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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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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일 03시 44분 등록
 

선의 황금시대


오웅경 지음/ 류시화 옮김 


Ⅰ. 저자에 대하여


오경웅(John C.H.Wu, 1899~1986) 박사는 중국 출신으로 20세기에 동서양을 완전하게 이해한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는 진실한 가톨릭신자이면서 진실한 동양인으로 불렸다. 중국 미국 프랑스의 7개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한 세계적인 석학이며 중화민국 헌법 기초와 UN 헌장 구성 등에 참여했다. 그는 중국 내 천주교 신앙을 대변했고 신약성서 시편 등의 중국어 번역을 하기도 했다. 또 중화민국 주재 바티칸 교황청의 공사를 지내기도 했다.


오경웅 박사는 1899년 3월 28일 중국 절강성 영파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상하이 호강대학에 들어갔으며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과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곧 진로를 법학으로 바꾸었다. 자연의 이치를 다루는 과학에서 인간 삶의 이치를 다루는 것으로 보인 법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가 법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상하이 동오대학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법을 자연법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러한 그를 전문가들은 『젊었을 적에는 자연법의 옹호자였고 만년에는 자연법을 일체법의 기초로 보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법정신은 다음의 그의 사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만사에 스며드는 실재의 기본적 중심과 핵심이 법에도 스며드니 법도 우리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 통과할 관문의 하나에 불과하다. 또 자연과 정신의 일치는 밀접하여 무엇이든지 사물 실재의 극치에 닿으면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중심을 진동시킨다. 인간은 무상 최고치에 이르러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 거기서 우리는 음악과 법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관점이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서 법의 궁극적 근거가 일체 사물의 궁극적 근거와 동일하고 또 법의 의의가 우주 「최초 내원」과 「최종 거처」에 기인한다는데까지 이른다. …』

그의 법철학은 지성적 추구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도덕상 직무로 바뀌었다. 하지만 법에 대한 그의 탐구는 그를 신앙적이고 영성적인 인물로 안내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는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유학하는 중에 미국 대법관이면서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법사상가인 올리버 W.홈즈와 14년 동안 교류하였다. 홈즈와의 사상적 우정을 통해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사고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또 베를린에서는 슈탐러(Rudolf Stammler)의 지도를 받으며 이들 두 사람의 법사상을 종합하려 노력했다.


처음에 가졌던 개신교에서 그는 내면의 깊은 끌림을 얻지 못했다. 이후 테레사 성녀의 전기를 읽은 후 테레사 성녀의 일생이 매우 큰 자극제가 되어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에게 테레사 성녀가 삶을 통해 제시했던 신비사상과 금욕주의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소박한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항로에 필요한 것을 구하기만 하면 은총과 은사와 함께 모든 준비가 갖추어 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현대 중국이 낳은 대법철학자이다. 1949년 하와이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저술한 『동서의 피안』을 저술했다. 이 책안에는 30년 동안의 그가 쌓았던 정신적인 생활이 녹아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공자와 맹자의 유가, 노자와 장자의 도가사상, 대승과 선사상에 관한 비판,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에 관한 견해 등을 동서를 비교하여 그 차이 안에서 종합 요소를 발견하고 동서를 초월한 사상을 제시했다. 그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불후의 가치관이 있음을 설파했다. 다종교 다문화간의 대화가 강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의 이 같은 견해는 미래의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새롭게 주시되고 있다.


「선의 황금시대」는 1967년에 쓰여 졌다. 그는‘홈즈 신부’와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가 1948년부터 1951년 까지 하오이 대학에서 중국철학과 문학 초빙교수로 있을 때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를 만나며서 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tm즈키 박사에게서 단순히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대로 사는 사람이 이라는, 감동적인 인상을 받았다. 또한 그 무렵에 출간된 스즈키 박사의 「선의 숨결로 살다」을 읽고 나서 그는 혜능을 비롯해 마조, 건주, 임제, 운문 등 역대 조사들이 보여주는 빛나는 통찰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선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즈키 다이세츠 박사의 선 연구 결과를 선에 대한 통찰력으로 연구하여 재해석하였고 당대 이후의 선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스승인 스즈키 박사에게 책의 서문과  에필로그의 검토를 부탁했으며 아울러 스즈키 박사는 그의 심오한 학식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토마스 머튼 신부도 그가 단순히 학자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 인간 존재의 위대성과 신성을 꿰뚫고자 노력한‘참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중국의 휴머니즘과 기독교 영성」,「선학의 황금시대」,「법철학 및 정치 철학론」,「선의 향연」등이 있다.




