서 도저히 이 네 귀절로 된 원칙에만 묶어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P78. 이 사구게를 도구삼아 그의 참된 사상을 엿보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원칙이 상호 의존적이고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얼마간의 중복은 불가피하다.

1)      교외별전

P78. ‘이라든가 도 또는 진리는 오직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할 수 있을 뿐이고, 경전들은 단지 우리 자신의 통찰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P78. 경전말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으니 이를 일컬어 교회별전이라 한다.

P79. 정신의 지혜는 우리의 온 존재, 즉 마음과 머리, 육체와 정신이 한 덩어리가 되어 경험되고 터득되어야 한다.

P80. 그는 절대 학자나 박식한 해설가의 태도로 경전에 접근하지 않는다. 말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적 핵심을 꿰뚫는 각자의 자세로 다가간다.

P80. 학문에 있어서 만일 그 근본을 안다면 모든 경전은 다만 속 진리에 대한 갖가지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 송나라 유학자 육상산

2)      불립문자

P81. 불립문자 언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음’, 경전 속의 말에 집착해서도 안되며 또한 남이 우리의 말에 의지하여 깨닫기를 기대해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P81. 만가지 법이 다 사람 마음속에 있다. ? 혜능

P82. 참본성을 본 사람은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그때그때 잘 꿰뚫어 본다. 왜냐하면 그는 둘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그 어느 쪽에도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으로, 말해야 할 때는 말로 언제고 질문에 대답한다. 그는 한 순간도 참본성을 잃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자기 할 일을 한다.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 경지가 바로 견성이다.

3)      직지인심

P83. 참본성은 마음의 본바탕 내지는 속 알맹이요, 마음은 참본성의 작용이다.

P84. 마음은 끝없이 흘러 어느 한 곳에 고여있지 않아야 한다는 통찰이 바로 혜능 철학의 열쇠다.

P84. 참마음은 생각하는것이지 생각되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객관적으로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리면 그 순간 이미 본질을 잃고 만다.

P84. 혜능이 말하는 무념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P85.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말과 문자에만 집착하는 마음은 세상 만 가지 일을 순식간에 수갑과 밧줄로 둔갑시킨다.

P86. 생각하지 않으면서 생각 못함이 없다. ? 혜능

P86. 인생의 최대 비극은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먹는 일이다.

P87. 높은 덕은 스스로 덕답지 않기 때문에 덕이 되는 것이요.

     낮은 덕은 스스로 덕다우려 하기 때문에 덕이 아니다.

     - 노자의 잠언

4)      견성성불

P88. 우리의 본성은 바로 부처요. 이 본성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

P88. 만물은 다 우리 안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의 눈길을 안으로 돌려 자신이 참본성을 성실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만큼 큰 즐거움도 없다. ? 맹자

P89. 혜능은 깨달음과 올바름, 그리고 깨끗함에 귀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P89. 참본성은 절대적이어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으며 일체 언어의 속성을 초월한다.

P89. 절대란 그 앞에서 모든 언어가 잔뜩 주늑이 드는 초월의 세계다.

P91. 혜능의 철학은 초월을 강조한 점에서는 노자, 장자와 비슷하고 인간을 중시한 점에서는 공자, 맹자와 비슷하다. 혜능은 모든 경전이 인간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참본성의 지혜 위에 쓰여졌다고 강조한다.

P92.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선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P92.      마음이 바르다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면 참선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속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데 시줏돈도 필요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든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         혜능 <단경>

P94.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P95. 밝음이 사라지면 어둠이 오니 어둠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밝음은 어둠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P95. 혜능은 이원론을 교묘히 이용하여 수직적인 것을 드러내 보였으며 인간 정신을 절대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리는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었다.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마조 도일)

P98. 마조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그가 큰 법그릇임을 간파했다

P99. 달구지가 움직이지 않으면 달구지를 채찍질 하겠는가 소를 채찍질 하겠는가?

P99. “도는 형체와 색깔을 초월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본단 말입니까?”

     네가 갖고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무상삼매에 드는 일이다.”

P100.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

P100. 현상이 모두 텅 비어있으니 삶은 곧 삶이 아니다. 이 뜻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 속 성스러운 태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해 갈 것이니 이 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P101. 평상심이 곧 도다 ? 마조의 수제자, 남전 보원

P101.    내 일상생활엔 특별한 것 따로 없고

             내 스스로 차별없이 즐긴다.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으며

             너무 법석 떨 것도 치워 버릴 것도 없다.

             내 영광의 상징이라고는

             티끌 하나 없는 산들과 언덕이 있을 뿐.

             내 마음 공부는

             물 긷고 땔나무 줍는 일이로다.

        -마조의 제자, 방온 거사의 시

P101. 마조의 위대성은 그가 가르친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놀라운 기술과 번뜩이는 기지에 있다.

P102. 그는 때로는 부정법을 쓰는가 하면 상황이 바뀌는 다시 긍정법을 쓴다. 얼핏 보기엔 이 두가지 방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제자의 공부와 지혜의 정도에 따라 알맞게 사용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또한 제자로 하여금 현재의 상태를 뛰어넘을 수 잇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그 모순은 당장에 사라진다.

P103. 마음이 바로 부처다 ? 마조

P104. 대매는 자신의 독자적인 정신을 드러내 보였고 이것이 스승을 기쁘게 했던 것이다.

P104. 마조는 무려 130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했으며 그들 모두가 제각기 독특한 자기 경지를 열었다 한다. 한 스승 밑에서 나왔다 해서 천편일률적인 아니고 제각기 다른 스타일과 깊이를 지녔던 것이다.

P104. 경전의 강의는 지장에게 맞고, 선을 논함은 회해로 돌아갈 것이요, 오직 보원만이 홀로 만물에 초연해 있구나

P108.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있는가?

P109. 자네는 아직 쓸데없는 것들에 집착해 마음이 바쁘군

P109. 달마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P110. 마조가 나를 짓밝은 후 나는 지금까지 줄곧 웃고 있다.

P111. 먹고 마시는 것은 당신이 응당 받아야 할 상이지만, 먹고 마시는 걸 절제하면 당신은 복을 쌓게 됩니다.

P114. 지장이 두통을 핑계로 대답을 회피한 것은 만일 두통이 없었다면 조리있게 대답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회해의 사양은 매우 솔직하고 정직했다. 그에 의하면 이 문제가 모든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 그 무엇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대답으로도 불가능하다. 노자의 말마따나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는 이미 도가 아니다.”

P115. 한 제자를 깨닫게 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힘을 모았는지 알아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P117. 누구라도 머무름 없이 항상 여행만 할 수 없고, 또 여행하지 않고 항상 머물기만 할 수도 없다. 그대는 응당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해서 이르는 곳마다 나룻배나 뗏목이 되어 사람들을 건네 주어야 한다. 영원이 이곳에 머무를 순 없다.

P118.    만물에는 앞서갈 때와 따라갈 때가 있고

             천천히 숨쉴 때와 급히 숨쉴 때가 있으며

             무성할 때와 시들 때가 있고

             일어날 때와 누울 때가 있다.

P119. 사람이 참본성을 보고나면 장수하든 단명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P119. 상자(일찍 죽은 대표적 인물)처럼 오래 산 사람도 없고, 팽조(오랜 산 대표적 인물)처럼 일찍 죽은 사람도 없다 ? 장자

P120.     권하거니 그대여 고향엘랑 가지 마소

             고향에선 누구도 성자일 수 없으니

             개울가에 살던 그 할머니

             아직도 내 옛 이름만 부르네!

 

6. 선악을 넘어서 (백장과 황벽)

P121. 중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 바른 도로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

죽이지 말 것 / 도둑질 하지 말 것 / 음란한 깃 하지 말 것 / 헛된 말을 하지 말 것 / 술 마시지 말 것

P122. 계를 받은 승려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청규

1)      높고 넓은 침상에 앉거나 눕지 말 것

2)      머리나 옷에 장식품을 달지 말고 몸에 향수를 바르지 말 것

3)      광대처럼 노래하고 춤추지 말 것이며, 가서 구경도 하지 말 것

4)      금은 따위의 보물을 모으지 말 것

5)      때 아닌 때에 먹지 말 것

P122. 백장이 활립한 사원 제도의 가장 독특한 점 ? ‘경작의 의무

P123.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 백장

P125.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

P127.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

P127. 성인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없이 문제의 양쪽면을 다 고려하고서 <>에 비추어 양자를 본다. 이것을 양행, 즉 두 길을 한꺼번에 따름이라 한다.