Ⅱ.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1. 선의 심지


선과 도


중국에서 선의 스승들이 체험하고 가르친 ‘禪’은 존재 전체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 내지는 직관을 통한 자신의 참 본성 자각을 뜻한다.  p.20


노장의 근본정신을 선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생생하게 되살리고 꽃피운 것은 순전히 <대승불교>의 추진력이었다.  p.21



자기 존재의 속 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 조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 속안의 깨침은 장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을 맑게 함[心齎]’이나 ‘마음을 잊음[坐忘]’또는 ‘아침처럼 맑음[朝澈]’에 해당된다.  p.22

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장자의 ‘마음을 맑게 함’(심재), ‘마음을 잊음’(좌망), 그리고 ‘아침처럼 맑음’(조철)을 이해하는 게 지름길일 수도 있다.  p.22

마음을 맑게 함[心齎]


나아가 자네는 무엇 때문에 세상이 갈수록 덕을 잃고 지능만 발달하는지 알겠나? 덕이 사라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명성과 이름에만 눈이 팔려 있기 때문이고, 지능은 경쟁 때문에 발달하는 것일세. 명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립에서 생긴다네. 그리고 지능이야말로 서로 헐뜯고 모함하는 경쟁의 무기이지. 따라서 들 다 사악한 흉기일 뿐이며, 절대로 본받을 만한 게 못 되지.  p.23


문제는 자네가 아직도 자신의 얕은 마음을 길잡이로 삼으려 한다는 데 있네.  p.25



“그러면 마음을 말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네의 기(氣)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일세.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듣게나.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로 듣게나. 귀는 소리에만 매달리고 마음은 현상과 관념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니, 이에 반해 기는 텅 비어 있으면서도 일체 사물을 다 포용하지. 도(道)는 이 텅 빈 상태 속에만 깃든다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곧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일세.” p.26


마음을 잊음[坐忘]


“잊은 상태로 침잠.”


"저는 좌망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놀라 그게 어떤 경지냐고 물었다.


“몸뚱이와 사지를 떨쳐 버렸고 이성과 의식을 물리쳤습니다. 모습과 지식의 속박감에 벗어나 무한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한 좌망의 경지입니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무한과 하나가 되었다니 더 이상 어떤 편견도 없어졌겠군. 그토록 철저히 탈바꿈하였다니 더 이상 어디에 집착하지도 않겠군. 이렇게 해서 자네는 나를 앞질렀군. 내 이제 자네한테 배워야 하겠네.” p.29


아침처럼 맑음[朝澈]


가르치기 시작한 지 사흘 만에 세상을 잊었소. 계속 가르치면서 지켜보았더니 일주일 후엔 감각과 물질의 세계에서 벗어나더군요. 그러고 나서 9일을 더 가르치면서 지켜보니 생의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났소.  p.29


사람은 생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비로소 아침 공기처럼 맑아지는 것이오. 아침 공기처럼 맑아져만 절대의 모습을 볼 수가 있소. 과거와 현재라는 의식을 벗어났을 때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경지, 탄생과 죽음이 하나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오. 이 같은 경지에든 사람은 바깥의 대상이 아무리 천만 변화를 하더라도 항상 폭넓게 포용하고 반갑게 맞아들이고 또 모든 일에 차별이 없소. 이것이 바로 ‘혼란과 고통 속의 평화’라는 것이오. 혼란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소? 그것은 바로 완전한 평화가 되려면 혼란과 고통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p30


장자의 가장 심오한 통찰 중의 하나는 ‘ 참사람만이 참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를 ‘앎’보다 강조한 것으로, 이 역시 선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하라, 그러면 알 것이다. p.30


선(禪)의 현대적 가치


단지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언어를 사용하고, 침묵을 일깨우기 위해서만 소리를 사용하며, 형태없는 무한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색깔을 사용한다.  p.33


선의 심오한 통찰력에다 그것과 비슷한 불교의 통찰, 거기에 진리를 전파하려는 사도적 정열을 지닌 불교의 추진력이 가세해 생겨난, 말하자면 도가 사상이 최고로 활짝 피어 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p.38