P128. 네가 바로 제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서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P130. 황벽은 궁극의 실체를 마음 즉 일심으로 보았다. 이 마음이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창조하며 진정한 지혜의 원천이다. 이러한 살아있는 지혜의 샘을 속안에 지니고 있으나 우리의 마음이 바깥 대상에만 눈을 돌리고 우리의 정신이 이리저리 나누고 판단내리기에 바쁘다보니 결국 얕은 나라는 분별의식의 그물에 걸려 스스로 정신과 의식을 묶어 버린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속안의 지혜의 샘은 마셔보지도 못하고 메말라 버린다.

P130.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큰 마음을 얻으려면 우선 스스로 그것들을 중요히 여겨선 안 된다. 그것들은 진정한 지혜의 샘물이 솟아나오는 물구멍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벽의 일심은 곧 무심을 말한다. 우리가 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무심을 통해서다.

P131. 사실상 참마음이란 바로 우리 속안에 있는 본래의 불성이다. 무엇보다도 꼭 필요한 일은 이 사실을 바로 아는 일이다

P131. 일심은 모든 상대관념을 넘어서 있어서 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오로지 직관-깨달음에 의해서만 알아진다.

P131. 스승의 언어와 행동은 때가 무르익었을 때 그대의 직관-깨달음을 일깨우기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P131. 말을 떠나 침묵으로 오가는 이해, 이것이 이른바 이심전심이다.

P132. 그는 참본성이 본래 가득 차 있어 부족함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P133. 유교는 고정된 외적 규범들로 그들을 묶어 놓고 구속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요구에 부딪쳤을 때 자유롭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다.

P135. 만일 자네가 이런 글을 통해 불교의 이치를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아주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네. 종이와 먹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려고 덤비면 우리 선종의 정신을 망쳐놓고 말 뿐이야.

P136. 그대는 자나깨나 끊임없이 이 ()’라는 말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P136. 날이 가고 달이 거듭한 어느날 홀연히 온 마음이 한덩어리가 되면 갑자기 마음의 꽃이 활짝 피어나고 부처와 조사들의 처음으로 깨친 바를 비로소 뼈속 깊이 이해할 것이다. 이 깨달음은 더없이 단단하여 그대는 세상 그 어떤 노승들의 입에 발린 말에도 속지 않을 것이며 활짝 열린 그대의 입에서 위대한 진리가 저절로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P136. 마음과 정신을 여기에 집중한 사람에겐 불가능이 없다.

P137. 참된 삶을 누리는 사람한테는 가장 평범한 일이 기적 중의 기적으로 다가온다.

P137. “세상에서 가장 기적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내가 여기 대웅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지.”

P137. 먼저 철저히 죽지 않으면 철저히 살 수도 없다.

P138. 욕심의 샘이 깊으면 천상의 샘이 말라간다.

P138.    모르면 바로 취급을 당하고

             좀 알련 그 지식이 나를 번뇌케 합니다.

             좋은 일을 안 하면 남을 해치고

             좋은 일을 하면 내 자신이 해를 입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일에 소홀해지고

             의무를 다하자니 기진맥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P140. 자신이 판 함정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스승은 오히려 그 문제들은 옆으로 제쳐 놓고, 제자가 스스로 높은 경지에 올라가 그 함정을 굽어볼 수 있도록 곧바로 를 가리켜 보인다. 스스로 높이 올라가 이 함정을 굽어보면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제자의 질문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7. 뜰 앞의 잣나무 (조주 종심)

P142.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빗나간 것이다.

P142.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P144. ‘란 어디에도 없으면서 가는 곳마다 있기 때문에 조주는 와 하나가 된 후엔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가 어디에나 내재하고 있음을 생생히 표현하고자 남전은 그런 사람은 산 아래의 마을로 내려가 한 마리 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P144.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그 안에 있는 만 가지 물건과도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P146. 깨달음이란 결국 바른 말을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울러 바른 말이라고 해서 반드시 말일 필요는 없다. 침묵이나 이 경우처럼 열쇠를 건네주는 행동일 수 도 있다.

P147. 스승의 행동은 마음의 소리에 대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대 선사들이 수많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148. 선이란 일상 의식과 관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P148. 진정한 구도자는 먼저 모든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려야 한다. 그런 무자비한 행위를 통해서만 자유와 초연의 길을 걸을 수 있다.

P149. 참사람은 스스로가 자신의 거주자

P151. “일급 방문객이 오면 앉은 채 영접하고, 보통 사람이 오면 일어나 맞이하며, 더욱 하찮은 손님이 오면 문앞까지 나가 맞아들이는 것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그는 사회적 신분에 따른 예절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능력 여하에 따른 영접의 여러 방법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P153. ‘고담한천이란 다름아닌 를 의미한다. 그리고 물맛이 쓰다는 것은 도를 닦으려면 일체의 세상사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엄격한 자기 수련과 자기부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른다. 철저히 죽어야 철저히 산다.

P153. 제자를 진정한 에게로 인도하는 것은 모든 선사들의 한결 같은 목표이다.

P155. 그의 세계관에서 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P156.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지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P159. 나는 다만 그대들이 이 를 마음 속 깊이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만을 알기 원한다.

P160.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 노자 <도덕경>

P160. 조주는 제자들이 명확한 상투적인 공식 속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일부러 미끄러운 길로 그들을 데려간다.

P161. 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개인적인 것이라 해도 결국 하나로 돌아가며 그 하나와 떨어질 수 없다.

P161. 도는 사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사물을 떠나서는 도가 없다.

P161. 도는 하나와 여럿을 초월할 뿐 아니라 있음없음또는 현상본체를 초월한다.

P163. 똑 같은 질문이라고 해서 똑 같은 대답만을 되풀이한다면 생명력을 잃은 판에 박은 공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아무리 그 대답이 독창적이고 싱싱한 것이라 해도 매번 되풀이 사용하면 마치 발라 비틀어진 무우 말랭이처럼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은 흔히들 녹음기나 앵무새로 전락하고 만다.

P163.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날카로운 감각

P164. 선의 정신은 천편일률적인 상투수단을 거부한다.

P164. 그는 선의 수행은 일체가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

P164. 바른 사람이 사악한 법을 말하면 사악한 법까지도 바르게 되고, 사악한 사람이 바른 법을 말하면 바른 법까지도 사악해진다.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 (석두 밑에서 나온 대선사들)

P172. “본래 구속된 게 없는 데 뭘 더 벗어난단 말이냐?”

P173. “원래 네 것이었던 것을 너에게 다시 돌려 주는데 무슨 잘못이라도 있느냐?”

P174.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P174. “어찌하면 이 깨달음의 경지를 오래 간직할 수 있습니까?”

너의 참본성에 맡겨 자유롭게 노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

P178. 잡다한 이론을 늘어놓아 봤댔자 태허의 허공에다 털오라기 하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모든 능력을 과시해 봤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P178. 어두움이 가장 짙을 때 정신적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

P179.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으로 덕산은 몽둥이를 쓰고 임제는 고함을 이용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덕산방 임제할이라고 한다.

P179. 그대들이 바른 말을 해도 삼십 방을 때리고, 틀린 말을 해도 역시 삼십 방을 때리리라.”

P184. 이제부터 자네가 위대한 가르침을 널리 펴고자 한다면 일체의 언행을 자신의 흉금에서 흘러나오게 하여 온 누리에 고루 퍼지게하게.

P185. 나는 그에게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P185. 실제로 스승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진리다.

P185. 한 가지 교육 방법에만 집착하는 것은 초심자의 눈을 현혹케 한다.

P185. 설봉은 다른 사람의 탁월한 점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장점이 있었다.

P187. 복선의 잘못은 초월성에 치우친 데에 있고 설봉의 잘못은 내재성에 치우친 데에 있다. 그러나 노자는 밝음을 알지만 어두움을 지켜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설봉은 피안, 즉 강 건너를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차안, 강 이쪽에 충실했던 것이다. 아아, 한 스승의 그 불가사의한 노력과 고뇌여!

 

9. 감추어진 불씨 (위암종의 창시자 위산 영우)

P190. 여기서 현상계의 상대성과 본질계의 절대성이 일치한다는 위산의 견해는 바로 노자의 절대계와 상대계의 신비한 일치또는 안팎이 하나라는 사상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P193. 신령스런 불씨 즉 신비한 깨달음을 라고 한다면 우리의 참나는 본래적 존재 즉 이며, 깨달음 이후의 모든 행위와 언어는 참나의 작용 즉 이다.

P194. 들은 바를 우선 이성에 의해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합리적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섬세해지면 마음은 저절로 원숙하고 밝아져 의혹이나 미망의 상태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P194. 오묘한 가르침이 제아무리 많고 다양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어떤 것은 물리치고 어떤 것은 펴는 활용방법을 직관적으로 터득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대는 비로소 진정 슬기로운 생활인으로 옷을 입고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

P195. 작용은 본체에 응당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작용 없는 본체란 결코 없기 때문이다.