2. 처음 불 밝힌 사람들


진정한 공덕이란 밝고 맑은 지혜를 깨쳐 아는 것인데 이러한 지혜는 본래 말로 담을 수 없고 침묵 속에 있는 것이기에 세상의 속셈으론 구하지 못한다.  p.40


'벽‘이란 정신을 한데 모아 바깥세상과의 인연을 끊는 걸 뜻한다.  p.41


우리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이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이 지시에 따른다. p.44


업보의 상호작용  p.44


일체의 고락은 외적인 인연의 산물이며, 영광되거나 욕되거나 화를 당하거나 복을 받거나 간에 모두가 전생에 행한 결과이다. p.44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이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 도취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음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마음은 ‘도’의 큰 흐름과 은밀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수 없이 변하는 삶의 여러 형편과 상황들에 적응하는 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p.44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어려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경전에도 있듯이, “온갖 고뇌는 집착에서 생기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진다. p.45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여러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p.45


불법의 본질은 더없이 순수한 지성이다. 이 순수한 지성은 모든 형상 속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말한다. 이 순수한 지성은 밝고 순결하며 물들지 않고 모든 집착을 떠나 있으며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구별이 없다.  p.45


모든 존재 자체와 생명체들의 본질이 ‘공’임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기대지 않는다.  p.46


너야말로 나의 골수를 얻었도다.  p.49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p.51


그렇다면 어째서 해탈하려 하는가?  p.51

3. 부처의 눈 / 혜능(慧能, 638-713)


부처를 알아보려면 자기가 먼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부처가 된 사람만이 자신 뿐 아니라 세상 만 가지 사물 속에 깃든 불성을 발견 할 수 있다.  p.54

참 본성을 잃고 헛되이 헤매는 한 복을 누린다 한들 어찌 삶과 죽음에서 벗어나 수 있겠습니까?  p.56


최상의 지혜를 얻으려면 직관을 갖고 곧바로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야만 한다.  p.58


마땅히 어디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써야 한다.  p.61

  

깨달은 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모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할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가 있고 다함없는 지혜의 원천을 지니게 된다.  p.67


"때묻지도 더럽혀질 수도 없는 바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애써 지켜주고 있는 것이다. p.68


4. 평범한 것과 성스러운 것 (혜능의 가르침)


진리의 깨달음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본래면목이 바로 후대의 임제선사가 말하는 ‘참사람’(眞人) 이다 ? 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외적 교리들 또한 우리들 ‘참모습’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p.78


말이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그 정신적 핵심을 꿰뚫는 각자(覺者)의 자세로 다가간다. 그리하여 그의 손 안에서 경전들은 새 생명을 얻고 영혼의 해탈이라는 궁극의 목적지로 인도하는 안내자로 탈바꿈한다. p.80


선사들이 말하는 마음을 환히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선의 언저리에도 갈 수 없다.  p.82


참본성은 마음의 본바탕 내지는 속알맹이요, 마음은 참본성의 작용이다. p.83


마음의 힘은 무한히 크다. 자아 실현에 도달하는 것, 다시 말해 ‘참 나’로 돌아가는 것도 마음의 통해서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음을 통해서다. 마음이 없다면 선도 악도 없으며, 집착도 초월도 없고, 깨달음과 어리석음도, 열반과 번뇌도 없다. 혜능은 맑음 마음, 선한 마음, 공평한 마음, 바른 마음, 지혜의 마음, 평온한 마음을 말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흐린 마음, 악한 마음 삐뚤어진 마음, 번뇌에 빠진 마음, 망령된 마음 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p.83


참마음은 ‘생각하는’것이지 ‘생각되어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주체이므로 그것이 객관적으로 하나의 대상이 되어 버리면 그 순간 이미 본질을 잃고 만다.  p.84


혜능이 말하는 ‘무념(無念)은 단순히 어떤 기존 관념이나 판단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마음을 어떤 것에도 고정시켜 놓지 않고 자유롭게, 걸림 없이 쓰는걸 뜻한다.  p.84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 말과 문자에만 집착하는 마음은 세상 만 가지 일을 순식간에 수갑과 밧줄로 둔갑시킨다.  p.85


맑고 깨끗하며 물들지 않은 마음은 “왕래가 자유롭고 조금도 걸림이나 막힘이 없다.”p.86


“그대가 이미 모든 집착에서 자유롭고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깎아지른 듯한 허공에 떨어지지 않도록, 죽음과 같은 고요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도 모름지기 학문을 닦고 견문을 더 넓혀라. 그래야 비소로 자신의 참본성을 깨닫고 모든 깨우친 사람의 도리를 터득할 수 있다. 남과의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화합하려고 노력하고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그대는 큰 지혜와 평안에 이르러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대의 참 마음을 보리라.”p.87

마음이 바르면 계율이 무슨 소용이며

행실이 바르면 참선이 무슨 필요인가.