P196. 그대들 대다수가 훌륭한 그릇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상 그 그릇을 크게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 없다.

P197. 어떠한 철학이든 그 근본 이념은 비교적 간단하고 분명하나, 다만 이를 전달해 주는 말이 악마다.

P199. 내가 지금 그것을 가르쳐 주면 너는 분명히 후에 나를 욕할 것이다. 어쨌거나 무엇을 말하든 내 말은 어디까지나 내 말이지 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P200. 나는 가끔 숱한 유망한 천재들이 채 꽃피기도 전에 벌써 시들어 버리는 걸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내 생각에 성질상 그들 스스로 체험해 얻어야 할 사실들을 스승이 지나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위산은 이와 같이 물론 말로 표현해 가르친 점에서도 위대했으나, 말하지 않고 남겨두어 가르친 점에서 더욱 위대했다.

P201. 조용한 물 밑은 깊은 법이다.

P201. 그대들 각자는 내 말을 기억하려 하지 말고 내 말을 통해 스스로 자기 안을 들여다 보라.

 

10. 집으로 돌아가라 (조동종의 창시자 동산 양개)

P203. 비록 어린 동산은 정신적인 이해력에 있어서는 아직 미숙했으나, 적어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자주적인 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P204. 다른 사람이나 어떤 책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걸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

P204. 속안의 참나는 갈고 닦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P206.    신기하고 신기하다!

             물가사의한 무정물의 설법이여

             귀로 들으려 하면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눈으로 들어야 참으로 안다.

P208. 그는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P209. 뜻을 얻으면 말은 잊어 버리는 것이다.

P210. 단지 그분이 나에게 진리를 설명해 주시지 않은 게 고마울 따름이다.

P211. 그는 주로 문답을 사용하였는데 그 대화는 평범하면서도 뜻이 깊어 마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더 나는 칡뿌리 같았다.

P212. 각자가 직접 참나실체를 깨달았을 때에만 또한 그것이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P212. 위대한 스승은 절대 자기의 견해를 그대로 늘어놓는 게 아니라 문제를 가지고 제자를 자극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얻도록 이끈다. 제자 스스로 얻은 해답 하나는 스승이가르쳐 준 백 개의 해답보다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다.

P213. 동산이 설명한 오위

1.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2.       본체로 돌아감

3.       본체로부터 돌아옴

4.       본체와 현상이 함께 함

5.       최고의 조화를 이룸

P214. 누구든지 현상을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다 보면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큰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P214. 대상 속에 숨은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의 첫걸음이다.

P214. 친숙한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친숙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P215. 그대는 거짓의 세계에 환멸을 느꼈으며 동시에 거짓 세계를 꿰뚫고 진실하고 불변하는 본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단계가 바로 깨달음의 경험이다.

P215. ‘본체인은 즉 도인이라 불러도 좋다. 이 본체인은 다시 현상계로 돌아와 중생을 위해 일하고 가르칠 의무가 있다. 이렇게 본체에서 돌아온 사람은 비록 현상계에 몸담고 있지만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르다.

P216. 본체에서 돌아온 사람은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에게 간단한 공식으로 그것을 설명해 주면 상당한 오해를 낳는 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P216. [초우주의 단계] 깨달은 사람이 현상계로 돌아오면 그 전 단계 때보다 더욱 자유 자재함을 느끼며, 마침내 번뇌가 곧 열반임을 깨닫는다. 그는 이치상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현상과 본체가 하나라는 사실을 이 단계에서 직접 체험한다.

P217. [초우주에서 귀환하는 단계]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본체와 현상이 서로 녹아 들어 한 덩어리가 되는 경지에 이른다.

P218. 지상에서 낙원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곧 임을 알게 되는 경지이다.

P219. 그러나 사실 단순한 수수께끼 이상가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 모든 신비중의 신비인 것이다.

P219.    1) ? 예찬 또는 찬미

             2) ? 기꺼이 따름, 즉 순종

             3) ? 결실 또는 수확

             4) 공공 ? 풍요한 결실

             5) 공공 ? 모든 결실의 결실

P219. ? 이 단계에서 스승은 자신의 행동이나 지혜를 통해 제자들에게 사랑과 예찬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제자들도 스스로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이상에 대해 찬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20. ? 이 단계에서는 제자들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전심전력으로 참선해야 한다. 첫 단계의 열정은 이제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불로 변해야 한다.

P221. 스승이 그렇게 강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어떤 신비한 소리가 그에게 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재촉하기 때문이다.

P221. 돌아갈 집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울음은 마음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니, 이러한 돌아감이 바로 내면 생활의 시작이다.

P222. 자신이 혼자가 아니고 많은 동반자들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 많은 위안을 받는다.

P222. ? 이 단계는 첫 결실의 단계로 안정과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안정은 노력의 결과요, 즐거움은 뜻밖에 얻은 혜택이다.

P224. 자신이 하인이 되어 판단 내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남에게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P224. 공공 ? 세번째 단계에선 단독으로 결실을 이루었고, 네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삼라만상과 함께 결실을 이루었다.

P224. 완전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이상인지가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자기 도취나 독선은 그 싹이 보일 때 재빨리 뿌리 뽑아야 한다.

P228.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일 있겠느냐?

 

11. 차별없는 참사람 (임제종의 창시자 임제 의현)

P235. “사람들은 곳곳에 화장 당하고 있는데 나만 여기서 산 채로 매장 당하는 구나

세속적인 얕은 나는 죽어 땅에 묻히고, 속안의 참나만이 살아났다는 뜻이다.

P238. 날 때부터 현명하고 깨우친 이는 없다. 그 마음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부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P239.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절대의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P239. 인간이 자신을 일시적인 한 개체로만 생각하는 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노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단 속안의 참사람을 깨닫고 나면 그는 비로소 눈을 뜨고 자유 자재하게 된다.

P241. 우리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지혜를 우리는 직관이라 부르고, 모든 후천적인 행동들을 학습이라 부른다.

P242. 그들은 직관에 대해선 등을 돌린 채 무가치한 학습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즉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

P243. 임제의 몽둥이질이나 고함은 아무 쓸모도 없는 제자의 사념을 끊어 버리려는 의도였다.

P244. 스승이 어떤 한 방법을 즐겨 사용하면 제자들은 덮어놓고 이를 흉내내어 결과적으로 그것을 제도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P245. ‘이 사람은 어디에나 걸림이 없이 모든 방향으로 자유자재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서도 자유롭다. 그는 어떤 환경에도 영향받지 아니하며, 순식간에 모든 현상계를 넘나든다.

P245. 그는 어디서나 맑고 깨끗하며 그의 광명으로 우주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세상 만 가지 사물이 하나임을 본다.

P245. 우리를 본래의 자신과 갈라 놓고 있는 그 심연도 건너지 못하면서 달에는 건너가서 무엇하리오

P246. 깨달은 뒤엔 평상시의 평범한 행위가 곧 참나의 행동이다.

P246. 어떤 일이 닥쳐도 서두르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귀인이다. 특별히 애쓰지 않는 마음이 바로 평상심이다.

P247. 가장 귀중한 보물인 차별없는 참사람은 바로 그대 안에 있고, 그대 자신이 바로 그다. 그러므로 그것을 밖에서 찾으려 한다면 이미 잃고 만다.

P247. 우리의 참나는 항상 주체이지 결코 객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P249.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러한 성찰을 한 첫번째 인물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러한 통찰이 그의 진심에서 우러난 확신이냐 아니냐 하는 사실이다.

P249. 그의 가르침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었다.

P250. 진정한 구도자는 의연히 이 속세를 초탈하여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기에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P251.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P251. 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안의 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속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

P252. 실제로 그는 깨달은 선사로서 기지의 방편을 자유자재로 쓰긴 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에 끌려다지지 않았다.

P255. 구도자들이어, 자신을 속이지 말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자신의 본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12. 날마다 좋은 날 (운문종의 창시자 운문 문언)

P259.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P265. 그들에게 오직 이것 하나만이 본질적인 것이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불필요한 것이며,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대신해 줄 수 없으니 이것 하나를 발견하는데 오로지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라고 당부했다.

P267.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일이다.

P267. 운문은 그 질문을 통해 질문자의 정신 상태와 그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직관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 대답이 질문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대답이 아니더라도 질문자에 대해서만은 적어도 생동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P269. 참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아무 곳에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또한 모든 곳에 존재한다.

P270. ‘우주의 질서 안에, 우주의 한 복판에, 누구나 눈에 보이는 산 깊숙한 곳에 신비한 보물이 하나 숨겨져 있다.’ 운문은 승조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절대자가 세상 도처에 내재해 있음을 암시했다.

P272. 절대는 이 현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시대의 물결을 따르고 그 흐름과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이다.