은혜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고

믿음으로 서로들 사랑하라

겸손과 존경으로 위 아래 화목하고

참으면 나쁜 일들 조용히 사라지네.

나무 비벼 불을 얻듯 하면

진흙 솔에서 붉은 연꽃 피리라.

입에 쓰면 몸에는 좋은 약이니

거슬리는 말 충언임을 기억하라.

허물을 뉘우치면 지혜가 일고

잘못을 감추면 마음이 어질지 못하다.

나날이 한결같이 좋은 일 하면

도를 이루는 데 시줏돈이 필요 없다.

진리는 그대 마음에서 찾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밖으로만 찾아 헤매나.

그대 이 가르침 따라 닦으면

천국이 그대 앞에 펼쳐지리라.  p.92


누가 그대에게 있음의 의미를 물으면 없음의 시각에서 대답하라. 평범한 것을 물으면 성스러운 것을 말하고, 성스러운 것을 물으면 평범한 것으로 대답하라. 이렇게 두 극단이 서로 도와 중도(中道)의 의미가 밝혀지리라.  p.94


5. 물 긷고 땔 나무 줍는 일

다.


“앉아서 명상하면서 너는 참선을 하려는 거냐 아니면 앉아 있는 부처 흉내를 내려는 거냐? 만일 부처가 되려 한다면 부처란 일정한 모습에 구애되는 게 아니다. 법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니 법을 구할 때는 마땅히 어떤 특정한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무릇 앉아서 부처가 되려 하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과 같다. 앉은 형태에 집착해서는 절대로 큰 도(道)를 볼 수가 없다.” p.99


“현상(色)이 모두 텅 비어(空) 있으니 삶은 독 삶이 아니다. 이 뜻을 충분히 깨치면 일상생활에 따라 때 맞추어 옷 입고 밥 먹으며 마음 속 성스러운 태(胎)를 키우고 인연에 따라 생활 해 갈 것이니 이 밖에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p.100


오직 보원만이 홀로 만물에 초연해 있구나.  p.104


“그렇게 묻고 있는 네가 보배다. 그 보배 안에 일체가 부족함 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 네 맘껏 그 보배를 사용할 수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태여 바깥에서 찾아 헤맬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이 말을 듣고 난 대주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직관을 통해 자신의 참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p.108


 “자네는 아직 쓸데없는 것들에 집착해 마음이 바쁘군. 물러가있다가 뒷날에 오게.”p.109


모든 긍정과 부정을 초월한 그 무엇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대답으로도 불가능하다. 노자는 말마따나 “말로 표현 될 수 있는 ‘도’(道)는 이미 도가 아니다.”p.114


참된 자유와 순수성을 되찾고자 애를 썼다.  p.115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참본성을 보고 부처되게 한다.  p.115


“아니다. 누구라도 머무름 없이 항상 여행만 할 수 없고, 또 여행하지 않고 항상 머물기만 할 수가 없다. 그대는 응당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 더 이상 행할 수 없는 것을 행해서 이르는 곳마다 나룻배나 뗏목이 되어 사람들을 건네 주어야 한다.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순 없다.” p.117


노동을 통해 인류의 공동운명에 참여한다는 속 깊은 뜻이 감겨 있었던 것이다. 마조의 제자로서 그는 추월과 현실이라는 둘이 아닌 통일성을 깊이 명심하였다. 이에 의하면 초월이라는 한쪽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 절대의 실체를 둘로 나누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의 실체는 형이상과 형이하를 다 포함 한다고 믿었다. p.125


참으로 깨친 사람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현상계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초월계의 영원성을 꿰뚫어보지만 동시에 현상계의 변화도 잘 알고 있다. p127