P273. 시간의 영역에서는 발전, 탄생, 성장, 성숙, 쇠퇴 등을 논할 수 있으나 절대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질문자의 마음을 현상의 차원에서 초현상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운문의 독특한 방법이며 아울러 모든 흐름을 한 순간에 끊어버리는좋은 예이다.

P275. 하늘은 서로 다른 형태의 탁월한 정신들이 숨쉬는 거대한 공동주택

P276. 자유롭고 걸림없이 그대의 길을 가라. 특별한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올 결과를 고려하지 말고 그대에게 합당한 일을 하라. 그대의 일을 계속하면서 가라.

P276. 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중은 중이고, 속인은 속인이다.”

P276. 일단 참본성을 되찾고 나면 우리는 무지와 욕망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두려움과 장애물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되면 일을 해도 행복하고, 놀아도 행복하며, 살아도 행복,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P277.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

 

13. 지금 여기 (법안종의 창시자 법안 문익)

P280. 천지와 나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모든 만물은 나와 하나이다.

P280. 다름 종문에서는 속안의 참나를 체험함으로써 최고의 실체에 도달하는데 반해, 법안종은 우리 속안의 참사람을 소홀히 다르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무한한 지평으로 시야를 넓혀 궁극의 실체라는 같은 목표에 도달한다. 그들에 따르면 세상 만 가지 사물이 우리에게 절대를 이야기해 주며 우리를 참사람으로 인도해 간다.

P282. 관심의 초점을 속안의 참나에 두지 않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여 신비한 피안의 세계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P284. 실체는 바로 그대들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것을 이름이나 모습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것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을까

P284. 실체는 바로 우리 앞에 있어서 그것은 직관을 통해 알아지는 것이지 사변이나 추리로 다가가야 오히려 눈만 흐려진다.

P286. 궁극적인 것 앞에서는 단계라든가 경지라든가 하는 게 있을 수 없다.

P289. 온 천지가 단지 하나의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P294. 선이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수행절차와 결합하면 선은 그 당장에 독자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 있다.

P296. 자연의 조화는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자연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물창고라고들 하는 것이다.

P296. 천지보다 앞선 한 물건이 있나니, 그것은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으면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능히 만물의 주인이며, 사계절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P297. 큰 마음을 깨진 사람은 세상 어디를 가도 할 일이 없다.

 

14. 선의 불꽃 (에필로그)

P300. 영겁의 침묵을 깨뜨리는 첫 노랫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심금을 흔드는 체험이 있을까? 더구나 매일매일이 곧 창조의 새벽이다. 왜냐하면 하루하루가 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죽은 사람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사람의 하느님이다.

P304. 말을 하면 진리에 대한 모독이요, 말을 안하면 속이는 것이다. 말과 침묵을 한꺼번에 초월하는 방법이 있다.

P305.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수록

             나는 높이높이 올라가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P306.    모든 일에서 즐거움을 구하려면 아무 일에서도 즐거움을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가지려면 아무것도 자지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성취하려면 어느 것도 성취하길 바라지 말라

             모든 것을 알려거든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P307. “깨달았으나 그걸 표현할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다 비유할 수 있을까요?”

      거야 꿀먹은 벙어리와 같지

      깨닫지는 못했으면서 청산유수같이 말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 비기겠습니까?”

      거야 사람들 이름을 외는 앵무새지.”

P311.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P312. 깨달음이란 숨겨져 있던 큰 나가 드러나면서 거죽의 작은 나가 사라지는 일이다.

P314.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입니다. ? 스즈키 다이세츠

P316. 철학자는 낯익은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낯익게 바라본다. ? 윌리엄 제임스

P318. 스승이 할 수 있는 일은 를 사람들에게 떠먹여 주는 게 아니라 그들 속에 잠자고 있는 직관을 일깨우는 일 뿐이다.

P319.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밖에서만 찾고 있다.

P320. 슬픔은 단 한 가지 뿐이니 곧 낙원을 잃었다는 것이요, 단 한가지 희망과 바램이 있다면 그 낙원을 되찾는 일이다.

P320. 비극은 그 낙원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낙원을 찾으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록 낙원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P320. 그대는 그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또다시 몽땅 잃고 만다.

P321.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진주는 그것을 탐내지 않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용담 숭신

P327. 홀로 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 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런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일간의 삶에 더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P330. 우리의 전 생애는 우리의 참나를 발견해가는 한편의 로맨스다.