네가 바로 네 자신일 때 너는 모순도 걸리적거림도 없이 자유자재로 우주 안팎을 넘나들 수 있다. 네가 너의 ‘참 나’를 발견하는 순간 너는 오로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 ‘얕은 나’에게 해방된다. ‘참나’는 본래가 하나이며 세상 만물을 다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자기중심적인 행복에 안달하지 않으면서도 곧바로 명상과 혼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p.129


그러한 사람은 폐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복에만 연연해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곧 행복 그 자체요 참사람임을 깨닫지 못하고 대신 바깥에 행복이 있다고 믿어 그 쪽으로만 안달하며 찾아 헤매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는 환상의 그림자만 쫓고 있는 것이다.  p.130


황벽은 궁극의 실제를 마음 즉 ‘일심’(一心)으로 보았다. 이 마음이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을 창조하며 진정한 지혜의 원천이다.  p.130



“만일 구도자가 이 ‘큰 마음’(心體)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이 마음을 떠나 다른 얕은 마음을 만들고, 자기 자신 밖에서 부처를 찾으며, 현상과 수행에만 얽매이기 수비다. 이것은 죄다 악법이지 지혜로운 도가 아니다. 아무리 천지사방 부처들에게 공양한다 해도 한 사람의 무심도인(無心道人)을 따느니만 못하다.” p.130


선한 업을 쌓건 악한 업을 쌓건 똑같이 현상에 집착한 것이다. p.131


이 불성, 이 큰 마음은 텅빈 충만이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만물에 편재해 있다. 굳이 표현한다면 영광되고 신비한 평화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깨쳐 알아 그 진면목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p.131


오직 ‘큰 마음’을 깨닫고 더 이상 취해야 할 게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바로 참 부처이다. p.132

욕심의 샘이 깊으면 천상의 샘이 말라간다.  p.138


7. 뜰 앞의 잣나무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이다.”p.141


“도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고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안다고 해야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은 단순히 혼란일 뿐이다. 만일 네가 터럭만큼의 의심도 없이 도를 깨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와 장애물에서 벗어나 일체를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p.142


 ‘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그 안에 있는 만가지 물건과도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p.144


깨닫는다는 것은 환상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걸 뜻한다.  p.144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바른 말’을 계기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p.146


선이란 일상 의식과 관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선은 의식을 초월하지만 무의식 또한 초월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p148


쓴맛 없이는 진정한 기쁨을 모른다.  p.153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라면 일상적인 행위전부가 ‘도’의 표현이다.  p.154


한번은 초심자 한 사람이 주조에게 물었다.

“저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스님께서 지도해 주십시오.”

“아침은 먹었는가?”

“예, 스승님.”

“그럼 가서 밥그릇이나 씻게!”

스승의 이 말에 제자가 홀연히 깨쳤다. 장자와 마찬가지로 조주 역시‘우주적 민주주의자’라 부를 만하다. 그의 세계관에서 ‘도’는 귀하든 천하든 어떤 것 속에나 두루 내재되기 때문에 만물은 평등하다. p.155


순수한 사람에겐 모든 것이 순수하게 생각되자만 순수하지 못한 사람에겐 가장 순수한 것까지 더럽게 생각된다.  p.156


“천만 사람이 다 부처를 찾아 헤매지만 단 한 사람도 진정한 도인이 아니다. 세계가 있기 전에 참 본성이 있었다. 세계가 없어진 뒤에도 참본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이 이 늙은 중을 만나 보았다 해서 그대들이 갑자기 다른 어떤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그대들 스스로가 바로 주인공이다. 바깥에서 다른 이를 찾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p.157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최상의 지혜요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가장 큰 병이다.  p.160


8. 영원히 병들지 않는 자(석두의 제자들)


“진정한 깨달음은 그 자리서 당장에 깨치는 것이지 머리로 따지고 되짚기 시작하면 이미 빗나간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비소로 용담은 마음 문이 열리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는 다시 이렇게 물었다. p.174


“너는 참본성이 맡겨 자유롭게 거닐고, 환경에 따르되 거기에 집착하지 말며, 항상 평상심(平常心)에 따르기만 하면 되지 그 외에 달리 ‘거룩한 경지’라는 게 없느니라.”p.174



9. 감추어진 불씨


“도가 무엇입니까?”

“무심(無心)이 바로 도이네.”