P331. 우리의 전 생애는 진실 아닌 것에서 떠나 진실로 가는순례이다.

P331.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 ?홈즈 대법관

P332. 바깥의 어떤 힘에 의해서도 해탈은 얻어지지 않는다.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진리는 그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P333. 나는 빈 손으로 그에게 가서 빈 손으로 돌아왔다.

P334.    물이 끝나는 곳까지 따라가

             앉아서 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보리라

P335.     천리 밖을 내다보려면

             한 층을 더 올라가라

P339.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생각 없이 그저 속안의 참나에서 있는 그대로 선이 흘러나왔을 때, 그것이 바로 선이다.

P341. 티없이 맑은 어린애와 같은 마음의 순수한 샘에서 솟아나는 도덕성과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곧 아름다움이다.

P346. 자연만이 마음 속 풍경을 어느 정도 엇비슷이 반영할 수 있다.

P347. ‘의 사람만이, 진정으로 초월해 있는 사람만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 풍경을 즐기기에는 그들의 마음이 너무나 욕심과 목적들로 가득차 있다.

P348. 선의 진정한 의미는 그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절실히 깨닫는 데 있다.

P349.     그 칠 때를 아는 것

             내 자신의 행동으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올바른 시작이다.

P350.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깨달음의 계기를 연구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할 뿐더러 대단히 매력적이다.

P350. 일체 만물이 본래 고요하고 텅 빈 것이다.

P353.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날은 날에게 그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일러 줍니다.

P353. 깨달은 사람은 자유롭다. 그는 이미 철저히 죽어 있기 때문에 그에겐 더 이상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살아있기 때문에 그에겐 그보다 더 좋은 일이란 있을 수 없다.

P354. 그에게는 어느 날이고 어느 달이고 다 주님의 날이다. 따라서 똑같이 아름다운 날들이다

 

이 책에 바쳐진 토마스 머튼의 글 ?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선

P370. 선은 인생의 체계적인 설명도, 이데올로기도, 세계관도 아니며, 계시와 구원의 신학도 아니고, 어떤 비법도, 고행과 금욕을 통한 완성의 길도 아니며, 대부분 알고 있는 것처럼 신비주의도 아니다.

P371. 선은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가능한 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체험속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이러한 모든 체계적인 논리 전개를 거부한다.

P372. 선의 목적은 체험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에 있지 않고 오로지 논리나 문자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본질을 체험하는 데에 있다.

P373. 선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이 하나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다. 아니면 그렇게 분별하고 나눠 놓은 자체가 하나의 환상임을 깨쳐 아는 일이다.

P384. 선의 가르침이나 수행 속에 담겨 있는 상당한 양의 독설과 폭력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서 기존의 설명과 안이한 해설들을 죄다 쓸어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P384. 선이 전달하는 것은 당사자가 이미 갖고는 있었으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어떤 것이다. 선은 말씀을 전도하는 설교가 아니라 실현이며, 계시가 아니라 자각이고,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아버지로부터의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세상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존재의 자리를 여실히 깨닫는 일이다.

P386.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들의 의미를 앞질러 단정짓게 만들며, 사물들을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 공식에 맞추려 들게끔 만든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머리 속에 만들어 놓은 문장들의 그림자로만 생각한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재빨리 언어를 사물 자체와 바꿔치며, 우리의 안이한 선입견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본다.

P388. 선은 가르치지 않고 가리킨다.

P391. 사고의 능력만으로는 우리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문지방들이 있다. 한 가지 절실히 요구되는 체험은 가난과 병의 체험이다.

P392.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바로 그 눈으로 하느님이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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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09:19:50 *.78.105.123
내가 저자라면~~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마음에 들어옵니다. 소제목으로 나누어 감상과 평을 써내려간 것이 참 좋습니다. 저 또한 책을 읽으며 시간에 쫓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넘어간 것이 가장 걸리는 부분입니다. 이 책이야말로 오랜 시간 되새김질하며 선의 정수를 은은하게 느꼈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언젠가 천천히 시간을 두고 다시 한 번 선사들의 유쾌하고 엉뚱한 유머를 만나고 싶네요. 그 유쾌한 웃음 속에서 물론 선의 숨결을 느껴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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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4 10:03:14 *.149.106.27
네 천천히 하나하나 곱씹으며 다시 읽으면 더 많은 걸 느끼고 배울게 될거 같아요.
꼭 다시 한번 읽어야 할 책 리스트에 담아 두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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