“저는 이해가 안 갑니다.”

“자네가 할 일을 이해를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을 이해 하는 일이네.”

“이해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바로 자네지!”


“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참나’를 직접 깨쳐 알았으면 좋겠다. 이해 못하는 바로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요, 자신에서부터이다. 만일 바깥으로 추구하여 지식만을 쌓으면서 이를 선이고 도라 생각한다면 정말 빗나가도 한참 빛나간 얘기다. 마치 검댕이를 작고 마음 밭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내가 그것을 도라 여기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p.191


숱한 유명한 천재들이 채 꽃피기 전에 벌써 시들어버리는걸 본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생각의 성질상 그들 스스로 체험해 얻어야 할 사실들을 스스로 지나치게 참여해 주기 때문이 아니까 싶다. p.200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그대들 마음을 모아 그대들 존재 뿌리인 근본을 얻는 일이다. 그 뿌리에 이르면 잔가지들은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능이니 능력이니 하는 잔가지들은 이마 이 뿌리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뿌리에 이르지 못하는 한 아무리 배우고 멀리를 굴려도 그런 재능과 능력을 잦출 수가 있었다. p202


10. 집으로 돌아가라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 세상 사람들이 저더러 ‘당신 스승이 진면목이 무엇이지?’하고 묻는다면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까요?” 운암은 한참 침묵하고 있다가 대답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라니, 도대체 무얼 말하는가 하고 동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운암이 당부했다.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데 있어 각별히 조심하고 신중하길 바라네.”

이렇게 작별한 뒤 남은 여행을 계속하면서도 동산은 끊임없이 스승이 말한 ‘바로 이것이라는 비밀에 찬 말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다 얼마 후 냇물을 건너다 문득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서 ‘바로 이것’의 참뜻을 철저히 깨달았다. 그는 그 감격을 다시 시로써 표현했다.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

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

어디에서나 나를 만나리.

그게 바로 나이지만

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p.207


현상계에 숨어 있는 본체- 누구든지 현상을 깊이 탐구하고 들여다보다 보면 오래지 않아 그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큰 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 속에 숨은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자아발견의 첫걸음이다. p.214


본체로 돌아감 ? 그대 거짓의 세계에 환명을 느꼈으며 동시에 거짓 세계를 꿰뚫고 진실하고 불변하는 본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단계가 바로 깨달음의 단계다. p.215


본체와 현상이 함께 오다- 깨달은 사람이라 해서 자신의 본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는 본체에만 매달리지 않고 위로는 하늘을 찌르고 아래로는 황천에 달하는 무극(無極)의 무한한 경지를 열망한다. p.217


현상과 본체는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지상에서 낙을 발견해 일상생활의 가장 평범한 일들도 모두 신성한 것임을 알게 된다. p.218


돌아갈 빚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자신들 마음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울림은 마음이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니 이러한 돌아감이 바로 내면 생활의 시작이다. p.221


우리가 정말로 ‘참나’를 인식할 수 없다면 태초 이래 아무도 그 ‘참나’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참나’ 는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할 무엇이다. p.225


“우리 가출한 사람들은 덧없는 것에 무관심해야 한다. 바로 거기에 진정한 정신적 수행이 있다. 사는 것은 일하는 것이고 죽는 것은 쉬는 것이다. 그러니 슬퍼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p.228


11. 차별 없는 참사랑


그 마음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자 염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끝없이 공보하고 철저한 수행과 숱한 체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스스로에게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도의 수행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구도자로서 진정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면 절대의 외부의 다른 것, 다른 사람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건 바른 깨달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누구이든 간에 빨리 그에게서 떠나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그가 부모이지라도 죽이고, 친척권속이라 해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최상의 자유인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때 그대는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될 것이다. p.239


그는 인간이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운 절대의 경지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삶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우상파괴는 반종교적인 행동이 아니라 친정한 종교 정신에서 우러나온 행위였다.

이때의 ‘나’는 삶의 거죽에서 일어나는 여러 우연들에 지배를 받는 일시적이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도의 물결과 하나가 되는 존재하는 영원한 ‘참나’ 인 것이다. p.239


자기가 본래 자유인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일시적인 거죽의 ‘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스스로 노예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무위지인-차별 없는 참사람’은 생명도 없고 가치도 없는 마른 똥 막대기와 같은 생태로 격하되고 만다. p.240


그들 자신은 자기들이 본래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상태로 주거 앉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부처를 몸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밖으로 밖으로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 p.242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을까? 무차별 진리,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만일 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면 서 속된 것은 지독히 싫어한다면 그대는 절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번뇌는 바로 사념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는다면 번뇌가 어찌 그대를 괴롭힐 수 있으리오? 거죽의 모습에 홀려 차별하고 집착하는 헛수고를 거두라. 그리하면 단번에 ‘도’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p.251


소안 마음의 깨달음이란 인간 존재의 속 알맹이까지 꿰뚫어보는 내적 인식을 말한다.[251]


위대한 선사는 언제나 공안을 갖고 우리를 궁지로 마구 몰아넣는 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엄청난 고민 속에서 문득 내면의 눈(心眼)을 뜰 수 있고 그리고는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어리석음과 미망들이, 일단 깨닫고 나면 곧 사리질 악몽임을 알 수 있다. p.254


자신을 속이지 마라. 나는 그대들이 경전을 능숙하게 해석한다든지, 세상의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말을 청산유수처럼 한다든지, 또는 머리가 좋고 지혜가 있다든지 하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하고 참된 눈을 갖고 지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기 바란다. p.255


12. 날마다 좋은 날


“너희들이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현명한 말 한 마디를 덧보탤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너희들 머리에 똥물을 끼얹는 것밖에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스승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해도 결국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운문은 세속적으로 아무리 가치 있는 말이라도 영원한 ‘도’의 관점에선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 아마도 그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p.259


그대들이 진실로 ‘참나’를 보았다면 불 속을 지나면서도 불에 따지 않을 것이고, 하루 종일 떠들더라도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으며. 진실로 한 톨의 쌀, 한 오라기의 실을 건드리지 않고도 매일 같은 옷 입고 밥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대들 자신이 직접 이러한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p.267


 “우주의 질서 안에, 우주의 한 복판에, 누구나 눈에 보이는 산 깊숙한 곳에 신비한 보물이 하나 숨겨져 있다. 운문은 승조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절대자가 세상도처에 내재해 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곧이어 이렇게 덧붙였다.

“그 신비한 보물을 법당 안으로 들고 들어와 이 절의 세 출입구를 등불 위에 얹어 놓는다. 자, 이 보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


아무도 대답이 없자 운문 스스로 대답했다.

“그것은 마음을 사물의 변화에 따라 움직인다.”

한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 그는 다시 말했다.

“구름이 일면 번개가 친다.” p.270


누구나 현실에 발을 딛고 꾸준히 자기가 맡은 바 임부를 다해야 한다. 환상이나 공허한 생각들에 몰두하느니 보다는 이러한 생활이 휠씬 현명한 것이다. 도를 깨친 사람에게는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중은 중이고, 속인은 속인이다.” p.276


“모든 날이 다 최고의 날”(日日是好日)이라고 한 말이다. p.277


 13. 지금 여기


“불법이란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야.”

“실체는 바로 그대들 눈앞에 있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것을 이름이나 모습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것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을까 ?” p.284


선의 정신은 결과적으로 연수가 이룩해 놓은 그런 체계화나 절충주의 와는 근본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다. 실제로 연수는 전종과 정토종(淨土宗)을 결합시키려고 심혈을 기울이기까지 했다. 즉, 어떤 현대 역사가의 말마따나 “염불, 독경 및 참회 등이 참선과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선이 이러한 종교의식이나 수행절차와 결합하면 선은 그 당장에 독자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선이 아니게 된다는 점에 있다. p.294


에필로그


14. 선(禪)의 불꽃


나를 잃음으로써 나를 되찾는 것은 모든 종교와 지혜의 공통된 메시지다. 잃어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장님이 되어라, 그러면 보게 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러면 들을 것이다. 집을 떠나라, 그러면 집에 도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죽어라, 그러면 살리라. 삶이란 ‘참나’ 와 현세를 살아가는 ‘나’와의 끊임없는 대화다.  p.311


홀로 있음이란 마치 누룩이 안든 빵처럼 단맛이 덜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에 더 없이 중요한 요소이다. p.327


참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다. 우리의 전 생애는 한 편의 로맨스다. 즉 우리의 참나를 발견해 가는 로맨스다. p.330


“마음에 안든 것을 정면으로 만나고, 삶에 있어서 낭만적이 아닌 것들과 똑바로 만나 그것들을 낭만적인 것으로 바꾸는 자세를 배우라.”p.331


 예기치 못했던 자발적인 선(善)의 체험도 우리들을  ‘얕은 나’의 껍질에서 해방시켜 케케묵은 관념과 잼 대들을 벗어 던지고 곧바로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생각 없이 그저 속안의 참나에 서 있는 그대로 선(善)이 흘러나왔을 때, 그것 바로 선(禪)이다. p.339



Ⅲ. 내가 저자라면


『선의 황금시대』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로 중국 당나라 시대에 살았던 위대한 선사들의 가르쳤던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이들의 삶은 선을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가르쳤다. 책의 전반부는 6세기경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대사의 도의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선의 불꽃을 지핀 육조 혜능으로부터 그의 제자들(회양, 마조,석두. 백장, 남전, 황벽 등)과 다섯 종파(위앙종, 조동종, 임제종, 운문종, 법안종)로 나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주로 당대 이후의 문헌들 중에서 가려 뽑아 역은 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글들은 선의 체험들과 일화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선에 관한 작은 불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비록 오래 전에 그 절정을 넘어섰으나 그 핵심 정신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저자는 선사들에 관한 일화를 들어 선속의 속 알맹이를 알알이 드러내면서 심오한 통찰을 일깨주고 있다. 선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어떤 의미에서 반언어이며, 선의 논리는 철학적인 논리를 철저히 뒤엎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언어와 논리에 습관적으로 젖어 있는 보통사람들이 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이처럼 매우 난해한 선을 초보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있다. 선사들과 제자들 사이에 오가는 모든 언어와 행위를 맥락 속에서 이해하도록 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인 류시화 선생도 앞선 역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 한 걸음 심혈을 기울여 나갔지만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깍아지른 절벽이 막아섬을 느끼고 탄식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선의 가르침을 언어의 그릇에 담기지 않은 크나큰 절대의 ‘거시기’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 깊이를 헤아리기 쉽지 않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선의 불꽃을 찬란히 이어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신비적인 용어로 합리화되고 상상되기 쉬운 선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동안이나마 선입견을 버리고 속단하지 않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책에서 페이지마다 마주하게 되는 신비한 수수께끼, 숨 막히는 전환, 경악할 돌발사, 선악을 뛰어넘는 통찰, 그리고 ‘우주적 농담’등을 통해 선에 대한 저자의 깊은 통찰을 다시 한 번 보게 된다. ‘우주적 농담’을 모르는 것은 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선에 대한 책을 읽을 때는 한 문장을 적어도 열흘은 명상하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불교나 장자 ? 노자에 대한 기초지식이 일천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불교, 노장사상, 유교 등 중국 사상의 흐름을 미리 공부해 두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을 자유롭게 오갔던 저자는 서구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 특히 기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선입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 배경을 가진 독자에게 선은 본능적으로 주의해야 할 사상이나 무시해도 될 이야기로 간주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사이비 종교’로 취급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이야기는 기독교인 나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주었다. 이는 저자가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을 실어 선사상의 치우침에 대한 우려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토마스 머튼 신부의 글이 이 책의 내용 전체를 위한 해설판임을 알려주며 먼저 읽어보기를 권유하고 있다. 토마스 머튼의 글을 통해 선입견을 내려놓고 책을 읽어나갔다. 책의 내용 중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기독교의 핵심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절대자에 대한 ‘생생한 체험’임을 일깨워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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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
2009.03.02 08:40:12 *.246.146.19
수고했소.
이제 친구는 한 경지를 넘어섰으니 새로운 날들이 열리겠네.
나도 3월에는 집안에 새로운 일들이 많고, 나 자신이 새로워져야 할 이유도 생겼네.

'제국의 미래'도 잘 삼키시게. ㅋㅋ

봄이다.
언제 한 번 만날 기회가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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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2009.03.02 16:23:30 *.124.157.251
형산!
이번주가 고비였네!!
하마트면 형산 얼굴 볼 면목 없을뻔 했네!!
살아오면서 세번째로 날샜네!!!
선의 황금시대 덕에 요즘 슈퍼맨되가네!!!!
늘 든든한 친구덕에 살맛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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